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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조차 말할 수 없는 현실.

국가 권력이 누구 편인지 이렇게 명백히 보여주는 사진이 또 있을까?

가진 자가 없는 자를 위해주며, 국가가 노동자를 위해줄 거라는 바람, 그것이야말로 거짓이며 기만이다.

그래서 맑스와 레닌은 이렇게 말했던 게 아닐까

만국의 프로레타리아여 단결하라! (Proletarier aller Lander, vereinigt euch!)

연대만이 민초의 저력을 보여줄 수 있는 힘이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노무현 대통령 묘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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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1-07-11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론은 침묵내지 욕을 퍼붓죠. 길막고 뭐하는 짓거리냐고...
그래서 깨어있는 시민의 연대가... 그 희망 버스가 중요한 것입니다.

leeza 2011-07-11 19:14   좋아요 0 | URL
'너희의 모습이 나의 모습이다'는 깨우침이 가장 중요하겠죠. 어제 하루 맘이 무거웠습니다.
 

요즘 대학생들 사이에선 ‘스펙’이 화두다. 스펙을 쌓아야 한다느니, 그래선 안 된다느니 설왕설래 하고 있는 거다.

스펙이란 원래 어떤 상품의 사양을 말하는 거였다. 상품의 겉만 봐선 어떤 부속품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알 수 없기에 그걸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도표화한 것이다. 물건을 사려는 사람은 그것부터 면밀히 살펴보고 자기가 원하는 물건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것이다. 이런 용도로 쓰이던 스펙이란 단어가 사람에게까지 쓰이게 되었다면 이미 사람의 인격성은 거세되고 기계의 한 측면으로만 바라보게 되었다고 생각해도 될 거다. 고로 사람이면 각자의 개성, 특성이 있다는 ‘주체성’은 더 이상 들어설 공간이 없다. 단지 내세울만한 스펙이 있으면 쓰일 수 있고 그걸 넘어서는 스펙의 소유자가 나타나면 여지없이 ‘교환 가능’해진 것이다. 우리가 컴퓨터를 업그레이드하며 구식 CPU에 ‘미련’, ‘안타까움’을 가지지 않듯, 우리 또한 그렇게 된 것이다. 결국 스펙이란 용어는 이미 태생 자체가 자본주의 사회의 타락한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게 스펙표다. 나의 가치도 이런 식으로 환산된다고 생각하니 왠지 끔찍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스펙을 쌓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그건 기업이 원하는 인간, 사회가 원하는 인간이 되려는 것이다. 진정한 나의 가치는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보내고 내가 진정 원하는 일 따위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누군가가 원하는 모습으로 나를 ‘성형’하는 것이다. 토익을 본다, 인턴사원을 한다, 해외에 교환 학생으로 나갔다 온다, 각종 자격증을 딴다 하는 것들 속엔 ‘세상에서 원하니까’, ‘취업에 유리하니까’하는 생각만 들어 있을 뿐, ‘내가 왜 이걸 하는 거지?’ ‘내가 잘 가고 있는 건가?’하는 고민은 없다. 취업에 대한 불안은 점점 우릴 수동적으로 만들고 체념하게 만든 것이다. 
 

임용을 준비하는 사람들이라 해서 나은 게 있냐 하면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물론 영어 점수의 유혹, 자격증의 유혹에서 자유로운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미 대학에 들어올 때부터 목적이 뚜렷하다보니 그것 외의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더 이상 야학의 낭만(?)도 없으며, 다양한 경험을 통해 다양한 학생들을 이해하려는 마음도 없다. 단순히 빨리 교사가 되기 위해 ‘죽어라’ 한 우물만 팔 뿐이다. 이들에게 스펙 쌓기란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맞을 수 있는 ‘정답기계’가 되는 것이며 주어진 방식에 따라서만 사고하는 ‘훈육기계’가 되는 것이다. 
 

