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서 아직 ‘아줌마’라는 말은 긍정의 의미보다는 부정의 의미가 더 강하다. 처음부터 나쁜 의미로 쓰인 건 아닐 것이다. 아주머니에서 출발한 그 말은 친척이나 가까운 이웃의 부인네를 친숙하게 칭할 때 두루 쓰이는 말이었을 게다. 하지만 이 글을 쓰기 위해 사전을 펼치니 그리 좋은 뜻으로 쓰인 게 아닌 건 확실하다. ‘아주머니를 낮추어 이르는 말’이라고 제일 먼저 명시되어 있다. 씁쓸하게도 ‘아줌마’란 호칭은 좋은 뜻보다는 그렇지 않은 쪽으로 더 많이 쓰이는 게 현실이다.

 

 

사전적 의미의 아줌마를 오늘 목격했다. 은행잎 가로수 흩날리는 대로변에서였다. 예의 아줌마가 한 남자에게 악다구니를 퍼부으며 뺨을 사정없이 후려친다. 그것도 분에 차지 않는지 핸드백으로 남자의 가슴팍과 어깨 등을 닥치는 대로 내리치고 발길질까지 서슴지 않는다. 호기심 발동한 몇몇이 길 가다 말고 전후사정 파악하기에 바쁘다. 재혼 가정인 모양인데 딸 혼사 문제로 실랑이를 벌이는 듯했다. ‘네 딸 아닌 내 딸이니 혼수 문제에 관여하지 말라’는 취지로 ‘아줌마’는 남자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 남자로서는 혼수 문제에 끼어들다 된통 당하는 모양이었다.

 

 

아줌마의 여러 이미지 중 ‘그악스러움’이 담긴 얘기는 옛날에도 있었다. 구한말 때의 여행가 새비지 랜도어는 우리의 아줌마 관찰기를 이런 내용으로 기록했다. 꿔 간 돈을 갚지 않은 포졸이 오리발을 내민다. 채권자 남편이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자 구경만 하고 있던 아내가 빨래방망이로 포졸의 머리를 사정없이 두들긴다. 실신했던 포졸이 달아나자 아낙은 끝까지 쫓아가 포졸의 배를 걷어차고 얼음판에 쓰러뜨리고 얼굴을 물어뜯기까지 한다. 보다 못한 새비지 랜도어가 말리러 끼어든다. 결과는 빨래방망이로 무릎을 얻어맞아 달걀만한 혹이 생겼다나.

 

 

예나 지금이나 ‘아줌마’는 약간은 그악스럽고 조금은 불편한 이미지로 그려지나 보다. 하지만 양성 평등론과 여성 운동이 본격화되면서 그 말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알리게 되었다. 남성의 그악스러움과 불편부당함은 ‘아저씨’로 한정되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어머니, 엄마’가 주는 이미지만큼 성스러운 위상을 기대하는 건 아니지만 아줌마도 여성인 만큼 너무 부정적인 의미로만 국한되지 않기를 희망해본다. ‘아줌마는 나라의 기둥’이라면서 아줌마들 힘을 돋우는 여성 단체도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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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2-11-06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전적 의미는 어떠하든지
저는 아줌마의 힘이 세상을 바꾼다고 믿어요!^^
대한민국 아줌마들 화이팅!!

다크아이즈 2012-11-06 22:37   좋아요 0 | URL
아, 순오기님 저도 그런 날 만날 꿈 꾸는걸요. 세상을 바꿀 아줌마들 많아지기를...

blanca 2012-11-06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줌마'라는 말이 좀 더 이쁜 말로 대체되었으면 좋겠어요. 왠지 모를 그악스러움의 뉘앙스가 넘 아쉬워요.

다크아이즈 2012-11-06 22:39   좋아요 0 | URL
블랑카님,이쁜 말 좋네요. 기왕이면 엄마처럼 숭고한 의미로다가?
그렇게 되면 아줌마의 본질이 훼손될까 걱정되긴 합니다. ㅋ
 

 

 

 

 도나도나 그리고 존 바에즈

 

「도나도나」란 포크송은 반전(反戰)가수 존 바에즈가 불러 유명해졌다. 구슬픈 가락의 그 노래는 물론 그녀가 처음 부른 건 아니다. 유태인 작곡자와 작사자가 따로 있고 곡에 얽힌 사연도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홀로코스트에 희생된 유태인 이웃을 지켜본 상황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노래라고 알려져있다. 마차에 실려 어딘가로 끌려가는 송아지의 슬픈 눈은 맥없이 수용소로 잡혀가는 유태인들을 가리키리라.

