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의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

- 정영문, <어떤 작위의 세계>

 

 

 

1. 소수적인 문학

 

들뢰즈/가타리가 카프카론에서 사용한 소수적인(mineure) 문학이라는 개념은 물론 카프카가 처한 언어적 정황과 관련된 것이다. “소수적인 문학이란 소수적인 언어로 된 문학이라기보다는 다수적인 언어 안에서 만들어진 소수자의 문학으로서 고도로 탈영토화된 언어, 정치성과 집합성을 특징으로 한다(들뢰즈/가타리, 44-46). 카프카의 경우 체코어, 독일어, 유대어 등 세 개의 언어-문화가 만나고 어긋나면서 서로의 경계를 침범하는 지점이 그의 문학의 출발점이다.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인 ‘K’()의 실존적 고독과 소외, 그리고 카프카 특유의 분석적이고 건조한 문체(‘문서체’)의 진앙도 여기이다. 그럼에도 소수적인 문학의 핵심은 생래적이고 객관적인 정황에 있지 않다. “소수적이지 않은 위대한 문학이나 혁명적 문학은 없다. 모든 거장적인 문학을 증오하는 것.”(들뢰즈/가타리, 67)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언어 그것이 단일하며 다수적이거나 다수적이었다고 해도 를 소수적인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 “자기 자신의 언어 안에서 이방인처럼 되는 것”(같은 곳)이다.

 

 

 

 

 

 

 

 

 

 

 

 

 

 

단일 민족에 단일 언어를 사용하는 한국문학의 현재와 미래적 지향점을 타진할 때 소수적인 문학은 제법 유용한 개념으로 보인다. ‘세계문학지역문학’(민족문학) 개념의 ()정립이 요청될 만큼 여러 언어권 간의 경계가 흐려졌으며 문단의 구조는 기존의 작가/비평/출판(시장) 권력에 덧붙여 대학(문예창작학과) 권력까지 가세해 무척 복잡해졌다. 이와는 별개로 여전히 좋은 문학이 나오고 있지만, 문학-장이 기술 논리와 경제 논리에 따라 급속도로 재편되고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의 원칙이 새삼 강조되면서 소수적인 문학의 입지가 좁아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소설가 정영문의 문학적인 성취에 대한 문단의 관심이 (이 역시 문학 권력들의 흐름의 산물이지만!) 반가운 건 이 때문이다. 다수적인-소수적인 문학은 주류-비주류, 중심-주변처럼 극히 상대적인, 고로 정치적인 개념이지만 미시적인 관점에서는 엄연히 구분되는데, 둘의 생산적인 공생 관계의 예를 19세기 러시아문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2. 다수-규범의 문학과 소수-전위의 문학: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

 

정녕 톨스토이의 소설이 소설-서사시인 만큼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은 소설-비극이다. 전자의 소설에서는 세기의 영웅인 나폴레옹조차 한 명의 등장인물로, 더욱이 꼰질꼰질하고 촌스러운 출세주의자로 전락하는(<전쟁과 평화>) 반면, 후자의 소설은 페테르부르크의 누추한 하숙방에 틀어박힌 채 나폴레옹을 꿈꾸다 고리대금업자를 살해한 괴상한 법학도마저 오이디푸스 못지않은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든다(<죄와 벌>). 요컨대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는 같은 시공간에 속해 있었음에도 그들이 살았던 러시아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이 다름과 다름의 공존이 두 작가를 공히 불멸케 하고 러시아문학뿐만 아니라 세계문학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앞서 언급한 루카치의 소설론은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혁신성을 지적하는 것으로(루카치, 205-206) 끝나는데, 톨스토이가 전범의 계보를 완성한 만큼이나 도스토예프스키는 전위의 계보를 연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문학사의 심판이 사실상 종료된 문학, 더군다나 의 문학 얘기이다. 지금 생성 중인 문학, 더군다나 /우리의 문학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은, 다시금 톨스토이를 겨냥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을 빌자면, 본질상 혼돈과 무질서이고 따라서 그것에 대한 기록은 당연히 오류와 실수를 피할 수 없다(<미성년>).

 

 

 

 

 

 

 

 

 

 

 

 

 

 

 

 

3. 정영문의 이론적 서사와 <어떤 작위의 세계>

 

3-1. 말과 사물 사이 - 말의 말

 

이제 우리 문학의 전위의 계보도 두둑해졌는데 정영문은 그 끄트머리에 있을 법하다. 2000년대 이후 그가 써낸 책의 목차만 봐도 중성적인 낱말이 오히려 생경하게 여겨질 만큼 정영문스럽다.

  (...) 

