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때 봤었던 애니메이션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다시 이 영화를 보고자 했던 것인가? 저번 토요일(3월 14일)에 이문세씨의 라디오 프로를 듣던 중에 알라딘을 맛깔나게  이야기해주는 것을 듣고 다시 봐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이 명작을 보게 되었다. 과연 15년이나 지난 지금 보는 느낌은 어떨 것인가?

 

  과연 명작은 명작이었다. 지금 봐도 전혀 유치하거나 어색하거나 하진 않았으니까. 또 다시 보고 싶을 정도로 너무나 좋았다. 이 안에도 어떤 요행수를 바라는 인간의 모습이나 사랑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극히 단순한 인간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긴 했지만, 그것 외에도 더 깊이 있는 내용이 있었다.  

 

  인간은 과연 만족을 아는 존재일까? 이건 나의 오랜 생각 거리다. 99개를 가진 사람은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1개만을 가진 사람 것까지 차지하려 한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던가? 과연 그게 인간의 본성이란 말인가? 그런 욕망을 제어할 수 있는 길이란 없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럼에도 난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욕망의 노예가 되어 사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으니까. 어쩌면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부익부 빈익빈의 부조리한 사회의 모습을 보다보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이 영화를 본 것이다.

  여기에는 두 사람이 나온다. 물론 많은 인물들이 나오지만 이야기의 두 축을 구성하는 두 인물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가도록 하자.

 



  가운데 있는 사람이 궁전의 총리 대신인 '자파'이며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이 영화의 주인공인 '알라딘'이다.

  우선 알라딘부터 이야기를 해볼까. 알라딘은 순수한 사람이다. 가난하긴 해도 희망을 지니고 있고 돈을 쌓아두는 것보다 그저 한끼 때울 수 있으면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 자기의 한 끼의 식사마저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쯤 되면 우린 알라딘의 욕망이 참 건전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욕망의 노예로 살긴커녕 어느 정도가 되면 절제도 가능할 거란 기대를 하게 되는 것도 이 시점에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가 지니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지니에게 말한다. "나는 두 가지 소원만 말하고 나머지 하나는 너를 위해 쓰겠어"라고 말이다. 그 말은 곧 그에게 자유를 주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정작 두 가지 소원을 말하고 난 다음에 그와 같은 상황이 닥쳤을 때 알라딘의 반응은 어땠나? 두 말하면 잔소리다. 그는 자신의 순수한 마음에서 나왔던 스스로의 약속을 져버렸다. 어느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욕망의 화신이 되어 욕망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바라던 모든 일을 이뤘지만, 여전히 모든 게 불안하다보니 지니를 놓아줄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나니 알라딘의 모습에 우리들의 모습이 겹쳐진다. "나 1억만 모으면 정말 행복할 거 같아. 그 때쯤 되면 아무 걱정 없이 내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아야지."라고 말하며 악착 같이 돈을 모은다. 그 때까지만 해도 순수한 욕망 그대로다. 하지만 정작 그게 이루어지고 난 다음엔 어떠 하던가? 혹여나 누가 이 돈을 가져가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돈을 가만히 놀리면 그 가치가 줄어들기 때문에 어떻게든 재투자하여 좀더 많은 수익을 얻으려 한다. 애초의 마음 따위는 온데 간데 없다. 어느 순간 자신은 돈을 위해 살아가는 하인이 되어 있을 뿐이다. 욕망의 하인이 되는 순간, 자기의 삶은 없어진다. 결국 알라딘은 모든 것을 잃었던 것처럼 우리 또한 그런 악순환에서 예외일 순 없을 것이다.  

