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키릴로프의 혁명: 신인-그리스도? 인신?
키릴로프에 관한 한 작가는 ‘관념’을 부각시키기 위해 ‘인간’으로서의 필수적인 속성, 즉 생물학적, 사회적 속성을 최소화한다. 가령, 샤토프와 같은 스물예닐곱이라는 나이는 깡그리 잊힐 만큼 무의미하고 건축기사라는 직업은 스체판의 유쾌한 농담대로(상권, 151) 그의 사상에 대한 아이러니 이상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 자살에 관한 책을 집필한다고 하지만 쉬갈료프의 노트만도 못한, 그저 소문일 따름이다. 섭생도 엉망이어서, 식사는 거의 하지 않고 차만 마시며 밤새도록 깨어 있다가 동틀 녘에 되어서야 잠자리에 든다. 작가 특유의 유물론에 기대자면 이런 무위 상태, 황폐한 생활 방식이야말로 가히 관념인의 탄생을 위한 질 좋은 토양인 셈인데, 간질병도 유전적 요인과 이런 환경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간단히, 키릴로프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여타 백수들 중 단연코 으뜸일 정도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인간, 나아가 관념을 위해 창조된 ‘종이 인간’(샤토프의 말: 상권, 216, 219), ‘자연의 품이 아니라 증류기에서 나온 인간’(<지하로부터의 수기>, 5: 104)으로 창조되었다. 이 때문에 또한 그는 <악령>이라는 극히 속된 세계에 속해 있으면서도 대심문관만큼이나 환상적인 층위에서 “누구 앞에 경배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경우 환상은 흔히 통용되는 장르가 아니라 인물의 내적 운동성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장르로서 삼차원적인 시공간을 초월한 간질발작의 찰나적 황홀경, 혹은 정지됨으로써 영원히 확장되는 시간(2시 37분에 고정된 키릴로프의 시계바늘: 상권, 370)처럼 관념의 영역에 속한다. 키릴로프는 ‘바위’ 자체가 아닌 그것에 대한 공포(=죽음=신), 즉 각종 관념의 극복을 꿈꾸지만 그것도 결국엔 또 다른 관념(인신)을 현실화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키릴로프의 인신사상은 니힐리즘(특히 ‘богоборчество’)의 범주에 속한다는 점에서 본질상 표트르의 정치론과 유사할 수 있다. 하지만 표트르가 외부 세계를 향한 공격성을 과시하는 반면(정치), 키릴로프는 오로지 자기 자신의 내면에만 집중한다(신화). 샤토프는 이를 광기로 치부하며 동정하지만, 키릴로프라는 인물만 놓고 보면 그는 오히려 ‘관념’과 ‘인간’의 변증법이 가장 조화롭게 발현된 예이며 심지어 그것의 육화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인신 되기’ 프로젝트는 ‘그리스도 되기’ 프로젝트의 변형이며 이 점에서 그는 누구보다도, 심지어 과거의 샤토프보다도 더 메시아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있는 자, 이른바 ‘가짜 메시아’이다. 그 자체로는 대단히 양가적인 이 콤플렉스가 설득력을, 또 미학적 정당성을 얻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전제조건이 바로 인물의 도덕적인 완성도, 그리고 믿음의 깊이다.
앞서도 언급했듯 스타브로긴이 미남에 부유한 귀족이어야 하는 것처럼, 또 샤토프가 추남에 불쌍한 농노여야 하는 것처럼, 또 표트르가 영리하되 치사한 행동분자여야 하는 것처럼 키릴로프는 절대적으로 선한 인물이어야 한다. 작가가 키릴로프를 거의 모든 점에서 그리스도의 모상이자 ‘조용한 돈 키호테’로, 우스꽝스러운 백치-광인의 모습에 가깝게 창조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잎사귀에 대한 사랑, ‘좋음’에 대한 믿음은 그가 신인(богочеловек)이든 인신(человекобог)이든 그냥 광인이든 하여간 비루한 인간들이 난무하는 <악령>의 텍스트에서 신의 유비로서의 인간의 원형에 가장 근접해 있음을 보여준다.
“나는 최근에 푸른빛이 약간 남아 있는 노란 잎을 보았습니다. 잎사귀 끝이 좀 시들었더군요. 바람에 날려 온 것이었지요. 열 살이 되던 해 겨울, 나는 일부러 눈을 감고 잎사귀를 그려보곤 했지요, 잎맥이 반짝거리는 푸른 잎사귀를. 그리고 햇빛이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눈을 뜨면 너무나도 좋았기 때문에 믿어지지가 않았어요, 그래서 다시 눈을 감았지요.”
