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이커>에 열광하고 있는, 예나 지금이나 진정한 만화광인 남편에게 아이를 맡겨두고 나와 있다. 시간이 철철 남아돌 때와는 달리(그래서 어떨 때는 12시간씩 자기도 했다!), (당장 밥벌이와 상관이 없는!) 뭘 읽고 뭘 쓰는 시간이 너무 소중하다.  암튼 진즉에 읽었어야 마땅한 이 책을 어쩌다 보니 이제야 읽는다. 대체로 예술에 문외한이고, 발레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3년 동안 러시아, 그것도 모스크바에 살면서 <볼쇼이> 한 번 안 갔다면, 뭐..-_-;;

 

 

 

 

 

 

 

 

 

이 책은 10년은 자라고 10년은 배우고 10년은 춤추고 나머지 30년은 암흑 속에 살다 간, 그렇다고 정리되는 천재 무용수가 말하자면 정신줄을 완전히 놓기 직전 6주에 걸쳐 남긴 일기인데, 그 도입부부터가  압도적이다.

 

점심 식사는 아주 좋았다. 살짝 익힌 달걀 두 개와 기름에 튀긴 감자와 콩을 먹었으니까. 나는 콩을 좋아하지만, 그것들은 메마르다. 나는 마른 콩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 속엔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스위스는 병든 땅이다. 온통 산들로 가득 차 있으니까. 스위스 사람들은 메마르다. 그들 속에는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내 시중을 드는 하녀는 메마른 인간이다. 그녀는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너무 많이 생각한다.”(103)

 

첫 느낌은 고골의 <광인 일기>. 하지만 고골이 아무리 광기의 작가라고 할지라도, 그리고 이 소설이 아무리 걸작이라고 할지라도, 정녕, 진짜 광인이 정신의 완전한 죽음으로 넘어가기 직전 광기의 정점에서, 필사적인 속기의 느낌으로 내면의 흐름을 줄줄이 써나간 이 기록을 어찌 따라가겠는가. 촘촘히 들어찬 대책 없는 1형식과 2형식의 문장들, 논리도 뭣도 없는 어마어마한 시적인 비약, 논증도 뭣도 없으되 엄청난 통찰을 담은 아포리즘들. 

 

춤꾼이 이 정도의 지성과 감성과 문체를 갖춘 나라, 역시, 러시아답다. 도중에 다윈, 니체, 톨스토이, 도..키, 졸라, 셰익스피어 얘기도 중구난방으로 나오지만 가장 놀라운 것은 이 모든 말(!)을 줄줄이 풀어내는 발레리노의 광기에 찬 필력이다.

 

인간은 신을 위해 죽는다. 신은 움직임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필요한 것이다. 육체는 죽지만 정신은 산다. 나는 살고 싶다. 하지만 내 손은 힘이 빠지고 있다. 손이 내게 복종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오늘 나는 오랜 시간을 쓰겠다. 신은 내게 나의 삶을 기술하기를 원한다. (...) 나는 내일 계속해서 쓰겠다. 신은 내가 쉬기를 바라기 때문에...”(127)

 

나는 신의 방법으로 쓰고 싶다. 따라서 나는 나의 저작을 교정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글을 고치지 않는다. 나는 고의로 서투르게 쓴다. ”(168)

나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176)

나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하지 않는 철학자이다. 나는 감정을 지닌 철학자이다. 나는 인공적인 일들을 쓰고 싶지는 않다.”(185)

 

 

나는 고독을 무서워할 테지만 울지는 않을 것이다. 신이 나를 사랑하니까 나는 외롭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만약에 신이 나를 버린다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나는 미리 느낀다. 만약에 신이 나를 버린다면 나는 죽을 것이라는 걸 안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그러니 나는 사람들이 나를 이해할 수 있도록 다른 사람들처럼 살겠다. 신은 사람들이다. 신은 자신의 목적을 방해하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그의 목적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다. 나는 신의 도구이다. 나는 신의 사람이다.”(190)

 