이렇듯 스펙 쌓기의 본질이 나를 버리고 누군가 왜 정해 놓은 지도 모르는 기준에 맞춰 나를 재정립하는 것이라 한다면,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어차피 세상은 내가 사는 것이고, 나를 타인의 기준에 100% 맞추는 것도 불가능할뿐더러, 교환 가능한 기계노릇을 하며 살 수도 없으니까. 그렇게 빈껍데기로 살아가느니 내가 진정 원하던 나의 모습을 그리며 그 일을 하는 가운데 행복을 느끼며 사는 삶이 훨씬 낫겠다. 이런 ‘결단’이 말로만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스펙 사회’의 촘촘한 그물망을 뛰어넘는 자신의 역량과 능력이 필요하다. 그건 스펙이란 단어를 자기 나름대로 재정립하는 데서 시작해야 함은 물론이다.(물론 그런 단어를 아예 안 쓰는 게 제일 좋겠지만, 이미 일상어가 되었다면 사용할지언정 나만의 방식으로 사용해야 한다) 나에게 스펙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나가는 데서 얻는 깨달음과 노하우이다’라고 말이다. 각자의 정의는 각자의 기준과 나가고자 하는 방향대로 해보길. 그러므로 우리의 고민은 스펙을 쌓아야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과연 난 누구인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어떤 일을 어떻게 하며 살고 싶은가? 하는 고민이 선행되어야 하는 거다. 그런 고민을 통해 나의 길을 알게 되었을 때, 난 더 이상 교환 가능한 ‘기계’가 아니라 나만의 존재 이유와 존재 가치가 ‘활발발’하게 흘러넘치는 ‘주체’가 될 수 있으리라.  

일찍이 조선 후기 학자 이덕무는 《耳目口心書》에서 “시인과 운사가 아름다운 때, 좋은 경치를 대하면 시를 쓰는 어깨에선 산이 솟아오르고, 읊던 눈동자엔 물결이 일어나며, 어금니와 뺨에선 향기가 나고 입과 입술에선 꽃이 핀다. (騷人韻士, 佳辰美景, 詩肩聳山, 吟眸漾波, 牙頰生香, 口吻開花.)”라고 했다. 어찌 이 말이 시인과 운사에게만 쓰일 수 있는 말일까 보랴. 이 말이야말로 자신을 위한 스펙을 쌓으며 오늘 하루 신나게 살고 있는 이에게 쓸 수 있는 말일 거니까. ‘자신의 스펙을 쌓으며 하루 하루를 충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어깨에선 산이 치솟고, 눈동자엔 파도가 치며, 어금니와 뺨에선 향기가 나고 입과 입술에선 꽃이 핀다’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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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10-08-21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펙 뭐에 써먹는 건지 관심이 없었는데 사회 나오니 자꾸 관심 갖게 하네요. -_- 어느 분들이 제 스펙에 관심을 자꾸 가지시니.

leeza 2010-08-21 17:29   좋아요 0 | URL
어느 분이라고 말했지만, 분명히 그 분은 권력을 가진 높은 분이겠죠. 그 분에게 아프락사스님의 서재를 보여드리는 것도 좋을 거 같아요. 그거야 말로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스펙이고 포트폴리오니까~

마늘빵 2010-08-21 17:32   좋아요 0 | URL
제 서재를 공개하면 지나치게(?) 올바름을 추구하는 저를 더 싫어할지도 모르겠어요. 윗분들은 이런 서재 안 좋아합니다. 오히려 공개하면 제 스펙을 깎아 먹을 겁니다. ^^
 

지금은 2010년 4월이고 난 중앙도서관 4열람실 4번 자리에 앉아 있다. 아침에 눈을 뜰 때 시계를 보면서 ‘햐~ 오늘은 4월 4일이네. 여기에 4시 44분 44초가 되었을 때 시계를 보면 재수 더럽게 없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더 기막힌 조합이 있는 것이 아닌가? 거기에 덧붙여 ‘4월 4일, 4시 44분 44초에 4번 열람실 4번 자리에 앉아 공부했다’라고 할 수 있으니까. 이건 뭐 재수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옴 붙었다’고 할 만하다. 아마 이렇게 말하고 있으면 누구나 쉽게 그렇다고 인정할 것이다. 우리는 같은 문화권에 살고 있으니까.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 서양 사람들은 좀 의아해 할 것이다. 왜 그런 논리 전개가 가능하냐고 따져 물을 지도 모르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四’를 음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死’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런 관념 자체를 의심해볼 수 있고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다면 이 논리 전개는 순식간에 뒤집혀 진다. ‘四’를 ‘事’로 생각한다면 일이 많은 하루이거나, 누군가에게 대접 받는 하루로 성격이 바뀔 것이고 ‘賜’로 생각한다면 높은 분에게 좋은 것을 받는 하루로 생각해 볼 수도 있으니까. 같은 논리라는 한계는 있지만 어찌되었든 그 연결 고리만 바꿔줘도 우리의 걱정은 괜한 걱정이 되는 셈이다.

