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산공동체학교 -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살아있는 교육 17
윤구병.김미선 지음 / 보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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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하는 그대, 청춘이어라

대학교 도서관을 둘러본다. 방학인데도 도서관 자리는 꽉 차있다. 무엇을 위해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걸까. 이들에게 방학이란 무슨 의미일까. 예전엔 농활을 가거나 여행을 떠나는 친구를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대학생들은 더 이상 그러지 않는다. 정해진 루트에서 벗어나는 일은 꿈도 못 꾸며, 기득권 체제에 빨리 합류하기 위해 스펙을 쌓고 시험공부에 열중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들의 표정은 굳어있고 좀비가 걸어가듯 흐느적거리며 걷고 말엔 음산한 기운이 감돈다. 이들은 애늙은이.



공부한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왜 공부하는지 모르는 게 문제다

예술회관을 둘러본다. 여기저기 흩어져 농악을 배우고 있는 노인분들이 보인다. 장구를 배우기 위해 찾아왔다는 할머니는 진즉부터 오려고 했는디. 사느라 바빠서 여지껏 미루다가 인제 왔당게라고 말씀하신다. 할머니 얼굴엔 낯선 공간에 대한 긴장과 함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되었다는 기대감이 엿보인다. 강사의 지도에 따라 연신 장구를 쳐보지만 도무지 손이 따라주질 않는다. 그래도 할머니는 한마디 불평도 없이 덩기덕 쿵더러러러 쿵기덕 쿵덕이란 가락에 맞춰 신나게 두드린다. 몸 따로 맘 따로지만 할머니의 모습에선 열정이 느껴진다. 할머니는 청춘이다.

흔히 청춘이라는 단어는 나이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위의 예에서 보듯이 청춘은 나이와 아무 상관없다. 삶을 고민하고, 자신의 욕구를 충실히 표현하며 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청춘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꿈이 이루어지든, 이루어지지 않든 상관없다. 불타오르는 열정으로 부딪히며 나아갈 때, 우린 젊어지기 때문이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느 기간이 아니라 마음가짐을 말한다

장밋빛 볼, 붉은 입술, 나긋나긋한 무릎이 아니라

씩씩한 의지, 풍부한 상상력, 불타오로는 정열을 가르킨다.

인생이라는 깊은 샘의 신선함을 이르는 말이다.



청춘이란 두려움을 무리치는 용기,

안이함을 선호하는 마음을 뿌리치는 모험심을 의미한다.

때로는 20세 청년보다는 60세 인간에게 청춘이 있다.

나이를 더해가는 것만으로 사람은 늙지 않는다

이상을 버릴 때 비로소 늙는다.



세월은 피부에 주름살을 늘려가지만

열정을 잃으면 영혼이 주름진다.

고뇌, 공포, 실망에 의해서 기력은 땅을 기고 정신은 먼지가 돼버린다.

60세든 16세든 인간의 가슴 속에는

경이에 이끌리는 마음,

어린애와 같은 미지에 대한 탐구심,

인생에 대한 흥미와 환희가 있다.

우리 모두의 가슴에 있는 무선 우체국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하느님으로부터

아름다움, 희망, 격력, 용기, 힘의 영감을 받는 한

그대는 젊다.



영감이 끊기고, 영혼이 비난의 눈으로 덮이며

비탄의 얼음에 갇힐 때

20대라도 인간은 늙지만,

머리를 높이 치켜들고 희망의 물결을 붙잡는 한,

80세라도 인간은 청춘으로 남는다.

청춘사무엘 울만







청춘되기의 힘겨움

그러나 아무리 청춘이 좋다고 해도, 자신의 열정만 믿고 함부로 나갈 수는 없는 법이다. 보통 사람으로 살기도 힘든 세상에, 일부로 불협화음을 만들어 내면서까지 해야 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뭔가 특이한 사람을 보면 사람들은 괜히 분란 일으키지 말고, 그냥 남들 하는 대로만 살아. 니가 아무리 그렇게 발버둥 쳐도 세상은 변하지 않아라고 말하며 체념하게 만든다. 이런 핀잔을 듣노라면, 아무리 의지가 강한 사람이라도 주눅 들어 의기소침해질 수밖에 없다. ‘청춘애늙은이로 만드는 사회다. 이렇듯 청춘은 그냥 얻어지지 않는다. 끊임없는 질문과 고민들 속에서 주체를 세우고 허무주의와 맞서 싸울 때 비로소 얻어지는 것이다.





청춘 윤구병의 이야기

교육자라고 해서 모두 다 청춘일 순 없다. 아무리 의식 있는 교육자라해도 학교라는 공동체에 들어가는 이상, 조직이 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학생을 위하고 소통하는 교육을 하고 싶어도 현실 교육 여건은 그러한 의지를 매번 꺾는다. 그런 식으로 여러 번 좌절하다보면, 예전에 가졌던 생각은 흐려지고 어느덧 학생을 억압하거나 방치하는 교사가 되는 것이다. 교육 조직에서 초심을 지킨다는 것은 외줄 타기만큼 힘들다.



윤구병 선생님의 실험학교 이야기

하지만 윤구병 선생님은 너끈히 외줄타기를 해냈다. 제도교육기관이 지닌 문제점을 보며 실험학교 이야기를 펴낸 것만으로도 자신의 열정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도 막상 행동은 하지 못하고 생각하는 단계에서만 그친다. 자신이 누리던 것을 포기할 수 있는 결단력, 자신의 생각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는 확신, 사회와 사람이 가하는 유언무언의 압박을 견뎌낼 수 있는 저력 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학교수직만 유지해도 편하게 살 수 있는데 무엇 하러 고난의 행군을 자처한단 말인가. 그런데 윤구병 선생님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한 발짝 더 나갔다. ‘청춘윤구병의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결단에서부터 시작된다.



윤구병 선생님, 참 잘 생기셨다~



삶터일터배움터가 하나인 변산공동체학교

그는 자신의 생각을 펼칠 공간으로 변산을 택한다. 산살림, 들살림, 갯살림을 모두 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변산에 내려와 몸에 익지 않은 농사를 지으며, 공동체를 이루어 간다. 공동체엔 당연히 어린 아이들이 있게 마련이다. ‘변산공동체학교는 바로 이런 아이들을 교육하기 위해 만든 곳이다. 과연 제도권 학교와 다른 점은 무엇일까?

이 학교의 교육 목표는 단순하다. ‘스스로 제 앞가림 할 힘함께 살 힘을 기르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단순한 목표 속에 제도권 교육을 비판하는 날카로운 비수가 숨어 있다. 제도권 교육은 적게는 12년 동안, 많게는 20년 넘게 사람을 붙잡아뒀으면서도 자신의 앞가림도 못하는 인간을 만들어냈다. 그 뿐인가. ‘엘리트 한 사람이 99명을 먹여 살린다는 허황된 논리를 앞세워, 한 사람을 위해 99명이 들러리 서게 했으며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게 만들었다. 앞가림도 못하고 서로를 불신하게 만드는 제도권 교육을 보며, 윤구병 선생님은 위와 같은 목표를 내세운 학교를 만든 것이다.



