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심기
‘마음으로 느끼는 기분’을 심기(心氣)라고 한다. 상대의 심기를 너무 헤아려도 진상이요, 그 심기를 자극하거나 도발하면 밉상이다. 눈칫밥을 먹어야 하는 입장에서는 권력자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제 입지를 높이려 욕망하는 자는 은근히 권력자의 심기를 자극하고 도발한다. 백성 입장에서는 둘 다 똑 같아 뵌다.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지난 달 박대통령이 영국 방문을 했을 때 런던의 모 극장에서 한국영화제 특별시사회가 있었단다. 애초의 영화제 개막작은 <설국열차>또는 <관상>이었다. 하지만 박대통령이 그 자리에 참석한다는 이유로 <숨바꼭질>로 바뀌었다나. 설국열차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를 빗댄 계급투쟁 이야기라서 안 되고, 관상은 부정한 방법으로 권력 찬탈을 한 등장인물이 나와서 안 된다는 식이다. 인사차 들러 예고편 2분을 보고 떠나는 VIP를 위한 배려치고는 너무 심한 자기검열이다.
실제 대부분의 권력자는 나무라지 않고 핀잔하지도 않는다. 심기 불편할까봐 주변인들이 알아서 기는 게 문제다. 재외 국민에게 용기와 힘을 보태는, 의례적 행사 참석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을 대통령 입장에서는 그런 ‘지나친 헤아림’이 도리어 불편했을 수도 있다.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주변인들이 민감하게 반응해서 화가 되는 경우는 허다하다. 물론 반대로 죄 없는 가진 자에게 도발을 감행해 심기를 자극하는 주변인도 많다.
세상일은 제 맘대로 되지 않는다. 남 뜻대로 될 때가 훨씬 많다. 객관적으로 나보다 남이 옳을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단, 가진 자나 권력자들이 그들 맘대로 할 의사가 전혀 없음에도 주변인들이 앞서서, 그들 말이 다 옳으니 그들 심기만을 살피겠다고 한다면 못 가진 자, 안 가진 자의 심기는 누가 보살피나? 언제나 타인은 옳을 수 있지만, 그것이 언제나 가진 자가 옳다는 뜻은 아니다. 심기는 가진 자나 못 가진 자 모두에게 있다. 도발해서도, 눈치 봐서도 안 되는 오묘한 심리가 인간의 ‘심기’ 안에 들어 있다는 걸 알겠다.
2. 과잉교정인간
‘과잉교정(overcorrection)’은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에 대해 강제로 책임지게 하기 위해 특정 행동을 지나칠 정도로 반복하게 해 문제 행동을 수정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심리학 용어인데 문제 행동이 수정될 때까지 강제로 반복시키는 방법이란다. 잘못된 행동이 지나치게 일어날 때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되어 있는 걸로 보아, 이 말은 행동 주체나 교정 조력자 양측 다 ‘지나친’ 부분이 있을 때 쓰이는 것이기도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면 음식을 흘릴 경우 단순히 흘린 음식을 치우는 것을 넘어 바닥 전체를 닦게 하거나, 물건을 집어던졌을 때 그것을 제대로 놓을 때까지 반복해서 제 자리에 정돈하게끔 하는 것도 과잉교정에 해당된다. 이것의 단점은 지나친 반복으로 반항심이나 적대감 등을 키울 수 있고, 강압적 훈련으로 인한 윤리적 측면에서도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흔히 ‘오버한다’는 말이 있는데 과잉교정 용어 자체의 뉘앙스에서 보듯이 뭐든 지나쳐서 좋을 건 없다.
과잉교정이란 말에서 파생되어, 네티즌 사이에서 회자되는 용어가 ‘과잉교정인간’ 이다. 잘못된 언어사용을 용납하지 않는 태도를 지닌 사람을 일컬을 때 쓰이는데 표준어, 맞춤법, 띄어쓰기 등 지나치게 문법에 얽매이거나 이에 집착하는 사람을 말한다. 잘못된 언어를 쓰는 게 좋을 리는 없지만 ‘과잉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그것을 콕콕 집어 교정하려는 태도도 그리 좋아 보이지 않음을 꼬집는 것이리라.
