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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방과 탈주 트랜스 소시올로지 2
고병권 지음 / 그린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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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쾌한 느낌의 책

오랜만에 느껴보는 상쾌함이다. 책 한 권을 읽고 느껴보는 기분 중 상쾌함이라니. 선뜻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은 힘들게 산에 올라가 정상에 이르렀을 때의 상쾌함이나 도심의 답답함을 벗어나 언덕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을 때의 기분을 떠올리면 된다. 의식의 상쾌함과 육체의 상쾌함은 하나다. 의식이 상쾌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폐쇄되어 있고 감정이 억눌려 있다면, 아무리 산에 올라간 들, 언덕의 바람을 몸소 맞이한 들 상쾌함 따위는 느껴지지 않을 테니까. 내가 아는 사람은 오히려 바람이 몸을 사정없이 흔든다며 짜증을 내기도 했다. , 상쾌함은 육체적 상쾌함이 들기 이전에 정신적인 상쾌함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말씀. 상쾌함을 그렇게 정의할 수 있다면, 이 책을 읽고서 상쾌함을 느꼈다는 것도 그리 어색한 표현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상쾌함은 내가 살아있음을 재인식하는 데서 느껴지는 감정이다. 훈풍이 불어와 나의 피부를 어루만지며 코 속으로 들어가 나의 머리를 맑게 한다. 그동안 이런저런 일에 두서없이 지내며 느끼지 못했던 신체의 각 부위가 그 곳에 그대로 있음을 느끼게 되는 거다. 그 때 비로소 드는 감정이 상쾌함인데, 책 한 편을 읽고 그걸 통해 나의 인식을 다시 한번 되짚어 볼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 또한 상쾌함이지 않겠는가.

경험이 버무려진 인문학서

고추장님의 책은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난해하진 않아서 아무 부담 없이 읽게 된다. 고추장님이 쓴 니체 해설서를 보면서 좋은 인상을 받고 많은 가르침을 받았던 터라 이 책도 그런 기대로 읽게 되었다. 이미 서두에서 말했다시피 그의 글을 읽은 소감은 기대 이상이었다. 솔직히 제목만 보고서 어렵거나 난해하지 않을까 걱정을 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렇진 않았다. 철학적인 내용들이 사회적인 현안들에 녹아들어 별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었으니까. 어찌 보면 이게 고추장님의 매력인지도 모르겠다. 글을 쓰되, 그것도 이해하기 난해한 철학적인 글을 쓰되 이해가 쉽게 쓸 수 있는 것. 그런 까닭에 난 이 책을 한 번에 쉼 없이 읽을 수 있었다. 다 읽고 나선 무언가 새로운 희망을 얻은 것처럼 상쾌함이 느껴졌다. 역시 실천력을 갖춘 인문학자(사회학자)인만큼 그의 글에는 진정성이 있다.

추방, 그건 우리의 현실이다

추방’, 과연 누가 누구를 추방했다는 것일까?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을 내쫓아 버린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추방이란 단어를 들었을 때, 대학의 唯仁人 放流之 迸諸四夷 不與同中國(오직 어진 사람만이 그를 추방하여 오랑캐가 있는 곳으로 보내어 중국과 함께 할 수 없게 했다.)’이라는 구절이 생각났다. 전제주의 국가 시절, 왕은 자신의 판단에 어긋나는 인물을 처벌하거나 추방하는 게 가능했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이란 책에선 그런 권한을 지닌 왕이 아무나 되어서는 안 되며 修身(몸을 수양함)’을 잘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추방이란 단어가 대학의 구절과 맞물린 까닭은, 이 단어 자체가 민주주의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을 읽고서 비로소 깨달았다. 이를 테면 나 자신을 닭 가운데 한 마리의 학이라 생각했었으나, 그런 체제 자체가 한 마리의 학을 위해 모두가 닭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었고 난 당연히 닭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추방은 결코 과거의 단어가 아니라 현재의 단어였으며, 나와 전혀 상관없는 단어가 아니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단어였던 것이다. 국가가 국민을 추방하고 학교가 학생을 추방하며 노동부가 노동자를 추방한다. 이게 웬 말이냐고? 그렇게 추방해선 어떻게 국가가 유지되고 학교가 유지될 수 있겠느냐고? 걱정 마시라. 모두 다 추방하는 게 아니라 국가의 입장에서 자기의 입장에 반대되는이들만 선별하여 추방하는 거니까. 그래서 미군기지가 들어서야 하기에 평택의 주민들은 쫓겨나야 했고 용산에 살던 상인들도 추방되어야 했다. 여기서 화성 앞 바다 간척사업으로 쫓겨난 어민의 절규는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평택 미군기지 반대 시위 중(2006.02.20)

