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플롯과 친구하기

 

  스토리텔링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인간관계의 원활한 소통과 한 대상의 전략적 홍보 수단 등에서도 스토리텔링의 필요성과 중요성은 커지고 있다. 원래 스토리텔링은 문학적 성과, 특히 소설을 이루는 장치이자 재료로서 강조되는 부분이었다. 스토리텔링이 제대로 되지 않는 소설은 고전적 의미에서 소설이라고 할 수 없다. 의식의 흐름 기법을 고수하거나 의도적으로 스토리텔링을 무시하는 작가가 있어왔지만 그건 극히 예외적인 경우이다.

 

  한때 나는 글쓰기에서 플롯을 그리 중요시 여기지 않았더랬다. 글은 플롯에 의해 좌우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등장인물의 행동이나 심리 묘사에 의해서만 글의 흥미나 질이 판가름 난다고 믿었다. 근거 없는 편협의 우물에 갇혀 있었다. 하기야 스토리텔링 자체도 부질없고 소용없다고 여겼다. 오직 쓰는 자의 손가락 의지에 글의 운명이 달려 있다고 믿고 싶어 했다. 등장인물의 외적 내적 묘사의 장악력만 있으면 플롯은 자연스레 따라온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플롯에 대한 신뢰감이 되살아난다. 단단한 플롯만이 독자를 만든다. 이야기의 뼈대나 구조, 즉 플롯은 단순한 이야기의 개념을 넘어선다. 어떤 사물이나 사건에 대해 그저 늘어놓는 것이 이야기라면, 플롯은 그것에 더해 당위인 인과관계가 있어야 한다. 짜임새 있는 이야기의 힘이나 과정이 녹아 나야 제대로 된 플롯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간 너무 등장인물의 내적 또는 외적 패턴에 의해서만 글을 쓰려고 했다. 이제 자세를 좀 바꿔보고 싶다. 플롯의 대가라 해도 좋을, 작가 딘 쿤츠가 말했다. ‘플롯이 없는 소설처럼 이 세상에 우스운 것은 없다. 누가 뭐래도 플롯은 소설의 으뜸 조건이다.’ 태생적으로 광적 재능을 타고난 작가라면 플롯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그 자체로 실험소설의 반열에 오를 수 있으니. 하지만 끊임없이 연마해야 하는 입장이라면 구태의연하게 보일지라도 기본에 충실한 것도 나쁘지 않다. 초심으로 돌아가서 쓰라는 내면의 요청이 들린다.

 

 

 

2.잔소리

 

제 앞가림하기도 버거운 나는  엄마 노릇에서는 빵점이다. 그만큼의 보상으로 아들딸에게 자율성을 부여했다고 위안했는데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다. 아들녀석이 말한다. ‘엄마, 잔소리가 뭔지 아세요? 엄마들이 하는 모든 말이 잔소리가 아니라, 같은 소리를 계속 하는 게 잔소리예요.’ 한마디로 ‘엄마는 잔소리꾼’이란 얘기다. 은근히 서운하다.

 

 

사람은 언제나 자기 식으로 생각하는 법. 별 잔소리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건 내 입장일 뿐, 아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를 테면 내가 아들에게 하는 레퍼토리는 이런 거다. ‘첫째, 어학이 기본이다. 딴 건 몰라도 어학 공부는 게을리하지 마라. 이 글로벌한 세상에서 어학이야말로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둘째, 확실한 관심 분야를 개척하고, 악기 하나쯤은 다룰 줄 알았으면 좋겠다. 현대의 중산층 개념이 뭔지 아나? 아파트 평수도, 외제차 유무도, 명품 가방 살 수 있는 능력도 아니다. 그건 경제적 측면에서 본 것이고, 요즘은 문화적 잣대로 중산층을 가늠한다. 그러니 정신적 중산층이 되고 싶으면 자기계발에 신경 써라.’

 

적고 보니 잔소리 맞다. 아들 기준에 의하면 엄마가 이런 말을 두 번 이상, 어쩌면 여러 번 했기 때문에 잔소리가 되는 것이다. 세상 모든 부모는 자식 걱정을 한다. 그 걱정의 다양한 버전이 보통의 자식들에게는 잔소리로 들린다. 그 시절 나 역시 그랬으니 할 말은 없다. 그렇다고 잔소리를 하지 않을 수는 없다. 부모는 말하고 자식은 거부하는 것, 그것이 잔소리의 속성이다. 엄마는 한두 번밖에 말한 기억이 없는데 자식은 여러 번 들은 것 역시 잔소리의 특징이기도 하다.

