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산공동체학교 -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살아있는 교육 17
윤구병.김미선 지음 / 보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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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하는 그대, 청춘이어라

대학교 도서관을 둘러본다. 방학인데도 도서관 자리는 꽉 차있다. 무엇을 위해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걸까. 이들에게 방학이란 무슨 의미일까. 예전엔 농활을 가거나 여행을 떠나는 친구를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대학생들은 더 이상 그러지 않는다. 정해진 루트에서 벗어나는 일은 꿈도 못 꾸며, 기득권 체제에 빨리 합류하기 위해 스펙을 쌓고 시험공부에 열중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들의 표정은 굳어있고 좀비가 걸어가듯 흐느적거리며 걷고 말엔 음산한 기운이 감돈다. 이들은 애늙은이.



공부한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왜 공부하는지 모르는 게 문제다

예술회관을 둘러본다. 여기저기 흩어져 농악을 배우고 있는 노인분들이 보인다. 장구를 배우기 위해 찾아왔다는 할머니는 진즉부터 오려고 했는디. 사느라 바빠서 여지껏 미루다가 인제 왔당게라고 말씀하신다. 할머니 얼굴엔 낯선 공간에 대한 긴장과 함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되었다는 기대감이 엿보인다. 강사의 지도에 따라 연신 장구를 쳐보지만 도무지 손이 따라주질 않는다. 그래도 할머니는 한마디 불평도 없이 덩기덕 쿵더러러러 쿵기덕 쿵덕이란 가락에 맞춰 신나게 두드린다. 몸 따로 맘 따로지만 할머니의 모습에선 열정이 느껴진다. 할머니는 청춘이다.

흔히 청춘이라는 단어는 나이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위의 예에서 보듯이 청춘은 나이와 아무 상관없다. 삶을 고민하고, 자신의 욕구를 충실히 표현하며 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청춘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꿈이 이루어지든, 이루어지지 않든 상관없다. 불타오르는 열정으로 부딪히며 나아갈 때, 우린 젊어지기 때문이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느 기간이 아니라 마음가짐을 말한다

장밋빛 볼, 붉은 입술, 나긋나긋한 무릎이 아니라

씩씩한 의지, 풍부한 상상력, 불타오로는 정열을 가르킨다.

인생이라는 깊은 샘의 신선함을 이르는 말이다.



청춘이란 두려움을 무리치는 용기,

안이함을 선호하는 마음을 뿌리치는 모험심을 의미한다.

때로는 20세 청년보다는 60세 인간에게 청춘이 있다.

나이를 더해가는 것만으로 사람은 늙지 않는다

이상을 버릴 때 비로소 늙는다.



세월은 피부에 주름살을 늘려가지만

열정을 잃으면 영혼이 주름진다.

고뇌, 공포, 실망에 의해서 기력은 땅을 기고 정신은 먼지가 돼버린다.

60세든 16세든 인간의 가슴 속에는

경이에 이끌리는 마음,

어린애와 같은 미지에 대한 탐구심,

인생에 대한 흥미와 환희가 있다.

우리 모두의 가슴에 있는 무선 우체국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하느님으로부터

아름다움, 희망, 격력, 용기, 힘의 영감을 받는 한

그대는 젊다.



영감이 끊기고, 영혼이 비난의 눈으로 덮이며

비탄의 얼음에 갇힐 때

20대라도 인간은 늙지만,

머리를 높이 치켜들고 희망의 물결을 붙잡는 한,

80세라도 인간은 청춘으로 남는다.