이렇게 초반부터 고정관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놓은 것은 돈만큼 고정관념이 확실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가장 흔한 고정관념이 ‘돈만 있으면 안 되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有錢無罪인 상황도 많고 돈 때문에 사람이 자신의 신념도 버리는 상황도 많다. 자본주의 사회이니 ‘돈의 양’이 그 사람의 가치를 나타내는 데까지 이른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악착 같이 돈을 벌고 또 그 돈으로 돈을 벌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부동산 투기, 개발 광풍, 교육으로의 투자 등이 돈을 투자하여 그 이상을 뽑아내고자 하는 욕구의 반영이다. 그쯤 되면 돈은 돈을 낳고 사람은 그 돈의 증식을 도와주는 하인이라 할 만 하다. 그렇게 모아지는 돈이 기쁨을 줄 수 있을까? 자본의 욕망엔 만족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잠시 행복, 긴 불행이 뒤따를 뿐이다. 10억이 있건 100억이 있건 그건 1000억, 10000억에 비하면 한참 모자란 금액이니까. 돈이 불어날수록 충만감보다는 더 큰 결핍감만이 느껴진다.

올해 난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돈을 모았다. 이 정도 되면 만족하고 정말 내가 하고 싶던 일을 찾아서 할만도 하다. 물론 몇 십만원도 없어서 빌빌거리던 때의 나라면 말이다. 하지만 돈이 불어나니 오히려 더 욕심만 생기며 더 아껴 쓰려고만 하는 것이지 않은가? 이런 마음이 한 부분이고 또 다른 부분은 그다지 필요하지도 않은데 평소에 가지고 싶던 것들이 사고 싶다는 거다. 자전거가 아직도 쓸만한데도 더 좋은 것으로 바꾸고 싶고 컴퓨터도 마찬가지다. 살 수 있는 돈이 있으니 어떻게든 쓰지 못해 안달이 나 있는 거다. 이 두 마음 다 돈이 유포하는 가치관에 충실히 따른 결과다. 돈이 증식되길 바라는 마음, 그리고 필요에 의한 구매가 아닌 허영에 의한 구매욕.

내가 번 돈일지라도 그건 단지 한 순간 내가 소유하게 된 것에 불과할 거다. 난 돈이 모여드는 창구가 아니라 돈이 유통되는 통로여야 한다. 그래서 정작 중요한 것이 돈이 어느 곳으로 흘러가게 해야 하는지 늘 고민해야 한다는 거다. 내가 움켜쥐면 한 푼의 돈에 불과 할테지만 정말로 필요한 사람에게 흘려보낼 수 있다면 그것은 생명력 있는 힘이 될 테니까. 그런 내가 될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겠다.

<읽어볼만 한 책들>

 

1. 상처받지 않을 권리  - 강신주 著



 

2.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 고미숙 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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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08 14: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leeza 2010-04-11 21:18   좋아요 0 | URL
기간제 교사는 아니구요. 그냥 단기 인턴직원을 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마음 다잡고 있는 중이예요.
아~ 나는 어디로 흘러 가고 있는걸까요^^

찔레꽃 2010-04-08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삼, 제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네요. 고맙습니다.

leeza 2010-04-11 21:18   좋아요 0 | URL
제가 더 고맙네요~
 



법정스님이 입적하셨다. 어둔 방에 들어가 자신의 진리만을 찾고자 하셨던 분이 아니라, 세상에 나와 어둠 속에 환한 빛을 비추려고 하셨다. 불교라는 틀에 소속되어 있으면서도 불교의 타락상에 먼저 마음 아파하셨고 ‘은둔의 종교인’으로 남기보다 세상에 나와 중생의 안녕을 위해 뛰어다니셨다. 그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무소유’라는 말은 단순한 설법이 아니었고 그의 삶을 통해 드러나는 향기 그 자체였다. 스님은 입적하시기 직전에 “사리도 찾으려 하지 말고 탑도 세우지 말라”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건 자신의 죽음이 죽음 이상의 의미를 가지며 사람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악용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으리라. 언제나 죽음 후대 사람들의 입맛에 따라 왜곡되고 날조되기 일쑤였다. 불교에선 스님이 입적하고 나면 사리가 얼마나 나왔냐 하는 것을 경쟁적으로 알렸고 그 사리의 양에 따라 그의 불심이 어쨌느니 하는 말을 하곤 했다. 한 스님의 생애를 돌아보고 그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려 하기보다 그 죽음을 어떻게든 자신에게 유리하게 써먹으려 한 것이다. 그런 모습이 어디 불교에서 뿐이겠으랴~ 기독교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임을.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사람들은 왜 그의 죽음을 ‘그 죽음 자체로’ 가만히 두지 못했던 것일까? 왜 그를 꼭 다시 살아나게 만들어야 했던 것일까? 그것이야말로 자신들의 세를 과시하고 종교적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 ‘사리도 찾고 탑도 세우는’ 것이었던 거다. 죽음을 죽음 그 자체로 느끼기보다 초자연적인 부활과 연결시켜야만 하는 그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생각’에 법정스님의 유언이 더욱 무게감 있게 들린다.