 

가만 생각하면 훈육 또는 길잡이라는 형식의 모든 군소리는 부질없어 보인다. 물이 자정작용을 하면서 흐르듯 인간 성장에도 그 법칙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부모의 잔소리와 무관하게 아이들은 크면서 스스로 깨닫는다. 시기의 늦고 빠름에 차이가 있을 뿐, 본인의 인생행로에서 자정능력을 발휘한다. 부모 스스로도 그리해왔지만 그 시행착오의 시간과 노력을 줄이고 싶은 욕심에 부모는 잔소리를 하게 된다. 부모의 모든 옳은 소리는 아이들에게 잔소리다. 떼려야 뗄 수 없는 부모자식 간이라는 걸 증명하는 천형의 매개물인 잔소리!

 

 

 

 

   

투 마더스 포스터 

 

 

 

 

3. 도리스 레싱 앤 투 마더스

 

상식과 기본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도전을 받으면 어떻게 될까? 전통적 사고와 도덕적 관념이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굳건한 힘이 되기는 하는 걸까? 이런 물음에 대한 알싸한 답을 주는 작가가 도리스 레싱이다.『다섯째 아이』에서의 강렬하고 통렬한 통점 때문에 기억에 남는 작가인데 이번에 개봉하는「투 마더스(두 엄마)」도 그녀의 작품이 원작이란다.

 

『다섯째 아이』에서의 그녀의 메시지를 내 식으로 환원하면 이렇다. 장미와 백합향이 향기롭다고 그것만을 삶의 가치로 고수할 수 있을 것인가. 시궁창 냄새나 쓰레기장 냄새도 나름의 존재이유가 있다. 평화로운 질서, 안온한 일상, 보장되는 미래 - 전통적 가치관과 건전한 윤리관에 충실한 젊은 부부는 이런 가정을 꿈꾼다. 하지만 다섯째 아이인 ‘벤’이 태어나면서 그들의 신화는 무참히 부서진다. 가는 몸에 부서질 것 같은 사지, 거대한 머리에 툭 튀어나온 눈. 괴물 같고 벌레 같은 외형에다 성격마저 괴팍한 벤은 중산층 삶에 대한 거리낄 것 없는 로망을 가졌던 부부를 순식간에 나락으로 몰아넣는다.

 

행복의 기별로 가득했던 집안은 불행의 기운이 점령하고 만다. 파괴와 증오, 공포와 침울의 대상이 된 벤을 버려야 할 것인가. 가족의 평화와 안위를 위해, 그들이 꿈꿨던 이상향이란 그림을 위해 또 다른 가족인 벤을 포기할 것인가. 해결 난망의 숙제이지만 도리스 레싱의 전언은 분명하다. 벤이란 상징을 통해 우리 스스로 믿고 있는 가치나 기준이란 게 얼마나 헛된 것이며 무너지기 쉬운가를 보여준다.

 

관계 또는 가족 이데올로기의 허상을 바늘 끝 같은 감각으로 감지해낸 도리스 레싱의 철학이「투 마더스」에 와서는 어떻게 변주되는지 궁금하다. 여성 감독이 만든 여성적 시각의 영화라 한계가 있을 수도 있다. 더구나 쌍방 친구 아들들과의 로맨스라니 막장 드라마로 빠질까 우려도 된다. 하지만『다섯째 아이』에서의 도리스 레싱을 기억하는 감독이라면 뭔가 선명한 메시지를 던져주기 위해 애쓰지 않았을까. 작가의 기가 전해질지 기대 중이다.

 

 

 

4. 군더더기 없는 삶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스티븐 킹은 강조했다. 군더더기 없는 글의 매혹에 대해서. 고교 시절 그는 한 신문사에서 일을 시작했다. 늙은 편집자는 그가 제출한 원고의 대부분을 지워서 돌려주었다. 남은 것은 오직 킹이 처음에 하고자 한 내용 뿐이었다. 늙은 편집자는 어린 그에게 충고했다. 어떤 이야기를 쓸 때는 스스로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생각하고 써라. 원고를 고칠 때에도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아닌 것은 모두 없애라. 그렇게 하면 핵심만 남을 것이다.