말의 규범을 지키는 것은 말을 다루는 사람들의 기본자세이다. 하지만 일상에서조차 말의 노예가 되어 시시콜콜 그 잘못을 지적하려 든다면 피곤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사회적’이라는 말을 가장 실감할 수 있는 영역이 언어 분야이다. 생활이 바뀌는 것만큼 언어는 빠르고 다양하게 변화한다. 이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언어의 사회성을 인정하는 융통성과 언어 규범을 지키려는 원칙, 그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는 것 자체가 ‘오버’인 게 우리 언어 활용의 현 주소인지도 모르겠다.
3.강박은 예술을 낳고
프로이트가 진단에 의하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여러 강박증을 지녔다. 해부도에 능한 다 빈치였건만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그릴 때, 남자 몸은 세밀하게 표현하지만 여자 몸은 단순화하거나 왜곡해서 그렸다. 다 빈치가 무엇인가에 억압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프로이트는 분석했다. 다 빈치는 또한 어머니의 장례식 비용을 강박적이리만큼 세부적 회계 방식으로 기록했다. 얼핏 어머니 죽음을 애도하지 않는 냉혈한 같아 보이지만, 괴로움을 표출하는 다 빈치의 다른 방식이라고 프로이트는 보았다. 기쁨이나 슬픔의 감정조차 이성으로 포장할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서자로 태어난 다 빈치는 계모에게 입양되는데, 생모와 함께 했던 기간 동안 모자 관계는 무척 돈독했다. 지나치게 어머니에게 밀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 빈치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다른 여자와의 교제에 어려움이 있었을 거라고 프로이트는 추측한다. ‘모나리자’의 미소가 불가해한 것도 이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고 보았다. 잡을 수 없는 과거에 집착하며 모나리자 속에서 어머니의 미소를 발견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모나리자가 미완의 작품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소유욕이 강한 어머니 밑에 자란 아들은 강박증을 가지기 쉽다. 그녀의 모든 것인 아들이 완벽하기를 어머니는 바란다.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아들은 성인이 된 후에도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다빈치의 경우 그런 완벽에 대한 집착 때문에 그림을 왜곡하거나 미완으로 남긴 셈이다.
프로이트의 눈에 비친 그는 성숙한 성인이 아니었다. 그의 의식은 모성과 분리되지 않은 어린아이 상태에 머물고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강박적 집착이 다 빈치의 예술을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감성과는 멀어 보이는 치밀한 계산과 과학의 방식으로, 말할 수 없는 내면을 예술혼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예술가의 작품이 강박의 소산물일 수도 있다는 게 전적으로 이해가 된다. 누구나 크고 작은 강박 증세를 품고 있다. 예술가는 그것으로 꽃을 피우고, 평범한 이들은 그것이 꽃이 되는지조차 모른다.
4. 그림으로 공자 읽기
조정육 선생의 ‘행복한 그림읽기’라는 블로그가 있다. 담백하면서도 분명한 논지의 글이 올라와 내 취향에 맞춤하다. 여러 카테고리 중에 그림으로 읽는 공자, 라는 코너가 있다. 공자의 활동 상황이 그려진 고전 그림을 제시하고 관련 고사 성어를 곁들여 알기 쉽게 설명해주는 시리즈물이다. 내 짧은 소견으로 다른 학자들이 시도하지 않는 영역을 개척하는 것 같아 신기하면서도 호기심이 인다. 관련 그림을 찾아내는 수고도 대단한데다, 그것으로 독자에게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다니 고맙기 그지없다.
그 중 오늘 읽은 ‘인번거노’부분은 무척 인상적이다. 공자가 정치할 때 장사치는 저울을 속이지 않았고, 길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주워가는 이가 없을 정도로 지도력이 있었던 모양이다. 공자 덕에 강해지는 노나라에 위기를 느낀 이웃 제나라가 계책을 꾸민다. 미인계를 써 노나라 군주가 미혹에 빠지면 공자가 충언을 할 테고, 충언을 멀리하게 된 군주에게 환멸을 느낀 공자가 결국 노나라를 떠나게 된다는 시나리오다.