현재로선 의심의 여지없이 그의 최고작인 <작위>에서 정영문스러움은 더 공고해진 느낌이다. 일종의 서문에서 그는 이 소설을 샌프란시스코 표류기에 더 가깝게 여겨지는 샌프란시스코 체류기”, “그냥 보이는 대로 보고 들리는 대로 듣고 느껴지는 대로 느끼고 어쩔 수 없이 경험되는 대로 경험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 “아니, 그보다는 보이는 대로 보지 않고 들리는 대로 듣지 않고 느껴지는 대로 느끼지 않고 경험한 대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소개한다. 여기서 이미 전형적인 번역 투(더욱이 윤문을 거치지 않은!)의 문장, 각종 지시 형용사와 대명사에 대한 강박적인 거부, 그것의 자연스러운 결과인바, 사소한 변주를 동반한 동어반복, 불성실하고 무성의하고 심드렁한 문체 등이 눈에 익다. 다만, 말들의 틈새가 훨씬 더 촘촘, 아니, “쫀쫀”(<달에 홀린 광대>, 33)해졌으며 작가의 감각 기관에 포착된 객관적인 사물과 대상은 내가 마음대로 뒤틀어 심하게 뒤틀”(<작위>, 7)려 있다. 이는 작가의 관심사가 사물의 세계가 아니라 말의 세계에 있기 때문, 말의 말, 소설의 소설에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은 이 소설이 뜬구름 잡는 것에 관한 뜬구름 잡는 이야기”(<작위>, 270)임을, 굳이 괄호까지 사용하여, 강조하는 것으로 종결된다. 앞서 서문에서 작가는 이 소설의 부제로 지극히 사소하고 무용하며 허황된 고찰로서의 글쓰기에 대한 시도, 혹은 재미에 대한 나의 생각, 혹은 사나운 초록색 잠을 자는 무색의 관념들, 혹은 뜬구름 같은 따위”(7)를 지적했는데, 소설의 마지막에서는 뜬구름에 좀 더 재미를 느낀 듯하다. 그 이유인즉, “자연계의 모든 것 중에서도 그 안에 핵심이 없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뜬구름이기 때문이며 이 소설이 뜬구름처럼 아무런 핵심이 없는 것이기 때문”(<작위>, 270)이다.

 

이렇게 아무런 핵심이 없고 이 핵심 없음이 곧 핵심인 세계가 나타났는데, 정영문은 그것을 완벽한 작위의 세계’, 심지어 이상한 무위의 세계라고 부른다. “의미와 무의미가, 존재와 비존재가, 우연과 필연의 차이가 사라져 경계가 모호한 그 작위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맥락이 없었고, 뭔가가 일어나도 그만이고 일어나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그 세계는 이상한 무위의 허구의 세계이기도 했다.”(<작위>, 190) 이런 허망한 세계에 관한 집요한 말장난이 한 편의 소설이 됐다. 그것에 대한 각종 해석이 초라하고 애처롭게 여겨지는 것은 그의 소설 자체가 하나의 소설론인 까닭이다. 그것도 해석에 반대한다!’라는 식의 기치를 내걸거나 기존의 소설론이나 서사학과의 대결을 염두에 둔 것도 아닌 심드렁하고 시건방진(!) 소설인 까닭이다. 그뿐인가. 소위 난해한 소설의 대명사인 정영문에게는 그 나름의 완벽한 알리바이도 있다. , 그 특유의 유머러스한 문체에 허무와 불모의 세계관이 돋보임과 동시에 잘 짜인 서사 구조를 갖춘 중단편 소설이 적지 않다. 할아버지(아버지)의 성묘를 떠났다가 성묘를 하고 돌아오는(혹은 제대로 돌아오지 못하는), 연극적인 대화와 괴상한 작태가 인상적인 부자(父子) 이야기를 그린 달에 홀린 광대(<달에 홀린 광대>)라든가 남의 집에 침입해 기껏 마실 것과 치질약과 네 곡의 연주”(<목신의 어떤 오후>, 39)만 요구한 어린 강도 커플의 난감한얘기를 액자식으로 들려주는 브라운 부인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리라.

 

자기만의 검은 이야기 사슬을 짜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음에도 정영문은 보이지 않는 균열파괴적인 충동의 극단으로 치닫더니 급기야는 핏기 없는 독백(‘하품을 곁들인!) ‘중얼거림을 택한 형국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 무력한 상태의 궁극의 모르기 때문에 쓸 수 있는 글을 쓰고 있을 뿐인 것 같아. 앞으로 글을 쓴다 하더라도 끝내 이해할 수 없는 이 세계를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려낼 수 있을 뿐이겠지.”(<더없이 어렴풋한 일요일>, 156.) 사물과 말 사이의 간극을 영원히 극복할 수 없다는 절망과 마땅히 그럴 필요도 없다는 체념 뒤에 나왔을 법한 글쓰기는 칸트 식으로 말해 지극히 무목적인, 따라서 지극히 미학적인 행위에 가까워진다. 그 표현이 <바셀린 붓다>이다. 장은커녕 문단조차 잘 나누어놓지 않고 아무데나 되는대로 마구 읽으라는(혹은 굳이 그렇게도 읽지 말라는) 식의 이 소설은 베케트의 <몰로이>에 대한 오마주인 것 같으나 그 작태가 너무 노골적이어서 실은 그것의 캐리커처로 보이기도 한다. 어떤 곳에서는 생각하다는 술어로 연결된 치명적인 문장 하나가 15쪽에 걸쳐 이어진다.

 

나는 일상의 다양한 모습과 차원들에 대해 생각했는데,() 자신이 생선을 지나치게 많이 먹고 있다는 생각과 함께, 도대체 지금까지 먹은 생선의 숫자는 얼마나 될지에 대해 생각하며, 그런 생각을 생선을 먹을 때마다 거의 예외 없이 한다는 생각을 하고, 외국어를 번역하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생각하고,() 자신의 삶이 언젠가 이후로 사실주의와의 길고도 험하며 지루하고도 즐거운, 전면적인 싸움이 되었다는 생각을 하며,()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제초제를 위스키로 착각해 커피로 넣으려 했던 화가에 대해 생각하며(이쯤에서 그만할까? - 이것은 화자가 내는 목소리이다. 그만할 수도 있지만 얼마든지 더 할 수도 있고, 더 하고 싶은 걸 이것은 좀더 장난스러운 작가의 목소리다) () 역시 마음대로 갖고 놀 수 있는 것은 언어뿐이라는 생각을 하는 하루들로 이루어진, 이런 식으로 그 목록을 끝없이 작성하고, 그 목록들에 이야기를 더할 수 있는 일상들의 순간들 혹은 시간들이 있었다.(<바셀린 붓다>, 60-74.)

