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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협화음론자 비고츠키 그 첫번째 이야기 - 탈심리학을 선동한 미완의 사상가와의 대화
박동섭 지음 / 서현사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비고츠키 강의가 끝났다. 6강 동안 치열하게 무언가 알고자 했지만 헛수고였다. 불량주부님의 관점이 있어야 상이 맺힌다라는 말처럼 무언가 나만의 관점이 있어야 할 텐데, 아무 것도 없으니 맺힐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내 특기는 무조건 열심히 듣는 것이다.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는 심정으로 열심히 들었는데, 내 귀는 어찌나 뻥뻥 잘 뚫려있던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말았다. 흘리는 과정 속에 뇌를 거쳤기에 뇌에 잔상이 남아 있을 만도 한데, 별똥별처럼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이럴 때 도움이 되는 건 순간순간 끼적거려 놓은 글일 텐데, 지금 들여다보면 도무지 무슨 말을 듣고 이런 글을 써놨나 싶기도 하다. ~ 참새보다 약간 좋은 나의 기억력이 한스럽다ㅠㅠ

 

기억은 추억을 배반한다

그런데 이런 넋두리도 사실 부질없는 짓이다. 언제나 기억은 추억을 배반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잘 기억했다 한들, 그러한 기억은 왜곡된 사실일 수밖에 없다. 강의를 듣는 순간, 나에게 의미 있는 내용만을 취사선택하여 기억한다. 그걸 글로 적거나 남에게 이야기할 땐, 모두 다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또한 취사선택하게 마련이다. 두 번의(또는 그 이상의) 취사선택 과정을 거치며 표현하다보면 어느새 강의 내용과 표현 내용은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 메멘토란 영화는 이러한 기억의 속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기억과 기록이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믿을 때 불행은 시작된다는 걸 보여주던 영화

 

그렇기에 객관적인비고츠키 강의 후기를 쓰려는 욕심은 버리련다. 그저 느낌 그대로, (feel)을 살려서 나에게 비고츠키는 어떻게 다가왔는지 써보려 한다.

 

마리가 요리를 만든 이야기로 학습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열강하던 교수님 모습.

결연한 듯, 당당한 듯.

 

人間 그리고 삶

사람이란 결코 혼자 살아갈 수 없다. 사람과의 관계, 도구와의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한자로 표현하면 人間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무엇과 무엇의 사이에서 살아간다는 뜻이다. 내 안에 있는 지식이 나의 독창적인 것일 수 없으며, 내가 살아가는 방식도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고려하지 않은 채, 나만 뚝 떼어내어 객관화시켜서 말할 수 있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서서

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

 

저렇게 저 혼자서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린 몇 밤

저 안에 땡볕 한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이 들어서서,

둥글게 만드는 것일 게다.

 

대추나무야!

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

대추 한 알장 석주

어디 대추만 환경과 통하였겠는가. 사람도 똑같은 것을.

 

한 개인에게 책임지우는 개체환원주의의 오류

우리를 구성하는 수많은 관계들은 생각지도 않은 채, 모든 문제점을 한 개인으로 환원하여 생각하기 쉽다. 예를 들면 능력의 유무, 성실성 유무, 장애의 유무 등을 말이다.

 

    능력의 경우

학교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을 보고선 능력이 있다고 판단하고, 그런 학생일수록 역시 난 놈은 뭘해도 잘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반면 공부 못하는 학생을 보고선 능력이 떨어진다고 판단하고, 뭘 조금이라도 잘 한다면 어쩌다 보니 그런 것 뿐이라고 단정짓기 쉽다. 이런 판단을 통해 우린 능력개인의 특성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자. 여기서 유능이라는 판단 근거는 무엇인가? 바로 추상적 사고 능력의 뛰어남. 바로 그런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니, 기준에 맞는 사람은 유능한 사람이 되고, 맞지 않는 사람은 무능한 사람이 된다. 그런데 학교 시스템 자체가 운동 능력이 좋은 사람이 유능한 사람이라는 기준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되면 지금의 유능한 사람들은 무능한 사람으로 낙인찍힐 것이고, 반면에 무능한 사람들은 순식간에 유능한 사람으로 탈바꿈하게 될 것이다.

결국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개체가 지닌 능력이란 개인이 지닌 게 아닌 사회 시스템에 의해 구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장애의 경우

능력은 그렇다 쳐도 장애 또한 사회시스템에 의해서 정해진다는 말엔 반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눈이 멀었거나 귀가 들리지 않는다면, 그건 장애이지 정상은 아니지 않은가?’라는 물음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이미 푸코의 책 광기의 역사를 통해 밝혀진 바 있다. 광기 또한 근대 이전엔 좀 남다른 사람이라는 인식만 있었을 뿐 사회에서 배제하거나, 정신병원에 가둬야 할 질병으로 인식되진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성적 사고와 효율이 사회 전면의 가치로 떠오른 근대에 이르러선 광기가 있는 사람은 정신병원에 격리되고 치유되어야만 하는 질병을 지닌 존재로 취급받기 시작한다. 이처럼 개인의 정신 상태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장애로 취급될 수 있다.

