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과 관습을 넘어, 자연과 호흡하는 자유의 삶을 찾아

- 마크 트웨인, <허클베리 핀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미시시피 강을 따라 펼쳐지는 십대 소년의 모험담을 그린 동화 정도로 생각한다면 그만한 실례도 없을 것 같다. 실상 남북전쟁 직전의 미국 사회, 특히 남부의 생활상과 세태, 모럴과 관습을 이 정도로 밀도 있게 조망한 소설도 드물다. 헉은 더글라스 과부댁의 양자이고 짐은 그녀의 여동생인 왓츤 아줌마의 노예이다. 둘은 나이, 그보다는 피부색의 차이 때문에 좀처럼 어울리기 힘든 사이지만 도망이라는 정황 때문에 문자 그대로 한 배를 탄다. 헉은 알코올 중독자이자 부랑자인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짐은 올리언스 지방으로 팔려갈 위기를 피해 도망친 것인데, 가정과 국가-사회의 폭력(노예제도)이 묘한 유비를 이룬다. 어쩌면 이 때문에 검둥이’(nigger)와 소외된 백인 하층 소년 사이에 유대 관계가 돈독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허클베리…>에서 흑백의 대립과 인종 문제는 단순한 휴머니즘과 훈훈한 온정주의로만 환원되지는 않는다.

 

 

 

 

 

 

 

 

 

 

 

 

 

 

 

가령 희대의 사기꾼인 공작이 짐을 펠프스 농장에 팔아버린다. 헉은 법률과 관습에 따라 검둥이를 내줄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어기면서까지 검둥이를 구할 것인지 고민한다. 왓츤 아줌마에게 짐의 행방을 알리는 편지를 쓰기도 하지만 결단을 내리는 데는 제법 시간이 걸린다.

 

좋아, 난 지옥으로 가겠어.- 그러고는 편지를 북북 찢어버렸습니다.

그것은 끔찍스러운 생각이었고 무서운 말이었지만 벌써 입 밖으로 내뱉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내뱉은 말을 취소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었지요. (중략) 다시 나쁜 짓을 하기로 하자고 했습니다. 나란 놈은 자라나기를 그런 식으로 자라났으니 나쁜 짓이 내 천성에 맞고, 착한 일은 그렇지 않다고 말입니다. 맨 첫 번째 일로 나는 짐을 다시 한 번 노예 상태에서 훔쳐내자, 아니 그보다 더 나쁜 일을 생각해 낼 수 있다면 그것도 하겠다고 다짐했지요. 나쁜 짓을 하기로 한 이상, 더구나 끝까지 하기로 한 이상, 철저하게 해내는 것이 좋을 테니까요.”(451-452)

 

절친한 친구를 구하는 일이 그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지옥과 동일시되는 정황은 시대적인 맥락을 고려해야만 이해될 수 있겠다.

 

 

 

 

 

 

 

 

 

 

 

 

 

 

헉의 눈에 비친 짐은 어리석고 미신적이며 따라서 어딘가 야만스럽지만 인정이 많고 생활의 지혜를 보여주는 일도 잦다. 그럼에도 이런 긍정적인 자질들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다. “짐이 하는 말은 대체로 늘 옳았습니다. 짐은 검둥이치고 비상한 머리를 갖고 있었지요.”(166) 한편 짐은 자유주에 도착하면 열심히 돈을 모아, 다른 농장으로 팔려가는 바람에 뿔뿔이 흩어진 처자식을 되사겠다는, 만약 주인이 팔지 않으면 노예 폐지론자에게 부탁하여 애들을 훔쳐오겠다는 생각을 하고 가족이 그리워 수시로 눈물을 흘린다. 이에 대해 헉의 반응이 참 아이러니하다. “자기 가족을 생각하는 심정은 흑인이나 백인이나 다를 것이 없다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340) 간단히, 검둥이는 인간에 근접한 그 무엇이지, 온전한 의미의 인간은 아닌 것이다. 노예제도의 위력이 실감남과 동시에 이 소설의 리얼리즘이 도드라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결국 헉은 얼떨결에 펠프스 집안의 조카 톰 역할을 떠맡은 다음 그 특유의 거짓말과 연기 능력을 발휘하여, 또 느닷없이 등장한 톰 소여의 도움을 받아 짐을 탈출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짐이 진정한 자유를 획득하는 것은, 다소 황당하게도, 왓츤 아줌마의 갑작스러운 개심덕분이다. 짐은 이렇게 수동적으로 자유를 얻는 반면, 헉은 그 스스로 그것을 찾아 떠난다. 그가 글을 쓰는 일에 회의를 표하고 무엇보다도 교양으로써 자신을 길들이려는 은혜로운자들을 피하는 것은 문명에 대한 저항이자 자연-자유를 향한 추구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교양 있는’, 그리하여 자신이 읽은 책에 따라 삶을 그야말로 모험-유희로 즐기고 어딘가 주일학교냄새를 풍기는 톰 소여와 확연히 구분되는 헉의 특징이기도 하다.

