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대학생들 사이에선 ‘스펙’이 화두다. 스펙을 쌓아야 한다느니, 그래선 안 된다느니 설왕설래 하고 있는 거다.

스펙이란 원래 어떤 상품의 사양을 말하는 거였다. 상품의 겉만 봐선 어떤 부속품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알 수 없기에 그걸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도표화한 것이다. 물건을 사려는 사람은 그것부터 면밀히 살펴보고 자기가 원하는 물건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것이다. 이런 용도로 쓰이던 스펙이란 단어가 사람에게까지 쓰이게 되었다면 이미 사람의 인격성은 거세되고 기계의 한 측면으로만 바라보게 되었다고 생각해도 될 거다. 고로 사람이면 각자의 개성, 특성이 있다는 ‘주체성’은 더 이상 들어설 공간이 없다. 단지 내세울만한 스펙이 있으면 쓰일 수 있고 그걸 넘어서는 스펙의 소유자가 나타나면 여지없이 ‘교환 가능’해진 것이다. 우리가 컴퓨터를 업그레이드하며 구식 CPU에 ‘미련’, ‘안타까움’을 가지지 않듯, 우리 또한 그렇게 된 것이다. 결국 스펙이란 용어는 이미 태생 자체가 자본주의 사회의 타락한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게 스펙표다. 나의 가치도 이런 식으로 환산된다고 생각하니 왠지 끔찍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스펙을 쌓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그건 기업이 원하는 인간, 사회가 원하는 인간이 되려는 것이다. 진정한 나의 가치는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보내고 내가 진정 원하는 일 따위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누군가가 원하는 모습으로 나를 ‘성형’하는 것이다. 토익을 본다, 인턴사원을 한다, 해외에 교환 학생으로 나갔다 온다, 각종 자격증을 딴다 하는 것들 속엔 ‘세상에서 원하니까’, ‘취업에 유리하니까’하는 생각만 들어 있을 뿐, ‘내가 왜 이걸 하는 거지?’ ‘내가 잘 가고 있는 건가?’하는 고민은 없다. 취업에 대한 불안은 점점 우릴 수동적으로 만들고 체념하게 만든 것이다. 
 

임용을 준비하는 사람들이라 해서 나은 게 있냐 하면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물론 영어 점수의 유혹, 자격증의 유혹에서 자유로운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미 대학에 들어올 때부터 목적이 뚜렷하다보니 그것 외의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더 이상 야학의 낭만(?)도 없으며, 다양한 경험을 통해 다양한 학생들을 이해하려는 마음도 없다. 단순히 빨리 교사가 되기 위해 ‘죽어라’ 한 우물만 팔 뿐이다. 이들에게 스펙 쌓기란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맞을 수 있는 ‘정답기계’가 되는 것이며 주어진 방식에 따라서만 사고하는 ‘훈육기계’가 되는 것이다. 
 

이렇듯 스펙 쌓기의 본질이 나를 버리고 누군가 왜 정해 놓은 지도 모르는 기준에 맞춰 나를 재정립하는 것이라 한다면,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어차피 세상은 내가 사는 것이고, 나를 타인의 기준에 100% 맞추는 것도 불가능할뿐더러, 교환 가능한 기계노릇을 하며 살 수도 없으니까. 그렇게 빈껍데기로 살아가느니 내가 진정 원하던 나의 모습을 그리며 그 일을 하는 가운데 행복을 느끼며 사는 삶이 훨씬 낫겠다. 이런 ‘결단’이 말로만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스펙 사회’의 촘촘한 그물망을 뛰어넘는 자신의 역량과 능력이 필요하다. 그건 스펙이란 단어를 자기 나름대로 재정립하는 데서 시작해야 함은 물론이다.(물론 그런 단어를 아예 안 쓰는 게 제일 좋겠지만, 이미 일상어가 되었다면 사용할지언정 나만의 방식으로 사용해야 한다) 나에게 스펙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나가는 데서 얻는 깨달음과 노하우이다’라고 말이다. 각자의 정의는 각자의 기준과 나가고자 하는 방향대로 해보길. 그러므로 우리의 고민은 스펙을 쌓아야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과연 난 누구인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어떤 일을 어떻게 하며 살고 싶은가? 하는 고민이 선행되어야 하는 거다. 그런 고민을 통해 나의 길을 알게 되었을 때, 난 더 이상 교환 가능한 ‘기계’가 아니라 나만의 존재 이유와 존재 가치가 ‘활발발’하게 흘러넘치는 ‘주체’가 될 수 있으리라.  

일찍이 조선 후기 학자 이덕무는 《耳目口心書》에서 “시인과 운사가 아름다운 때, 좋은 경치를 대하면 시를 쓰는 어깨에선 산이 솟아오르고, 읊던 눈동자엔 물결이 일어나며, 어금니와 뺨에선 향기가 나고 입과 입술에선 꽃이 핀다. (騷人韻士, 佳辰美景, 詩肩聳山, 吟眸漾波, 牙頰生香, 口吻開花.)”라고 했다. 어찌 이 말이 시인과 운사에게만 쓰일 수 있는 말일까 보랴. 이 말이야말로 자신을 위한 스펙을 쌓으며 오늘 하루 신나게 살고 있는 이에게 쓸 수 있는 말일 거니까. ‘자신의 스펙을 쌓으며 하루 하루를 충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어깨에선 산이 치솟고, 눈동자엔 파도가 치며, 어금니와 뺨에선 향기가 나고 입과 입술에선 꽃이 핀다’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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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10-08-21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펙 뭐에 써먹는 건지 관심이 없었는데 사회 나오니 자꾸 관심 갖게 하네요. -_- 어느 분들이 제 스펙에 관심을 자꾸 가지시니.