이런 예에 빗대어 박동섭 교수님은 노라 엘렌 그로스Nora Ellen Groce가 집필한 여기서는 모든 이들이 수화로 말하였다 Everyone Here Spoke Sign Language라는 책을 소개했다. 미국 근해에 위치한 비니어드 섬엔 유전적 청각장애인들이 많이 태어났는데, 이 곳 사람들은 수화를 기본 언어로 익혔기에 청각장애인들이 차별 받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고 한다. 문화인류학자가 그러면 그동안 살면서 할머니가 만났던 청각장애인들은 전부 몇 명이었습니까?”라고 묻자, 할머니가 대답을 하는데 이 대답이야말로 장애도 사회 시스템에 의해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 그들은 장애인이 아니었어요, 단지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지만요.”

 

 

단지 듣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인식과 장애인이라는 인식엔 레테의 강만큼의 격차가 있다. 현대엔 심리학이 주요 학문으로 떠오르면서 현대인은 모두다 정신병자가 되고 말았다. 과연 우린 정신병자인가, ‘팔팔 끓는 감정을 지닌 사람인가?

 

엑스맨은 남다른 능력을 지닌 사람들을 돌연변이로 볼 것인가, 좀 특별한 능력을 지닌 사람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는 영화다.

교정이나 치유는 한 개인을 장애인이나 돌연변이로 인정할 때만 사용할 수 있는 용어이다.

 

우린 결코 닫혀 있는, 완결형의 존재들이 아니다. 환경과 끊임없이 소통하며 열려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도 우린 왜 개체환원주의를 의심하거나, 되묻지 못한 채 사회나 학교가 규정지은 특성이 나의 모습인양 착각하며, 그런 기준으로 남까지 판단하며 살아가는 것일까? 그건 무언가를 묻고 새롭게 디자인할 힘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

 

개체의 관점이 변하면 학습이란 관점도 변해야 한다

박동섭 교수님이 말해준 마리의 요리 만들기라는 이야기는 충격을 넘어 혼란의 도가니였다. 그건 지금까지 지녀왔던 학습=획득의 공식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며 학습=실천이란 새로운 관점을 갖게 했기 때문이다. 물론 앞으로도 끊임없이 화두로 삼아야 할 이야기이지만 말이다.

 

마리는 중증장애인이다. 그래서 몸조차 가누기 힘든데 글쎄 요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만 듣고 보면, 누구나 마리가 직접 요리 재료를 샀고 직접 손을 움직여 요리를 했다는 정도로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마리는 여러 사람의 도움을 빌려 요리를 만들었다. 마리는 재료도 직접 사지 못했으며 요리도 손수 만들지 못했다. 단지 고개를 끄덕이거나 손을 미묘하게 움직이는 동작을 통해 요리 만들기를 선두지휘했을 뿐이다. , 그녀는 의지만으로 요리를 만든 것이다.

과연 이걸 학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야기를 듣고 나선 잠시 멍해졌다. 이건 학습에 대한 관념을 완전히 뿌리째 뽑지 않고서야 도무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이야기이니 말이다. 보통 정의하는 학습이란 개인의 내면에 어떤 능력을 획득하는 것인데, 마리는 어디에서도 그런 능력을 획득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관점으로 나를 보면, 나 또한 여러 문화적 도구와 성취물의 도움을 통해 무언가를 해왔을 뿐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컴퓨터를 개발한 사람들의 도움, 전기를 발명한 사람의 도움, 끼적거릴 종이를 발명한 사람의 도움 등 수많은 사람의 도움을 등에 업고 있다마리와 나는 다양한 도구(물론 사람의 도움도 포함된다)를 사용하여 자신이 원하는 일을 했다는 점에서 같은 게 아닐까?

더욱 현실적인 예로 대기업 회장들은 어떤가? 그들이 직접 반도체를 만들기를 하나, 각 계열사의 일들을 일일이 알아서 할 수 있길 하나. 회장은 자신의 어떤 의지만을 직원들에게 보일 뿐이고 실제 일을 하는 사람들은 부하직원들이다. 마리와 대기업 회장의 모습은 비슷한 게 아닐까. 하지만 마리는 중증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요리도 만들 수 없는 무능력자로 낙인찍히고 회장은 최고경영자라는 이유로 존경(?)과 대우를 받는다. 이와 같은 부조화를 어떻게 재평가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학습능력사회와 인간의 관계를 보는 눈도 달라질 것이다.

 

안다는 것, 그건 끊임없는 투쟁의 길이다

관성대로 살 때 우리의 삶은 편하다. 더 이상 머리 아프게 공부할 필요도, 내가 발 딛고선 현실을 부정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불편함에 익숙해진 결과이고 왜곡을 합리화한 결과이지 않을까? 학교에서 정한 성적 따위로 사람을 판단하고, 기업이 정한 기준으로 나만의 가치를 죽이고 스펙으로 가득 찬 기계덩어리로 만드는 것이 과연 편하고 좋은 것일까. 그렇기에 박동섭 교수님은 어떤 사실을 알았다는 것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긴장감을 유지하고 살아야 합니다.”고 말했던 것이리라.