 

, 이제 더 이상 쓸 이야기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이 나에게는 무엇보다도 기쁩니다. 그 까닭은 만일 책을 쓴다는 것이 이렇게 귀찮은 일인지 미리 알았더라면, 나는 아마 이 일에 덤벼들지 않았을 것이고, 두 번 다시는 이런 일을 하려고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나는 나머지 사람들보다 앞서 인디언 부락으로 떠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샐리 아줌마가 나를 양자로 삼아 <교양 있는> 사람으로 만들려 하고 있고, 나는 그 일이 도저히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 일이라면 전에도 한번 해본 적이 있으니 말입니다.(596)

 

여기다 무슨 얘기를 더 보태는 것 자체가 작가의 의도를 배반하는 행위일 것 같다. 이 소설이야말로 흐르는 강물처럼쓰인, 또한 그렇게 읽는 것이 더 옳지 않겠는가. 이 책의 맨 처음에 다음과 같은 경고문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에서 어떤 동기를 찾으려고 하는 자()는 기소할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어떤 교훈을 찾으려고 하는 자()는 추방할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어떤 플롯을 찾으려고 하는 자()는 총살할 것이다.

- 지은이의 명령에 따라

군사령관 G. G.

 

 

-- <네이버캐스트>

 

-- 미국 문학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에 대해서는 전에도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마크 트웨인이 이렇게 비중있는 작가라는 건 이 소설을 읽으면서 처음 알았습니다. 동화로만, 티브이 만화로만 알았던 <허클베리...> <톰 소여...>, 어릴 때 동화로만 읽은 <왕자와 거지> 등의 작가인 그가 실은 러시아문학으로 치면 고골쯤 된다는군요...-_-;;  실제로 정신차리고(?!) 읽어보니, 어려운(=지루한 ㅠ.ㅠ) 책이더라고요... ㅋㅋㅋ

마크 트웨인 하면 떠오르는 건, 자기는 담배를 끊을 때마다 성공했다는(^^;) 식의 말뿐인데 대단한 애연가였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많이 크지만 이런 사진을...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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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이 속물스러움을 어찌할 것인가

- 고골, <뻬쩨르부르그 이야기>

 

 

 

 

 

 

 

 

 

 

 

 

 

 

 

 

 

 

 

고골은 러시아문학 최고의 수수께끼이다. 그는 얼굴이 너무 많거나 아예 없다. 능글맞고 의뭉스러운 재담꾼의 얼굴, 이상과 현실의 괴리 앞에서 파멸하는 광기 어린 예술가의 얼굴, 궁상맞고 추레한 노총각의 얼굴, 구원의 열망에 사로잡혀 고통 받는 메시아의 얼굴. 이 얼굴들이 <뻬쩨르부르그 이야기>  속을, 환상의 도시 뻬쩨르부르그를 유령처럼 배회한다.

 

그러나 가장 기묘한 것은 네프스끼 거리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다. , 이 네프스끼 거리를 믿지 마라! (중략) 모든 것이 기만이고 모든 것이 꿈이며 모든 것이 겉보기와는 다르다!(281)

 

인간은 그를 구성하는 각종 부속물로 해체된다. 프록코트, 넥타이, 중절모, 콧수염 등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그 파편들이 인간을 장악한다.(네프스끼 거리) 오죽하면 엄연히 인간의 한 부분인 신체마저도 속을 썩인다. 가령 에서 는 분명히 코발료프의 일부였으나 어느 날 갑자기 독립적인 인간이 되어, 더욱이 그보다 더 높은 관등을 뽐내며 그를 위협한다. 과연 이 모든 것이 한낱 꿈에(-NOS를 뒤집으면 꿈-SON이 된다) 불과한 것일까.

 

 

 ([코] 러시아 본 중 하나.)

 

외투처럼 사실주의의 외투를 걸친 소설 속의 세계는 더 환상적이다. 가난한 하급 관리가 북국의 혹한에 맞서려고 힘들게 장만한 새 외투를 강탈당하고 절망 끝에 사망한 뒤 귀신이 되어 뻬쩨르부르그를 떠돈다. 실상 이 소설의 환상성은 전설의 고향 같은 줄거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그 자체로 존재하지 못하고 하나의 외투, 하나의 자리로 환원되는 세계야말로 그로테스크하다.

 

아까끼 아까끼예비치의 시신은 어디론가 옮겨져 매장되었다. 그리고 더 이상 뻬쩨르부르그에 아까끼 아까끼예비치라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사람은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 같았다. 누구의 보호나 사랑도 받지 못하고, 흔한 파리 한 마리도 놓치지 않고 핀으로 꽂아 현미경을 들이대는 자연 관측자의 관심조차 끌지 못했던 존재가 사라졌다. (중략) 이렇게 하여 관청에서도 아까끼 아까끼예비치의 죽음을 알게 되었고, 벌써 그 다음날부터 훨씬 키가 큰 다른 관리가 그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89-90)

 

말하자면 고골은 카프카 보다 먼저 관료제의 암흑과 심연을 엿보았던 것이다. 광인 일기는 관료제의 부품이 된 인간의 내면을 포착한다. 뽀쁘리시친은 상관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승진을 하려는 야무진 포부를 키우지만 그것이 좌절되자 완전히 미쳐버린다. 이 광기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의 저 독백은 한 편의 시처럼 읽힌다.

