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본 <살인의 추억>의 원작이 연극 대본이었음은 이번에 알았다. 그런데 표현 매체가 달라지면 사실상 흔한 의미의 '베낌/표절'은 얼토당토 않고 소위 '개작' 역시 무의미해보인다. 요컨대 창작이다. 기록문학(다큐멘터리), 소설, 연극, 영화, 뮤지컬 등. 이런 문제를 창작의 관점에서(^^;) 고민해볼 수도 있겠다.

 

 

 

 

 

 

 

 

 

 

 

 

 

 

 

 

최종 텍스트, 이 경우 영화의 관점에서 보면 위의 텍스트들이 대본에 해당한다. 영화 대본, 즉 시나리오는 실제 촬영 과정에서 적잖은 변주를 거치며 영화로 완성되는 것으로 안다. 많은 애드립, 또 즉흥적인 소품들(심지어 벌레 한마리, 이런 것). 이런 것을, 이번 학기에는 희곡을 한 편 다루는 김에, 생각해보면 좋겠다. 덧붙여, 어느 장르든 시대 의식 없는 작품이 살아남는 경우는 드문 것 같다. 그만큼 작가는 명민해야, 예민해야 한다는 뜻이리라.

 

 

 

 

 

 

 

 

 

 

 

 

 

 

 

 

셰익스피어 시절은 물론 이후에도 소위 공연 대본이 이렇게 활자화된 책-고전으로 남으리라 누가 생각했을까. 혹은 생각했다고 하더라도, 그 심판을 거쳐 살아남는 텍스트는 극소수. 이건 사실 어느 분야나 똑같으니 하나마나한 얘기. 아무튼 서양은 극 장르의 역사가 길지만 우리는 참 일천하다. 지금 <희곡선1>의 두 작품 읽었다 -_-; (편집이 아주 잘 되어 있다! 편집한 양승국 교수도 한때 등단한 극작가(?)인 것으로 안다.) 암튼, 생각보다 수준이 높아서 놀랐는데, 시나리오-영화 역시 비슷한 속도로 발전하길 바라는 마음, 크다.

 

 

 

 

 

 

 

 

 

 

 

 

 

 

 

 

*

 

소설을 비롯한 여러 책 텍스트와 달리 연극, 영화, 뮤지컬 등은 표현 수위가 정말로 중요한 문제일 법하다. 봉준호 감독 영화는 보통 '청불'(미불^^;)이 많은데, <살인의 추억>은 뜻밖에도(?!) 15세였다. 참 잘한, 좋은 일인 것 같다. 제목만으로도, 사건의 얼개만으로도 후덜덜. 그래도 많은 관객이 볼 수 있도록 하려면 표현 수위를 낮추는 것이 옳을 법하다. 그렇게 낮추었다고 해도 폭력 장면도 많고(실제 취조실의 폭행, 고문은 우리의 상상의 초월할 터) 아이의 가방에서 소지품 꺼내서 나열하는 장면은 차라리 없었으면 좋겠다 싶을 만큼 무서웠다. 하지만 그 정도의 공포는 감당하라는 것이 감독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구로사와 아키라를 좋아하여 오래 전 그의 영화를 거의 샅샅이 뒤져 보았다. 그 역시, 큰 줄거리와 주제를 드러내려고 하지, 잔혹한 장면에 변태적으로 집착하지 않는다.(여기도 일본 중세를 배경으로 나름 '강간의 왕국'이기도 하다.) 그런 과는 또 따로 있는 것 같다. 그런 쪽에 초점을 맞춘 공포영화, 스릴러는 그 나름으로 매니아 층이 있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아무래도  보편성을 중시하는 예술가라면, 표현 수위 문제는 신중한 고려의 대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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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미루어둔 봉준호 감독의 2003년 작 <살인의 추억>을 보았다. 러시아 갔다가 귀국한 것이 2004년 2월인데, 이 영화를 꽤 보고 싶어 했던 것 같다. 봤다는 후배한테 줄거리를 물어보며 '스포일'을 강요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마지막에 범인이 잡혀?" 어제 좀 찾아보니 감독은 범인을 소위 '특정하지' 않았다고 한다.(나는 '특정하다', '특정되다'의 동사적 사용이 상당히 불편한데, 자꾸 들으니 편리해보이긴 한다.) 즉, 어쩌면 박해일도 범인이 아닐 수 있는 가능성도 없지 않으리라. 99프로 범인으로 보이지만, 맨처음 취조당할 때 그가 하는 말에 힌트가 있을 수도. "죄없는 놈들 잡아다가 족치고~~" 등등. 어쩌면 그보다는...