leeza 2010-08-21 17:29   좋아요 0 | URL
어느 분이라고 말했지만, 분명히 그 분은 권력을 가진 높은 분이겠죠. 그 분에게 아프락사스님의 서재를 보여드리는 것도 좋을 거 같아요. 그거야 말로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스펙이고 포트폴리오니까~

마늘빵 2010-08-21 17:32   좋아요 0 | URL
제 서재를 공개하면 지나치게(?) 올바름을 추구하는 저를 더 싫어할지도 모르겠어요. 윗분들은 이런 서재 안 좋아합니다. 오히려 공개하면 제 스펙을 깎아 먹을 겁니다. ^^
 
가장 왼쪽에서 가장 아래쪽까지 - B급 좌파 김규항이 말하는 진보와 영성
김규항.지승호 지음 / 알마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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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가 그랬던가? 괴물과 싸우는 동안 괴물을 닮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그건 자신이 극도로 혐오하는 일일지라도 그 환경에 계속 노출되다보면 어느 순간 익숙해지게 된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독재에 맞서 싸운 민주 진영 내에서도 획일화와 엄격한 상하관계를 강조하는 것이나,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을 비판하던 사람이 자식에겐 외고에 들어가라고 닦달하는 것이 그 예일 것이다. 그런데 그건 단순히 타인에 대한 비판으로만 끝날 문제는 아니었다. 나의 모습에서도 그런 아이러니는 있었으니까. 
 

오늘 군대 동기인 상남이와 중앙도서관에서 이야기할 시간이 있었다. 아무래도 군생활을 같이 했던 사람이다 보니 당연히 그 때 이야기가 나왔던 것이다. 지금은 그저 추억이란 이름으로 한껏 포장되어 있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하던 중 화들짝 놀라게 하는 구절이 있었다. 바로 양우주라는 후임을 내가 엄청 때리고 괴롭혔다는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상남이가 이야기해주는 사실은 더 악랄했다. 이게 충격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내가 후임일 때 여러 상황들로 선임들에게 당하면서 그런 것들을 되풀이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이다. 난 '군대 폭력'이란 것과 싸우고 있었던 셈인데, 그게 어느 순간 내재화되어 내가 선임이 되자 쏟아져 나온 것이다. 내 안에 숨겨져 있던 폭력성이 나온 것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난 꽤 악랄한 구석이 있었다. 난 꽤 선한 척하며 그렇게 한데 반해 상남이는 노골적으로 아이들을 괴롭혔으니 오히려 인간적이라 할만하다. 내 악랄함의 극치는 08년도에 청학동 겨울 캠프에서 드러났다. 난 30명가량을 이끌어야 하는 훈사라는 역할을 맡았다. 그곳은 군대 규율이 횡횡하는 곳이었다. 분위기를 다잡기 위해 연대 책임을 묻기도 하고 아이들의 발바닥을 때려 일벌백계를 하기도 했으니까. 내가 정말 '폭력성'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있었다면, '폭력'이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는 걸 알았다면 분위기가 아무리 그럴지라도 새로운 방법을 찾았을 거다. 난 기본적으로 내가 당한 '폭력'에 대한 반감정만 있었을 뿐, 그것 외엔 아무 것도 없었다. 난 그렇게 괴물이 된 것이다.

난 내 스스로 주위 환경 자체의 나쁜 점을 개선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에 그러한 환경을 철저하게 수호하는, 아니 더 적극 활용하는 '괴물'이 되어 있었던 셈이다. 이래서 사회변혁을 이루기 위해선 자기변혁이 더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리라. 이미 내 안에 알게 모르게 기존 관념들이(명예욕, 권력욕, 자본욕) 자리하고 있는데 그 관념의 허구를 비판하지 않고 어떻게 사회변혁을 이끌어 낼 수 있겠는가?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지금의 나를 되돌아 볼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줬다. 내가 ‘자본주의’에 대해,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에 대해 비판을 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넘어설 수 있는 지 고민했던 건 아니었다. 나야말로 예수가 비판한 ‘바리사인’이었던 것이다. 체제 유지에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오히려 체제 유지에 도움이 되는 존재였던 거다.

그가 말하는 ‘진보’와 ‘영성’이라는 게 무엇인지 조금은 알겠더라. 그건 자신이 있는 위치(계급적 위치)를 망각하지 않는 것이며 사회가 유포한 욕망에 내 몸을 맡기지 않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당연히 ‘영성’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영성’이란 신을 찾으면 만사가 형통한다는 그런 영성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그건 내 존재에 대한 물음이고 나 자신의 변화에 대한 물음인 거니까. 그래서 그는 ‘하루에 30분도 기도하지 않는 혁명가가 만들 세상은 위험하며, 혁명을 도외시하는 영성가가 얻을 수 있는 건 제 심리적 평온 뿐’이라고 말한다. 괴물과 싸우기 위해선 결국 외부의 괴물을 물리치려는 ‘혁명’적인 마음과 내부의 괴물을 물리치려는 ‘영성’이 동시에 필요했던 것이다. 나의 상황을 알게 된 지금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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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 2010-07-16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참으로 절절한 말씀입니다. 미워하면서 닮아가죠. 정말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leeza 2010-07-26 07:31   좋아요 0 | URL
맞아요..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렇더라구요. 그러니 늘 깨어있어야 한다는 거겠죠.

saint236 2010-07-23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자님 오랫만입니다. 김규항씨 참 난해한 분입니다.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분이죠. 그렇지만 분명한 건 그의 책이 짱돌이 된다는 겁니다. 이 책 한번 읽어봐야 겠네요

leeza 2010-07-26 07:32   좋아요 0 | URL
이 책은 대담 형식이라 재밌더라구요. 예수전을 통해 김규항씨를 알게됐는데, 과격한 면도 있지만 지금은 그래서 더 맘이 드는 거 같아요

dd 2013-02-22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렇죠...김정일 김정은 독재에 북한주민들이 무뎌지는거 같아 안타까워요...
 