 

나는 9급 관리이다. 9급 관리가 되었을까? 어쩌면 나는 백작이나 장군인데, 다만 9급 관리처럼 보이는 건 아닐까? 아마 나 자신도 내가 어떤 인간인지 모르고 있을 거다. 사실 역사에도 그런 예가 얼마든지 있다. (중략) 어떤 평민이나 농부가 어쩌다가 그 신분이 드러나 갑자기 어떤 귀족이나 황제라는 것이 밝혀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중략) 나도 당장에 총독에 임명되거나 경리 국장이나 그 밖의 어떤 관직을 받지 않을까? 내가 왜 9급 관리인지 알고 싶지 않을까? 다시 말해 내가 9급 관리인 이유가 뭘까?(121-122)

 

뽀쁘리시친은 정체성이라는 화두를 붙든 채 자신의 광기의 궤적을 고스란히 추적할 만큼 뛰어난 시적인 능력을 지녔다. 그럼에도 그의 실존적 고뇌와 그 저변에 깔린 속물스러움의 충돌은 가히, 미학적 충격에 가깝다.

 

(참 고골스럽게 생겼지요? ^^;;)

 

 

초상화의 주인공 차르뜨꼬프도 현실 법칙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우연찮게 구입한 초상화 속의 인물이 떨어뜨린 돈으로 그는 양복, 향수, 오페라글라스 등을 사고 프랑스 레스토랑에서 고급 음식과 샴페인을 주문한다. 예술이라는 이름하에 이 가난한 청년이 억눌러왔던 속물적인 욕망이 얼마나 강렬했는지를 보여주는 안쓰러운 대목이다. 순수한 열정의 화신조차도 결코 완전히 죽일 수는 없었던 내 안의 악마, 그것의 이름이 바로 속물성이다.

 

 

 

 

 

 

 

 

 

 

 

 

 

 

 

고골은 인간 본연의 속물성을 종교를 통해 극복하려 한다. 자기가 그린 초상화가 많은 사람을 악의 구렁텅이로 빠뜨렸음을 통감하고 수도원에 들어가 평생을 속죄하며 산 성상화가가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교회의 벽 안에서 순결함과 고고함을 유지하는 것은 전혀 어렵지도 않거니와 숫제 무의미하다. 인생의 문제는 항상 홍진에 묻힌 세상에서 생겨나되, 우리는 그것을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딜레마가 결국 고골을 광기로 몰아간다.

 

 

 

 

(나보코프는 고골을 가장 잘 읽어낸 작가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좀 얇긴 하지만  고골론을 썼습니다.)

 

 

 

 

 

 

 

고골의 소설가적 재능은 예민한 코와 왕성한 위장에 있었다. 러시아문단이 낭만주의의 끝물을 붙잡고 있을 무렵, 그는 잘 먹고 잘 살자는, 절대 죄스러울 것 없는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에 주의를 기울인 최초의 작가였다. 하지만 동시에, 어떤 초월성도 담보하지 못하는 이 허망한 욕망을 혹독히 단죄하고자 했다. 속물스러운 가치를 탐했던 그의 주인공들은 실제로건 은유적으로건 모두, 죽는다. 한편, 소설 바깥에서 고골은 자기 자신을 단죄한다. 말년에 이르러 종교에 심취한 그는 기괴한 단식을 감행, 포도주 몇 방울로 연명하다가 굶어죽는다. 서른 살만 돼도 다들 웬만큼 타협하게 되는 속물스러움에 고골은 왜 그토록 큰 우수를 느꼈던 것일까. 누구보다 타인을 배려할 줄 알았던 그가 자신의 평범한주인공들에겐 왜 그토록 혹독했던 것일까. 그러게, 고골은 수수께끼란 말이다.

 

-- <네이버캐스트>

 

-- 언제부터인가 이 학기가 마지막 학기다, 라는 생각을 하면서 '마지막'이란 말을 조롱하고 있지만, 이번이야말로 진짜 '마지막'이다, 라고 단언하는 이유는 운을 맞추기 위해서인데, 무슨 말인고 하니, 나의 대학 입학년도에 들어 있는 끝자리 숫자(-3)가 이십년을 흘러흘러 다시 끝자리에  왔기 때문이다. ~~~ 뭐, 개강과 더불어 이런 말이 주저리주저리 나오는 와중에 고골을 잠시 떠올려 봅니다. 그의 딜레마와 광기에 대해 제법 많이 생각했는데(즉 두 편의 논문을 썼는데) 결국에는 다 나의 문제를 거기다가 투사했던 것 같습니다. 뭐, 다 좋지만, 특히, 인용한 포프리쉰(뽀쁘리시친)의 말은 최근 들어, 더 귓전에 맴도는군요...!

