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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조차 말할 수 없는 현실.

국가 권력이 누구 편인지 이렇게 명백히 보여주는 사진이 또 있을까?

가진 자가 없는 자를 위해주며, 국가가 노동자를 위해줄 거라는 바람, 그것이야말로 거짓이며 기만이다.

그래서 맑스와 레닌은 이렇게 말했던 게 아닐까

만국의 프로레타리아여 단결하라! (Proletarier aller Lander, vereinigt euch!)

연대만이 민초의 저력을 보여줄 수 있는 힘이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노무현 대통령 묘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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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1-07-11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론은 침묵내지 욕을 퍼붓죠. 길막고 뭐하는 짓거리냐고...
그래서 깨어있는 시민의 연대가... 그 희망 버스가 중요한 것입니다.

leeza 2011-07-11 19:14   좋아요 0 | URL
'너희의 모습이 나의 모습이다'는 깨우침이 가장 중요하겠죠. 어제 하루 맘이 무거웠습니다.
 

요즘 대학생들 사이에선 ‘스펙’이 화두다. 스펙을 쌓아야 한다느니, 그래선 안 된다느니 설왕설래 하고 있는 거다.

스펙이란 원래 어떤 상품의 사양을 말하는 거였다. 상품의 겉만 봐선 어떤 부속품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알 수 없기에 그걸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도표화한 것이다. 물건을 사려는 사람은 그것부터 면밀히 살펴보고 자기가 원하는 물건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것이다. 이런 용도로 쓰이던 스펙이란 단어가 사람에게까지 쓰이게 되었다면 이미 사람의 인격성은 거세되고 기계의 한 측면으로만 바라보게 되었다고 생각해도 될 거다. 고로 사람이면 각자의 개성, 특성이 있다는 ‘주체성’은 더 이상 들어설 공간이 없다. 단지 내세울만한 스펙이 있으면 쓰일 수 있고 그걸 넘어서는 스펙의 소유자가 나타나면 여지없이 ‘교환 가능’해진 것이다. 우리가 컴퓨터를 업그레이드하며 구식 CPU에 ‘미련’, ‘안타까움’을 가지지 않듯, 우리 또한 그렇게 된 것이다. 결국 스펙이란 용어는 이미 태생 자체가 자본주의 사회의 타락한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게 스펙표다. 나의 가치도 이런 식으로 환산된다고 생각하니 왠지 끔찍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스펙을 쌓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그건 기업이 원하는 인간, 사회가 원하는 인간이 되려는 것이다. 진정한 나의 가치는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보내고 내가 진정 원하는 일 따위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누군가가 원하는 모습으로 나를 ‘성형’하는 것이다. 토익을 본다, 인턴사원을 한다, 해외에 교환 학생으로 나갔다 온다, 각종 자격증을 딴다 하는 것들 속엔 ‘세상에서 원하니까’, ‘취업에 유리하니까’하는 생각만 들어 있을 뿐, ‘내가 왜 이걸 하는 거지?’ ‘내가 잘 가고 있는 건가?’하는 고민은 없다. 취업에 대한 불안은 점점 우릴 수동적으로 만들고 체념하게 만든 것이다. 
 

임용을 준비하는 사람들이라 해서 나은 게 있냐 하면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물론 영어 점수의 유혹, 자격증의 유혹에서 자유로운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미 대학에 들어올 때부터 목적이 뚜렷하다보니 그것 외의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더 이상 야학의 낭만(?)도 없으며, 다양한 경험을 통해 다양한 학생들을 이해하려는 마음도 없다. 단순히 빨리 교사가 되기 위해 ‘죽어라’ 한 우물만 팔 뿐이다. 이들에게 스펙 쌓기란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맞을 수 있는 ‘정답기계’가 되는 것이며 주어진 방식에 따라서만 사고하는 ‘훈육기계’가 되는 것이다. 
 

