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때 봤었던 애니메이션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다시 이 영화를 보고자 했던 것인가? 저번 토요일(3월 14일)에 이문세씨의 라디오 프로를 듣던 중에 알라딘을 맛깔나게  이야기해주는 것을 듣고 다시 봐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이 명작을 보게 되었다. 과연 15년이나 지난 지금 보는 느낌은 어떨 것인가?

 

  과연 명작은 명작이었다. 지금 봐도 전혀 유치하거나 어색하거나 하진 않았으니까. 또 다시 보고 싶을 정도로 너무나 좋았다. 이 안에도 어떤 요행수를 바라는 인간의 모습이나 사랑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극히 단순한 인간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긴 했지만, 그것 외에도 더 깊이 있는 내용이 있었다.  

 

  인간은 과연 만족을 아는 존재일까? 이건 나의 오랜 생각 거리다. 99개를 가진 사람은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1개만을 가진 사람 것까지 차지하려 한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던가? 과연 그게 인간의 본성이란 말인가? 그런 욕망을 제어할 수 있는 길이란 없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럼에도 난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욕망의 노예가 되어 사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으니까. 어쩌면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부익부 빈익빈의 부조리한 사회의 모습을 보다보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이 영화를 본 것이다.

  여기에는 두 사람이 나온다. 물론 많은 인물들이 나오지만 이야기의 두 축을 구성하는 두 인물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가도록 하자.

 



  가운데 있는 사람이 궁전의 총리 대신인 '자파'이며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이 영화의 주인공인 '알라딘'이다.

  우선 알라딘부터 이야기를 해볼까. 알라딘은 순수한 사람이다. 가난하긴 해도 희망을 지니고 있고 돈을 쌓아두는 것보다 그저 한끼 때울 수 있으면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 자기의 한 끼의 식사마저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쯤 되면 우린 알라딘의 욕망이 참 건전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욕망의 노예로 살긴커녕 어느 정도가 되면 절제도 가능할 거란 기대를 하게 되는 것도 이 시점에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가 지니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지니에게 말한다. "나는 두 가지 소원만 말하고 나머지 하나는 너를 위해 쓰겠어"라고 말이다. 그 말은 곧 그에게 자유를 주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정작 두 가지 소원을 말하고 난 다음에 그와 같은 상황이 닥쳤을 때 알라딘의 반응은 어땠나? 두 말하면 잔소리다. 그는 자신의 순수한 마음에서 나왔던 스스로의 약속을 져버렸다. 어느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욕망의 화신이 되어 욕망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바라던 모든 일을 이뤘지만, 여전히 모든 게 불안하다보니 지니를 놓아줄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나니 알라딘의 모습에 우리들의 모습이 겹쳐진다. "나 1억만 모으면 정말 행복할 거 같아. 그 때쯤 되면 아무 걱정 없이 내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아야지."라고 말하며 악착 같이 돈을 모은다. 그 때까지만 해도 순수한 욕망 그대로다. 하지만 정작 그게 이루어지고 난 다음엔 어떠 하던가? 혹여나 누가 이 돈을 가져가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돈을 가만히 놀리면 그 가치가 줄어들기 때문에 어떻게든 재투자하여 좀더 많은 수익을 얻으려 한다. 애초의 마음 따위는 온데 간데 없다. 어느 순간 자신은 돈을 위해 살아가는 하인이 되어 있을 뿐이다. 욕망의 하인이 되는 순간, 자기의 삶은 없어진다. 결국 알라딘은 모든 것을 잃었던 것처럼 우리 또한 그런 악순환에서 예외일 순 없을 것이다.  