청춘사무엘 울만







청춘되기의 힘겨움

그러나 아무리 청춘이 좋다고 해도, 자신의 열정만 믿고 함부로 나갈 수는 없는 법이다. 보통 사람으로 살기도 힘든 세상에, 일부로 불협화음을 만들어 내면서까지 해야 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뭔가 특이한 사람을 보면 사람들은 괜히 분란 일으키지 말고, 그냥 남들 하는 대로만 살아. 니가 아무리 그렇게 발버둥 쳐도 세상은 변하지 않아라고 말하며 체념하게 만든다. 이런 핀잔을 듣노라면, 아무리 의지가 강한 사람이라도 주눅 들어 의기소침해질 수밖에 없다. ‘청춘애늙은이로 만드는 사회다. 이렇듯 청춘은 그냥 얻어지지 않는다. 끊임없는 질문과 고민들 속에서 주체를 세우고 허무주의와 맞서 싸울 때 비로소 얻어지는 것이다.





청춘 윤구병의 이야기

교육자라고 해서 모두 다 청춘일 순 없다. 아무리 의식 있는 교육자라해도 학교라는 공동체에 들어가는 이상, 조직이 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학생을 위하고 소통하는 교육을 하고 싶어도 현실 교육 여건은 그러한 의지를 매번 꺾는다. 그런 식으로 여러 번 좌절하다보면, 예전에 가졌던 생각은 흐려지고 어느덧 학생을 억압하거나 방치하는 교사가 되는 것이다. 교육 조직에서 초심을 지킨다는 것은 외줄 타기만큼 힘들다.



윤구병 선생님의 실험학교 이야기

하지만 윤구병 선생님은 너끈히 외줄타기를 해냈다. 제도교육기관이 지닌 문제점을 보며 실험학교 이야기를 펴낸 것만으로도 자신의 열정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도 막상 행동은 하지 못하고 생각하는 단계에서만 그친다. 자신이 누리던 것을 포기할 수 있는 결단력, 자신의 생각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는 확신, 사회와 사람이 가하는 유언무언의 압박을 견뎌낼 수 있는 저력 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학교수직만 유지해도 편하게 살 수 있는데 무엇 하러 고난의 행군을 자처한단 말인가. 그런데 윤구병 선생님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한 발짝 더 나갔다. ‘청춘윤구병의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결단에서부터 시작된다.



윤구병 선생님, 참 잘 생기셨다~



삶터일터배움터가 하나인 변산공동체학교

그는 자신의 생각을 펼칠 공간으로 변산을 택한다. 산살림, 들살림, 갯살림을 모두 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변산에 내려와 몸에 익지 않은 농사를 지으며, 공동체를 이루어 간다. 공동체엔 당연히 어린 아이들이 있게 마련이다. ‘변산공동체학교는 바로 이런 아이들을 교육하기 위해 만든 곳이다. 과연 제도권 학교와 다른 점은 무엇일까?

이 학교의 교육 목표는 단순하다. ‘스스로 제 앞가림 할 힘함께 살 힘을 기르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단순한 목표 속에 제도권 교육을 비판하는 날카로운 비수가 숨어 있다. 제도권 교육은 적게는 12년 동안, 많게는 20년 넘게 사람을 붙잡아뒀으면서도 자신의 앞가림도 못하는 인간을 만들어냈다. 그 뿐인가. ‘엘리트 한 사람이 99명을 먹여 살린다는 허황된 논리를 앞세워, 한 사람을 위해 99명이 들러리 서게 했으며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게 만들었다. 앞가림도 못하고 서로를 불신하게 만드는 제도권 교육을 보며, 윤구병 선생님은 위와 같은 목표를 내세운 학교를 만든 것이다.