이렇듯 스펙 쌓기의 본질이 나를 버리고 누군가 왜 정해 놓은 지도 모르는 기준에 맞춰 나를 재정립하는 것이라 한다면,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어차피 세상은 내가 사는 것이고, 나를 타인의 기준에 100% 맞추는 것도 불가능할뿐더러, 교환 가능한 기계노릇을 하며 살 수도 없으니까. 그렇게 빈껍데기로 살아가느니 내가 진정 원하던 나의 모습을 그리며 그 일을 하는 가운데 행복을 느끼며 사는 삶이 훨씬 낫겠다. 이런 ‘결단’이 말로만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스펙 사회’의 촘촘한 그물망을 뛰어넘는 자신의 역량과 능력이 필요하다. 그건 스펙이란 단어를 자기 나름대로 재정립하는 데서 시작해야 함은 물론이다.(물론 그런 단어를 아예 안 쓰는 게 제일 좋겠지만, 이미 일상어가 되었다면 사용할지언정 나만의 방식으로 사용해야 한다) 나에게 스펙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나가는 데서 얻는 깨달음과 노하우이다’라고 말이다. 각자의 정의는 각자의 기준과 나가고자 하는 방향대로 해보길. 그러므로 우리의 고민은 스펙을 쌓아야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과연 난 누구인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어떤 일을 어떻게 하며 살고 싶은가? 하는 고민이 선행되어야 하는 거다. 그런 고민을 통해 나의 길을 알게 되었을 때, 난 더 이상 교환 가능한 ‘기계’가 아니라 나만의 존재 이유와 존재 가치가 ‘활발발’하게 흘러넘치는 ‘주체’가 될 수 있으리라.  

일찍이 조선 후기 학자 이덕무는 《耳目口心書》에서 “시인과 운사가 아름다운 때, 좋은 경치를 대하면 시를 쓰는 어깨에선 산이 솟아오르고, 읊던 눈동자엔 물결이 일어나며, 어금니와 뺨에선 향기가 나고 입과 입술에선 꽃이 핀다. (騷人韻士, 佳辰美景, 詩肩聳山, 吟眸漾波, 牙頰生香, 口吻開花.)”라고 했다. 어찌 이 말이 시인과 운사에게만 쓰일 수 있는 말일까 보랴. 이 말이야말로 자신을 위한 스펙을 쌓으며 오늘 하루 신나게 살고 있는 이에게 쓸 수 있는 말일 거니까. ‘자신의 스펙을 쌓으며 하루 하루를 충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어깨에선 산이 치솟고, 눈동자엔 파도가 치며, 어금니와 뺨에선 향기가 나고 입과 입술에선 꽃이 핀다’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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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10-08-21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펙 뭐에 써먹는 건지 관심이 없었는데 사회 나오니 자꾸 관심 갖게 하네요. -_- 어느 분들이 제 스펙에 관심을 자꾸 가지시니.

leeza 2010-08-21 17:29   좋아요 0 | URL
어느 분이라고 말했지만, 분명히 그 분은 권력을 가진 높은 분이겠죠. 그 분에게 아프락사스님의 서재를 보여드리는 것도 좋을 거 같아요. 그거야 말로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스펙이고 포트폴리오니까~

마늘빵 2010-08-21 17:32   좋아요 0 | URL
제 서재를 공개하면 지나치게(?) 올바름을 추구하는 저를 더 싫어할지도 모르겠어요. 윗분들은 이런 서재 안 좋아합니다. 오히려 공개하면 제 스펙을 깎아 먹을 겁니다. ^^
 