 

‘시장가는 달구지 위에 슬픈 눈동자를 하고 있는 송아지, 하늘에는 제비 한 마리가 날고. 바람은 온밤과 낮 종일토록 웃다 못해, 여름이 다가도록 웃지. 도나도나도나. 농부가 송아지에게 말하지. 불평 좀 그만해. 누가 송아지가 되래? 제비처럼 날개를 달아 뿌듯한 자유를 얻지 그랬니. 도나도나도나. 쉽게 잡힌 송아지들은 이유도 모른 채 도살장에 끌려가지. 하지만 자유를 소중히 여긴다면 제비처럼 나는 법을 배워야해. 도나도나도나.’

 

들을 때마다 가사에 나오는 송아지, 제비, 바람, 농부의 이미지가 하나의 그림이 되어 떠오른다. 쓸쓸하다 못해 서늘해지는 그림 한 점을 해설하자면 이렇다. 속박된 송아지의 슬픈 눈앞에는 가없이 자유로운 바람의 웃음(어쩌면 비웃음일지도)과 맘껏 나는 제비의 날갯짓이 펼쳐진다. 송아지로서는 부럽기만 하다. 그런 송아지의 눈빛을 보는 달구지의 주인인 농부도 맘이 편할 리 없다. 송아지의 운명을 연민하듯, 억울하면 날개 달고 제비처럼 날아보지 그랬니, 라고 원망 섞인 충고를 한다. 자유가 소중하다면 나는 법을 배우라고.

 

훗날 기타 든 존 바에즈가 이 노래를 자기화하여 불렀을 때, 비폭력 저항 및 자유에 대한 상징의 기치와 매우 잘 어울리는 노래가 되었다. 온몸으로 읊조리듯 고백하는 목소리와 시적이고 구슬픈 노랫말 때문에 귀가 절로 열린다. 특히, 후렴구인 ‘도나도나’ 부분은 묘한 여운이 남는다. 후렴구 도나도나는 보는 이에 따라 다르다. 원곡에 충실하자면 절대자인 구원자를 의미할 것이고, 시적인 가사에 충실하자면 이탈리아 말로 ‘부인’이란 뜻도 있다니 그렇게 봐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자유를 갈구하는 노랫말로 보자면 단순한 추임새 기능으로 봐도 무방하다.

 

존 바에즈의 도나도나를 떠올린 건 얼마 전 그녀가 낸 자서전 기사를 읽었기 때문이다. 내 기억의 그녀 대표곡인 그 노래가 떠오르는 동시에 밥 딜런도 떠올랐다. 동지이자 애인이었던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 후보로 몇 번이나 오르내릴 때 나는 그녀야말로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완전히 읽지 않은 그녀의 자서전 곳곳에도 그런 문학적 조짐이 보인다. 미화된 찬사만이 아니라 치부와 약점마저 오롯이 담겨있는 이 책이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출간기념회 겸 고희를 넘긴 존 바에즈가 전 세계를 돌며 도나도나 구슬프게 읊는 자유의 노래를 한 번 들어보고 싶다. 상상만으로도 도나도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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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A의 ‘쾌도난마’ 는 내가 즐겨보는 프로그램 중 하나이다. 정치와 시사를 건드리는 일대일 토크 쇼인데도 왠지 무겁지 않아 좋다. 어눌한 듯하면서 능구렁이 같이 상황을 잘 이끄는 진행자의 솜씨 덕에 부담없이 볼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가끔씩 너무 편향적 정치 성향을 가졌거나 독특한 정신세계를 지닌 출연자가 나와 한 편의 코미디를 연출해 줄 땐 이 프로그램이 정녕 시사 토크를 표방하는 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한 심리학자가 시사 토크 프로그램에 출연해 박근혜 대통령 후보의 여성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이 발언 때문에 각종 매체가 또 한 차례 시끄럽다. 아마 박 후보 스스로 ‘최초의 여성 대통령론’을 펼치니 반발심에 그런 의견을 낸 모양이다. 정치에 관심이 없으니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 보고 싶을 마음은 추호도 없다. 어떤 후보를 지지하느냐 와는 별개로 여성으로서 황당하기 그지없다. 언제 어디서나 내가 여성이라는 자각을 하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는 나 같은 시청자는 금세 흥분지수가 높아질 만하다.

 

황상민 교수의 논지는 대개 이렇다. ‘여성과 남성의 차이는 생식기가 아니라 역할의 차이이다. 여성의 대표적 역할은 결혼하고 애 낳고 그 애를 키우는 것이다. 박 후보가 결혼을 했나, 애를 낳았나? 학교 다닐 때는 여성들이 남성보다 대우받는데, 결혼하고부터 여성들이 차별 받는다. 따라서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여성의 차별을 이야기하기가 사실 힘들다.’