1. 경주로 가는 까닭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을 묻는 것만큼이나 이 질문도 쓸데없는 것이다. ‘경주로 왜 갔는지?’를 알기 위해선 ‘왜 부산으로 가지 않았는지?’, ‘왜 공주로 가지 않았는지?’ 이런 계속 되는 질문에 답해야 하기 때문이다. 과연 이유가 있었을까? 꼭 가야할 이유가 있었을까? 그건 나조차도 잘 모르겠다는 것. 단지 <공각기동대>식으로 말하면 ‘고스트가 그렇게 속삭였다(ep 1)’는 게 될 것이고, <에반게리온>식으로 말하면 ‘여자의 감(물론 난 남자니까 남자의 감이 될 거다^^)’이 될 게다. 뚜렷한 이유는 없고 내 맘이 이끄는 대로 목적지를 정하고 움직인 것에 불과하다. 이런 걸 여행이라 할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있는 장소를 떠나 새로운 장소로 찾아가는 걸 여행’이라고 한다면 여행했다고 할 수 있는 거겠지. 그러나 보통 여행이란 ‘계획과 목표가 확실한 것’이기에 그 기준에서 본다면 난 그저 ‘싸돌아 댕기다 온 것’이리라. 
 

경주는 초등학생 때 몇 번 왔던 것 같다.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별 흥미도 없이 왔다가 간 것이다. 그러니 눈으로 보긴 보지만 저게 나에게 무슨 의미인지, 뭐 하러 이것을 보려고 여기까지 와야 하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모든 게 귀찮게 느껴질 수밖에. 의미부여가 안 된 상태에서 하는 일은 정신낭비, 체력 낭비일 뿐이다.
 

바로 그걸 바꾸고 싶었다. 언젠가 한 번 와서 본 것으로 ‘나 거기 가봤어.’라고 하기엔 쪽팔렸으니까. 가봤다고 하기엔 내 머릿속에 남은 경주의 풍경들은 초라했다. 아니 차라리 그런 기억들이 없음만도 못했던 것이다. 지금 간다고 해서 얼마나 많은 것을 깨닫게 되겠냐 만은 한 가지 분명한 건 이번엔 내가 가고 싶어서 간다는 거겠지. 그런 자발성에 마음이 활짝 열려 서라벌의 풍치를 온 몸으로 맛보고 오기를.

 

2. 시간이 멈춘 곳, 나를 만날 수 있던 곳.

경주 터미널에 내렸다. 빙빙 돌아오니 3시간 30분이 걸리더라. 내리자마자 길을 나섰다. 불어오는 바람이 코끝을 스친다. 깊이 들이 마셔보는데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지며 몸의 긴장도 풀어지더라. 고풍이 스민 고장이기에 내 몸 속에 새겨진 옛 사람들의 흥취가 되살아나는 느낌이더라. 정말 말로는 미처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늘 꿈꾸던 의식의 자유, 마음의 자유를 실컷 경험해 볼 수 있었으니까.

조금 걸으니 고분군이 나오더라. 도시 한복판에 옛 무덤들이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높은 언덕 같은 무덤은 그 당시 지배층의 권위를 드러내고 있었다. 지금은 역사 유적이 되어 삶의 공간과 섞여 있다. 삶과 죽음이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그 곳에는 공원 같이 꾸며져 있어 어르신들의 휴식처이며,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이기도 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말이 있듯이 죽음 자체를 생과 별개로 사유하지 않는 정신을 느낄 수 있었다. 난 살아 있다. 고로 난 죽어 있다.

 



고분군 안내판엔 불장난도 하지 말고 고분에 올라가지도 말라고 써져 있다. 아~ 하지 말라고 하니깐 더 하고 싶은 거 있지^^ 불장난은 별취미가 없으니 그러려니 해도 꼭 저 고분을 오르고 싶은 이 마음은 뭘까~ 내 안에 꿈틀꿈틀하는 이 마음을 어찌해야 할까? 지금도 지금이지만 겨울에 눈 내리고 난 후에 비료 푸대로 눈썰매 타면 최고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하긴 너무 급경사라 올라가기도 힘들겠지만.

그 다음에 간 곳은 大陵苑(큰 능묘가 있는 동산)이다. 무덤으로 정원을 만들었다는 건데, 참 기발하다. 역시나 관광의 도시답게 관광객이 엄청 많더라. 들어가자마자 경악스런 비석을 보고야 말았다.