 

"(가라) 밥은 먹고 다니냐? (가라)"

 

흑, 이 명대사 드디어 들었다. 정말 명불허전, 배우들의 탄복할 만한 연기력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떻게 그리 잘 재현했는지, 80년대 후반 농촌-도시의 중간쯤 되는 시공간의 모습에 정녕 나 자신이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천고마비라고, 파란 가을 하늘 아래, 노랗게 익은 벼들, 터덜터덜 신작로를 달리는 경운기, 철 없이 뛰놀며 메뚜기 잡는 아이(들), 경운기에 거꾸로 탄 송강호가 시신을 보러가는 줄은 몰랐다. 아, 물론 영화를 처음 봤으니. 이런 아름다운 대조의 미학은 이후에도 꾸준히 영화를 지배한다. 첫 장면 남자꼬맹이가 잡던 메뚜기, 그런 메뚜기가 가득 담긴 병, 굳이 그것을 어른들한테 감추려는 제스처, 이건 또 뭘까. 다시 돌아가서 보고 싶었는데, 이미 너무 늦은 시각이었다.(그래서 지금 머리가 무거움.)

 

누구나 느끼겠지만, 전두환/노태우(우리는 이 이름 자체를 발음하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 나뿐놈들!) 저 80년대가 영화 속에 만연하고 그 코드가 속속들이 박혀 있다. 무엇보다도, 말하자면 '우리 편'인 형사들, 특히 송강호와 김뢰하, 두 사람은 우리가 정녕 '폭력과 야만'을 살아왔음을 너무도 여실히 보여준다. 그들의 아버지 변희봉은 급기야 퇴물로 사라지고 만다. 그 다음은 좀 달라지나. 송재호, 김상경 등은 보다 더 선진화되고 문명화된 버전이다. 패는 대신 말로 하려고 한다. '~깜'이나 '발바닥'이 아니라 '서류'로 해결하려고 한다. 그러나 전체적인 시스템 속에서, 그 다음 전대미문의 흉악한 범죄(자) 앞에서 누구보다 더 '야만화'되는 것은 또한 김상경이다. 아마 그의 분노와 폭발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여중생 희생자와 앞선 장면(상처에 밴드 붙여주는 것)을 넣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전체적으로 역사가 퇴보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역사는 진보한다.

 

*

 

사실 <기생충>은 뒷북이지만 <살인의 추억>은 오히려 뒷북이 아니게 돼버렸다. "참 시의적적하다." '연쇄살인'이라는 것 자체가 굉장히 '선진적인' 범죄유형이다.(라고 한다.) 아주 오래 전, 겁 없던 대학 시절에 본 데이빗 핀처 <세븐>에서,, (첫) 사건을 접한 노회한 형사 모건 프리먼의 대사. "It's just  beginning." 이걸 자막에 "연쇄살인"이라고 번역했다. 초짜 형사인 브래드 피트인가 누가 묻는다, 왜냐고. 답: 이유가 없거든. (이건 영어가 기억 안남 -_-;)

 

아마 화성 사건은 이 점에서 참 놀랍지 싶다. 영화와 달리, 실제 범인은 체모, 담배꽁초 등 꽤나 흔적을 많이 남겼다고 한다. 그리고 너무나도 순정만화스러운, 기품 있고 지적인 박해일 같은 이미지는 아니었을 법하다. 손이 부드러웠다, 라는 디테일은 여러 모로 참 중요하다. 그럼에도 유재하, <우울한 편지> 관련 스토리는 거의 전적으로 소설적, 아니, 영화적 설정이라니, 여기서 감독의 미감이 엿보인다. 통상 악마적인 인물을 고급스럽게(?) 묘사한 여러 텍스트들이 엿보이기도 한다.(당장 떠오르는 건 <악령>의 스타브로긴이다. 우선은 잘 생겨야 한다!) 형사들, 심지어 기자(박기자?^^;), 희생자들, 심지어 여타 '디테일'(봉테일!)에 대한 애정까지, 영화든 소설이든 무릇 예술은 자신이 담아내고자, 창조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깊은 사랑과 관심, 무한한 공부의 산물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세상에 들판에서 링거를 맞다니! 영화를 본 뒤에야 어떤 장면인지 알았다.)