 

현실의 부조리를 아는 순간, 어떻게 살지 막막해졌다. 하지만 그 순간의 혼란은 짜릿한 황홀감이었다. 내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떻게 끊임없이 긴장감을 유지한 채 디자인된 현실의 그물망에 걸려들지 않을지, 그게 고민이다. 밑에 인용해 놓은 구절은 바로 이와 같은 긴장감을 잘 보여주는 글이다.

 

한 백정이 문혜군 앞에서 소를 잡았다. 그가 손을 놀리고 어깨에 힘을 주며, 발로 밟고 무릎을 굽힐 적마다, 칼질하는 소리가 쓱싹쓱싹 울려 퍼져 음악의 가락에 맞았다. 그 동작은 상림의 춤과 같았고, 그 소리는 경수의 악장을 연상케 하였다.

庖丁爲文惠君解牛, 手之所觸, 肩之所倚, 足之所履, 膝之所踦, 砉然嚮然, 奏刀騞然, 莫不中音. 合於桑林之舞, 乃中經首之會.

 

문혜군이 말했다. “과연 훌륭하구나. 솜씨가 어찌 여기까지 이를 수 있느냐?”

文惠君曰, 善哉! 技蓋至此乎?”

 

백정이 칼을 놓고 대답하였다. “제가 좋아하는 것은 이며, 이는 솜씨 이상의 것입니다. 제가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는 소의 겉모습만 보였습니다. 3년이 지나자 소의 온전한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다만 마음으로 일할 뿐, 눈에 의지하지 않습니다. 감각기관은 멈추고 마음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큰 틈을 벌리고 그 속에 칼을 넣는 것은 본래의 생김새에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까지 힘줄이나 근육을 베는 일이 없습니다. 하물며 큰 뼈다귀겠습니까?

庖丁釋刀對曰臣之所好者道也, 進乎技矣, 始臣之解牛之時, 所見无非全牛者. 三年之後, 未嘗見全牛也. 方今之時, 臣以神遇而不以目視, 官知之而神欲行. 依乎天理, 批大卻 導大窾因其固然, 技經肯綮之未嘗微礙, 而況大軱乎! 

 

노련한 백정도 해마다 칼을 바꾸는데 이는 살을 베기 때문입니다. 보통의 백정은 달마다 칼을 바꾸는데 이는 뼈에 부딪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칼로 19년 동안 수천마리의 소를 잡았습니다. 하지만 아직 칼날은 새로 숫돌에서 빼낸 듯합니다.

良庖歲更刀, 割也. 族庖月更刀, 折也. 今臣之刀十九年矣, 所解數千牛矣, 而刀刃若新發於硎.

 

원래 소의 뼈마디에는 틈이 있으나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것을 틈에 밀어 넣어 여유 있게 놀리는 까닭에 19년이나 써도 칼날은 여전히 숫돌에 간 듯이 예리합니다. 그러나 막상 뼈와 힘줄이 엉겨 있는 곳에 다다르면 저는 늘 긴장합니다. 저는 눈을 그 곳에 응시한 채 동작은 더디게 하고 칼의 움직임은 심히 섬세히 합니다. 그러다가 살덩이가 후두둑 아래로 떨어져, 일이 끝나면 비로소 마음이 놓이게 됩니다. 그때서야 저는 칼을 든 채 일어나서 사방을 둘러보며, 머뭇거리다가 이내 흐뭇해져서 칼을 닦아 넣어 둡니다.“

彼節者有閒, 而刀刃者無厚. 以無厚入有閒, 恢恢乎其於遊刃必有餘地矣. 是以十九年而刀刃若新發於硎. 雖然, 每至於族, 吾見其難爲, 怵然爲戒, 視爲止, 行爲遲. 動刀甚微, 謋然已解, 如士委地. 提刀而立, 爲之四顧, 爲之躊躇滿志, 善刀而藏之.”

 

문혜군이 말했다. “훌륭하구나. 나는 그대의 말을 듣고서 삶을 기르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文惠君曰善哉! 吾聞丁之言, 得養生焉.”                          莊子』「養生主篇

 

 

비고츠키는 백정이다. 이게 웬 막말인가 할 테지만, 내가 볼 땐 두 사람이 지닌 삶의 긴장도는 같기 때문에 이런 막말을 한 것이다.

윗글은 백정, 소와 통하였느냐?’쯤 될 것 같다. 백정이 소에게서 살을 베어낼 때 뼈와 살의 자연스런 흐름에 따라 칼을 들인다. 그러니 칼은 하나도 손상되지 않고 뼈와 살이 자연스럽게 분리되더라는 것이다. 백정은 전문가다. 하지만 처음부터 전문가는 아니었다. 그러니 처음엔 잔뜩 긴장하여 소의 겉모습에 기가 질렸던 것이다. 하지만 3년이 지나자 감각기관 너머의 본질을 볼 수 있게 되었단다.