 



  두 번째로 얘기해야 할 사람은 '자파'다. 그는 애초부터 욕망의 화신이었다. 권력욕 하나로 이 영화에서 악역을 자처한다. 과연 그런 그에게선 어떤 욕망의 구도를 발견할 수 있을까? 그는 램프를 손에 넣고 소원을 빈다. '나라의 왕이 되게 해달라'는 것. 그 소원은 자파의 가장 큰 소원이다. 당연히 그 소원 한 가지로 그는 모든 소원을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만족하며 거기에서 멈출 수도 있는 거였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이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무언가가 이루어지는 순간, 그건 시시한 무엇이 되어버린다. 새로운 욕망이 싹트는 거다. 그는 다른 소원을 또 빈다. '강력한 마법사가 되게 해달라'. 세상의 모든 것을 자신의 맘대로 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세상을 맘대로 한다. 이 얼마나 매력적인 능력인가? 하지만 그는 거기에서도 만족하지 못한다. 아무리 강력한 마법사가 되더라도 죽음을 피해갈 순 없고, 지니의 전지전능에 비하면 한 수 아래니까.이건 순전히 누군가와의 비교의식에서 나온 욕망일 뿐이다. 그의 욕망은 끝이 없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 소원을 빈다. '지니가 되게 해달라' 이 소원을 통해 우린 인간의 욕망을 들여다볼 수 있다. 인간의 욕망은 남과의 비교의식에 머물러 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남보다 많이'를 외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욕망 자체가 이루어질 수는 없다. 어느 면에서건 나보다 뛰어난 사람은 꼭 있게 마련이니까. 그렇기 때문에 어느 순간에 인간은 욕망의 하인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욕망의 무한 팽창을 위해 자신의 삶을 버려가면서까지 충성 봉사한다. 지니가 된 자파는 결국 램프에 갇히는 꼴이 되고 만다. 가장 전지전능한 신이 되었으면서도 램프에 갇혀 욕망의 하인이 된다는 설정은,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면 인간이 어떻게 될 수 있는지를 시각적으로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인간에겐 희망이란 없는 것인가? 욕망의 하인이 되어 그렇게 삶을 저주하며 살 수밖에 없다는 말인가? 이렇게만 말한다면 얼마나 힘 팽기는 일인가? 인간의 인생은 비극일 뿐이라는 이야기인데. 그런데 이 영화의 미덕은 그런 욕망의 배치를 드러내면서도 그 해결책까지 보여주고 있다는 데에 있다.  그 해결책은 뭘까? 어렵다고.... 너무 머리 굴리지 마라. 애초에 욕망이란 무엇이란 것을 말하지 않았던가? 순수한 욕망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그게 불행이 되는 까닭은 남과의 알량한 비교의식을 통해 변질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배치를 바꾸면 된다. 순수한 욕망이 되도록, 남과 비교하지 않도록 자신만의 장점과 자신만의 가치를 키우는 거다. 알라딘은 결국 다시 돌아와 자파를 램프에 가두고 모든 것을 원래 모습으로 돌려 놓는다. 그리고 그는 지니에게 마지막 소원을 말한다. 이 때의 장면이 소름끼치도록 새롭게 와닿았다. 가슴이 뭉클했다. 과연 그는 어떤 소원을 빌까? 공주와 결혼하기 위해선 당연히 다시 왕자가 되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어야 한다. 왕자만이 공주와 결혼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는 더이상 자신의 욕망을 위해 소원을 빌지 않는다. 더이상 그런 욕망이 필요치 않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왕자인척 하던 자신의 모습이 거짓임을 알았던 거다. 거지이지만 순수한 자신의 모습이 자신에게 더 맞고 더 행복하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그런 자아존중감이 충만해진 그였기에 욕망을 위한 소원을 빌지 않고 '지니'를 위한 소원을 빌 수 있었다. 욕망의 하인이 된 순간 불행이 그를 휩싸고 있었지만, 그가 그 욕망을 제어할 수 있게 되는 순간 그는 환희에 찬 미소를 띄울 수 있었다. 얼마나 가슴 뭉클하도록 아름다운 장면이었던지. 내 얼굴에 미소가 가득 띄어질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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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시인의 사회
N.H 클라인바움 지음, 한은주 옮김 / 서교출판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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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우연하게 보게 된 책이다. 알라딘이란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었다. 거기에 '지니'가 나오는데 그 익살맞은 목소리가 얼마나 매력적이던지. 그래서 누가 그 목소리를 내는지 찾아봤다. 그랬더니 Robin Williams라지 않은가~ 그래서 그가 나온 영화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굿윌 헌팅'이나 '죽은 시인의 사회'란 영화가 전면에 떴다. 이름을 한 번정도는 들어본 영화다. 그 중 '죽은 시인의 사회'란 영화는 이미 예전에 친구가 DVD를 빌려줘서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끝까지 다 보진 못했다. 그 때 다른 할 일이 있던 탓에 거기에 집중할 수 없었으니까. 그 때로부터 한참이 지난 지금 다시 이렇게 제목을 접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다시 보기로 맘먹은 거다. 하지만 막 찾아보니, 원작은 소설이라지 않은가? 그래서 영화를 먼저 보기보단 소설을 먼저 읽기로 했다.
 

