1. 수수가 붉어졌네

 

 

  모옌이 노벨문학상을 받지 않았다면『홍까오량 가족』을 사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화 ‘붉은 수수밭’의 강렬한 인상이 모옌의 원작에 빚지고 있다는 사실에 호기심을 느꼈다. ‘홍까오량’은 ‘붉은 수수’를 뜻하는데, 이 책 1,2장「붉은수수」및「고량주」부분이 영화의 근간이 되었다. 하지만 영화는 어디까지나 감독 ‘장이모우’와 배우 ‘공리’를 위한 것이었다.

 

 

  관람객 입장에서 원작가인 모옌까지 주목하기는 쉽지 않다. 원작을 떠난 영화는 그 자체로 독립된 예술이기를 원하고, 개봉 당시는 모옌이 전 지구촌 작가도 아니었다. 웬만한 이슈가 되지 않고는 영화의 원작가를 기억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모옌은 행운 작가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이란 쾌거 하나로 장이모우나 공리 못지않게 ‘붉은수수밭’ 하면 떠오르는 인물로 거듭나게 되었으니.

 

 

  연작 중편들로 이루어진『홍까오량 가족』은 항일 무장 투쟁, 애달픈 민중들의 삶, 한 가족의 애증사 등이 일렁이며 붉어가는 수수밭 사이로 교차 편집되어 있다. 읽을수록 울림이 큰 것은 우리의 일제강점기 역사 또한 그 작품 속 궤도와 맥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서걱대는 수수잎에 손가락이 베일만큼, 익어가는 고량주에 온몸이 취할 만큼 아련하고 강렬한 이야기지만 이야기를 풀어놓는 방식은 조금 아쉬웠다.

 

 

  소설가를 이야기꾼과 문장꾼으로 나뉜다면 모옌은 전자에 속했다. 할 말이 넘치다 보니 구성이 산만해져버렸다. 중복되는 에피소드와 반복되는 묘사 때문에 피로함이 몰려왔다. 생생하고 사실적인 표현도 너무 잦으면 독자는 지루해진다. 몸과 마음이 시키는 대로 자유롭게 쓰는 작가이다 보니 곁가지치기를 덜한 것 같다.

 

 

  목마르다고 끊임없이 두레박질만 할 수는 없다. 효율적인 두레박질은 목을 충분히 축일 때까지 만이다. 선명한 이야기에 분명한 호흡을 기대한 독자라면 책 두께가 조금 더 얇아도 좋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홍까오량 가족』은 이야기와 구성을 동시에 바라는 걸 버린 뒤에야 더 잘 몰입하게 되는 작품이다.

 

 

 

2. 괜한 걱정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을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 많은 시간을 걱정하는데 허비한다. 건강 문제부터 시작해 밑도 끝도 없는 온갖 걱정을 달고 산다. 하지만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건 없다. 오히려 걱정한다는 그 걱정 때문에 골치만 아플 뿐이다. 그걸 알면서도 나 역시 걱정이 많다. 가족들이 좀 더 건강하기를 바라고, 자식들 미래가 평탄하기를 원하며, 경제적으로 힘들지 않기를 욕망한다. 얼마나 현실적 이기심으로 가득한 걱정인가.

 

 

  알고 보면 모든 걱정은 괜한 짓거리이다. 그 말 속엔 미래적 함의가 숨겨져 있다. 오지도 않은 일을 가불해서 생각하는 것이니 비생산적인데다 영혼을 갉아먹는 행위이다. 과거를 말할 때 우리는 걱정이란 표현을 쓰지는 않는다. 과거는 ‘후회’는 할 수 있을지언정 ‘걱정’할 대상은 아니다. 걱정이란 오롯이 현재 이후의 다가오지 않은 시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일어나지도 않은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 지나지 않으니 얼마나 쓸모없는 짓인가.

