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속의 고슴도치>

- 프롤로그

 

 

 

 

 

 

 

 

저녁이 됐군요. 오늘도 고슴도치는 딸기잼을 들고 곰을 만나러 갑니다. 둘이 함께 딸기잼을 곁들인 홍차를 마시며 별을 헤아릴 거랍니다. 고슴도치는 걸음을 옮기면서 계속 혼잣말로 옹알댑니다.

“곰에게 무슨 말을 할까… 곰아, 너 주려고 딸기잼을 가져왔어. 내가 이렇게 말하면 곰은…”

 

바로 그때 고슴도치의 눈앞에 자욱한 안개가 어립니다. 그 안개 사이로 하얀 말이 떠 있습니다. 어쩜, 저렇게 아름답고 신비스러울 수가! 고슴도치는 넋을 잃은 채 안개 속으로 들어갑니다. 안개 속에는 대체 무엇이 있을까? 고슴도치는 궁금해집니다. 조심스레 첫 발을 내딛어 봅니다. 이런, 자기 발도 보이지 않네요. 안개가 얼마나 짙게, 깊게 깔려 있으면 말이지요.

 

고슴도치는 두렵지만 안으로 더 들어갑니다. 커다란 나무들이 괴물처럼 버티고 있습니다.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다니는 것도 같군요.

“으악!”

고슴도치는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지릅니다.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가 고슴도치를 부르네요.

“고슴도치야!” “고슴도치야!” “고슴도치야!”

 

하지만 이 애타는 메아리를 고슴도치는 듣지도 못한답니다. 어머나! 그러고 보니 딸기잼도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네요. 안개 자욱한 숲 속에 갇힌 고슴도치는 몸을 움츠리고 벌벌 떱니다. 여기가 대체 어딜까?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안개의 문은 어디 있지? 고슴도치는 오도 가도 못하고 눈알만 굴립니다. 불안하고 무서워 죽을 지경입니다.

 

그때 귀가 길게 축 늘어지고 코끝이 새카맣고 동그란 강아지가 나타납니다. 심지어 코를 킁킁거리며 고슴도치의 얼굴까지 바싹 다가오네요. 무척 귀여운 강아지이지만, 웬걸, 고슴도치는 금방 기절이라도 할 것처럼 얼굴이 새하얘집니다. 하지만 강아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고슴도치의 냄새를 맡더니 뭔가를 건네주고는 웃으며 사라집니다. 아, 딸기잼 보따리! 잃어버린 딸기잼을 다시 찾았지만, 고슴도치는 왠지 기쁜 것 같지 않네요. 왜 그럴까요? 글쎄요.

 

갑자기 고슴도치는 미친 듯 어디론가 마구 달려갑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시커먼 강물이 나타납니다. 고슴도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강물 속으로 풍덩, 뛰어듭니다.

 

자, 이제 고슴도치는 출렁이는 물 위에 둥둥 떠 있습니다. 죽은 걸까요? 아, 아니네요. 혼잣말처럼 뭐라고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걸요. 뭐라고 하는 걸까요?

“나는 고슴도치. 나는 물에 빠졌어. 이제 곧 물속으로 가라앉을 거야.”

그때 뭔가가 말을 걸어옵니다.

“내가 너를 강가로 데려다 줄게.”

 

대체 누굴까요? 아니, 뭘까요? 궁금해 죽겠지만, 미끈미끈할 것 같은 시커멓고 거대한 형상만 보일 뿐, 도무지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군요. 그런데도 고슴도치는 무섭지도 않은가 봐요. 저항하지도 않고 얌전히 있는 걸 보면 말이지요. 그 시커먼 뭔가는 조용히 고슴도치를 자기 등에 태우고 물을 따라 떠내려갑니다.

 

얼마나 갔을까요? 드디어 고슴도치가 눈을 뜹니다. 고슴도치 옆에는 곰 한 마리가 앉아 있습니다. 양쪽 볼에 부푼 풍선을 집어넣은 것처럼 통통하고 팔다리와 몸통이 커다란, 정말 귀여운 곰이네요. 고슴도치와 곰 앞에는 모닥불이 활활 타오릅니다. 그 위에 차 주전자가 놓여 있습니다. 주전자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걸 좀 봐요. 곰은 오래 전부터 고슴도치를 기다렸던 모양이에요. 그래서일까요, 곰은 불만이 많습니다. 투덜거리며 쉬지 않고 말을 늘어놓네요.

 

“고슴도치야, 대체 어디 갔던 거야? 얼마나 불렀는지 알아? 아무리 불러도 대답도 하지 않고…. 대체 어디를 갔었어? 이렇게 모닥불도 지펴놓고 의자도 갖다 놓고 차도 끓여 놓고…. 우리 둘이 함께 차 마시기로 했잖아…. 아참, 너, 딸기잼 가져온다고 했지, 응? 계속 기다렸단 말이야! 너랑 별을 헤아리고….”

 

곰은 잠깐 말을 멈춥니다. 잠깐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다시 입을 열고 한숨을 크게 내쉬네요.

“휴우…. 네가 없으면 누구랑 같이 별을 세겠어, 응?”

 

곰의 길고 긴 잔소리가 고슴도치에게는 감미로운 자장가처럼 들리나봅니다. 귀엽고 커다란 곰을 바라보며 고슴도치는 생각에 잠깁니다.

‘어쨌거나 참 좋구나, 다시 곰과 함께 있으니….’

하지만 연이어 이런 생각도 떠오릅니다.

‘저어기, 저 안개 속의 하얀 말은 어떻게 됐을까?’

 

조막만 한 고슴도치와 집채만 한 곰 위로 캄캄한 밤하늘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 밤하늘에는 별이 가득하네요. 저 별을 언제 다 헤아릴까요? 별을 다 헤아리기도 전에 너무나 쉬이 아침이 오는 것은 아닐까요? 차를 마시고 별을 헤아리는 동안에도 고슴도치가 계속 하얀 말 생각을 하면 어떡하죠? 이런, 참, 궁금한 것도 많네요! 하지만 우리는 이제 그만 고슴도치와 곰을 단 둘이 남겨두고 사라져야겠지요?

 

 

 

 

 

 

 

― 소영이가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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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화는 유리 노르슈테인의 단편 애니메이션 「안개 속의 고슴도치」(1975 / 각본 - 코즐로프)를 토대로 쓴 것입니다. 애니메이션은 http://www.youtube.com/watch?v=oW0jvJC2rvM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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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 화요일부터 본격적으로 구덩이 오막살이의 꼬마 소영이 얘기를 쓰려고 합니다.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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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99 2015-03-03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딸기잼!!!
냠냠^^

최재혁 2023-11-11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둘이서 뭘 했을지 알것만 같은 묘묘하고 기기하고 현현하는

푸른괭이 2023-11-12 16:19   좋아요 0 | URL
10여년 전의 글에 댓글을 달아 주셔서 감동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