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방과 탈주 트랜스 소시올로지 2
고병권 지음 / 그린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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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쾌한 느낌의 책

오랜만에 느껴보는 상쾌함이다. 책 한 권을 읽고 느껴보는 기분 중 상쾌함이라니. 선뜻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은 힘들게 산에 올라가 정상에 이르렀을 때의 상쾌함이나 도심의 답답함을 벗어나 언덕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을 때의 기분을 떠올리면 된다. 의식의 상쾌함과 육체의 상쾌함은 하나다. 의식이 상쾌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폐쇄되어 있고 감정이 억눌려 있다면, 아무리 산에 올라간 들, 언덕의 바람을 몸소 맞이한 들 상쾌함 따위는 느껴지지 않을 테니까. 내가 아는 사람은 오히려 바람이 몸을 사정없이 흔든다며 짜증을 내기도 했다. , 상쾌함은 육체적 상쾌함이 들기 이전에 정신적인 상쾌함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말씀. 상쾌함을 그렇게 정의할 수 있다면, 이 책을 읽고서 상쾌함을 느꼈다는 것도 그리 어색한 표현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상쾌함은 내가 살아있음을 재인식하는 데서 느껴지는 감정이다. 훈풍이 불어와 나의 피부를 어루만지며 코 속으로 들어가 나의 머리를 맑게 한다. 그동안 이런저런 일에 두서없이 지내며 느끼지 못했던 신체의 각 부위가 그 곳에 그대로 있음을 느끼게 되는 거다. 그 때 비로소 드는 감정이 상쾌함인데, 책 한 편을 읽고 그걸 통해 나의 인식을 다시 한번 되짚어 볼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 또한 상쾌함이지 않겠는가.

경험이 버무려진 인문학서

고추장님의 책은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난해하진 않아서 아무 부담 없이 읽게 된다. 고추장님이 쓴 니체 해설서를 보면서 좋은 인상을 받고 많은 가르침을 받았던 터라 이 책도 그런 기대로 읽게 되었다. 이미 서두에서 말했다시피 그의 글을 읽은 소감은 기대 이상이었다. 솔직히 제목만 보고서 어렵거나 난해하지 않을까 걱정을 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렇진 않았다. 철학적인 내용들이 사회적인 현안들에 녹아들어 별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었으니까. 어찌 보면 이게 고추장님의 매력인지도 모르겠다. 글을 쓰되, 그것도 이해하기 난해한 철학적인 글을 쓰되 이해가 쉽게 쓸 수 있는 것. 그런 까닭에 난 이 책을 한 번에 쉼 없이 읽을 수 있었다. 다 읽고 나선 무언가 새로운 희망을 얻은 것처럼 상쾌함이 느껴졌다. 역시 실천력을 갖춘 인문학자(사회학자)인만큼 그의 글에는 진정성이 있다.

추방, 그건 우리의 현실이다

추방’, 과연 누가 누구를 추방했다는 것일까?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을 내쫓아 버린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추방이란 단어를 들었을 때, 대학의 唯仁人 放流之 迸諸四夷 不與同中國(오직 어진 사람만이 그를 추방하여 오랑캐가 있는 곳으로 보내어 중국과 함께 할 수 없게 했다.)’이라는 구절이 생각났다. 전제주의 국가 시절, 왕은 자신의 판단에 어긋나는 인물을 처벌하거나 추방하는 게 가능했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이란 책에선 그런 권한을 지닌 왕이 아무나 되어서는 안 되며 修身(몸을 수양함)’을 잘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추방이란 단어가 대학의 구절과 맞물린 까닭은, 이 단어 자체가 민주주의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을 읽고서 비로소 깨달았다. 이를 테면 나 자신을 닭 가운데 한 마리의 학이라 생각했었으나, 그런 체제 자체가 한 마리의 학을 위해 모두가 닭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었고 난 당연히 닭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추방은 결코 과거의 단어가 아니라 현재의 단어였으며, 나와 전혀 상관없는 단어가 아니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단어였던 것이다. 국가가 국민을 추방하고 학교가 학생을 추방하며 노동부가 노동자를 추방한다. 이게 웬 말이냐고? 그렇게 추방해선 어떻게 국가가 유지되고 학교가 유지될 수 있겠느냐고? 걱정 마시라. 모두 다 추방하는 게 아니라 국가의 입장에서 자기의 입장에 반대되는이들만 선별하여 추방하는 거니까. 그래서 미군기지가 들어서야 하기에 평택의 주민들은 쫓겨나야 했고 용산에 살던 상인들도 추방되어야 했다. 여기서 화성 앞 바다 간척사업으로 쫓겨난 어민의 절규는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평택 미군기지 반대 시위 중(2006.02.20)

