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경주로 가는 까닭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을 묻는 것만큼이나 이 질문도 쓸데없는 것이다. ‘경주로 왜 갔는지?’를 알기 위해선 ‘왜 부산으로 가지 않았는지?’, ‘왜 공주로 가지 않았는지?’ 이런 계속 되는 질문에 답해야 하기 때문이다. 과연 이유가 있었을까? 꼭 가야할 이유가 있었을까? 그건 나조차도 잘 모르겠다는 것. 단지 <공각기동대>식으로 말하면 ‘고스트가 그렇게 속삭였다(ep 1)’는 게 될 것이고, <에반게리온>식으로 말하면 ‘여자의 감(물론 난 남자니까 남자의 감이 될 거다^^)’이 될 게다. 뚜렷한 이유는 없고 내 맘이 이끄는 대로 목적지를 정하고 움직인 것에 불과하다. 이런 걸 여행이라 할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있는 장소를 떠나 새로운 장소로 찾아가는 걸 여행’이라고 한다면 여행했다고 할 수 있는 거겠지. 그러나 보통 여행이란 ‘계획과 목표가 확실한 것’이기에 그 기준에서 본다면 난 그저 ‘싸돌아 댕기다 온 것’이리라.
경주는 초등학생 때 몇 번 왔던 것 같다.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별 흥미도 없이 왔다가 간 것이다. 그러니 눈으로 보긴 보지만 저게 나에게 무슨 의미인지, 뭐 하러 이것을 보려고 여기까지 와야 하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모든 게 귀찮게 느껴질 수밖에. 의미부여가 안 된 상태에서 하는 일은 정신낭비, 체력 낭비일 뿐이다.
바로 그걸 바꾸고 싶었다. 언젠가 한 번 와서 본 것으로 ‘나 거기 가봤어.’라고 하기엔 쪽팔렸으니까. 가봤다고 하기엔 내 머릿속에 남은 경주의 풍경들은 초라했다. 아니 차라리 그런 기억들이 없음만도 못했던 것이다. 지금 간다고 해서 얼마나 많은 것을 깨닫게 되겠냐 만은 한 가지 분명한 건 이번엔 내가 가고 싶어서 간다는 거겠지. 그런 자발성에 마음이 활짝 열려 서라벌의 풍치를 온 몸으로 맛보고 오기를.
2. 시간이 멈춘 곳, 나를 만날 수 있던 곳.
경주 터미널에 내렸다. 빙빙 돌아오니 3시간 30분이 걸리더라. 내리자마자 길을 나섰다. 불어오는 바람이 코끝을 스친다. 깊이 들이 마셔보는데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지며 몸의 긴장도 풀어지더라. 고풍이 스민 고장이기에 내 몸 속에 새겨진 옛 사람들의 흥취가 되살아나는 느낌이더라. 정말 말로는 미처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늘 꿈꾸던 의식의 자유, 마음의 자유를 실컷 경험해 볼 수 있었으니까.
조금 걸으니 고분군이 나오더라. 도시 한복판에 옛 무덤들이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높은 언덕 같은 무덤은 그 당시 지배층의 권위를 드러내고 있었다. 지금은 역사 유적이 되어 삶의 공간과 섞여 있다. 삶과 죽음이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그 곳에는 공원 같이 꾸며져 있어 어르신들의 휴식처이며,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이기도 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말이 있듯이 죽음 자체를 생과 별개로 사유하지 않는 정신을 느낄 수 있었다. 난 살아 있다. 고로 난 죽어 있다.
고분군 안내판엔 불장난도 하지 말고 고분에 올라가지도 말라고 써져 있다. 아~ 하지 말라고 하니깐 더 하고 싶은 거 있지^^ 불장난은 별취미가 없으니 그러려니 해도 꼭 저 고분을 오르고 싶은 이 마음은 뭘까~ 내 안에 꿈틀꿈틀하는 이 마음을 어찌해야 할까? 지금도 지금이지만 겨울에 눈 내리고 난 후에 비료 푸대로 눈썰매 타면 최고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하긴 너무 급경사라 올라가기도 힘들겠지만.