 

거미의 항문에서 줄줄 나와 엮어지는 거미줄에 싱싱한 먹이가 걸려들듯(혹은 그러지 않듯) 말들이 사물들을 붙잡을 때가 있는데, 대략 그 순간에 정영문식 서사가 어느 정도 모양새를 갖춘다. 그것의 재미는 어쩌면 그가 배척하는 일련의 재미없는 서사(“전통적인 소설, 시대를 반영하는 소설, 상처와 위안과 치유에 대해 얘기하는 소설, 등장인물의 생각보다 행위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소설, 거창한 소설, 감동을 주는 소설(), 성장소설, 심각하기만 한 소설, 자의식의 과잉이 묻어나지 않는 소설”(<작위>, 94))을 향한 유쾌한 야유에서 시작된다. 이어, 자신이 재미있게 생각하는 것들”, 말로 하는 놀이, 말하는 것이 거의 없는 시와 소설,() 근거가 전혀 없거나 상당히 근거 없는 생각들”(<작위>, 95)을 써나가는 데 집중한다. 그 결과 근대 이후 소설의 숙명이기도 했던 의미와 논리의 과잉에 맞서 점점 더 비워지는 의미, 점점 더 무너지는 논리를 선보이는 소설이 태어난다.

 

(계속)

 

-- <세계의문학>, 2013년, 여름호

 

- 주요 계간지에 지면을 얻게 된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지난 겨울, <창비>에 실은 촌평도 그렇거니와! - 그러니까 영도 다리 밑 점쟁이 말대로 사십부터는 인생이 피려나 보다! ^^;; ) 완죤 감격, 그쪽의 기획 의도에 맞추기 위해 고민하는 시간이 좀 길었음에도,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그간 쓰고 싶은 얘기를 민폐를 끼치지 않으면서(-_-;;) 최대한 요령껏(?) 풀어보려고 했다. 언제든 지면이 주어지는 대로 우리 소설을 좀 체계적으로 읽어보고 싶은 바람이 있는데, 아무래도 공.부.가 체질인가...-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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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는 불타지 않는다!”

- 신의 존재와 권능을 증명하는 악마, 정치권력에 맞서는 문학 권력:

미하일 불가코프, <거장과 마르가리타>

   

 

 

 

1930년대 스탈린 치하, 소비에트의 수도 모스크바에 악마 볼란드가 수행원을 동반하고 나타난다. 그의 앞에서 악마의 존재를, 나아가 신의 존재를 부정한 베를리오즈는 이른바 참수형을 선고받고 전차에 목이 잘려 죽는다. 이어, 악마들은 바리에테[버라이어티] 극장 관계자들을 혼내줌과 동시에 한 판 마술쇼를 벌여 모스크바 시민들의 허영과 속악을 폭로한다. 대체로 이들의 활약상(폭로와 응징!)을 통해 당시 소비에트의 문제점이 여실히 드러난다. 스탈린 공포 정치와 무자비한 숙청(아파트 주민들의 증발), 급속한 근대화와 부의 불균등한 분배로 인한 주택난(악마조차 집 주인을 쫓아내고 새로 서류를 작성하지 않으면 묵을 아파트가 없다), 뇌물 수수와 각종 뒷거래(주택 위원장 니카노르의 수난), 지나친 관료주의와 형식주의(‘그리보예도프집에 들어가려면 악마라도 출입증이 필요하다) . 보다시피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는 소비에트 사회에 대한 통렬한 풍자 소설이지만 괴테의 <파우스트>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들이 천착했던 여러 형이상학적 문제를 파헤친 철학 소설이기도 하다.

 

 

 

 

 

 

 

 

 

 

 

 

 

 

다시 소설의 첫 부분으로 돌아가자. 볼란드는 베를리오즈의 운명을 예언하면서 제발 악마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어달라고 부탁하고 그것을 증명할 일곱 번째 증거가 곧 나타날 것이라고 말한다. 악마의 예언은 물론 실현되었다. 뿐더러 베를리오즈의 잘린 머리가 악마의 무도회의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 또 한 번 등장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신봉한 무신론의 원칙에 따라 (불멸 대신!) 영원한 죽음을 선고받는다.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베를리오즈], 모든 일이 예언대로 실현됐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볼란드가 머리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중략) 당신은 머리가 잘리면 사람의 삶은 그것으로 멈추고 그 사람은 재로 화하여 무()로 사라져버린다는 이론을 열띠게 전파해 왔지요. 저의 손님들 앞에서 - 하긴 이 손님들 자체가 반론의 증거가 되기는 합니다만 - 이분들 앞에서 당신의 이론은 확고하고 재치 있다는 사실을 알려 드리게 되어 기쁩니다. 이론이라는 건 다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는 법입니다. 그런 것들 중에는 사람은 각자 믿는 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이론도 있지요. 그 이론도 실현될 겁니다! 당신은 무로 사라질 것이고, 저는 당신의 머리로 술잔을 만들게 되어 기쁠 겁니다. 존재를 위해 건배합시다!”(462-463)

 

이렇게 악마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음에도 <거장과 마르가리타>는 신에게서 출발하여 신에게로 귀결되는 소설이다. 이 소설의 제사로 쓰인 <파우스트>의 메피스토펠레스의 말(“항상 악을 원하면서도 항상 선을 창조해내는 힘의 일부분입지요.”)은 여러 모로 선언적이다. 악을 통해 궁극적으로 선에 도달하는 것, 악마의 존재를 눈앞에 직접 보여줌으로써 숨어 있는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 (절대선)과 악마(절대악)의 관계는 여기서, 완전히 평등하지는 않을지라도, 영원한 공존과 동행의 운명을 타고난 원상과 그림자처럼 상보적이다. -예수의 사도 마태오(레비 마트베이)에게 볼란드가 하는 말을 보라.