 

같은 맥락의 얘기를 사진 기초를 배울 때도 들었다. 한 수강생이 제출한 사진을 선생님은 화면에 띄웠다. 호수 풍경이었다. 드넓은 호수 가운데 오리 한 마리가 노닐고 언덕 주변으로는 화사한 붓꽃이 만개했다. 남은 오리 떼는 물풀에 가려 보일 듯 말듯 했고 그것을 정원 삼아 전원주택이 원경으로 잡힌 사진이었다. 선생님은 말했다. 그 풍경 중 호수에 떠 있는 오리를 제외하곤 다 버리는 게 낫다고. 사람들은 핵심을 원하지 군더더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고.

 

무엇을 듣고 싶은가 또는 무엇을 보고 싶은가에 대한 중심점은 하나이다. 이것저것 말하고 이리저리 보여주고 싶은 건 당사자 입장일 뿐이다. 어떻게든지 하고 싶은 얘기도 많고, 보여주고 싶은 풍경도 많은 게 내 입장이다. 하지만 상대는 그렇지 않다. 다 알아 들을 마음도 없고, 다 볼 수 있는 눈을 키우지도 않는다. 타자화된 우리가 듣고 싶고 보고 싶은 건 언제나 단순한 핵심 그것이다.

 

글에서 군더더기를 버리는 것이나 사진에서 불필요한 풍경을 버리는 것만큼 삶에서 던적스러움을 버리는 건 어렵다. 단순한 핵심에 이르는 일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피나는 노력과 끊임없는 자기 훈련을 필요로 한다. 복잡하고 거창하고 요란한 것은 내 안에 깃든 욕망의 실체일 뿐, 타자에게 비치는 그것은 피로와 지루함의 허상일 뿐이다. 단순하고, 소박하고, 명쾌한 것 그 중심에 닿으려 하는 건, 그만큼 우리 삶이 복잡하고 까다롭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5. 사랑하고 있는 걸까?

 

지금 이 순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상대의 목소리나 문자를 기다린다면 당신은 사랑하고 있다. 어쩌다 상대가 건네는 한 마디 말에 심장이 오그라든다면 당신은 사랑하고 있다. 아니 사랑에 빠져있다.

 

사랑에도 구별이 있다. 덜 사랑하는 자와 더 사랑하는 자. 사랑에 덜 사랑과 더 사랑이 어디 있냐고? 천만에! 사랑만큼 저울추가 확실히 기울어지는 것도 없다. 사랑의 깊이와 넓이가 당사자들에게 똑 같이 할당되는 것이라면 애초에 사람들은 사랑 때문에 입술이 부풀고, 이별 때문에 치통에 시달릴 이유가 없다.

 

대상을 객관적·보편적으로 바라볼 수 있으면 덜 사랑하는 쪽이고, 대상에 주관적·감정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면 사랑에 빠진 쪽이다. 덜 사랑하는 쪽은 그 순도가 탁하기 때문에 덜 다치고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게 버겁지 않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쪽은 순도 백퍼센트이기 때문에 더 다치고 버겁기만 하다.

 

사랑의 단상에 관한 롤랑 바르트의 전언을 보자. ‘나는 사랑하고 있는 걸까? 그래, 기다리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 사람, 그 사람은 결코 기다리지 않는다. 때로 나는 기다리지 않는 그 사람의 역할을 해보고 싶어 한다. 다른 일 때문에 바빠 늦게 도착하려고 애써 본다. 그러나 이 내기에서 나는 항상 패배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정체는 기다리는 사람, 바로 그것이다.’

 

덜 사랑하는 사람은 철새이고 사라지는 자이다. 반면 사랑하는 자의 천직은 외곬이자 처분을 기다리는 자이다. 설거지하기 성가셔 싱크대 한쪽에 미뤄둔 프라이팬처럼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는 신세이다. 언제나 부재중이거나 안개처럼 존재하는 그 덜 사랑하는 존재가 사랑인줄 알고 창을 연 채 반쯤은 얼이 빠진 채 기다리는 것이다. 결코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하지만 어쩌랴. 아무 것도 아닌 것에 갈망하고 집착하는 것, 이것이 사랑의 속성인 것을. 찔러대고, 나약했던 그 순간을 겪기 전까지는 투명한 물방울 같은 환상으로 남을 몹쓸 그 사랑!

