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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가 내린다. 봄을 재촉하는 비라던데 오늘부터해서 이번 주 내내 추울 예정이란다. 진짜 막바지 추위이긴 한가보다. 이젠 다시 따뜻해질 날만 남았다고 생각하니, 이 추위가 가는 것마저도 아쉽게 느껴진다.

자연은 늘 그렇게 미련없이 때가 되어 바뀌는데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사람에겐 늘 다르게 느껴지곤 한다. 그래서 붙잡고 싶을 때도 있고 빨리 갔으면 하고 바랄 때도 있고 말이다. 이번 겨울은 나에게 어떤 의미였더라. 그저 어딘지 알 수 없게 방황하며 얼렁뚱땅 보낸 시간들은 아니었을지? 지난 시간에 대해서만 미련을 두는 못난 나^^ 앞으로 올 시간에 더 많은 것들을 담을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 나~

오늘은 비가 온다는 핑계로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이렇게 뒹굴고 있다. 해야할 일은 있는데도 이런 날은 좀 여유를 부리고 싶기 때문일까. 이런 날엔 내 마음인데도 잘 모르겠단 말이다. 나 자신도 알 수 없는데 남을 안다고, 세상을 안다고 하는 건 착각이거나 만용이겠지. 이런 날엔 영화를 한 편 보는 게 좋다. 비 소리를 들으며 한껏 영화에 의미 부여를 하는 거다. 무언가 했다는 생각에 그나마 죄책감 같은 건 덜 하겠지^^

작년에 도보여행을 하던 중에 양구에서 원통으로 향하던 길에 있었던 일이다. 점심을 먹지 못했던 터라 늦게서야 식당을 찾아 밥을 먹게 되었다. 그곳엔 이미 마을분들이 앉아서 한 잔씩 하고 계셨는데 그 중 한 아저씨가 나에게 한 말씀하시는거다. 거의 한 달간 여행을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싫은 소리를 들은 적은 없었다. 속으로 미친 사람이라 생각할지라도 그걸 말로 하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 식당에서 처음으로 그런 반응을 직접적으로 보여 준 것이다. 아저씨는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난 앞뒤 따질 필요 없이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해. 차도 있는데 뭐 하러 걸어 다녀. 할 일이 없으니까 그렇지. 그렇게 여유부리기 전에 고추라도 한 군데 더 심겠구만.”이라고 말씀하신 거다. 처음으로 제대로(?) 된 반응을 뒷담화가 아닌 앞담화로 듣게 되니 기분이 상할 겨를도 없이 멍할 뿐이었다. 이를 테면 기습 공격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바로 정신을 차려야 했다. 어차피 이 일 자체가 평범한 일은 아니기 때문에 좋게 보는 사람보다 안 좋게 보는 사람이 더 많을 거니까. 그걸 이제서야 체험하게 된 것 뿐이다. 난 '미친 사람' 맞다~

 

그로부터 10개월이 흘렀다. 지금에서야 보게 된 프로는 <차마고도>라는 다큐이다. 예전부터 얼핏 듣긴 했는데, 볼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우연하게 기회가 되어 1편부터 보게 된 것이다. 영상미가 끝내준다는 말에 그런 눈요기만 할 생각으로 봤는데, 이건 그냥 단순한 다큐가 아니었다. 그 안에 잔잔하게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2편 순례의 길은 라싸로 순례를 하러 떠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었다. 그들이 가는 길은 내가 걸었던 길보다 훨씬 멀고 훨씬 험했다. 그 길을 그들도 걸어서 갔던 것일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딱이다. 그들은 삼보일배를 하면서 그 길을 가고 있다. 이쯤 되면 내가 왜 작년 도보여행 때의 이야기를 꺼냈는지 대충은 짐작이 될 것이다. 단지 한 달 정도를 걸어서 여행한 나를 보고도 그 아저씨는 '미친~'이라는 말로 이야기를 꺼내셨는데, 과연 이들의 모습을 보시면 아저씨는 뭐라고 하실지 반응이 기대가 되어서 이다. 아마 좋은 말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완전히 미친~'이라는 말이 튀어나오지 않을까? 