 

이 말 속엔 모름지기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시집살이도 해보고, 남편 보필도 제대로 해봐야 여성이라고 할 수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나아가 모성을 잃지 않은 상태에서, 온갖 세파에도 끄덕하지 않은 불굴의 의지를 경험한 경우라야 진정한 여성이라 할 수 있다는 뉘앙스가 풍긴다. 이런 마초적이고 폭력적인 여성관을 가진 자가 있을까. 이런 마인드를 가진 학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방송에 나와 떠들 수 있다니 한심할 뿐이다.

 

세상의 모든 여성은 다만 여성일 뿐이다. 결혼하고, 애 낳고, 세상 단맛 쓴맛을 경험해봐야 꼭 여성인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한정된 의미의 여성은 전 여성의 반에도 못 미친다. 결혼 안 한 여자, 아이 안 낳은 여자, 세파에 시달려보지 않은 여자도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여성이다. 모성이 없어도 여성이요, 심지어 여자라고 자기 정체성을 확신하는 단순 생물학적 남성도 여성이라 할 수 있다.

 

여성이냐 아니냐를 구분하는 건 마초적 성향의 남자 잣대에 달려 있는 게 아니다. 자신이 여성이면서도 남성적 시각으로 같은 여성을 바라보는 치들과 더불어 내가 가장 혐오하는 부류가 저런 시각의 보유자들이다.

 

 

 

** 제 정치적 성향과 이 글과는 아무 관련 없어요.  그것과는 별개로 여성으로서 흥분하고 있는 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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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11-04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느와르님 전적으로 동감이에요. 그 방송 며칠전 저도 봤어요. 어이없는 저런 분이 심리학자에 명문대 교수라니ᆢ 김연아교생실습 건으로도 어이없이 발언하고 그 발언 후의 태도는 더 어이없더니 ㅠ 저런 생각과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하다니 ᆢ 에잇 그 생각하면 또 열오르니까 접고 오늘 편안한 일요일 보내세요. 입시일로 마음 많이 쓰이시겠지만요. 좋은 결과 바라는대로 있기를요!

다크아이즈 2012-11-04 22:15   좋아요 0 | URL
저는 논란이 되기에 다시 보기로 봤어요. 김연아 건 때 정신 차렸거니 했는데 자제가 안 되나 봐요.ㅠ

오후에 기숙사 가서 아들 만나고 왔는데 넘 시원찮네요ㅠㅠ
나중에 프레이야님께 상담할지도 몰라요. 도와주세요.^^

글샘 2012-11-04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상민, 이 사람, 똑똑한 바보 같애요.
김연아의 문제도 분명 누구도 지적 안하는.. 엘리트 스포츠의 문제점이란 점에서 문제제기할 수 있었고,
박근혜 역시, 여성을 내세우지만 남성보다 더 남성스런 스타일의 사고방식을 문제제기한 점에선 똑똑한데,
표현하는 방식이... 누구에게나 욕먹을... 바보같은 소릴 하는 거죠.

다크아이즈 2012-11-04 22:17   좋아요 0 | URL
하긴 멍청한 바보는 사랑스럽기나 하지
똑똑한 바보는 답이 없네요.

이슈 되는 사람 끌어들이면 시청률 조금이라도 올릴 수 있으니 종방에서 부르는 거겠지요. 종방스럽게요~~

별족 2012-11-05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요, 저는 말할 방법을 못 찾았어요.
박근혜가 '여성'인 거는 맞는데, 여성 정체성을 자각하는 저는 어떻게 박근혜를 찍지 않을 변명을 '여성대통령이라는 프레임?안에서 설명하지?' 싶은 거지요.

다크아이즈 2012-11-05 15:26   좋아요 0 | URL
별족님 그 고민은 별개라고 생각해요^^ 제 정체성을 자각한다해도,꼭 여성대통령 프레임 안에서 우리가 그 변명을 해야할 필요성은 없거든요. 그런 인간적 연민을 박 후보가 파고드는 듯해서 '여성 대통령 후보'를 내걸며 선거운동하는 게 영 맘에 들지 않아요.

별족 2012-11-05 15:29   좋아요 0 | URL
아, 저는 그래서, 굉장히 거친 표현이지만 황상민이란 분이 하신 말씀에 수긍했거든요. '여성의 문제'를 하나도 겪어보지 못한 '여성'이 대통령으로서 정치를 할 때, 그 사람을 어떻게 '여성대통령'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라는 문제제기였다고.

별족 2012-11-05 15:31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여성대통령 후보'를 내걸어 선거운동하는 게 맘에 들지 않는다,라는 다른 표현으로 이해했다는 거죠.
 
사르트르 평전
베르나르 앙리 레비 지음, 변광배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업무 차 타지에서 온 친구를 만났다. 오랜만에 본 그녀는 무척 야위었다. 통통하게 볼 살이 올랐을 때만을 기억한 내겐 그 모습이 충격이었다. 다이어트나 운동을 해서 뺀 살은 아닌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극심한 스트레스가 주범이라고 실토했다. 일은 하나도 힘들지 않은데 관계에서 오는 갈등으로 마음고생이 심하단다. 지옥이 따로 없다고 했다.