나는 니진스키이다. 니진스키는 나이고, 나는 그가 자신을 걱정하기 때문에 그가 걱정된다. 나는 그의 힘을 안다. 나는 그의 선량한 신이다. 나는 나쁜 니진스키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나쁜 신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신이다. 니진스키는 신이다. 니진스키는 선량한 사람이지 사악한 인간이 아니다. (...) 신은 통상적인 용모가 아니다. 신은 얼굴에 깃들인 감정이다. 꼽추는 신이다. 나는 꼽추를 좋아한다. 나는 못생긴 사람들을 좋아한다. 나는 감정을 지닌, 못생긴 남자이다. 나는 곱사등이를 춤추고 똑바른 등의 사람의 춤도 춘다.”(199)

  

유감스럽게도, 이 책의 원본을 갖고 있지 않다.  주문하려고 하니 다 품절. 암튼, <감정>이라는 제목으로 적절히 편집되어 나온 모양인데, 이 제목 역시 <일기>의 한 구절을 참조한 듯. 이렇다.

 

나는 이 책을 감정이라 부르고 싶다. 나는 이 책을 감정이라 부르겠다. 나는 감정을 좋아한다. 그러므로 많은 것을 쓰겠다. 나는 감정에 관한 방대한 저서를 원한다.”(197-198)

 

번역도 참 좋다. 인터넷 사이트에서 다운받은 원문과 대충 비교를 해 봐도 그렇다. 그럼에도 러시아어에서 곧장 번역한 우리말 버전이 있으면 좋겠다 싶고, 한 번 해보고 싶다. 당장엔  너무 바빠, 그냥 읽어가며 느끼는 수밖에.  겸사겸사, 니진스키의 이름인 '바슬라프'는 그렇게 일반적인 건 아니다. Vatslav Nizhinsky. 바쯜라프 니쥔스키. 그대로 전사하면 이 정도의 발음.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 라는 말답게, 니진스키의 일기 속에서도 속된 부분이나 생리적 얘기를 쓴 대목이 와닿기도 하다. 이러나저러나, 책장을 넘기다 멀리 훌쩍 가서 발견한 익숙한 구절. 절친한 선배가 곧잘 인용하는 부분이다.

 

"나는 울고 싶은데 신은 내게 쓰라고 명령한다. 그는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 바라지 않는다. 아내는 울고 또 운다. 나 역시 운다. 나는 프랑겔 박사가 내게 와서 내가 쓰고 있는 동안 아내는 울고 있다고 말할까봐 두렵다."(347) 

 

 

유명한 사진 중 하나.(좌는 '목신'으로 분장한 니진스키.) 160이 겨우 넘는 단신이었다는데...흠. 겸사겸사 예브게니 플루셴코가 빙판에서 니진스키를 재현하기도. 이 동영상도 볼 만함.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Nussbaum 2013-06-29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혹시 네이버캐스트에 <위대한 개츠비> 에 관해 쓰신 분이 아니실지요?
간결하면서도 의미를 담은 글 감사히 잘 보았는데, 알라딘 서재에서 이렇게 또 뵙게 되네요.

종종 들려 쓰신 글, 읽도록 하겠습니다 : )

푸른괭이 2013-06-29 14:14   좋아요 0 | URL
예, 자주 오세요^^;;
 

망각의 저 편에서 건져 올린 연인과 가족의 초상: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뒤라스, <연인>

 

 

 

 

 

 

 

 

 

 

 

 

 

 

 

 

전쟁이 끝나고 몇 해가 흘렀다. 몇 번의 결혼과 몇 번의 이혼에서 아이들을 낳고 몇 권의 책을 펴냈을 즈음이었다. 그가 부인과 함께 파리에 왔다. 그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요. 그녀는 목소리에서 이미 그인 줄 알았다. (중략) 그는 겁을 먹고 있었다. 예전처럼 두려워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떨리는 음성 속에서, 갑자기, 그녀는 잊고 있던 중국 억양을 기억해 냈다. (중략) 그는 잠깐 뜸을 들인 후 이렇게 말했다. 그의 사랑은 예전과 똑같다고. 그는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으며, 결코 이 사랑을 멈출 수 없을 거라고. 죽는 순간까지 그녀만을 사랑할 거라고.(136-137)

 

이런 말로 끝나는 <연인>은 물론 연애소설이다. 두 연인 모두에게 이국인 베트남, 오직 사랑을 위해 존재하는 중국인 거리의 집, 열다섯 반 나이의 가난한 프랑스 소녀와 삼십대 후반의 부유한 중국인이 만들어내는 대조의 효과, 무엇보다도 사랑에만 몰입하려는 의지 등. 상당히 절제된 문체에 간접화법이 주를 이루기는 하나,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애초부터 미래를 꿈꿀 수 없는(혹은 그러지 않으려는) 그들의 열애는 더욱더 낭만적인 색채를 띤다. 1984, 소녀는 이미 노인이 되었고, 이렇게 설정된 화자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난 첫 사랑, 아니 첫 남자의 추억은 극적이고 관능적일 수밖에 없으리라.