  보는내내 머리 속을 스쳐가는 광경이 있었다.

 



  바로 이들이다. 일제 교사에 대해 학생들의 권리를 존중해줬다고 해서 해직된 교사들의 모습이다.  자신의 교육적 신념을 펼치기라도 하면, 그게 지배층의 생각과 다를 때엔 여지 없이 짤릴 수도 있다. 이 땅에 키팅 선생님의 모습은 더욱 요원하게 느껴진다. 지금껏 그래왔듯이 자신의 기득권만 챙기면 되고 아이들에겐 생각할 수 있는 힘을 일깨워줄 필요가 없이 국가의 하수인, 지배층의 하수인이 되도록 하기만 하면 된다. 어쩌면 그게 학교란 제도가 생긴 태생적인 문제점인지 모르겠다. 학교는 국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우매한 국민을 만들기 위한  기관에서 출발했으니까. 그래서 학교는 정신병원, 교도소와 같은 맥락으로 분류되곤 한다. 1950년대 미국과 2009년의 한국, 그 사이엔 59년이란 시간의 흐름이 있지만, 그 흐름이 무색할 정도로 둘의 모습은 똑같았다.

 

학생은 학교의 명예를 위해, 부모의 희망을 위해 복종하는 존재에 불과했다. 세상이 유포한 거짓말. '일류대학교에 가서 사 짜 돌림의 직책을 갖게 되면 떵떵거리며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다'는 것.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고 있으니 거짓말은 아닌 셈이다. 하지만 그 안에 자신은 없다. 오로지 명예욕과 권력욕의 화신이 된 자신이란 껍질만 있을 뿐. 1%의 영광을 위해 99%는 암울한 현실을 묵인하며 살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런 현실을 대하며 부모들은 뭐라고 아이들을 채찍질 하던가. "다 너를 위해 그러는 거야. 그래서 나도 이렇게 희생하고 있으니까. 아빠말 거역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갈 생각만 해!".  아이의 꿈과 주체성을 짓밟으면서 기껏 한다는 소리가 '다 너를 위한' 것이란다. 그렇다면 정말로 묻고 싶다. 정말 그런 밀어붙임 속엔 아버지의 욕망 같은 건 들어있지 않은 건가요???? 이쯤에서 페리(닐의 아버지)의 말을 한 번 들어보자 "일단 의대를 졸업해라. 그리고 나서 하고 싶은 일을 해도 늦지 않는다. 그 땐 네가 무슨 일을 하든 아무 상관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 전까지는 내가 하라는 대로 해!(38p)" 이 말이 나중에 그가 의사가 된 후에 지켜질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말에 반대해서 얘기했다간 한 대 맞을 각오를 해야 한다. 아주 깔끔하게(?) 명령조로 이야기 하고 있지 않은가! 아버지의 강압적인 지배 욕망이 펄펄 살아 꿈틀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키팅은 그렇게 희망 없이 살아가던 아이들에게 한마디를 해준다. 'Carpe Diem' 바로 오늘을 즐기라는 것. 그러면서 시를 들려준다. '장미꽃 봉오리를 따려면 바로 지금이니/ 언제나 시간은 쉼없이 흐르고 /오늘 이렇게 활짝 핀 꽃송이도/ 내일이면 시들어지고 말지어라.' 지금 이 순간만 있다는 이야기다. 내가 정작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지금 해야 한다는 소리다. 미루는 순간, 그건 아무 것도 아닌 자기 기만으로 남을 뿐이다.  카르페 디엠의 정신은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 이 순간을 긍정하며, 내가 정작 무엇을 어떻게 하고 싶은지 알려는 투철한 자기애의 정신. 키팅의 교육관은 "교육이란 스스로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184p)" 이다. 그는 아이들에게 자신이 정말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들여다 볼 수 있도록 지도해줬다. 남과 자신을 비교할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독특한 개성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도록 한 부분은 탁월했다. 그 깨우침 덕분에 닐은 자신이 연극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게 되었고 그걸 향해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매진할 수 있었다.