그쯤에서 글이 끝났다면 이글은 평범한 글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능숙하다 할지라도, 뼈와 살이 엉켜있는 곳(나의 능숙함으로도 도무지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이르면 모든 자의식을 걷어내고 더욱더 긴장을 해야만 한다고 말을 이어가기 때문에 이 글은 명문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알게 된 것만으로는 절대 끝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건 매순간 긴장 속에서 살아야 하는 출발점일 뿐이다. 그럴 때 우린 관성의 늪에 빠지지 않고 디자인된 세상의 그물망에 걸려들지 않을 수 있다. 그럴 때에야 새롭게 환경을 디자인할 수 있는 힘도 생기는 것이다 

 

돗대가 아닌 연대로

돗대(담배의 돗대를 말함*^^*)는 외롭다. 아무리 깨어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배척되게 마련이다. 눈먼 자들의 나라에서 눈이 보이는 주인공은 눈먼 자들의 왕이 되긴커녕 배척당했던 것처럼 말이다. 박동섭 교수님이 게재불가에 울분을 삭히지 못했던 이유도 이 때문이지 않을까.

그렇기에 우린 돗대로 머물러선 안 된다. 디자인된 세상의 부조리함을 알았다면, 좀 더 나은 디자인을 할 수 있도록 함께 모여 힘을 보태야 한다. 돗대로 남기보단 연대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비고츠키 강의에 모였던 당신들이 소중했고 오래 만나고 싶었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6강의 시간을 함께 하며 비고츠키 강의를 들었던 수강생들에게 아래의 노래를 바치며 문화적 실천을 함께 할 수 있길 희망해 본다.

 

언제든지 누군가가 꼭 곁에 있어

생각해주세요. 그 멋있는 이름을

마음이 울적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에

꼭 꼭 누군가가 언제나 곁에 있어

태어난 마을을 멀리 떠나 있어도

잊지 말아주세요. 그 마을의 바람을

언제든지 곁에 있어

비오는 아침엔 도대체 어떻게 해

꿈에서 깨어나도 역시 외톨이야

언제든지 네가 꼭 옆에 있어

생각해주세요. 멋있는 그 이름을

싸움에서 상처 입고 빛이 보이지 않으면

귀를 기울여봐요. 노래가 들려와요

눈물도 아픔도 언젠가 사라져가

그래 꼭 너의 웃는 얼굴을 원해

바람 부는 밤엔 누군가를 만나고파, 꿈속에서 봤지. 너를 만나고파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의 엔딩송 いつでもかが

 

 

[동영상:8]

 

주말에 쉬고 싶을 텐데도, 배움에 대한 열정으로 함께 참여한 그대들이여~ 아름답습니다!

 

주말에 쉬고 싶을 텐데도, 배움에 대한 열정으로 함께 참여한 그대들이여~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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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 2013-01-14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고츠키, 저만 어려운게 아니었군요 ^ ^

아이러 2013-03-06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돗대가 아닌 연대가 필요하다는 말이 가슴속에 깊이 박힙니다.

leeza 2013-03-07 12:26   좋아요 0 | URL
비고츠키는 충분히 파고들만한 철학자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런 철학자를 알려준 박동섭 교수님께 감사의 말씀을.
 
철학, 삶을 만나다
강신주 지음 / 이학사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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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철학에 관심은 있지만, 제대로 읽을만한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없는 사람이 읽었으면 좋겠다. 또한 철학을 고리타분한 것으로 여기며 가까이 하지 못했던 사람이 읽었으면 좋겠다. 이 책은 철학이 가진 난해함은 최대한 쉽게 풀어쓰고, 그 철학적 가치관이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 명쾌하게 풀어냈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에 관심이 있던 사람도, 삶의 문제로 인해 이런 저런 고민이 있는 사람도, 세상에 대해 실망했던 사람도 모두 읽을 만 하다.

  이 책을 아무 걱정없이 고르게 된 데에는 '강신주'라는 필자명이 한 몫을 했다. 이미 '장자'에 대한 그의 글들을 보면서 많은 깨달음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깊이 있는 사유에 흠껏 빠져있던 터였으니 말이다. 그런 까닭에 이 책도 그런 사유의 산물일테니 결코 실망시키진 않으리란 생각으로 집어들었던 거다. 막상 책을 받았을 땐 좀 실망이 되기도 했다. 아직도 난 책의 외형을 통해 책의 가치를 매기는 그런 인간이다^^. 책이 얇아서, 그리고 내용도 부실한 거 같아서 적잖이 실망했었다. 하지만 나의 그런 책에 대한 가치 매기기는 곧 허구임이 드러났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데 도무지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쉽게 쓰여졌을 뿐더러, 그 내용은 어찌나 그리도 다채로운지 생각할 것도 많았으니 말이다. 책이 나를 읽는지, 내가 책을 읽는지 모를 정도로 그런 몰입된 상태로 책을 다 읽을 수 있었다. 이 쯤되면 이 책은 대중을 위해 쉽게 풀어쓴 철학책이지만, 그렇다고 가벼운 책은 아닌 복잡한 성격의 책이라 할 수 있다. 그건 곧 철학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읽을 만하며, 조금 알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재밌게 읽을 수 있다는 얘기이다. 그런 경험 때문인지 이젠 제대로 나의 가치 매기는 습관을 고치기로 했다. 겉모습보단 내실이 더 중요하다.... 물론 사람도^^