1. 경주로 가는 까닭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을 묻는 것만큼이나 이 질문도 쓸데없는 것이다. ‘경주로 왜 갔는지?’를 알기 위해선 ‘왜 부산으로 가지 않았는지?’, ‘왜 공주로 가지 않았는지?’ 이런 계속 되는 질문에 답해야 하기 때문이다. 과연 이유가 있었을까? 꼭 가야할 이유가 있었을까? 그건 나조차도 잘 모르겠다는 것. 단지 <공각기동대>식으로 말하면 ‘고스트가 그렇게 속삭였다(ep 1)’는 게 될 것이고, <에반게리온>식으로 말하면 ‘여자의 감(물론 난 남자니까 남자의 감이 될 거다^^)’이 될 게다. 뚜렷한 이유는 없고 내 맘이 이끄는 대로 목적지를 정하고 움직인 것에 불과하다. 이런 걸 여행이라 할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있는 장소를 떠나 새로운 장소로 찾아가는 걸 여행’이라고 한다면 여행했다고 할 수 있는 거겠지. 그러나 보통 여행이란 ‘계획과 목표가 확실한 것’이기에 그 기준에서 본다면 난 그저 ‘싸돌아 댕기다 온 것’이리라. 
 

경주는 초등학생 때 몇 번 왔던 것 같다.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별 흥미도 없이 왔다가 간 것이다. 그러니 눈으로 보긴 보지만 저게 나에게 무슨 의미인지, 뭐 하러 이것을 보려고 여기까지 와야 하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모든 게 귀찮게 느껴질 수밖에. 의미부여가 안 된 상태에서 하는 일은 정신낭비, 체력 낭비일 뿐이다.
 

바로 그걸 바꾸고 싶었다. 언젠가 한 번 와서 본 것으로 ‘나 거기 가봤어.’라고 하기엔 쪽팔렸으니까. 가봤다고 하기엔 내 머릿속에 남은 경주의 풍경들은 초라했다. 아니 차라리 그런 기억들이 없음만도 못했던 것이다. 지금 간다고 해서 얼마나 많은 것을 깨닫게 되겠냐 만은 한 가지 분명한 건 이번엔 내가 가고 싶어서 간다는 거겠지. 그런 자발성에 마음이 활짝 열려 서라벌의 풍치를 온 몸으로 맛보고 오기를.

 

2. 시간이 멈춘 곳, 나를 만날 수 있던 곳.

경주 터미널에 내렸다. 빙빙 돌아오니 3시간 30분이 걸리더라. 내리자마자 길을 나섰다. 불어오는 바람이 코끝을 스친다. 깊이 들이 마셔보는데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지며 몸의 긴장도 풀어지더라. 고풍이 스민 고장이기에 내 몸 속에 새겨진 옛 사람들의 흥취가 되살아나는 느낌이더라. 정말 말로는 미처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늘 꿈꾸던 의식의 자유, 마음의 자유를 실컷 경험해 볼 수 있었으니까.

조금 걸으니 고분군이 나오더라. 도시 한복판에 옛 무덤들이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높은 언덕 같은 무덤은 그 당시 지배층의 권위를 드러내고 있었다. 지금은 역사 유적이 되어 삶의 공간과 섞여 있다. 삶과 죽음이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그 곳에는 공원 같이 꾸며져 있어 어르신들의 휴식처이며,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이기도 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말이 있듯이 죽음 자체를 생과 별개로 사유하지 않는 정신을 느낄 수 있었다. 난 살아 있다. 고로 난 죽어 있다.

 



고분군 안내판엔 불장난도 하지 말고 고분에 올라가지도 말라고 써져 있다. 아~ 하지 말라고 하니깐 더 하고 싶은 거 있지^^ 불장난은 별취미가 없으니 그러려니 해도 꼭 저 고분을 오르고 싶은 이 마음은 뭘까~ 내 안에 꿈틀꿈틀하는 이 마음을 어찌해야 할까? 지금도 지금이지만 겨울에 눈 내리고 난 후에 비료 푸대로 눈썰매 타면 최고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하긴 너무 급경사라 올라가기도 힘들겠지만.

그 다음에 간 곳은 大陵苑(큰 능묘가 있는 동산)이다. 무덤으로 정원을 만들었다는 건데, 참 기발하다. 역시나 관광의 도시답게 관광객이 엄청 많더라. 들어가자마자 경악스런 비석을 보고야 말았다.



