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 처음으로 콘서트를 가게 되었을 때, 콘서트 당일보다 가기 전에 더 설레고 즐거웠던 기억이 난다. 여행 준비도 그랬던 것 같다. 필요로 하는 것들을 준비하고, 가서 할 일들을 생각하고, 가서 보고 겪게 될 것들을 상상하는 일들이 몹시 즐거웠다.
이 때는 공부도 무척 재밌어질 때인데, 아뿔싸! 여행 직전에 나는 지금 내 이미지를 장식한 저 남자한테 다시 푹 빠지는 우를 범했으니, 이름하여 '보련등전전'. 이집트 관련 책들을 바리바리 쌓아두고서 드라마 보기 바빴다는 슬픈 이야기....;;;;;
그리하여, 비행기 안에서, 그리고 대기 시간에 보기 위해 넣어둔 쾌도 홍길동 외에도 보련등전전 파일 변환하기에 무척 바빴다. 고백하자면, 집에서 출발하기 직전에야 전체 파일을 다 변환 완료!
떠나기 일주일 전부터 모니터 고장으로 컴퓨터를 아예 종료도 못 시켰는데, 토요일에 형부가 뭘 봐주다가 컴을 종료하는 바람에 다시 부팅을 못 시키는 일이 생겨버렸다. 나의 싸늘해진 표정을 보며, 형부는 급 복구하기 시작했고, 모니터 안의 망가진 부품을 전자 드라이버 안의 어떤 부품과 맞교환해서 무사히 고쳐주셨다. 하핫, 암튼 다행...-_-;;;
문제는, 토요일부터 나의 컨디션이 무척 나빠졌다는 거다. 앞서도 말했지만, 몸살이 나버렸다. 이틀 전에 전기장판 코드를 실수로 안 꽂고 잤던 게 제일 큰 원인이었고, 토요일 당일 목욕탕에서 머리 안 말리고 나와서 찬 바람 쐰 게 또 결정타였던 듯.
게다가 흥분 모드로 잠도 못 잤다. 뭐, 그 바람에 못 보고 있던 이집트 관련 책을 마저 읽고, 도서관 반납은 언니에게 맡긴 채 출발할 수 있었지만. (근데 언니가 이틀 늦게 반납해서 대출 정지 8일 먹었다. 내일 모레 풀린다. 그리고 설 연휴ㅠㅠ)





아, 짐싸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친구네 집에서 보내온 짐이 13kg이었고, 친구의 친구가 부탁해서 우리 집에 온 게 또 1kg이었고, 그밖에 친구가 내게 부탁한 것들이 메일이 오고 갈수록 자꾸 추가되는 것이다. 막판에 성이 좀 날~ 뻔했지만, 잘 넘어갔고... ^^
일요일 오전. 8시 반에 출발하는데, 그 시간에 일어날 사람이 없다고 나더러 택시 타고 가란 소리에 경악할 뻔했다. 큰 가방이 20kg, 배낭이랑 크로스 가방이 10kg인데, 이건 너무하잖아!
결국, 큰언니가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준 덕분에 리무진 버스 타는 곳까지 데려다줬다. 공항 가서 재보니 사실 20이 넘었지만 그냥 봐줬다. 하핫... 땡스! 내가 갖고 탄 짐도 사실 10kg을 넘겼다. 러시아 항공사 에어로 플로트 비행기는 양쪽에 2명씩, 가운데 줄에 세명이 앉는데, 내 좌석은 그 가운데 세 좌석 중 오른쪽 끝자리. 헌데 짐칸에 모두 짐이 차 있어서 난 그 큰 가방 두 개를 내 다리 밑에 깔고서 10시간을 날아가야 했다는 슬픈 이야기. 오, 갓!
기내식은 예상보다 훌륭했다. 작년에 상해 갈 때 남방항공기에서 겪은 토나오는 기내식을 떠올리며 감사감사... 그런데 양이 너무 많다. 마침 읽고 있던 책이 한비야의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였는데, 남기자니 미안하고, 다 먹자니 부담스럽고, 적당히 타협...;;; 하며 식사를 마쳤는데 방송이 나온다.