  이들은 완전히 미친 거 맞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무지막지한 일을 할 순 없다. 그들은 순례의 길을 떠나며 두 조로 나누어 길을 떠났다. 젊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조는 아래 사진과 같이 삼보일배(오체투지)를 하며 길을 떠나고 나이든 사람들로 이루어진 조는 윗 사진과 같이 수레를 끌려 길을 나선다. 삼보일배를 하기 위해 손엔 나무로 된 발판을 달았고 몸엔 고무로 만든 옷을 입었다. 아무리 질긴 고무라 해도, 단단한 나무라 해도 그게 남아날 수는 없었다. 헤어지고 닳고 또 다른 고무로 기워내고. 고무나 나무가 그렇게 될 정도면 이들의 몸은 어떻겠는가? 온 몸에 멍이 드는 건 당연한 것이고 이마엔 피멍까지 들었다. 그들의 여행은 고난의 길이었고, 나 자신은 하나도 없는 길이었다. 아래 사진 처럼 눈 밭에서 오체투지 하는 저들의 모습에서 난 가슴 찡한 울림을 느꼈다. 미쳐도 완전히 미쳤다~ 그런데 이들이 이렇게 떠나기 위해서는 나이든 사람들의 도움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들에겐 짐이 없잖은가? 어디서 어떻게 자고, 어떻게 먹을까 궁금하지 않은가? 바로 나이든 사람들이 모는 수레 속에 그 해답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천막과 먹을 것을 수레에 싣고 이들보다 앞서 가서 이들을 위한 천막을 치고서 기다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의 임무가 오체투지 하는 젊은 이들보다 가볍다고 코웃음치진 말자. 이들은 나이가 많아 그 무거운 수레를 끌고서 가기에도 벅차니까. 이들 또한 젊은 이들의 그 오체투지와 똑같은 마음가짐, 정신력으로 이 고행을 자처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모습이 '시간은 돈', '스펙이 나의 경쟁력' 운운하는 한국 사람들에게 정상적으로 보일리가 없다. 이들은 시간을 죽이고 있고, 스펙을 쌓으며 미래를 준비하기 보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의 자신의 모습이 충실하고 있으니까. 우리가 이들의 모습에서 감동을 느끼거나, 아니면 한심함을 느끼거나 하는 건 모두 이들의 삶을 우리의 삶과는 동떨어진 어떤 특별한 것으로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반응은 극과 극이지만 우리와 다른 사람이라고 느꼈다는 데엔 공통점이 있다. 그렇게 요원하게 생각해서는 이 다큐는 '바보상자'가 내보내는 연극에 불과할 뿐이다.

 



이들은 왜 그 길을 떠나야 했던 것일까? 왜 그렇게 자신을 학대하면서 길을 가려 했던 것일까? 여기에는 어떤 종교적인 메시지가 숨겨 있을 것이다.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이 일생에 한번 마호메트의 유적지를 찾아 순례를 떠나길 바라듯 이들 또한 그들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삶의 가장 큰 영광을 누리기 위해 고단한 길을 군말 없이 나선 것이다. 이들을 우리가 어떻게 비난할 수 있을 것인가? '미쳐도 한참 미친 그들을' 우리가 어떻게 비난할 수 있을 것인가?

 



이들의 '미침'을 나도 본받고 싶다. 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요새 간판과 스펙 싸움을 당당히 거부한 '김예슬 양'의 모습이 떠올랐다. 외모만 봐서는 전혀 닮은 부분은 없지만, 이들의 삶은 비슷한 부분이 있었으니까. 바로 '미쳤다'는 것이다. 누가 봐도 미쳤다. 일류대라는 간판을 벗어던진 것도 그렇고, 자본주의의 충실한 하수인이 된 대학을 정면 비판하며 새 길을 개척하려 한다는 점도 그렇다. 그 '미침(狂)야 말로 진정한 미침(及)아닐까? 순례의 길을 떠났던 그들은 라싸에서 다시 10만배를 하고 각자가 꿈꾸던 삶을 찾아 떠났다. 그들에게 순례는 한 생애의 마지막임과 동시에 다른 생애의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김예슬 양도 자신이 꿈꾸던 삶을 찾아 미련없이 떠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게 바로 미침(狂)주는 진정한 미침(及)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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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과 하루-150년만의 공개 카톨릭 신학교 ', '길 위의 신부들-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를 보고 