 “이곳은 국토통일의 기상이 넘치고 민족문화가 찬란하게 꽃핀 신라의 천년고도 서라벌의 옛터다.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신라의 통일정신을 오늘에 되살리고 찬란한 민족문화를 기리 보존하기 위하여 경주지구 개발의 대영단을 내리셨다. (...중략...) 우리 민족문화의 전통을 발전 한국의 위대한 기상 속에 재현코져 하는 그 드높은 뜻을 여기 새겨서 기리 전하고져 한다. 문화공보부”

‘박정희 대통령께서~ 대영단을 내리셨다’ 란다. 이곳을 본격적으로 개발하게 되면서 그 공을 박정희에게 모조리 돌리고 있는 글이었다. 그 글로 인해 기분이 다운 되긴 했지만 우리 근대사를 보여주는 하나의 증표이기에 그곳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더라. 신라의 고분이 왕들의 위엄을 드러내는 공간이듯이, 왕의 위엄을 빌어 박대통령의 위엄이 드러나는 대릉원의 의미는 남달랐던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과거사를 재정리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도 알 수 있었다. 그 과거사에 현재의 관점을 투영하여 과거의 현재화를 진행하는 것이었으니까. 결국 역사란 ‘이긴 자의 역사’이듯이, 과거의 복원도 ‘복원자의 현재’였던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대영단’의 고심이 스민 대릉원을 힘차게 걸었다.



 정말 잘 꾸며진 무덤 정원이더라. 한적하고 운치 있었다. 그곳에서 한나절 머물며 있고 싶은 생각도 들더라. 천마총은 무덤이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 지 보여줬다. 그 안에는 외부와 다르게 시원하더라. 발굴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고 관과 곽이 어떤 구조로 만들어졌고 거대한 봉분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관을 나무로 만든 곽으로 한 번 씌우고 그 위에 돌로 전체면을 한 번 더 감싼다. 돌맹이들이 쌓인 두께가 엄청났는데 그걸 쌓느라 엄청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흙으로 그걸 감싸면 끝이다. 그곳에 있던 무덤들이 다 그러한 과정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왕의 장례식은 왕가의 장례식으로만 끝나지 않고 경주에 살던 백성들까지 참여하는 경주의 행사였을 것이다. 그렇게 큰 무덤을 만들기 위해서는 갑남을녀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테니까. 지금 대통령이 돌아가시면 하는 국장은 그것에 비하면 약과겠지.

대릉원에서 나와 한적한 들길을 따라 걷는다. 잘 꾸며 있기에 사람들도 많더라. 작년에 함양에 있는 상림숲에 갔었는데 그때 느꼈던 운치와 거의 흡사했다. 풀내음이 코끝을 자극하니, 여기야말로 ‘천국’, ‘극락’이 아닐까하는 착각마저 들더라. 정말 두고두고 다시 오고 싶은 길이었고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오고 싶은 길이었다. 조금 가다보니 첨성대가 보이더라.



 들길 한복판에 솟아 있는 첨성대가 특이해 보이는 건 그 때문이었다. 가까이 가서 보기 위해서는 500원의 입장료를 내야 한다. 멀리서도 충분히 볼 수 있었고 들어간다해도 첨성대에 올라갈 수는 없었기에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돌로 만들어진 건축물이다. 하긴 석굴암, 불국사 등 걸출한 예술품들을 만들어낸 신라 사람들에게 있어 첨성대쯤의 ‘작은’ 건축물은 아무 것도 아니었겠지. 그곳에 올라 별자리의 운행을 연구하며 국가의 흥쇠를 연구했을 옛 사람들을 떠올려 봤다. 