 “이곳은 국토통일의 기상이 넘치고 민족문화가 찬란하게 꽃핀 신라의 천년고도 서라벌의 옛터다.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신라의 통일정신을 오늘에 되살리고 찬란한 민족문화를 기리 보존하기 위하여 경주지구 개발의 대영단을 내리셨다. (...중략...) 우리 민족문화의 전통을 발전 한국의 위대한 기상 속에 재현코져 하는 그 드높은 뜻을 여기 새겨서 기리 전하고져 한다. 문화공보부”

‘박정희 대통령께서~ 대영단을 내리셨다’ 란다. 이곳을 본격적으로 개발하게 되면서 그 공을 박정희에게 모조리 돌리고 있는 글이었다. 그 글로 인해 기분이 다운 되긴 했지만 우리 근대사를 보여주는 하나의 증표이기에 그곳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더라. 신라의 고분이 왕들의 위엄을 드러내는 공간이듯이, 왕의 위엄을 빌어 박대통령의 위엄이 드러나는 대릉원의 의미는 남달랐던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과거사를 재정리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도 알 수 있었다. 그 과거사에 현재의 관점을 투영하여 과거의 현재화를 진행하는 것이었으니까. 결국 역사란 ‘이긴 자의 역사’이듯이, 과거의 복원도 ‘복원자의 현재’였던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대영단’의 고심이 스민 대릉원을 힘차게 걸었다.



 정말 잘 꾸며진 무덤 정원이더라. 한적하고 운치 있었다. 그곳에서 한나절 머물며 있고 싶은 생각도 들더라. 천마총은 무덤이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 지 보여줬다. 그 안에는 외부와 다르게 시원하더라. 발굴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고 관과 곽이 어떤 구조로 만들어졌고 거대한 봉분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관을 나무로 만든 곽으로 한 번 씌우고 그 위에 돌로 전체면을 한 번 더 감싼다. 돌맹이들이 쌓인 두께가 엄청났는데 그걸 쌓느라 엄청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흙으로 그걸 감싸면 끝이다. 그곳에 있던 무덤들이 다 그러한 과정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왕의 장례식은 왕가의 장례식으로만 끝나지 않고 경주에 살던 백성들까지 참여하는 경주의 행사였을 것이다. 그렇게 큰 무덤을 만들기 위해서는 갑남을녀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테니까. 지금 대통령이 돌아가시면 하는 국장은 그것에 비하면 약과겠지.

대릉원에서 나와 한적한 들길을 따라 걷는다. 잘 꾸며 있기에 사람들도 많더라. 작년에 함양에 있는 상림숲에 갔었는데 그때 느꼈던 운치와 거의 흡사했다. 풀내음이 코끝을 자극하니, 여기야말로 ‘천국’, ‘극락’이 아닐까하는 착각마저 들더라. 정말 두고두고 다시 오고 싶은 길이었고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오고 싶은 길이었다. 조금 가다보니 첨성대가 보이더라.



 들길 한복판에 솟아 있는 첨성대가 특이해 보이는 건 그 때문이었다. 가까이 가서 보기 위해서는 500원의 입장료를 내야 한다. 멀리서도 충분히 볼 수 있었고 들어간다해도 첨성대에 올라갈 수는 없었기에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돌로 만들어진 건축물이다. 하긴 석굴암, 불국사 등 걸출한 예술품들을 만들어낸 신라 사람들에게 있어 첨성대쯤의 ‘작은’ 건축물은 아무 것도 아니었겠지. 그곳에 올라 별자리의 운행을 연구하며 국가의 흥쇠를 연구했을 옛 사람들을 떠올려 봤다. 

안압지는 신라 왕실 정원의 웅장함을 여지없이 느끼게 해줬다. 조선 왕실의 연못인 경회루와는 다른 운치다. 하지만 그렇다고 초라하거나 그러진 않더라. 오히려 경회루보다 규모도 더 커보였다. 그곳에서 온갖 연회도 이루어졌겠지.

거기서 조금 내려오니 바로 경주국립박물관이더라. 경주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이곳을 꼭 찾아야 한다. 박물관의 규모부터가 엄청나서 역사의 도시라는 이름을 내건 전주박물관은 비교조차 되지 않더라. 하긴 그건 단순히 규모 문제만은 아니었다. 박물관 내에 소장한 물품의 질과 밀접하게 관련 있으니까. 경주는 경주에서 출토된 유물만으로도 경주국립박물관을 유지하기에 충분했지만, 전주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 그래서 대부분은 모조품으로 한 것이다. 이런 차이는 박물관의 질과 관련이 있고 그건 곧 관람객의 많고 적음과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위치상의 차이도 간과할 순 없다. 경주는 다양한 유적지를 보며 걷다보면 박물관이 나오는데 반해, 전주는 유명한 곳과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다. 한옥마을ㆍ전동성당을 보고 나서 한참을 달려야 박물관에 갈 수 있는 것이다. 접근성까지도 별로이다보니 당연히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질 수밖에. 결국 전주박물관이 살기 위해선 박물관 주변에 전주를 대표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하고, 소장품의 질도 높여야 한다.

경주 박물관 입구 쪽엔 성덕대왕신종이 있다. 