제나라가 원하는 대로 노나라 군주는 환락에 빠졌고, 자로가 스승인 공자더러 떠날 때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때 공자는 ‘주군이 하늘에 제사 지낸 뒤 고기를 나누어주지 않으면 떠나겠다.(인번거노)’라고 답한다. 고기를 받지 못한 공자는 제자들을 이끌고 노나라를 떠난다. ‘그깐 제사 지낸 고기 못 받아 삐쳐서 떠나는 놈’으로 떠날 구실을 만든 것이다.
그건 공자의 진심이 아니었다. 공자가 달리 공자이겠는가. 어차피 떠날 몸, 구차하게 군주가 싫어서 떠난다고 핑계대지 않고, 스스로 모든 짐을 졌다. 남은 군주를 위한 배려로 위악을 떤 셈이다. 너무나 공자다운 생각이다. 충언이 통할 때까지 계속 설득하면 좋겠지만 길이 보이지 않을 때는 멈추고 떠나는 수밖에 없다. 떠나는 와중에도 주군을 위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더구나 선한 자를 위한 방패막이가 아닌 그렇지 못한 사람을 위한 자기희생이 아니던가. 공자가 아니면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5.굴원과 어부
전국시대의 굴원은 초인의 노래인 초사(楚辭) 문학에 능했다. 어부사(漁父辭)는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이다. 어부와 굴원이 나눈 대화체 이야기를 되새길 때마다 굴원보다는 어부의 말에 오래 눈길이 머문다. 아무래도 어부가 현실적인 인물이라서 그럴 것이다. 굴원만큼 강직한 사람은 문헌 속에서나 흔하지, 일반적으로는 작품 속 어부처럼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간다.
청렴결백한 굴원은 정계에서 쫓겨났다. 굴원의 죄라면 완전무결함이 가장 큰 죄였다. 잘못하지 않음이 죄가 되는 건 잘못 많은 정계에서는 흔한 일이다. 이제 그의 할 일은 수척해진 몸으로 강호에서 시나 읊는 것이었다. 어부가 물었다. 큰 사람이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냐고. 굴원이 답한다. 혼탁하고 취한 세상에 홀로 깨끗한 채 깨어 있다가 쫓겨나게 되었다고. 어부가 충고한다. 사물에 얽매이지 말고 세상 따라 변할 줄 알아야 한다고. 모두 탁한 물이면 진흙탕을 일으킬 수 있어야 하고, 모두 취했으면 싸구려 술을 마시면 되지 고매한 처신으로 추방을 자처할 일이 무엇이냐고. 굴원이 응한다. 머리를 감았다면 관을 털어 쓰고, 목욕을 했다면 반드시 옷을 털어 입어야 한다고. 결백한 몸으로 더러운 것을 받아들이는 건 가당치 않다고. 그럴 바엔 강물에 뛰어들어 고기밥이 되겠다고. 깨끗한 몸으로 세속의 먼지를 뒤집어 쓸 순 없다고. 지친 어부가 웃으며 뱃전을 두드리며 떠나간다. 다음과 같이 노래하면서. “창랑(滄浪)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으면 되고, 그 물 흐리면 발 씻으면 되는 것을!”
타협을 강조하는 어부의 삶과 대조적으로 굴원의 강직한 세계관을 보여주는 것이 이 이야기의 주제가 될 수 있겠지만 삶이란 강물은 우리가 바라는 대로 흘러주는 게 아니다. 어쩌면 어부가 부른 창랑가처럼 한 세상 둥글게 살아가는 게 범부(凡夫)의 일상이라는 것을 비틀어 보여주기 위해 굴원은 제 강직한 삶을 빗대어 이런 이야기를 남겼는지도 모른다. 범부 부처되기가 위대한 건 그렇게 된 분이 오직 부처 한 분이기 때문이리라.
6. 겸허해지기
다시 수전 손택이다. 1961년 어느 봄날의 일기에서 그녀는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 -이 말을 하루에 스무 번씩 할 것.”이라고 고백한다. 시린 무릎에 전율이 일 정도로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다.