 

타인은 지옥 맞다. 희곡「출구 없는 방」에서 사르트르가 확인시켜 준 말이기도 하다. 한 남자와 두 여자가 있다. 그 셋이 한 호텔 같은 방에 배정을 받는다. 그것만으로도 이상한데 출구마저 없다. 한 방에서 꼼짝없이 세 명이 살아야 한다. 방안의 전등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다. 이 호텔은 다름 아닌 죽은 자들의 감옥인 지옥이다. 한데 아무리 기다려도 불바다는커녕 고문조차 없다. 하지만 곧 그들은 깨닫는다. 그들 서로가 불바다요, 고문자라는 것을. 타인보다 더한 지옥은 없다는 것을. 끓는 납에 넣는 것보다 부젓가락으로 쑤시는 것보다 더한 지옥이 타인이었던 것.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어릴 때부터 숱하게 배워왔다. 싫든 좋든 타인과의 관계없이는 살아가기 힘들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 타인이 필요악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이럴 때 사르트르 같은 철학자가 나타나 ‘타인은 지옥’이라고 말해주니 얼마나 위안이 될 것인가. 비록 ‘닫힌 공간’이라는 전제가 있긴 하지만 어느 누가 인간 존재의 근원적 모순에 대해 이처럼 통렬한 발견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누구나 현실은 힘겹고, 관계는 피로하다. 그렇다고 타인 없는 천국이 가당키나 한가. ‘타인이 곧 지옥’이라는 사르트르의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타인 없는 천국’도 삼일천하를 누리기 힘들다. 사르트르를 비틀어 만약 ‘혼자만의 방’이란 희곡을 쓴다면 그것이야말로 더한 지옥이 될 것이다. 말하자면 타인은 지옥이자 곧 천국이 되는 것이다. 그것도 실은 지옥이 아닌 천국일 때의 타인이 더 많다. 그 힘으로 우리는 일상을 버텨내는 게 아닐까.

 

지옥이자 천국인 타인. 살이 빠질 만큼 상처 입으면서도 우리가 그 딜레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은 운명적으로 사람은 사회적 동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상처와 치유가 함께 하는 즉, 지옥과 천국의 다른 이름인 그대 타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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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견난사(能見難思)

 

송광사 행은 처음이었다. 천 리 밖, 상상으로 그리기만 했던 경내엔 가을 풍광이 완연했다. 잘 물든 단풍잎마다 햇살이 고르게 박혔다. 여기저기 카메라를 들이대는 객들의 손길이 분주했다. 품 넓은 절집의 한 점 풍경이 되어 지친 몸 반나절쯤 풀었다 가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터였다. 썸네일        썸네일

 

구내 성보박물관에 전시된 다양한 사료들을 보면서 그러한 생각은 굳어졌다. 그 중 입구 쪽의 그릇더미에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그릇 자체는 지극히 평범해보였다. 얇고 둥근 청동제 접시인데 고려시대 것이었다. 공양 바리때로 쓰였는데 ‘능견난사’(能見難思)라 했다. ‘눈으로 볼 수는 있지만 그 이치를 알기가 어려운 일’이란 뜻이다. 그릇 이름치고는 유별나고 심오했다.

 

고려 때 원나라에서 가져왔단다. 주조법이 특이해 위로 포개도, 아래로 맞춰도 딱 들어맞는단다. 요즘 시각으로 보면 별 것 아니지만 모든 것이 수제이던 당시로는 최첨단 기술이었던 모양이다. 조선 숙종 임금이 그것과 똑같이 만들라고 했지만 장인들 어느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나. 그래서 ‘눈으로 볼 수는 있지만 만들기는 어렵다’란 의미로 그런 이름이 붙었다.

 

‘보기엔 쉬워도 만들기는 어려운’ 것 중의 또 하나가 글쓰기이다. 어느 정도 눈이 트이면, 잘 된 글과 그렇지 않은 글은 금세 알 수 있다. 하지만 읽는 눈이 열렸다고 쓰는 것이 절로 되는 건 아니다. 보는 눈과 쓰는 눈의 차이만큼 글쓰기의 괴로움이 따라 붙는다. 쓰는 이의 이런 노고를 알기에 인터넷 서점에서 책 평가용 별 개수를 물어오면 웬만하면 다섯 개 전부를 준다.

 

커뮤니티 활동이 자유로운 인터넷 시대엔 작가나 비작가의 경계가 없다. 글 잘 쓰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잘 쓰는 모든 이들은 내 존경과 부러움의 대상이다. 글쓰기야말로 능견난사이기 때문이다. 읽기에 좋은 글이 쓰기엔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송광사 능견난사를 통해 다시 깨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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