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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서구를 만들다 - 알타미라에서 게르니카까지, 서구 근대를 밝힌 예술 읽기
이순예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9년 1월
평점 :
'기억은 항상 선택적이다. 내가 기억하는 나는 실제 내 삶에 일어났던 수많은 사건들 가운데 내게 유리한 것들로만 구성되는 기억의 게슈탈트다. (...) 이러한 기억의 선택적 구성을 통해 자기 아이덴티티가 성립된다. 자기를 서술하는 방식이 자기 자신이 된다는 이야기다. '내가 이야기하는 나'가 '나'다. (일본열광 105p)'
우리가 어떤 사건을 겪고 그걸 이야기 한다고 해보자. 과연 그 이야기가 얼마나 객관적일까? 얼마나 사실 그대로에 근접한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솔직히 이런 질문은 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우리는 외부의 사건을 우리의 시신경을 통해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바로 느낌이 오는 건 아니다. 그걸 걸러내는 기제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뇌를 통해 어떤 사실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결정하고 받아들이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실들은 흐릿한 배경으로 처리되어 아무 의미도 남지 않는데 반해, 어떤 사실은 나의 관념까지 덧씌워져 확실한 이미지로 남는다. 위에 인용해 놓은 구절은 바로 이런 사실을 명확히 보여준다. 어쩌면 사실에 접근하려는 그 마음 자체가 오류 투성이인지도 모른다. 사실에 접근하려 하면 할 수록 진실은 저멀리 나를 비웃듯 멀어질 것이니까. 그런 꼬이고 꼬인 삶의 진실을 보여주는 영화가 있다. 바로 '羅生門'이 그것이다.

라생문(나쇼몬)이란 제목 자체가 생이 꼬이고 꼬였다는 걸 표현해 놓은 걸거다. 그 생의 진실을 알려고 그 꼬인 것을 풀려고 하면 할 수록 더 꼬여 간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어떻게 진실을 담보할 수 있다는 말인가? 사무라이와 아내가 길을 가다가 도둑의 침입을 받아 아내는 겁탈당하고 사무라이는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하지만 그 사건을 보고서 그걸 이야기하는 사람마다 그 이야기는 서로 다르다.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은 빼고 자신만의 관점으로 사건을 풀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진실을 알려할수록 꼬이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사람 수만큼 진리는 존재한다.' 이 말이 괜한 이야기가 아님을 알 수 있는 대목이며 '기억은 항상 선택적이다'라는 말이 제대로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진리가 정말로 있는 줄 알았다. 어느 하나로 귀결되어 갈 수 있는 절대선이 있는 줄만 알았다. 그래서 근대화를 이룬 지금 전근대화란 명칭으로 표현되는 조선 시대 이전을 맹목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 때에 비해 지금은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진보하였으니, 그 때를 비판하는 것을 옳다는 거다. 하지만 이미 위에서부터 살펴보았듯이 진보란 말은 어색하다. 그건 하나의 절대선이 있어 거기에 조금씩 다가간다는 것인데, 애초에 그런 절대선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근접 사물을 보는 능력을 발달시켜 현재와 같은 물질 문명을 이뤘다 하더라도 그건 진보라고 할 수 없다. 그럼으로 해서 자연과 감응할 수 있는 능력을 잃었으며 원거리의 사물도 꿰뚫어볼 수있는 능력은 퇴화되었으니까. 진보와 퇴화, 고로 인간의 진보는 어느 한 면에서만 판단한 것일 뿐이다. 그렇기에 진보라는 이름을 들이대며 현재를 개선해야 한다고, 미래의 행복한 삶을 위해 지금의 불행 쯤은 참고 이겨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속내가 의심해보아야 하는거다

위에 보이는 것은 '라오콘 군상'이다. 라오콘은 트로이 신관이다. 그렇기에 천주교에서 보면 이교도의 사제일 뿐이다. 그런데 이 군상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바티칸 박물관에 있다. 종교적 공간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거다. 이것이야말로 형용모순이지 않나? 좀더 쉽게 말하면 교회 강단 앞에 부처 목상이 올려 있는 거와 같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가? 그것이야말로 해석의 자유가 낳은 정치적 역학 관계의 소산이었던 셈이다. 라오콘은 신들이 합의를 하여 트로이를 없애려 하는 것에 온 몸으로 맞서 거부하다가 저와 같은 고난을 당하게 된 것이다. 바로 그와 같은 인간 정신의 우월함이 종교적 전통과 만나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교도 사제라는 관념은 지워버려도 된다. 바티칸에서 취한 것은 라오콘의 밝게 빛나는 헬레니즘적인 인문정신에 있기 때문이다. 어떤 예술품조차 인간은 '선택적'인 해석만을 덧붙여 자기에게 유리하게 활용하고 있음을 여기에서도 여실히 볼 수 있다.
이 책에는 예술품이 지닌 미적 속성을 밝히는 책이 아니다. 그 예술을 둘러싼 당대 지배세력의 해석이 어떠한지 살피며 예술이 나아가야할 올바른 방향은 무엇인지 탐구하는 책이다. 예술은 이미 고정된 해석 자체가 없다는 것이며, 단순히 정해진 어떤 진리일 수 없다는 것이다. '라생문'이란 영화에서 그랬듯이 그걸 분석하는 사람들의 자기 관점이나 자기 합리화가 들어 있다는 거다. 바로 그 속내들이 주술이 넘쳐 흐르던 중세를 지나 인문정신이 광채를 발하는 서구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지금껏 우리가 '동양보다 우월한 서양'이라 말할 때의 그 '서양'을 있게 한 원동력이 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따라가고자 했던 서양은 정말 낙원과 같은 세상이었던가? 그건 서양인들 뿐만 아니라 우리 동양인들의 착각이었을 뿐이다. 애초에 진보라는 말이 어색했듯이 좀더 발전했다던 서양은 좀더 타락한 그 무엇일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 결론을 내린다. '예술은 잘 '놀' 때, 자신의 본분에 가장 충실할 수 있다. 놀아야 하는 까닭은, 개념이 문명인의 정신과 세계를 지배하는 것을 저지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416p)' 예술이 그와 같은 하수인의 노릇에서 탈피하여 놀이로 다시 태어날 때 예술의 본래 의미가 살아난다는 것이다. 예술이 인간을 자연과 분리시키고 인식과 몸을 분리시켰을 때, 그 안에서 인간은 고립감을 느끼며 울부짖어야 했다. 바로 그와 같은 현실을 과감없이 드러내어 고립감을 해소시켜줄 수 있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호모루덴스(놀이하는 인간)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니까. 어떤 획일적인 해석들을 지양하고 그 안에서 밝게 뛰어놀 수 있을 때 예술의 본래 의미가 살아 난다. '놀이와 유머, 웃음이 이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 덕목들은 사실 근대 인간들에게 가장 결여된 것이고, 근대의 도덕이 가장 경멸했던 것이다 (이것은 애니메이션이 아니다 [고병권])' 예술을 통해 우린 근대 인간이 잃어버렸던 놀이와 유머, 그리고 웃음을 찾아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우린 누군가의 의지가 깊이 개입된 진보라는 논리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