스님의 무소유 정신은 “그동안 풀어 논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으려 하니 부디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유언으로 드러났다.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언젠가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힘들어 한다. 하지만 더 힘든 건 자신이 죽으면 이 세상에 자신이 존재했다는 사실조차 지워진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잊혀 진 사람이 되는 것 자체가 가장 큰 두려움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편적인 방법으로 자식을 낳으려 하는 것이다. 자신의 유전자를 타고 난 자식을 보며 그런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그들에 의해 제사 지내질 때마다 기억나게 될 것임을 위안 삼는 것이다. 그 방법 외에 자신의 저서를 남기는 일도 같은 의미를 가진다. 더욱이 그게 자서전이라면 더 말이 필요 없다. 그건 자신의 삶을 정리한다는 의미 외에 언제까지 기억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을 테니까.’ 사람이 무언가를 기록하는 행위는 지식의 전달이라는 것도 있겠으나 자신을 남기고자 하는 욕구가 더 크다고 생각했다. 그건 언젠가 없어져 그 존재의 의미마저 묻혀버릴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법인 것이다. 법정스님의 수필집도 그와 같은 의미에서 벗어날 순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스님은 당당히 그 죽음 이후의 무한 소유의 유혹까지도 말끔히 털어내셨다. 자신을 드러내는 모든 출판물이 나오지 않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이 유언을 듣고 얼마나 가슴이 쿵쾅거리며 떨렸는지 모른다. 이렇게 ‘담백하고 맛난 죽음’이 또 있을까 싶다.

죽음에 어떤 멋드러진 의미를 부여하고 사리의 양을 따져 훌륭한 분이라고 치켜세우기보다 그 죽음 자체를 느낄 수 있었던 ‘법정스님’의 입적은 그래서 의미가 있었다. 불교의 윤회관에 따라 그는 어딘가에서 다시 태어날 것이다. 그곳에서 무엇으로 태어나든 지금 우리에게 이렇게 향기를 한아름 남기고 돌아가셨듯이 끊임없이 향내를 내셨으면 좋겠다.



그런데 여기서 꼭 한번 되짚어보고 싶은 것은, 유명인과 일반인의 죽음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점이다. 밑에 있는 글은 고려 시대 학자인 이규보의 <이와 개에 대한 글 蝨犬說>이라는 문장이다.

