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레비나스 입문기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했을 때 그 주체와 대상은 오직 ‘나’에 관한 것이었다. 서구의 전통적 존재론을 대표하는 이 명제는 모든 생각을 ‘나’란 인식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를 전제한다. 그 사유 안에서는 타자가 끼어들 틈은 없다. ‘나’란 존재에 대한 고민만으로도 날 밤 샐 지경인데 언제 주변까지 시선을 둔단 말인가. 내가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 이런 생각에 몰두하느라 사유 영역을 타자로까지 넓히는 데는 인색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자아 귀환형 사고의 외곬성이 급기야는 전체주의로까지 퍼졌다고 철학자 레비나스는 말한다. 편협한 전체성을 낳는 자아와는 별개로, 타자는 운명적으로 무한자유를 향해 달려가는 존재이다. 레비나스는 이를 ‘전체와 무한’이란 개념으로 정리했다. (타자를 무한성의 개념으로 본 건 하이데가도 마찬가지.) 타자는 결코 나의 카테고리 안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타자는 타자로서 무한을 향해 발산하는 속성이 있다. 나의 바깥에서 한없이 자유롭게 떠도는 그 타자를 나비나 잠자리 잡듯이 내 손아귀에 넣고 말겠다는 그 지점에서 세계관은 충돌한다.
사소한 예를 들어보자. 지인의 집들이 선물로 포트메리온 찻잔 세트를 사들고 간다 치자. 그 집의 주방엔 알라딘 사은품으로 받은 머그컵이 종류별로 정돈되어 있다. 알라딘 램프 로고가 선명하게 박힌 그 머그컵이 우아하거나 고급스러울 리는 없다. 하지만 실용적이고 깔끔해 집주인은 그 컵을 애용한다. 한데 같이 간 누군가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사 온 이 찻잔으로 바꿔. 하기야 이 유명 브랜드 찻잔을 알기나 하겠어?”
(포트메리온이 유명 브랜드라는 생각 자체를 집주인은 하지 않을 것인데!)


이 경우 영국제 찻잔의 우위성에 점수를 주는 ‘나’의 전체성은 사은품 머그컵을 애용하는 ‘타자’의 개별적 무한성을 침범한 경우가 되겠다. 생활수준이 비슷하다면 브랜드 찻잔과 실용성 머그컵 사이는 취향의 차이 딱 그만큼이다. 한데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파의 존재론적 전체성에 함몰된 우리는 무한 발산하는 타인의 취향이나 의중은 고려하지 않고 내 식의 방식을 전수하려한다. 내 식으로 문화 코드를 바꾸라고 타자에게 충고하기를 즐긴다. 이런 생각이야말로 엄연한 폭력이다.
유폐된 우물 안 개구리식 세계관은 스스럼없고 무한한 에너자이저인 타자에 대해 관용적일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레비나스가 타자에 대한 윤리성을 강조한 것은 눈여겨볼만하다. 그에 의하면 윤리는 모든 것에 우선한다. 독립된 차원인 그의 에티카는 전체성에 대한 경고보다도 우선한다. 물론 여기서 윤리란 타자 앞에서 갖춰야 할 ‘나’의 도덕관을 말한다.
2. 자기계발서 단상
자기계발서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것은 필요에 의한 남편의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유를 덧대자면 그런 책에 편견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것들의 주된 내용은 대개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 라거나 성공하려면 생각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옮겨라, 처럼 뻔한 내용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나 알지만 그야말로 실천하기가 어려운 행동 강령들의 압박 앞에서 독자로서 자괴감과 게으름만 확인할 뿐이니까.
한데 좀 더 현실감 있는 자기계발서 한 권을 만났다. 반값 판매 도서를 사면서 함께 주문했는데『마흔, 당신의 책을 써라』이다. 저자 김태광은 처음 들어본다. 첫 책을 낸 이래 몇 달에 한 권 꼴로 책을 냈단다. 마흔이 되기 전에 110권의 책을 써 기네스북에도 등재가 되었다나.
수많은 그의 책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이 한 권의 책은 무척 고무적이다. 독자의 나태한 생활을 질타하고 정신무장을 독려한다. 시간이 나야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없는 시간을 내서 글을 써야 한다고 강조한다. 작가가 되어야 책을 내는 게 아니라, 책을 내야 작가가 된다고 역설하기도 한다.
글에 미친 사람들의 특징은 글 관련 이외의 활동에는 자제심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도 마찬가지다. 글쓰기, 강연, 글 가르치기, 독서 외에는 그 어떤 시간도 허투루 보내지 않는다. 나처럼 낮잠을 자거나 수다를 떨지도 않고, 술잔을 기울이지도 않는다. 자아실현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게으름과 핑계라나. 성공하려면 철저한 자기 관리를 할 수밖에 없다는 건 진리이다.
일상이 평화롭기만 하거나 성공할 마음이 없는 사람, 성공했거나 성공했다고 믿는 사람 등은 자기계발서가 별로 필요치 않다. 춥고, 배고프고, 열망하는 자들만이 그런 책을 펼친다. 열망하는 모든 이들이 자기 입맛에 맞는 자기계발서 한 권 쯤은 읽어도 좋을 계절이다. 비록 물질적 욕망일지라도 그 욕망을 실현한 사람들이 보내는 채찍과 동기부여가 힘을 주는 건 사실이니까.
여기서 잠깐, 자기계발서 작가들엔 두 부류가 있다. 성공해서 책을 낸 부류와, 성공하기 위해서 책을 낸 부류. 김태광 작가는 후자이다. 달걀이 먼저인지 닭이 먼저인지 아리송하긴 하다. 하지만 자기계발서의 현실적 목적은 물리적 성공이고, 궁극적 목적은 자아실현이니 독자로서 둘 다 옳다고 해두자. 진정성은 차치하고라도 두 그룹 다 치열하게 살고 있으니 그 자체로도 본받을 만하지 않은가. 자기계발서는 책 내용보다 그 저자의 정신력을 눈여겨볼 때 더욱 유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