그 다음에 간 곳은 大陵苑(큰 능묘가 있는 동산)이다. 무덤으로 정원을 만들었다는 건데, 참 기발하다. 역시나 관광의 도시답게 관광객이 엄청 많더라. 들어가자마자 경악스런 비석을 보고야 말았다.
“이곳은 국토통일의 기상이 넘치고 민족문화가 찬란하게 꽃핀 신라의 천년고도 서라벌의 옛터다.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신라의 통일정신을 오늘에 되살리고 찬란한 민족문화를 기리 보존하기 위하여 경주지구 개발의 대영단을 내리셨다. (...중략...) 우리 민족문화의 전통을 발전 한국의 위대한 기상 속에 재현코져 하는 그 드높은 뜻을 여기 새겨서 기리 전하고져 한다. 문화공보부”
‘박정희 대통령께서~ 대영단을 내리셨다’ 란다. 이곳을 본격적으로 개발하게 되면서 그 공을 박정희에게 모조리 돌리고 있는 글이었다. 그 글로 인해 기분이 다운 되긴 했지만 우리 근대사를 보여주는 하나의 증표이기에 그곳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더라. 신라의 고분이 왕들의 위엄을 드러내는 공간이듯이, 왕의 위엄을 빌어 박대통령의 위엄이 드러나는 대릉원의 의미는 남달랐던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과거사를 재정리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도 알 수 있었다. 그 과거사에 현재의 관점을 투영하여 과거의 현재화를 진행하는 것이었으니까. 결국 역사란 ‘이긴 자의 역사’이듯이, 과거의 복원도 ‘복원자의 현재’였던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대영단’의 고심이 스민 대릉원을 힘차게 걸었다.
정말 잘 꾸며진 무덤 정원이더라. 한적하고 운치 있었다. 그곳에서 한나절 머물며 있고 싶은 생각도 들더라. 천마총은 무덤이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 지 보여줬다. 그 안에는 외부와 다르게 시원하더라. 발굴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고 관과 곽이 어떤 구조로 만들어졌고 거대한 봉분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관을 나무로 만든 곽으로 한 번 씌우고 그 위에 돌로 전체면을 한 번 더 감싼다. 돌맹이들이 쌓인 두께가 엄청났는데 그걸 쌓느라 엄청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흙으로 그걸 감싸면 끝이다. 그곳에 있던 무덤들이 다 그러한 과정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왕의 장례식은 왕가의 장례식으로만 끝나지 않고 경주에 살던 백성들까지 참여하는 경주의 행사였을 것이다. 그렇게 큰 무덤을 만들기 위해서는 갑남을녀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테니까. 지금 대통령이 돌아가시면 하는 국장은 그것에 비하면 약과겠지.
대릉원에서 나와 한적한 들길을 따라 걷는다. 잘 꾸며 있기에 사람들도 많더라. 작년에 함양에 있는 상림숲에 갔었는데 그때 느꼈던 운치와 거의 흡사했다. 풀내음이 코끝을 자극하니, 여기야말로 ‘천국’, ‘극락’이 아닐까하는 착각마저 들더라. 정말 두고두고 다시 오고 싶은 길이었고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오고 싶은 길이었다. 조금 가다보니 첨성대가 보이더라.
들길 한복판에 솟아 있는 첨성대가 특이해 보이는 건 그 때문이었다. 가까이 가서 보기 위해서는 500원의 입장료를 내야 한다. 멀리서도 충분히 볼 수 있었고 들어간다해도 첨성대에 올라갈 수는 없었기에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돌로 만들어진 건축물이다. 하긴 석굴암, 불국사 등 걸출한 예술품들을 만들어낸 신라 사람들에게 있어 첨성대쯤의 ‘작은’ 건축물은 아무 것도 아니었겠지. 그곳에 올라 별자리의 운행을 연구하며 국가의 흥쇠를 연구했을 옛 사람들을 떠올려 봤다.
안압지는 신라 왕실 정원의 웅장함을 여지없이 느끼게 해줬다. 조선 왕실의 연못인 경회루와는 다른 운치다. 하지만 그렇다고 초라하거나 그러진 않더라. 오히려 경회루보다 규모도 더 커보였다. 그곳에서 온갖 연회도 이루어졌겠지.