 그 우람한 종을 만들었다니 기술이 놀랍더라. 근데 그 뿐인가? 그걸 매단 신라인들의 기술력은 현재로도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라고 한다. 그 무겁고도 큰 종을 매달고 그걸 버텨낼 수 있는 것을 만들 정도였으니, 고대인들의 과학은 현재 과학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 게 분명하다. 기술이란 게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건 아닌가 보다. 단절되기도 하고 비약되기도 하는 걸지도. 종소리를 들을 수 없으니 아쉽더라. 박물관에는 안압지에서 발굴한 유물들로 꾸며진 곳과 불교 예술품으로 꾸며진 곳, 신라의 발굴품으로 꾸며진 곳이 있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곳은 불교 예술품으로 꾸며진 곳이었다. 돌부처상을 보고 있으니 왠지 마음이 울리더라. 무언가 뜨거운 게 느껴졌다. 불자가 아닌 나도 이러는데 불자였으면 더 심했겠지. 여긴 신라인들의 ‘왕국토’였을 것이다. 곳곳에 보이는 사찰과 불교 예술품, 그리고 황룡사지의 웅장함을 보면서 중생들은 마음의 위로를 얻었을 것이다. 윤회의 업을 벗어나 해탈의 경지에 들어가기 위해 늘 불심을 되돌아 봤겠지. 황룡사지는 터만 남아있지만 박물관에 복원도가 있었다. 여느 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규모도 크고 9층탑의 위용은 엄청 나더라. 그 실물을 보지 못하는 게 어찌나 아쉽던지. 



 (여행을 끝내고 터미널로 향하는 길에 아리따운 낭자를 만났다. 청초한 얼굴에 수수해 보이는 모습까지.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건넨다. 화들짝 놀랐다. 타지에서까지 ‘도를 아십니까?’를 만나다니^^ 얘기를 조금 들어보니 미륵불을 연구하는 사람이란다. 여기가 경주 아니랄까봐, 단순히 ‘도를 아십니까?’도 아니고 미륵불 이야기를 해준단다. 참 재밌는 사건이다. 하지만 시간이 없기에 도망치듯 걸어왔다.)

3. 역사가 묻어 있는 곳, 그래서 우린 그곳에 가야 한다. 

경주, 딱 한마디로 말하면 ‘마음의 여유를 찾고 싶은 사람이 와야 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한 2박 3일간 머무를 각오를 하고 와야 한다. 많은 걸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를 보더라도 여유롭게 보기 위해서다. 대릉원에서, 황룡사지에서 하루를 꼬박 보낸다 해도 아쉽지 않으리라. 마음의 정리가 필요한 사람, 이런 저런 문제로 골머리 앓고 있는 사람, 삶의 여유가 뭔지 모르는 사람이라면 한 번 와보길 바란다. 천년전의 자취를 느끼다보면 오늘을 살고 있는 내가 무얼 해야 하는지도 자연히 알게 될 테니까. 역사는 지난 이야기가 아니다. 현재의 나로 인해 끊임없이 새롭게 쓰여 져야 하는 게 역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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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 세트 (반양장) - 전10권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4. 벌교, 그 역사의 현장에

순천에서 벌교까지는 기차로 22분 거리였다. 바로 옆동네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다. 지도상으로 봤을 땐 큰 도시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막상 진트재를 지나 중도방죽의 철다리를 지나면서 벌교를 둘러보니 아주 작고 아담한 곳이더라. 왜 큰 도시로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그건 아마도 소설에선 보성에 소속된 읍이면서도 오히려 보성보다 더 번화한 곳이라 이야기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벌교역은 예전의 그 모습이 아니었다. 하지만 개발되지 않아 그나마 예전의 모습에 가까웠다고나 할까. 계엄사령관이 처음 그곳에 당도하면 부대원들이 열렬한 환영식을 치르기도 했단다. 내가 바로 계엄사령관이 된 듯 근엄한 자세로 기차에서 내렸다. 늘 소설에선 역이 엄청 분주했었다. 그곳에서 여러 계엄사령관이 오고 갔고, 김범우의 활약담이 펼쳐졌다. 소설에서와 달리 현실에선 그렇게 한적할 수가 없었다. 역에서 바로 나와서 오른쪽으로 가면 벌교시장이 있다. 역 근처에 시장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이곳에서 염상구는 활개 치며 다녔을 것이고 사람들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귓속말로 욕을 했을 것이다.

시장을 둘러보고 방향을 꺾어 난 왼쪽으로 가보기로 했다. 거기가 바로 일제 때의 중심 거리이기 때문이다. 거긴 한참 공사 중이더라. 바닥을 다 헤집어 놨다. 태백산맥 문학로 조성 사업 때문이란다. 바닥을 잘 단장한다고 문화로가 되는지는 잘 모르겠더라. 조금 걸어가니 옛술도가터가 있었다. 거기서 정현동 사장이 호령하며 벌교 지주로서 떵떵거리며 살았겠지. 근데 구체적인 건물이나 그런 건 없어서 못내 아쉬웠다. 조금 더 올라가니 벌교 초등학교가 나오고 그 입구에 보성여관이 있다.

 



 

지금은 해체 공사를 하는 중이라 전체적인 외관을 한 눈에 볼 수 없다. 이 여관엔 토벌대들이 묵던 곳이다. 빨갱이들을 잡으러 온 토벌대들이 여기에 진을 치고 있었다.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일본풍의 건물을 눈으로 보고 있으니 느낌이 새롭더라. 벌교초등학교도 소설에선 여러 번 등장한다. 여긴 학교이면서 사상을 검증하는 장소이기도 했으니까. 염상진이 점령했을 때도, 그들이 밀려 다시 경찰이 차지했을 때도 그 곳은 사람들의 사상을 검증하고 직결처분을 하던 장소였다.

 



 

그 길에서 조금 올라가면 옛 금융조합(현 농민상담소) 건물이 나온다.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건물이다. 이 땅에 처음으로 뿌리 뻗은 자본이 어떻게 돈을 불렸는지 소설에선 여과 없이 보여준다. 돈이 돈을 불러들인다. 그런 돈 놓고 돈 먹기가 결국 엄청난 착취의 다름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초대 금융조합장은 좌익에 사살되었다.

