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다시 읽는 루쉰이 감동적이다. 돌이켜보니 고등학교 때 읽은 다음, 저 번역본으로 대학시절 왕창 다 읽었던 기억이 난다. 기왕지사 읽었던 <광인 일기>, <아Q정전>에 덧붙여 <<고사신편>>을 새로 접한 것이 큰 소득이었다.

 

 

 

 

 

 

 

 

 

 

 

 

 

 

 

러시아문학 전공자가 돼서 다시 읽는 중국 현대 소설의 거장은 우선 그 대륙적인(!) 스타일로 독자를 압도한다. 혁명의 시기(신해혁명~), 작가는 붓(펜)을 메스로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을 터.(러시아 작가들과 비슷하다!) 루쉰이 젊은 날 의학도였음은 이번에 처음 알았는데, 아무튼 소설 곳곳에 선혈이 낭자한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지면이 작아서(그 와중에 14매에서 12매로 줄었다..ㅠ.ㅠ) 여기다 쓴다...^^;;  이번에  읽은 번역본은 전형준 역, 창비에서 나온 것. 그는 나의 첫 소설집의 해설을 써주신 비평가 성민엽 선생이기도 하다.

 

 

 

 

 

 

 

 

 

 

 

 

 

 

폐병에 걸린 아들을 살리려고 살해된 죄수의 피를 적신 만두(‘인혈만두’)를 구해오는 부부(라오수안과 화 부인)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약」. '인혈만두', 이 무슨 섬뜩한 말인가! 사람의 생피를 적신 만두, 라니! 무슨 무협 영화도 아니고. 그럼에도 자식을 살리려는 부모의 심정이(정녕 지푸라기도 잡고 싶은) 십분 이해된다. 아무튼. 결국 죽고만 아들의 무덤을 찾은 화 부인은 길 하나를 사이에 둔, 옆의 무덤이 자기 아들이 먹은 ‘인혈’의 주인공, 즉 민중을 위해 투쟁하다가 바로 그 민중에 의해 살해된 비운의 혁명가의 것임을 알게 된다. 두 어머니의 조우는 곧 민중(우매함)과 지식인(나약함)이 만남, 나아가 화해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무덤 위로 날아오르는 까마귀(혁명가의 빙의처럼) 역시 그 나름으로 희망의 상징처럼 읽힌다.

 

[고향]도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나’는 거의 삼십년만에, 어린 시절, 해변의 수박 밭을 덮치는 오소리를 잡던 유년의 벗 룬투와 재회한다. 어머니가 룬투가 온다는 말을 하자 화자의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어린 룬투의 형상이 목가적이다. 나 역시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진다.

 

“그 순간, 나의 뇌리에 문득 한 폭의 신비스러운 그림이 떠올랐다. 쪽빛 하늘에 황금빛 둥근 달이 걸려 있고, 그 아래는 해변의 모래밭인데 온통 초록빛 수박이 끝없이 심어져 있다. 그 속에서 열한두 살 된 소년이 목에 은목걸이를 차고 손에 죄작살을 들고서 한 마리의 차(오소리~~~)를 힘껏 찌르는데, 차는 몸을 비틀어 그의 가랑이 사이로 도망친다.”(51)

 

 

그러나 막상 눈앞에 나타난 룬투는  바닷가 농부의 고생스러움을 고스란히 반영한 주름 가득하고 신산한 얼굴을 하고 있다. 더군다나, 그가 내뱉은 첫마디. “나으리!” 더 이상 너나들이를 할 수도 없는 것이다.(체호프 초기소설 <홀쭉이와 뚱뚱이>를 연상시킨다.) 해맑은 소년 대신 “많/은 자식들, 계속되는 흉년, 가혹한 세금, 군벌, 비적, 관리, 향신, 이 모든 것들” 때문에 “하나의 나무인형”(61)이 된 룬투. 그는 심지어 화자의 물건까지 일부 빼돌린다. 어쩌냐. 먹고 살아야 되는 것을. 작가는 묻는다. 이 뼈아픈 ‘격절’을 어찌할 것인가. 그리고 삼사십대의 야심찬 작가, 계몽가의 면모가 드러나는바, '희망'을 얘기한다.

 

“나는 희망한다. 그들은(수이성과 훙얼) 더 이상 나처럼, 사람들끼리 격절되지 않기를... 그러나 나는 또한, 그들이 한마음이 되려고 하다가 그 때문에 나처럼 괴롭고 떠도는 삶을 사는 것은 원하지 않고, 그들이 룬투처럼 괴롭고 마비된 삶을 사는 것도 원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처럼 괴롭고 방종한 삶을 사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마땅히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가 아직 살아보지 못한 삶을.”(63)

/ “희망은 본래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지상의 길과 같다. 사실은, 원래 지상에는 길이 없었는데, 걸어 다니는 사람이 많아지자 길이 된 것이다.”(64)

 

 

 「복을 비는 제사」에서는 수더분하고 성실하고 솜씨 좋은 일꾼이었던 샹린 댁이 영락한 사연이 나온다. 두 번에 걸친 강제 결혼, 강간도 당하고, 지옥 같은 노동에 시달리고 등등. 모든 것은 다 참아도 ‘아차’ 실수로 어린 아들을 잃어버리고는 그녀도 무너진다. 폭삭 늙어버린데다가 일도 잘 못하고 거의 반편이처럼 돼서 온갖 사람을 붙잡고 아이를 잃어버린 사연을 얘기한다. 모든 어미는 자식 앞에서 죄인이다. (낳은 것 자체가 죄다..ㅠ.ㅠ)