  박노자씨의 책이나, 남경태씨의 '개념어 사전' 류의 책에서 펼쳐지던 내용이 여기에서 반복되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 친근감에 책을 더 집중하며 읽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건 곧 가정의 신화, 국가의 신화, 화폐의 신화를 깨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솔직히 그런 신화에 둘러싸여 사는 이상,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순 없다. 노예 아닌 노예, 매체(주체의 반대) 아닌 매체로 밖에 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기의 삶은 왜이리 꼬여 있는지 도무지 알지도 못한다. 한번이라도 자기의 삶을 제대로 생각해본적이 없으니, 그런 갑갑증은 당연하다. 바로 이 책에서도 그런 신화들을 뛰어넘을 것을 철학적 사유를 통해 풀어가고 있다. 또한 철학 사유는 만남을 통해 이뤄지며  알 수 없는 세상 사리가 얼마나 축복된 일인지를 알려준다. 누구나 자기의 삶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고 싶어한다. 그렇기 때문에 맘대로 되지 않는 삶을 경험하게 되면 실의에 빠지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거다. 하지만 과연 내가 원하는 대로 모든 일이 다 된다면, 세상은 얼마나 무료할 것인가. 천국에 살아가는 사람이 행복하기보다 지루할 수밖에 없는 논리와 같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무예측성으로 인해 여러 만남들이 가능하며 그런 만남들을 통해 나의 삶이 또한 바뀌어진다. 무한한 변이체인 나, 그걸 통해 전혀 다른 삶을 조성해갈 수 있는 가능성이 늘 열려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이 책은 우리의 삶을 살찌울 책이다. 아니 나에게 어떠한 변화 가능성을 열어주는 책이다. 이 책을 만나기 전의 나의 모습과 만난 후의 나의 모습은 전혀 다를 것이다. 과연 어떻게 나의 모습이 변해 있을지 궁금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책을 집어들고 맘껏 저자의 사유와 소통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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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태의 스토리 철학 18
남경태 지음 / 들녘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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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세상을 살아간다. 그건 곧 누구나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 이상의 신념을 지니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종교적 신념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세상을 판단하며 사람을 판단할 것이다. 무종교인이라면 각 자의 이데올로기가 있을 것이다. 그걸 삶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미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왜 철학은 중요한 것인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철학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했을 때, 이미 철학을 가진 것이니 다른 철학을 지닐 필요는 없어진다. 그럼에도 왜 철학을 논해야 하는 것이며, 왜 번거롭게 철학을 탐구해야 하는 것인가? 물론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람 자체가 이미 자기의 한계 영역을 알고 그걸 넘어서려 노력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주어진 그대로의 삶에 만족하며 산다. 주어진 철학이 절대적인 참(진리)라고 생각하며 그걸 부여잡고 세상을 살아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게 끝이 아님은 분명하다. 평생 기독교를 저주하며 살아오던 사람이 임종의 시기가 다가오자 갑자기 기독교를 인정하는 등의 행동을 취하기도 하니 말이다. 그건 죽음의 공포를 벗어나기 위한 일시적인 방법일 테지만, 그의 삶이 지금껏 얼마나 허무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이런 삶의 허무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금껏 지녀왔던 철학의 담론을 새롭게 정립하는 것, 누군가가 어떠한 목적에서 나에게 줬는지도 모르는 삶의 철학의 한계를 넘어서 나의 삶을 내가 정의하고 살아가려 하는 것, 바로 그게 우리에게 철학이 필요한 까닭이다. 우린 지금껏 타인의 의지로 이 세상을 살아왔다. 하지만 이젠 우리가 내 자신의 의지를 명확히 알고 그 의지에 따라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바로 그 명확히 알고자 하는 의지 속에 철학에 대한 담론들이 들어 있는 것이다.

  참고로 이 책은 강신주씨가 쓴 '철학, 삶을 만나다'와 같이 읽으면 좋을 것이다. 철학이 결코 삶과 동떨어질 수 없음을, 그런 철학이라면 전혀 무용한 것임을 두 책에선 나란히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왜 우린 무의식이란 것을 알아야 하는지, 왜 우린 인간이 지닌 철학들을 알아야 하는지 이 책에서 명확히 나와 있다. 그건 곧 타인을 이해하는 통로임과 동시에 나 자신을 이해하는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언제나 나 자신의 관점에서 타인을 정형화하려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 '나 같으면 저렇게 하지 않을텐데, 도무지 저 자식을 잘 모르겠어'라는 말들은 그런 정형화의 한계를 표현한 것이다. 홍상수 감독의 '해변의 여인'이라는 영화에선 사람의 형상을 아메바 모양으로 그린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을 볼 땐 몇 개의 점만을 찍어 삼각형, 사각형으로 정형화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혹 그 사람을 전부다 아는 것처럼 생각한다니, 그런 심각한 착각이 또 있을까. 바로 이런 소통의 문제로 인해 우리의 삶은 늘 고립되며, 나 자신 또한 내 스스로 고립시켜 가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형상이 아메바라 한다면, 우린 수도 없이 그 점들을 찍어봐야만 그를 어느정도 제대로 알게 되는 것이다.