 

 

  한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걱정을 끌어안고 산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끊임없이 되새기고, 법륜 스님의 강의를 열심히 쫓아다니고, 혜민 스님의 어록을 쉴 새 없이 밑줄 그어도 걱정에서 해방되기는 어렵다. 담백하게 자신을 버리는 게 쉽지는 않다. 어느 누군들 자유를 얻기 위해 팽팽한 삶의 밧줄을 쉽게 놓아버릴 수 있을 것인가. 갖춘 종교인의 경지를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걱정이란 일상의 부담이 많이 줄어들기를 바랄 뿐이다.

 

 

  내가 하는 걱정은 타인에겐 사소하게 보일 때가 더 많다. 제 삼자에게 설득시키지 못하는 걱정은 걱정으로서의 값어치가 없다. 걱정은 부정을 전제하는 것이지 긍정을 사는 행위는 아니다. 우리가 걱정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걱정을 이만큼 하고 있다’ 는 자기 보상 심리 때문일 것이다. 소심한 자가 쓸데없이 걱정할 때 적극적인 사람은 보란 듯이 행동한다. 걱정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날들을 꿈꾼다.

 

 

 

* 홍까오량 가족 - 번역조차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종결어미 방식에 일관성이 없다. 번역의 기본일 터인데.

                         이유없이, 설명없이 내레이터의 종결어미 방식이 왔다갔다 한다.

                         원작에서 그랬다면 할 말이 없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 ~습니다, ~지요, ~했다 >등이 적절한 설명 없이 마구 혼재되어 있다.

                         내가 보기에 존칭 종결어미 다 버리고 그냥 <~했다>로 통일하는 게 가장 깔끔한 것 같다. 원작가의 의중이 있었다면 부연 설명이 필요했던 부분이다. 구성이 산만한데 번역까지 정돈이 안 되니 독자도 갈팡질팡. 별 것 아닌데, 문학과지성사는 까다로운 독자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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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3-01-22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과 지성사, 라면 꽤 괜찮은 출판사인데요...

걱정에 대한 글에 공감해요. 저만 해도 쓸데없는 걱정을 할 때가 있어요.
"제 삼자에게 설득시키지 못하는 걱정은 걱정으로서의 값어치가 없다."
- 이 말을 제게 하고 싶어요. ㅋㅋ

다크아이즈 2013-01-24 22:12   좋아요 0 | URL
페크님, 원작이 어떤지 모르겠는데, 여하튼 부연 설명없이 종결어미를 통일하지 않은 부분은 일차적으로 번역자께서 설명 좀 해줬음 좋겠어요. 거기다 큰 의미를 두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더 큰 문제지요.

넘 쓰잘데기 없는 걱정을 달고 사는 저인지라 채찍질하고 싶었어요^^*

마녀고양이 2013-01-22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타인을 설득하지 못하는 걱정이 과연 걱정이 아닐지에 대해서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런 생각으로 인해, 나 자신을 더 괴롭히게 되는게 아닐까 생각도 들구요.
아마 타자도 동일한 고민을 가진다면, 그것이 자신의 고민이라면 고민할 거라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듭니다. 나의 타당화는 내가 해야지, 타인이 해주어야만 한다면 너무 힘들어요...

음, 제가 횡설수설하는 거 같아요.... 실은
바탕 화면이 제 컴터에서는 진한 감빛으로 나와서,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팜언니~ ^^

다크아이즈 2013-01-24 22:17   좋아요 0 | URL
달여우님 말씀 들으니 그렇네요. 열심히 그 쪽으로 연구하시다 보니 절로 깊은 생각이 따라오는 걸까요?^^*
<내가 걱정되니 걱정하는 것>이지, 남들이 <그 걱정은 걱정 아니다>라고 말한다고 그 말에 휘둘릴 필요는 없다, 그 말씀이지요? 이렇게 명쾌한 답을 얻다니? 그럼 걱정한다고 스스로 넘 쫄지 않아도 되지요? 감사합니다.홍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