 

“저는 정말 바보였어요, 정말.” 그녀는 말했다. “눈 오는 날에만 짐승들이 깊은 산에 먹을 게 없으니까 마을로 내려오는 줄 알았죠. 봄에도 그럴 줄은 몰랐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문을 열고, 소쿠리에 콩을 담아서 우리 아마오에게 문턱에 앉아 콩을 까게 했지요. 그 애는 말을 아주 잘 듣는 아이라서, 제 말이라면 뭐든지 다 들었어요. (애 소리가 안 들리고.. 가시덤불에 신 발 한 짝.....) 다들 말했죠, 끝났군, 이리를 만났나봐, 더 들어갔더니 과연, 그 애가 풀섶에 쓰러져 있는 거예요, 뱃속의 창자를 벌써 다 먹혀버렸는데, 불쌍하게도 그 애는 손에 그 소쿠리를 꼭 잡고 있었어요...”(146-7)

 

 

처음엔 동정을 갖고 들어주던 사람들도 나중에는 귀찮아하거나 지루해하거나, 심지어 그녀를 놀리기도 한다. 어쩔 수 없이, 동정 없는 세상! ^^;;) 아무튼 그런 그녀가 “배운 사람”이고 “대처 사람”인 ‘나’를 향해 묻는다. “사람이 죽은 뒤에, 도대체 영혼이 있는 건가요?”(133)  “그러면, 지옥도 있나요?”  “그러면, 죽은 식구들은 다 만날 수 있나요?” 그녀의 인생사를 생각해 보면 이 질문(들)에는 공포과 기대가 같이 들어가 있는 것 같다. 즉, 사후 세계가 있다면, 남편도 보게 되는데, 남편이 둘이나 되니, 옥황상제가 샹린 댁의 몸을 반토막 내서 두 남자에 줄 거라는 공포(누가 이렇게 놀렸다..ㅠ.ㅠ). 그 다음, 죽은 다음 죽은 아들을 만나고 싶은 열망. 옛날에도 오랫동안 여운을 남겼던 소설인데, 애 낳고 읽으니 더 그렇다. 

 

대표작인 <아Q정전>에서 아Q가 심문 끝에 서명을 해야 하는 장면은, 얼마나 인상적이었으면, 이 소설을 처음 읽던 고교 시절로 나를 되돌려 놓는다. 맞다, 이런 장면이 나오는 소설이었지!

 

그러자 장삼을 입은 사람 하나가 종이 한 장과 붓 한 자루를 아Q 앞에다 가져다 놓고 붓을 그의 손에 쥐여주려고 했다. 그 순간 아Q는 몹시 놀라서 거의 ‘혼비백산’할 지경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손이 붓을 잡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어떻게 잡아야 할지를 몰라 하고 있는데 그 사람은 오히려 한군데를 가리키며 그에게 서명을 하라고 했다.

“저는... 저는... 글자를 모르는데요...” 아Q는 덥석 붓을 움켜잡고서 황공해하면서 부끄러운 듯이 말했다.

“그러면, 너 좋을 대로, 동그라미나 하나 그려라!”

아Q는 동그라미를 그리려 했지만 붓을 잡은 손이 떨리기만 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종이를 바닥에 펴주었고, 아Q는 엎드려서 평생의 힘을 다 쏟아 동그라미를 그렸다.(124)

 

그리하여 있는 힘을 다해 하나 그렸지만, 호박씨 모양으로 찌그러지고 말았다. 그러다가 다시 감방 안으로 들어간 아Q. “이 세상에 살다 보면 원래 끌려들어가고 끌려나오고 하는 때도 있는 법이고 또 종이 위에 동그라미를 그려야 할 때도 있는 법일 터인데 다만 동그라미를 동그렇게 그리지 못한 것만은 그의 ‘행장’에서 하나의 오점으로 남는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곧 개운해졌다.”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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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은 도..키를 비롯, 러시아문학에 조예가 깊었는데(당연하다!) 그의 데뷔작 <광인 일기>는 고골의 <광인 일기>를 염두에 두고 쓴 것이다. 말년의 루쉰이, 역시나 고골이 말년에 쓴 <죽은 혼>을 번역했음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고골은 이 소설을 쓰지 말았어야 했다!!! 이거 쓰다가 자기도 죽고, 번역하던 루쉰도 힘들었을 것이다 -_-;;  이런 운명의 소설-책이 있는 거다...!

 

마지막. <고사신편>에 수록된 <관문 밖으로>. 늙은 노자(스승)와 젊은 공자(제자)의 만남을 루쉰이 새로 쓴 소설이다. '고사신편' 자체가 옛날 얘기를 자기가 새로 쓴 것으로, 아쿠다가와 류노스케의 일부 소설들과 비슷하다. 아무튼, 간만에 접하는 동양적(!) 아포리즘이 웅숭깊다.

