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시인의 사회
N.H 클라인바움 지음, 한은주 옮김 / 서교출판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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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우연하게 보게 된 책이다. 알라딘이란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었다. 거기에 '지니'가 나오는데 그 익살맞은 목소리가 얼마나 매력적이던지. 그래서 누가 그 목소리를 내는지 찾아봤다. 그랬더니 Robin Williams라지 않은가~ 그래서 그가 나온 영화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굿윌 헌팅'이나 '죽은 시인의 사회'란 영화가 전면에 떴다. 이름을 한 번정도는 들어본 영화다. 그 중 '죽은 시인의 사회'란 영화는 이미 예전에 친구가 DVD를 빌려줘서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끝까지 다 보진 못했다. 그 때 다른 할 일이 있던 탓에 거기에 집중할 수 없었으니까. 그 때로부터 한참이 지난 지금 다시 이렇게 제목을 접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다시 보기로 맘먹은 거다. 하지만 막 찾아보니, 원작은 소설이라지 않은가? 그래서 영화를 먼저 보기보단 소설을 먼저 읽기로 했다.
 

  보는내내 머리 속을 스쳐가는 광경이 있었다.

 



  바로 이들이다. 일제 교사에 대해 학생들의 권리를 존중해줬다고 해서 해직된 교사들의 모습이다.  자신의 교육적 신념을 펼치기라도 하면, 그게 지배층의 생각과 다를 때엔 여지 없이 짤릴 수도 있다. 이 땅에 키팅 선생님의 모습은 더욱 요원하게 느껴진다. 지금껏 그래왔듯이 자신의 기득권만 챙기면 되고 아이들에겐 생각할 수 있는 힘을 일깨워줄 필요가 없이 국가의 하수인, 지배층의 하수인이 되도록 하기만 하면 된다. 어쩌면 그게 학교란 제도가 생긴 태생적인 문제점인지 모르겠다. 학교는 국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우매한 국민을 만들기 위한  기관에서 출발했으니까. 그래서 학교는 정신병원, 교도소와 같은 맥락으로 분류되곤 한다. 1950년대 미국과 2009년의 한국, 그 사이엔 59년이란 시간의 흐름이 있지만, 그 흐름이 무색할 정도로 둘의 모습은 똑같았다.

 

학생은 학교의 명예를 위해, 부모의 희망을 위해 복종하는 존재에 불과했다. 세상이 유포한 거짓말. '일류대학교에 가서 사 짜 돌림의 직책을 갖게 되면 떵떵거리며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다'는 것.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고 있으니 거짓말은 아닌 셈이다. 하지만 그 안에 자신은 없다. 오로지 명예욕과 권력욕의 화신이 된 자신이란 껍질만 있을 뿐. 1%의 영광을 위해 99%는 암울한 현실을 묵인하며 살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런 현실을 대하며 부모들은 뭐라고 아이들을 채찍질 하던가. "다 너를 위해 그러는 거야. 그래서 나도 이렇게 희생하고 있으니까. 아빠말 거역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갈 생각만 해!".  아이의 꿈과 주체성을 짓밟으면서 기껏 한다는 소리가 '다 너를 위한' 것이란다. 그렇다면 정말로 묻고 싶다. 정말 그런 밀어붙임 속엔 아버지의 욕망 같은 건 들어있지 않은 건가요???? 이쯤에서 페리(닐의 아버지)의 말을 한 번 들어보자 "일단 의대를 졸업해라. 그리고 나서 하고 싶은 일을 해도 늦지 않는다. 그 땐 네가 무슨 일을 하든 아무 상관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 전까지는 내가 하라는 대로 해!(38p)" 이 말이 나중에 그가 의사가 된 후에 지켜질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말에 반대해서 얘기했다간 한 대 맞을 각오를 해야 한다. 아주 깔끔하게(?) 명령조로 이야기 하고 있지 않은가! 아버지의 강압적인 지배 욕망이 펄펄 살아 꿈틀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키팅은 그렇게 희망 없이 살아가던 아이들에게 한마디를 해준다. 'Carpe Diem' 바로 오늘을 즐기라는 것. 그러면서 시를 들려준다. '장미꽃 봉오리를 따려면 바로 지금이니/ 언제나 시간은 쉼없이 흐르고 /오늘 이렇게 활짝 핀 꽃송이도/ 내일이면 시들어지고 말지어라.' 지금 이 순간만 있다는 이야기다. 내가 정작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지금 해야 한다는 소리다. 미루는 순간, 그건 아무 것도 아닌 자기 기만으로 남을 뿐이다.  카르페 디엠의 정신은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 이 순간을 긍정하며, 내가 정작 무엇을 어떻게 하고 싶은지 알려는 투철한 자기애의 정신. 키팅의 교육관은 "교육이란 스스로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184p)" 이다. 그는 아이들에게 자신이 정말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들여다 볼 수 있도록 지도해줬다. 남과 자신을 비교할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독특한 개성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도록 한 부분은 탁월했다. 그 깨우침 덕분에 닐은 자신이 연극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게 되었고 그걸 향해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매진할 수 있었다.