(일리야 레핀이 1870년에 그린 포프리쉰(뽀쁘리시친), 이랍니다. 처음 보는데, 좋군요!)

 

여하튼. 환상과 괴기 역시 단지 기법이 아니라 세계관의 문제라, 작가별로 그 양상이 다르고 각기 자기만의 방식으로 '참을 수 없는 현실-실제의 무거움'(!)을 담아냅니다. 가령, 이런 작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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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낭만주의자가 쓴 성장소설의 경전:

헤르만 헤세(1877-1962), <데미안>(1919)

 

 

헤르만 헤세의 소설들, 특히 <데미안>은 많은 독자들의 기억 속에 청춘의 책으로 아로새겨져 있다. 이토록 젊은소설을 쓸 때 작가가 이미 불혹의 나이를 넘겼다는 사실이 오히려 새삼스럽다. 실제로 이 얄따란 소설의 기저에는 독일 문학 특유의 교양소설(성장소설)과 관념소설의 전통, 아직 환멸과 분열을 모르는 몽상적이고 이상적인 낭만주의, 그리고 관록이 쌓인 작가의 문학적 성찰이 깔려 있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싱클레어는 일종의 서문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9)이라고 말한다. 과연 시적인 소제목이 붙은 여덟 개의 장()의 자아 찾기와 자아 완성의 과정을 다루는데, 그 출발점은 두 세계’, 정확히 그것에 대한 인식이다. 사랑과 행복이 가득 한 가족, 모범과 규율에 지배되는 학교로 대변되는 밝은 세계와 나란히, 혹은 바로 그 세계 안에 어두운 세계가 공존하고 있다. “(중략) 너처럼 부자 아버지가 없단 말이야.”(20)라는 계급의식에 사로잡혀 싱클레어를 괴롭히는 프란츠 크로머는 후자의 상징이다.

 

한편, 두 세계 사이에서 방황하는 싱클레어 앞에 나타난 유복한 미망인의 아들 막스 데미안은 지덕체의 구현 같다. 또래들보다 지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우월한 그의 가르침을 통해 싱클레어는 새로운 세계관을 갖게 된다. 지금껏 밝고 깨끗한 세계에서 살아온 일종의 아벨이었던 그가 카인의 표적(표식)’, 말하자면 카인의 후예쪽으로 한 발짝 다가서는 것이다. 예수와 함께 처형당한 두 도둑 중 무덤을 코앞에 두고서 회개한 징징거리는 개종자”(82)가 아니라 회개하지 않은 도둑이야말로 진짜 사나이라는 데미안의 얘기에도 감화된다. 말뿐만이 아니다. “그의 주위를 둘러싼 이 고요한 공허, 이 정기(精氣)와 별들의 공간, 이 고독한 죽음!”(89) 싱클레어가 포착한 데미안은 두 세계의 모순을 초월한 아파테이아의 화신이자 동양적 해탈의 경지에 오른 싯다르타이다.

 

 

 

 

 

 

 

 

 

 

 

 

 

 

 

 

몇몇 친구와의 만남, ‘베아트리체를 향한 관념적인 사랑, 오르간 연주자(피스토리우스)와의 영적인 교류 등 싱클레어의 성장과 구도(求道)는 계속된다. 그가 그린 거대한 노란색 매의 그림, 그에 대한 데미안의 답장이 유명하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123)

 

 

 

 

 

 

 

 

 

 

 

 

 

 

 

압락사스(Abraxas: 아프락사스, 아브락사스)는 기독교의 한 분파 혹은 한 원류인 영지주의의 신으로 알려져 있다.(스티븐 횔러, <이것이 영지주의다>)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의 전통이 강한 서구 지성사에 이토록 신비적이고 비의적인 전통이 공존한다는 사실이 당연하면서도 의미심장하다. 이교적인 냄새를 물씬 풍기는 이 독특한 신은 빛과 어둠, 신과 악마, 선과 악은 물론 남과 여, 인간과 동물 등 서로 모순되는 두 세계를 자웅동체처럼 한 몸으로 구현해낸다. 다시 싱클레어 앞에 나타난 데미안, 그리고 장신에 거의 남자 같은 여자의 모습을 한 그의 어머니(에바 부인)는 압락사스의 현현이기도 하다. 그들이 다양한 구도자들과 함께 하는 모임은 밀교적인 카발라를 연상시킨다.

 

 

(젊은 헤세.)