 

나의 삶은 아주 일찍부터 너무 늦어버렸다. 열여덟 살에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늦어버렸다. 열여덟 살과 스물다섯 살 사이에 내 얼굴은 전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변해갔다. 열여덟 살에 나는 늙어 있었다. (중략) 늙어 간다는 것은 가혹했다. 나는 늙음이 내 얼굴에 찾아와 내 모습을 하나씩 하나씩 변화시키는 것을 목격했다. 얼굴 모양이 일그러지고, 두 눈은 더 커지고, 시선은 더 슬픈 빛을 띠고, 입 모양은 더 고집스러워 보이고, 이마에는 깊은 주름이 패었다. 그런 변화에 진저리치기는커녕 나는 오히려 내 얼굴의 노쇠 현상을 마치 이야기의 줄거리가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해 하는 것 같은 호기심을 품고 지켜보았다.(10)

 

노인은 구태여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건을 엄정하게 배치하려고 하지도, 기억의 빈 곳을 메우려고 하지도 않는다. 추억은 펜을 따라 자유분방하게 흘러가 제멋대로 겹치기도, 엇갈리기도 한다. 소녀의 조숙을 넘어선 조로는 물론 엄밀한 의미의 늙음이 아니라 그 당시 소녀가 감당한 욕망경험’, 그 크기와 깊이를 말해주는 것이리라. 성장기의 기억 속에 외딴 섬처럼 자리 잡은 이 사랑의 추억은 실은 소녀를 옥죄던 현실과 얽혀 있다. 다름 아니라 가족이다.

 

안녕, 잘 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등의 인사는 결코 나누지 않는다. 고맙다는 인사도. 전혀 말을 하지 않는다. 말할 필요가 없다. 모두가 말없이, 멀찍이 떨어져 산다. 돌로 된 가족이다. 어떤 접근도 불가능한 두꺼운 퇴적물 속에서 화석이 되어 버린 가족이다. 날마다 우리는 자살을, 혹은 살인을 기도한다. 우리는 서로 말을 걸지도 않지만 보지도 않는다. 어쩌다 눈이 마주쳐도 시선을 돌려 버린다. 바라본다는 것은 한순간 그 대상을 향한, 그 대상에 대한 호기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불행에 빠지는 행위이다. 누군가를 바라본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그 시선에 합당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여전히 그는 불명예스러운 사람일 수도 있다. 대화라는 단어는 허영이다. 이 집에 가장 잘 어울리는 어휘는 수치와 자만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68-69)

 

심각한 도벽과 폭력적 성향에 아편까지 시작한 망나니 큰 오빠, 그와 정반대로 계집애처럼 연약한 작은 오빠, 무엇보다도 큰아들을 지나치게 편애하는 어머니. “나는 내 가족들에 대해 많이 썼다. 하지만 그렇게 쓰는 동안에도, 그들, 나의 어머니와 오빠들은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그들 주위에서, 다가가지 않고서 그 사물 같은 인간들 주변에서 글을 썼다.”(14) 그들로부터 공간적, 시간적 거리를 유지하며 글을 씀으로써 사물같은 그들을 인간으로 만들고 동시에 그녀 자신도 저 애증의 굴레로부터 벗어난다. ‘연인에 대한 그녀의 태도도 비슷하리라. 기억 속을 헤적이며 글을 쓰는 행위만이 우리에게 잃어버린 시간을 되살려줄 수 있으니까.