 

다른 한편, 시대에 대한 심판(?)도 물론 보인다. 결국 범인을 못 잡은 것이 결국 그것. 다 잡고 놓친 것이든, 아예 수사권에 포착도 못한 것이든 어쨌거나 이것은 '실패한 미션'에 관한 영화다. 즉 비극이다. 송강호가 형사를 그만둔 것도 그 상징일 터.(그런데 형사 안 하고 딴 일, 사업? 하면서 더 잘산다^^; 전미선과 알콩달콩, 아파트 좋고, 애도 아들 딸 둘이고^^; 과거의 이력은 아들을 취조^^; 할 때 빛난다!) 결과적으로 자기 때문에 백광호가 죽게 되는 것, 쌩 하고 기차 지나가면서 송강호 손에 묻은 피가 그 표현. 그리고, 자신의 열등감과 분을 못 이겨 고깃집(술집)에서 폭행을 휘두르던 김뢰하가, 무심코(?!) 내두른 백광호의 나무토막(실은 못!)에 다리를 얻어맞는 것. 파상풍 때문에 급기야 그 다리를(그나마 무릎 이하라고^^;) 절단해야 하는 것도 그렇다. 송강호의 눈으로, 덧신(?) 신긴 그의 군화 한쪽을 살짝 클로즈업한다.

 

여러 말 필요 없다. 군홧발. 이걸로 80년대가 다 설명되는 것 같다.

흑, 그럼 나의, 우리의 학령기가 그렇게 참혹했단 말인가.

 

 

 

 

 

 

 

 

 

 

 

 

 

 

 

 

불과 10년만 뒤로 가도 엄청나게 옛날 같다. 유학 갔다가 돌아온 공항, 남자친구의 형(현 아주버니)이 마중을 나왔다. "이거 **가 주래요." 그러고 처음 받게 된다, 슬라이드 형 휴대폰. 그 당시에는 아주 기능이 많다고 생각되었다. 폰을 몇 번 갈고, 스마트폰으로 넘어온 것이 언제던가. 기계에 별로 예민하지 않아, 아마 아이가 두세 돌쯤 되었을 때가 아닌가 싶다.  심지어 10년도 안 되었건만, 그 시절도 무척 옛날처럼 느껴진다.

 

하물며 80년대, 말해서 뭣하랴. 형사들이 모두 담배를 피운다. 실제 사건의 용의자를 보았다는 버스기사의 증언. 버스에 타서 옆자리에 앉았고 라이터를 빌려달라고 했다고. 헉, 버스 안에서 담배를? 그랬던 시절이다. 시골 버스는 더 했다. 할배들 다 담배 피웠고 아이 엄마들, 아이 업고 걸리고 그랬다. 기차안의 풍경도 그랬다. 심지어 객실 안에서 술판도 벌였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지만, 그 당시에는 아주 말이 되는 것이었다. 'make sense'라는 표현 있지 않나^^; 비슷하게, 범인을 못 잡은 것도 이해가 되는 것이다. 전경들이 모조리 데모 진압하러 서울 갔다고^^; 브리핑 하는 데 종이 걸어 놓고 하고 ㅋㅋ

 

*

 

아마 감독은 2003년쯤 이 살인마가 화성 일대는 어슬렁거리며 '살인의 추억'을 곱씹으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게 미학적, 예술적 출발점. 송강호는 사업차 우연히 그곳을 지나다가 농수로를 들여다 본다. 첫 장면처럼 이 장면도 너무 예쁘고(!) 앞서 나온 남자아이의 대응처럼 여자아이가 또 나온다. "... 뻔한 얼굴... " "... 옛날에 자기가 여기서 한 일이 생각나서..." 정녕 악의 평범성이랄까. 아무튼 봉 감독의 추측은 틀린 셈이 되었는데, 역시나 그가 살인마가 아니기 때문이리라^^;  살인마는 살인을 멈출 수 없다, 아마 살인을 저지르지 못하는 상황(죽었거나 다른 범죄로 감옥에 있거나)에 처했을 것이라는 유영철의 말이 결국 맞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런데 진짜가 맞다는 그놈은 정녕 진짜인 거냐. 나도 너무 보고 싶다, 그놈.