손님이 나에게 말했다. “어제 저녁에 한 불량한 사람이 큰 몽둥이로 놀던 개를 내리쳐 죽이는 것을 보니 그 광경이 너무 슬퍼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다시는 개나 돼지고기를 먹지 않을 거라 다짐했어요.”
나는 그 말에 대꾸하며 말했다. “어제 어떤 사람이 난로를 끼고 이를 잡아 태워 죽이는 것을 보니 가슴이 너무나 아프더군요. 그래서 그 때부터 다시는 이를 잡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손님이 어이없어 하면서 말했다. “이는 아주 작은 생물이예요. 나는 큰 생물의 죽음을 보았으니 슬퍼할만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지요. 그런데 자네는 작은 미물로 대조하였으니 어찌 나를 놀리는 것이 아니겠어요.”
내가 말했다. “모든 혈기가 있는 생물은 사람들로부터 소, 말, 돼지, 양, 곤충, 개미에 이르기까지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마음이 다를 수 없습니다. 어찌 큰 생물이라 하여 죽기를 싫어하고 작은 생물이라 하여 그렇지 않는단 말입니까? 그렇다면 개와 이가 죽는 것은 다 똑같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비유적으로 들어 대조를 한 것이니 어찌 놀린 것이겠습니까. 당신이 그런 사실을 믿지 못한다면, 어찌하여 당신의 손가락들을 깨물어보지는 않는 것입니까? 유독 엄지손가락만 아프고, 나머지 손가락이라고 해서 아프지 않다는 말입니까? 몸에 있는 것 중에는 크고 작음이 따로 없습니다. 고르게 피가 돌기 때문에 고통은 똑같은 것이죠. 하물며 각각 기운을 받은 것이라면 어찌하여 저것이라 하여 죽기를 싫어하며 이것이라 하여 죽기를 즐길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집에 돌아가시면 맑은 마음을 고요하게 하십시오. 그래서 달팽이 더듬이 보기를 소 뿔 같이 하고 메추라기를 큰 붕새와 같이 볼 수 있게 된 후에 나는 당신과 함께 올바른 도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客有謂予曰 “昨晚見一不逞男子以大棒子椎遊犬而殺者, 勢甚可哀, 不能無痛心, 自是誓不食犬豕之肉矣” 予應之曰 “昨見有人擁熾爐捫蝨而烘者, 予不能無痛心, 自誓不復捫蝨矣” 客憮然曰 “蝨微物也. 吾見庬然大物之死, 有可哀者故言之, 子以此爲對, 豈欺我耶” 予曰 “凡有血氣者, 自黔首至于牛馬猪羊昆蟲螻蟻, 其貪生惡死之心, 未始不同, 豈大者獨惡死, 而小則不爾耶? 然則犬與蝨之死一也. 故擧以爲的對, 豈故相欺耶. 子不信之, 盍齕爾之十指乎? 獨拇指痛, 而餘則否乎? 在一體之中, 無大小支節, 均有血肉. 故其痛則同. 況各受氣息者, 安有彼之惡死而此之樂乎? 子退焉, 冥心靜慮, 視蝸角如牛角; 齊斥鷃爲大鵬. 然後吾方與之語道矣.”

법정스님 한 분의 죽음은 대한민국을 흔들 정도의 관심과 파급력이 있었다. 연일 매스컴 첫 머리에 보도 되었고 그의 생애를 쭉 돌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땅의 수많은 민초들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는 다들 쉬쉬하며 별관심이 없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용산 사례’가 아닐까 한다. 그곳에선 한 명이 아닌 여섯 명(경찰 1명 포함)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고 그것으로 모자라 온갖 악성루머가 그들을 물들였다. 그래서 일년 가까이 장례식을 치루지 못했던 것이다. 이규보의 말대로 사람 목숨이 다 똑같다고 한다면, ‘법정 스님의 죽음이 갖는 의미〈 용산 참사 희생자의 죽음이 갖는 의미’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그건 물론 나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까. 이규보는 위의 글을 통해 바로 우리의 이와 같은 마음을 비판하고 있다. 권력의 높고 낮음, 명성의 있고 없음, 돈의 많고 적음에 따라 사람을 다르게 대하고 다르게 생각하는 우리들의 속물근성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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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연아가 놀라운 일을 해냈다. 파이널 그랑프리에서 2연패를 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살펴보고자 하는 건 2연패를 했다는 그 성취감이 아니라 실수를 딛고서 우승을 했다는 사실이다. 사진에도 잘 나와 있다시피 트리플 악셀을 하던 도중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피겨스케이팅에선 단 한 번의 실수로 4~5점이 날라가기 때문에 실수 자체는 실패와도 같다. 그런 까닭에 한 번의 실수는 육체적 위축과 심적인 부담을 낳아 연이은 실수로 이어진다. 바로 이런 악순환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게 놀랍다는 것이다. 그 한 번의 실수를 만회하고자 더욱 열심히 정석에 따라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가산점을 많이 받음으로 우승할 수 있었다. 최초에 목표했던 200점대를 넘지는 못했으나 그의 라이벌인 아사다 마오를 이겼으며 2연패를 달성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리라 하겠다.