 

넌 마치 그림자도 악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약간의 호의를 발휘해서 내 물음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겠는가?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네 선으로 무엇을 할 것이며, 땅 위에 그림자가 사라진다면 이 땅은 어떻게 보일 것인가? 그림자는 사물과 사람들 때문에 지는 것이다. 저기 내 장검 때문에 그림자가 졌다. 하지만 그림자는 나무나 살아 있는 동물 때문에도 생기지. 벌거벗은 세상을 즐기려는 네 환상 때문에 나무와 동물들을 모두 없애고 지구의 껍데기를 전부 벗기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너는 바보다.”(604)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 거장은 대체 무엇일까. 그는 이름도 없을뿐더러(그저 거장-M’일 뿐이다!) 전기적인 사항도 최소화되어 있다. 좀 과장하면, 작가의 분신으로서 오직 문학과 작가의 소명을 얘기하기 위해 존재한달까. 특히 그가 우여곡절 끝에 불태워버린 원고(본디오 빌라도에 관한 소설)부활하는 장면이 의미심장하다. “원고는 불타지 않아요.”(486) 볼란드가 남긴 유명한 말이다.

 

 

 

 

 

 

 

 

 

 

 

 

 

 

 

문학의 불멸을 위해서는, 실상 극히 소비에트적인 화법인바, 작가 권력이 정치권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야 한다. 스탈린의 애매한 비호-폭력아래서 작품 활동을 해야 했던 불가코프에게 이것은 무척 치명적인 문제였다. 그랬기에 그는 거장을 통해 자신이 역사와 시대 앞에서 범한 죄(‘비겁함’)를 예슈아(예수)의 무고함을 알면서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지키기 위해 그의 처형을 묵과할 수밖에 없었던 빌라도에게 투영한다. 나아가 거장이 빌라도를 만월의 고통, 즉 불면과 편두통으로부터 해방시켜주듯, 불가코프는 거장에게 은 아닐지언정 최후의 안식처를 선사한다. 평안이야말로 병마에 시달리며 당시로서는 출간 가능성이 거의 없었던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써나간 불가코프가 스스로에게 내민 위안의 손길이었을 터이다.

 

, 다른 이들보다 세 배는 더 낭만적인 거장이여, 낮에는 반려자와 함께 꽃이 피기 시작한 벚나무 아래를 산책하고 저녁에는 슈베르트의 음악을 듣는 생활을 하고 싶지 않습니까? 촛불 앞에서 거위 깃털로 글을 쓰면 즐겁지 않겠습니까? 파우스트처럼 새로운 호문쿨루스를 빚어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증류기 앞에 앉아 있고 싶지 않습니까? 저곳! 저기에 벌써 당신들의 집과 늙은 하인이 기다리고 있고, 촛불도 벌써 타오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촛불은 곧 꺼질 겁니다, 이제 곧 새벽이 다가올 테니까요. 이 길로 가십시오, 거장, 이 길로! 안녕히 가십시오! 나는 떠날 때가 됐습니다.”(642-643)

 

 

-- <네이버캐스트>

 

 

-- 대학 들어와서 처음 알게 된 작가. <거장과 마르가리타> 처음 읽었을 때(당시는 번역도 별로 좋지 않았음에도) 진짜 깜.놀.했는데, 그 무렵엔 전체 형식에 일단 끌렸던 터라, 그런 식(즉, 두 텍스트가 시공을 초월하여 뫼비우스 띠처럼 뒤섞이는, 어떤 의미에선 무척 유치하지만 또한 무척 에로틱하다!)의 장편을 써보고 싶었고, 심지어 내 나름으로 뭘 썼던 기억도 있다. (쓰다 보니, '루저'의 한탄이냐, 뭐냐, 죄다 기억, 즉 과거지사의 나열이냐...쩝.) 좀 철들고 나서 그런 형식 자체가 정녕 '영혼의 형식'이었음을 알겠다.  그러니 소설의 어떤 형식도 실은, 모방을 불.허.한.다!

--  그럼에도  이 소설 역시 빚진 작품들이 많은데, 우선은 이것.

 

 

 

 

 

 

 

 

 

 

 

 

 

 

 

 

 

 

-- 그리고 이 참에 한 번 더 올려본다. 이 작가, 이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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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경(越境)의 시학과 미():

- 가와바타 야스나리(1899-1972), <설국>(1848)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은 한 남자(시마무라)와 한 여자(고마코)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연애소설이다. 세 번에 걸친 만남은 모두 그가 도쿄를 떠나 눈의 고장’(‘설국’)으로 오면서 이루어진다. 첫 만남은 회상처럼 짧게 삽입되고 나머지 두 만남에서는 무용 선생의 아들(유키오)을 사이에 두고 고마코와 미묘한 연적이 된 처녀(요코)가 등장하면서 두 겹의 삼각관계가 형성된다. 소설은 영화가 상영되는 고치 공장의 화재와 요코의 자살로 끝난다. 장기간에 걸쳐 발표한 여러 단편을 용해해 만들었다는 창작 과정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설국>은 파편적인 장면들의 모자이크처럼 읽힌다. 무엇보다도 한량이나 다름없는 유부남과 게이샤의 자칫 진부할 수 있는 사랑을 인간 존재의 한시성에 대한 인식을 담은 소설로 승화한 작가의 솜씨와 날카롭고도 섬세한 문체가 돋보인다. 가령, 대개 눈[]과 함께 어우러져 포착되는 고마코에 관한 묘사를 보자. “거울 속 새하얗게 반짝이는 것은 눈[]이다. 그 눈 속에 여자의 새빨간 뺨이 떠올라 있다. 뭐라 형용하기 힘든 청결한 아름다움이었다.”(44) “거울 속에는 차가운 꽃잎 같은 함박눈이 한층 크게 나타나, 옷깃을 들추고 목덜미를 닦는 고마코 주위에서 하얀 선으로 감돌았다.”(129) 은하수가 흐르는 가운데 게다를 신고 꽁꽁 언 눈[] 위를 달리는 고마코의 모습도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 같다.