“그건 무슨 알레고리인가요?”
“아-아니오…. 아니, 왜요? 나는 알레고리가 아니라 그저 잎사귀를, 잎사귀 하나를 두고 말하는 겁니다. 잎사귀는 좋아요. 모든 것이 좋습니다.”
“모든 것이?”
“모든 것이. 인간은 자신이 행복하다는 걸 모르기 때문에 불행한 겁니다, 오직 그 때문이지요.(…)”(상권, 369)
“모든 사람들이 좋다는 걸 가르치는 사람, 바로 그가 세상을 끝낼 겁니다.”
“그렇게 가르쳤던 사람, 바로 그를 못 박았죠.”
“그가 올 겁니다, 그의 이름은 인신(人神)입니다.“
“신인(神人)이라고요?”
“인신지요, 바로 그게 다른 점입니다.”(상권, 371)
키릴로프의 실제 삶도 그의 원칙과 이론에 전적으로 부합한다. 그는 ‘좋음’을 시시각각 느끼기에, 자살(죽음)에 탐닉하는 만큼이나 삶을 사랑하고 즐긴다. 가령, 죽을 날을 세는 낙으로 살면서 동시에 등뼈를 튼튼하게 하려고 매일 공놀이와 맨손체조를 하고 옆집의 갓난아이도 무척 귀여워한다. 정상적인 언어 구사 능력도 결여되어 있을 만큼 고립되어 있지만, 누가 오든 좀처럼 동요하지 않으며 상대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을 해준다. 극도로 궁핍한 형편에 값비싼 권총을 수집하는 것도 구태여 자살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그냥 그 자체를 즐기는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 있어 ‘관념’과 ‘삶’은 절대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그가 관념을 먹어치웠든 관념이 그를 먹어치웠든, 어쨌거나 진정한 니힐리스트는 ‘니힐-무’를 꿈꾸지만, 아니 그렇기에 더더욱 매순간의 삶을 사랑하는 자라는 것을 키릴로프가 몸소 보여주는 것이다. 이 미묘한 역설이야말로 훗날 카뮈를 비롯한 실존주의자를 매혹시킨 핵심적인 요소였을 것이다.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완성은, 비루한 현실과 각종 부조리에 대한 반항을 포함하여, 사유하고 행동하는 인간이 꿈꾸는 궁극의 지점이기 때문이다.
(<악령> 원고 중.)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키릴로프의 이른바 ‘형이상학적 욕망’을 잔혹하게 단죄한다. 최후의 순간을 충실한 ‘사도’가 아니라 ‘원숭이’ 표트르와 함께 하게 한 것은 상대적으로 사소한 장치일 것이다. 보다 본질적인 것은 표트르와의 장황한 대화, 심지어 고골 풍의 코미디를 연상시키는 육체적인 드잡이에서 키릴로프가 보여주는 우스꽝스러운 작태이다. 대체로 “그의 자살은 그가 평온한 오만함을 자랑하며 꿈꾼 것과는 달리, 또한 독자들이 속편하게 환상을 만드는 것과는 달리 절대로 원칙의 실현이 아니었다.” 그는 놀라울 만큼 다변을 과시하며 자꾸만 자살의 실행을 연기하는데, 이는 그저 목숨에 대한 집착의 표현일 따름이다. 표트르는 그의 독실함(“신부보다 더 열심히 믿는 것 같은데요”: 하권, 955)은 물론이거니와 이 생존 본능에 대한 통찰에 있어서도 전적으로 옳았다.
물론, 표트르의 짜증스러운 체념을 비웃기라도 하듯, 키릴로프는 기필코 방아쇠를 당긴다. 하지만 지리멸렬한 유예 끝에 행해진 자살은 강조하건대, ‘관념’의 거국적이고 비장한 실행이 아니라 마지못해, 차마 어쩔 수 없이 행해진 거의 ‘면피용’에 가깝다. 살아 있는 동안 오직 자살만을 외쳐왔고 이미 증인한테 유서까지 넘겨놓은 상태에서 멀쩡히 살아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그가 유서에 그려 넣고 싶어 한 “혀를 쑥 빼고 낯짝을 높이 쳐든 그림”(하권, 958)을 현실에서 재현하는 셈이 아니겠는가. 인신을 꿈꾸었던 자로서 이만한 창피와 낭패도 없을 것이다. 표트르의 시선에 의해 포착된, 자살을 전후한 장면을 보자.
