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의 문장

 

 

 

 

 

아이가 펄펄 끓는 동안에도 강낭콩은 쑥쑥 자랐다

태양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연덕스레 떠오르고   

소싯적 떡잎은 세상 미련 없다는 듯 쪼그라들고

본잎은 살판 난 듯 푸르러지고 꽃이라도 피울 기세다

 

중세 사람들이 가장 자살을 많이 한 시각은 자정 이후 새벽이라고 한다

 

책상 앞에 구겨지듯 앉는 아이를 보며 강낭콩 줄기를 움켜쥐고

뿌리째 뽑으려다가, 더한 천벌 받을까 무서워 마음을 고쳐 먹은

지금은 정오 

 

물끄러미

정오의 문장이 쓰였고 나는

이제 막 의욕을 가질 참이다

 

 

 

 

 

 

 

 

 

 

 

 

 

 

 

 

 

 

 

물끄러미 / 자정의 문장을 썼다. // 나는 의욕을 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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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떠올라 찾아봤는데 내가 제일 좋아한 정윤희 사진이 <안개 마을>(1982, 임권택: 원작 이문열 <익명의 섬>) 속 한 장면이었다. 아쉽지만, 영화는 보지 못하고 리뷰만 대충 봤다. 아, 저게 시골 학교 선생님의 모습이구나. 나의 '그' 학교에 정윤희만큼 예쁜 선생님은 없었지만(언제 봐도, 누가 봐도, 의심의 여지 없이, 단군 이래 최고의 미모!^_^) 저런 느낌들은 있었다. 어떤 사진을 봐도 너무 예쁜데, 저 미모의 핵심은 어딘가 모르게 슬퍼 보이는, 어떤 우수와 비애의 분위기, 그런 아우라에 있지 않나 싶다. 그 베이스^^에 양념처럼, 토핑처럼 백치미, 섹스미, 귀요미^^;, 청승미, 관능미, 촌스러운^^미, 원시^^미 등등이 붙는다. 위의 사진은 (역시나 저 우수의 느낌에 덧붙여) 단아한 지성미 같은 것이 있다. 아마 그래서 손에는 책/공책.   

 

 

 

 

 

전체 배경, 하얗지만 그보다는 희끄무레하고 우중충한 느낌의 날씨, 카키색과 베이색이 잘 섞인 트렌치코트, 무엇보다도 빨간 우산과 빨간 입술, 넘나 예쁘다. 밑에 흑백 사진, 머플러가 붉은 계열이다.

 

 저 영화 스틸컷을 쭉 본다. 내가 산, 산 적이 있는 80년대 시골의 풍경이 어찌나 사실적이던지. 한편으론, 그것이 어찌나 아뜩, 아득하게 느껴지는지. 역시나. 우주보다도 낯설고 먼. 그리고 아름다움, 미는 항상 우리를 교란한다.

 

이 사진도 되게 좋아하는데, 출처가 어디인지. 저렇게 은은하게 웃고 있는데도 어딘가 슬픔이 묻어나오는 미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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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모종 사러

 

 

 

 

모종 사러 가는 길

자작나무 심는 장면을 보았다

원래 있던 건요?

죽었어요, 죽어서 다시 심는 거예요,

라고 대답하는 늙수그레한 남자, 당신은 

나무 심는 사람, 살아 있고 건강해서 좋겠다

 

모종 사는 동안

러시아 자작나무처럼 두툼하고 하얀 중년 남자

작게 혼잣말하고 눈은 멍하고 손끝은 떨린다

어른의 몸에 아이의 정신, 당신도 좋겠다

햇살이 투명한 비처럼 내리는 날 모종 산책이라니

 

모종 사서 오는 길

오이 깻잎 상추 모종을 보자마자 아이가 절규한다

엄마, 이건 우리가 심은 게 아니잖아!