안압지는 신라 왕실 정원의 웅장함을 여지없이 느끼게 해줬다. 조선 왕실의 연못인 경회루와는 다른 운치다. 하지만 그렇다고 초라하거나 그러진 않더라. 오히려 경회루보다 규모도 더 커보였다. 그곳에서 온갖 연회도 이루어졌겠지.

거기서 조금 내려오니 바로 경주국립박물관이더라. 경주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이곳을 꼭 찾아야 한다. 박물관의 규모부터가 엄청나서 역사의 도시라는 이름을 내건 전주박물관은 비교조차 되지 않더라. 하긴 그건 단순히 규모 문제만은 아니었다. 박물관 내에 소장한 물품의 질과 밀접하게 관련 있으니까. 경주는 경주에서 출토된 유물만으로도 경주국립박물관을 유지하기에 충분했지만, 전주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 그래서 대부분은 모조품으로 한 것이다. 이런 차이는 박물관의 질과 관련이 있고 그건 곧 관람객의 많고 적음과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위치상의 차이도 간과할 순 없다. 경주는 다양한 유적지를 보며 걷다보면 박물관이 나오는데 반해, 전주는 유명한 곳과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다. 한옥마을ㆍ전동성당을 보고 나서 한참을 달려야 박물관에 갈 수 있는 것이다. 접근성까지도 별로이다보니 당연히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질 수밖에. 결국 전주박물관이 살기 위해선 박물관 주변에 전주를 대표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하고, 소장품의 질도 높여야 한다.

경주 박물관 입구 쪽엔 성덕대왕신종이 있다. 



 그 우람한 종을 만들었다니 기술이 놀랍더라. 근데 그 뿐인가? 그걸 매단 신라인들의 기술력은 현재로도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라고 한다. 그 무겁고도 큰 종을 매달고 그걸 버텨낼 수 있는 것을 만들 정도였으니, 고대인들의 과학은 현재 과학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 게 분명하다. 기술이란 게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건 아닌가 보다. 단절되기도 하고 비약되기도 하는 걸지도. 종소리를 들을 수 없으니 아쉽더라. 박물관에는 안압지에서 발굴한 유물들로 꾸며진 곳과 불교 예술품으로 꾸며진 곳, 신라의 발굴품으로 꾸며진 곳이 있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곳은 불교 예술품으로 꾸며진 곳이었다. 돌부처상을 보고 있으니 왠지 마음이 울리더라. 무언가 뜨거운 게 느껴졌다. 불자가 아닌 나도 이러는데 불자였으면 더 심했겠지. 여긴 신라인들의 ‘왕국토’였을 것이다. 곳곳에 보이는 사찰과 불교 예술품, 그리고 황룡사지의 웅장함을 보면서 중생들은 마음의 위로를 얻었을 것이다. 윤회의 업을 벗어나 해탈의 경지에 들어가기 위해 늘 불심을 되돌아 봤겠지. 황룡사지는 터만 남아있지만 박물관에 복원도가 있었다. 여느 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규모도 크고 9층탑의 위용은 엄청 나더라. 그 실물을 보지 못하는 게 어찌나 아쉽던지. 



 (여행을 끝내고 터미널로 향하는 길에 아리따운 낭자를 만났다. 청초한 얼굴에 수수해 보이는 모습까지.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건넨다. 화들짝 놀랐다. 타지에서까지 ‘도를 아십니까?’를 만나다니^^ 얘기를 조금 들어보니 미륵불을 연구하는 사람이란다. 여기가 경주 아니랄까봐, 단순히 ‘도를 아십니까?’도 아니고 미륵불 이야기를 해준단다. 참 재밌는 사건이다. 하지만 시간이 없기에 도망치듯 걸어왔다.)

3. 역사가 묻어 있는 곳, 그래서 우린 그곳에 가야 한다. 