 

공자(공구)의 첫 방문에  노자가 하는 말: 성(性)은 고칠 수 없고, 명(命)은 바꿀 수 없고, 시(時)는 멈출 수 없고, 도(道)는 막을 수 없어. 도를 얻기만 하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지만, 만약 잃어버린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지.”(217)

석달 뒤. 두번째 방문 뒤 노자의 말: “우리는 여전히 도가 다르다. 설사 같은 한 켤레의 신발이라 할지라도, 내 것은 사막으로 가는 것이고 그자의 것은 조정으로 오는 것이다.”(220)

 

여기서 “조정”(정치)의 길을 가는 공자와 “사막”(은둔)의 길을 가는 노자 모두 루쉰의 분신처럼 읽힌다. 혁명의 시대를 산 지식인 작가의 두 모습.(얼핏, 도..키와 체호프가 동시에 떠오른다.)

 

끝으로. 루쉰은 잡문을 엄청 많이 쓴(사실 소설은 다 해야 중편1편, 단편 32편이다) 작가인데, 그의 산문시 한 구절을 되새겨본다.

 

“절망은 허망하다. 희망이 그러하듯이.”(<들풀[野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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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긍정과 생성과 기쁨의 철학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물론 철학자 니체가 쓴 철학책이다. 하지만 동시에 몹시 독특한 정신의 소유자였던 한 천재 작가가 우리에게 남겨준 가장 아름다운 문학책이기도 하다. 실제로 기존의 엄정한 철학서와는 달리 모종의 문학적 설정도 있다. 서른 살에 고향을 떠나 산을 들어간 차라투스트라는 10년간 고독 속에서 정진을 거듭한 끝에 드디어 아침의 태양을 맞으며 세상에 나온다. 이후 그는 적잖은 시련을 겪는 와중에도 도시와 산속을 오가며 자신의 ‘말’을 설파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대들에게 초인(超人)을 가르치려 하노라.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이렇게 그는 운을 뗀다. ‘초인’(위버멘쉬: Übermensch)이란 대체 무엇인가.

 

 

인간은 짐승과 초인 사이에 놓인 밧줄이다. 심연 위에 걸쳐진 밧줄이다. (중략) /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다리[橋]일 뿐 목적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인간이 사랑스러울 수 있는 것은 그가 건너가는 존재이며 몰락하는 존재라는 데 있다. / 나는 사랑한다. 몰락하는 자로서 살 뿐 그 밖의 삶은 모르는 자를. 왜냐하면 그는 건너가는 자이기 때문이다.(「차라투스트라의 머리말」, 19)

 

 

건너감과 몰락의 의미는 또한 무엇인가. <차라투스트라>를 여는 아포리즘은 “어떻게 하여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는 사자가 되며, 사자는 마침내 아이가 되는가”를 다룬다. 낙타는 끊임없이 무거운 짐을 요구하는 인내의 정신으로서 그 짐을 지고 사막을 달린다. 저 고독한 사막에서 정신의 두 번째 변화가 일어난다. 이제 정신은 사자가 된다. 당위와 의무(‘너는 해야 한다’)에 맞서 사자는 의지와 자유(‘나는 원한다’)를 주장한다. 그 순간 정신은 또 한 번의 변화를 앞에 두고 있다. 

 

그러나 말하라, 형제들이여, 사자도 하지 못한 일을 어떻게 아이가 할 수 있단 말인가? 강탈하는 사자가 이제는 왜 아이가 되어야만 하는가? / 아이는 순진무구함이며 망각이고, 새로운 출발, 놀이,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최초의 움직임이며, 성스러운 긍정이 아닌가. / 그렇다. 창조라는 유희를 위해서는, 형제들이여, 성스러운 긍정이 필요하다. 이제 정신은 자신의 의지를 원하고 세계를 상실한 자는 이제 자신의 세계를 되찾는다.(「세 가지 변화에 대하여」, 38)

 

 

이 책에 만연한 여러 비유 중 아이는 인간의 정신이 도달해야 할 최고의 단계를 상징한다. 아이는 끊임없이 ‘건너가고’ ‘몰락하고’ 그로써 끊임없는 긍정과 창조를 실천한다. 아이는 ‘(과거에) 그러했다’라는 원한(르상티망: Ressentiment)을 모른다. 2부의 한 아포리즘은 바로 그런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했다. 이것이 분노하며 이를 부드득거리는 의지와 고독하기 그지없는 슬픔의 이름이다. 이미 이루어진 일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한 의지는 모든 과거의 일에 대해 악의적인 방관자일 뿐이다. / 의지는 과거로 되돌아가 의욕할 수가 없다. 의지가 시간을 부수지 못하고 시간의 욕망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 이것이 의지의 가장 외로운 슬픔이다. / (중략) / 시간이 거꾸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의지의 원한이다. 과거에 있었던 것. 이것이 의지가 굴리지 못하는 돌의 이름이다. / 그리하여 원한과 불만에 찬 의지는 돌을 굴리고 자신과 같이 원한과 불만을 느끼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 복수를 한다.”(「구제에 대하여」, 248-249)

 

 

이 맥락에서 보자면 니체의 저 유명한 영원회귀 사상은 결코 얄팍한 니힐리즘이 아니다. 동일한 것의 끊임없는 반복과 권태를 말함도 아니며 단 한 번뿐인 삶이나 존재의 비극을 말함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무수히 쌓아졌다가 무수히 허물어지되 그러면서도 설움과 분함을 모르는 아이의 모래성 같은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를 에워싼 동물들의 말대로, 춤이며 웃음이며 영원한 시작이며 영원한 움직임이다.