우리는 국가의 주인이라기보다는 국가에 빌붙어서 생계를 꾸렸던 거지였구나. 우리는 국민이 아니었구나 (30p)”

추방과 법질서 강화

문제는 이렇게 추방당한 이들이 더욱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한 번 생각해볼만 하다. 추방당한 이들이 많다면 이들이 하나로 뭉쳐 그 절망감을 표현하고 당당히 주권을 행사할 수도 있는 거 아니냐고. 하지만 이런 생각은 현실에서 한계를 갖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척도(자본우월주의, 국가지상주의 등)를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고 그대로 내면화한 이상,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으니까. 오히려 날카롭게 항의하고 대항하려 하기보다 국가에서 내려주는 떡고물이라도 없는 지 처절하게 매달린다. 이들은 이 없어 이와 같은 어려움을 당한다고만 생각하기에 만 있으면 남들처럼 살 수 있으리라 착각한다. 그런데 지배층은 이렇게 추방당한 이들을 보면서 어떻게 대처하는가? 추방당한 이들은 언제든 맘만 먹으면 난리를 일으킬 수 있다는 두려움을 느낀다. 추방당한 이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여기는 것. 용산 참사의 피해자들이 가해자로 둔갑된 그 논리와 매한가지다. 이때부터 국가가 취할 수 있는 수단은 치안강화법질서 확립이다. 유독 돈 없는 자에게만 가혹할 정도로 정확히 적용되는 법의 이중성은 이렇게 완성된다. 이와 같은 요인들로 국가는 국민을 추방함에도 별 어려움 없이 유지되어 올 수 있었다. 어떻게 국민이 추방당하고 추방당한 그들조차 국가의 충실한 하수인이 될 수 있는 지, 우린 추방이란 개념을 통해 샅샅이 알 수 있다.





용산참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다. 지금의 일이며 미래의 일이다

추방당한 우리의 힘, 탈주

그렇다면 우린 그렇게 국가의 충실한 하수인이 되어 국가의 처분만을 바라며 살아야 하는 걸까? 바로 이에 대한 대답이 탈주. 탈주는 무언가로부터 벗어난다는 뜻이다. 과연 그 무엇은 무엇일까?

나는 대중들의 탈주 현상을 주변화와 대비해서 소수화라고 부르고자 한다. 주변화가 척도에 의한 부차화를 가르킨다면, 소수화는 척도로부터의 탈주를 가르킨다. 주변인으로써의 대중이 지배적 척도에 의해 인정받기를 꿈꾼다면, 소수자로서의 대중은 척도로부터 탈주한다. (39p)”

이를 좀 더 쉬운 이야기로 풀어보자. 내 자신이 학이 아닌 닭이었음을 깨달았다.(이게 바로 추방이다) 예전엔 학을 선망하고 나도 학이 되려 했을 것이다(주변화). 하지만 이젠 그 자체가 허구임을 알기에 더 이상 학이 되려 하지 않는다. 닭인 내 모습을 긍정하며 이 안에서 새 가치를 만들어 간다(소수화). 바로 이런 변화가 탈주이다. 탈주는 그래서 철학적인 용어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인 용어가 된다. 기존의 가치를 허물고 나만의 가치를 찾는다는 점에서 철학적이지만 그렇게 함으로 당당히 소수자의 삶을 살 수 있다는 점에서 사회적이다.

