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아무튼
접속사 없이 글을 쓰기가 힘들다. 특히 아무튼. 이 낱말은 논리와 인과의 결여를 정당화한다. 아무튼을 지양하자. 숫제 추방하자. 아무튼, 변신의 한 양상에 대해 생각해본다. 아줌마-되기, 할머니-되기, 중환자-되기, 벌레-되기, 시신-되기, 신-되기. 변신은 배신이다. 배신은 배반. 배반은 배변을 닮았다. 배변 역시 배반. 아까 입속에 집어넣은 향긋한 음식이 구린내 나는 변으로 변신하여 지금 항문 밖으로 빠져나온다. 변신을 꿈꾸다 배신을 하니 배변을 본다. 변화를 꾀하다가 변고를 당하는 격이다, 아무튼.
시골집 언덕에서 머윗대를 뚝뚝 끊어 왔다. 무릎 하나를 세워두고 방바닥에 퍼질고 앉아, 끓는 물에 살짝 데쳐낸 머윗대 껍질을 무던히, 심드렁하니 벗겼다. 풀 물이 손톱 밑 살에 스미도록 이런 자세로 이런 일을 하는 나의 모습이 참 자연스러웠다. 이런 나를 완상하며 그 자연스러움에 녹아드는 또 다른 나 역시 참 자연스러웠다. 스스로 자, 그럴 연. 개고기를 먹을 때는 불에 그을려야 제 맛이라니. 자연이란 스스로, 그런 것이다.
하고 싶은 일만 할래요, 그것도 하고 싶을 때만 할래요, 하기 싫은 일은 하기 싫어요, 아예 하지 않을래요. 그런다고 해서 제가 유달리 까다로운 건 아니잖아요? 아무튼 덜 하고 싶은 일도 할 수밖에 없을 때가 있지요. 아침 잠이 많아서 관직은 싫고 항일은 몸이 고단할 것 같고 친일은 마음이 고단할 것 같고. 아무튼 그래도 뭘 하긴 해야 한단 말이죠. 달, 별, 꽃, 바람, 웃음, 농담, 그런 것들. 나는 이렇게 쓸모 없고 아름다운 것들을 좋아한답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아니, 인간. 자연과 인간은 변신과 배신과 배변과 변화와 변고로 이루어져 있지 않나 싶군요.
내 이름은 빨강, 네 이름은 파랑, 얘 이름은 노랑, 쟤 이름은 초록, 걔 이름은 검정. 자연의 색깔은 무한이지만, 색깔의 이름은 유한하다. 모든 것을 섞었더니 검정이 되었다가 갑자기 하양이 되었다. 빨강 파랑 노랑 주홍 초록, 아무튼. 대명사도 유한하고 접속사도 유한하다. 접속사를 지양하자, 숫제 추방하자. 특히 아무튼을 때려잡자. 무의미의 의미, 무논리의 논리, 부조리의 조리. 아무튼은 아무 짝에도 쓸모 없어.
그런데 내가 이런 말들을 왜 쓰고 있지?
심심해서? 그럴 리가.
*
[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 청년·가족·인간·미남…새로운 이름을 찾아서 | 중앙일보 (joongang.co.kr)
<미.션.> 김희성 대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