 

 

우리처럼 생각하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모든 사물 자체가 춤춘다. 만물은 다가와서 손을 내밀고 웃다가는 달아난다. 그리고 다시 되돌아온다. / 모든 것은 가고,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굴러간다. 모든 것은 죽고, 모든 것은 다시 꽃피어난다. 존재의 세월은 영원히 흘러간다. / 모든 것은 꺾이고, 모든 것은 새로이 이어진다. 존재의 동일한 집이 영원히 세워진다. 모든 것은 헤어지고, 모든 것은 다시 인사를 나눈다. 존재의 둥근 고리는 영원히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다. / 모든 순간에 존재는 시작한다. 모든 ‘여기’를 중심으로 ‘저기’라는 공[球]이 회전한다. 중심은 어디에나 있다. 영원의 오솔길은 굽어 있다.(「치유되고 있는 자」, 383)

 

 

만일 신들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내가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참고 견딜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신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행복의 섬에서」, 148-149) 그리하여 당당히 신을 죽여 버리고 독수리와 뱀을 거느린 채 악동처럼 웃는 자. “선과 악이라고 불리는 낡아빠진 망상이 있다.”(「낡은 서판(書板)과 새로운 서판에 대하여」, 357) 그 망상을 뒤엎고 ‘선악의 저편’을 꿈꾼, 아침놀과 한낮의 태양을 사랑한 자. 그는 부정과 어둠과 비극에 맞서 끊임없이 긍정과 생성과 기쁨을 역설했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그에게는 신의 존재, 선악의 무게, 정신과 육체의 이분법 등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무거웠던 것이 아닐까. 그 무게를 거부하며 자유를 쟁취한 후 ‘아이’의 정신으로 영원히 회귀하기 위해 포효했던 ‘사자’는 곧 니체가 아니었을까.

 

(네이버 캐스트)

 

 

 

 

 

 

 

 

 

 

 

 

 

 

 

- 작년말에 정간한 <책앤>에 다시 글을 연재하기로 한 참에 오래 전에 쓴 글을 하나 올려본다.

 

- 근황. 날은 포근해졌지만 최근 아이의 경련이 잦아지고 정도가 심해져 다소 우울하다.

(각종 과거에 대한) '원한'을 갖지 않기 힘들다. 자책도 도움이 안 된다, 당연히. 오랜만에 루쉰의 소설들, 특히 [아Q정전]을 다시 읽고 감동했는데, 아Q처럼, 사람이 태어나서 살다 보면 뭐 이런 일도 있나 보다, 라고 생각하려고 노력 중이다. 어쨌거나 말도 하고 걷기도 하지 않느냔 말이다. 이제는 혼자서 레고도 쌓는다.

 

 

 

 

 

아이를 밖으로 내보내면 다시 집을 탈환하게 될 줄 알았는데, 웬걸, 아이 없는 집에 혼자 있는 것이 너무 생경해, 아침 일찍 아이와 함께 도망친다. 그런 다음엔? 잠시 도망 놀이를 하다가 다시 제자리. 그래도 (아Q처럼! 아이들처럼!) 재빨리 망각하고 다시 놀아보자.

 

니체의 이 책에서 출발하는 소설.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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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CE 2014-07-16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이는 순진무구함이며 망각이고, 새로운 출발, 놀이,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최초의 움직임이며, 성스러운 긍정이 아닌가 . 아이가 너무 예쁘네요 ^ ^ 특히 정말 예쁜 눈을 가졌어요 .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관한 짧은 글의 마감을 잠시 미뤄둔 채 막간의 여유를 부려본다.  

 

 

 

 

 

 

 

 

 

 

 

 

 

 

이런 저런 놀라운 소설들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소설가'라기 보다는 교수이자 학자로 여겨진다. 그에게 있어 소설은 (물론 너무 잘 썼음에도!) 아무래도 호작질(^^;;)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건 또한 그가 본업(연구와 교육, 집필 활동 ^^;)에 너무 충실한 탓이기도 할 터. 암튼, 에코의 정수는 이후의 걸작들에도 불구하고 <장미의 이름>에 제일 잘 표현된 것 같다.

 

 

 

 

 

 

 

 

 

 

 

 

 

상아탑이 도저히 감당하지 못한 '-끼'. '중세'라는 '암흑'의 시대를 깊이 연구한 학자(학위논문 주제는, 이름 조차 고루한 토마스 아퀴나스^^;;)임에도 '속세'(=대중)의 쾌락을 마다하지 않았을 법하다. 그것을 사진 속 유쾌한 에코의 얼굴, 동영상 속 분주하고 말 많고 두툼, 뚱뚱한 아저씨의 모습이 잘 보여준다...ㅋ 어쩌면 그렇기에 이 소설은 (에코가 <장미의 이름 작가노트>에서 밝히듯) 보르헤스에 대한 오마주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마지막 - 한밤중>. 고된 노력 끝에 우연찮게(!) 암호를 해독한 윌리엄과 아드소는 부리나케 장서관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암호 Q-R을 눌러 거울-문을 연다.(키가 커야만 누를 수 있는 위치! ㅠ.ㅠ 키 작은 수도원장은 설령 여기까지 온다 할 지라도 절대 누를 수가 없다..ㅠ.ㅠ) 문 너머, 드디어 정체를 드러낸, 지적 갈망에 넘친 똑똑한 수도사들의 목숨을 앗아간 책이 보관된 밀실 <아프리카의 끝>. 희미한 등잔불, 가득 쌓인 책들, 그 속에 책상, 그 앞에 앉아 있는 장님 노수도사, 부르고스 사람 호르헤. 너무 말라, 그의 손은 숫제 투명해보인다. 윌리엄(-아드소)와 호르헤의 이 마지막 배틀(!)은 정녕 명장면이다.  