우리는 국가의 주인이라기보다는 국가에 빌붙어서 생계를 꾸렸던 거지였구나. 우리는 국민이 아니었구나 (30p)”

추방과 법질서 강화

문제는 이렇게 추방당한 이들이 더욱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한 번 생각해볼만 하다. 추방당한 이들이 많다면 이들이 하나로 뭉쳐 그 절망감을 표현하고 당당히 주권을 행사할 수도 있는 거 아니냐고. 하지만 이런 생각은 현실에서 한계를 갖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척도(자본우월주의, 국가지상주의 등)를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고 그대로 내면화한 이상,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으니까. 오히려 날카롭게 항의하고 대항하려 하기보다 국가에서 내려주는 떡고물이라도 없는 지 처절하게 매달린다. 이들은 이 없어 이와 같은 어려움을 당한다고만 생각하기에 만 있으면 남들처럼 살 수 있으리라 착각한다. 그런데 지배층은 이렇게 추방당한 이들을 보면서 어떻게 대처하는가? 추방당한 이들은 언제든 맘만 먹으면 난리를 일으킬 수 있다는 두려움을 느낀다. 추방당한 이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여기는 것. 용산 참사의 피해자들이 가해자로 둔갑된 그 논리와 매한가지다. 이때부터 국가가 취할 수 있는 수단은 치안강화법질서 확립이다. 유독 돈 없는 자에게만 가혹할 정도로 정확히 적용되는 법의 이중성은 이렇게 완성된다. 이와 같은 요인들로 국가는 국민을 추방함에도 별 어려움 없이 유지되어 올 수 있었다. 어떻게 국민이 추방당하고 추방당한 그들조차 국가의 충실한 하수인이 될 수 있는 지, 우린 추방이란 개념을 통해 샅샅이 알 수 있다.





용산참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다. 지금의 일이며 미래의 일이다

추방당한 우리의 힘, 탈주

그렇다면 우린 그렇게 국가의 충실한 하수인이 되어 국가의 처분만을 바라며 살아야 하는 걸까? 바로 이에 대한 대답이 탈주. 탈주는 무언가로부터 벗어난다는 뜻이다. 과연 그 무엇은 무엇일까?

나는 대중들의 탈주 현상을 주변화와 대비해서 소수화라고 부르고자 한다. 주변화가 척도에 의한 부차화를 가르킨다면, 소수화는 척도로부터의 탈주를 가르킨다. 주변인으로써의 대중이 지배적 척도에 의해 인정받기를 꿈꾼다면, 소수자로서의 대중은 척도로부터 탈주한다. (39p)”

이를 좀 더 쉬운 이야기로 풀어보자. 내 자신이 학이 아닌 닭이었음을 깨달았다.(이게 바로 추방이다) 예전엔 학을 선망하고 나도 학이 되려 했을 것이다(주변화). 하지만 이젠 그 자체가 허구임을 알기에 더 이상 학이 되려 하지 않는다. 닭인 내 모습을 긍정하며 이 안에서 새 가치를 만들어 간다(소수화). 바로 이런 변화가 탈주이다. 탈주는 그래서 철학적인 용어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인 용어가 된다. 기존의 가치를 허물고 나만의 가치를 찾는다는 점에서 철학적이지만 그렇게 함으로 당당히 소수자의 삶을 살 수 있다는 점에서 사회적이다.