 

  키팅의 이런 지도법은 학생들을 변화시켰다. 이런 변화가 좀 급작스런 감이 없지 않다. 누군가가 내 생각에 같이 공감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아는 까닭이다. 더욱이 자신의 모든 기반을 바꾸는 그런 일에 있어선 더욱 힘들다. 그럼에도 이렇게 빨리 그들이 변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렇다 그들도 이미 자신의 삶이 심하게 꼬여 있음을 눈치채고 있었고 그것을 어떻게든 조금씩 변화시키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이미 불씨는 있었던 셈이니, 거기에 바람이 불거나 기름을 껴얹어만 준다면, 불은 어느새 활활 타오를 수 있는 거였다. 바로 키팅 선생님의 말이 기름 역할을 했음을 볼 수 있다.

  키팅의 지도 방법은 일정 부분 나에게 영감을 주었다. 나 또한 교사가 되어 수업다운 수업을 하고 싶은 사람이지만, 그런 수업을 보지 못했던 탓에 그저 맹목적인 강의식 수업만 하고서 끝내는 경우가 태반이었으니까. 왠지 키팅이 아이들에게 수업하는 광경을 보고 있노라니 베토벤 바이러스의 장면이 떠올랐다. 그만큼 신선하고 흥미진진 했을 것이다.



 이런 이상적이고 감정적인 요소들이 비록 소설이기에, 또는 드라마이기에 가능했다 하더라도 그런 수업시간이 되길 꿈꾸며 늘 노력하는 선생님이라면 나쁘진 않을 것이다.

 

  닐은 연극을 잘 마쳤지만,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로 자신의 꿈이 무너지게 되자 자살한다. 그 후에 어떻게 됐을까? 상식적으로는 그렇게 만든 아버지의 교육관을 탓해야하며 그렇게 아이들을 획일화의 늪에 빠뜨린 학교의 교육관이 욕을 먹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키팅 선생님이 쫓겨나게 된 것이다. 아이들의 말 속에 그 사건의 내막이 잘 드러난다. ' "학교에서는 희생양이 필요할 거야."  "희생양?"  "그래, 이런 사건이 생겼는데 학교 평판이 좋을 리 있겠니? 누군가 책임질 사람을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을 거라고!"   '(토드의 독백) 닐의 죽음은 본인의 적성이나 꿈은 무시하고 억지로 갈 길을 강요했던 그의 아버지와 학교 공통의 책임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반성은커녕 책임을 떠넘길 사람을 물색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는 것이다. 그건 닐 혼자만의 문제로 덮어둘 수는 없는, 어쩌면 그들 모두의 문제이기도 했기에 더욱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258p) ' 그런 내막으로 키팅은 잘렸다. 하지만 그가 교실을 나가는 그 순간에 카메론을 뺀 나머지 '죽은 시인의 사회'의 멤버들은 목놓아 울면서 그를 부른다. '선장님! ,오 나의 선장님!'이라고~