탈주는 생각함으로부터

과연 이런 탈주는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 자신만의 척도는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

그런 물음에 대한 해답은 현장인문학에 실려 있다. 내가 참 상쾌하다고 느낀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다. 교육이 학교라는 체계 속에서만 이루어져야 된다고 생각하거나 인문학은 삶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정신적 여유를 누리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큰 깨우침을 주는 부분이다. 바로 그런 고정관념 때문에 난 나 자신을 배반하며 나를 늘 궁지에 몰아넣기만 하는 척도를 신봉하는 게 아닌가. 잘 살기 위해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음에도 오히려 그게 삶을 파괴하는 것이 되기도 했다. 바로 그 생각 없음이 문제였던 것이다.

습관적으로 살아갈 때, 편견이나 통념에 빠져 있을 때, 어떤 강제적 명령 아래 있을 때, 우리는 어떤 입력된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기계와 다를 바 없다. ‘남들도 그렇게 사니까’,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그런 명령을 받았으니까’. 우리는 이 경우 아무리 정성을 다해 산다고 해도 '생각 없이' 사는 것이다. (145p)”

바로 그와 같은 관성을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우린 생각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생각하는 삶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길을 모색하게 하며 전혀 새로운 길을 창출하게 한다(장자는 이를 道行之而成<길은 걸어가면서 만들어진다>라고 했다) .

나만의 탈주법

내가 이와 같은 깨달음을 얻게 된 건 궁지에 몰렸을 때였다. 임용 시험에 떨어졌다. 집에 돈도 넉넉지 않았다. 배운 게 이것 밖에 없으니 어떻게든 교사가 되어야만 한다. 그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재수생들이 택하는 방법은 임용공부에만 몰두하는 것이다. 오로지 하나에만 신경 써서 꼭 합격하겠다는 일념으로. 그런 공부가 재미있을 리는 없고 삶의 의욕도 없다고 했다. 또 떨어지지나 않을까 겁만 난다고. 의욕도 열정도 다 소진되어 가던 동기들. 그렇게 죽을 둥 살 둥 공부해서 몇몇은 교사가 되었다. 하지만 난 또 떨어졌다. 떨어진 자의 자기 합리화 때문인지는 몰라도 난 그들이 그렇게 부럽지는 않다. 그들은 여전히 다른 업무에 골치 아파하고 있고 공부의 괴로움만 알고 공부했으니, 그런 공부를 가르칠 때는 더욱 괴로울 거니까.

그들이 임용공부에만 몰두할 때 난 다른 방법을 택했다. 그냥 책을 읽으며 사색하는 정도. 친구들은 척도에 매달려 있을 때, 난 탈주를 택한 거다. 그 독서는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됐다. 가장 큰 수확은 공부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고 그로 인해 임용 공부의 악순환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다른 길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고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때부터 현실을 느끼는 내 마음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임용에 떨어진 지금, 임용에 떨어졌다는 사실로 불행한 게 아니라 진정 공부다운 공부를 하고 현실을 긍정할 수 있어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는 것. 어찌 보면 현실은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 하지만 내가 주변화되었던 시기엔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가장 암울하고 빨리 벗어나야할 시기였던 데 반해, ‘소수화를 택하게 되자 지금은 가장 행복한 시간으로 변한 것이다. 나에게 일어난 이런 변화들을 기반으로 탈주를 가능하게 하는 현장인문학의 프로젝트를 긍정할 수 있었다. 나도 초보자이긴 하지만 인문학을 전공한 사람으로 그 프로젝트는 나에게 누군가와 소통을 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보였으니까.