경주, 딱 한마디로 말하면 ‘마음의 여유를 찾고 싶은 사람이 와야 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한 2박 3일간 머무를 각오를 하고 와야 한다. 많은 걸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를 보더라도 여유롭게 보기 위해서다. 대릉원에서, 황룡사지에서 하루를 꼬박 보낸다 해도 아쉽지 않으리라. 마음의 정리가 필요한 사람, 이런 저런 문제로 골머리 앓고 있는 사람, 삶의 여유가 뭔지 모르는 사람이라면 한 번 와보길 바란다. 천년전의 자취를 느끼다보면 오늘을 살고 있는 내가 무얼 해야 하는지도 자연히 알게 될 테니까. 역사는 지난 이야기가 아니다. 현재의 나로 인해 끊임없이 새롭게 쓰여 져야 하는 게 역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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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보여행 그리고 1년 후

  2009년 4월에 도보여행을 시작하여 한 달간 걸어서 5월에 도보여행을 마쳤다. 한 달이란 시간의 의미는 그 어느 때의 1년이란 시간보다도 의미가 있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 시간은 온전히 나만을 위한 시간이었고 세상과 한 걸음 더 가까워지는 시간이었으니까. 걸을 때마다 몸은 고되지만 생기는 넘치는 아이러니가 계속 되었다. 그로인해 알게 된 건 세상은 그리 삭막하지도 팍팍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어딘가 알게 모르게 도움의 손길은 계속 되었고 그 도움으로 인해 난 한걸음 더 나갈 수 있었으니까. 그 벅찬 감동과 열정은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생생하다.

  그 후 1년이 지났다. 작년엔 4월 19일이 일요일이었는데 올해는 4월 18일이 일요일인 거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 날 여행을 가는 거냐고? ‘도보여행 출발일을 기념하기 위해서 떠났다’고 하면 좀 그럴 듯해 보이지만 거짓말이 된다. 그저 전주대 중간고사 기간에 맞춰 움직인 것뿐이니까. 중간고사 기간엔 중앙도서관이 전쟁터가 되니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이다. 그런 이유로 떠나게 된 것인데 우연히도 날짜가 맞은 것이다. 이거 뭔가 딱딱 맞는 느낌이다. 작년엔 도보여행 출발일이 우연하게 4.19와 겹쳤었는데 올해도 그런 꼴이니. 참~ 세상은 이렇게 신기하다. 억지로 딱딱 맞추는 건 아닌데 이런 식으로 의미 부여를 할 수 있으니까. 그런 면에서 보면 오늘의 여행은 ‘벌교 탐방기’이며 ‘도보여행 1주년 축하 여행’이지 않을까?


 

2. 벌교에 가기까지

  ≪태백산맥≫ 소설의 무대인 벌교에 가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갑자기 가기로 한 걸까?

  한참 ≪태백산맥≫을 읽고 있었다. 벌교에 가본 적이 없는지라 지리가 낯선 탓에 소설 속 상황들이 잘 이해되지 않더라. 지역상황은 몰라도 이념의 대립이란 것에 집중하며 책을 읽었다. 그렇게 ≪태백산맥≫의 산줄기를 따라 헤매고 있을 때 <한겨레신문> esc에 벌교 탐방기가 실렸다. 그 기사를 읽고 있으니 ≪태백산맥≫의 이야기가 상상 속에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건 생생한 현실에 대한 기록이었고 그 곳에 살던 민중의 증언이었던 것이다. 소설을 읽으며 그저 막연하게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광경이 거기에 그대로 있는 걸 보니 어찌나 가슴이 두근거리던지. 그런 우연들이 맞물려 벌교로 떠나기로 결심한 것이다.

 



 


 

3. 순천, 스쳐가는 바람으로

  전주에서 벌교로 바로 가는 버스나 기차는 없었다. 그래서 광주나 순천을 경유해서 가야 하는데 난 순천을 경유해서 가기로 했다. 아무래도 소설에서 자주 언급되던 도시니까. 그리고 오늘은 특별히 기차여행을 하기로 맘먹었다. 오랜만에 덜컹거림을 느끼고도 싶었고 요즘은 ≪아리랑≫에서 철도부설권과 관련된 부분을 읽고 있는지라 일제가 한국에 남긴 ‘선물’인 철도를 따라가며 아픈 역사를 반추해 보고 싶었다.