건물 사진 찍는 걸 멀찍이서 한 할아버지가 보고 계셨다. 그 쪽으로 가니 할아버지가 말을 걸어오신다. 뭐 하러 왔냐고 물으셔서 문학로 탐방을 하러 왔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앞에 있는 빨간 벽돌로 지어진 건물을 가리키면서 그 곳이 청년단 사무실이란다.

 



 

그 순간 왠지 모를 의심이 들었다.(내가 속고만 살았냐 --;;) 아무리 봐도 오래된 건물 같아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랬더니 할아버지는 생생하게 증언해 주시더라. “바로 저기 보이는 이층 보이쟈. 저기가 청년단장 방이여. 여그서 얼매나 많은 사람들이 붙들려 와서 고초를 당했다고.”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닌 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여긴 염상구가 활개 치며 다닌 곳이란 말이고 앞에선 보이지 않는 이층에 염상구의 자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없는 죄’를 고문에 못 이겨 ‘자백’했을까?

쭉 올라가면 아치형 모양의 돌다리가 나온다.

 



 

여기가 바로 벌교 홍교다. 반절 정도만 남아서 나머지 반절은 새로 만들어 이어 붙였다. 좀 어색한 모양이더라. 저기 위에 서서 벌교천을 내려다보니 왠지 모를 회한 같은 게 느껴지더라. 바로 그 위쪽에는 자애병원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흔적조차 없지만 말이다. 안창민은 총상을 입고 거기까지 사람 눈에 띄지 않게 왔단다. 청년단, 경찰서가 멀찍이 떨어져 있으니 가능했을 테지만 정말 죽기 살기로 왔을 것이다.

봉림교를 건너 다시 밑으로 내려오면 김범우의 집을 알리는 안내판이 나온다.

 



 

그 안내판을 따라 올라가면 임봉열 가옥(김범우의 집)이 나온다. 예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집이다. 지금도 사람이 사는지 연신 개 짓는 소리가 들린다. 그 집은 높은 곳에 있어 예전엔 벌교 읍내가 내려다 보였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다. 그 집엔 김사용 영감이 살았을 것이다. 지주이면서도 인간미가 있었던 지주였다. 그의 자식 두 명이 공산주의 사상에 어느 정도 호의적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범준이 한국전쟁 때 ‘인민군 대장’이란 직책으로 몇 십년 만에 아버지를 찾아와 만나는 장면은 아직도 뇌리에 선하다. 그 장면이 왜 그리 감동적이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도 그가 독립운동을 하러 가서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한참을 내려가니 꽤 번화한 곳이 나온다. 시대가 변하면서 중심지가 변화한 것이다. 그 곳에 ‘소화다리’가 있다.

 



 

일제치하의 아픔을 다리 이름에 고스란히 담고 있다. 해방이 되고 나서 바꿔도 됐을 텐데, 바꾸지 않은 게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 식으로 지우고 싶은 과거일지라도 그걸 남겨두고 다신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는 것도 좋으니까. 무조건 지우고 싶은 과거의 흔적으로 없애는 것만이 상책은 아니다. 그 다리에선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이념의 대립 때문에 죽어갔다고 한다. 시체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기도 했고 그 피가 갯벌에 떨어져 빨갛게 물들였다고도 한다. 지금은 인도로만 사용되고 있고 그 옆에 새로 지어진 다리에 차들이 다닌다. 다리 옆엔 꼬막 정식 집이 즐비했는데 음식점 이름이 이색적이다. 태백산맥 등장인물의 이름이 그대로 음식점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더라.


 

5. 태백산맥 문학관 탐방기

이제 마지막 코스가 남았다.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문학관에 가는 것이다. 언덕을 오르니 휘황찬란한 문학관의 모습이 보인다. 수수한 내용의 소설과 어울리지 않게 너무 화려하다는 느낌을 들었다. 그런데 바로 그 옆에 초가집과 기와집이 함께 있는 거다.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이 들어 그곳으로 가봤다.

 



 



 

그곳이 바로 무당인 소화네 집이고 그 옆에 있는 으리으리한 집은 소화와 정하섭의 사랑이 꽃핀 박씨제각이란다. 소화네 집은 최근에 만든 집이어서 별로 볼품없었으나 박씨제각은 예술이었다. 전통 한옥에 일본식을 가미한 독특한 건축양식을 자랑하고 있었으니까. 기와 위에 다시 누각을 세웠다. 그 집의 지대 또한 높은데 거기에 높은 누각까지 섰으니 벌교 읍내를 내려다보며 즐기기에 좋았을 것이다. 집도 제법 큰 규모였고 잘 보존되어 기분이 좋았다. 도대체 거기에 살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이만한 규모의 집을 유지하려면 꽤나 뼈대(?) 있는 집안이었을 테지.