추방된 그대여 탈주를 꿈꾸라

추방은 현실에서의 내 위치를 인식하는 것이고, ‘탈주는 새로운 가능성이었다. 이것들이 삶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드러나고 실천될 수 있을지, 그건 각 자의 실천성에 달려 있다. 내 자신이 여러 사상이 모인 코뮨 그 자체이듯, 우리 또한 앎의 코뮨을 이루어(연대하여) 가르치고 배우며 나날이 변해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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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왼쪽에서 가장 아래쪽까지 - B급 좌파 김규항이 말하는 진보와 영성
김규항.지승호 지음 / 알마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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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가 그랬던가? 괴물과 싸우는 동안 괴물을 닮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그건 자신이 극도로 혐오하는 일일지라도 그 환경에 계속 노출되다보면 어느 순간 익숙해지게 된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독재에 맞서 싸운 민주 진영 내에서도 획일화와 엄격한 상하관계를 강조하는 것이나,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을 비판하던 사람이 자식에겐 외고에 들어가라고 닦달하는 것이 그 예일 것이다. 그런데 그건 단순히 타인에 대한 비판으로만 끝날 문제는 아니었다. 나의 모습에서도 그런 아이러니는 있었으니까. 
 

오늘 군대 동기인 상남이와 중앙도서관에서 이야기할 시간이 있었다. 아무래도 군생활을 같이 했던 사람이다 보니 당연히 그 때 이야기가 나왔던 것이다. 지금은 그저 추억이란 이름으로 한껏 포장되어 있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하던 중 화들짝 놀라게 하는 구절이 있었다. 바로 양우주라는 후임을 내가 엄청 때리고 괴롭혔다는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상남이가 이야기해주는 사실은 더 악랄했다. 이게 충격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내가 후임일 때 여러 상황들로 선임들에게 당하면서 그런 것들을 되풀이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이다. 난 '군대 폭력'이란 것과 싸우고 있었던 셈인데, 그게 어느 순간 내재화되어 내가 선임이 되자 쏟아져 나온 것이다. 내 안에 숨겨져 있던 폭력성이 나온 것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난 꽤 악랄한 구석이 있었다. 난 꽤 선한 척하며 그렇게 한데 반해 상남이는 노골적으로 아이들을 괴롭혔으니 오히려 인간적이라 할만하다. 내 악랄함의 극치는 08년도에 청학동 겨울 캠프에서 드러났다. 난 30명가량을 이끌어야 하는 훈사라는 역할을 맡았다. 그곳은 군대 규율이 횡횡하는 곳이었다. 분위기를 다잡기 위해 연대 책임을 묻기도 하고 아이들의 발바닥을 때려 일벌백계를 하기도 했으니까. 내가 정말 '폭력성'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있었다면, '폭력'이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는 걸 알았다면 분위기가 아무리 그럴지라도 새로운 방법을 찾았을 거다. 난 기본적으로 내가 당한 '폭력'에 대한 반감정만 있었을 뿐, 그것 외엔 아무 것도 없었다. 난 그렇게 괴물이 된 것이다.

난 내 스스로 주위 환경 자체의 나쁜 점을 개선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에 그러한 환경을 철저하게 수호하는, 아니 더 적극 활용하는 '괴물'이 되어 있었던 셈이다. 이래서 사회변혁을 이루기 위해선 자기변혁이 더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리라. 이미 내 안에 알게 모르게 기존 관념들이(명예욕, 권력욕, 자본욕) 자리하고 있는데 그 관념의 허구를 비판하지 않고 어떻게 사회변혁을 이끌어 낼 수 있겠는가?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지금의 나를 되돌아 볼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줬다. 내가 ‘자본주의’에 대해,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에 대해 비판을 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넘어설 수 있는 지 고민했던 건 아니었다. 나야말로 예수가 비판한 ‘바리사인’이었던 것이다. 체제 유지에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오히려 체제 유지에 도움이 되는 존재였던 거다.

그가 말하는 ‘진보’와 ‘영성’이라는 게 무엇인지 조금은 알겠더라. 그건 자신이 있는 위치(계급적 위치)를 망각하지 않는 것이며 사회가 유포한 욕망에 내 몸을 맡기지 않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당연히 ‘영성’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영성’이란 신을 찾으면 만사가 형통한다는 그런 영성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그건 내 존재에 대한 물음이고 나 자신의 변화에 대한 물음인 거니까. 그래서 그는 ‘하루에 30분도 기도하지 않는 혁명가가 만들 세상은 위험하며, 혁명을 도외시하는 영성가가 얻을 수 있는 건 제 심리적 평온 뿐’이라고 말한다. 괴물과 싸우기 위해선 결국 외부의 괴물을 물리치려는 ‘혁명’적인 마음과 내부의 괴물을 물리치려는 ‘영성’이 동시에 필요했던 것이다. 나의 상황을 알게 된 지금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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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 2010-07-16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참으로 절절한 말씀입니다. 미워하면서 닮아가죠. 정말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leeza 2010-07-26 07:31   좋아요 0 | URL
맞아요..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렇더라구요. 그러니 늘 깨어있어야 한다는 거겠죠.