 

(그리고 배우들, 왜 이리 젊냐..ㅠ 감독도 볼살이 통통한 것이 넘나 젊더라는 ㅠ)

 

 

가을의 논이 너무 예뻐서...

 

 

저 아이들도 다 컸다! 송강호는 넘나 큰 얼굴, 넘나 서민적, 평민적 얼굴, 이런 스크린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얼굴인데, 바로 그것이 그의 무기였던 것이다. 나날이 발전하는 연기력은 물론 노력의 산물이겠지. 청장년을 거쳐 이제 중년. 노년의 그도 보고 싶다.   

 

*

 

막간에, 라고 썼는데 지난 2주 동안 정신이 없었다. 아직 다 끝난 건 아니지만 '서류(준비)'라는 것이 그 본질상 얼마나 G-R-인지, 얼마나 'ㅈ '같은지, 정말 입에서 'ㅆㅅㄲ' 이런 육두문자를 내뱉고 싶은 심정이었다. <살인의 추억> 속 형사들이 내가 할 욕 다 해준 기분. 욕의 카타르시스랄까. 나도 '미국'(실제는 일본으로 보냈다던데)에서 올 서류-결과를 기다리는 신세가 될 테니 이거야말로 정말 'ㅈ' 같다. 나도 주먹질, 발길질 이런 것도 마구 하고 싶은 심정인데, 역시나 대신 다 해주었다 -_-;; 심지어 교훈까지! 폭력은 안 돼, 안 돼^^;;  김뢰하의 종아리에 박혔다가 빠진 녹슨 못처럼, 폭력은 결국 부메랑이 되어 나를 죽인다.   

 

이제 슬슬 <악령>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전작주의까지는 엄두를 못내더라도, 그의 사실상 입봉작도 보고 싶다. <플란더스의 개>가 연애소설(^^;;)인 줄 알았는데, 이 역시 연쇄- 사건을 다룬 모양이다. 봉 감독은 어릴 때부터 처음부터 이런 '연쇄-'에 상당히 끌린 모양이다. (사실 <기생충>도 어쩌면 연쇄 사기극^^;) 스릴러와 블랙코미디의 결합. 그러게, 사람 참 안 변한다. 아, 나 잘 쓰고 싶다, 흑 ㅠ 나도 어릴 때는 싹이 없지 않았을 텐데... 아닌가?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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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는 체계가 필요하다

 

 

또 책을 낸다. 번역한 책이 아니라 쓴 책이지만 소설책이 아니다. 때로는 글자를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설레며, 때로는 관성의 법칙에 짓눌린 수험생처럼 억지로 읽고 나름대로 공들여 쓴 글들, 즉 공부의 기록이다. 거의 모든 글에는 작가의 전기가 정리되어 있는데, 이는 내가 남의 사생활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이 글들을 쓰는 동안 나는 비단 소설가가 아니라 명실상부한 작가-글쟁이가 되었다. 작가는 아무 책이나 쓸 수 있다. 모든 책에는 그러나, 체계가 필요하다.

 

이 책은 총 아홉 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은 어릴 때부터 좋아한 <적과 흑>, <고리오 영감>, <보바리 부인> 19세기 프랑스 소설을 읽기 위한 장이다. 르네 지라르의 모방 욕망을 염두에 두었다. 2장은 문학 이상의 문학, 소설 이상의 소설에 관한 장으로서 오늘날 철학서로 자리 잡은 에세이에 관한 글도 들어갔다. 인간과 세계의 모순을 탐구한 문학은 확실히 그 형식 역시 모순이다. 원래는 3장과 한 데 묶여 있었다. 4장은 주로 생활과 일상이 담긴 세태 소설을 다루었는데, 영미문학과 러시아문학의 -메이드소설이 포함되었다. 교과서 소설은 ()’의 기록임이 드러난다. 5장은 청소년기에 즐겨 읽은 성장소설과 예술가소설에 대한 글이 대부분이다. 일본 근대 소설 역시 그 맥락에서 읽어보았다. 6, 7, 8, 9장은 각각 카프카, 카뮈(사르트르), 쿤데라(오웰), 보르헤스(나보코프, 에코)를 염두에 두고 구성하였다.

이 책의 처음과 끝에 위치한 작품이 모두 책에 관한 책이다. <돈 키호테>에서 <픽션들>과 <장미의 이름>까지 나의 읽기는 극히 주관적이다. 그럼에도 독자들이 공유할 만한 지점이 있으면 좋겠다.