첫째는 시간문제입니다. 어떤 생명체든 살아남기 위해서는 제 삶의 시간을 스스로 통제할 힘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이 점에서는 식물, 동물, 하다못해 미생물까지도 예외가 없습니다. 싹트고 꽃피고 열매 맺을 시간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식물이 어떻게 제힘으로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요즈음 우리 사회가 아이들에게 저지르고 있는 짓을 보십시오. 부모들이나 교육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나 모두 아이들이 걸음마와 옹알이를 제대로 익히기 전부터 아이들 시간을 뺏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아이들을 정신적으로 집단 학살할 정도로 극한에 이르는 집단 학대를 교육의 이름으로 부끄러움 없이 버젓이 저지르는 사회에 무슨 미래가 있겠습니까? 스무 해가 넘도록 시간 단위로 다른 사람에게 통제당하고, 기계적인 시간 계획에 길들여진 사람에게 스스로 제 앞가림하는 힘을 기대하는 것은 삶은 밤에 싹 돋기를 기다리는 것만큼이나 부질없는 노릇입니다. 둘째로 함께 사는 힘은 무한 경쟁 체제에서는 절대로 길러질 수 없습니다. 윤구병 pp 24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방식과 다른 시간표를 짤 수밖에 없다. 제도권 교육은 주요 교과 위주의 이론교육을 중시한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교육 내용이 삶과 괴리되어 현실에서 아무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배우면 배울수록 창의력은 말살되고 수동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그래서 이 학교는 오전엔 정보 교육이라는 이론 수업을 하고 오후엔 노작교육이라는 활동 교육을 한다. 정보교육 시간엔 주요 교과 뿐 아니라(물론 국영수 위주로 구성되어 있지도 않다) 삶에 직접 필요한 과목들을 배우게 된다. 선생님들은 농사를 지으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생활인이다. 전공자는 아니지만, 대안교육을 고민했던 분들이고 아이들을 누구보다 잘 아는 분들이기 때문에 아이들 수준에 맞춘 교육을 할 수 있다. 노작 교육 시간에는 집짓기, 천연염색, 발효식품 등을 만든다. 일과 앎, 그리고 삶을 일치시키는 교육을 통해 진정한 공부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며, 자신을 앞가림할 수 있는 유형무형의 지식을 몸으로 배우는 것이다.



삶터, 일터, 배움터가 하나인 변산공동체학교

이곳은 방학 때면 자율학습이란 미명의 보충수업이 아닌, ‘계절학교를 연다. 45일간 진행되는 이 행사의 주제는 놀다 죽자!’.(이렇게 선정적인 주제(?)를 전면에 내걸 수 있는 이 학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계절학교의 시간표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맘껏 놀 수 있도록 날짜별로 장소만 달리 했기 때문이다. 갯벌, , 산으로 장소를 이동하여 놀 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해져 있지 않다. 그러니 아이들은 장소에 맞게 여러 놀이를 만들어 맘껏 놀면 된다. 자연 속에서 한껏 어우러지며 놀다 보니, 자연히 자연 속의 인간’, 즉 생태학적인 관심이 생기는 것이다. 생태학이란 구호도 이론도 아니다. 자연과 나와의 연관 속에서 나를 사유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자연과 나는 하나이므로 계절학교에선 똥을 그냥 버리지 않고 거름으로 재활용한다. 이 때문에 도시환경에 익숙한 아이에겐 큰일보는 게 여간 큰일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더 큰일은 따로 있다. 막상 시간과 장소가 주어졌는데 놀 줄 모른다는 게 문제다. 한 번도 놀아본 적이 없는 아이에게 맘껏 놀라고 하니, 어떻게 해야 하는 줄 몰라 두리번거린다고 한다. 이건 돈벌이와 돈벌이를 위해 쉬기만을 반복하는 어른의 모습과 똑같다. 하긴 그런 어른에게서 배운 아이들이니 오죽할까. 그런데 신기하게도 놀지 못하던 아이가 시간이 지나 환경에 익숙해지면 그렇게 신나게 뛰어놀 수가 없다는 것이다. 호이징가(Huizinga)호모루덴스라는 이론을 빌리지 않더라도 인간은 본능적으로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교육이란 이름으로 이와 같은 본능을 억누르게 만들지나 않았는지 돌아보게 되는 순간이다. 이렇게 본능에 충실하게 맘껏 놀아본 아이들은 커서도 신나게 놀 줄 알며 자신의 창조적 역량을 발휘할 줄 아는 어른이 될 것이다. 밑의 글은 저자의 계절학교 체험평인데, 계절학교의 가치가 잘 드러난 것 같아 발췌해 둔다.



45일의 경험을 안고 아이들은 저마다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아이들은 이곳에서 죽어도 못 먹을 것 같은 것을 먹었다. 또 게임기 없이 못 살 것 같았는데 게임을 안 하고도 재미있게 놀 수 있었다. 물에 빠지거나 옷이 더러워지는 것이 불편하고 싫었던 아이는 막상 해 보니 재미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만으로도 변산 여름 계절 학교가 있어야 할 까닭은 충분해 보였다. 김미선 pp 231



변산공동체학교의 여름캠프. 놀다죽자!



변산공동체학교에 바라다

그런데 아무리 변산공동체학교가 남다른 학교라고해도 완벽한 곳은 아니다. 체계를 잡아가는 과정에서 삐걱거리기도 했고 아이들에게 제대로 교육해주지 못할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변산공동체학교가 보완해야 할 점은 무엇이 있을까.

첫째, 제도권 교육의 좋은 점마저 계승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우리 아이들이 학교 교육 체제 속에서 자라면서 겪는 가장 큰 손실은 어려서부터 스스로 시간을 통제하는 법을 익히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유치원 교육에서 대학 교육에 이르기까지 제도 교육 기관은 아이들이 제힘으로 자기 적성과 취미, 그리고 삶의 리듬에 맞추어 시간을 통제하고 조절할 기회를 조직적으로 빼앗습니다. 어떤 아이는 그림 그리는 것이 좋아서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그리고 싶어 하지만 끝나는 종이 울리면 붓을 놓아야 합니다. 그 다음 시간은 수학 시간인데 이 아이는 수학이 적성에 맞지 않아 50분이나 이어지는 수업 시간 동안 대부분 한눈을 팔거나 딴전을 피우면서 때웁니다. 이렇게 학교에 가서 마칠 때까지 다른 사람이 조각조각 빈틈없이 짜 놓은 시간의 틀에 맞추어 10년 넘게 살다 보면 아이의 지적 능력도, 감수성도, 행동 양식도 모두 기계처럼 되어 무엇인가 저 나름으로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윤구병 pp 42



학생의 개인 능력에 맞지 않는 교육과정이나 촘촘히 짜인 시간표 때문에 수동적인 인간이 된다는 비판은 적절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도권 교육이 무조건 잘못됐다고 할 수는 없다. 비판할 부분은 비판하되, 좋은 점은 무엇인지, 아이들에게 유용한 부분은 없는지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 제도권 교육의 장점은 어떤 지식에 대해서는 짧은 시간에 확실하게 가르쳐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현실에 필요한 지식 중에 어떤 것은 강의식 수업을 통해서 전해주는 게 더 효율적인 것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어느 것을 가르칠지 교사학생학부모가 모여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둘째, 정보교육이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제도권 교육이 이론 교육만을 중시하여 폐해를 키워왔으니, 대안 교육은 반대의 노선을 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노작교육을 전면에 내세운 것은 그래서 타당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정보 교육 자체를 너무 홀대한다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학벌 사회이기 때문에 정보 교육을 강화하자는 얘긴 아니다. 단지 앎과 삶이 일치되는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앎도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빈민가에서 인문교육을 했던 얼 쇼리스(Earl Shorris)의 이야기는 참고해볼만 하다. 학문이 개인의 성장을 위한 것이라면, 그러한 단계에 오르기까지 많이 연구한 사람의 도움닫기도 필요한 법이다. 생각하는 방법, 고민하는 법을 배운 사람만이 다른 삶을 생각해볼 수 있고,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있다.