 

 

 

 

 

 

 

 

 

 

 

 

 

 

 

 

관능적이고 농염한 고마코, 청순하고 순결한 요코 등 남성의 눈으로 포착된 두 여성은 그 자체로 미()의 육화이다. ‘게이샤라는 단어를 세계어 사전에 등록한 일본 문화의 특수성과 탐미주의가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실제로 고마코는 단순히 미적 대상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 같다. 어린 나이에 동기(童伎)로 도쿄에 팔려 갔고 자신을 기방에서 빼준 남자와 결혼했으나 그는 16개월 만에 사망한다. 시마무라가 도쿄로 떠난 다음에는 자기가 도쿄로 팔려 갈 때 배웅해준 유일한 사람인, 장결핵으로 죽어가는 유키오를 위해 게이샤로 나섰다. 사연이 많은 만큼이나 여백이 많은 탓인지 그녀의 사랑과 교태에는 어딘가 기법 같은, 즉 미학적인 구석이 있다. 덧붙여 그녀에게는 일기를 쓰는 흥미로운 습관이 있다. 유키오 얘기는 가장 오래된 일기 첫머리에 적혀 있고 시마무라와의 첫 만남도 날짜와 함께 기록돼 있는데, 이런 공책이 열권이나 된다. 자기가 읽은 소설의 제목과 저자, 등장인물과 그들의 관계도 간단히 적어둔다. 이를 두고 시마무라는 헛수고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헛수고를 반복하는 눈[]의 게이샤를 찾아오는(혹은 더 이상 그러지 않는) 남자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고마코의 헛수고는 계속될 것이다.

 

소설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단어 중 하나가 허무이다. 대체로 <설국>의 허무주의와 탐미주의는 어려서 부모, 누나, 조부모를 연이어 잃은 작가의 개인사, 나아가 20세기 전반(前半) 일본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소설의 처음으로 가자.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7) 󰡔설국󰡕은 연애소설이자 미에 관한 소설임과 동시에 월경(越境)에 관한 소설이다. ‘눈의 고장이 아름다운 것은 아주 드물게 언급되는(“나방이 알을 스는 계절이니까 양복을 옷걸이나 벽에 건 채로 두지 말라고, 도쿄의 집을 나설 때 아내가 말했다.”(77)) 생활의 공간(도쿄)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연상되는 우리의 소설이 있다.

 

 

 

 

 

 

 

 

 

 

 

 

 

 

 

 

 

 

김승옥이 스물세 살 때 쓴 무진기행빽이 좋고 돈 많은 과부와 결혼한 가 제약회사의 전무로의 승진을 앞두고 잠시 고향, 즉 안개의 고장인 무진’(霧津)에 와서 겪는 얘기를 담은 소설이다. 너무 날 것이어서 작위적인 느낌을 주는 사건들, 절대 길들여지지 않을 것 같은 거친 야생의 문장, 속되고도 어딘가 날이 선 관계(후배 박, 동기 조, 음악 선생 하인숙, 서울의 아내 과 장인, 옛 애인 ’) 등 비슷한 연배의 작가 이청준과는 확연히 대조되는 소설 문법이 여전히 충격적이다. 과거의 처럼 서울을 꿈꾸는(“서울로 가고 싶어죽겠어요.”) 음악 선생 하인숙과 동침한 다음날, 빨리 상경하라는 내용이 담긴 아내의 전보를 앞에 두고 가 내놓는 타협안 역시 모방을 불허하는 명문장이다.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 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번만이다. 꼭 한 번만, 그리고 나는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한다. 전보여, 새끼손가락을 내밀어라.”(무진기행) 끝으로, 하인숙에게 쓴 사과의 편지를 그냥 찢어버리고 무진을 떠나는 가 느끼는 심한 부끄러움”, 이 수치의 감각은 무엇인가.

 

순천에서 서울로 월경한 어느 불문학도가 단편 하나(생명연습)를 들고 문학사의 한복판으로 성큼 걸어들어왔다. 그가 이룩한 감수성의 혁명’(유종호)의 동력은 아무래도 각종 속(), 속됨과 속물스러움에 대한 혐오, 궁극적으론 자기혐오였던 것 같다. 아무튼 풋풋한 미남 청년은 반쯤 타들어간 담배, 그리고 천재 작가라는 지당한 수식어와 함께 흑백 사진 속에 붙박인 박제가 되었고, 펜을 놓고 속절없이 허물어져가는 중년, 심지어 말을 놓고 슬어져가는 노년만 남았다. 미가 미인 것은 역시나 그것이 시간 앞에서 무력하기 때문, 찰나적이기 때문인가. 이 비극 앞에서 문학만이 우리의 위안이다. 마흔을 목전에 두고 다시 읽는 무진기행이 고맙다.

 

-- <책앤> 6월호 게재 예정.