 

  일제고사를 치루며 학생에게 선택권을 줬다는 이유로 8명의 선생님들이 해직되는 비운이 사건이 있었다. 교육당국의 대응은 웰튼 아카데미의 대응과 다르지 않다. 왜 그런 사건이 발생했는지 따지지 않고 희생양을 찾아 그 사건의 본질은 흐려버린 것이니까. 그런데 그 선생님이 떠나가자 아이들은 덩달아 같이 눈물을 흘렸고, 그 선생님이 주는 졸업장을 받기 위해 늦게까지 남았다. 과연 어떤 교사가 진정한 교사인지 교육당국에 되묻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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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서구를 만들다 - 알타미라에서 게르니카까지, 서구 근대를 밝힌 예술 읽기
이순예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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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항상 선택적이다. 내가 기억하는 나는 실제 내 삶에 일어났던 수많은 사건들 가운데 내게 유리한 것들로만 구성되는 기억의 게슈탈트다. (...) 이러한 기억의 선택적 구성을 통해 자기 아이덴티티가 성립된다. 자기를 서술하는 방식이 자기 자신이 된다는 이야기다. '내가 이야기하는 나'가 '나'다. (일본열광 105p)'
  우리가 어떤 사건을 겪고 그걸 이야기 한다고 해보자. 과연 그 이야기가 얼마나 객관적일까? 얼마나 사실 그대로에 근접한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솔직히 이런 질문은 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우리는 외부의 사건을 우리의 시신경을 통해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바로 느낌이 오는 건 아니다. 그걸 걸러내는 기제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뇌를 통해 어떤 사실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결정하고 받아들이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실들은 흐릿한 배경으로 처리되어 아무 의미도 남지 않는데 반해, 어떤 사실은 나의 관념까지 덧씌워져 확실한 이미지로 남는다. 위에 인용해 놓은 구절은 바로 이런 사실을 명확히 보여준다. 어쩌면 사실에 접근하려는 그 마음 자체가 오류 투성이인지도 모른다. 사실에 접근하려 하면 할 수록 진실은  저멀리 나를 비웃듯 멀어질 것이니까. 그런 꼬이고 꼬인 삶의 진실을 보여주는 영화가 있다. 바로 '羅生門'이 그것이다. 
 

라생문(나쇼몬)이란 제목 자체가 생이 꼬이고 꼬였다는 걸 표현해 놓은 걸거다. 그 생의 진실을 알려고 그 꼬인 것을 풀려고 하면 할 수록 더 꼬여 간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어떻게 진실을 담보할 수 있다는 말인가? 사무라이와 아내가 길을 가다가 도둑의 침입을 받아 아내는 겁탈당하고 사무라이는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하지만 그 사건을 보고서 그걸 이야기하는 사람마다 그 이야기는 서로 다르다.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은 빼고 자신만의 관점으로 사건을 풀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진실을 알려할수록 꼬이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사람 수만큼 진리는 존재한다.' 이 말이 괜한 이야기가 아님을 알 수 있는 대목이며 '기억은 항상 선택적이다'라는 말이 제대로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진리가 정말로 있는 줄 알았다. 어느 하나로 귀결되어 갈 수 있는 절대선이 있는 줄만 알았다. 그래서 근대화를 이룬 지금 전근대화란 명칭으로 표현되는 조선 시대 이전을 맹목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 때에 비해 지금은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진보하였으니, 그 때를 비판하는 것을 옳다는 거다. 하지만 이미 위에서부터 살펴보았듯이 진보란 말은 어색하다. 그건 하나의 절대선이 있어 거기에 조금씩 다가간다는 것인데, 애초에 그런 절대선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근접 사물을 보는 능력을 발달시켜 현재와 같은 물질 문명을 이뤘다 하더라도 그건 진보라고 할 수 없다. 그럼으로 해서 자연과 감응할 수 있는 능력을 잃었으며 원거리의 사물도 꿰뚫어볼 수있는 능력은 퇴화되었으니까. 진보와 퇴화, 고로 인간의 진보는 어느 한 면에서만 판단한 것일 뿐이다. 그렇기에 진보라는 이름을 들이대며 현재를 개선해야 한다고, 미래의 행복한 삶을 위해 지금의 불행 쯤은 참고 이겨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속내가 의심해보아야 하는거다 
 