(가난하고 소외되어 희망이 없는 사람들에게) 왜 우리가 여기서 인문학을 해야 하는가. 그것은 여유와, 절실함, 모두의 문제이다. 만약 당신이 다르게 살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거나 갖고 싶다면, 만약 당신이 지금과 다르게 살기를 간절히 바란다면, 당신은 인문학을 할 수 있고, 해야 한다. 추방과 탈주pp 148



위 글에서는 인문학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그걸 정보교육이라고 바꾸어도 무방하다. 앎과 삶이 일치될 때, 모든 지식은 인문학적 지식이 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와 같은 교육을 할 수 있는 교사를 모집하여 제대로 된 정보교육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아이들의 의식이 자라며,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셋째, 학생 수가 적다는 것이다. 학생 수가 적으면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 한정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사람과 관계 맺는데 어려움을 느끼거나 사고가 경직될 수도 있다.



변산공동체학교 아이들의 불만 가운데 하나는 같이 공부하고 놀 친구가 없다는 것이다. 변산공동체학교에는 변산에서 농사짓는 집 아이들만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러니 가뜩이나 사람도 없는 농촌에서 변산공동체학교에 오는 아이들 수가 적을 수밖에. 김미선 pp 105



변산공동체학교는 보통 10명 내외의 학생들이 공부하는 곳이다. 그러니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더 크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변산공동체학교의 학생을 전국적으로 모집하여 정원을 늘리거나(실제로 2009년엔 전국적으로 30명을 모집했다고 한다), 계절학교를 다른 대안학교와 함께 실시하여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장으로 활용하는 방법 등이 그것이다. 물론 이럴 경우에 변산공동체학교만의 기치가 흐려질 위험도 있고, 다른 대안학교와의 관계도 신경을 써야 한다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학생에게 다양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회를 선물한다는 의미에서 해볼만 하다고 생각한다.

넷째, 경험의 범위가 너무 작다는 점이다. 사람은 하나의 가치만으로 살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경험과 다양한 관점을 경험해 보면서 자신의 가치를 찾아가야 한다. 그런데 이 곳은 도시생활에 대한 반감 때문에 오로지 농촌문화, 농촌적 가치만을 가르치려 한다. 아무리 좋은 가치관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깨달음 없이 그것만을 강요받을 때 사람은 수동적인 인간이 되기 쉽다. 도시적 삶도 살아보고, 피상적으로 관계 맺는 것도 경험해 보며, 서열에 따라 자신의 가치가 정해지는 것도 경험해 보면서 자신만의 가치를 찾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것 또한 세상의 일면이기 때문이다. 이 학교의 목표는 온실 속의 화초를 기르기 위한 것이 아닌 자신의 앞가림을 할 수 있는 사람을 기르기 위한 것이기에 풍부하게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





청춘이 청춘을 기름



나는 교육이란 청춘이 청춘을 양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사 또한 어느 지식 체계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질문하며 변해야 하고 학생 또한 기존 지식 체계를 허물고 자신만의 길을 고민하며 변해가야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가르침을 주고받으며 함께 길을 나서기 때문에 師友(스승이자 벗인 관계)’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사는 언제고 청춘이 되어야 하며, 학생도 청춘의 파릇파릇한 열정을 지녀야 한다. 교육을 이런 식으로 정의할 수 있다면, 제도권 교육은 늙은이애늙은이를 키워내는 것이라 할 수 있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제도권 교육은 교육이라기보다 훈육이라고 표현해야 맞다.

변산공동체학교는 교육을 하는 곳이다. 비록 여러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에서 아이들에게 교육의 정신이 제대로 이해되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가능성은 확인했다고 생각한다. 지금부터 이 학교가 본래의 목표를 달성하느냐 하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공동체를 이룬 사람들의 청춘이 되고자 하는 마음과, 이 학교를 이끄는 사람들의 청춘이 되고자 하는 마음의 합치 여부에 달려 있다. 앞으로도 이 학교가 더욱 발전하여 자기 앞가림 할 힘함께 살 힘을 두루 갖춘 청춘들을 많이 배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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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
공지영 지음 / 오픈하우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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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멋 들지 않고 허황되지 않으며 허영심 없는 담백한 삶을 살고자 하는 이유는 행복하게 살고 싶기 때문이다. 남의 이목에만 신경 쓰느라 내 안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에는 무뎌지고 사회가 정해놓은 길을 따라가느라 내 욕망은 억압한다. 온갖 것들로 치장하고 있지만 난 나라고 할 수 없는 빈껍데기일 뿐이다. 그런 삶을 지속한들 남는 것은 난 왜 이렇게 살고 있지?’하는 신세 한탄뿐이며 현실에 대한 불안, 미래에 대한 불안일 뿐이다. 거적대기에 불과한 나는 바람도 아닌 것들에 쉽게 흔들리며 더욱 나 자신을 위장하기 위해 동분서주 하게 된다. 그럴수록 삶과는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니 표정은 없어지고 활기는 사라질 수밖에. 그렇기에 행복한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의 내면을 키우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려 노력하는 것이다. 나 자신은 이대로일 때가 가장 아름답고 멋지다. 무언가를 이루어냈기에 대단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모습이 대단한 것이다.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비로소 타인의 시선, 사회의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실마리를 찾게 되는 것이다. 그걸 기반으로 주류적 가치를 전복시킬 수도 있다. ‘자벌적 가난이라느니, ‘소유물에 소유 당하지 않는 삶이라느니 하는 것들은 바로 자신의 삶을 고민했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게 청승맞아 보인다거나 괴이한 행동처럼 보이지 않는 까닭은 자신이 고민한 것이고 그 상황을 즐기며 살기 때문이리라. 보통 사람들은 무엇을 할 때조차 몸이 무겁고 얼굴엔 무표정인데 반해, 이 사람들은 몸도 가볍고 얼굴엔 표정이 살아있다. 천진난만해 보이기까지 한다고 하면 오버이려나. 그런 삶이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는 이유가 바로 생활에서 드러나는 그와 같은 차이에 있다.