 

*

 

나 역시 어느 시인처럼 나를 환멸로 이끄는 것들중 하나로 (“모교의 정문과 더불어!) 주저 없이 인용과 각주를 꼽겠다.(심보선, <슬픔이 없는 십오 초>, 문학과지성사, 2008.) 그 무게에서 해방된 가뿐한 글쓰기를 꿈꾸었으나 책에 관한 책이라 인용이 불가피했다. 각주 역시 참고문헌 목록으로 흔적기관처럼 남았다. 천형이라면 웃기고 자업자득이다. 이참에 44년을 넘긴 내 인생을 요약해본다.

 

19751, 태어났으며

10, 공부했고, 자랐고, (부모) 집 떠났으며

20, 공부했고, 소설 썼고, 담배 피웠고, 연애했고, 번역했으며

30, 공부했고, 강의했고, 논문 썼고, 번역했고, 소설 썼고, 결혼했고, 담배 끊었고, 아이 낳았으며

40, 공부하고, 강의하고, 논문 쓰고, 번역하고, 소설 쓰고, 책 내고, 담배 안 피우고, 아이 키우고,

암과 치매와 실명 없는 노년을 꿈꾼다.

  

누군가에게는 하강일 수 있는 문학이, 경상남도 거창군의 으슥한 산골에서 의무 교육만 간신히 받은 농부의 장녀로 태어난 나에게는 시종일관 상승이었다. 여섯 살이 되던 해 여름, 부산 사는 삼촌의 결혼식에 가던 길에 아빠의 손을 잡고 조만간 내가 다닐 학교를 구경 갔던 일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우리 집에서 5킬로미터는 족히 떨어진 그 야트막한 학교는 물론, 폐교된 지 오래이다. 그해 겨울 우리 가족은 거창을 떠나 부산의 산동네에 단칸방을 얻었다. 이듬해 봄, 나는 학교에 들어갔다. 한 반의 학생 수가 쉰 명도 넘던 시절, 오후반도 있던 시절이다. 그 역사적인 1981년에 읽고 쓰는 법을 배웠고 책의 세계에 진입했다. 나쁜 종이에 조잡한 그림이 들어간 교과서가 전부였음에도 그것은 아주 처음부터 문학의 형식을 갖고 있었던 듯하다. 처음 손에 잡은 순간부터 너무 좋았다, 책이라는 것이.

 

나의 책읽기는 중학교 시절 값싼 문고판으로 시작되어, 장학금과 과외비 덕분에 현금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대학 시절에 절정을 이루었다. 19933월부터 박사학위를 받은 20042월까지 촘촘히, 빼곡히 들어찬 11년의 세월 동안 단 하루도 빠짐없이 꿰차고 있던 학생증을 버리기가 얼마나 아까웠던가! 이후, 또 한 번의 시간 덩어리를 여전히 비정규직 신분이지만 러시아문학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또 그것을 연구하고 번역하는 학자로 살고 있다. 러시아문학에 한정된 좁은책읽기에 환멸을 느끼던 삼십대 중반쯤, 다시 넓은책읽기를 넘보았다. 2009<문지문화원 사이>에서 세 학기 동안 진행한 세계문학 읽기 강좌가 시발점이 되었다. 그와 얼추 맞물려 2010년 가을부터 2011년 상반기까지 <네이버> 문학 캐스트에 세계문학을 소개했다. 맨 처음 다룬 책은 사르트르의 <말>이다. 2012년부터는 <책앤>(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 귀한 지면을 얻어 2015년까지 썼다. 2016년부터는 소설 창작 강의를 맡아 세계문학의 전범과 전위의 소설을 두루 읽고 있다.

 