위에 보이는 것은 '라오콘 군상'이다. 라오콘은 트로이 신관이다. 그렇기에 천주교에서 보면 이교도의 사제일 뿐이다. 그런데 이 군상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바티칸 박물관에 있다. 종교적 공간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거다. 이것이야말로 형용모순이지 않나? 좀더 쉽게 말하면 교회 강단 앞에 부처 목상이 올려 있는 거와 같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가? 그것이야말로 해석의 자유가 낳은 정치적 역학 관계의 소산이었던 셈이다. 라오콘은 신들이 합의를 하여 트로이를 없애려 하는 것에 온 몸으로 맞서 거부하다가 저와 같은 고난을 당하게 된 것이다. 바로 그와 같은 인간 정신의 우월함이 종교적 전통과 만나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교도 사제라는 관념은 지워버려도 된다. 바티칸에서 취한 것은 라오콘의 밝게 빛나는 헬레니즘적인 인문정신에 있기 때문이다. 어떤 예술품조차 인간은 '선택적'인 해석만을 덧붙여 자기에게 유리하게 활용하고 있음을 여기에서도 여실히 볼 수 있다.   
 

  이 책에는 예술품이 지닌 미적 속성을 밝히는 책이 아니다. 그 예술을 둘러싼 당대 지배세력의 해석이 어떠한지 살피며 예술이 나아가야할 올바른 방향은 무엇인지 탐구하는 책이다. 예술은 이미 고정된 해석 자체가 없다는 것이며, 단순히 정해진 어떤 진리일 수 없다는 것이다. '라생문'이란 영화에서 그랬듯이 그걸 분석하는 사람들의 자기 관점이나 자기 합리화가 들어 있다는 거다. 바로 그 속내들이 주술이 넘쳐 흐르던 중세를 지나 인문정신이 광채를 발하는 서구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지금껏 우리가 '동양보다 우월한 서양'이라 말할 때의 그 '서양'을 있게 한 원동력이 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따라가고자 했던 서양은 정말 낙원과 같은 세상이었던가? 그건 서양인들 뿐만 아니라 우리 동양인들의 착각이었을 뿐이다. 애초에 진보라는 말이 어색했듯이 좀더 발전했다던 서양은 좀더 타락한 그 무엇일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 결론을 내린다. '예술은 잘 '놀' 때, 자신의 본분에 가장 충실할 수 있다. 놀아야 하는 까닭은, 개념이 문명인의 정신과 세계를 지배하는 것을 저지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416p)' 예술이 그와 같은 하수인의 노릇에서 탈피하여 놀이로 다시 태어날 때 예술의 본래 의미가 살아난다는 것이다. 예술이 인간을 자연과 분리시키고 인식과 몸을 분리시켰을 때, 그 안에서 인간은 고립감을 느끼며 울부짖어야 했다. 바로 그와 같은 현실을 과감없이 드러내어 고립감을 해소시켜줄 수 있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호모루덴스(놀이하는 인간)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니까. 어떤 획일적인 해석들을 지양하고 그 안에서 밝게 뛰어놀 수 있을 때 예술의 본래 의미가 살아 난다. '놀이와 유머, 웃음이 이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 덕목들은 사실 근대 인간들에게 가장 결여된 것이고, 근대의 도덕이 가장 경멸했던 것이다 (이것은 애니메이션이 아니다 [고병권])' 예술을 통해 우린 근대 인간이 잃어버렸던 놀이와 유머, 그리고 웃음을 찾아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우린 누군가의 의지가 깊이 개입된 진보라는 논리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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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진보 전집 - 제2판 을유세계사상고전
황견 엮음, 이장우.우재호.장세후 옮김 / 을유문화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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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시의 난해함은 참으로 공부하는 사람을 힘들게 한다. 평상시대로 해석하면 바로 뜻이 와닿지 않고 그렇다고 이 방법 저 방법을 동원해도 마찬가지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은 저명한 국역본일 것이다. 시에든 더욱이 전고가 많기 때문에 그걸 꿰뚫어 국역해 놓은 국역본의 존재는 더욱 절실하다. 거기에 편집까지 깔끔하게 되어 있어 보기에도 편하다면, 그래서 나날이 보고 싶어진다면 그야 말로 금상첨화일 것이다.  