 

“... 내가 보고 싶은 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 세상이 소실되었다고 믿거나 아예 쓰이지도 않았다고 믿는 책... 어쩌면 이 세상에서 한 권밖에 남자 않았을지도 모르는 당신의 소장품, 바로 그겁니다.”(829)

 

 호르헤는 “40년 동안 시력 대신 기억력/에 의존해 책을 되새겨 온 사람다운 놀라운 기억력”(830/31)을 뽐내며 책의 내용을 줄줄 읊고 예의 그 시니컬한(^^;;) 평도 곁들인다. 아리스-스의 책에 관한 한, 에코가 직접 몇 자 써주었다.

 

“1부에서 우리는 비극을 다루면서......이 희극이 어리석은 자들을 즐겁게 함으로써 비극과 같은 작용을 하는 과정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우리가 영혼에 관한 책에서 이미 말했듯이 인간은 하고많은 동물 가운데서도 웃을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이다.”(831)

 

호르헤의 웃음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의 특정 본성, 그러니까 인간 자체에 대한 두려움에서 기인하는 것일 터. 암튼,그는 그 자신에게 너무 잘 어울리는 최후를 맞는다.  세베리노의 시약실에 훔친 독약을 발라놓은 책을 먹기 시작하는 것.

 

“(묵시록의 7번째 나팔)... 내가 곧 무덤이 될 터이다. 그 비밀을 나는 나의 무덤에 봉인하리라!”(853)

 

이로써 자신을  지식의 일곱번째 제물로 바친다. (앞선 제물 중 제일 보고 싶은 것은, 소설 속에 실제로 등장하지는 않는 미남 수도사 아델모이다. 그는 문제의 책을 손에 넣기 위해 베렝가리오에게 속된 말로 몸을 판다. 동성애가 얼마나 공공연히 이루어졌는지 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어, 그의 반응.

 

그는 웃었다, 그가, 호르헤가, 그가 웃는 것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는 목구멍으로 웃었다. 입술은 웃는 꼴을 하지 못했다. 아니, 웃는 것이 아니라 우는 것 같았다.”(853)

 

그뿐이냐. 노인은 손으로 등잔을 손으로 꺼버리고, 급기야, 제 손으로 장서관에 불을 질러버린다. 불을 진압하다가 지친 윌리엄은 숫제 울음을 터뜨린다. 암튼. 윌리엄은 호르헤에게 하는 말은 여전히 뇌쇄적이다. 

 

이 영감아, 악마는 바로 당신이야!” “... 악마라고 하는 것은 영혼의 교만, 미소를 모르는 신앙, 의혹의 여지가 없다고 믿는 진리... 이런 게 바로 악마야! (...) 봐라, 이 영감은 악마답게 이렇게 어둠 속에 살고 있지 않아! /(....) 널 웃음거리로 만들고 싶다.”(848/49) : “하느님의 손은 창조하지, 감추지는 않는다.”(851)

 

“(호르헤가 가짜 그리스도이다.) 호르헤 영감의 얼굴 말이다. 철학에 대한 증오로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서 나는 처음으로 가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았다. (...) 가짜 그리스도는 지나친 믿음에서 나올 수도 있고, 하느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사랑에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 그리고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여라.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다. (...) 호르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책을 두려워한 것은, 이 책이 능히 모든 진리의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방법을 가르침으로써 우리를 망령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해줄 수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871)

 

 

대학 시절, 추석이었나, 설이었나, 암튼, 부산 내려가는 통일호에서 처음 읽었던 책. 한 6시간은 족히 가는, 등받이가 젖혀지지 않아 잠도 자기 힘들었던(등받이가 젖혀지는 무궁화호는 사치였다!) 기차였다. 책 읽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아무려나, 너무 재미었었던 책. 오죽 하면 이 책을 읽지도 않은 동생이 (내가 떠들었던 내용 때문에-_-;;) 기억할 정도. 다시 읽어도 전율스럽다. 이 참에 훑어본 책. 이런 것도 써주시고, 님은 정말, 르네상스-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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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처형사이, 지루한 소송같은 삶: “개 같군!”

카프카(1883-1924), <소송>(1925)

 

 

 

카프카가 서른을 막 넘기고 쓴 미완의 장편 <소송>의 첫 문장이 유명하다. 누군가 요제프 K를 중상모략한 것이 틀림없다. 그가 무슨 특별한 나쁜 짓을 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어느 날 아침 느닷없이 체포되었기 때문이다.”(9) 피고인의 아침이나 훔쳐 먹는 한심한 감시인들(프란츠와 빌렘)K의 물음에 답을 주기는커녕 말단 직원의 설움만 늘어놓는다. 말이 좀 통할 것 같은 감독관도 마찬가지이다. 어떻든 체포됐음에도 은행의 자금담당 부장으로서 K의 일상생활은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 열흘쯤 뒤 일요일, K는 심리위원회에 참석, 예심판사를 향해 호통을 친 다음 법정을 나온다. 이어, 재차 법원 방문, 법원의 정리(廷吏)와 그의 아내와 그녀의 정부(법학도) 목격, 은행 사무실 근처 창고에서 매질을 당하는 두 감시인, “시골에서 온 유령”(112)K의 숙부(카를-알베르트)의 호들갑, 와병 중인 변호사(홀트 박사) 방문, 그의 애인인 레니와의 접촉, 은행의 고객(제조업자)이 소개해준 법원 소속의 초상화가(티토렐리) 방문, 변호사와 그의 고객인 상인 블로크의 관계 등 일련의 에피소드가 파편처럼 제시된다.