텃밭에 쪼그리고 앉아 모종을 옮겨 심는 심사란

 

역시 4월은 잔인한 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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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그러니까 4월 20일 화요일에 거의 넉달만에(!) 아이가 가방(2킬로 남짓)을 직접 메고 하교했다. 추체외로증후군일 것이 확실시되는 증상 이후 처음이다. 거의 항상 내가 이렇게 가방을 들고 오거나, 아이가 메더라도 거의 부축하다시피 데려온 것 같다.

 

 

경련을 하고 있기 때문에(부디 소거발작이라면 좋을 텐데! ㅠㅠ) 약을 아주 안 먹일 수는 없으나, 정말이지 약이라는 것이 너무 무섭다.(코로나 보다도, 지난 금요일 내 동생이 맞은 저 백신이 더 무섭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이의 학교 생활이 상당 부분 궤도에 오르고 있다는 것. 지난 주에 이어 이번 주도 엘리베이터를 전혀 타지 않고 계단으로 올라간다. 3월말부터 알림장을 제대로 다 써오고 있다. 그다음 교과목 학습 수준인데...  

 

4학년 1학기, 첫 한 두달 동안 아이는 네 과목 단평을 다 봤다. 수학은 두 번이나 봤다. 지난 주는 시험을 세 번(즉 삼일) 봤다. 시험지를 보니 난이도 높은 응용 문제가 많지 않은, 그야말로 기본적인 수준이다. 그걸 감안하면, 수학 정도만 따라간다고 할 수 있고, 나머지 교과는, 솔직히, 학창 시절의 나를 생각한다면, "저런 아이들은 왜 학교 오지? -_-;;"하고 생각했던 수준이다, 음.(그 생각에 대한 벌을 지금 받고 있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수학은 1, 20점도 있다고 하니, 음 -_-;; 일단 기록 삼아 남겨둔다.

 

사회를 워낙 싫어하고 어려워하는데(쓸 게 넘나 많다!!) 아이 평생 첫 단평치고는 선전했다고 본다. 많이 틀려서 다시 풀 것이 많았다.  

 

과학. 진짜 반타작. 집에 와서 풀리니 조금 낫긴 한데, 하나마한 소리. 시험이란, 점수의 세계란 냉정한 것. 컨디션 관리까지도 시험 점수의 영역이다. 사회보다는 과학을 좀 더 좋아하는 것도 점수에서 증명된다. 딱 10점 더 좋아하나보다^^;

 

 

수학 2단원 각도. 실행증이 심해서(요즘은 손떨림도 더 심하고) 각도기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른바 이론은 거의 다 맞았더라, 감동했다. 삼각형 세 각의 합, 사각형 네 각의 합 등. 수학을 할 때는 아이도 행복해 보인다. 못 하면 속상해 하기도 한다. 100점 받은 친구가 부러웠다고.

 

 

 

*

 

 

 

비온 뒤의 장미. 주말에 많이 아팠지만, 봄이 너무 예쁘다! 아프고 나니 봄이 더 예쁘다!

 

 

지난 주 수, 학교에 시냇물 ㅋ

 

네가 봄이다, 아이야!

 

*

 

 

과학 3단원 식물의 한살이. 강낭콩을 키우고 있습니다. 4월 13일부터. 아침에 3센티였는데 지금 재보니 8센티. 식물의 성장, 생장이 동물보다 더 역동적, 육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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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봄나무 봄꽃 봄풀 들 사이로, 지난 겨울의 그(!) 장미. 

 

 

4월 8일

 

 

4월 16일, 즉 오늘 아침.

장미나무에 새 순이 돋다 못해 잎이 푸르러지는데도 죽지 않고 있다. 가운데 녀석뿐만 아니라 옆에 작은 아이들 두 송이도. 불멸, 이라고 밖에는.

 

 

 

* 어제 아이와 함께 집에 오는 길에 집 근처에서 배추흰나비 한 마리를 보았다. 알에서 애벌레, 번데기, 성충을 거쳐 저렇게까지 한살이를 완료하는 개체가 많지 않다. 이른바 '죽을병' 걸린 친구나 가족, 친지가 안쓰러워질 때마다, 나 자신에게 말한다. 너도 곧 죽어. 그리고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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