첫째는 시간문제입니다. 어떤 생명체든 살아남기 위해서는 제 삶의 시간을 스스로 통제할 힘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이 점에서는 식물, 동물, 하다못해 미생물까지도 예외가 없습니다. 싹트고 꽃피고 열매 맺을 시간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식물이 어떻게 제힘으로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요즈음 우리 사회가 아이들에게 저지르고 있는 짓을 보십시오. 부모들이나 교육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나 모두 아이들이 걸음마와 옹알이를 제대로 익히기 전부터 아이들 시간을 뺏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아이들을 정신적으로 집단 학살할 정도로 극한에 이르는 집단 학대를 교육의 이름으로 부끄러움 없이 버젓이 저지르는 사회에 무슨 미래가 있겠습니까? 스무 해가 넘도록 시간 단위로 다른 사람에게 통제당하고, 기계적인 시간 계획에 길들여진 사람에게 스스로 제 앞가림하는 힘을 기대하는 것은 삶은 밤에 싹 돋기를 기다리는 것만큼이나 부질없는 노릇입니다. 둘째로 함께 사는 힘은 무한 경쟁 체제에서는 절대로 길러질 수 없습니다. 윤구병 pp 24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방식과 다른 시간표를 짤 수밖에 없다. 제도권 교육은 주요 교과 위주의 이론교육을 중시한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교육 내용이 삶과 괴리되어 현실에서 아무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배우면 배울수록 창의력은 말살되고 수동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그래서 이 학교는 오전엔 정보 교육이라는 이론 수업을 하고 오후엔 노작교육이라는 활동 교육을 한다. 정보교육 시간엔 주요 교과 뿐 아니라(물론 국영수 위주로 구성되어 있지도 않다) 삶에 직접 필요한 과목들을 배우게 된다. 선생님들은 농사를 지으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생활인이다. 전공자는 아니지만, 대안교육을 고민했던 분들이고 아이들을 누구보다 잘 아는 분들이기 때문에 아이들 수준에 맞춘 교육을 할 수 있다. 노작 교육 시간에는 집짓기, 천연염색, 발효식품 등을 만든다. 일과 앎, 그리고 삶을 일치시키는 교육을 통해 진정한 공부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며, 자신을 앞가림할 수 있는 유형무형의 지식을 몸으로 배우는 것이다.



삶터, 일터, 배움터가 하나인 변산공동체학교

이곳은 방학 때면 자율학습이란 미명의 보충수업이 아닌, ‘계절학교를 연다. 45일간 진행되는 이 행사의 주제는 놀다 죽자!’.(이렇게 선정적인 주제(?)를 전면에 내걸 수 있는 이 학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계절학교의 시간표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맘껏 놀 수 있도록 날짜별로 장소만 달리 했기 때문이다. 갯벌, , 산으로 장소를 이동하여 놀 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해져 있지 않다. 그러니 아이들은 장소에 맞게 여러 놀이를 만들어 맘껏 놀면 된다. 자연 속에서 한껏 어우러지며 놀다 보니, 자연히 자연 속의 인간’, 즉 생태학적인 관심이 생기는 것이다. 생태학이란 구호도 이론도 아니다. 자연과 나와의 연관 속에서 나를 사유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자연과 나는 하나이므로 계절학교에선 똥을 그냥 버리지 않고 거름으로 재활용한다. 이 때문에 도시환경에 익숙한 아이에겐 큰일보는 게 여간 큰일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더 큰일은 따로 있다. 막상 시간과 장소가 주어졌는데 놀 줄 모른다는 게 문제다. 한 번도 놀아본 적이 없는 아이에게 맘껏 놀라고 하니, 어떻게 해야 하는 줄 몰라 두리번거린다고 한다. 이건 돈벌이와 돈벌이를 위해 쉬기만을 반복하는 어른의 모습과 똑같다. 하긴 그런 어른에게서 배운 아이들이니 오죽할까. 그런데 신기하게도 놀지 못하던 아이가 시간이 지나 환경에 익숙해지면 그렇게 신나게 뛰어놀 수가 없다는 것이다. 호이징가(Huizinga)호모루덴스라는 이론을 빌리지 않더라도 인간은 본능적으로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교육이란 이름으로 이와 같은 본능을 억누르게 만들지나 않았는지 돌아보게 되는 순간이다. 이렇게 본능에 충실하게 맘껏 놀아본 아이들은 커서도 신나게 놀 줄 알며 자신의 창조적 역량을 발휘할 줄 아는 어른이 될 것이다. 밑의 글은 저자의 계절학교 체험평인데, 계절학교의 가치가 잘 드러난 것 같아 발췌해 둔다.