 

이런 불멸성이 살아 있을 때에만, 삶은 불멸의 것이 된다. 불멸성이 삶 속에 있을 때, 그것은 길게 사느냐 짧게 사느냐 하는 시간의 문제가 아니다.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르고 있는 또 다른 그 무엇인 것이다. 불멸성은 시작도 끝도 없다고 말하는 것도, 불멸성은 정신의 삶과 함께 시작되어 그것과 함께 끝난다고 말하는 것도 똑같이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불멸성은 정신에도 관여하고 또 바람을 쫓아가는 것에도 관여하기 때문이다. 사막의 죽은 모래들, 어린아이들의 시체를 보라. 불멸성은 거기로 지나가지 않는다. 그것은 거기에 머물렀다가 우회한다.(125)

 

 

-- 네이버캐스트

 

-- 오랜만에 뭘 올릴까 찾아보니, 이런 것도 있더라. 뒤라스의 소설은 항상 기대 이하(?)였는데, 그녀의 (너무나 개성 있는!) 얼굴에서 풍기는 포스가 너무 강한 탓인지도 모르겠다..@_@

뒤라스의 <연인>은 저 글을 쓰려고 처음 읽었다. 그러니까 소설 이전에 영화가 먼저 있었는데, 대학 시절에 본 제인 마치 주연의 <연인>은 (학력고사 치고 나서 본 <원초적 본능>에 이어) 가장 '야한' 영화로 머릿속에 남아 있다. 소설을 읽은 다음 오랜만에 다시 보니 역시나 야했지만(^^;) 연애 라인보다는 가족소설적 측면이 더 눈에 들어오더라. 덧붙여, 유학 시절 만났던 베트남 친구들에 대한 기억(그 흔적은 <내 아내의 모든 것>에 수록된 한 단편에 좀 남아 있다) 때문인지 베트남의 풍경.

 

 

 

 

그리고 공간적 배경 때문에 비슷한 인상으로 남아 있는 이 영화! 카트린느 드뇌브는 <쉘부르의 우산> 시절보다 중년 이후가 더 멋있구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원한 화해와 상생을 위하여:

- 투르게네프(1818-1883), <아버지와 아들>(1862)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원래 제목을 직역하면 아버지들과 아들들’, 즉 복수이다)은 제목이 암시하듯 세대 간의 갈등과 화해의 문제를 다룬 소설이다. 표층적으론 1860년대에 이르러 더욱더 첨예해진 사상 대립이 부각된다. ‘60년대 세대’, 즉 민주 진영을 대표한 젊은 지식인의 입장인 부정’(否定)니힐리즘이라 불렸는데, 이는 단순히 이론이 아니라 극히 정치적인 개념, 일종의 행동 강령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많은 니힐리스트들이 유형이나 추방, 망명까지도 감수한 혁명가였고 <무엇을 할 것인가>을 쓴 체르니셰프스키, 투르게네프와도 친분이 있던 바쿠닌은 대표적인 예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이런 시대적 분위기를 십분 반영할 뿐더러 이후 러시아문학의 큰 흐름 중 하나를 예고한 문제작이다. 가령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은 이 작품에 대한 그 나름의 답변으로서 시작된 소설이다. 한편 사상적 갈등과 맞물린 세대 간의 갈등의 이면에는 계급간의 갈등이 깔려 있다. 심지어 파벨 키르사노프(귀족 - 아버지 세대)와 바자로프(‘잡계급’ - 아들 세대)의 반목이 소설의 구성적, 사상적 축을 이룬다고 볼 수도 있다.

 

 

 

 

 

 

 

 

 

 

 

 

 

바자로프는 친구 겸 후배인 아르카디의 정의대로 니힐리스트”, “모든 것을 비판적 관점에서 보는 사람”(39)이다. 파벨과의 논쟁에서는 훌륭한 화학자는 그 어떠한 시인보다 스무 배는 더 유익”(44)하다며 유물론과 경험론, 공리주의를 역설한다. 니힐리즘의 근거도 유익함에 있다. 오딘초바와의 대화에서는 예술 무용론을 주장하는데, 그와 더불어 피력하는 인간관도 상당히 과격하다. 인간도 다른 동식물과 같아서 표본 하나만 있으면 충분히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각각의 인간을 따로 연구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 이렇게 극단적이고 편협한 유물론은 물론 속류라고 비난받을 소지가 있으며 그가 대인 관계에서 보이는 날선 계급의식과 냉소주의도 곱게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대체로 그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개구리를 비롯한 각종 동식물 채집과 해부, 실험에 열을 올리는 부지런한 의학도이자 파벨과의 결투에서 보이듯 의사로서의 자부심이 무척 강한 청년이다. 이런 그를 작가는 두 번에 걸쳐 시험에 들게 한다.