  삶은 신념의 문제이다. 며칠전 케이블TV에서 삼황신성교에 관한 프로그램을 방영했었다. 누가보아도 일반물인데 '신성수'라는 이름으로 십만원씩에 판매하고 있고 그걸 치유의 명약이라는 생각으로 아무 거리낌없이 산다. 우린 묻는다. 티비에선 그 물이 먹을 수조차 없는 물이라 방영했지만, 그걸 사람들은 사서 마신다. 우린 이런 사람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드는가? 정말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지 않은가? 신념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그나마 올바른 생각들로 신념을 지닌 사람이라면 당연히 괜찮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 폐해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을 통해 나의 신념을 다시 재검토해 보는 게 필요하다 거다.

  철학은 곧 내 삶에 대한 비젼을 탐구하며, 나 자신을 알고자 하는 노력일 뿐이다. 이 책을 읽고 그런 깨달음을 조금이라도 얻게 된다면, 이 책은 그 자체만으로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둔 책이라 할 것이다. 스토리를 통해 이야기를 하기에 지루하지도 어렵지도 않다. 하지만 너무 단편적인 이야기들이라 너무 짧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젠 다시 '철학(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읽어봐야 하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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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어 사전
남경태 지음 / 들녘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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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대에서 후임이 자기 직책에 맞지 않는 행동을 했을 때, 흔히 '개념 없는~'이라는 말을 하곤 한다. 솔직히 욕보단 품위가 있어 보이지만, 그 말만큼 위협적이고 무서운 말도 없다. 그건 곧 '어리버리하다'는 말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군대에서 얘기되어지는 개념이란 '얼마나 군대화 되었느냐?'하는 거다. 그래서 군대적 상식에서 벗어나는, 여전히 사회적인 행동을 할 땐 여차없이 저런 품위 있는 욕을 한다. 하지만 그 개념이란 게 얼마나 자의적이고 우연적인 것인지 당해본 사람은 그 억울했던 기억이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

  '개념'이라는 말에 대해서 예전엔 쉽게 생각했었다. 사전에 나와있는 설명들이 곧 개념일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개념이 절대적인 진실이 아님을 알게 된 건 머지 않아서 였다. 무지개에 대한 사전적인 정의는 "공중에 떠 있는 물방울이 햇빛을 받아 나타내는 반원 모양의 일곱 빛깔의 줄. 흔히 비가 그친 뒤 태양의 반대쪽에서 나타난다. 보통 바깥쪽에서부터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 보라의 차례이다"라고 되어 있다. 흔히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배웠듯이 '일곱색깔 무지개'를 풀어서 설명한 것이다. 하지만 이 설명만을 안다고 하여 제대로 된 무지개를 안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눈을 들어 하늘의 무지개를 봐보자. 과연 일곱색깔인지, 그렇게 분명하게 일곱색깔로 분별할 수 있는지 말이다. 일곱 색깔이란 건 우리의 언어적인 약속에 불과하다. 다른 나라에선 무지개를 3가지 색으로 인지하는 곳도 있고, 15가지 색으로 인지하는 곳도 있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할 수가 있다. 개념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아무 것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바보가 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바보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로 이 사전의 저자는 "누구나 개념을 객관적으로 사용하려 하고, 또 자신은 그렇게 한다고 확신해도 개념의 정의에는 그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선입견이 개재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특정한 개념의 의미를 알고자 할 때는 반드시 그 개념이 사용된 맥락 또는 이론 체계를 고려해야만 한다." 라고 말하고 있다.

  난 이 사전을 사전이라 부르지 않으련다. 물론 그런 기대를 가지고 읽었으며 그런 기대가 읽는 내내 충분히 확인되어 흡족했다. 이건 사전이기보다 인문학, 사회학, 철학, 과학의 종합적 보고서인 셈이다. 처음부터 사전(단어의 명확한 개념 규정)일거라 생각하고 이 책을 집어들었다면 다소 황당할 것이다. 하나의 개념을 설명하는 다양한 관점들을 여과없이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읽는 내내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것들에 회의를 제기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회의가 든다는 건 결코 나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회의는 반성을 촉구하며 지금과는 다른 생각을 하게 하는 발전의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나 하나 새로운 국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사고력을 키우고자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붙들고 찬찬히 음미해보길 바란다. 쓰디쓰지만 어느 순간 달콤해지는 그런 순간이 분명 찾아올 거니까.

  남경태가 쓴 '종횡무진' 역사 시리즈를 읽고나서 정말 짜릿한 흥분을 느꼈기 때문에 이 책까지 옮겨오게 되었다. 그의 종횡무진 꿰뚫을 수 있는 혜안이 참으로 경이로웠기에 이 책 또한 그런 기대감에 집어들었다. 역시 이 책에는 '종횡무진' 역사 시리즈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모든 사상들이 맛깔나게 융합되어 있더라. 학문의 횡적 연대란 바로 이런 서술 방식과 탐구 방법을 일컫는 것일거다. 그런 학문의 횡적 연대에 대해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꼭 봤으면 한다.