지리산엔 그런 사람들이 산다. 맹목적으로 살던 관성을 버리고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살고자 하는 사람들. 낙장불입 시인과 버들치 시인, 고알피엠 여사, 최도사 등의 사람들은 그 곳에 산다. 일상을 만끽하며 의기투합하여 사는 모습이 보기 좋다. 그들이 왜 거기까지 오게 되었는지는 묻지 말자. 단지 지금의 모습을 보고 우리 또한 공감하며 내 삶에 질문을 던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들에겐 자기의 소유, 자기 공간이란 개념조차 없어 보인다. 사람들과 어울리며 여름엔 찾아오는 숙박객을 위해 아예 집을 비워두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런 모습이 이해가 되는가? 누군 집 사려 아등바등 하고, 차 배기량 늘리려 밤샘 근무까지 자처한다. 소유하여 자신의 재산을 불려야만 자신의 가치가 상승한다고 믿는 것만 같다. 그런 사람들이 어찌 집을 빌려주며 자신의 소유물을 공유할 수 있겠는가. 말짱 헛소리일 뿐이다. 소유한 것이 많으니 신경 써야 할 게 많고 그 때문에 걱정도 많다. 어느 순간 소유물에 의해 소유 당한 영혼들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지리산에 사는 그들은 그와 같은 삶을 살지 않는다. 대자연이 누구나 품어주듯 그들도 자연을 닮은 듯하다.


내가 생각하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봤다. 그들이 특이하기에 그렇게 산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들 또한 몸으로 부딪치며 지금까지 왔을 뿐이다. 나도 과연 그들과 같은 삶을 살 수 있을까. 난 어떤 삶의 모습을 꿈꾸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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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1-06-06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를 보고나니 님의 대문아래 글귀를 다시 읽게 되네요.
생각한대로 살아라, 그렇지 않으면 사는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말이요.
생각하대로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leeza 2011-06-06 20:30   좋아요 0 | URL
자기가 진정 생각하는 삶이 무언지 아는 것만으로도 괜찮을 거 같아요.
남이 원하는 방향으로만 살게 되는 세상이다보니, 남다르게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특별하게 느껴지는 거겠죠.
 
한한대자전 (가죽장정) - 3판
민중서림 편집국 엮음 / 민중서림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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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나라에 나온 자전 중에서는 과히 최고의 명품이라 할 수 있다. 이 한 권만 가지고 있어도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은 안정감을 얻을 수 있으리라.
  프로게이머 임요한이 스타 대회에 나갈 때마다 키보드와 마우스를 챙기는 것을 보았다. 어떤 마우스나 다 똑같을 터인데, 어떤 키보드나 똑같을 터인데 왜 유독 자기 것만을 고집하는 것일까. 그건 손이 익었기 때문이며 자기 감각이 익었기 때문이다. 자기와 혼연일체된 것으로 해야만 본래의 자기 실력이 나오기 때문이다. 바로 임요한에게 있어서는 자기 키보드와 마우스가 무기인 셈이다.

  한문학도에게 있어서 무기는 여러 경서들과 바로 그걸 꿰뚫을 수 있는 자전이다. 그렇다면 어떤 자전을 고를 것인가? 난 이 자전을 강추 한다.

  이 자전의 장점은 기존에 새로 쓰기 였던 것이 가로 쓰기로 바뀌어 훨씬 보기 편해졌다는 것이다. 또한 한자의 자원을 상세히 설명해 주고 있다. 금문이나 갑골문에서 쓰였던 자료들을 참고하여 원래 무슨 의미에서 만들어진 한자인지를 상세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또한 반절음을 표시하여 본음을 알기 쉽도록 했으며, 중국의 음가까지 병서하여 중국어 학습까지 돕는다. 하지만 이 책의 장점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바로 한자에 담긴 여러 뜻들과 그 뜻들이 사용된 예들을 들어놔서 경서 공부하는 도움이 많이 된다. 예를 들면 數가 맹자 양혜왕 장에서는 '빽빽할촉'으로 쓰이는데 그러한 예들이 아주 적절하게 설명하게 되어 있다. 또한 그 한자로 구성된 단어들을 실어놓아 문장 학습에 무척 도움이 된다.

  한문을 잘 하고 싶다면 이 자전을 통해 그 꿈을 이뤄보자. 간혹 옥편과 자전을 궁금해 하는 사람이 있다.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은 옥편은 작은 한자사전을 의미하며, 자전은 그것보다 좀 더 큰 한자사전을 의미하는지 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지식이다.

  그렇다면 자전과 옥편은 무엇인가? 한자는 하나 하나가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르는 한자를 찾아 알기 쉽도록 한 책이 바로 자전이라고 한다. 옥편은 중국 사람인 '고야왕'이란 학자가 발행한 자전의 이름이다. 그러나 훗날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자전의 의미가 되었다. '워크맨'은 소니가 만든 휴대용 음악기기 이름인데 훗날, 그러한 기능을 가진 상품의 명칭이 되어버리거와 같은 거죠. 그렇기에 때문에 옥편이라는 특수 명칭을 사용하기 보다 자전이라는 일반 명칭을 사용하는 게 옳다.

  정민 선생님이 쓴 '스승과 옥편'이란 수필집이 생각나네요. 이 자전이 완전 너덜너덜 해질 때까지 보았던 스승의 모습이 그 책에 담겨 있죠. 아무쪼록 이 책에 대한 애정으로 보고 또 보고 뚫어지게 만들어서 한문학의 대가 되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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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자서전 - 전2권 김대중 자서전
김대중 지음 / 삼인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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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을 추억하는 일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왜곡될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사람이 이미 세상에 없다면 그것만큼 결례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왜 추억하는 일 자체가 왜곡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기억을 통해 재구성하는 걸 추억이라 한다. 그런데 기억에서 끄집어내는 과정 속에 생각이란 필터로 걸러지고 이상화된 관념으로 치장되기 때문에 추억은 사실과 달라진다. 현재 박정희 정권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에게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 고통괴로움은 말끔히 사라지고 눈꼽 만큼좋았던 기억만 한껏 부풀려진 추억’. 그렇다면 객관적인보도 자료나 자서전을 통해서 추억하는 일은 괜찮지 않을까? 그런 기록들이 객관적이냐를 먼저 따져 봐야겠지만, 그걸 논외로 친다 해도 읽는 사람의 깊이나 관심에 따라 다양한 관점으로 읽힐 수 있다는 게 문제다. 그래서 같은 내용을 읽고도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고 해서 추억하지 말라고 주문한다면 그건 아예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격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나는 燕巖 朴趾源의 방법을 통해 왜곡과 추억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연암이 살았던 조선 후기의 祭文들은 사람 이름만 바꿔 써도 될 정도로 천편일률적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추억=왜곡의 전형적인 사례라 할만하다. 그런 시대적인 한계 속에서도 연암은

살아 있는 석치라면 함께 모여 곡도 하고, 조문도 하며, 욕도 하고 웃기도 하며<祭鄭石癡文>”

로 시작되는 파격적인제문을 썼다. 벗에 대한 그리움을 그대로 써서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레퀴엠을 읊은 것이다. 팔팔 끓는 감정을 그대로 드러낼 때, 추억은 사실이 된다. 고로 연암의 방법이란 사람에 대한 감정을 가감 없이 서술하는 방법이라 정의할 수 있다. 이 방법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하 그)을 추억하며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보련다.

그를 본격적으로 알게 된 건, 고등학생 때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대선에 뛰어들었고 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란 책을 읽으며 그에게 관심을 가졌었다. 그 땐 그의 행동 하나 하나가 절망의 극복’, ‘정의는 꼭 승리한다.’는 메시지로 읽혔었다. 그로부터 10년여가 흐른 지금 김대중 자서전을 읽으면서도 그 메시지가 그대로 읽히는 건 우연이거나 오독 탓이 아니다. 여전히 그는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난 그가 극복한 절망의 순간을 문턱이라 표현하련다. 지금부터 그가 넘은 문턱들과 그것을 넘으며 어떻게 변해갔는지 살펴보자.