 

(러시아 작가 중에서는 체호프와 더불어 빛나는 미모인데...-_-;;)

 

바자로프의 이론에 따르면 사랑은 호르몬의 작용일 뿐이다. 오딘초바에 대해 그 귀부인이 어떤 종류의 포유동물에 속하는가 두고 보세.”(120)라든가 참 실한 몸뚱이야.() 지금 당장 해부대에 올려놓고 싶은 걸.”(125)과 같은 냉소적인 말을 던지지만, 자신이 사랑에 빠졌음을 인정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사랑을 신경이 약한 구세대의 낭만주의자나 부유하고 나약한 귀족의 전유물이라고 여겨온 만큼 그의 사랑 고백은 증오와 닮은, 아마도 증오와 비슷한 강하고 고통스러운 욕망”(163)의 분출처럼 읽힌다. 다시 오딘초바를 찾아갔을 때는 사랑의 감정과 사랑에 빠졌다는 분노에 덧붙여 부유한 귀족 부인을 향한 잡계급 출신 청년의 열패감마저 보인다. 너무 오랫동안 나와 인연이 없는 세상을 돌아다닌 것 같아요. 날치는 얼마 동안 공중에 떠 있을 수 있지만, 곧 물속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지요.”(282)

 

(바자로프. 이렇게 온순한 이미지??)

 

바자로프의 사랑보다 더 극적인 것은 바자로프-죽음이다. 성실하고 명민한 의학도가 전염병으로 사망한 농부의 시신을 해부하던 중 감염이 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사망한다는 결말을 두고 말이 많았다. “죽음은 오래된 농담이지만 누구에게나 새롭지요.”(306)라고 말하며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이 의연해 보이기도 하다. 실연 이후의 우울과 무기력증을 생각한다면 반쯤 의도된 자살의 가능성도 엿보인다. 어떤 경우든 그가 추구한 이익과는 무관한 죽음이, 니힐리즘(허무주의)’의 아이러니한 변용인 허무한죽음이 돼 버렸다. 과연 온건파 귀족 작가의 손으로 그려낸, 야망에 사로잡힌 잡계급 청년의 형상과 운명은 아이러니에 귀속될 수밖에 없다. 그의 죽음과 흡사 그것을 대가로 성취된 것 같은 키르사노프 집안의 행복(아르카디와 카탸(오딘초바의 여동생)의 결혼, 니콜라이와 페냐의 결혼, 파벨의 출국, 오딘초바의 성공적인 재혼 등)이 씁쓸한 대조를 이룬다. 자식을 앞세운 바자로프의 부모들이 자식의 무덤을 찾아 흐느껴 우는 마지막 장면이 주는 여운도 오래 지속된다. 결국 작가가 얘기하고 싶었던 것은 영원한 화해와 무궁한 생명”(316)이었으리라.

 

 

 

 

 

 

 

 

 

 

 

 

 

 

 

 

투르게네프는 다소 방탕했던 아버지와 그보다 연상인 다소 히스테릭한 성격의 어머니의 불화, 그로 인한 심리적 상처에도 불구하고(이런 가정사가 첫 사랑에 표현된다) 19세기 러시아 귀족의 일반적인 특권을 두루 향유하며 자랐다. 작가가 된 후에는 인생의 많은 시간을 유럽에서 보냈으되, <아버지와 아들>이 보여주듯, 조국의 현실과 젊은 세대의 사상적, 문학적 동향을 꾸준히 관찰하고 기록했다. ‘인텔리겐치아’(지식인)와 민중의 화합 문제에 대한 관심 역시 그의 문우이기도 했던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를 비롯하여 19세기 러시아 지성계의 보편적인 문제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그가 말년에 쓴 산문시 거지늙은 거지의 화합을 통해 총체적인 형제애를 강조한 작품인데, ‘와 세 명의 소년 거지의 서늘한 엇갈림을 보여주는 윤동주의 투르게네프의 언덕에 영감을 제공하기도 했다.