 

 

 

 

 

 

 

 

 

 

 

 

 

 

 

 

그러나 새 인물의 거듭된 등장도 사건의 큰 흐름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각각의 만남과 대화는 순서를 바꿔도 될 만큼 우연의 논리에 지배된다. 곳곳에 포진한 여자들과 K의 관계는 외설적이긴 하지만 관능적이지는 않고, 때문에 정서적 감흥보다는 미학적 당혹감을 불러일으킨다. 한마디로, <소송>은 동일한 것의 반복과 좀처럼 눈에 뜨이지 않는 섬세한 변주를 보여주는 티토렐리의 음산한풍경화 세 점(‘황야의 풍경’)을 닮았다. 하숙집 여주인(그루바흐 부인)의 말처럼 무언가 학문적인 것”(32), 일상이 된 체포-소송에 관한 학적 연구 같은 소설, 그리고 모든 점에서 평범의 화신인 K의 삶 깊숙이 침투한 이 권력-법의 테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소송>의 아홉 번째 장(대성당에서)에서 신부는 K에게 기만에 관한 성담’(聖譚)(법 앞에서)을 들려준다. 한 시골 사람이 법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문지기에게 저지당한다. 그럼에도 계속 기다리다가 마침내 임종을 앞둔 시점, 지금껏 아무도 법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이 없음을 알아채고서 이유를 묻는다. 문지기는 이 문은 오직 그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누가 누구를 기만한 것인가. 문지기야말로 기만당한 것이 아닐까. 그는 법의 내부를 지키는 문지기들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고, 법의 문을 지켜야 하는 직무 때문에 자기 자리에서 한 발도 벗어나지 못한다. 이쯤 되면 자기기만에 빠진 자발적인 노예가 아닌가. 한편, K는 얼핏 시골 사람에 가까워 보이지만 단 하루도 업무 영역 밖으로 밀려나지 않고자애쓰고 한번 밀려나면 다시 돌아오게 해주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249)에 떤다는 점에서 문지기의 삶을 사는 것도 같다. 혹은, 법의 문 안으로 들어섰고(, 체포됐고) 그 내부의 공허함과 비루함(허름한 주택가의 건물 안에 위치한, 각종 세간이 들어찬 방과 같은 법정!)을 봐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많은 가정과 물음은, 그러나, 소설의 길고 두툼한 몸통(‘소송’)을 무자비하게 절단하는 마지막 장(‘처형’) 앞에서 무한히 유예된다.

 

 

 

 

 

 

 

 

 

 

 

 

 

 

 

 

카프카가 친구들 앞에서 <소송>의 첫 장을 낭독했을 때 모두 즐거워했다고 한다. 익살스러운 농담 같은 첫 장(체포)은 그러나, 1년의 시간차(서른 번째 생일날 아침 8, 서른한 번째 생일날 저녁 9)를 보여주는 마지막 장(종말)과 그 정조에 있어 현격한 대조를 이룬다. 두 명의 희극배우 대신 프록코트와 실크해트 차림의 늙은 조연배우두 명이 등장한다. 저항해본들 아무 의미가 없음을 깨달은 K는 순순히 처형장으로 향한다. 하지만 도시 외곽의 황량한 채석장, 조끼는 물론 셔츠까지 벗겨져 땅바닥에 눕혀졌고 양날이 선 길고 얇은 정육점 칼이 달빛을 받아 번득이는 상황임에도 그가 아직 이르지 못한 상급 법원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287)하는 물음을 던져본다. 이 부질없는 희망을 조롱하듯, 한 남자가 그의 목을 양손으로 거머쥠과 동시에 다른 남자가 그의 심장에 칼을 찔러 넣고 두 번을 돌린다. “개 같군!” K의 말에 그가 죽은 후에도 치욕은 살아남을 것 같았다.”(287)라는 문장이 덧붙여진다. 두 번째로 법정을 찾았던 K가 건물을 빠져나오며 경험한 환각과 구토를 환기시키는 이 당혹스러운, ‘개 같은농담은 대체 무엇인가. 정녕 카프카는 농담의 검은 밑바닥까지 내려가기를”(쿤데라, <커튼>) 원했을 법하다. 눅눅한 농담(희극)과 찝찝한 진담(비극), 체포처형’, 그 사이에 위치한 소송은 물론, 부조리한 인간 실존의 은유이다. 덧붙여 존재와 존재함 자체가 죄이다. 도대체 인간이라는 사실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264)라는 K의 절규가 그래서 더 절절하다.

 

한때 심판이라는 제목으로 읽었던 소설을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K의 상황을 좀 더 잘 반영한 것 같은 소송이란 제목으로 다시 읽는 기분이 새롭다. 많은 이들이 카프카와 <소송>에 대해 말했지만, 말은 앞으로도 끊이지 않을 것이다. 카프카의 소설 앞에서 우리는 항상 새로운 절망에 빠지지만, 신부의 말처럼 글은 불변하는 것이고, 해석들은 종종 글에 대한 절망의 표현인 경우가 많”(273)기 때문이다.