45일의 경험을 안고 아이들은 저마다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아이들은 이곳에서 죽어도 못 먹을 것 같은 것을 먹었다. 또 게임기 없이 못 살 것 같았는데 게임을 안 하고도 재미있게 놀 수 있었다. 물에 빠지거나 옷이 더러워지는 것이 불편하고 싫었던 아이는 막상 해 보니 재미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만으로도 변산 여름 계절 학교가 있어야 할 까닭은 충분해 보였다. 김미선 pp 231



변산공동체학교의 여름캠프. 놀다죽자!



변산공동체학교에 바라다

그런데 아무리 변산공동체학교가 남다른 학교라고해도 완벽한 곳은 아니다. 체계를 잡아가는 과정에서 삐걱거리기도 했고 아이들에게 제대로 교육해주지 못할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변산공동체학교가 보완해야 할 점은 무엇이 있을까.

첫째, 제도권 교육의 좋은 점마저 계승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우리 아이들이 학교 교육 체제 속에서 자라면서 겪는 가장 큰 손실은 어려서부터 스스로 시간을 통제하는 법을 익히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유치원 교육에서 대학 교육에 이르기까지 제도 교육 기관은 아이들이 제힘으로 자기 적성과 취미, 그리고 삶의 리듬에 맞추어 시간을 통제하고 조절할 기회를 조직적으로 빼앗습니다. 어떤 아이는 그림 그리는 것이 좋아서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그리고 싶어 하지만 끝나는 종이 울리면 붓을 놓아야 합니다. 그 다음 시간은 수학 시간인데 이 아이는 수학이 적성에 맞지 않아 50분이나 이어지는 수업 시간 동안 대부분 한눈을 팔거나 딴전을 피우면서 때웁니다. 이렇게 학교에 가서 마칠 때까지 다른 사람이 조각조각 빈틈없이 짜 놓은 시간의 틀에 맞추어 10년 넘게 살다 보면 아이의 지적 능력도, 감수성도, 행동 양식도 모두 기계처럼 되어 무엇인가 저 나름으로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윤구병 pp 42



학생의 개인 능력에 맞지 않는 교육과정이나 촘촘히 짜인 시간표 때문에 수동적인 인간이 된다는 비판은 적절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도권 교육이 무조건 잘못됐다고 할 수는 없다. 비판할 부분은 비판하되, 좋은 점은 무엇인지, 아이들에게 유용한 부분은 없는지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 제도권 교육의 장점은 어떤 지식에 대해서는 짧은 시간에 확실하게 가르쳐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현실에 필요한 지식 중에 어떤 것은 강의식 수업을 통해서 전해주는 게 더 효율적인 것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어느 것을 가르칠지 교사학생학부모가 모여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둘째, 정보교육이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제도권 교육이 이론 교육만을 중시하여 폐해를 키워왔으니, 대안 교육은 반대의 노선을 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노작교육을 전면에 내세운 것은 그래서 타당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정보 교육 자체를 너무 홀대한다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학벌 사회이기 때문에 정보 교육을 강화하자는 얘긴 아니다. 단지 앎과 삶이 일치되는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앎도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빈민가에서 인문교육을 했던 얼 쇼리스(Earl Shorris)의 이야기는 참고해볼만 하다. 학문이 개인의 성장을 위한 것이라면, 그러한 단계에 오르기까지 많이 연구한 사람의 도움닫기도 필요한 법이다. 생각하는 방법, 고민하는 법을 배운 사람만이 다른 삶을 생각해볼 수 있고,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있다.