  왜 사는 거지?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사냔 말이다. 친구의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왠지 모를 답답함이 느껴졌다. 자라온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비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가정의 짐을 어깨 가득 지고서 정작 자신을 죽여가는 것만 같아 그게 답답했을 뿐이다. 가족이라 할지라도 일방적인 도움은 받지 않는 게 좋다. 언제든 족쇄가 될 수 있으니까. 그건 내가 일방적인 희생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건 상호 간에 의존적인 관계로 만드려 어느 순간엔 서로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게 될 테니까. 어느 순간 그 친구가 "집에 돈을 다 대주느라, 난 아무 것도 못하고 요 모양, 요 꼴이야."라고 자조하는 말을 한다면, 그건 확실히 자신이 판 무덤이라고 할 수밖에 없으리라. 친구의 상황이나 나의 상황이 다른 건 별로 없다. 단지 난 내 앞 길에 대한 중압감만을 느끼며 나의 길만을 간다는 점이 다를까. 여기에 멈춘 우리는 무엇이 되고자 하는 건가? 





카톨릭 대학교는 7년 과정이었다. 사제가 된다는 건 대단한 결심이다. 가장 인간적인 성욕, 명예욕을 포기하고 한 세상 자신이 믿는 신만을 의지하며 나가야 하는 거니까. 더욱이 모든 것들이 짜여져 있다. 그 길에 들어선 이상, 그 답답함이 싫다고 해서 나올 수도 없다. 끼가 많던 그들, 하지만 그들은 그런 것들을 승화시키며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한 가지만 바라보고 물질적인 욕망이나 사회 진입의 갈등을 겪지 않아도 되기에 그들이 더 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지금의 나의 답답한 현실이 반영된 해석일 뿐임을 안다. 어쨌든 그들은 사회에서 쓰임 받을 것이기에 그게 부러운 것이었겠지. 하지만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그 자리에 나갈 수 있느냐고 한다면 나는 손사래를 칠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길을 가고자 하는 맘만 같았을 뿐, 그 길은 서로 달랐으니까.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이란 이름을 듣게 된 건 작년 촛불 집회 때였다. 그들은 삼성이란 거대 권력과 싸웠고 처참하게 패했다. 진실이 가려지고 어둠이 득세하는 세상을 목도한 것이다. 그들은 그런 억울한 상황에서도 다시 자기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세상에 묻힌 어둠을 드러내고 외칠 수 있는 그들이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현실을 지배하는 가치들에서 일정 부분 떨어져 있고 신의 보호를 믿는 사람들이기에 그런 대단한 일들을 할 수 있는 거겠지. 아니, 모든 신부님들이 그런 것은 아니니까 그들이 그만큼 더 깨어 있다는 증거겠지. 그 분들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도 '더불어 사는 삶'에 도움이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각 자의 길이 있다. 그건 나 혼자 방탕하게 살아도 된다는 식의 말은 아니다. 어떤 선언 뒤엔 그 선언에 따른 책임이 따르게 마련이니까. 그들에게 왜 사냐고 하면 그들은 웃을 것이다. 여기에 어떤 수식 따위가 필요할까. 그럼 뭐하러 그런 길에 들어섰고 왜 그렇게 사서 고생을 하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그게 옳은 일처럼 보였기 때문이라 말하겠지. 무언가 그로 인해 주어질 떡고물이나 명예 따위에 집중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의 행동은 더욱 칭송 받고 사람들 마음에 울림을 주는 것이리라. 내가 이 두 편의 천주교 관련 방송을 맘이 뭉클해졌던 건 바로 이 때문이었다. 나의 삶의 지표가 될 이야기들. 정령 그렇게 자신의 일을 초연히 해나갈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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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대한민국엔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여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시작한 촛불 집회가 거대한 불길이 되어 연일 서울을 덮고 있었다.  