 

-- <책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끝으로 사족을 달자면, 이 글은 ‘10’의 나이와 학번의 차이에도 불구하고(딱히 등단 년도가 같아서도 아니고) 스승이나 선배가 아니라 문우 비스름한 존재로 여겨온 한 소설가에 대해 또 다른 한 소설가가 쓴 글이다. 언젠가는 비슷한 지점에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덧 저만치 앞서 가고 있는 이상한 오기와 끈기로 무장한(혹은 해제한?) 그의 뒤태를 보며 시새움을 느끼는 건 인지상정, 심지어 문학에 대한 예의이다.

 

90년대를 포함하여 그를 만난 건 다섯 번도 안 되지 싶은데, 가장 최근의 만남은 2010년에서 2011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의 어느 날, 모 전철역에서였다. 정말이지 우연이었다. 그 우연에, 정영문은 정영문의 소설(그때 <작위>를 연재 중이었다) 속에서 막, 또 마지못해 기어 나온 것 같은 표정과 몰골을 한 채 허공으로 퍼지는 맛깔스러운 담배 연기 같은, 한층 더 길쭉해지고 느슨해진 것 같은 몸뚱어리를 곤혹스러워하며 엉거주춤, 어영부영 전화번호를 물었다. 아니, 말을 한 건 아니고 실어증환자처럼 입술을 달싹거리며 그런 뜻을 전하는 어슴푸레하고 희끄무레한 손짓과 몸짓을 보였다. 만남이랄 수도 없는 짧은 스침이었지만, 오랜만에 본 그의 모습이 너무도 여전하여 신명이 났던 기억이 있다. 그가 너무 고통스럽지 않은 병”(<작위>, 95)을 계속 앓길, 그리하여 우리 문학에 건강한 전범과 더불어 불온한 전위가 두루 넘쳐나길 바란다.

 

4. 다시, 소수적인 문학

 

서슬 퍼런 비평(비평은 일정 부분 그래야 한다)과 근엄한 학문(이 역시 황혼녘에야 날갯짓을 하는 미네르바의 올빼미의 속성이다)의 눈으로 보면, 각종 엄친아와 비교하면 현재 우리의 문학은 모조리 다 시원찮을 수 있다. 그리고 슬프게도, 실상이 그럴 수도 있다. 그럼에도 소설가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과거바깥에서 전범을 찾고 ()처럼이라고 말하는 것은 좀 불쌍한 일, 심지어 좀 촌스러운 일 같다.

 

도스토예프스키처럼’, ‘카프카처럼’, ‘이상처럼은 작가 개인의 인생을 놓고 봐도 하룻강아지 시절에나 낯붉힘 없이 할 수 있는 얘기이다. ‘-처럼이란 말에 이미 내포되어 있듯 완전한 닮음(같음)은 불가능하다. 그럴 수 없는 것은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 됨이 마땅하다. 물론 당대의 평가가 훗날 뒤집어진다는 식의 복수(復讎)’의 문학사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문학사는 오히려 당대의 베스트셀러(적어도 순위권)가 미래의 스테디셀러가 됨을 보여준다. 카프카가 예외적인 경우지, 현재의 무명이 미래의 불멸을 담보하지는 절대 않는다. 작가로서 자신의 그릇이 큰 대접은커녕 간장종지밖에 안 된다면 그것도 운명이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타협할 때 그 간장종지나마 잘 채울 수 있다. 요컨대 작가의 삶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자존감이거니와 이는 일국의 문학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우리의 문학사도 제법 묵직해져서 전범-다수전위-소수의 계보를 따로 작성해볼 수도 있겠다. 한데 이광수나 염상섭, 이상이나 김동인을 놓고서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대가가 아니라고 투덜대는 건 역시나 좀 촌스럽고, 덧붙여 배은망덕한 패륜이다. 그런 아비-어미 밑에서 태어난 것도 운명이다. 우리는 그것이 오직 우리의 문학이란 이유만으로도 소중히 여길 의무가 있다. 그것이 문학사와 마주한 우리의 최소한의 덕목, 이다. 마찬가지로 현재 쏟아지는 문학에 대해서도 너그러울 필요가 있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한국문학이야말로 한국어를 사용하는 민족이 우리밖에 없다는 단순한 이유로 진정 소수적인 문학, 너무나 고독한문학이다. 그리고 작가는 어떤 의미에서 모두가 제각기 소수적인 문학의 주체이다. 굳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 것을 마다할 필요는 없겠지만 소수의 다수 독자를 갖는 것보다 다수의 소수 독자를 갖는 것이 작가로서는 더 큰 행복일 수 있다. 최근에 우리 문학의 번역과 수출 관련 얘기가 많아졌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문학 바깥의 얘기이다. 문학 안에서의 논의는 훨씬 더 간단할 법하다. 어쨌거나 심판은 문학사의 몫이다. 무조건 열심히 쓰고 열심히 읽을 일이다. 그것이 장르 불문, 글쟁이의 실존이다.