2010121, 정녕 마지못해, 하루 두 갑 진정한 골초에서 비흡연자가 되었다. 나쓰메 소세키의 <그 후>에 관한 글은 담배 없이 쓴 첫 번째 글이다. 솔직히, 담배를 피우고 싶어 죽는 줄 알았다. 2011년 한여름에 아이가 태어났다. 출산 이후에는 흡연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담배를 안 피워도 나는 사람이지만 책을 읽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새끼를 낳아 젖을 먹이는 포유류의 일종, 한 마리의 암컷일 뿐이었다. 물론 이 역시 숭고한 실존이지만(동물-인간으로 회귀!) 그것을 배면으로 책의 삶이 얼마나 숭고한 실존인지(사람-인간으로 회귀!) 새삼 깨달았다. 사람은 무릇, 책을 읽어야 사람이다. 이 책의 거의 모든 글을 몸 안에서, 그리고 몸 밖에서 아이를 키우며 썼다. 아직도 걸음걸이가 불안정한 아이가, 물론 건강하고, 덧붙여 책을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으로 자라주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끝으로, 사족 한마디. 내가 가끔 아이보다 책을 더 사랑한다고 해서 엄마가 아닌 건 아니다. 밤낮을 잊고 몇날며칠을 담배와 단둘이 골방에 틀어박혀 있던, 아이 이전의 황금시대가 너무 그립다. 조금의 시건방과 비아냥도 없이 말하거니와, 공부는 내 인생의 거의 전부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가 언제까지 모범생이어야 하니러시아 유학 시절 이런 따사로운 답장을 보내준 절친했던 라이벌이 작년에 암 수술을 받았다. 이 나이에 뭘 어쩌겠는가. 우리는 언제까지나, 여전히 모범생일 필요가 있다.

    

 

2019년 여름, 김연경

 

 

*

 

 

 

 

 

 

 

 

 

 

 

 

 

 

 

독서 에세이집은 처음인데, 편집 과정이 길었다. 처음에 초고를 넘길 때는 독자서비스(?) 차원에서 원문 인용을 많이 넣었다. 하지만 분량이 너무 많아져서, 또 저작권 문제 때문에 인용문을 대폭 줄이고 대신 내 말로 푸는 수고를 많이 해야했다. 몇 꼭지를 그냥 확, 덜어내기도 했다. 그 결과 책이 훨씬 깔끔하고 날씬해졌다.

 

표지에 담배를 피우는 3,40대 여성 사진을 쓰자고 제안한 건 나다. 저 얼굴은 프랑스와즈 사강이라, 한데 이 책은 사강에 대한 책이 아니라, 다른 것을 쓰고 싶었지만, 흥미롭게도(^^;;) 저것이 사강인 것을 알아본 사람이 나 말고는 별로 없었다. 한편, 내가 고른 것은 너무 퇴폐적(^^;;)이라, 저 책의 주요 독자층(자식들에게 고전을 읽히려는 나 같은 아줌마^^;)을 염두에 둔다면 좋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담배,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퇴폐적(^^;)인지라 , 현재의 시안으로 낙착되었다. 만들고 나니, 좋더라. 그리고 한 장 넘기면, 지난 겨울 <창비 까페>에서 찍은 내 사진이 나온다. 어릴 때는 나도 한 인물 했는데 -_-;

 

제목, 목차, 서문은 마지막까지 (편집자와 함께) 고민한 것이다. 제목은 결국 내가 제안한 것이 채택되었는데, 20여년 작가 인생에 참 드문 일이다^^; 서문은 지금 올린 것에서, 중간부분을 뭉텅 덜어냈다. 그 결과, 역시나 서문이 깔끔해졌다. 나보코프는 <롤리타> 후기에서 자신의 개인사는 누구의 관심사도 될 수 없으나, 라는 식의 말을 했지만, 나는 반대의 지점에서 출발한다. 서문에서 잠깐 언급한, 거창 고제면의 개명 국민(초등)학교는 올 여름에 탈고한 소설에서 좀 묘사를 해보았다. 

 

자, 그러니까...

이제는 소설이 나올 차례다!

그런데 어디서, 어떻게? -_-;

아무튼 '삼재'가 끝났으니(나는 영원한 미신주의자!) 이제 당분간은 인생이 풀릴 것이다.

이런 믿음 자체가 소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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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나왔다. 그동안 쓴 책, 번역한 책이 적지 않지만, 나오자마자 세일즈포인트가 천단위로 뜨는 책은 처음이다. 그동안의 원한을 설욕할 것 같은 느낌! 그 느낌이 너무 좋아 오히려 무섭다. 그다음, 내숭 떨지 않고 말하자면, 참 열심히 공부하고 썼다. 쓴 것보다도 저 많은 걸 언제 읽었는지 그게 더 아뜩하다. 말마따나, "제가 속도 없고(좁고) 재능도 없지만 성실하긴 무척 성실하여~~~"

 

*

 

나의 행복은 타인의 불행, 나의 불행은 타인의 행복,,, 이던가.

