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이커>에 열광하고 있는, 예나 지금이나 진정한 만화광인 남편에게 아이를 맡겨두고 나와 있다. 시간이 철철 남아돌 때와는 달리(그래서 어떨 때는 12시간씩 자기도 했다!), (당장 밥벌이와 상관이 없는!) 뭘 읽고 뭘 쓰는 시간이 너무 소중하다.  암튼 진즉에 읽었어야 마땅한 이 책을 어쩌다 보니 이제야 읽는다. 대체로 예술에 문외한이고, 발레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3년 동안 러시아, 그것도 모스크바에 살면서 <볼쇼이> 한 번 안 갔다면, 뭐..-_-;;

 

 

 

 

 

 

 

 

 

이 책은 10년은 자라고 10년은 배우고 10년은 춤추고 나머지 30년은 암흑 속에 살다 간, 그렇다고 정리되는 천재 무용수가 말하자면 정신줄을 완전히 놓기 직전 6주에 걸쳐 남긴 일기인데, 그 도입부부터가  압도적이다.

 

점심 식사는 아주 좋았다. 살짝 익힌 달걀 두 개와 기름에 튀긴 감자와 콩을 먹었으니까. 나는 콩을 좋아하지만, 그것들은 메마르다. 나는 마른 콩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 속엔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스위스는 병든 땅이다. 온통 산들로 가득 차 있으니까. 스위스 사람들은 메마르다. 그들 속에는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내 시중을 드는 하녀는 메마른 인간이다. 그녀는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너무 많이 생각한다.”(103)

 

첫 느낌은 고골의 <광인 일기>. 하지만 고골이 아무리 광기의 작가라고 할지라도, 그리고 이 소설이 아무리 걸작이라고 할지라도, 정녕, 진짜 광인이 정신의 완전한 죽음으로 넘어가기 직전 광기의 정점에서, 필사적인 속기의 느낌으로 내면의 흐름을 줄줄이 써나간 이 기록을 어찌 따라가겠는가. 촘촘히 들어찬 대책 없는 1형식과 2형식의 문장들, 논리도 뭣도 없는 어마어마한 시적인 비약, 논증도 뭣도 없으되 엄청난 통찰을 담은 아포리즘들. 

 

춤꾼이 이 정도의 지성과 감성과 문체를 갖춘 나라, 역시, 러시아답다. 도중에 다윈, 니체, 톨스토이, 도..키, 졸라, 셰익스피어 얘기도 중구난방으로 나오지만 가장 놀라운 것은 이 모든 말(!)을 줄줄이 풀어내는 발레리노의 광기에 찬 필력이다.

 

인간은 신을 위해 죽는다. 신은 움직임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필요한 것이다. 육체는 죽지만 정신은 산다. 나는 살고 싶다. 하지만 내 손은 힘이 빠지고 있다. 손이 내게 복종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오늘 나는 오랜 시간을 쓰겠다. 신은 내게 나의 삶을 기술하기를 원한다. (...) 나는 내일 계속해서 쓰겠다. 신은 내가 쉬기를 바라기 때문에...”(127)

 

나는 신의 방법으로 쓰고 싶다. 따라서 나는 나의 저작을 교정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글을 고치지 않는다. 나는 고의로 서투르게 쓴다. ”(168)

나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176)

나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하지 않는 철학자이다. 나는 감정을 지닌 철학자이다. 나는 인공적인 일들을 쓰고 싶지는 않다.”(185)

 

 

나는 고독을 무서워할 테지만 울지는 않을 것이다. 신이 나를 사랑하니까 나는 외롭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만약에 신이 나를 버린다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나는 미리 느낀다. 만약에 신이 나를 버린다면 나는 죽을 것이라는 걸 안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그러니 나는 사람들이 나를 이해할 수 있도록 다른 사람들처럼 살겠다. 신은 사람들이다. 신은 자신의 목적을 방해하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그의 목적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다. 나는 신의 도구이다. 나는 신의 사람이다.”(190)

 

나는 니진스키이다. 니진스키는 나이고, 나는 그가 자신을 걱정하기 때문에 그가 걱정된다. 나는 그의 힘을 안다. 나는 그의 선량한 신이다. 나는 나쁜 니진스키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나쁜 신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신이다. 니진스키는 신이다. 니진스키는 선량한 사람이지 사악한 인간이 아니다. (...) 신은 통상적인 용모가 아니다. 신은 얼굴에 깃들인 감정이다. 꼽추는 신이다. 나는 꼽추를 좋아한다. 나는 못생긴 사람들을 좋아한다. 나는 감정을 지닌, 못생긴 남자이다. 나는 곱사등이를 춤추고 똑바른 등의 사람의 춤도 춘다.”(199)

  

유감스럽게도, 이 책의 원본을 갖고 있지 않다.  주문하려고 하니 다 품절. 암튼, <감정>이라는 제목으로 적절히 편집되어 나온 모양인데, 이 제목 역시 <일기>의 한 구절을 참조한 듯. 이렇다.

 

나는 이 책을 감정이라 부르고 싶다. 나는 이 책을 감정이라 부르겠다. 나는 감정을 좋아한다. 그러므로 많은 것을 쓰겠다. 나는 감정에 관한 방대한 저서를 원한다.”(197-198)

 

번역도 참 좋다. 인터넷 사이트에서 다운받은 원문과 대충 비교를 해 봐도 그렇다. 그럼에도 러시아어에서 곧장 번역한 우리말 버전이 있으면 좋겠다 싶고, 한 번 해보고 싶다. 당장엔  너무 바빠, 그냥 읽어가며 느끼는 수밖에.  겸사겸사, 니진스키의 이름인 '바슬라프'는 그렇게 일반적인 건 아니다. Vatslav Nizhinsky. 바쯜라프 니쥔스키. 그대로 전사하면 이 정도의 발음.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 라는 말답게, 니진스키의 일기 속에서도 속된 부분이나 생리적 얘기를 쓴 대목이 와닿기도 하다. 이러나저러나, 책장을 넘기다 멀리 훌쩍 가서 발견한 익숙한 구절. 절친한 선배가 곧잘 인용하는 부분이다.

 

"나는 울고 싶은데 신은 내게 쓰라고 명령한다. 그는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 바라지 않는다. 아내는 울고 또 운다. 나 역시 운다. 나는 프랑겔 박사가 내게 와서 내가 쓰고 있는 동안 아내는 울고 있다고 말할까봐 두렵다."(347) 

 

 

유명한 사진 중 하나.(좌는 '목신'으로 분장한 니진스키.) 160이 겨우 넘는 단신이었다는데...흠. 겸사겸사 예브게니 플루셴코가 빙판에서 니진스키를 재현하기도. 이 동영상도 볼 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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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ssbaum 2013-06-29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혹시 네이버캐스트에 <위대한 개츠비> 에 관해 쓰신 분이 아니실지요?
간결하면서도 의미를 담은 글 감사히 잘 보았는데, 알라딘 서재에서 이렇게 또 뵙게 되네요.

종종 들려 쓰신 글, 읽도록 하겠습니다 : )

푸른괭이 2013-06-29 14:14   좋아요 0 | URL
예, 자주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