 

  키팅의 이런 지도법은 학생들을 변화시켰다. 이런 변화가 좀 급작스런 감이 없지 않다. 누군가가 내 생각에 같이 공감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아는 까닭이다. 더욱이 자신의 모든 기반을 바꾸는 그런 일에 있어선 더욱 힘들다. 그럼에도 이렇게 빨리 그들이 변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렇다 그들도 이미 자신의 삶이 심하게 꼬여 있음을 눈치채고 있었고 그것을 어떻게든 조금씩 변화시키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이미 불씨는 있었던 셈이니, 거기에 바람이 불거나 기름을 껴얹어만 준다면, 불은 어느새 활활 타오를 수 있는 거였다. 바로 키팅 선생님의 말이 기름 역할을 했음을 볼 수 있다.

  키팅의 지도 방법은 일정 부분 나에게 영감을 주었다. 나 또한 교사가 되어 수업다운 수업을 하고 싶은 사람이지만, 그런 수업을 보지 못했던 탓에 그저 맹목적인 강의식 수업만 하고서 끝내는 경우가 태반이었으니까. 왠지 키팅이 아이들에게 수업하는 광경을 보고 있노라니 베토벤 바이러스의 장면이 떠올랐다. 그만큼 신선하고 흥미진진 했을 것이다.



 이런 이상적이고 감정적인 요소들이 비록 소설이기에, 또는 드라마이기에 가능했다 하더라도 그런 수업시간이 되길 꿈꾸며 늘 노력하는 선생님이라면 나쁘진 않을 것이다.

 

  닐은 연극을 잘 마쳤지만,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로 자신의 꿈이 무너지게 되자 자살한다. 그 후에 어떻게 됐을까? 상식적으로는 그렇게 만든 아버지의 교육관을 탓해야하며 그렇게 아이들을 획일화의 늪에 빠뜨린 학교의 교육관이 욕을 먹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키팅 선생님이 쫓겨나게 된 것이다. 아이들의 말 속에 그 사건의 내막이 잘 드러난다. ' "학교에서는 희생양이 필요할 거야."  "희생양?"  "그래, 이런 사건이 생겼는데 학교 평판이 좋을 리 있겠니? 누군가 책임질 사람을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을 거라고!"   '(토드의 독백) 닐의 죽음은 본인의 적성이나 꿈은 무시하고 억지로 갈 길을 강요했던 그의 아버지와 학교 공통의 책임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반성은커녕 책임을 떠넘길 사람을 물색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는 것이다. 그건 닐 혼자만의 문제로 덮어둘 수는 없는, 어쩌면 그들 모두의 문제이기도 했기에 더욱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258p) ' 그런 내막으로 키팅은 잘렸다. 하지만 그가 교실을 나가는 그 순간에 카메론을 뺀 나머지 '죽은 시인의 사회'의 멤버들은 목놓아 울면서 그를 부른다. '선장님! ,오 나의 선장님!'이라고~

 

  일제고사를 치루며 학생에게 선택권을 줬다는 이유로 8명의 선생님들이 해직되는 비운이 사건이 있었다. 교육당국의 대응은 웰튼 아카데미의 대응과 다르지 않다. 왜 그런 사건이 발생했는지 따지지 않고 희생양을 찾아 그 사건의 본질은 흐려버린 것이니까. 그런데 그 선생님이 떠나가자 아이들은 덩달아 같이 눈물을 흘렸고, 그 선생님이 주는 졸업장을 받기 위해 늦게까지 남았다. 과연 어떤 교사가 진정한 교사인지 교육당국에 되묻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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