거기서 조금 내려오니 바로 경주국립박물관이더라. 경주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이곳을 꼭 찾아야 한다. 박물관의 규모부터가 엄청나서 역사의 도시라는 이름을 내건 전주박물관은 비교조차 되지 않더라. 하긴 그건 단순히 규모 문제만은 아니었다. 박물관 내에 소장한 물품의 질과 밀접하게 관련 있으니까. 경주는 경주에서 출토된 유물만으로도 경주국립박물관을 유지하기에 충분했지만, 전주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 그래서 대부분은 모조품으로 한 것이다. 이런 차이는 박물관의 질과 관련이 있고 그건 곧 관람객의 많고 적음과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위치상의 차이도 간과할 순 없다. 경주는 다양한 유적지를 보며 걷다보면 박물관이 나오는데 반해, 전주는 유명한 곳과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다. 한옥마을ㆍ전동성당을 보고 나서 한참을 달려야 박물관에 갈 수 있는 것이다. 접근성까지도 별로이다보니 당연히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질 수밖에. 결국 전주박물관이 살기 위해선 박물관 주변에 전주를 대표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하고, 소장품의 질도 높여야 한다.
경주 박물관 입구 쪽엔 성덕대왕신종이 있다.
그 우람한 종을 만들었다니 기술이 놀랍더라. 근데 그 뿐인가? 그걸 매단 신라인들의 기술력은 현재로도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라고 한다. 그 무겁고도 큰 종을 매달고 그걸 버텨낼 수 있는 것을 만들 정도였으니, 고대인들의 과학은 현재 과학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 게 분명하다. 기술이란 게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건 아닌가 보다. 단절되기도 하고 비약되기도 하는 걸지도. 종소리를 들을 수 없으니 아쉽더라. 박물관에는 안압지에서 발굴한 유물들로 꾸며진 곳과 불교 예술품으로 꾸며진 곳, 신라의 발굴품으로 꾸며진 곳이 있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곳은 불교 예술품으로 꾸며진 곳이었다. 돌부처상을 보고 있으니 왠지 마음이 울리더라. 무언가 뜨거운 게 느껴졌다. 불자가 아닌 나도 이러는데 불자였으면 더 심했겠지. 여긴 신라인들의 ‘왕국토’였을 것이다. 곳곳에 보이는 사찰과 불교 예술품, 그리고 황룡사지의 웅장함을 보면서 중생들은 마음의 위로를 얻었을 것이다. 윤회의 업을 벗어나 해탈의 경지에 들어가기 위해 늘 불심을 되돌아 봤겠지. 황룡사지는 터만 남아있지만 박물관에 복원도가 있었다. 여느 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규모도 크고 9층탑의 위용은 엄청 나더라. 그 실물을 보지 못하는 게 어찌나 아쉽던지.
(여행을 끝내고 터미널로 향하는 길에 아리따운 낭자를 만났다. 청초한 얼굴에 수수해 보이는 모습까지.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건넨다. 화들짝 놀랐다. 타지에서까지 ‘도를 아십니까?’를 만나다니^^ 얘기를 조금 들어보니 미륵불을 연구하는 사람이란다. 여기가 경주 아니랄까봐, 단순히 ‘도를 아십니까?’도 아니고 미륵불 이야기를 해준단다. 참 재밌는 사건이다. 하지만 시간이 없기에 도망치듯 걸어왔다.)
3. 역사가 묻어 있는 곳, 그래서 우린 그곳에 가야 한다.
경주, 딱 한마디로 말하면 ‘마음의 여유를 찾고 싶은 사람이 와야 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한 2박 3일간 머무를 각오를 하고 와야 한다. 많은 걸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를 보더라도 여유롭게 보기 위해서다. 대릉원에서, 황룡사지에서 하루를 꼬박 보낸다 해도 아쉽지 않으리라. 마음의 정리가 필요한 사람, 이런 저런 문제로 골머리 앓고 있는 사람, 삶의 여유가 뭔지 모르는 사람이라면 한 번 와보길 바란다. 천년전의 자취를 느끼다보면 오늘을 살고 있는 내가 무얼 해야 하는지도 자연히 알게 될 테니까. 역사는 지난 이야기가 아니다. 현재의 나로 인해 끊임없이 새롭게 쓰여 져야 하는 게 역사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