  바로 이 책이 그런 바람을 이루어 놓은 책이다. 이미 고문진보 후집 리뷰에서 말했다시피, 거기에서 언급했던 장점들을 이 책도 고스한히 다 가지고 있다. 그래서 여기서 더 부연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찌 되었든 이 책도 한문을 좋아하고 한시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보아야 할 책인 것만은 분명하니 말이다.  

  한문학도라면 가지고 있어도 전혀 후회 없는 책일 것이다. 맘껏 소장하여 그 책읽는 즐거움에 빠져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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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진보 후집 - 제2판 을유세계사상고전
황견 엮음, 이장우.우재호.박세욱 옮김 / 을유문화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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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한문학도에게 필수인 책이다. 책의 두께도 두께지만 그걸 편집해 놓은 정성이 대단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외에도 좋은 변역서들은 많다. 고전의 명작들을 모아놓은 책이다보니 자연히 책이 범람할 수밖에 없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책을 볼 것인지 고민해보는 것도 당연하다.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첫째, 편집이 깔끔하게 되어 있다. 이 점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책의 편집은 책의 내용 못지 않게 중요하다. 아무리 내용이 훌룡해도 그게 산만하게 편집되어 있으면 다시 보기 싫어지니까. 더욱이 이 책은 한문학도라면 두고두고 보아야 하는 필독서이다. 그런데 한 번 보고선 다시 보기 싫어진다면 그와 같은 낭패가 또 어디 있을까. 원문을 한 줄씩 끊어 바로 옆에 해설을 달아 놓은 점은 참 탁월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주까지 상세히 달아 의심나는 부분을 풀어놓은 점도 탁월하고 말이다. 그렇게 하다보니 페이지수가 엄청 늘어나버린 감도 없지 않지만 그 두둑한 두께는 오히려 책의 가치를 표현해주는 것이 아닐까.  

  둘째, 국역의 우수성이다. 흔히 보는 책이 전통문화연구회에서 나온 고문진보 국역본일 거다. 물론 그 책도 국역이 잘되어 있는 책 중에 하나임에 분명하지만, 이 책은 그 책의 단점들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더욱 현대어에 가깝게 국역이 되어 있기 때문에 의미도 더욱 분명하고 뜻도 바로 바로 와닿는다. 바로 이 책을 한 권 제대로 읽고 해석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한문 실력은 비약적으로 상승할 수 있을 것이고 우리말의 묘미 또한 제대로 살릴 수 있게 될 것이다.  

  한문학도에게 이 책은 필요한 필독서이니만치 하나 정도 소장하며 두고 두고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단점이라면 이미 첫째 장점에서 말했듯이 책이 두꺼워 가지고 다니며 보기엔 꽤 무리가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어느 한 군데서 진득하니 볼 수 있는 사람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과거의 좋은 문장들을 내 것으로 만들어 지금의 우리의 언어와 사고로 맘껏 자기화 해보자. 그 곳에 한문의 묘미가 숨어 있으니까. 한문학도들이여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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