saint236 2010-07-23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자님 오랫만입니다. 김규항씨 참 난해한 분입니다.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분이죠. 그렇지만 분명한 건 그의 책이 짱돌이 된다는 겁니다. 이 책 한번 읽어봐야 겠네요

leeza 2010-07-26 07:32   좋아요 0 | URL
이 책은 대담 형식이라 재밌더라구요. 예수전을 통해 김규항씨를 알게됐는데, 과격한 면도 있지만 지금은 그래서 더 맘이 드는 거 같아요

dd 2013-02-22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렇죠...김정일 김정은 독재에 북한주민들이 무뎌지는거 같아 안타까워요...
 
그건, 사랑이었네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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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맛을 보려거든 먹어봐야 하고, 세상이 어떤지 알고 싶거든 문 밖을 나서봐야 한다. 누군가 사귀어 보고 싶거든 마음을 보여야 하며 책을 쓰고 싶거든 한 자, 한 자 적어내려가야 한다. 이것이야 말로 삶의 진리이다.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란 속담이 담고 있는 이런 진리를 체득해 나가는 게 바로 우리의 삶의 여정이리라.  

  떠나보는 거다. 여태껏 우린 여행 중이었고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었을 뿐이니까. 그 목적지에 왜 아직 도착하지 않았느냐고 어리석은 질문은 던지지 말자. 삶이 여행이라고 한다면, 목적지에 도착하는 건 죽음 이후에나 가능한 걸테니. 그저 지금은 내가 목표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 지만 살펴보면 된다. 방향이 틀리다고 큰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닐 테지만 그 낯선 환경에 소스라치게 놀라 여행을 그만두고 싶을 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의욕이 꺾인다면 여행은 그 순간부터 지옥이 될 거다. 꼭 도착지점에 제대로 가지 않아도 그만이다. 방향만 맞다면 언제고 도착은 할 테니까. 그게 그저 돌고 도는 듯, 시간 낭비인 듯 보일 테지만 실상 더 좋은 시간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생각지 못한 인연을 만날지도 모르고 전혀 뜻밖의 상황을 만나 다른 시공간으로 들어가게 될지도 모르니. 그러니까 그 방향만 맞다면, 줄곧 가보는 거다. 그럴 때 중요한 것은 조급해하거나 '이 쪽으로 가면 길을 헤매게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쓸데 없는 걱정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든 활짝 웃고 당당히 걸어야 한다. 자신을 믿는 그 마음 속에 길도 서서히 열릴 테니까.  