 

 

이런 상황에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데미안과 싱클레어 모두 참전한다. “모든 사람들이 형제가 된 것 같았다. 그들은 조국과 명예를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운명이었다.”(217) 이 전쟁에서 싱클레어가 비로소 진정한 자아를 찾는다는 식의 결말에 불편함을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백년 가까이 성장소설과 구도소설의 경전으로 숭상되어온 이유는 무엇인가.

 

토마스 만은 <데미안>을 독일 민족과 독일 문학의 운명 속에서 이해하면서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연장선상에 놓았는데, 그 와중에 이 동년배 작가의 초상화도 그려주었다. “나는 (중략) 그의 명랑하고 사려 깊은, 선량하면서도 악동 같은 특성을, 유감스럽게도 병든 눈의 깊고도 아름다운 눈길을 사랑한다.”(토마스 만, <데미안> 영문판 서문.) 이런 이미지는 1964년 이 소설을 국내에 처음 번역, 소개한 전혜린의 글에서도 엿보인다. 헤세가 직접 그린 수채화를 두고서 그녀는 흰 구름헤세의 생활이나 사랑의 방랑의 상징이고 나무구도자 헤세를 보여주는 것 같다고 썼다.(전혜린,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니체의 아포리즘(싱클레어는 니체를 탐독한다)과 은은한 수채화 위에 쓰인 서정시의 종합에 동양적 종교철학까지 가미한 에밀 싱클레어의 청춘 이야기는 어쨌거나, ‘질풍노도의 한가운데서 제각기 불안과 떨림의 병을 앓으며 데미안-압락사스를 갈구하던 우리 청춘의 기록이기도 하다.

 

-- <책&>

 

 

 

(헤세가 그린 수채화.)

 

 

-- 헤세 없이 우리의 성장이 가능했을까, 라는 물음. 결코 과장이 아닐 법한데요, 오랜만에 <데미안>을 읽으면서 그 관념성과 구도성에 깜.놀.하고 '아프락사스'의 낯섦이 이제는 덜해진 것 같아 흐뭇(?)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늙었다는 소리겠군요. 헤세의 소설 중 제일 좋아한 것은 <지와 사랑>, 즉 <골드문트와 나르치스>였습니다. 확실히, 비교-대조(대구)를 좋아하나 봅니다 ㅎ ㅎ 한편, 그의 최고작이라 불리는 <유리알 유희>는 대학 기숙사에서 읽은 기억이 있는데, 너무 어려웠던 것 같아요..-_-;; <황야의 이리>는 여전히 못 읽고 있네요..ㅠ.ㅠ

 

 

 

 

 

 

 

 

 

 

 

 

 

 

 

 

-- 카인이니 아벨이니, 예수니 그 옆의 도둑이니 하는 얘기를 읽으며 떠올린 건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마땅한 이미지가 없네요 ㅠ.ㅠ -- 내가 읽은 판본의 표지는 샤갈의 그림이었는데요), 황순원의 <카인의 후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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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의 원형, 인간의 근원을 찾아서:

류드밀라 울리츠카야(1943-), <소네치카>(2012, 비채)

 

 

1990년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의 러시아와 마주한 ‘P세대’(펩시 세대)의 딜레마를 가장 잘 대변해준 이는 모스크바 출신의 삼십대 작가 빅토르 펠레빈이었다. 도시적인 감수성과 비의적인 분위기, 도발적이고도 지적인 문체, 현란한 문화 코드와 다양한 장르의 혼합 등 그는 새로움과 젊음의 대명사였다. 그 무렵, 우랄 지역 출신에 두 아이의 엄마이자 쉰 살을 목전에 둔 아줌마소네치카(1992)라는 촌스러운제목의 중편소설을 들고 문단에 나타난다.

 

 

 

 

 

 

 

 

 

 

 

 

 

 

류드밀라 울리츠카야(1943-)의 데뷔작이자 출세작인 소네치카는 한마디로 여자의 일생이다. 소냐(소네치카)는 네프 시대에서 스탈린 독재로 이어지는 격동기에도 도스토옙스키의 불안한 심연투르게네프의 그림자 드리운 가로수”(10)에 빠져 사는 독서광이지만 어느 중년 화가(로베르트)와 결혼하면서 삶의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선다. “책 속의 삶을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받아들이는() 능력은 사라진 반면 이 세상에서 가장 변변치 않았던 것들, 예를 들어 직접 만든 쥐덫으로 쥐를 잡은 일”(22)이 중요해진다. “고상한 소녀에서 지극히 현실적인 안주인이 된 그녀의 꿈은 수도관이 설비된 부엌, 딸이 혼자 쓰는 방, 남편의 공방이 딸린 사람이 살만한 평범한 집”(34-35)을 갖는 것이다. 노화의 폭탄을 맞은 그녀를 슬프게 하는 것도 아이를 더 많이 낳지 않으면 남편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35)는 생각이다.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일부러 젊었을 적 사진을 올려봅니다 ^^; 예쁘지요? 최근 사진 보면 너무 튼실(?)해보이는데, 인터뷰 동영상 보면 은근히 조심스러운 느낌을 줍니다.)