창문 맞은편 벽 쪽, 즉 문의 오른쪽에 장롱이 있었다. 이 장롱의 오른쪽으로, 벽과 장롱에 의해 형성된 틈새에 키릴로프가 서 있었는데, 그것도 끔찍할 정도로 이상하게, 즉 두 팔을 바지솔기를 따라 늘어뜨리고 온 몸을 쫙 편 채, 머리를 치켜 올려 목덜미를 틈새 바로 안쪽 벽에 바싹 붙이고서 꼼짝도 않고 서 있었는데, 마치 기가 팍 죽어서 몸을 숨기려고 하는 것 같았다.(…) /(…) 그[표트르]가 키릴로프를 건드리기가 무섭게, 상대편은 재빨리 머리를 숙였고 그 바람에 머리로 그의 손에서 양초를 떨어뜨려 버렸다. 촛대는 소리를 내며 마룻바닥으로 떨어졌고 촛불은 꺼져버렸다. 바로 그 순간, 그는 자신의 왼손 새끼손가락에서 끔찍한 통증을 느꼈다.(…) 마침내 그는 손가락을 빼낸 뒤 어둠 속에서 길을 더듬으며 쏜살같이 그 집을 뛰쳐나갔다. 그의 뒤를 따라 방에서 나는 섬뜩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지금, 지금, 지금….”
열 번쯤. 하지만 그는 계속 달렸고, 이미 현관까지 달려 나왔을 때 갑자기 커다란 총성이 들렸다. 그 순간, 그는 현관의 어둠 속에서 정지한 채로 5분 정도 머리를 굴리다가 마침내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통풍구가 활짝 열린 창문 곁에, 두 발을 방의 오른쪽 구석으로 향한 채 키릴로프의 시체가 뻗어 있었다. 우측 관자놀이를 맞은 것이었고 총알은 두개골을 박살내고 좌측 위쪽으로 빠져나갔다. 피와 뇌수가 거품처럼 튀어나온 것이 보였다. 권총은 마룻바닥에 널브러진 자살자의 손 안에 남겨져 있었다.(하권, 963-966)
자살이 완료되는 순간, ‘살아 있는 삶’(живая жизнь)은 ‘관념’을 결정적으로 배반한다. 이 배반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모든 관념인을 통틀어 가장 순수하고 선량한 관념인을 통해 실현되었기 때문에 더욱더 의미심장하다. 키릴로프는 자살을 통해 최초의 인신이 된 것이 아니라 그냥 시체가 됐으며, 이로써 그의 관념이 생명력을 얻은 것이 아니라 그 관념을 존재케 했던 삶-생명이 뇌수와 피로, 유물론적이고 생물학적인 잔해로 환원돼 버렸다. 말하자면 얻은 것은 ‘관념의 육화’는커녕 아무것도 없고, 잃은 것은 삶 자체였다.
이제 더 이상 그는 야밤의 홍차와 몽상을 즐기지 못하며 그가 그토록 아꼈던 햇볕 아래 푸른 잎사귀를, 또한 갓난아이가 자라는 풍경을 볼 수 없다. 이런 ‘희생’을 대가로, 비록 기만적일지언정, 성스러움을 얻지도 못하고 표트르의 야비한 음모에 일조했을 뿐이다. 하지만 관념이 삼차원적 시공간과 부딪치며 만들어내는 이 불협화음과 균열이야말로 ‘낭만적 거짓’ 위에 우뚝 선 ‘소설적 진실’의 진면목일 것이다. 또한 바로 여기에, ‘신인-그리스도’도 ‘인신-가짜 메시아’도 아닌, 그저 그것을 향한 몽상을 먹고 살았던 한 ‘인간’ 키릴로프의 매력이 있기도 하다.
(키릴로프와 표트르 베르호벤스키)
-- 이 부분을 읽다 보니,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중에서도 [악령]을, 특히 키릴로프를 유달리 좋아했던, 그에게 그야말로 푹 빠졌던 한 친구가 생각납니다.
-- 샤토프와 키릴로프에 관해서는 <홀림에 관하여>(현대문학, 2007, 6월호)라는 제목으로 짧은 글 한 편을 쓴 적도 있습니다. 소설 텍스트에서 언급만 되고 묘사는 안 되는, 둘의 아메리카 동거 시절을 소설로 써보고 싶었던 적도 있었는데요... 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