  "놀이도 사랑과 마찬가지로 기술이 필요하다. 젊은 시절을 일로만 때운 사람들은 막상 그 일이 떨어져나갔을 때 불안할 수밖에 없다. 이런 비극을 예방하려면 일할 수 있는 나이에 반드시 놀이의 기술도 배워둬야만 한다.(호모루덴스 편 中)"

  공부가 놀이가 될 수 있다면 호모루덴스란 결코 특별한 명칭이 되지 않을 것이다. '개념 없는' 개념어 사전은 그런 면에서 탁월한 놀이 기구가 될 수 있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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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7-09-17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도 고3 딸을 위해 구입했는데, 항상 책상 위에 놓고 수시로 펼쳐봅니다.
제가 막연하게 생각하거나 명쾌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을 슬며서 펼쳐보면 딱입니다!

leeza 2007-09-17 21:57   좋아요 0 | URL
아주 멋진 책인 거 같아요. 두고 두고 읽으며 생각을 정리해도 좋을~

누에 2007-09-17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념없는..'이란 말이 그렇게 무서운 말이었군요.

leeza 2007-09-17 21:58   좋아요 0 | URL
무섭진 않죠^^ 왠지 귀여운 맛이랄까~
 
실패한 교육과 거짓말
노암 촘스키 지음, 강주헌 옮김 / 아침이슬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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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덧 벌써 거의 17년이란 시간동안 교육의 굴레에서 살아가고 있다. 감히 교육과 인간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를 통한 교육을 받게 되고 죽을 때까지 누군가를 통해 무언가를 끊임없이 배운다. 그런 배움의 절정은 학교라는 기관에서, 누구나 ‘학생’이란 신분으로 배우게 되는 시기일 것이다. 그 시기에 사람들은 육체적 성장뿐 아니라 정신적 성장(가치 정립)까지 이뤄지기 때문에 그 때 어떤 교육을 받았느냐 하는 것이 한 개인에게 있어, 또는 그 개인이 소속된 사회에 있어 대단히 중요하다. 나 같은 경우 17년이란 시간동안 학교 교육을 받아오면서 지식을 넓혀간다는 생각만을 가지고 있었기에 선생님의 한마디, 한마디에 대단히 순종적이었다. 애국가를 외우라고하면 당연히 외웠고, 무언가 교칙에 어긋난 행동을 하게 되면 만인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알았기에 고분고분히 행동했으며, 친구들은 늘 한결같이  부모님이 차로 태워다 주는데 나만 힘겹게 걸어다니더라도, 그 친구나 국가를 원망하기보다 정말 열심히 공부해서 성공해야겠다는 생각만을 했었다. 그 땐 선생님이란 존재가 한없는 경외감의 대상이었기에, 그 분 말씀에의 순종은 으레 당연한 것이었으며, 학교라는 곳 또한 열심히만 공부하면 어느 정도의 신분 상승이 가능한 곳이라 여겨졌기에 최선을 다해서 공부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나 또한 교육 주입을 통해 비판적 사고나, 비교적 사고를 할 수 없는 ‘우물 안 개구리’일 뿐이라는 자각을 하게 되었다. 이 책에 따르면 선생님이란 존재는 귀족주의적 사회의식을 학생들에게 주입하며, 귀족주의적 요소를 각종 과목을 통해 자연스레 받아들이도록 강제한다는 것이고 학교 또한 가르침을 통한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안목을 키워주기 보다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복종과 순종을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쯤 되어 내가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받았던 교육들을 되짚어 보니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전에 들었던 예들만 살펴보더라도 애국가의 암기는 국가에 대한 은근한 충성의 강요이며, 교칙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사회질서에 대한 순종의 강요이며, 나와 잘 사는 아이에 대한 묵인은 ‘열심히만 공부해 그러면 너도 저 아이 부럽지 않게 더 부유해질 수 있어’라는 말처럼 뜬구름식 교육이 안겨준 허구적 희망이다. 이러한 교육에 대한 자각이 예비 교사를 꿈꾸고 있는 나에게 있어 많이 부담스러운 것 또한 사실이지만, 뭔가 확실하고 옳은 것을 알아가는 것이기에 뿌듯하기도 하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나의 고정관념과도 같던 사상 속에 어떠한 혼란들이 자리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줄곧 우리나라는 민주주의 사회라는 교육을 받으며 자라왔으며, 능력에 따라 자본의 양이 다르고 사는 모습도 제각각인 귀족주의(자본주의) 사회의 모습을 눈으로 보면서 자라왔다. 그런 배움과 현실 속에서 민주주의와 귀족주의는 같은 것, 또는 같이 병행되어야만 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던 기억이 난다.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10년 넘게 살아왔는데, 촘스키는 그런 나의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고 꼬집어 준다. 바로 그런 생각 자체가 학교 교육을 통해 가지게 된 고정관념일 뿐이라는 얘기이다. 그 얘기에 따르면 민주주의와 귀족주의는 같은 것도 아니며 병행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인데 그렇게 얘기를 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제퍼슨은 “귀족주의자는 ‘국민을 두려워하고 불신하는 사람들로, 모든 힘을 국민에게서 빼앗아 더 높은 계급에게 몰아주려는 사람들’이다”라고 했으며 “민주주의자는 ‘국민과 모든 것을 함께 하면서 국민을 신뢰하고, 공존의 이익을 정직하고 안전하게 떠맡아줄 존재로서 국민을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들’이라 얘기했다. 이 인용문만 놓고 보더라도 귀족주의와 민주주의가 어떤 점에서 현격한 차이를 가지는지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귀족주의에서의 국민은 기득권자들 위치, 기득권자들의 이익을 위해서만 필요한 존재이기에 그 시간 외엔 방관자(傍觀者)로 머물러 있어야 한다. 국민들의 주체성으로 인한 간섭과 충고는 그들의 안락한 위치 유지와, 쉽사리 얻게 되는 이익 증대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에 반하여 민주주의에서는 국민을 함께 공존해야할 주체로 여기기에 자기들의 위치 유지보다는 서로 잘 사는 것에, 자기들의 이익보다는 국민들의 이익에 초점을 맞추어 일을 한다. 이러한 현격한 차이점 때문에 민주주의와 귀족주의는 같이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촘스키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민주주의자가 될 것인가, 귀족주의자가 될 것인가? 후자의 길은 쉬운 길이며 제도권이 그에 대한 보상을 약속한 길이기에 어느 정도의 부가 보장되는데 반해 전자의 길은 투쟁과 패배의 길이어서 힘이 들고 쉽사리 발걸음을 옮기기 힘들지만 결국은 새로운 시대정신이기에 더욱 큰 보상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이다. 당신 같으면 쉽고 편한 길로 갈 것인가, 어렵고 힘든 길로 갈 것인가?