 



 

문학관 전면 벽에 쓰인 ‘문학은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인간에게 기여해야 한다.’라는 조정래 씨의 글귀가 눈길을 끈다. 그에게 있어 문학이 어떤 것인지 이 한 마디 말로 잘 알 수 있다. 누군가에게 문학은 여가이거나 돈벌이 수단일 테다. 하지만 조정래 씨는 거기서 더 한 걸음 나아가 어떤 사명감까지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런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정치 세력의 회유와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마무리 지을 수 있었던 거겠지. 태백산맥엔 이적성 시비가 잇달았다. 그래서 ≪아리랑≫ㆍ≪한강≫을 쓸 때 집필하는 시간보다 검찰에서 증언하는 시간이 더 많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 이적성 시비는 작가 개인에게만 문제가 되는 게 아니었다. 그의 가족 전체에게 고스란히 피해가 가고 심지어는 태백산맥을 소장한 일반 사람들까지 ‘이적물 소지자’로 국가보안법에 걸릴 위험이 있었던 거다. 남한에선 ‘빨갱이’란 낙인이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그렇게 한번 낙인이 찍히면 우리 사회에서 ‘인간답게’ 살아가긴 힘드니까. 그런 혼란한 시대상에 작가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세 편의 대하소설을 엮어내고 결국 2005년엔 이적성 시비에서마저 벗어나게 된 것이다. 당연한 결과였지만 그 때 울컥했던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벽에 쓰여져 있는 작가의 말은 그동안의 그런 회환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말이었던 셈이다. 자기 확신이 담겨 있는 말이었던 셈이다.

 



 

들어가는 입구엔 건물을 설계한 이유가 써져 있다. 그 글을 통해 내가 처음에 했던 ‘휘황찬란하여 소설의 수수함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평이 허황된 비판인 줄을 알 수 있었다. 그 건물에 건축가의 생각이 그대로 담겨 있더라. 확정된 공간이 아닌 늘 변해가는 공간으로 설계한 것이며, 멀리서 봤을 때 비석이 솟은 듯 보여 이념 때문에 죽어간 민중을 늘 깊이 새기는 공간이 되도록 했다는 것이다.

들어가서 1층을 둘러봤다. 거기엔 조정래 씨가 태백산맥을 쓸 때 사용했던 필기구들, 답사할 때 입었던 옷과 신발 등 작가와 관련된 물품과 4년 동안 취재하고 준비해온 과정을 보여주는 기록물들, 집필 과정을 보여주는 기록물, 이적성 시비와 그 판결 내용을 담은 신문 자료들, 태백산맥 원고 뭉치들이 있었다. 그런 것들을 보면서 난 그냥 읽어 내려가는 것이지만 작가는 그 한 줄, 한 사건을 위해 발로 뛰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손으로 기록했다는 것을 새삼 알 수 있었다. 지리산에서 내려다본 경치를 묘사한 부분, 중도 들판의 배경을 묘사한 부분은 직접 체험하지 않고서는 그렇게 생생하게 기록할 수 없다. 그것 외에도 빨치산들의 비트 조성법이랄지 투쟁 사업의 전개 등은 객관적인 자료를 참고하지 않고선 불가능하다. 바로 그 모든 기록들이 증언과 관찰을 통해 가능했다는 것이다. 수많은 등장인물을 우리도 기억하기 힘든데 작가라고 해서 그게 쉽겠는가. 그래서 일일이 관계도를 그려 넣으며 정리한 부분에 이르러선 할 말을 잊었다.

 



 

지금껏 이런 소설은 천재성에 의해서 뚝딱 쓰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것과 반대되는 현실을 본 것이니까. 치밀하게 준비했고 꺾이지 않는 열정으로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짜내어 10권의 소설을 완성했을 뿐이었다. 바로 그런 정신과 치밀성만 있다면 이 세상에서 못 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싶었다. 지금껏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분통을 터뜨렸던 내 자신이 창피하게 느껴졌다.

벌교를 탐방할 땐 비가 내리지 않더니 문학관에 들어와 둘러보고 있는데 밖에서 비가 내리더라. 운이 좋게도 타이밍이 잘 맞았다. 관람을 끝내고 나오는 길엔 다행히 비도 그쳐 있었다.


 

6. 눈물은 뚝뚝

소설 속의 인물들을 벌교에서 직접 만나볼 수 있었다. 하대치 형님이랑 술 한잔하며 구수한 사투리에서 풍겨오는 인간미와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소신을 느낄 수 있었고 염상구의 거들먹거리는 모습을 시장통에서 봤으며 절뚝거리며 걸어가는 서민영 선생님의 부드러운 듯 날카로운 눈매도 볼 수 있었다. 작은 동네였지만 그 곳은 어느 곳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커보였고 사람들도 왠지 다르게 느껴졌다. 난 시간이 되어 다시 순천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는 어김없이 나카시마 방죽 위를 달려 지나간다. 수많은 민초들의 애환이 나의 가슴 속에 파고든다. 차창 밖으론 그들의 눈물인양, 나의 눈물인양 빗방울이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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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보여행 그리고 1년 후

  2009년 4월에 도보여행을 시작하여 한 달간 걸어서 5월에 도보여행을 마쳤다. 한 달이란 시간의 의미는 그 어느 때의 1년이란 시간보다도 의미가 있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 시간은 온전히 나만을 위한 시간이었고 세상과 한 걸음 더 가까워지는 시간이었으니까. 걸을 때마다 몸은 고되지만 생기는 넘치는 아이러니가 계속 되었다. 그로인해 알게 된 건 세상은 그리 삭막하지도 팍팍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어딘가 알게 모르게 도움의 손길은 계속 되었고 그 도움으로 인해 난 한걸음 더 나갈 수 있었으니까. 그 벅찬 감동과 열정은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생생하다.