 

-- <책앤>

 

-- 쿤데라에 대한 글을 쓰던 중 한숨 돌리는 참에 그가 대놓고 숭배했던 카프카에 관한 글을 올려본다. 그들을 읽던 시절이 있었다. 90년대. 

겸사겸사 오래된 컴퓨터 속에 잠자코 버티고 있던, 젊은(어린?) 날 썼던 콩트 하나도 꺼내본다.(소설가 이인성의 홈페이지에 실었던 것도 같다.) 맞춤법을 손본 걸 빼면  문장을 전혀 고치지 않았다. 이십대중반, 내가 무슨 생각을 했던가, 무엇을 쓰고자 했던가, 반추해본다. 거칠고 도발적인 문장들(의도된 반복이 무척 불편한데, 그 불편함이 희극성을 낳는 것 같다!), 절망적인(혹은 절망을 가장한) 세계관, 환상적이고 알레고리적인 분위기 등이 눈에 들어온다. 요컨대, 사람 참 변하지 않는다.

다시 쿤데라. 처음부터 끝까지 쭉 일별. <농담>에서 <향수>까지. 많은 변주가 있긴 하지만 역시 사람 참 안 변한다. 시간이 변화를 강요하는 탓에 차라리 '안 변함'이 위안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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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진 원고의 자리는 좁은데 메모가 넘쳐나서 여기다 다시 좀 갖다 놓는다. 메모가 넘치는 건 시간이 넘치기 때문인데, 시간이 넘치는 건 또, 다른 일(그러니까 번역-_-;;)을 너무 하기 싫기 때문이다. 대체로 요즘 나는 글을 실을 지면과 책을 내줄 출판사를 필요로 하는데, 그쪽에서는 내 글과 원고가 필요없다는 것이 문제이다...ㅠ.ㅠ 그뿐이냐. 나는 어디든 '자리'가 필요한데, 그쪽에서는 나한테 줄 '자리'가 또 없는 것이다..ㅠ.ㅠ 이건 되게 웃긴 정황인데, 가만 생각하면 울쩍해지고, 생각을 멈추면 다시 좀 웃을 수 있다. 암튼.

 

 

 

 

 

 

 

 

 

 

 

 

 

 

 

우선 책 얘기다. 아무래도 보르헤스는 '책'의 작가이고, '바벨의 도서관'은 그 상징이다. 소설로는 정말 마음에 안 들고 재미도 없지만(재미는 <피에르 메나르...>, <두 갈래... 정원> 쪽) 워낙에 교과서라. 도서관 사서(나중에는 관장)로 살았던 이력이 이런 글도 만들어낸다.

 

 “다른 사람들이 도서관이라고 부르는 우주는 육각형 진열실들로 이루어진 부정수, 아니, 아마도 무한수로 구성되어 있다.”(97)

당연한 소리이지만, 그런 억제할 수 없는 희망 후에는 엄청난 절망이 뒤따랐다. 어떤 육각형 진열실의 어떤 책장에는 틀림없이 귀중한 책들이 존재하지만 그 누구도 그것들에 접근할 수 없다는 확신감은 거의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104)

만일 제가 영광과 지혜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그 책을 읽어 볼 수 없다면, 다른 사람들에게라도 그런 기회를 허락해 주소서.”(106)

 

좀 더 잘 쓴 건 사실 <모래의 책>인 것 같다. (<셰익스피어의 기억>에 수록.) 제목 자체가 이미 많은 얘기를 해주지 않는가.  첫 문장은 이렇다.

 

선은 무한한 점들로 이루어져 있다. 면은 무한한 선들로 이루어져 있다. 부피는 무한한 면들로 이루어져 있다. 4차원적 부피는 무한한 부피들로 이루어져 있다. 아니 의심할 바 없이 이러한 방식은 <보다 기하학적인> 나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최고의 방법이 아니다. 요즘의 모든 허구적 이야기들은 유행처럼 그것이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나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사실이다.”(132)

 

그리고, 성경을 파는 낯선 남자가 나를 방문한다.  근데 왜 음울한 얼굴이냐. 그가 내놓은 책은 인도,  어느 평원에 있는 마을, 카스트 제도의 최하층 사람한테서 구한 책이다. 이른바 <모래의 책>. 뫼비우스의 띠를 연상시키는 측면이 있다.

 

 

왜냐하면 책도 모래도 처음과 끝이 없기 때문이라나요.”(135)

 “... 마치 책 속에서 페이지들이 점점 불어나는 것 같다고나 해야 할까.”(135)

만일 공간이 무한하다면 우리는 공간의 모든 곳에 있다고 할 수 있지요. 만일 시간이 무한하다면 우리는 모든 시간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는 거지요.”(136)

 

일종의 물물교환처럼((위클리프 성경 vs. 모래의 책>) 손에  넣은 책이 결국 처치 곤란이 된다. 나는 마침내 그것이 악몽의 물체, 현실을 손상시키고 썩게 만드는 물건이라는 느낌에 이르게 되었다.”(139) 어쩔까 하다가 도서관에 갖다둔다. “나는 축축한 서가 속에서 <모래의 책>을 잃어버리기 위해 사서들이 한눈을 팔고 있는 틈을 이용했다. 나는 출입구로부터 어느 높이, 어느 정도의 거리에 그 책을 두었는지 기억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139)

 

 

 

 

 

 

 

 

 

 

 

 

 

 

 

 

 