  기차는 7시 56분에 있다. 그걸 타기 위해 아침부터 부산을 떨었다. 전주역엔 오랜만에 가본다. 한옥을 본 뜬 역사는 어느 건물 못지않게 멋져 보이더라. 요즘은 통유리 건물이 대세여서 어떤 관공서 건물이든 지었다 하면 통유리 건물이다. 처음엔 그런 위용이 경이로웠는데 하도 여기저기 무분별하게 들어서니 어느 순간엔 식상하더라. 그런 일상의 식상함이 전주 역사를 보는 순간 말끔히 가셨다.

 



 

순천행 기차는 여수가 종착역이다. 그 기차를 타는 여행객들이 많았다. 가족 단위 여행객들이 대부분이다. 기차는 순천을 향해 달렸다. 순천으로 가는 길엔 정말 터널이 많더라. 귀가 잠시 멍해지는 체험을 하며 ‘그 터널을 뚫고 레일을 깔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채찍 앞에 벌벌 떨며 고생을 했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에게 근대는 일본이 거저 가져다 준 것이 아니었다. 우리들의 희생과 피땀으로 이루어낸 것일 뿐이다.

 



 

  2시간 30분여를 달려 순천에 도착했다. 순천에 와본 적이 있던가? 생각나는 장면이 없다. 한 번도 오지 않은 건 아닐 테지만, 단체로 온 것이기에 기억에 없는 거겠지. 그렇다면 순천하면 떠오르는 게 뭐지? 김승옥의 ≪무진기행≫, 공지영의 ≪도가니≫의 무대인 곳, 그만큼 안개가 자주 끼는 도시가 아닐까? 거기다가 ≪태백산맥≫을 읽으며 알게 된 ‘여순사건’의 중심도시다. 그만큼 혁명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던 곳이다. 순천에선 1시간 정도 밖에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바로 역에서 나왔다. 순천 역사는 바로 전통이 제거된 통유리 건물이더라. KTX가 지나 규모가 커진 만큼 어쩔 수 없는 변화겠지만 예전 모습을 찾을 수 없어 섭섭했다.

 



 

거기서 좀 걸어 나가니 천이 하나 보이더라. 전주천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컸다. 운동하던 사람에게 이것저것 물어봤다. 그랬더니 그 천의 이름은 ‘동천’이라 하고 거기서 1시간 정도 걸어가면 그 유명한 ‘순천만’에 가볼 수 있다고 하더라. 생각 같아선 가보고 싶었지만 오늘의 목적지는 다른 곳이었기에 그 길을 따라 30분 동안 걸어갔다가 다시 순천역으로 돌아왔다. 왠지 모르게 순천이 춘천 같다는 느낌이 들더라. 이미지가 같아 보였다. 하긴 순천이나 춘천이나 그냥 스쳐지나간 것에 불과하니 나의 이런 느낌도 ‘장님 코끼리 더듬기’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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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2010년 4월이고 난 중앙도서관 4열람실 4번 자리에 앉아 있다. 아침에 눈을 뜰 때 시계를 보면서 ‘햐~ 오늘은 4월 4일이네. 여기에 4시 44분 44초가 되었을 때 시계를 보면 재수 더럽게 없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더 기막힌 조합이 있는 것이 아닌가? 거기에 덧붙여 ‘4월 4일, 4시 44분 44초에 4번 열람실 4번 자리에 앉아 공부했다’라고 할 수 있으니까. 이건 뭐 재수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옴 붙었다’고 할 만하다. 아마 이렇게 말하고 있으면 누구나 쉽게 그렇다고 인정할 것이다. 우리는 같은 문화권에 살고 있으니까.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 서양 사람들은 좀 의아해 할 것이다. 왜 그런 논리 전개가 가능하냐고 따져 물을 지도 모르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四’를 음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死’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런 관념 자체를 의심해볼 수 있고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다면 이 논리 전개는 순식간에 뒤집혀 진다. ‘四’를 ‘事’로 생각한다면 일이 많은 하루이거나, 누군가에게 대접 받는 하루로 성격이 바뀔 것이고 ‘賜’로 생각한다면 높은 분에게 좋은 것을 받는 하루로 생각해 볼 수도 있으니까. 같은 논리라는 한계는 있지만 어찌되었든 그 연결 고리만 바꿔줘도 우리의 걱정은 괜한 걱정이 되는 셈이다.