탈주는 생각함으로부터

과연 이런 탈주는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 자신만의 척도는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

그런 물음에 대한 해답은 현장인문학에 실려 있다. 내가 참 상쾌하다고 느낀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다. 교육이 학교라는 체계 속에서만 이루어져야 된다고 생각하거나 인문학은 삶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정신적 여유를 누리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큰 깨우침을 주는 부분이다. 바로 그런 고정관념 때문에 난 나 자신을 배반하며 나를 늘 궁지에 몰아넣기만 하는 척도를 신봉하는 게 아닌가. 잘 살기 위해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음에도 오히려 그게 삶을 파괴하는 것이 되기도 했다. 바로 그 생각 없음이 문제였던 것이다.

습관적으로 살아갈 때, 편견이나 통념에 빠져 있을 때, 어떤 강제적 명령 아래 있을 때, 우리는 어떤 입력된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기계와 다를 바 없다. ‘남들도 그렇게 사니까’,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그런 명령을 받았으니까’. 우리는 이 경우 아무리 정성을 다해 산다고 해도 '생각 없이' 사는 것이다. (145p)”

바로 그와 같은 관성을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우린 생각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생각하는 삶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길을 모색하게 하며 전혀 새로운 길을 창출하게 한다(장자는 이를 道行之而成<길은 걸어가면서 만들어진다>라고 했다) .

나만의 탈주법

내가 이와 같은 깨달음을 얻게 된 건 궁지에 몰렸을 때였다. 임용 시험에 떨어졌다. 집에 돈도 넉넉지 않았다. 배운 게 이것 밖에 없으니 어떻게든 교사가 되어야만 한다. 그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재수생들이 택하는 방법은 임용공부에만 몰두하는 것이다. 오로지 하나에만 신경 써서 꼭 합격하겠다는 일념으로. 그런 공부가 재미있을 리는 없고 삶의 의욕도 없다고 했다. 또 떨어지지나 않을까 겁만 난다고. 의욕도 열정도 다 소진되어 가던 동기들. 그렇게 죽을 둥 살 둥 공부해서 몇몇은 교사가 되었다. 하지만 난 또 떨어졌다. 떨어진 자의 자기 합리화 때문인지는 몰라도 난 그들이 그렇게 부럽지는 않다. 그들은 여전히 다른 업무에 골치 아파하고 있고 공부의 괴로움만 알고 공부했으니, 그런 공부를 가르칠 때는 더욱 괴로울 거니까.

그들이 임용공부에만 몰두할 때 난 다른 방법을 택했다. 그냥 책을 읽으며 사색하는 정도. 친구들은 척도에 매달려 있을 때, 난 탈주를 택한 거다. 그 독서는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됐다. 가장 큰 수확은 공부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고 그로 인해 임용 공부의 악순환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다른 길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고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때부터 현실을 느끼는 내 마음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임용에 떨어진 지금, 임용에 떨어졌다는 사실로 불행한 게 아니라 진정 공부다운 공부를 하고 현실을 긍정할 수 있어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는 것. 어찌 보면 현실은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 하지만 내가 주변화되었던 시기엔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가장 암울하고 빨리 벗어나야할 시기였던 데 반해, ‘소수화를 택하게 되자 지금은 가장 행복한 시간으로 변한 것이다. 나에게 일어난 이런 변화들을 기반으로 탈주를 가능하게 하는 현장인문학의 프로젝트를 긍정할 수 있었다. 나도 초보자이긴 하지만 인문학을 전공한 사람으로 그 프로젝트는 나에게 누군가와 소통을 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보였으니까.

추방된 그대여 탈주를 꿈꾸라

추방은 현실에서의 내 위치를 인식하는 것이고, ‘탈주는 새로운 가능성이었다. 이것들이 삶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드러나고 실천될 수 있을지, 그건 각 자의 실천성에 달려 있다. 내 자신이 여러 사상이 모인 코뮨 그 자체이듯, 우리 또한 앎의 코뮨을 이루어(연대하여) 가르치고 배우며 나날이 변해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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