인생의 위기이자 기회인 문턱




아홉살 인생이란 책에선


우리네 인생살이에는 종종 느닷없이 행운이나 불행이 찾아오곤 한다. 그리고 그것은 느닷없이 우리의 삶을 뒤흔들어, 우리를 전혀 다른 존재로 바꾸어놓기도 한다. (143p)”

라고 말한다. 문턱은 어쩌면 내 안에 감춰진 참다운 나를 되살리는 한계 영역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누구나 자신의 한계 영역에 다다르면 벌벌 떨며 두려워할 수밖에 없지만 그걸 넘어서는 순간, 완전히 다른 내가 되는 것이다.

그에게 첫 번째 문턱은 목포 형무소에 갇혔을 때다. 한국 전쟁 당시 그는 인민군에 의해 처형될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미 100여 명이 끌려 나가 처형되었고 그는 80여 명 속에 끼어 있었다. 삶과 죽음이 한 끗 차이인 살벌한 순간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처형 도중 인민군이 철수하는 바람에 살 수 있었다. 그 후 기지를 발휘하여 감옥까지 탈출한다. 그 순간 그는 밤하늘에 뜬 둥근 달을 보며

그 달빛은 세수를 한 번도 못한, 개구리처럼 배만 튀어나온, 수인복을 입고 있는 나를 비추고 있었다. 80p)”

고 감회를 토로한다. 첫 번째 문턱을 넘으며 전쟁의 참혹함, 이념의 허무함, 정치의 무능함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 그 문턱을 넘으며 그는 더 이상 혼자만의 안위를 위해 살아선 안 됨을 느꼈다. 누군가에게 맡겨 세상이 바뀌길 기대하기보다 직접 자신이 정치를 하여 세상을 바꾸기로 맘먹은 것이다. 그의 고백을 들어보자.

내가 정치를 해야겠다고 결심을 하게 된 것은 하나의 사변과 또 하나의 사건을 겪으면서 이다. 바로 한국 전쟁과 부산 정치 파동이었다. () 지도자가 깨끗하지 못하면 사회가 혼탁하고, 국민을 기만하면 나라가 무너진다는 것을 느끼고 보았다. 정치가 바르지 못하면 인권은 짓밟히고 생명과 재산도 지켜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사선을 넘으며 가슴에 몇 번이나 새겼다. ( 90~91p)”

이 문턱이야 말로 자신의 삶에 대한 관심을 넘어 타인의 삶에 대한 관심으로 자아가 확장된 순간이라 할 만하다.

두 번째 문턱은 필연적으로 다가온 느낌이다. 정치인 생활은 그리 녹록치 못했다. 몇 번 낙선했고 아내도 잃었다. 그럼에도 인제 재보궐 선거에서 뽑히고 목포 선거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실력 행사가 있었음에도 당당히 맞서 이기는 등 관록 할 만한 기록을 남긴다. 그런 만큼 그는 유명해졌고 그에 비례하여 政敵에겐 제거할 대상이 되었다. 명예와 비방은 함께 한다더니 그 말이 딱 맞다(動輒得謗 名亦隨之). 그가 선거 유세를 하러 광주로 향하던 중 교통사고를 빙자한 살인사건을 당한 것은 두 번째 문턱의 맛보기에 해당된다. ‘네 목숨은 내 손 안에 있다는 권력의 충고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주눅 들지 않고 일본과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며 한국의 진실을 폭로한다. 그걸 가만히 보고 있을 권력이 아니다. 국경을 넘어 권력은 작동하기 시작한다. ‘김대중 살해 미수 사건이 바로 두 번째 문턱이다.





현장에서 살해하려던 계획이 변경되어 배에 실려 바다에 떠있게 되었고 정체불명의 비행기가 나타나 바다에 던져지지 않았으며 한국의 시골 민가를 거쳐 그의 집 앞에 버려지게 된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긴박하고 숨 막히던 순간이다. 글로만 읽어도 숨이 턱턱 막히고 소위 손발이 오그라드는데 직접 겪은 당사자는 오죽했을까? 그렇다면 그는 초인이라도 된단 말인가? 아니었다. 그도 사람이었다. 두렵고 무서웠지만 그만큼 삶에 대한 욕구가 컸을 뿐이다. 바다에 빠지기 직전 살만큼 살았으니 죽어도 된다고 체념을 하다가 이내 맘속으로 외친다.

아니다. 살고 싶다. 살아야 한다. 아직 할 일이 너무 많다. 상어에게 하반신을 뜯어 먹혀도 상반신만으로라도 살고 싶다.( 313p)”

남루한 삶일지라도 산다는 것 자체가 축복일 수 있다. 그는 그 순간 을 떠올린 것이다. 처절했기에 더욱 진심어린 고백이다. 그가 살게 된 건 기도의 힘과 함께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 때문이었다. 이 문턱을 통해 그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맘 속 깊이 느꼈다. 그건 곧 연대감이었다. 또한 국경을 뛰어넘는 정치의 타락상도 목격했다.

사건의 실체가 밝혀졌는데도 정치 결착으로 진실을 은폐하려는 한국과 일본의 저급한 정치인들의 작태에는 아직도 분노한다. ( 325p)”

저급한 정치의 세계, 부패한 정치의 세계를 보며 고급한정치를 꿈꿨을 것이다. 훗날에 대통령이 되었을 때, 그는 일본 문화 개방을 주도한다. 일부에선 그를 신매국노라 했지만, 그것이야말로 그의 이런 마음을 모르는 왜곡이 아닐런지. 그는 일본을 무조건 신봉하지 않는다. 일제시대와 정치 결착을 경험하며 일본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단지 좋은 점이 있다면 그걸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뿐이다.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더라도 우리 것으로 재창조하는 독특한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 해방 이후 그 많은 이질적 문화들이 물밀듯이 들어왔지만 이내 버릴 것은 버려서 우리 것으로 만들었다. 나는 일본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으로 믿었다. 오히려 일본 문화를 막는 것이 더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양질의 문화가 들어오지 않으면 폭력, 섹스 등 저질 문화만 몰래 스며들 것이기 때문이다. 문화를 역사의 어느 한 시점의 우열로만 판단하여 교류할 수는 없다. 문화는 과거, 현재, 미래를 잇는 끝없는 상호 학습을 통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볼 때 문화 교류는 서로를 배우는 과정이다. 일본 문화를 막는 것은 우리에게는 수치스러운 일이다. (114~115p)”





세 번째 문턱은 신념 자체를 뒤흔드는 사건이었다. 광주 항쟁의 주동자로 몰려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미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기에 사형선고쯤은 아무 것도 아닐 거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반복된다고 익숙해지는 게 아니다. 바늘에 많이 찔려봤다고 다음에 찔릴 때 아프지 않는 건 아니듯이.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도 살고 싶었다. 나는 제발 사형만은 면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법정에서도 속으로 기도했다. 재판장의 입 모양을 뚫어지게 보았다. 입술이 옆으로 찢어지면 사, 사형이었고, 입술이 앞쪽으로 튀어나오면 무, 무기 징역이었다. 입이 나오면 살고, 찢어지면 죽었다. 재판관이 입을 열었다. ‘김대중, 사형’ ( 424~425p)”