온통 나라가 시끄럽기만 하다. 한쪽에서는 NLL 포기 발언에 대해 물고 늘어지고 다른 쪽에서는 국정원 댓글 사건에 대해 거품을 문다. 민생과는 별 관계가 없는 사안을 두고 지겹도록 몇 달째 입씨름을 벌이고 있다. 들어 보면 모두 옳다. 일을 벌이는 쪽에서는 그들의 입장이라는 것이 있고, 꼬투리 잡는 쪽에서는 그 입장이 도대체 말이 되지 않는단다.
정치가 시끄럽고 관계가 뒤틀리는 건 나만 옳고 너는 그르다는 생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실은 나도 그를 수 있고, 너도 옳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걸 인정하는 순간 왠지 패배를 인정하는 꼴이니, 그게 두려워 괜히 목소리를 높이고 과격한 삿대질을 곁들이는 것이다.
이런 인간의 치졸한 속성을 파악했기에 젊은 수전 손택은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명제를 하루에 스무 번씩이나 가슴에 새겼으리라. 스스로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게 나쁜 건 아니다. 인간관계에서 긍정의 효과를 발휘하는 썩 좋은 방법 중의 하나가 스스로를 괜찮은 사람이라고 세뇌하는 일이다. 스스로를 귀히 여기는 사람이 타인도 귀하게 대접한다고 수많은 심리학 서적들이 가르쳐왔다. 하지만 그건 서로가 서로를 귀히 여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을 때 가능한 일이고, 정치 현실에서는 적용되기 어렵다. 정당의 목적이 ‘정권 획득’이다 보니 서로 배려하는 미덕 보다는 살아남기 위해 서로 흠 잡는 게임을 할 수밖에 없다.
나는 좋은 사람이다, 라는 신념이 너무 확고하면 아집이 생기고 편견에 사로잡히게 된다.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 라는 최소의 겸허 모드를 곁에 두었기에 손택은 그토록 진솔한 자기성찰에 가닿을 수 있었으리라. 진정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자들일수록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 라는 자세로 살아간다는 걸 알겠다.
7. 시크와 시니컬
의외로 대중들이 잘못 알고 쓰는 외래어가 있다. 그 중 하나가 시크’(chic)라는 말이다. 나 역시 그 단어를 내 식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뭔가 도도하고 무심해 타인의 의사에 휘둘리지 않을 것 같은 사람더러 ‘시크하다’고 표현해왔다. 우연히 인터넷 게시물을 보다가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고 당황했다. 당장 사전을 검색해 봤다.
시크하다 - ‘세련되고 멋있다’라고 되어있다. 도도하다, 차갑다, 등 소위 ‘쿨하다’는 의미는 그 어디에도 없다. 잘못 알고 쓴 경우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시크란 말은 패션용어로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왔다. 독일어로 세련되고 맵시 나는 경우를 일컬을 때 쉬크(schick)라고 한단다. 프랑스어(chic)를 거쳐 영어로 보편화 되었고, 우리나라에선 시크란 신외래어로 쓰이는 모양새다. 화려한 원색이 아니라 흰색과 검정색 톤의, 차분하면서도 도회적 감각을 추구하는 패션을 두고 시크하다는 표현을 썼다. 세련되고 멋있다, 라는 패션 용어와 도도하고 차갑다는 성격 이미지는 묘하게 어울린다. 그러다 보니 사람의 성격을 규정할 때도 시크하다는 표현을 하게 된 모양이다.
시크란 말이 무심하고 도도하다는 의미로 쓰인 건, 비슷한 단어인 ‘시니컬’(cynical)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냉소적인 데가 있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이 말이 시크와 비슷한 발음인데다 어쩌면 시크의 어원이 시니컬이라고 착각해서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다.
어딘지 모르게 냉정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더러 우리는 별 생각 없이 ‘그 사람 시크해.’라고 말해왔다. 한데 그 원뜻이 그 사람은 세련되고 멋있어, 라는 것이었다니 위로가 된다. 냉소적이면서 이기적인 도회풍 사람들이 멋있고 세련된 패션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으니 아주 잘못된 표현이라고도 할 수 없다. 시크한 패션을 추구하는 사람이 순박한 성격을 지녔다면 어딘지 부자연스럽기도 하다. 약간은 시니컬한 사람이 적당히 시크한 패션을 보여준다면 그야말로 안성맞춤이다. 그러니 시크한 자 시니컬해도 용서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