지금 봐도 가슴이 뭉클하던 순간이다.

그런데 바로 이 때 SBS에서는 '신의 길, 인간의 길'이란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었다.

SBS가 반촛불 방송국의 대명사로 찍혀서 '씨방새'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그 때, 어느 방송사에서도 기획하지 못했던 문제를 전면에 제기하고 나선 거다.

'기독교에 대한 문제 제기, 반기업 정서의 표출, 현정권에 대한 비판' 이 세 가지, 권력의 눈치를 봐야하는 방송사의 입장에서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주제다.

그럼에도 SBS는 민감한 주제를 과감하게 다뤘고, 원래 기획된 4부작을 모두 방송에 내보낸 거다. 촛불 집회에 버금가는 방송사의 새로운 유형의 '촛불 집회'가 아니었을지.

나는 일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이 방송을 보게 되었다.

1부에선 예수의 신화가 고대의 신화들을 짬뽕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2부에선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한 줄기에 뻗어나온 것이며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은 같다는 것을 드러낸다. 더욱이 마호메트가 추구하고자 했던 종교의 개혁 방향은 그 당시 뿐만 아니라 지금 들어도 꽤나 진보적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코란의 문구만을 맹목적으로 지키려는(악용하려는) 탈레반 등의 정치세력에 의해 어떻게 왜곡되었는지 알려준다.

3부에선 작은 섬에 나타난 종교 현상을 통해, 인류에게 종교란 게 어떤 의미이며 어떤 식으로 발생하고 어떤 식으로 교조화되는지 보여준다. 또한 영국에선 종교인구가 감소하는 현상과 미국에선 오히려 근본주의 기독교가 성행하는 현상을 고발한다.

4부에선 우리나라 기독교계의 모습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미국과 종교가 하나가 된 현실과 그로인해 공산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을 사탄처럼 여기는 현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또한 사탄이란 개념, 지옥이란 개념도 초기 기독교의 개념이 아니라 짜라투스트라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려준다. 결국 기독교, 이슬람교, 조로아스터교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장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이 절대 진리이며, 성경에 쓰인 글을 의심 없이 믿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다른 종교들을 제거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 프로를 보면서 좀 더 현실적으로 종교를 믿었으면 좋겠다. 종교의 긍정적인 점은 사람에게 희망을 준다는 것이지만, 극단으로 치우치면 더 큰 분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예수, 마호메트, 짜라투스트라가 살 당시 기존 종교의 부패상과 사회의 부조리한 면을 보고 그걸 고치려 노력하던 모습을 그대로 본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바로 그 정신이 종교의 정신이며, 종교의 지향점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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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등학생 때 봤었던 애니메이션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다시 이 영화를 보고자 했던 것인가? 저번 토요일(3월 14일)에 이문세씨의 라디오 프로를 듣던 중에 알라딘을 맛깔나게  이야기해주는 것을 듣고 다시 봐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이 명작을 보게 되었다. 과연 15년이나 지난 지금 보는 느낌은 어떨 것인가?

 

  과연 명작은 명작이었다. 지금 봐도 전혀 유치하거나 어색하거나 하진 않았으니까. 또 다시 보고 싶을 정도로 너무나 좋았다. 이 안에도 어떤 요행수를 바라는 인간의 모습이나 사랑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극히 단순한 인간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긴 했지만, 그것 외에도 더 깊이 있는 내용이 있었다.  