이렇게 죽는다고 생각하니 정말 삶에 정의란 있는지 의심이 들었을 거다. 그는 편지에

막상 이제 죽음을 내다보는 한계 상황 속에서의 자기 실존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약한 믿음 속의 그것인가 하는 것을 매일 같이 체험하고 있습니다. ( 428p)”

라고 쓴다. 첫 번째 문턱을 통해 강한 신념을 가졌고 지금껏 그것을 실천하며 살아왔는데, 그 순간 삶의 이유죽음의 이유가 된 것이니 얼마나 혼란스러웠을까. 하지만 그는 여러 사람들의 노력으로 감형되었고 작지만 큰 대학인 감옥에서 인고의 세월을 보낸다. 그곳에서 좌절 속에 꽃 핀 희망을 찾아낸다. 희망행복은 거저 오지 않는다. 절망불행에 푹 잠겨 본 사람만이 희망과 행복을 찾을 수 있다. 세 번째 문턱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더 이상 누군가 주는 거짓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고 자신이 만든 참 희망을 이야기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환경은 불행할 수 있으나, 그런 환경 속에서도 희망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은 자신에게 뿐 아니라 주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쇼생크 감옥은 절망이 스민 음습한 곳이었지만 앤디한 사람으로 희망이 샘솟는 곳으로 바뀐 것처럼 말이다<쇼생크탈출>.




그에게 감옥이 작지만 큰 대학이라 불렸던 이유도 바로 이런 게 아니었을까. 그 후 가택연금, 6.10 민주항쟁, 1314대 대선낙선, 은퇴선언, 영국으로의 출국 등 숨 돌릴 틈 없는 사건들이 연이어 전개된다.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그는 앞을 향해 나아간다. 그럴 수 있는 저력이야말로 세 번째 문턱을 넘으며 얻게 된 것이리라. 은퇴선언 당시 가장 힘든 사람은 당연히 자기 자신이었을 것이다. 세상을 바꾸고 싶어 여기까지 왔는데 그걸 이루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었으니까. 그런데도 그는 노자의 생하게 했으되 소유하진 않는다(生而不有)’는 말처럼, 자신이 이루어낸 모든 것을 집착하지 않고 내려놓았다. 그러면서도

나보다 더 슬퍼하는 사람들이 있어 나는 더 슬퍼할 수 없었다.( 607p)”

고 말하며 은퇴선언으로 상처 입은 사람들을 다독였다. 그에게 후광이 비치던 순간이다.

마지막 문턱은 정계복귀의 순간이다. 정계복귀, 그건 은퇴선언을 번복하여 자신의 신용을 무너뜨리는 일이기에 쉬운 결정이 아니다. 더욱이 대선에서 다시 낙선하기라도 한다면, 그는 지금까지 쌓아왔던 모든 것을 잃게 되고 세간에서 떠도는 대통령병 환자로 낙인찍힐 위험까지 있다. 아무리 이성적으로 생각해봐도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고 위험부담도 크다. 그런데도 그는 2차 망명 때 폭풍의 귀국을 감행했던 것처럼 정면 돌파를 시도한다. 원래 문턱이란 그런 것이다. 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넘으려 하는 순간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것. 위험부담이 크다는 건 그만큼 넘는 순간의 변화 가능성도 크다는 이야기다. 지금까지의 문턱은 누군가에 의해 억지로 넘어야만 하는 문턱이었다. 넘지 못하면 죽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네 번째 문턱은 순전히자신이 만든 문턱이다. 세 번째 문턱을 넘으며 감옥이란 불행의 공간에서 행복을 발견해내는 실존철학자가 되더니, 영국에서 그 능력을 더욱 갈고 닦아 이젠 자신의 기회를 창조하는 연금술사가 되기에 이르렀다. 기회는 늘 있다. 단지 그걸 포착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기회가 주어지는 것뿐이다. 그가 문턱을 넘으려는 이유는 명백하다.

내가 정계 복귀를 결심한 근본적인 이유는 평생 품었던 내 꿈을 실현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하나는 민주주의 국가 완성이요, 다른 하나는 민족 통일에 이바지하고자 함이었다. ( 653p)”

이 문턱을 넘는다는 것 자체가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자신이 지닌 소중한 꿈이 사람들에게 헛꿈으로 치부되어 그만하면 됐노라고 핀잔 아닌 핀잔을 들을 때, 그는 그게 헛꿈이 아니라 진짜 꿈이며 실현가능하다고 외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여러 문턱을 넘으며 자신의 꿈과 희망에 대해서 더 확고해졌다. 그는 대선 유세 기간 동안 국민들에게 자신의 진짜 꿈을 들려주고 보여줬다. 그 결과 199712월에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어떤 이는 김대중 씨의 당선은 IMF 때문에 어부지리로 된 거야라고 말한다. 과연 그가 넘은 문턱들을 안다면, 이런 식의 결과론적으로 짜 맞춘 이야기를 함부로 할 수 있을까. 그에게 마지막 문턱은 그가 지닌 신념이 얼마나 확고한 지 시험 해보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네 번째 문턱은 그의 예리한 감각이 포착한 기회였다.

아홉살 인생중 서두에 인용했던 내용에 이어

우리는 바로 이때를 조심해야 한다. ‘예전의 나느닷없이 바뀌어 버린 나어느 쪽이 진짜 나인지 혼란에 빠져 버리기 십상이다.”

라고 결론짓는다. 그도 문턱을 넘으며 이런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그런데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갔다. 과연 혼란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신념이 너를 자유케 하리라

권력의 향기에 취하지 않았다. 더 편하게 살 수 있는 길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나갔다. 그것을 정의필승이라 명명했다.

 

노벨평화상 시상식에서

“‘정의필승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저의 확신이 크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모든 나라의 모든 시대에 국민과 세상을 위해 정의롭게 살고 헌신한 사람은 비록 당대에는 성공하지 못하고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하더라도 역사 속에서 반드시 승자가 된다는 것을 저는 수많은 역사적 사실 속에서 보았습니다. 그러나 불의한 승자들은 비록 당대에는 성공을 하더라도 후세 역사의 준엄한 심판 속에서 부끄러운 패자가 되고 말았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 393p)”

라고 말했다. 후대까지 바라보며 정의는 꼭 이긴다고 말하는 대목에선 중용의 저자가 백 세 뒤의 성인을 기다려도 의혹됨이 없다고 외치던 강한 자기 확신이 떠오른다. 자신은 한 줌의 재가 될지라도 당대에 정의를 위해서 살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음가짐이 있었으니 문턱을 넘어야 할 때 좌절하지 않았던 것이고 넘고 나서 혼란스러울 때도 방향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 문턱은 고비임과 동시에 신념을 강화하는 계기였다.

정의필승의 확신은 행동하는 양심으로 이어진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말처럼 우리 사회는 침묵과 순종을 강요했다. 아무리 그른 일이 있어도 정 맞을까두려워 표정과 의식을 지워야 했다. 그런데 그는 정 맞아 아플지라도 언젠가 정의는 이기며 세상은 그만큼 좋아질 것이기에 행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작년 6.15 9주년 기념식에서

“‘행동하는 양심이 됩시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입니다.( 593p)”

라는 연설을 했다. 그 연설은 촛불 집회 이후 정 맞을까벌벌 떨고 있는 우리의 의식을 깨우는 죽비와도 같았다. ‘정의필승행동하는 양심은 그렇게 한 짝이 되어 밀고 끌며 그를 혼란에 빠지지 않게 한 것이다.