 

-- 간만에 여유를 부려본다. 혹은, <무진기행>을 다시 읽은 충격을 아직 다 소화하지 못했다고 해야겠다. 비도 주룩주룩 내리고 감기도 일주일, 이주일 째 지속되고, 다 겸사겸사, 이다.    

-- <설국>에 대해 쓰기로 했지만(지면상 그래야 했지만) 쓰다 보니 <무진기행> 얘기가 더 많아졌고, 마음으론 앞의 것 다 지우고 뒷 얘기만 더 쓰고 싶어졌다. (잘 쓴 줄 알겠으나, 일본식 탐미주의는 역시 체질이 아니더라는...-_-;;)  

-- 전집을 갖다 놓고(혹은 그렇게 모아가면서) 읽은 여러 작가 중 하나가 김승옥. 뒤로 갈수록(길어질 수록) 힘이 빠지는 그의 소설에 절망했던 기억. 아니, 그보다는 그의 초기작을 읽고 감탄하면서 그 때문에 또한 절망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물론 그때 나의 절망이 뭐, 얼마나 컸겠나, 그때는 나 역시 작가의 나이였으니, 시건방에 쩔었을 거다, 분명히. 지금 읽으니, 정녕 절망이더라. 천재란 역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인가 보다.

 

 

(무진이라고 하면 그것에의 연상은 아무래도 어둡던 나의 청년(靑年)이었다.”)

 

 

내 머릿속에 항상 김승옥과 함께 떠오르는 작가는 이청준. 뭐, 이유는 둘의 소설 세계와 문학 인생이 어떤 평행선을 그린다는 막연한 생각 때문. (천재형 vs. 장인형, 뭐 등등.) 덧붙여, 역시 오래 전 일인데, <당신들의 천국>의 작가의 빈소를 나오는 길에, 그 빈소를 찾아가는 <무진기행>의 작가의 뒷모습을 보았다.  이 역시 모종의 평행선. 짧은 순간이었지만, 여운은 무척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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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세상, 한 판 붙어보자

- 발자크, <고리오 영감>

 

 

 

 

세계문학사는 발자크를 소설의 교과서로 정의했다. 근대, 자본주의, 대도시, 속물들, 야망에 찬 청년, 전혀 미화되지 않은 날 것의 삶. 이 모든 것이 <고리오 영감>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장황하게 묘사되는 보케르 부인의 고급 하숙집의 풍경은 마냥 비루한, 하지만 그렇기에 진실한 우리 삶의 축소판 같다.

 

끝으로, 그곳에는 시적인 데라곤 전혀 없는 가난이 있다. 더 이를 데 없이 궁핍하고 넝마 같은 가난이 도사리고 있다. 그 가난은 진흙이 묻지 않았다 해도 얼룩이 지고, 구멍이나 누더기가 없더라도 곧 썩어 넘어질 지경이었다.(14)

 

이 하숙집에 고리오 영감, 보트랭(자크 콜랭), 빅토린 타페이유, ‘할멈노처녀 미쇼노 양, 으젠느 드 라스티냐크 등 일곱 명의 하숙인이 산다. 이들 중 라스티냐크는 청운의 꿈을 안고 이제 막 파리로 상경한 법대생이다. 근대화가 한창 진행되던 시절 우리의 청년들이 그러했듯, 그가 가진 것이라곤 머리와 야망밖에 없다. 하지만 당장 그를 끌어당기는 것은 두툼한 법전이 가득 찬 도서관이 아니라 현란한 세속적 불빛이 번득이는 파리의 사교계이다. 그곳을 드나들던 그는 고리오 영감의 작은딸인 델핀 드 뉘싱겐의 연인이 된다. 19세기 프랑스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 도식적 틀에서 부각되는 것은, 그러나 낭만적이고 열정적인 연애가 아니다. <고리오 영감>의 관심사는 첫째, 라스티냐크의 눈을 통해 포착한 인간 본연의 속물스러움을, 둘째, 그 속물스러운 세계와 마주하여 그가 겪는 내적인 운동성을 보여주는 데 있다.

 

 

 

 

 

 

 

 

 

 

 

 

 

 

고리오 영감은 두 딸의 행복을 위해 제분업으로 모은 재산을 거의 다 써버리고 마지막 남은 은그릇마저 부수어서 내다 판다. 작가의 비유를 빌자면 개의 성격에서 볼 수 있는 숭고한 경지에까지 도달한 부성애가 곧 그의 실존이다. 하지만 두 딸은 아비를 자기 집에 들이지도 않고 돈이 필요할 때만(가령, 무도회에 필요한 드레스를 마련하기 위해) 아비를 찾는다. 아비가 졸도하여 생사를 헤매고 있는데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을뿐더러 장례비도 대주지 않는다. 이 고리오 부녀의 얘기는 라스티냐크의 눈에 비친 파리 풍속의 가장 핵심적인 대목이기도 하다.

 

세상은 시적인 데라곤 하나도 없이 시종일관 속되고 치사하다. 여기서 라스티냐크의 목표는 단 하나, 아무리 열심히 읽어도 알쏭달쏭한 세상이라는 책을 정복하고 출세하는 것뿐이다. 보트랭은 그 나름의 처세술을 설파하며 청년을 길들인다.