 

  인간은 과연 만족을 아는 존재일까? 이건 나의 오랜 생각 거리다. 99개를 가진 사람은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1개만을 가진 사람 것까지 차지하려 한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던가? 과연 그게 인간의 본성이란 말인가? 그런 욕망을 제어할 수 있는 길이란 없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럼에도 난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욕망의 노예가 되어 사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으니까. 어쩌면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부익부 빈익빈의 부조리한 사회의 모습을 보다보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이 영화를 본 것이다.

  여기에는 두 사람이 나온다. 물론 많은 인물들이 나오지만 이야기의 두 축을 구성하는 두 인물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가도록 하자.

 



  가운데 있는 사람이 궁전의 총리 대신인 '자파'이며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이 영화의 주인공인 '알라딘'이다.

  우선 알라딘부터 이야기를 해볼까. 알라딘은 순수한 사람이다. 가난하긴 해도 희망을 지니고 있고 돈을 쌓아두는 것보다 그저 한끼 때울 수 있으면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 자기의 한 끼의 식사마저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쯤 되면 우린 알라딘의 욕망이 참 건전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욕망의 노예로 살긴커녕 어느 정도가 되면 절제도 가능할 거란 기대를 하게 되는 것도 이 시점에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가 지니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지니에게 말한다. "나는 두 가지 소원만 말하고 나머지 하나는 너를 위해 쓰겠어"라고 말이다. 그 말은 곧 그에게 자유를 주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정작 두 가지 소원을 말하고 난 다음에 그와 같은 상황이 닥쳤을 때 알라딘의 반응은 어땠나? 두 말하면 잔소리다. 그는 자신의 순수한 마음에서 나왔던 스스로의 약속을 져버렸다. 어느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욕망의 화신이 되어 욕망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바라던 모든 일을 이뤘지만, 여전히 모든 게 불안하다보니 지니를 놓아줄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나니 알라딘의 모습에 우리들의 모습이 겹쳐진다. "나 1억만 모으면 정말 행복할 거 같아. 그 때쯤 되면 아무 걱정 없이 내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아야지."라고 말하며 악착 같이 돈을 모은다. 그 때까지만 해도 순수한 욕망 그대로다. 하지만 정작 그게 이루어지고 난 다음엔 어떠 하던가? 혹여나 누가 이 돈을 가져가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돈을 가만히 놀리면 그 가치가 줄어들기 때문에 어떻게든 재투자하여 좀더 많은 수익을 얻으려 한다. 애초의 마음 따위는 온데 간데 없다. 어느 순간 자신은 돈을 위해 살아가는 하인이 되어 있을 뿐이다. 욕망의 하인이 되는 순간, 자기의 삶은 없어진다. 결국 알라딘은 모든 것을 잃었던 것처럼 우리 또한 그런 악순환에서 예외일 순 없을 것이다.  

 