 



  두 번째로 얘기해야 할 사람은 '자파'다. 그는 애초부터 욕망의 화신이었다. 권력욕 하나로 이 영화에서 악역을 자처한다. 과연 그런 그에게선 어떤 욕망의 구도를 발견할 수 있을까? 그는 램프를 손에 넣고 소원을 빈다. '나라의 왕이 되게 해달라'는 것. 그 소원은 자파의 가장 큰 소원이다. 당연히 그 소원 한 가지로 그는 모든 소원을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만족하며 거기에서 멈출 수도 있는 거였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이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무언가가 이루어지는 순간, 그건 시시한 무엇이 되어버린다. 새로운 욕망이 싹트는 거다. 그는 다른 소원을 또 빈다. '강력한 마법사가 되게 해달라'. 세상의 모든 것을 자신의 맘대로 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세상을 맘대로 한다. 이 얼마나 매력적인 능력인가? 하지만 그는 거기에서도 만족하지 못한다. 아무리 강력한 마법사가 되더라도 죽음을 피해갈 순 없고, 지니의 전지전능에 비하면 한 수 아래니까.이건 순전히 누군가와의 비교의식에서 나온 욕망일 뿐이다. 그의 욕망은 끝이 없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 소원을 빈다. '지니가 되게 해달라' 이 소원을 통해 우린 인간의 욕망을 들여다볼 수 있다. 인간의 욕망은 남과의 비교의식에 머물러 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남보다 많이'를 외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욕망 자체가 이루어질 수는 없다. 어느 면에서건 나보다 뛰어난 사람은 꼭 있게 마련이니까. 그렇기 때문에 어느 순간에 인간은 욕망의 하인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욕망의 무한 팽창을 위해 자신의 삶을 버려가면서까지 충성 봉사한다. 지니가 된 자파는 결국 램프에 갇히는 꼴이 되고 만다. 가장 전지전능한 신이 되었으면서도 램프에 갇혀 욕망의 하인이 된다는 설정은,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면 인간이 어떻게 될 수 있는지를 시각적으로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인간에겐 희망이란 없는 것인가? 욕망의 하인이 되어 그렇게 삶을 저주하며 살 수밖에 없다는 말인가? 이렇게만 말한다면 얼마나 힘 팽기는 일인가? 인간의 인생은 비극일 뿐이라는 이야기인데. 그런데 이 영화의 미덕은 그런 욕망의 배치를 드러내면서도 그 해결책까지 보여주고 있다는 데에 있다.  그 해결책은 뭘까? 어렵다고.... 너무 머리 굴리지 마라. 애초에 욕망이란 무엇이란 것을 말하지 않았던가? 순수한 욕망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그게 불행이 되는 까닭은 남과의 알량한 비교의식을 통해 변질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배치를 바꾸면 된다. 순수한 욕망이 되도록, 남과 비교하지 않도록 자신만의 장점과 자신만의 가치를 키우는 거다. 알라딘은 결국 다시 돌아와 자파를 램프에 가두고 모든 것을 원래 모습으로 돌려 놓는다. 그리고 그는 지니에게 마지막 소원을 말한다. 이 때의 장면이 소름끼치도록 새롭게 와닿았다. 가슴이 뭉클했다. 과연 그는 어떤 소원을 빌까? 공주와 결혼하기 위해선 당연히 다시 왕자가 되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어야 한다. 왕자만이 공주와 결혼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는 더이상 자신의 욕망을 위해 소원을 빌지 않는다. 더이상 그런 욕망이 필요치 않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왕자인척 하던 자신의 모습이 거짓임을 알았던 거다. 거지이지만 순수한 자신의 모습이 자신에게 더 맞고 더 행복하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그런 자아존중감이 충만해진 그였기에 욕망을 위한 소원을 빌지 않고 '지니'를 위한 소원을 빌 수 있었다. 욕망의 하인이 된 순간 불행이 그를 휩싸고 있었지만, 그가 그 욕망을 제어할 수 있게 되는 순간 그는 환희에 찬 미소를 띄울 수 있었다. 얼마나 가슴 뭉클하도록 아름다운 장면이었던지. 내 얼굴에 미소가 가득 띄어질 정도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