 

1950년대 초, 중년의 소냐는 아이의 양말을 기우며 남편과 예술가 친구들의 고상한대화를 듣는 가정주부이다. 그런데 남자애들과 어울리는 데 싫증이 난 딸(타냐)이 작고도 요염한 고아 소녀(야샤)를 데려오면서 가족 구조가 재편된다. 집이 철거당할 절박한 순간에 남편의 불륜 사실을 알게 된 소냐는 예외적이고 비범한 그이에게 젊고, 예쁘고, 부드럽고, 날씬한 아가씨가 생긴 것은 공평한(66)이라고 생각하고는 푸시킨의 소설을 꺼내 읽는다. 딸마저 페테르부르크로 떠나자 다시 문학이라는 마약”(71)에 손을 댄다. 반쪽짜리 남편이 죽은 다음 야샤를 챙기는 것도 그녀의 몫이다. “그녀[야샤]는 고아였고, 소냐는 엄마였다.”(78) 그렇기에 남편을 포함하여(!) 모든 아이들이 떠난 이후 그녀의 삶은 오직 문학만이 희망이다.

 

 

 

 

 

 

 

 

 

 

 

 

 

 

소네치카는 짧은 분량임에도 고전적인 가족 서사의 충실한 복원으로 읽힌다. 물론 대러시아제국이 소비에트연방으로, ‘아버지와 아들어머니와 딸로 바뀐 것이 도드라지긴 한다. 소위 웰 메이드가족 서사의 대가인 톨스토이, 특히 소냐가 탐독한 <전쟁과 평화>의 경우 구성적 주인공은 여성(나타샤 로스토바)이지만 사상적 차원은 제각기 톨스토이의 분신인 남성들이 담당한다. 울리츠카야의 가족 서사는 모든 점에서 명실상부한 여인천하이다. 한 남자가 여자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자들이 다양한 역할(어머니, 아내, 애인, )을 맡아가며 한 남자를 공유한다. 자유와 욕망의 발칙한 화신인 마녀-타냐와 야샤, ‘자기낮춤을 통해 성성(聖性)을 획득하는 성녀-어머니소냐, 이들 모두 제각기 자기 삶의 주인공이다.

 

 

 

 

 

(발레리 부토노프는 왠지 이렇게 생겼을 것 같아요, 스포츠맨이라 몸은 탄탄한데  은근히 수도사 같은 이미지, 그리고 방탕 자체가 아니라 방탕의 관념에 탐닉하는 지하인의 이미지.)   

 

 

 

 

 

메데야와 그 피붙이들의 이야기인 <메데야와 그녀의 아이들>에 이르면 그림이 더 또렷해진다. 이 시노플리 집안에서 제일 부각되는 것은 메데야(불모의 성녀)와 알렉산드라(다산의 마녀) 자매의 성화같은 대조이다. 메데야는 지극정성으로 보살펴온 남편 사무일이 죽은 직후 그와 알렉산드라가 연인관계였으며 여동생의 딸(니카)이 자기 남편의 아이였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녀에게 예정되었던 남편의 저 아이를 여동생의 유쾌하고 가벼운 몸에 넣어주었던 운명”(308)에 대한 원망을 뒤로 하고 멋진 과부, 모두의 어머니로 거듭난다. 얽히고설키는 아이들의 이야기 중 니카와 그녀의 조카 마샤 사이를 오가며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음탕의 권태에 탐닉하는 강철 같은 몸에다 꽁지머리를 길러서 사제 같은”(274) 발레리 부토노프가 소설적 흥미를 더한다. 그의 연인이자 저명한 학자(알리크)의 아내인 마샤는 심각한 조울증 끝에 몇 편의 시를 남기고 자살한다.

 

 

 

 

 

 

 

(이참에 <메데이아>를 다시 읽었는데, 의외로(??) 가정드라마 - 미국 현대 희곡에서 자주 보는 - 같은 데가 있어서 놀랐어요.)

 

 

 

 

 

메데야-알렉산드라가 이 파란만장한 세계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은, 말하자면 그들이 아이를 잘 낳는 암컷”(톨스토이, <전쟁과 평화>)이기 때문이다. 이 순혈 그리스인 자매는 공히 성녀-마녀로서 인간의 근원이자 서사의 근원으로 거듭난다. 여기서, 에우리피데스가 절묘하게 포착한 바, 고뇌와 번민 끝에 두 아들을 죽이고 그로써 (그들이 크레온 집안의 희생양이 될 가능성을 차단하고) 철저히 욕망에 충실했던 자신을 단죄함과 동시에 아버지-수컷에게 최고의 복수를 선사한 신화 속 메데이아가 묘한 음화로 되살아난다.