  두 번째로 얘기해야 할 사람은 '자파'다. 그는 애초부터 욕망의 화신이었다. 권력욕 하나로 이 영화에서 악역을 자처한다. 과연 그런 그에게선 어떤 욕망의 구도를 발견할 수 있을까? 그는 램프를 손에 넣고 소원을 빈다. '나라의 왕이 되게 해달라'는 것. 그 소원은 자파의 가장 큰 소원이다. 당연히 그 소원 한 가지로 그는 모든 소원을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만족하며 거기에서 멈출 수도 있는 거였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이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무언가가 이루어지는 순간, 그건 시시한 무엇이 되어버린다. 새로운 욕망이 싹트는 거다. 그는 다른 소원을 또 빈다. '강력한 마법사가 되게 해달라'. 세상의 모든 것을 자신의 맘대로 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세상을 맘대로 한다. 이 얼마나 매력적인 능력인가? 하지만 그는 거기에서도 만족하지 못한다. 아무리 강력한 마법사가 되더라도 죽음을 피해갈 순 없고, 지니의 전지전능에 비하면 한 수 아래니까.이건 순전히 누군가와의 비교의식에서 나온 욕망일 뿐이다. 그의 욕망은 끝이 없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 소원을 빈다. '지니가 되게 해달라' 이 소원을 통해 우린 인간의 욕망을 들여다볼 수 있다. 인간의 욕망은 남과의 비교의식에 머물러 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남보다 많이'를 외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욕망 자체가 이루어질 수는 없다. 어느 면에서건 나보다 뛰어난 사람은 꼭 있게 마련이니까. 그렇기 때문에 어느 순간에 인간은 욕망의 하인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욕망의 무한 팽창을 위해 자신의 삶을 버려가면서까지 충성 봉사한다. 지니가 된 자파는 결국 램프에 갇히는 꼴이 되고 만다. 가장 전지전능한 신이 되었으면서도 램프에 갇혀 욕망의 하인이 된다는 설정은,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면 인간이 어떻게 될 수 있는지를 시각적으로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인간에겐 희망이란 없는 것인가? 욕망의 하인이 되어 그렇게 삶을 저주하며 살 수밖에 없다는 말인가? 이렇게만 말한다면 얼마나 힘 팽기는 일인가? 인간의 인생은 비극일 뿐이라는 이야기인데. 그런데 이 영화의 미덕은 그런 욕망의 배치를 드러내면서도 그 해결책까지 보여주고 있다는 데에 있다.  그 해결책은 뭘까? 어렵다고.... 너무 머리 굴리지 마라. 애초에 욕망이란 무엇이란 것을 말하지 않았던가? 순수한 욕망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그게 불행이 되는 까닭은 남과의 알량한 비교의식을 통해 변질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배치를 바꾸면 된다. 순수한 욕망이 되도록, 남과 비교하지 않도록 자신만의 장점과 자신만의 가치를 키우는 거다. 알라딘은 결국 다시 돌아와 자파를 램프에 가두고 모든 것을 원래 모습으로 돌려 놓는다. 그리고 그는 지니에게 마지막 소원을 말한다. 이 때의 장면이 소름끼치도록 새롭게 와닿았다. 가슴이 뭉클했다. 과연 그는 어떤 소원을 빌까? 공주와 결혼하기 위해선 당연히 다시 왕자가 되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어야 한다. 왕자만이 공주와 결혼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는 더이상 자신의 욕망을 위해 소원을 빌지 않는다. 더이상 그런 욕망이 필요치 않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왕자인척 하던 자신의 모습이 거짓임을 알았던 거다. 거지이지만 순수한 자신의 모습이 자신에게 더 맞고 더 행복하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그런 자아존중감이 충만해진 그였기에 욕망을 위한 소원을 빌지 않고 '지니'를 위한 소원을 빌 수 있었다. 욕망의 하인이 된 순간 불행이 그를 휩싸고 있었지만, 그가 그 욕망을 제어할 수 있게 되는 순간 그는 환희에 찬 미소를 띄울 수 있었다. 얼마나 가슴 뭉클하도록 아름다운 장면이었던지. 내 얼굴에 미소가 가득 띄어질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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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에게 있어서나, 국민에게 있어서나 08년 5월은 다사다난 했던 한 달이었다. 촛불집회가 한 달 내내 계속되었으나, 우리의 요구는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급기야 장관 고시가 발표되었다. 이로써 5월은 갈등이 드러남과 동시에 완전히 해결되진 않은 미완의 한 달이었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본격담이 펼쳐질 6월이 기다려지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쇼생크탈출'이란 영화를 보게 되었다. 여기저기 소문이 났었던 영화인데 그걸 이제서야 보게 된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새삼스레 생각에 빠지게 된 대목은 '길들여짐'이란 단어가 나오는 부분에서 였다. 교도소는 인간을 재사회화하는 곳이다. '교정'과 '사회화' 이것이야말로 교도소의 태생의 이유이며 존재 근거이다. 그런데 과연 현실의 교도소는 이런 곳인가? 결론적으로 그렇지 않다. 이미 푸코가 파놉티콘 구조의 감옥 구조를 파헤쳐 교도소의 허울을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교도소는 '범죄학교'라 할만큼 교정되기보단 더 극악한 방법을 배우는 공간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욱 큰 문제는 역시나 '길들여짐'이다. 노예도 그 생활을 반복하다보면 노예근성에 젖어서 자신의 인권이 침해 당하던지 말던지, 자신을 데리고 있어주는 주인에게 감사해한다고 한다. 그러다 혹 그 관계를 파괴하려는 외부 세력이 있으면 주인이 반발하기도 전에 노예가 먼저 반발한다고 한다. 이미 길들여져 있어 어쨌든 그게 편안한 삶인데, 막상 그 관계가 와해되면 그 때부턴 홀로 모든 것을 처리해야 한다는 불안이 엄습해 오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심리상태가 '길들여짐'이며 '보수'인 것이다. 감옥은 분명 자유를 박탈하고 노동력마저 착취하고 있지만 그로인해 살아갈 것에 대한 근심을 하지 않도록 기본 요건을 충족해주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익숙해지기 전까지만 괴로울 뿐, 막상 익숙해지기만 하면 그 어느 곳보다 편하고 안락한 것이다. 그렇게 길들여진 사람들에겐 가석방만큼 가혹한 형벌도 없다. 어찌 다시 새롭게 적응하며 산단 말인가? 그래서 그들은 가석방을 기뻐하기보다 어떻게 다시 사고를 쳐서 들어갈 것인가를 고민한다. 길들여짐은 늘 현실의 상태를 왜곡하며 올바른 판단을 저해한다.