 

 

 

6.레미콘 차를 보며

 

달리는 레미콘 차 몸뚱이는 쉴 새 없이 돌아간다. 그 안에는 이미 섞인 콘크리트가 들어 있다. 모래, 자갈, 시멘트, 물 등 적절히 배합된 그들은 몸 섞어 서로를 보듬어야 한다. 목표점에 도달할 때까지 제 몸을 굴리지 않으면 내용물이 제대로 섞이지도 않을뿐더러 심하면 굳어버릴 수도 있다. 안착하여 타설될 때까지 돌고 돌아야 한다.

 

레미콘 차 뒤꽁무니가 잘 돌아간다고 안심할 일은 아니다. 건설 현장 비리에 관한 텔레비전 고발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관리가 잘 되는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는 입구에 담당자가 나서서 레미콘을 점검한다. 불량 레미콘이 들어 있는 차를 발견할 경우 그 자리에서 되돌려 보낸다. 반면 허술한 공사 현장에서는 퇴짜 맞은 그 레미콘 차를 형식적인 점검만 거친 채 그대로 투입시키고 있었다. 완공되었을 때 두 아파트에 대한 안전도는 극과 극이 될 것이다.

 

삶도 마찬가지다. 삶의 본질은 관계이다. 일단 잘 반죽해야 한다. 어긋나고 흐트러진 배합률로 제 인생의 내용물을 반죽한다면 아무리 잘 돌려도 몹쓸 것이 되고 만다. 잘 굳은 축조물을 얻으려면 두 가지 다 충족해야 한다. 배합이 맞아야 하고 잘 섞을 줄 알아야 한다. 정치 구도, 문화 방식, 소통 의지 등 우리가 살아가는 기본 바탕에는 관계망이란 사회적 운명이 부여된다. 그 사회적 약속을 잘 배합하고 잘 융합할 때 굳건한 구조물을 얻을 수 있다.

 

삶의 핵심은 인간 대 인간에게 있다. 일찍이 그것을 알아 낸 인류는 철학이라는 인간에 대한 위대한 학문을 고안해내기에 이르렀다. 하루하루의 삶이 모여 일생을 만든다. 내 삶을 어떻게 반죽하고 돌릴 것인가에 따라 완공된 건축물이 달라진다. 불량 반죽은 아무리 돌려도 불량일 뿐이다. 운 좋아 그 레미콘으로 층층이 타설한다 한들 부실 건축물이 되고 만다. 반죽은 굳기 마련이다. 문제는 잘 굳어야 한다는 것이다. 단단한 구조물로 남을 것인가, 부실한 건축물로 부서질 것인가는 기초인 반죽과 돌리기에 달려있다.

 

 

 

7. 예의라는 폭력

 

제 눈의 들보보다 남의 눈의 티가 크게 보인다. 그게 인간이다. 그리하여 ‘잘 아니까 똑바로 말해주는 거야.’ ‘뒤끝은 없으니 서운해하지마.’라며 상대에게 거침없이 말한다. 맞는 말처럼 들리는 저런 어법이야말로 부당한 말투 중의 하나이다. 사람은 상처의 동물이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의 약점을 알고 있다. 그것을 고려치 않은 채, 제 눈의 들보 든 지도 모르고 충고랍시고 권력자들은 남의 약점을 캐는데 일가견이 있다.

 

선인들이 타인에 대해서 왈가왈부하기를 조심하라고 가르친 건 제 안에 더한 그 왈가왈부가 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리라. 말하지 않는 약자는 타인의 약점을 몰라서가 아니다. 말할 필요도 없고, 말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예의 상 알 뿐이다. 자중할 줄 아는 것, 그것이 인간에 대한 예의라고 선인들은 가르쳐왔다.

 

하지만 예의 또는 예절이라는 게 동양적 사고의 틀 안에서는 약자가 강자에게 취하는 복종의 기미에 지나지 않는다. 일찍이 공자가 말했다. ‘다른 이를 존중하면 모욕당할 일이 없다’고. 애초에 그 말은 지위상하와 관계없이 태어난 말일 게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연예계에서 선배에게 깍듯이 인사하지 않는 것은 큰일날일이지만 먼저 상대를 발견하고도 선배가 후배에게 곁눈질조차 주지 않는다고 해서 예의에 어긋난다고 흥분하는 사람은 없다. 구석구석 살피면 예절은 언제나 약자 또는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만 적용된다. 권력 가진 자가 예의 부족 구설에 오른 예는 단연코 들어본 적이 없다.