  내가 도보여행 중 익산 함열에서 논산으로 걸을 때도 그랬었다. 국도의 번잡함과 위험함을 피해서 지방도의 굽이길을 택했다. 그 길엔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지 않으니 지도를 똑바로 보고 길을 찾아가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도 보기가 서툴렀던 나는 길을 잃고 말았다. 지금 내가 가는 길로 똑바로 간다해도 방향이 맞을 거라는 확신도 없었다. 이미 고창에서 길을 잃고 빙빙 돈 경험이 있는지라 더 겁이 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기에 가만히 있어서는 아무 일도 되지 않는다. 그래서 걷던 길을 무작정 걸었고 걷다보니 표지판이 보이더라. 그런데 그 곳이 어디인지 아무리 지도를 봐도 모르겠더라. 하지만 단서 하나는 잡았다. 강경 쪽으로 가는 길을 알게 됐으니까. 그 방향만 알고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걷다보니 5시가 좀 넘어서야 논산에 도착하게 되더라. 헤매게 되어 불안하긴 했지만 방향만 맞다면 길은 통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비야씨는 9년 간의 월드비젼 국제구호팀장의 역할을 그만 두고 대학교 석사 과정에 다니기로 했단다. 열정적으로 했던 일을 그만두고 다시 새로운 일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갈등과 고민들이 있었을까? 어떠한 경로를 거쳤건 그녀는 다시 시작 지점에 서있다. 그런 그녀의 모습과 나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건 왜였을까? 난 그녀가 그녀의 길을 굳건히 잘 가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덩달아 석사 과정이 끝났을 때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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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 88만원세대 새판짜기
우석훈 지음 / 레디앙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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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말로 위로를 해줄 수 있을까? ‘뭐든 다 잘 될 거야?’라는 낙관주의, 그것도 아니라면 ‘참고 고생했으니까 이제 교사가 될 수 있다.’는 보상주의. 물론 일 년간 교사가 되기 위해 맹목적으로 달려왔다. 지금의 이 회한도 그런 노력에 대한 대가(?)가 주어지지 않아서 이지 않은가? 그래서 교사가 되면 ‘불행 끝, 행복 시작’이라 생각하는 걸테고. 하지만 과연 지금의 이런 회한이 그렇게 꿈꾸던 교사가 되었다고 사라지긴 할지 의심스럽다. 꿈을 이루는 순간 성취감에 들뜰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이런 마음이 누그러지지는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경쟁 중심의 교육 체제(일제고사), 획일화된 교육방식, 교사와 학생의 자율을 침해하는 관료 중심의 자율화 등의 현실은 또 다른 갈등을 불러일으킬 게 뻔하다. 교사가 되는 순간 모든 게 다 해결될 거라 생각하는 것 자체가 유아적인 발상일 뿐이겠지.
 

결국 꿈을 이루었다손 치더라도 그게 이 회한을 풀 순 없다는 사실. 그게 솔직히 더 절망스럽다. 내 안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인 관념들이 날 꽁꽁 얽어매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결국 우리의 삶은 ‘행복’과는 거리가 먼 그런 것이란 말인가? 늘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아등바등 하지만 그렇게 자신의 행복과는 멀어지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걸 이 책에선 ‘두려움’이라는 말로 풀어낸다. 신자유주의 경제 논리를 몸으로 체화하여 승자독식주의를 당연한 듯 여기고 타인을 적으로 여기며 살아온 자가 느끼는 감정, 그게 바로 '두려움'이란다. 합격 또한 누군가를 이겨낸 승리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렇기에 또 누군가에게 패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생기는 것도 당연하다. 이기지 않으면 질 수밖에 없는 무서운 정글 서바이벌. '배틀로얄'의 장에 들어선 자의 운명인 셈이다. 피할 수 없는 ‘두려움’과 ‘불안’에 저당 잡힌 인생살이, 그게 바로 대한민국 20대의 피할 수없는 삶의 모습이다. 
 

이런 삶의 모습은 임용고시반에서 잘 드러난다. 모두 한 마디 이야기도 없이 각 자의 공부에 빠져 있다. 훗날의 성공을 그리며 지금 이 순간을 고통 속에 몰아넣고 자학하고 있는 것이다. ‘저격수’(책에 이 개념이 소개되어 있음)가 되기 위해 고독을 감수하는 처절함. 간혹 나누는 이야기는 음울하기 그지없다. 막상 공부는 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교사가 된다는 보장도 없고 선발 인원도 줄어들다보니 한껏 울분을 토로한다. 우리의 대화에선 공부를 통해 삶을 변화시켜나갈 비전이라든지, 어떤 교사가 되고자 하는 지에 대한 문제의식 따위는 전혀 없다. 단지 지금껏 맹목적으로 걸어왔던 유일한 길에 붙들려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해 서로의 눈치만을 살필 뿐이다. 이런 ‘두려움’이 주된 정서이다 보니, 사회에 대해 관심 갖을 수도, 자신에 대해 관심 갖을 수도 없다. 그럴만한 마음의 여유도, 그러고 싶은 마음도 일절 없는 거다. 또한 스터디를 구성한다해도 임용이란 틀에 맞춘 공부만을 계획할 뿐이지 삶의 지평을 넓히기 위한 진지한 모색은 이루어지지 못한다. 그래서 우린 같이 얼굴을 맞대고 있지만 무척이나 외롭고 같이 이야기하고 있지만 벽을 보고 이야기하는 듯 답답하기만 하다. 과연 이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렇게 동료 간에 연대도 하지 못하고 소통도 하지 못하는 우리들이 선생님이 된다해서 ‘참교육’을 할 수 있긴 할까? 누군가를 이겨 그 자리를 얻은 만큼 더욱 철저하게 '승자독식의 복음'을 전파하고 있지나 않을까?
 