 

  김연아가 전해온 낭보를 들으면서 왠지 몸이 떨리는 전율이 느껴졌다. 그 순간 떠오른 단어들은 '실수, 극복, 과거, 망각의 능력' 따위였다. 그녀에게 탁월한 점이 있었다면 피겨스케이팅 기술보다 실수를 인정하고 망각할 수 있었던 힘이다. 실수하는 순간, 누구나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게 마련이다.  그 실망은 고스란히 자기의 행동으로 나타나 행동의 위축으로 이어진다. 즉, 자기의 실수를 자기가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난 완벽한 사람인데....', 아니면 적어도 '이런 실수를 할 만한 사람은 아닌데...' 하는 생각이 있다 보니, 실수를 하고난 후의 자신의 모습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의식과 행동 사이의 괴리는 결국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만든다. 여기서 정작 중요한 건 실수를 인정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건 곧 자아에 대한 의식과도 맞닿아 있다. 즉, 자아존중감이 높은 사람은 실수를 인정하기 쉬운 반면, 자아비하감이 높은 사람은 실수를 인정하기 어려운 것이다. 왜 그렇게 쉽게 단언할 수 있는가? 자아존중감은 자기에 대한 긍정적 심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수 자체를 인정한다 할지라도 그게 자기에게 엄청난 결점은 아닌 것이다. 오히려 그런 사람은 그 실수를 하나의 계기로 삼아 더 나은 자신을 만들려 한다. 하지만 자기비하감이 높은 사람은 실수 그 자체가 자기의 결점이 노출된 것에 다름 아니기에 그걸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인정함으로 감내해야 할 심적 고통을 이겨낼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행동방침은 문제에 직면하여 넘어서려하기보다는 늘 회피하여 얼렁뚱땅 사태를 넘기려 한다. 바로 이런 차이를 알아차릴 수 있다면, 김연아가 둘 중에 어디에 속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정작 낭보에 전율을 느낀 까닭은 단순히 그녀가 자아존중감이 높은 사람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실수를 인정하고 그걸 계기로 삼을 수 있는 정신력을 지닌 사람이라는 것이다. 인정하되 그 실수에 얽매인 사람은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없다. 일찍이 니체는 '망각'을 하나의 능력이라고 말했다. 망각이 건망증처럼 인식되어 부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지지만, 실상 망각은 건망증과 다르다. 건망증은 기억해야할 것을 잊어버리는 것인 반면, 망각은 기억할 필요가 없는 것을 잊는 것이니 말이다. 이런 차이점 때문에 건망증은 무의식적이지만 망각은 의식적이다. 즉, 실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되 그것에 얽매이지 않고 망각함으로 평소 컨디션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니체가 권한 망각은 그냥 단순히 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한 일종의 휴식 또는 충전과도 같은 것이다. (....) 니체의 망각은 잊어야 할 것을 잊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지 않는 초월론적 결단의 자리에 주체가 서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니체는 '망각'을 "망각이란 단순한 타성이 아니라 일종의 능동적인 엄밀한 의미에서 적극적인 저지 능력"이라고 정의한다.(131P) 『노자:국가의...』 강신주 저' 김연아는 실수를 초월론적 결단의 자리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 내린 망각을 통해 하나의 계기이자 기회로 바꿀 수 있었다. 

 

  바로 그와 같은 상황이 나에게 이야기해주는 바는 명확하다. 어찌보면 지금의 내 상황이 김연아가 실수했던 그 순간과 같기 때문이다. 주저앉아 나아가지도, 물러나지도 못하는 절체절명의 상황, 그런 나에게 필요한 건 왜 이런 상황에 닥쳤는지 따져보고 그걸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 실패 자체가 나에게 엄청난 고통이 되지 않음을 인정하면서 받아들여야 한다. 바로 그럴 때에 그 인정한 것 자체를 적극적으로 저지할 수 있는 망각이 가능해지니 말이다. 그것을 나의 강박관념이나 자격지심으로 남겨놓지 않으려는, 그렇게 함으로 나의 창조하려는 의지를 키울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넘어서야 하는 건 타인이나 환경 따위의 외부조건이 아니다. 정작 나를 뛰어넘지 못하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김연아는 바로 그런 삶의 모습을 파이널 그랑프리에서 요약적으로 잘 보여줬다. 낙담한 표정과 우승메달을 목에 걸 때 환한 표정이 매치를 이루며 나의 마음을 사정없이 울린다. 망각과 창조는 사랑과 미움만큼이나 동전의 앞뒷면처럼 맞닿아 있다. 김연아야, 넌 어리지만 어찌보면 나의 인생 선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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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04 08: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leeza 2008-02-04 1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동안 서재를 내팽게쳐 뒀는데 다시 책과 소통하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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