 

예절은 마음의 진정성이 형식으로 표현되는 것을 말한다. 갑의 위치라 해서 진정성과 형식을 표현하지 말란 법은 없다. 옛말에 ‘인사에 선후 없다’라고 했다. 예절에도 선후가 있을 수 없다는 말과 같다. 하지만 우리의 예절은 언제나 강자 앞에서 표하는 약자의 리액션에 머물고 만다. 그러다 보니 잘 안다는 이유로, 뒤끝 없다는 핑계로 갑은 을에게 폭력적 언사를 일삼는다. 예절에서 인간 동격 개념을 적용하기엔 무리인 세상을 우리는 여전히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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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3-09-12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므느와르님, 안녕하세요^^

<소설쓰기의 모든 것>은 도서관에서 1권만 빌려서 읽다가 다 못 읽고 반납했었거든요. 님 글 읽고 보니, 전체를 꼼꼼히 읽어보고 싶어요.

현대의 중산층 개념 너무 좋은데요. 저도 엄마잖아요.
요즘에 딸롱이가 바이올린을 거부해서요, 조금만 더 배웠음하는데, 팜므느와르님 애기 해줘야겠어요. 다른 것보다 정신적인것, 문화적인 것에 중점을 두자 하면서요.

좋은 글 잘~~읽고 갑니다. 날씨가 선선하다 못해 서늘하네요. 또 놀러올께요~

다크아이즈 2013-09-16 07:00   좋아요 0 | URL
전 이 책 유익하게 잘 보고 있어요.
선전지 딸려 온 것 보고 당장 샀잖아요.
미국 환경에 맞는 거라 우리 상황에 다 적용할 순 없지만 읽어 볼 필요는 있었어요.

중산층도 못 되지만 그런 정신적 마인드는 중요할 것 같아 강조하는데
아이들에겐 잘 안 먹혀 들어요. 머리 굵으면 지들 생각이란 게 있잖아요.
단발머리님 추석 잘 보내시고, 스트레스는 알라딘에서 같이 풀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09-12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포스트 참 좋습니다. 팜므 님 글은 확실히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딘 쿤츠가 플롯이 팔 할'이다, 라고 했다면 스티븐 킹은 정반대로 말한 기억이 나네요. 아마... 유혹하는 글쓰기인가 아니면 죽음의 무도인가에서 플롯은 개나 줘 ! 그냥 플롯에 골몰하지 말고 그냥 써 !!! 이런말을 했거든요...ㅎㅎㅎㅎㅎㅎㅎㅎ.

사랑의 단상 띠지'에 <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 > 라는 문장 제가 정말 좋아했던 문장입니다. 사랑의 단상은 늘 꺼내서 보는 책인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한편의 서사시 같아요. 가장 위대한 서사시입니다.

레미콘에 대한 비유 정말 좋습니다. 저도 이거 좀 써먹어도 되나요 ? 써먹게 해주세요..

다크아이즈 2013-09-16 07:04   좋아요 0 | URL
그간 제가 그랬다니까요. 플롯은 개나 줘, 이런 마인드였죠.
근데 재능이 없으니 개 줄 플롯도 없더라구요.ㅠ 해서 초심으로 돌아가볼까 싶어서 방향을 바꿔 보려구요.

레미콘 비유 제발 좀 써먹어주세요. 곰발님이라면 멋진 사유가 깃든 살아있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요? 가끔씩 들어오는 알라딘, 곰발님 글맛에 취하는 그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습니다. 신통방통하게만 보이는 곰발님, 아흐 다롱디리~~

노이에자이트 2013-09-13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의보다는 위계질서를 더 중시하는 이들이 많죠.아랫사람에게는 함부로 대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참 골치 아픕니다.

'예의라는 폭력'에서 "저런 어법이야말로 불편부당한 말투 중의 하나..." 라고 하셨는데 무슨 뜻인지요? 문장의 의미가 통하지 않습니다.

다크아이즈 2013-09-16 07:07   좋아요 0 | URL
노이자님 고맙습니다.
제가 빨리 발견하고 고쳤어야 했는데, 게으름을 핑계로 이제 님의 귀한 덧글을 접수했다는 사실.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방치한 죄 크옵니다.
첫 댓글이신 것 같은데 좋은 말씀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래서 알라딘이 좋습니다.
많은 것 배우러 노이자님 서재에 놀러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