(가난하고 소외되어 희망이 없는 사람들에게) 왜 우리가 여기서 인문학을 해야 하는가. 그것은 여유와, 절실함, 모두의 문제이다. 만약 당신이 다르게 살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거나 갖고 싶다면, 만약 당신이 지금과 다르게 살기를 간절히 바란다면, 당신은 인문학을 할 수 있고, 해야 한다. 추방과 탈주pp 148



위 글에서는 인문학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그걸 정보교육이라고 바꾸어도 무방하다. 앎과 삶이 일치될 때, 모든 지식은 인문학적 지식이 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와 같은 교육을 할 수 있는 교사를 모집하여 제대로 된 정보교육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아이들의 의식이 자라며,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셋째, 학생 수가 적다는 것이다. 학생 수가 적으면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 한정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사람과 관계 맺는데 어려움을 느끼거나 사고가 경직될 수도 있다.



변산공동체학교 아이들의 불만 가운데 하나는 같이 공부하고 놀 친구가 없다는 것이다. 변산공동체학교에는 변산에서 농사짓는 집 아이들만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러니 가뜩이나 사람도 없는 농촌에서 변산공동체학교에 오는 아이들 수가 적을 수밖에. 김미선 pp 105



변산공동체학교는 보통 10명 내외의 학생들이 공부하는 곳이다. 그러니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더 크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변산공동체학교의 학생을 전국적으로 모집하여 정원을 늘리거나(실제로 2009년엔 전국적으로 30명을 모집했다고 한다), 계절학교를 다른 대안학교와 함께 실시하여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장으로 활용하는 방법 등이 그것이다. 물론 이럴 경우에 변산공동체학교만의 기치가 흐려질 위험도 있고, 다른 대안학교와의 관계도 신경을 써야 한다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학생에게 다양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회를 선물한다는 의미에서 해볼만 하다고 생각한다.

넷째, 경험의 범위가 너무 작다는 점이다. 사람은 하나의 가치만으로 살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경험과 다양한 관점을 경험해 보면서 자신의 가치를 찾아가야 한다. 그런데 이 곳은 도시생활에 대한 반감 때문에 오로지 농촌문화, 농촌적 가치만을 가르치려 한다. 아무리 좋은 가치관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깨달음 없이 그것만을 강요받을 때 사람은 수동적인 인간이 되기 쉽다. 도시적 삶도 살아보고, 피상적으로 관계 맺는 것도 경험해 보며, 서열에 따라 자신의 가치가 정해지는 것도 경험해 보면서 자신만의 가치를 찾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것 또한 세상의 일면이기 때문이다. 이 학교의 목표는 온실 속의 화초를 기르기 위한 것이 아닌 자신의 앞가림을 할 수 있는 사람을 기르기 위한 것이기에 풍부하게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





청춘이 청춘을 기름



나는 교육이란 청춘이 청춘을 양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사 또한 어느 지식 체계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질문하며 변해야 하고 학생 또한 기존 지식 체계를 허물고 자신만의 길을 고민하며 변해가야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가르침을 주고받으며 함께 길을 나서기 때문에 師友(스승이자 벗인 관계)’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사는 언제고 청춘이 되어야 하며, 학생도 청춘의 파릇파릇한 열정을 지녀야 한다. 교육을 이런 식으로 정의할 수 있다면, 제도권 교육은 늙은이애늙은이를 키워내는 것이라 할 수 있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제도권 교육은 교육이라기보다 훈육이라고 표현해야 맞다.

변산공동체학교는 교육을 하는 곳이다. 비록 여러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에서 아이들에게 교육의 정신이 제대로 이해되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가능성은 확인했다고 생각한다. 지금부터 이 학교가 본래의 목표를 달성하느냐 하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공동체를 이룬 사람들의 청춘이 되고자 하는 마음과, 이 학교를 이끄는 사람들의 청춘이 되고자 하는 마음의 합치 여부에 달려 있다. 앞으로도 이 학교가 더욱 발전하여 자기 앞가림 할 힘함께 살 힘을 두루 갖춘 청춘들을 많이 배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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