여기까지가 그에 대한 추억이며 추모이다. 그의 삶을 문턱이란 틀로 바라보고 나의 생각을 더해 보았다. 이 추억담이 그에 대한 왜곡이 아니라 그의 다양한 모습 중 하나를 보여준 것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이 독후감이 여기서 끝나선 안 된다. 애초에 그의 삶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듯 우리에게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의 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그를 추억하다가 나를 만나다

누군가를 추억하는 이유는, 그립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걸었던 길을 곱씹으며, 나에게 주어진 문제를 풀고 인생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다. 그의 자취를 더듬으며 생각을 정리하다보니, 그 속엔 나의 모습이 있었다. 그를 만나러 떠난 여행에서 나의 생각과 가치를 찾게 된 셈이다. 이래서 누군가를 추억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애초에 서로 남남인듯 자신의 길을 걸어갔지만, 전혀 엇나갔던 포물선이 어느 순간 겹치듯 우리도 만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넘은 문턱들은 그대로 내 앞에 있는 문턱들이었다. 그를 보며 용기를 내어 나의 문턱을 넘으려 한다. 그의 말마따나 꿈을 실현해 보기 위해서. 우리의 이러한 다짐들이 모여 사람 살만한 세상을 만들 수 있어야 하고 남과 북이 함께 행복한 사회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그의 정신을 계승하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정의필승행동하는 양심이란 가르침에 따라 당당히 자신의 문턱을 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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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 세트 (무선) - 전10권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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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벌교, 그 역사의 현장에

순천에서 벌교까지는 기차로 22분 거리였다. 바로 옆동네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다. 지도상으로 봤을 땐 큰 도시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막상 진트재를 지나 중도방죽의 철다리를 지나면서 벌교를 둘러보니 아주 작고 아담한 곳이더라. 왜 큰 도시로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그건 아마도 소설에선 보성에 소속된 읍이면서도 오히려 보성보다 더 번화한 곳이라 이야기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벌교역은 예전의 그 모습이 아니었다. 하지만 개발되지 않아 그나마 예전의 모습에 가까웠다고나 할까. 계엄사령관이 처음 그곳에 당도하면 부대원들이 열렬한 환영식을 치르기도 했단다. 내가 바로 계엄사령관이 된 듯 근엄한 자세로 기차에서 내렸다. 늘 소설에선 역이 엄청 분주했었다. 그곳에서 여러 계엄사령관이 오고 갔고, 김범우의 활약담이 펼쳐졌다. 소설에서와 달리 현실에선 그렇게 한적할 수가 없었다. 역에서 바로 나와서 오른쪽으로 가면 벌교시장이 있다. 역 근처에 시장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이곳에서 염상구는 활개 치며 다녔을 것이고 사람들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귓속말로 욕을 했을 것이다.

시장을 둘러보고 방향을 꺾어 난 왼쪽으로 가보기로 했다. 거기가 바로 일제 때의 중심 거리이기 때문이다. 거긴 한참 공사 중이더라. 바닥을 다 헤집어 놨다. 태백산맥 문학로 조성 사업 때문이란다. 바닥을 잘 단장한다고 문화로가 되는지는 잘 모르겠더라. 조금 걸어가니 옛술도가터가 있었다. 거기서 정현동 사장이 호령하며 벌교 지주로서 떵떵거리며 살았겠지. 근데 구체적인 건물이나 그런 건 없어서 못내 아쉬웠다. 조금 더 올라가니 벌교 초등학교가 나오고 그 입구에 보성여관이 있다.

 



 

지금은 해체 공사를 하는 중이라 전체적인 외관을 한 눈에 볼 수 없다. 이 여관엔 토벌대들이 묵던 곳이다. 빨갱이들을 잡으러 온 토벌대들이 여기에 진을 치고 있었다.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일본풍의 건물을 눈으로 보고 있으니 느낌이 새롭더라. 벌교초등학교도 소설에선 여러 번 등장한다. 여긴 학교이면서 사상을 검증하는 장소이기도 했으니까. 염상진이 점령했을 때도, 그들이 밀려 다시 경찰이 차지했을 때도 그 곳은 사람들의 사상을 검증하고 직결처분을 하던 장소였다.

 



 

그 길에서 조금 올라가면 옛 금융조합(현 농민상담소) 건물이 나온다.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건물이다. 이 땅에 처음으로 뿌리 뻗은 자본이 어떻게 돈을 불렸는지 소설에선 여과 없이 보여준다. 돈이 돈을 불러들인다. 그런 돈 놓고 돈 먹기가 결국 엄청난 착취의 다름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초대 금융조합장은 좌익에 사살되었다.

건물 사진 찍는 걸 멀찍이서 한 할아버지가 보고 계셨다. 그 쪽으로 가니 할아버지가 말을 걸어오신다. 뭐 하러 왔냐고 물으셔서 문학로 탐방을 하러 왔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앞에 있는 빨간 벽돌로 지어진 건물을 가리키면서 그 곳이 청년단 사무실이란다.

 



 

그 순간 왠지 모를 의심이 들었다.(내가 속고만 살았냐 --;;) 아무리 봐도 오래된 건물 같아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랬더니 할아버지는 생생하게 증언해 주시더라. “바로 저기 보이는 이층 보이쟈. 저기가 청년단장 방이여. 여그서 얼매나 많은 사람들이 붙들려 와서 고초를 당했다고.”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닌 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여긴 염상구가 활개 치며 다닌 곳이란 말이고 앞에선 보이지 않는 이층에 염상구의 자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없는 죄’를 고문에 못 이겨 ‘자백’했을까?

쭉 올라가면 아치형 모양의 돌다리가 나온다.

 



 

여기가 바로 벌교 홍교다. 반절 정도만 남아서 나머지 반절은 새로 만들어 이어 붙였다. 좀 어색한 모양이더라. 저기 위에 서서 벌교천을 내려다보니 왠지 모를 회한 같은 게 느껴지더라. 바로 그 위쪽에는 자애병원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흔적조차 없지만 말이다. 안창민은 총상을 입고 거기까지 사람 눈에 띄지 않게 왔단다. 청년단, 경찰서가 멀찍이 떨어져 있으니 가능했을 테지만 정말 죽기 살기로 왔을 것이다.

봉림교를 건너 다시 밑으로 내려오면 김범우의 집을 알리는 안내판이 나온다.

 



 

그 안내판을 따라 올라가면 임봉열 가옥(김범우의 집)이 나온다. 예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집이다. 지금도 사람이 사는지 연신 개 짓는 소리가 들린다. 그 집은 높은 곳에 있어 예전엔 벌교 읍내가 내려다 보였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다. 그 집엔 김사용 영감이 살았을 것이다. 지주이면서도 인간미가 있었던 지주였다. 그의 자식 두 명이 공산주의 사상에 어느 정도 호의적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범준이 한국전쟁 때 ‘인민군 대장’이란 직책으로 몇 십년 만에 아버지를 찾아와 만나는 장면은 아직도 뇌리에 선하다. 그 장면이 왜 그리 감동적이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도 그가 독립운동을 하러 가서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한참을 내려가니 꽤 번화한 곳이 나온다. 시대가 변하면서 중심지가 변화한 것이다. 그 곳에 ‘소화다리’가 있다.