  과연 우리의 모습은 이 모습들과 다른 것인가? 우리도 알게 모르게 무언가의 하수인이 되어 그 말도 안 되는 현실에 체념하며 '길들여진 채' 살아가고 있진 않은가? 길들여짐은 자신의 무한한 발전가능성을 막는 것이다. 지금의 편함이 언젠가 비수가 되어 나의 뒷통수를 때릴 즈음 깨달은들 뭐하겠는가!

  바로 이와 같은 면에서 5월은 길들여짐의 문제점을 깨닫고 당당히 주체로 나서기 위한 순간이었다고 평하고 싶다. 저 수많은 불꽃들의 향연을 보아라. 저게 바로 '길들여짐'을 거부하고 주체성을 드높인 국민들의 열정이다. 국민들은 국가의 길들임(국가는 국민을 위할 것이란 환상에서 벗어났으며, 2MB가 말한 '국민을 섬기겠읍니다'라는 말 속의 국민이 '10%의 특권층'을 말하는 것임을 눈치 챈 것이다.)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판단에 의해 행동하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87년 6월항쟁에 버금가는 대단한 변화이며 대단한 용기라고 나는 자평한다. 길들여지기 전에 좀 힘겨울지라도 광야로 나서자. 내 손으로 하나 하나의 여건을 조성하며 그렇게 살아보도록 하자. 우리 국민에겐 지금 그럴 수 있는 용기와 자신감이 절실히 필요하다. 나의 두 발로 당당히 대지를 박차고 나갈 수 있는 용기와 억압에 짓눌리지 말고 당당히 소신을 펼치는 자신감 말이다. 그리고 90%의 우리 국민들이 똘똘 뭉쳐 정부를 위한 '매체'가 아니라 '주체'로 당당히 서자. 그럴 때 우리는 쇼생크에 버금가는 대한민국정부의 오만과 억압에서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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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미숙 인터뷰 - &lt;괴물&gt;을 통해 본 광우병과 위생권력
    from 도서출판 그린비 2008-06-16 13:40 
    『이 영화를 보라』의 저자, 고미숙 인터뷰를 2번에 걸쳐 포스팅합니다. 1편은 "<괴물>과 위생권력 : 광우병과 프리온의 시대, 다시 생각하는 우리의 삶과 몸", 2편은 "이준익의 영화 두 편으로 본 우리 시대의 서사"입니다. 앞으로도 이렇게 저자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볼만한 책이 나올 때 마다, 저자 인터뷰 동영상을 서비스하도록 하겠습니다. 주~욱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누가 대중에게 그것을 먹이려 하는가?지금,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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