 

(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3-2. 정영문과 이론적 서사

 

정영문의 서사를 편의상 이론적 서사라고 부르자. 그것은 인간이든 동식물이든 물건이든 특정 현상이든 아무튼 어떤 대상에 관한 이론 정립을 지향하며 방법론에 있어 정치한 논증이 아니라 자유 연상, 즉 철저히 은유적인 사유의 흐름을 따른다. 가령, 첫 번째 이야기에서 나체주의자 행세를 하며 집안을 돌아다니는, 옛 여자 친구의 현 남자 친구가 어제 마신 데킬라가 남아 있는 오줌을 용설란 묘목을 향해 내뿜는 장면을 묘사한 다음 그의 생식기, 나아가 인간 남자(수컷)의 생식기 일반에 관한 이론이 펼쳐진다.

  (....)

 

이어, 좀 봐달라는 듯 문을 열어놓은 채 벌이는 그들의 정사 얘기 이후 그녀와의 연애 시절이 회상되고 그 끝에 그녀의 젖꼭지 얘기, 나아가 젖꼭지 일반에 관한 이론이 나오고(<작위>, 20-21) 겸사겸사 과음을 한 그녀가 누구 집 대문 앞에서 설사를 한 일이 회상된다. 정영문식 연애와 사랑, 윤리와 도덕에 관한 의식이 은근한 따사로움과 유머러스함을 뽐내며 표현되는 대목이다. “그녀가 설사를 하는 것을 지켜보며 나는 그녀에게 치하를 해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런데 그 후로 나는 두고두고, 길에서 설사를 하는 누군가에게 포도나무 잎을 몇 장 따다 준 것이 내가 지금껏 살면서 누군가에게 베푼 가장 큰 선행 중 하나처럼 생각되었다.”(<작위>, 27) 이렇게 말의 세계로 진입한 포도나무 잎, 즉 포도에서 또 다른 사물이 말의 세계를 더 풍성하게 만들어간다. 그 사물은 보다시피 일상의 냄새를 많이 풍기는 흥미로운 일화의 형식일 수도 있지만, 설령 그런 경우일지라도 이내 특정 대상에 관한 쫀쫀한 이론으로 바뀐다. “방귀도 볼품 있는 엉덩이라야 어엿하게 뀔 수 있을 것 같았고, 그것이 이치인 것 같았다. 그 사실을 확인하려고, 얼마나 어엿하지 않은 방귀가 나오나 보려고 정색을 하고 방귀를 뀌려고 했지만 방귀는 나올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작위>, 62) 이렇게 운을 뗀 방귀-론에서 엉덩이-론이, 엉덩이-론에서 궁상-론이 나오는데, 어지간한 시나 아포리즘보다 더 리듬감이 있어 읽기에 무척 신명나는 대목이다.

 

나는 궁상을 떨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며, 궁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는, 어떤 이론 같은 것을 펼쳤다. / 가끔은 떨어줘야 하고, 가끔 떠는 것은 나쁘지 않은 궁상은 잘 떨면 재미있고, 정신적인 건강을 위해서 좋을 수도 있지만 잘못 떨면 스스로도 면목 없게 될 위험이 있고, 곧잘 그 정도가 지나치기 쉽고, 정도가 지나치게 되면 몸에도 좋지 않을 수 있어 궁상을 떨 때에는 조심해야 했다. 궁상의 문제 중 하나는 알맞은 정도로, 품위를 잃지 않고 잘 떨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궁상은 일종의 정신적인 형태로 볼 수도 있었는데, 어쩌면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고자 하면서 기어코 떨어지고자 하는 어떤 정신적 분투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궁상은 가혹하게 권태롭고 무의미한 이 세계에 맞서기보다는 패배를 받아들이며 백기를 흔들면서 속으로 웃는 것으로 볼 수도 있었다. 카프카와 이상 같은 작가들이 그 점을 가장 잘 보여주었다. 이상이 어떤 몹시 불쾌한 하루를 선택해 회충약을 복용했다고 했을 때 그는 궁상의 정수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의 궁상에는 배울 점이 많았다. 한데 내 생각에는 궁상이 궁상으로서 돋보이려면 자의식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그것을 떨어야 했다.(<작위>, 65)