 



 

일제치하의 아픔을 다리 이름에 고스란히 담고 있다. 해방이 되고 나서 바꿔도 됐을 텐데, 바꾸지 않은 게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 식으로 지우고 싶은 과거일지라도 그걸 남겨두고 다신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는 것도 좋으니까. 무조건 지우고 싶은 과거의 흔적으로 없애는 것만이 상책은 아니다. 그 다리에선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이념의 대립 때문에 죽어갔다고 한다. 시체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기도 했고 그 피가 갯벌에 떨어져 빨갛게 물들였다고도 한다. 지금은 인도로만 사용되고 있고 그 옆에 새로 지어진 다리에 차들이 다닌다. 다리 옆엔 꼬막 정식 집이 즐비했는데 음식점 이름이 이색적이다. 태백산맥 등장인물의 이름이 그대로 음식점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더라.


 

5. 태백산맥 문학관 탐방기

이제 마지막 코스가 남았다.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문학관에 가는 것이다. 언덕을 오르니 휘황찬란한 문학관의 모습이 보인다. 수수한 내용의 소설과 어울리지 않게 너무 화려하다는 느낌을 들었다. 그런데 바로 그 옆에 초가집과 기와집이 함께 있는 거다.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이 들어 그곳으로 가봤다.

 



 



 

그곳이 바로 무당인 소화네 집이고 그 옆에 있는 으리으리한 집은 소화와 정하섭의 사랑이 꽃핀 박씨제각이란다. 소화네 집은 최근에 만든 집이어서 별로 볼품없었으나 박씨제각은 예술이었다. 전통 한옥에 일본식을 가미한 독특한 건축양식을 자랑하고 있었으니까. 기와 위에 다시 누각을 세웠다. 그 집의 지대 또한 높은데 거기에 높은 누각까지 섰으니 벌교 읍내를 내려다보며 즐기기에 좋았을 것이다. 집도 제법 큰 규모였고 잘 보존되어 기분이 좋았다. 도대체 거기에 살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이만한 규모의 집을 유지하려면 꽤나 뼈대(?) 있는 집안이었을 테지.

 



 

문학관 전면 벽에 쓰인 ‘문학은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인간에게 기여해야 한다.’라는 조정래 씨의 글귀가 눈길을 끈다. 그에게 있어 문학이 어떤 것인지 이 한 마디 말로 잘 알 수 있다. 누군가에게 문학은 여가이거나 돈벌이 수단일 테다. 하지만 조정래 씨는 거기서 더 한 걸음 나아가 어떤 사명감까지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런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정치 세력의 회유와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마무리 지을 수 있었던 거겠지. 태백산맥엔 이적성 시비가 잇달았다. 그래서 ≪아리랑≫ㆍ≪한강≫을 쓸 때 집필하는 시간보다 검찰에서 증언하는 시간이 더 많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 이적성 시비는 작가 개인에게만 문제가 되는 게 아니었다. 그의 가족 전체에게 고스란히 피해가 가고 심지어는 태백산맥을 소장한 일반 사람들까지 ‘이적물 소지자’로 국가보안법에 걸릴 위험이 있었던 거다. 남한에선 ‘빨갱이’란 낙인이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그렇게 한번 낙인이 찍히면 우리 사회에서 ‘인간답게’ 살아가긴 힘드니까. 그런 혼란한 시대상에 작가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세 편의 대하소설을 엮어내고 결국 2005년엔 이적성 시비에서마저 벗어나게 된 것이다. 당연한 결과였지만 그 때 울컥했던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벽에 쓰여져 있는 작가의 말은 그동안의 그런 회환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말이었던 셈이다. 자기 확신이 담겨 있는 말이었던 셈이다.

 



 

들어가는 입구엔 건물을 설계한 이유가 써져 있다. 그 글을 통해 내가 처음에 했던 ‘휘황찬란하여 소설의 수수함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평이 허황된 비판인 줄을 알 수 있었다. 그 건물에 건축가의 생각이 그대로 담겨 있더라. 확정된 공간이 아닌 늘 변해가는 공간으로 설계한 것이며, 멀리서 봤을 때 비석이 솟은 듯 보여 이념 때문에 죽어간 민중을 늘 깊이 새기는 공간이 되도록 했다는 것이다.

들어가서 1층을 둘러봤다. 거기엔 조정래 씨가 태백산맥을 쓸 때 사용했던 필기구들, 답사할 때 입었던 옷과 신발 등 작가와 관련된 물품과 4년 동안 취재하고 준비해온 과정을 보여주는 기록물들, 집필 과정을 보여주는 기록물, 이적성 시비와 그 판결 내용을 담은 신문 자료들, 태백산맥 원고 뭉치들이 있었다. 그런 것들을 보면서 난 그냥 읽어 내려가는 것이지만 작가는 그 한 줄, 한 사건을 위해 발로 뛰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손으로 기록했다는 것을 새삼 알 수 있었다. 지리산에서 내려다본 경치를 묘사한 부분, 중도 들판의 배경을 묘사한 부분은 직접 체험하지 않고서는 그렇게 생생하게 기록할 수 없다. 그것 외에도 빨치산들의 비트 조성법이랄지 투쟁 사업의 전개 등은 객관적인 자료를 참고하지 않고선 불가능하다. 바로 그 모든 기록들이 증언과 관찰을 통해 가능했다는 것이다. 수많은 등장인물을 우리도 기억하기 힘든데 작가라고 해서 그게 쉽겠는가. 그래서 일일이 관계도를 그려 넣으며 정리한 부분에 이르러선 할 말을 잊었다.

 



 

지금껏 이런 소설은 천재성에 의해서 뚝딱 쓰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것과 반대되는 현실을 본 것이니까. 치밀하게 준비했고 꺾이지 않는 열정으로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짜내어 10권의 소설을 완성했을 뿐이었다. 바로 그런 정신과 치밀성만 있다면 이 세상에서 못 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싶었다. 지금껏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분통을 터뜨렸던 내 자신이 창피하게 느껴졌다.

벌교를 탐방할 땐 비가 내리지 않더니 문학관에 들어와 둘러보고 있는데 밖에서 비가 내리더라. 운이 좋게도 타이밍이 잘 맞았다. 관람을 끝내고 나오는 길엔 다행히 비도 그쳐 있었다.


 

6. 눈물은 뚝뚝

소설 속의 인물들을 벌교에서 직접 만나볼 수 있었다. 하대치 형님이랑 술 한잔하며 구수한 사투리에서 풍겨오는 인간미와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소신을 느낄 수 있었고 염상구의 거들먹거리는 모습을 시장통에서 봤으며 절뚝거리며 걸어가는 서민영 선생님의 부드러운 듯 날카로운 눈매도 볼 수 있었다. 작은 동네였지만 그 곳은 어느 곳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커보였고 사람들도 왠지 다르게 느껴졌다. 난 시간이 되어 다시 순천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는 어김없이 나카시마 방죽 위를 달려 지나간다. 수많은 민초들의 애환이 나의 가슴 속에 파고든다. 차창 밖으론 그들의 눈물인양, 나의 눈물인양 빗방울이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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