'책의 작가'도 물론, 자기 인생에 대해, 개인사에 대해 대놓고 얘기할 때가 있다. 치명적인 사건을 겪었을 때는. 우선 일종의 '급성'은 마흔 즈음, 크리스마스 이브에 당한 사고와 그로 인한 패혈증이다. 그것에 대해 그는 <남부>라는 소설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마치 여덟 세기와도 같은 여드레가 지나갔다. (...) 그러나 병원에 도착하자 그의 옷은 벗겨졌고 그의 머리는 죄다 깎였으며, 간이침대에 눕혀져 쇠사슬로 묶였다. 그러더니 그들은 눈이 부시고 어지러울 정도로 강한 빛을 쪼이더니, 청진기로 진찰을 했고, 마스크를 한 누군가가 그의 팔에 주삿바늘을 꽂았다. 붕대에 감긴 채 구역질을 느끼며, 그는 우물 바닥 같은 병실에서 깨어났다. 수술 이후 몇 번이나 밤과 낮을 보낸 뒤, 그는 그때까지 자기가 지옥 언저리를 헤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입에 얼음을 넣어도 조금도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 기간 동안 달만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증오했다. 자기의 정체성을 증오했고, 얼굴에 바늘처럼 서 있는 수염도 증오했다. 그는 몹시 괴로운 치료를 꿋꿋하게 견뎌 냈다. 그러나 의사가 패혈증으로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는 말을 하자, (...)”(219)

 

 

급성보다 더 무서운 건 물론, 만성이다. 바로, 실명. 보르헤스와 실명은 유명한 테마이지만, 최근에 내가 안질환으로 약간의(-_-;;) 고생을 하다 보니, 정녕 이것도 농담이 아니다 싶다. 암튼. 그에 대해 보르헤스는 이렇게 쓴다. 

 

점차로 아름다운 세계가 그로부터 떠나기 시작했다. 걷히지 않는 안개가 그의 손금들을 지워버렸다. 밤은 자신의 수많은 별들을 잃어버렸다. 대지는 그의 발 아래에서 불분명해지기 시작했다. 모든 것들이 멀어지고 혼란스러워졌다. 그는 자신이 점차로 장님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소리쳐 울었다.”(10)(<작가>. <<칼잡이들의 이야기>>)

 

 

곁다리. 유다에 관한 보르헤스의 얘기도 재밌다. 학기 말에 반쯤은 수업 준비차 파졸리니 감독의 <마태복음>을 봤다. 예수보다(혹은 못지않게) 흥미로운 인물이 유다였는데, 보르헤스는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사도들 중에서 유일하게 유다는 비밀스러운 신성과 예수의 가공할 만한 목적을 깨달았다.”(199) / “닐스 루네베리는 과장되고 심지어는 무한한 금욕주의 때문이라는 완전히 상반되는 동기를 제안한다. 하느님의 크신 영광을 위해 금욕주의자는 육체를 비하하고 고행한다. 유다는 영혼을 비하하며 고행했다.”(200)(유다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

 

 

마지막.

보르헤스는 전형적인 엘리트 작가이다. 그가 라틴아메리카(아르헨티나) 작가라는 것이 오히려 놀라울 수 있는데(실은 스페인 정복자 가문의 후예니까 또 얘기가 다르다), 암튼, 지식인의 현실 망각에 대해 내놓은 답이 멋지다. 이 정도는 되어야 니가 작가다...! 모두가 다 참여작가일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나는 상아탑 속에 갇혀 다른 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 또한 현실을 변화시키는 하나의 방법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나는 당신이 말한 대로 상아탑 속에 있기 때문에 어떤 시 한 편을 떠올리고 있고, 어떤 책 한 권을 구상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어떤 것만큼이나 현실적인 겁니다. 나는, <현실은 일상적인 것이고 그것이 아닌 다른 것은 비현실적>이라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은 오류라고 생각합니다.”(141)

  

비슷한 맥락인데, 저번에 잠깐 소개한 단편  1983825」은 일종의 자살 예언서(?) 같은 것이었다. 문제는, 그렇게 자살할 거다, 라고 해놓고서 죽지 않았다는 것...-_-;; 왜 자살을 안 했냐고 묻자, 보르헤스의 답인즉:: 겁이 나서”.(156)  이 역시 지식인의 (대놓고! 당당히! 떳떳히!) 나약함을 보여주는 대목이 아닌가 싶다.  요컨대, '보다 체념적이고, 보다 문화적이고, 보다 지적인 행위'... 

 

 

 “이따금 나는 좋은 독자들은 좋은 저자들보다 더욱더 난삽하고, 독특한 존재들이라고 생각한다. (...) 따라서 읽기는 쓰기 후에 일어나는 행위이다. 보다 체념적이고, 보다 문화적이고, 보다 지적인 행위.”(13)

(<불한당들의 세계사> 1판의 서문」)

 

 

7월, 보르헤스를 읽으면서 내가 그를 많이 좋아했음(-좋아함)을 깨닫는다. 아무리 다른 일이 하기 싫어도, 읽기 싫은 책을 이렇게 오래 들고 있을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젊었을 때 사진은 꽤 미남이던데, 우리가 사랑하는 보르헤스의 얼굴은 아무래도 이런 얼굴. 나이가 좀 들어야 (다른 일을 할 힘이 없어서-_-;;) 책도 더 많이, 더 잘 읽을 수 있는 것 같으니...-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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