이렇게 초반부터 고정관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놓은 것은 돈만큼 고정관념이 확실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가장 흔한 고정관념이 ‘돈만 있으면 안 되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有錢無罪인 상황도 많고 돈 때문에 사람이 자신의 신념도 버리는 상황도 많다. 자본주의 사회이니 ‘돈의 양’이 그 사람의 가치를 나타내는 데까지 이른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악착 같이 돈을 벌고 또 그 돈으로 돈을 벌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부동산 투기, 개발 광풍, 교육으로의 투자 등이 돈을 투자하여 그 이상을 뽑아내고자 하는 욕구의 반영이다. 그쯤 되면 돈은 돈을 낳고 사람은 그 돈의 증식을 도와주는 하인이라 할 만 하다. 그렇게 모아지는 돈이 기쁨을 줄 수 있을까? 자본의 욕망엔 만족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잠시 행복, 긴 불행이 뒤따를 뿐이다. 10억이 있건 100억이 있건 그건 1000억, 10000억에 비하면 한참 모자란 금액이니까. 돈이 불어날수록 충만감보다는 더 큰 결핍감만이 느껴진다.

올해 난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돈을 모았다. 이 정도 되면 만족하고 정말 내가 하고 싶던 일을 찾아서 할만도 하다. 물론 몇 십만원도 없어서 빌빌거리던 때의 나라면 말이다. 하지만 돈이 불어나니 오히려 더 욕심만 생기며 더 아껴 쓰려고만 하는 것이지 않은가? 이런 마음이 한 부분이고 또 다른 부분은 그다지 필요하지도 않은데 평소에 가지고 싶던 것들이 사고 싶다는 거다. 자전거가 아직도 쓸만한데도 더 좋은 것으로 바꾸고 싶고 컴퓨터도 마찬가지다. 살 수 있는 돈이 있으니 어떻게든 쓰지 못해 안달이 나 있는 거다. 이 두 마음 다 돈이 유포하는 가치관에 충실히 따른 결과다. 돈이 증식되길 바라는 마음, 그리고 필요에 의한 구매가 아닌 허영에 의한 구매욕.

내가 번 돈일지라도 그건 단지 한 순간 내가 소유하게 된 것에 불과할 거다. 난 돈이 모여드는 창구가 아니라 돈이 유통되는 통로여야 한다. 그래서 정작 중요한 것이 돈이 어느 곳으로 흘러가게 해야 하는지 늘 고민해야 한다는 거다. 내가 움켜쥐면 한 푼의 돈에 불과 할테지만 정말로 필요한 사람에게 흘려보낼 수 있다면 그것은 생명력 있는 힘이 될 테니까. 그런 내가 될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겠다.

<읽어볼만 한 책들>

 

1. 상처받지 않을 권리  - 강신주 著



 

2.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 고미숙 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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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08 14: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leeza 2010-04-11 21:18   좋아요 0 | URL
기간제 교사는 아니구요. 그냥 단기 인턴직원을 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마음 다잡고 있는 중이예요.
아~ 나는 어디로 흘러 가고 있는걸까요^^

찔레꽃 2010-04-08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삼, 제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네요. 고맙습니다.

leeza 2010-04-11 21:18   좋아요 0 | URL
제가 더 고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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