 

여성 중심의 가족 서사는 스페이드의 여왕에서 더 극적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보다 더 질기게 살아남은 아흔 살의 무르, 어머니의 추한 음욕을 견뎌내는 예순 살의 안나(‘성녀’), 마흔 줄에 이른 안나의 딸 카챠, 끝으로 카챠의 아이들 등 총 4대가 만들어내는 풍속도는 스페이드 여왕보다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현대판 미니어처에 가깝다.

 

 

 

 

 

 

 

 

 

 

울리츠카야는 붕괴와 해체의 시대에 통합에 대해 쓴 작가이다. 핏줄의 그물망을 축조함으로써 서사의 원형을 복원하고 하늘-우라노스’(아버지/아들)보다 앞서는 대지-가이아’(어머니)를 소설화하려는 시도는 우리말 번역에서도 잘 표현된 문체적 독특성과 은근한 지성주의보다 더 본질적인 것이다. <박경리 문학상> 수상소감에서 그녀는 <김약국의 딸들>을 언급했는데, <토지>를 접할 기회가 있었다면 마땅히 이 경이로운 대작 앞에 경의를 표했으리라 생각된다. 아이를 낳지 않으면 소설의 다음 장(), 다음 부()는 쓰일 수 없음을, 사람은 사람과 엮일 때 비로소 사람임을 보여주는 것이 <토지>이다. 새로운 문학은 일견 그것이 아무리 새로워보일지라도 어쨌거나 핏줄의 산물이고, 가족 서사는 여전히 모든 소설가의 로망이다. 러시아문학을 흠모하는 우리 독자에게 울리츠카야의 소설이 많은 호응을 얻기를, 무엇보다도, 다양한 문화 체험을 통해 우리 문학의 가계도에 더 많은 <토지>가 생겨나길 바란다.

 

-- <창비> 2013년 봄호.(편집 전 파일.) 

 

 

-- 분량 때문에 많이 못 썼는데, <토지> 얘기를 좀 더 하고 싶었답니다. 팔은 당연히 안으로 굽죠! ^^ 남의 나라 작가가 아무리 잘 쓴들, 우리 것이 좋죠 ㅎㅎ

대학 때 읽은 굵직한 대하소설(뭐, 못 읽은 것도 많지만 -_-;;) 중 제일 좋아했던 작품이 <토지>인데요, 다시 읽으면 어떨지 궁금합니다! 서희와 길상이, 상현이와 봉순이의 아들딸들 얘기도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은데...  대학원 시절 학회 때문에 원주 갔다가 먼 발치에서 본 기억도 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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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정면에서 너무 오래 들여다보지 말라.”

- 멜빌, <모비딕>(1851)

 

 

  <모비딕>이 자신의 다리를 빼앗아간 고래에게 복수를 하다가 파멸하는 한 인간의 이야기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고래 뼈로 만든 의족에 몸을 의지한 채 두려움을 모르는 시선으로 앞만 바라보며 서 있는 노인, 신을 믿기는커녕 그 스스로 신이고자 하는 존재, ‘대학물까지 먹었으면서도 식인종과 어울린 적도 있는 거친 뱃사람. 에이해브 선장은 시종일관 신비스러운 존재로 그려지는데, 고래를 향한 집요한 복수심과 비장한 투지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스타벅의 눈에는 광기로, 불경스러운 반역으로 보인다. 근육질의 건강한 몸에 청교도적인 윤리와 합리적 실용주의를 겸비한 30세의 일등항해사는 당차게 말한다. “저는 고래를 잡으러왔지, 선장님의 원수를 갚으러 온 것이 아닙니다.”(216) 복수 따위는 돈벌이도 되지 못하거니와 그저 맹목적인 본능으로 공격을 했을 뿐인 말 못 하는 짐승에게 원한을 품었다가는 천벌을 받으리라는 것.

 

 

 

 

 

 

 

 

 

(세상에 쉬운 번역이 없겠지만, <모비딕> 완역하신 분,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하지만 이런 짐승에게서 에이해브는 가시적인 판지 가면로 가려진 뭔가 거대한 힘의 원천을 본다. “공격하려면 우선 그 가면을 뚫어야 해! 죄수가 감방 벽을 뚫지 못하면 어떻게 바깥세상으로 나올 수 있겠나? 내게는 그 흰 고래가 바로 내 코앞까지 닥쳐온 벽일세.”(217) 개인적인 복수심뿐만 아니라 인간의 이성과 의지로는 어찌할 수 없는 운명(신 혹은 자연)을 향한 분노를 모조리 고래에게 쏟아 붓는 것이다. 어떻든 열여덟 살의 어느 아름다운 날 처음 고래를 잡은 이래 40년 동안을 바다의 고래와 더불어 살아온 노선장의 한탄은 교향곡처럼 깊고 묵직한 울림을 낸다. 그는 당장 진로를 바꾸어 돌아가자는 스타벅의 바람직한 충고를 따를 수 없다. 고래, 특히 모비딕이야말로 그의 유일한 존재 이유인 까닭이다. “모든 것을 파괴하지만 정복하지 않는 고래여! 나는 너에게 달려간다. 나는 끝까지 너와 맞붙어 싸우겠다. 지옥 한복판에서 너를 찔러 죽이고, 증오를 위해 내 마지막 입김을 너에게 뱉어주마.”(681) 그러고서 에이해브는 고답적인 비극의 주인공답게 고래와 함께 바다 깊숙이 침몰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마감한다. 하지만 이 비장한 운명극은 이 소설의 일부를 이룰 뿐이다 

(모비딕, 향유고래.)