이런 음울하기 짝이 없는 현실에서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내면에 갇혀 있는 20대가 너무도 많다. 물론 나 또한 그런 20대 중의 한 명이긴 하지만. 이런 우리들에게 우석훈 씨는 말한다.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은 변화에 재빠르게 적응할 수 있지만, 잃을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결국 가진 것을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다 ‘사회적 지탄’ 세력이 되는 것, 그것이 역사가 주는 교훈이다 (142p)’
 

내 친구는 우리처럼 사회에 발붙이지 못한 존재를 ‘먼지 같은 존재’라고 비하하기도 했다. 또한 이 책의 끝에 붙어 있는 학생들의 기록문에선 ‘잉여존재’라고 표현했다. 이건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의 다양한 변주이리라. 그런 잃을 것이 전혀 없는 우리들이 뭐가 아쉬워서 기존에 만들어진 치열한 약육강식의 길만을 좇아가려 애쓰고 있었던 걸까? 그건 결국 우리 스스로가 새로운 길을 만들 수 없던 ‘상상력의 빈곤’, 그 자체가 문제이지 않았을까. 그저 지금의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야만 한다는 경쟁주의를 당연한 듯 느껴온 우리가 문제이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런 사실을 알았다손 치더라도 무언가를 새롭게 창안해 낸다는 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무언가를 새롭게 구상해본 적이 없다보니 사람들과 어떻게 어울려야 하는지도 어떻게 우리가 걸어갈 길을 만들며 나아가야 하는지도 모르니 말이다. 누군가가 정해놓은 길을 따라가는 건 내 자신이 갈 길을 만들며 가는 것보다 쉬운 일이다. 순종의 고통은 창조의 고통보단 덜한 게 사실이니까. 이런 상황이다보니  다시 무언가에 저당잡힌 삶으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에 빠지기도 한다. 매트릭스 1편의 스테이크 한 조각의 황홀에 빠져 노예로 다시 돌아가고자 했던 '싸이퍼'(Cypher)'처럼 말이다.


 싸이퍼, 그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논쟁은 많다. 성경에서 은 30냥에 예수를 판 유다와 같은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할 수록 더욱 큰 고통과 회한만이 우리를 감싸고 돌 뿐이라는 거다. 다음의 고병권 씨의 말은 그런 우리의 회귀하려는 마음에 일침을 놓는다.
‘행동은 결코 늦지 않는다. 언제나 후회만이 늦을 뿐 (고병권)’
 

나도 여기서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임용 천당, 실패 지옥'을 전복시켜 '임용 지옥, 실패 천당'이란 상상력을 지니는 것이다. (단순한 이분법으로 봤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겠는데, 임용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하는 생각이다) 조직에 들어가 조직의 부속품적인 존재로 아이들을 옥죄지 않게 되었다는 것, 밖에서 여러 활동들을 통해 '참교육'을 펼칠 수 있다는 것 등이 그런 상상력을 뒷받침 해준다. 물론 더 많은 고뇌와 노력이 필요할 테지만 말이다. 
 