  그 후 1년이 지났다. 작년엔 4월 19일이 일요일이었는데 올해는 4월 18일이 일요일인 거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 날 여행을 가는 거냐고? ‘도보여행 출발일을 기념하기 위해서 떠났다’고 하면 좀 그럴 듯해 보이지만 거짓말이 된다. 그저 전주대 중간고사 기간에 맞춰 움직인 것뿐이니까. 중간고사 기간엔 중앙도서관이 전쟁터가 되니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이다. 그런 이유로 떠나게 된 것인데 우연히도 날짜가 맞은 것이다. 이거 뭔가 딱딱 맞는 느낌이다. 작년엔 도보여행 출발일이 우연하게 4.19와 겹쳤었는데 올해도 그런 꼴이니. 참~ 세상은 이렇게 신기하다. 억지로 딱딱 맞추는 건 아닌데 이런 식으로 의미 부여를 할 수 있으니까. 그런 면에서 보면 오늘의 여행은 ‘벌교 탐방기’이며 ‘도보여행 1주년 축하 여행’이지 않을까?


 

2. 벌교에 가기까지

  ≪태백산맥≫ 소설의 무대인 벌교에 가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갑자기 가기로 한 걸까?

  한참 ≪태백산맥≫을 읽고 있었다. 벌교에 가본 적이 없는지라 지리가 낯선 탓에 소설 속 상황들이 잘 이해되지 않더라. 지역상황은 몰라도 이념의 대립이란 것에 집중하며 책을 읽었다. 그렇게 ≪태백산맥≫의 산줄기를 따라 헤매고 있을 때 <한겨레신문> esc에 벌교 탐방기가 실렸다. 그 기사를 읽고 있으니 ≪태백산맥≫의 이야기가 상상 속에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건 생생한 현실에 대한 기록이었고 그 곳에 살던 민중의 증언이었던 것이다. 소설을 읽으며 그저 막연하게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광경이 거기에 그대로 있는 걸 보니 어찌나 가슴이 두근거리던지. 그런 우연들이 맞물려 벌교로 떠나기로 결심한 것이다.

 



 


 

3. 순천, 스쳐가는 바람으로

  전주에서 벌교로 바로 가는 버스나 기차는 없었다. 그래서 광주나 순천을 경유해서 가야 하는데 난 순천을 경유해서 가기로 했다. 아무래도 소설에서 자주 언급되던 도시니까. 그리고 오늘은 특별히 기차여행을 하기로 맘먹었다. 오랜만에 덜컹거림을 느끼고도 싶었고 요즘은 ≪아리랑≫에서 철도부설권과 관련된 부분을 읽고 있는지라 일제가 한국에 남긴 ‘선물’인 철도를 따라가며 아픈 역사를 반추해 보고 싶었다.

  기차는 7시 56분에 있다. 그걸 타기 위해 아침부터 부산을 떨었다. 전주역엔 오랜만에 가본다. 한옥을 본 뜬 역사는 어느 건물 못지않게 멋져 보이더라. 요즘은 통유리 건물이 대세여서 어떤 관공서 건물이든 지었다 하면 통유리 건물이다. 처음엔 그런 위용이 경이로웠는데 하도 여기저기 무분별하게 들어서니 어느 순간엔 식상하더라. 그런 일상의 식상함이 전주 역사를 보는 순간 말끔히 가셨다.

 



 

순천행 기차는 여수가 종착역이다. 그 기차를 타는 여행객들이 많았다. 가족 단위 여행객들이 대부분이다. 기차는 순천을 향해 달렸다. 순천으로 가는 길엔 정말 터널이 많더라. 귀가 잠시 멍해지는 체험을 하며 ‘그 터널을 뚫고 레일을 깔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채찍 앞에 벌벌 떨며 고생을 했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에게 근대는 일본이 거저 가져다 준 것이 아니었다. 우리들의 희생과 피땀으로 이루어낸 것일 뿐이다.

 



 

  2시간 30분여를 달려 순천에 도착했다. 순천에 와본 적이 있던가? 생각나는 장면이 없다. 한 번도 오지 않은 건 아닐 테지만, 단체로 온 것이기에 기억에 없는 거겠지. 그렇다면 순천하면 떠오르는 게 뭐지? 김승옥의 ≪무진기행≫, 공지영의 ≪도가니≫의 무대인 곳, 그만큼 안개가 자주 끼는 도시가 아닐까? 거기다가 ≪태백산맥≫을 읽으며 알게 된 ‘여순사건’의 중심도시다. 그만큼 혁명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던 곳이다. 순천에선 1시간 정도 밖에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바로 역에서 나왔다. 순천 역사는 바로 전통이 제거된 통유리 건물이더라. KTX가 지나 규모가 커진 만큼 어쩔 수 없는 변화겠지만 예전 모습을 찾을 수 없어 섭섭했다.

 



 

거기서 좀 걸어 나가니 천이 하나 보이더라. 전주천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컸다. 운동하던 사람에게 이것저것 물어봤다. 그랬더니 그 천의 이름은 ‘동천’이라 하고 거기서 1시간 정도 걸어가면 그 유명한 ‘순천만’에 가볼 수 있다고 하더라. 생각 같아선 가보고 싶었지만 오늘의 목적지는 다른 곳이었기에 그 길을 따라 30분 동안 걸어갔다가 다시 순천역으로 돌아왔다. 왠지 모르게 순천이 춘천 같다는 느낌이 들더라. 이미지가 같아 보였다. 하긴 순천이나 춘천이나 그냥 스쳐지나간 것에 불과하니 나의 이런 느낌도 ‘장님 코끼리 더듬기’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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