 

<모비딕>은 원제(“Moby-Dick or, The Whale”)가 말해주듯 고래의 생김새와 생태와 종류, 고래를 잡고 해체하고 보관하고 활용하는 법, 고래 요리의 종류와 역사 등 정녕 고래학과 포경(捕鯨)에 관한 책이다. 모비딕은 고래 일반을 대표하는 짐승임과 동시에 <피쿼드> 호의 여느 선원들보다 더 또렷한 형상과 성격을 가진 인물이기도 하다.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몸집, 이마에는 주름이 잡혀 있고 등에는 하얀 혹이 피라미드처럼 높이 솟아 있는, 인간처럼 교활한 지성과 영원한 악의를 뽐내는 독특한 향유고래! 무엇보다도 본질적으로 색깔이라기보다 눈에 보이는 색깔이 없는 상태인 동시에 모든 색깔이 응집된 상태”(246)와 같은 저 흰색이 압도적이다. 검푸른 바다를 뚫고 용트림하는 하얗고 거대한 힘 앞에서 움츠러들지 않을 수 있을까.

 

(뱃사람처럼은 안 보이죠?ㅎㅎ)

 

한데 최후의 접전에서 살아남은 자는 비장함과도, 합리적 실용주의와도 무관한 인물이다. “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고 해두자.”(31) 이렇게 운을 떼는 청년은 지갑도 거의 바닥나고 뭍에는 딱히 흥미로운 것도 없어 기분 전환 삼아 배를 타게 되었다. 하필 포경선이었던 것은 거대한 고래, 그 경이롭고 신비로운 괴물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이 출사표에 대해 때론 비장한 말을 늘어놓기도 하지만 그의 어조는 대체로 덤덤하다. 자신이 속한 연극판과 자신의 역할에 대한 인식도 명징하다. “다른 사람들은 고상한 비극에서 당당한 역할을 맡거나 우아한 희극에서 짧고 쉬운 역할을 맡거나 익살극에서 유쾌한 광대 역할을 맡는데, ‘운명이라는 무대감독이 왜 나한테는 고래잡이 항해의 이 초라한 역할을 맡겼는지, 그 정확한 이유는 나도 알 수 없다.”(36) 그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것도 그렇다. 퀴퀘그의 관과 <레이첼> 호 덕분인데, 이런 흐름을 관장하는 메커니즘의 원리는 어떤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해 이슈메일 나름의 답은 이렇다. “인간들이여! 불을 정면에서 너무 오래 들여다보지 말라.”(511)

 

 

 

 

 

 

 

 

 

 

 

 

 

 

 

 

포경선은 나의 예일 대학이며 하버드 대학”(158)이라는 이슈메일의 고백은 작가에게도 적용된다. 멜빌 문학의 자양분 중 하나는 포경선과 남태평양의 섬에서 쌓은 경험이다. 그 토대 위에서 형상화된 자연의 이면에는 물론 문명이 도사리고 있다(멜빌의 후기의 역작인 필경사 바틀비는 문명의 한가운데 놓인 인간의 본질을 절묘하게 포착한다). 인종 박물관처럼 보이는, 총 서른 명의 선원을 실은 <피쿼드> 호는 19세기 중엽 미합중국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주인공들의 이름에서부터 여실히 드러나는 성경 텍스트가 이 작품의 보편성과 영구성을 부여해주기도 한다. 삼십대 초반의 작가가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십분 활용하여 공들여 쓴 소설이 <모비딕>이다. 이 소설과 함께 작가가 망각과 침묵의 바다 속에 침몰한 형국이랄까. 20세기 , <모비딕>의 부활은 눈 덮인 산 같은 모비딕이 바다 위로 웅비하는 모습을 반복하는 것 같지 않나.

 

-- <책&>

 

-- <모비딕>의 작가가 가장 열등감을 느낀 작가는 너대니얼 호손이었던 것 같은데, 언제 기회가 되면 다시 읽어봐야죠 ㅋ  <큰바위얼굴>은 연극도 하고 그랬는데...

 

 

 

 

 

 

 

 

 

 

 

 

 

 

 

-- 오로지 거대한 이미지, 숭고함, 뭐 이런 것 때문에 <모비딕>과 함께 연상되는 화가는 아이바조프스키입니다. 그의 그림은 종류 불문, 갤러리에서 실제로 보면 문자 그대로 압.도.(압사?)당합니다..^^;; 칸트의 숭고미 설명할 때 항상 언급하는 화가이기도..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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