 

자네는 보세앙 사촌 집에 가서 사치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를 이미 맡았네. 자네는 고리오 영감 딸인 레스토 부인 집에 가서 파리 여성의 냄새를 맡았어. 그날 자네는 이마에 내가 알아볼 수 있는 단어를 적어서 돌아왔네. 그 단어란 <출세>! 무슨 일이 있더라도 출세해야 한다는 것이었네. 브라보! () 출세하기 위해서 자네가 해야 할 노력과 필사적 싸움이 어떤가를 판단해 보게. 항아리 속에 들어 있는 거미들처럼 자네들은 서로를 잡아먹어야 하네. 왜냐하면 좋은 자리가 오만 개밖에 없기 때문이야. 이곳 파리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출세하는가를 알고 있나? 천재성을 떨치든지 아니면 능수능란하게 타락해야 하네. 사회 집단 속으로 대포알처럼 뚫고 들어가거나 페스트균처럼 스며들어 가야 하네. 정직이란 아무 소용이 없네.”(147-148)

 

약육강식의 논리가 판치는 이 현실 앞에서 청년은 고민한다. 그의 분류법에 따라 복종(귀찮다), 투쟁(불확실하다), 반항(불가능하다) 중 무엇을 택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이다. “청춘 시절에 흘려야 할 마지막 눈물을고리오 영감의 무덤에 묻은 뒤 등불이 빛나는 파리를 내려다보며 그는 이렇게 외친다.

 

이제부터 파리와 나와의 대결이야!”(396)

 

그 대결의 첫 행동은 아비의 죽음을 나 몰라라했던 뉘싱겐 부인 댁에 저녁 식사를 하러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라스티냐크는 체포되는 순간까지 도도함을 잃지 않았던 도형수 보트랭의 방식(반항) 대신에 복종이나 투쟁의 길을 선택한 것일까. 어떻든 이로써 순수의 시대는 종말을 고한다. 과연, 이 소설의 결말은 언제 봐도 불편한 구석이 있다. 곰곰 생각해 보니, 초점을 라스티냐크에 맞춘 탓이다.

 

 

 

 

 

 

 

 

 

 

 

 

실상 <고리오 영감>의 주인공은 고리오 영감이나 라스티냐크 같은 어떤 구체적인 개인도, 파리라는 근대적인 공간도 아니다. 훗날 발자크가 자신의 소설을 모조리 아우르는 제목으로 생각한 인간 희극이라는 말이 시사하듯, 이 웃긴 인간 세상이 곧 주인공이다. 발자크 자신도 평생을 그야말로 웃긴 속물로 살았다. 그러나 어떤 속물도 자기 안의 속물스러움과 세상의 속물스러움을 이토록 깊이 꿰뚫어보지 못했고 또 이토록 적나라하게 표현하지 못했다. 그가 우리에게 알려준 소설적 진실이 하나 더 있다. 세상이 더럽고 비루할수록 그 세상과 한 판 붙어볼 자유가 소중하다는 것. 설령 그 역시 라스티냐크의 경우처럼 속물스러운 타협의 형태가 될지라도, 그것 없이는 우리의 인생은 결코 어떤 진정성도 확보할 수 없는 것이다.

 

-- 네이버캐스트  

 

-- 오랜만에(그런 것 같은데 아닌가?) 하나 올려 본다.

발자크의 소설은 언제나 지루했고, 지금 읽어도 지루하다. 처음 읽은 건 혜원사판이었지 싶은데 <골짜기의 백합>. 지루한 연애 소설로 기억에 남아 있는데, 주기적으로 읽게 되는 그의 소설들은(<고리오 영감>, <잃어버린 환상>, <나귀 가죽> 등등) 대체로 다 그렇다. 그럼에도(!)  계속 읽는 것은, 저 글의 맨 처음에 썼듯, 그의 소설이 아무리 봐도 '교과서'이기 때문이다.  

다시금, 교과서가 재미있는 거 봤나. 교과서는 항상 지루하다! 그 지루함을 견디다 보면 더러 재미있는 대목이 있기도 하지만, 그래본들 지루한 건 지루한 거다. 한데, 지루한 소설을 잘 쓰는 작가들이 의외로(?) 전기가 재미있는 경우가 많다. 톨스토이가 대표적. 발자크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소설보다 몇 배는 더 재미있는 것이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 

  

 

 

 

 

 

 

 

 

 

 

 

 

 

- 덧붙여 사람이 아니라 짐승의 형상(즉, 진정한 소설쟁이!)처럼 보이는, 로뎅이 조각한 발자크. 한데 마땅한 이미지가 왜 이리 없냐. 언제가 프랑스 가면 꼭 봐야지...  

 

- 저 동상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것이, 볼쇼이 극장 맞은편에 서 있는 마르크스 동상. (발자크와 마르크스(더 정확히 엥겔스)도 뭐, 붙이자면, 못 붙일 건 없다.) 돌에 새겨진 문구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공산당 선언>의 마지막 문구. 여름에는 좋았지, 영하 20도 이하로 떨어진 날, 저거 또 보러 갔다가 얼어죽을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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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그 나름 애정이 있었던 것이 분명한, 그러다가 한동안 무시(?)했던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을, 아들-딸의 입장이 아닌, 아버지-어머니의 입장에서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아들-딸의 역할에 덧붙여, 아버지-어머니의 역할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정황이 됐기 때문에, 오랫동안 던져두었던 이 소설을 다시 꺼냈다고 해야 하나. 암튼.

 

 

 

 

 

 

 

 

 

 

 

 

 

 

 

옛날에는 거의 전적으로 바자로프의 입장에서 읽었던 것 같다. 그의 성격, 사상, 반항, 사랑, 실연, 환멸, 죽음 등등. 어쩌면, 당시로선 너무 촌스럽게(!!!), 궁상과 청승의 복합체처럼 여겨졌고 그래서 애써 보지 않으려 덮어두었던 아버지-어머니의 모습이 새롭게 보인다. 가령, 3년(?)만에 고향집을, 부모집을 찾아왔다가 고작 사흘을 머물고 매몰차게 떠나는 아들을 보낸 다음, 부모는 이런 대화를 주고 받는다.