그래서 나는 공부를 통해 임용을 준비하는 이들과 다른 삶을 기획해보려 하는 거다. 공부란 것이 삶과 괴리된 것이 아니라 삶 그 자체에 대한 깨달음이며 존재의 증명이라는 걸 같이 토론하며 알아가는 것. "행복해지기 위해 어린 아이에게 더 기다리라고, 노인에게 이미 지나갔다고, 노예나 매춘부에게 포기하라고 말해선 안 된다. 누구나 지금, 그 자리에서 함께 행복해야 한다. (에피쿠로스)" 지금이 순간을 위한 공부를 하자는 것. 생이 '활발발'하게 약동하는 공부를 하자는 것. 그렇기 때문에 공부하는 그 순간, 행복이 찾아오는 것이지 미래에 뭔가를 얻게 될 거라 말해선 안 된다. 독서와 공부를 통해 나의 생각들이 조금씩 변해갔듯이 모두 다 느끼는 문제점을 함께 공유할 수 있다면 지금의 이 ‘두려운’ 현실도 벗어날 수 있는 상상력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교사가 된다면, 두 말할 나위 없이 학생들에게도 그런 ‘공부다운 공부’를 전해줄 수 있는 교사가 될 수 있겠지. 그렇게 공부를 통해 소규모 연대가 이루어지고 그게 다시 뭉쳐서 더 큰 규모의 연대체로 발전한다면 우리의 열정이 이 세상을 조금 더 나은 세상으로 바꿔나갈 지도 모른다. 너무 이상적일지도 모르겠지만, 내 안의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현실과 이상 사이를 조율하며 짜임새를 갖추어 나가고 있다.

  



 <베토벤 바이러스의 마지막 장면이다. 마우스필의 마지막 공연에 공항으로 떠난 줄 알았던 강마에와 강건우가 마주친다. >



강마에 : 멍청한 짓들을 하고 있으니까 그렇지. 그렇게 실패했으면서도 몰라. 이건 끝이야. 시향도 그렇고 너희도 그렇고. 끝난 거라고.
건우  : 끝이라뇨? 이제 시작인데. 여기서 관두면 맞는데요. 또 덤비면 또 다른 길이 열리는 거잖아요. 그렇게 될 때까지 계속 가면 그게 바로 성공이고요
 

지금 당장 실패한다 해서 큰 문제가 일어나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좌충우돌하며 또 덤비고 덤벼야 한다. 그렇게 될 때까지 가보는 거다. 미래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단지 그 열정 하나로만 믿고 달려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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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의 달인, 호모 부커스 2.0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7
이권우 외 지음 / 그린비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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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풍경은 사람을 감동시킨다.  

그런데 좋은 풍경이란게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늘 주위에서 보아오던 그 풍경이 그 좋은 풍경일 수 있으니까. 단지 내가 무심코 지나치니 풍경은 저멀리에 있는 어떤 것으로 치부되는 것일 뿐이다.  

구름을 보며 '저건 수증기들이 모여 만들어진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은 얼마나 운치가 없나? 구름을 보면서 솔개를 떠올리고 거북이를 그려낼 수 있는 사람만이 내 주위의 풍경을 볼 수 있는 사람이리라.  

책에도 풍경이 있다. 그건 어떤 책이건 마찬가지인데, 이 책은 저자들이 읽은 책에 대한 풍경에 대한 서술이다. 책을 왜 읽는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읽는지? 요소요소 나누어 수록해 놓은 공동 저작물이다.  과연 이 책을 쓴 저자들은 책에서 어떤 풍경을 본 것일까?

이런 책의 장점은 짧은 글들이 여러 편 실려 있으니, 시간 될 때마다 하나씩 나누어 볼 수 있다는 거다. 하지만 그 점이 단점이 되기도 한다. 책 전체의 일관성도 없고 글의 깊이 또한 제각각이니까.  

책을 읽긴 해야 겠는데, 왜 읽어야 하는지 잘 모르는 사람이나, 어떤 방식으로 책을 읽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에게 권할 만한 책이다. 책을 통해 책을 소개하는 아이러니가 가득 담겨 있는 책이니까^^ 

<여담 : 이 책은 내가 쓴 첫 책이다. 공동 저작물이니 나의 책이라고만 할 수는 없겠지만. 여기서 한 발자국 나가다보면 언젠가는 정말 나의 책을 낼 때도 오겠지. 그 첫걸음을 자축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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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0 08: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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