뭐라뭐라 하는지 러시아 말이라 알 수도 없고, 비행기는 무섭게 흔들리고... 브론테님 말씀이 전 세계에서 가장 노후한 비행기일 거라 하셨는데 아 그 말이 실감나는 순간...ㅜ.ㅜ
뭐, 오래 가지는 않아서 다행이었지만. 영화 폴라 익스프레스를 보여주는데 영어 자막 없이 러시아 말 더빙... 난 그냥 음악 들었다...;;;;
내 앞좌석과 옆좌석은 고대 사회봉사단 유니폼을 입은 학생들이 쭈욱 도배를 했는데, 이 녀석들이 시작부터 끝까지 비매너로 일관해서 울컥울컥했지만, 그래도 화 안 내고 무사히 버티며 비행. 시간이 이른 곳에서 덜 이른 곳으로 가자니 계속해서 낮이다. 물론,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는 5시 경이었지만 무척 어둡기는 했다. 암튼, 의자를 조금 뒤로 미는 것만으로 계속해서 석양을 볼 수 있었다던 어린왕자 생각이 잠깐~
저녁 기내식엔 간식으로 '오예스'가 나왔다. 어찌나 반갑던지. 인증샷 찍을 생각을 미처 못했구나. 내릴 때 담요랑 쿠션 들고 가지 말라고, 자기들 재산이라는 방송이 나왔다. 이곳 한국말 더빙은 시작할 때 '안녕하십니까'와 마지막의 '감사합니다' 외에는 알아들을 수가 없다. 저게 한국말이긴 한데 해독 불가...
모스크바 국제 공항은, 우리나라 시골 시외버스 터미널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보안은 너무 철저해서 허리띠, 시계, 신발까지 다 벗고서 통과해야 했다. 분위기 살벌...
보딩 타임은 아무 방송 없이 가볍게 40분 넘겨주시고(돌아올 때는 1시간 지연..ㅜ.ㅜ), 공항에서 비행기까지 가는 동안 잠시 러시아 칼바람을 맞았다. 춥긴 춥구나. 걱정했던 공항 안은 무척 더웠는데...
모스크바에서 이집트로 가는 비행기는 비교적 한산했다. 내 옆으로 서양 여자분이 앉았는데 이집트는 처음이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 다음에 빠르게 뭐라뭐라 하는 소리가....
아, 또 다시 알아먹을 수 없는 소리... 침묵은 도도히 흐르고....ㅜ.ㅜ
카이로 국제 공항에 도착해서 입국 심사를 받는데, 비자 없다고 퇴짜 맞았다. 친구 말이 도착해서 받음 된다고 했는데 어디서 받는 건지는 모르겠다. 친구한테 전화를 하려던 찰나 비자 사는 곳 발견! 그 자리에서 15달러를 내고 비자를 샀다. 이건 편하구나!
이쯤 되면, 비행시간 14시간 + 1시간. 대기 시간 3시간 + a
게다가 짐이 워낙 무거웠으니 거의 초죽음 상태였다. 친구와 감격적인 상봉을 짧게 마치고 대기시켜놓은 택시 타고 친구 집으로 고고씽.
40분 정도 달렸던가? 친구의 아파트는 6층이지만, 이곳은 1층을 그라운드(G)로 표시하기 때문에 5층을 눌러서 올라간다. 여긴 엘리베이터 바깥에 문이 하나 더 있어서 여닫이로 먼저 열면, 자동으로 미닫이가 닫힌다.
짐부터 풀고, 전달식을 마치고, 나 씻는 동안 친구는 김밥 재료를 만들고, 그 사이사이 나는 수다 떨고~
그리고 그곳 시간으로 새벽 2시 넘어 잠들었다. 한국 시간으로 아침 9시이니, 나로서는 정말 긴 하루를 보낸 셈.
아파트가 넓어서 방을 각자 썼다. 널찍한 방에 혼자 자면서 침대 떡하지 차지하니 참 편하더라. 전기 장판이 너무 뜨거워서 자다 깨기를 반복한 게 흠이지만...
그래서 다음 이야기는 본격 첫 여행지, 피라미드 되시겠다. ^^
(사진 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