 

우릴 버렸어. 우리와 있는 게 답답했던 거야. 이젠 혼자야. 이 손가락처럼 혼자 남았어!”그는 몇 번이나 되뇌었고, 그때마다 집게손가락만 편 한쪽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때 아리나 블라시예브나가 다가와 백발이 성성한 자기 머리를 하얗게 센 남편의 머리에 가져다 대면서 말했다.

바샤, 어쩔 수 없어요! 그애는 매처럼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가지만, 우리는 한 구멍 속에 난 버섯처럼 나란히 앉아서 꼼짝하지 않지요. 나만은 영원히 당신 곁에 있을 거예요. 당신도 그럴 테지요.”(215-16)

 

그리고,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기도 한데, 바자로프가 죽은 다음, 먼저 보낸 아들의 무덤을 찾아 돌보고 또 흐느끼는 노부부의 모습. 뭐, 여기는 옛날에도 눈시울을 적시며 읽었던 것 같기도 하다. 

 

비교적 최근에 알게 된 것인데, 투르게네프 산문시 <거지>(1878)와 윤동주의 <투르게네프의 언덕>(1939년 9월)이 아주 놀라운(!) 대비를 이룬다. 전자는 기본적으로 조화, 상생, 화해, 형제애 등을 역설한다. 어쩜, 모순의 해결이, 이리도 쉬운가! 무척 훈훈한 분위기이다. 한 번 보시라. 번역은 내가 했다.

 

나는 거리를 걷고 있었다… 늙어빠진 노인 거지 때문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충혈되고 눈물이 고인 두 눈, 푸르스름한 입술, 거칠거칠한 누더기, 불결한 상처…. 오, 가난이 이 불행한 존재를 얼마나 추하게 갉아먹었는가!

그는 나에게 팅팅 부은 불그스름하고 더러운 손을 내밀었다. 그는 신음했다, 웅얼대며 도움을 청했다.

나는 호주머니를 온통 뒤지기 시작했다…. 지갑도, 시계도 없다, 손수건도 없다….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거지는 기다리고 있었다… 앞으로 내민 그의 손이 힘없이 흔들리며 떨리고 있었다.

당황한, 곤혹스러워진 나는 떨고 있는 그 더러운 손을 꼭 잡았다….

―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형제. 가진 것이 하나도 없구먼, 그래.

거지는 충혈된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시퍼런 입술에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싸늘해진 내 손가락을 꼭 쥐었다.

― 뭐가 어때서요, 형제. ― 그가 우물거렸다. ― 이만 해도 고마워요. 이것도 적선인걸요, 형제."

나는 나 역시 나의 형제로부터 적선을 받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반면, 윤동주는 우리가 익히 아는, 학사모를 쓴 은은한 미소의 꽃미남의 느낌에 찬물을 확~ 끼얹듯 너무도 냉소적이고 복잡하고 꼬여 있다. 늙은 거지는 소년 거지로, 더욱이 세 명으로 바뀌어 있고, 상황도 정반대. 즉, 아무것도 주고받지 않았음에도 쉽사리 화해에 도달하는 투르게네프-인텔리겐치아와 민중에 비해, 윤동주의 시 속에서는 모든 것이 있음에도 소통은 처절하게 결렬된다. 있어도 주지 못하고(줘야 되나, 주는 게 낫나, 줄 수 있나 등등), 또, 아무것도 없음에도 딱히 뭘 받으려 하지도 않는 거지 소년 셋. 새삼스레, 니가 정말 시인이구나!, 하는 감탄을 내질러본다. 과연 '수치'의 시인.  하여간 놀랍다! 

 

 

 

나는 고갯길을 넘고 있었다……. / 그때 세 少年(소년) 거지가 나를 지나쳤다.

  

첫째 아이는 잔등에 바구니를 둘러메고, / 바구니 속에는 사이다 병, 간즈메통, 쇳조각,

 

헌 양말 짝 等(등) 廢物(폐물)이 가득하였다. / 둘째 아이도 그러하였다. / 셋째 아이도 그러하였다.

 

텁수룩한 머리털, 시커먼 얼굴에 눈물 고인 充血(충혈)된 눈, / 色(색) 잃어 푸르스름한 입술,

너덜너덜한 襤褸(남루), 찢겨진 맨발. / 아─

얼마나 무서운 가난이 이 어린 少年(소년)들을 삼키었느냐! / 나는 惻隱(측은)한 마음이 움직이었다.

 

나는 호주머니를 뒤지었다. / 두툼한 지갑, 時計(시계), 손수건…… 있을 건 죄다 있었다.

그러나 무턱대고 이것들을 내줄 勇氣(용기)는 없었다. / 손으로 만지작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多情(다정)스레 이야기나 하리라 하고 "얘들아." 불러보았다.

첫째 아이가 充血(충혈)된 눈으로 흘끔 돌아다볼 뿐이었다.

둘째 아이도 그러할 뿐이었다. / 셋째 아이도 그러할 뿐이었다.

 

그리고는 너는 相關(상관)없다는 듯이

自己(자기)네끼리 소곤소곤 이야기하면서 고개로 넘어갔다.

언덕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짙어가는 黃昏(황혼)이 밀려들 뿐 ―

 

 

다시 앞으로. 비도 주룩주룩 내리니, 눅눅한 소설이 나쁘지 않다. 고전은 고전인지라, 도키, 톨스토이, 투르-프로 이루어진 트로이카는 이미 망가진 것 같지만,  <아버지와 아들>은 여전히 일독의 가치가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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