  위에서 얘기했던 민주주의, 귀족주의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으로 느낄 수도 없는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보니, 나와는 너무도 요원(遙遠)한 철학정도로 느껴졌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귀족주의자들로 인해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이 더욱 고착화되고 심화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기에 단순히 나와는 너무도 머나먼 얘기라 하며 흘려보낼 수만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 더욱 큰 충격을 안겨준 발언은 바로 뭣뭣주의자의 선택 따위가 아니었다. 바로 우리의 의식 가운데 귀족주의를 당연시하게 만들고, 귀족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도록 입김을 불어넣어준 사람들이 바로 우리가 흔히 스승이라 얘기하며 존경해 마지않았던 ‘선생님’이란 사실이다. 서두에서도 잠깐 언급했다시피, 과목 하나하나에 귀족주의적 사상을 실어놓고서 그걸 아이들에게 조금씩 주입한다. 그런 교육을 받는 아이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떠한 선택의 여지도 없이 조금씩 귀족주의자들로 길러지고 있는 것이다. 며칠 전에 언뜻 TV를 보니 , 일제 치하 시대에 여학교 선생님이었던 한 할머니께서 그 때 제자들에게 정신대에 가도록 종용했다고 하면서 땅을 치며 눈물을 흘리시면서 후회하고 있는 모습이 나왔다. 이와 비슷한 예로 여러 가지가 있지만 몇 가지만 들어보자면,  일제치하 시대에 남학생들에게는 강제징용에 찬성하도록, 군사 독재시대에는 군부에 대한 저항이나 반항보다는 무조건적으로 충성하도록, 현시대에는 불평등한 부의 편중을 자기의 실력 부족으로 인정하도록 그렇게 교육해왔다. 바로 국가 권력자의 하수인 역할을 선생님들이 해온 것이다.(이 말이 올곧게 세상에 저항하며 나름대로의 참 교육관을 펼쳐온 선생님들까지 폄하하는 듯해서 송구스럽기에 여기에서 얘기하고 있는 선생님들은 그저 일반론에 의거한 선생님들임을 밝힙니다.) 그러한 선생님들 밑에 귀족주의적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그대로 사회에 배출되었기 때문에 이 사회는 여전히 귀족주의적 사회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교육에 대한 맹신이나 순종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비판적 시각으로 교육이란 것을 보게 되니, 교육을 통해 강제되고 억압되었던 많은 예들을 대할 수 있었다. 아마도 나 또한 교사가 되려고 맘먹지 않았다면, 이러한 교육의 폐해를 깨닫지 못했을 것이고, 누군가에게 여전히 귀족주의적 가치관만을 주입시켜주고 있었을 것이다. 교육은 다른 사람에게 더 큰 지식을 준다는 순기능만 가지고 있지 않고 그 권력층에 대한, 기득권층에 대한 권력 유지, 이익 추구의 묵인(당연히 그러려니 하는 생각)을 주입하는 역기능도 있다. 이러한 사실이 크나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지는 까닭은, 내가 단순히 누군가로부터 교육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 아니라, 누군가를 가르쳐야 할 입장에 언젠가는 서야하기 때문이다. 만약 나 또한 지금까지의 교육이란 미명하의 역기능을 모른 채 누군가를 교육시킨다면, 그들에게 여전히 귀족주의를 전파하는 꼴 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기에 생각만 해도  아찔하고 두렵기까지 하다. 그렇게 되기 전에 조금이나마 교육의 순기능, 역기능에 대해 알게 되어 정말로 다행이다. 이젠 나의 교육관을 제대로 정립하여 귀족주의가 아닌 민주주의를 제대로 전파할 수 있는 그런 교사가 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내가 올바른 민주주의 가치관을 가지고 그런 민주주의를 전파해줌으로써 제자들이 올바른 민주주의 의식을 가진다면, 그래서 그런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인다면, 이 사회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꽃 피는 사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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