 

물론 이런 부분이 많지는 않다. 그는 지금까지 소설을 써온 것도 [돌멩이를 굴러가게 하고 숫자를 셀 때와 같은] 그 이상한 오기와 끈기 때문이었는데 그것들은 대단히 보기 싫은 것들이었다.”(<작위>, 131)라고 썼거니와 이 대단히 보기 싫은 이상한 오기와 끈기가 항상 신명나는 미학적 성취로 이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도 안 되는 것이, 그 역시 너무나 따분하고 무료하여 권태와 분노의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삶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작위>는 그동안 그가 쓴 소설 중 신명나는 부분이 가장 많을뿐더러 (<바셀린 붓다>심술궂은심사를 반영한 못된책이듯!) 자신의 신명을 독자와 공유하려는 갸륵한심사마저 표현된 착한책이다. 무대 의상 같은 재킷에 붉은색 계통의 체크무늬 바지(정말 난해한 패션이다!)를 입고 실직한 광대처럼 길을 걷는 의 모습에서는 그런 신명의 정수가 보인다. “그러자 나 자신이, 평생을 광대로 살아왔기에 앞으로도 광대로밖에는 살 수 없지만 더 이상 사람들 앞에서 광대 짓을 하지는 않고, 혼자 가끔 광대의 흉내의 내며 광대의 미소를 짓기도 할 광대 같이 느껴졌다.”(<작위>, 232-233)

 

아무래도 정영문의 소설은 영원토록 낯선 문체에도 불구하고 말보다는 사물의 세계에 더 가까이 가 있던, 그러려는 투지를 보인 카프카보다는 이 지랄은 이제 더는 못하겠다.”라는 선언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말의 지랄을 보여주는 베케트를 더 닮았다. 나는 소설을 쓰는 것으로 소설에 대한 복수를 하고 있었다.”(<작위>, 242) 정영문의 이 말에 졸렬한 악의는 물론 없어 보이지만 대단히 보기 싫은 이상한 오기와 끈기는 아주 잘 보인다. 자의식 과잉이나 과잉된 자의식은 소설을 저질의 서사(일기)로 퇴화시키지만 그것에 대한 미학적인 유희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나 나보코프의 <롤리타>가 보여주듯 고품격의 서사를 낳는다. <작위>가 그 증거인데, 난해해서가 아니라 워낙에 특이해서 그의 소설은 진정 소수적인 문학, 그래서 소중한 문학이다.

 

3-3. 소설 바깥의 소설가 정영문

 

잇따른 문학상 수상을 전후하여 공개된, 그의 소설 못지않게 소설적인 인터뷰 글을 토대로 대략 한 줄 전기를 구성해보자. 1965년 경남 함양군에서 쉰다섯의 아버지의 실수로 태어난 그는 거창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3년에 서울대학교 심리학과에 들어가고 간신히졸업을 한 다음에는 미술사를 공부하러 프랑스에 가지만 공부가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아 기꺼이포기하고 쉰 살을 목전에 둔 지금까지 번역으로 생계를 꾸리며 노예처럼소설을 써왔다. 대학에 입학한 해, 김천에서 통일호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한 청년 정영문에 관한 묘사도 재미있다. ‘상경의 이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은, 고전적인 근대소설에서 최근 우리문학의 루저 문학이나 정크 문학(그 이전의 칙릿 문학도 포함)에 이르기까지 각종 소설의 기저에 깔린 상승이 아니라 하강’, 말하자면 패배’(카프카)전락’(카뮈)의 동선을 보여준다. 물론 이 역시 <작위>의 의 광대 복장처럼 가면이자 포즈일 수 있다. 그러나 살 속까지 파고든 가면은 이미 그 사람의 얼굴이고 몸뚱어리에 붙어버린 포즈는 이미 그의 실존이다. 그리고 소설가의 실존을 구성하는 요소는 모두 그의 소설의 일부이다.

(...)

 

계속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