굳이 이렇게 생각할 건 없으나 지난 수요일 아침 7시 20분에 남동생이 **병원에서 뇌종양 수술을 시작했다. 내가 한 일은 물론 아무것도 없고, 폐강된 강좌 시간표에 맞는 영작문 강의를 들으러 갔다.

 

 

세부명으로 양성 뇌종양의 일종인 청신경초종 진단을 받은 남동생이 개두술을 받는 사이,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나도 학교에 갔다. 날씨도 좋고 풍경도 좋고. 그리고 이제 이렇게 쓰지만, 5시간 남짓 걸린 수술 이후에 환자는 사실상 거의 곧장 의식도 회복하고, 어제오늘 상태도 나쁘지 않아 (평소 친하지도 않던!!!) 나에게 문자 폭탄을 보내오고 있다. 그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증거. 도스-키가 즐겨 쓴 성경 표현대로 '죽은 자들 사이에서 부활'했다고 생각하고 정신 차리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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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 수준의 발달지체임이 명백한 아이가 2학기에는 한층 더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래 관계가 매끄럽지 못한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자조를 비롯한 사회성숙도도 많이 좋아지고(물론 수치화 하면 굉장히 떨어졌을 수도 있다!!!) 첫 단원평가 나쁘지 않다.

 

 

 

소위 보통/일반 아이들도 60~70점대 점수가 많다는데, 실로 고마운 점수가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도, 운동 기능이 현저히 떨어지는 아이가 수학 점수를 통해 자존감을 좀 더 갖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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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추억>. 너무 무서울 것 같아 못/안 본 것 같은데 이제라도 시간을 내봐야겠다. 살인충동은 식욕이나 성욕보다 더 강한 것이라고 하던데 과연. 그는 어쩌다 그런 생명으로 태어난(=자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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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0 2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괭이 2019-09-21 09:38   좋아요 0 | URL
앗, 소설까지 읽으셨다니 정말 ‘팬‘이시네요^^; 감사합니다.

박균호 2019-09-20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해요. 로쟈님 서재에서 봤는데 저도 읽어 보고 싶더라구요. 시간 내서 읽어 볼께요.

푸른괭이 2019-09-21 09:40   좋아요 0 | URL
예, 후회하시지 않을 겁니다^^;
 

죽은(을) 놈 걱정 말고 산(살) 놈 걱정을 하자. 지난 여름에 사두고 (지금 읽으려고) 벼르는 책도 있고, 이제 막 나와서 주문하려고 장바구니에 담은/는 책도 있다.

 

 

 

 

 

 

 

 

 

 

 

 

 

 

 

박상영은 지난 번에 썼는데, 아이들이 좋아해서(=많이 씹어서^^;) 소설집도 샀다. 김금희는 이전 소설집이 참 좋았는데, 장편이 조금 지루해서 실망했다가, 신작 작품집을 사보려고 한다. 조금 '올드'(^^;;)한 작가로는 이번에 김승옥문학상을 받은 윤성희 장편(혹은 다른 소설). 그 다음 <새의 선물>의 작가가 20대 대학생으로 분한(그렇게 이해되는데) <빛의 과거>.

 

 

 

 

 

 

 

 

 

 

 

 

 

 

 

엥, 이것이 전부인가? 목록이 현저히 짧은 것 같은 느낌에, 곰곰 생각해보니 1학기에 곧장 붙여서 강의를 하게 됐음이 상기되었다. 즉, 항상 있던 반년 정도의 텀이 없다보니 아무래도 지난 학기에 다룬 소설도 좀 더 들춰볼 수 있겠다. 책을 아예 사는 쪽이라, 그때 다 못 읽은 작품도 마저 볼 수 있겠다. 가령,

 

 

 

 

 

 

 

 

 

 

 

 

 

 

 

 

의도한 것이 결코 아니다!!! 90프로가 여성작가다. 언제부터 우리 문단이 이렇게 되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적어도 문학판에는 '남성할당제'(?)가 절실히 요청된다. 그래도 안 올 텐가, 이 문학으로? 시는 어떤가. 

 

 

 

 

 

 

 

 

 

 

 

 

 

 

 

이번 학기에는 시와 희곡도 한 주씩 할당하려고 한다. 물론 수업에 다루는 작품은 고전이지만, 얼씨구나 이참에 시집도 좀 주문하였다. 기대된다! 80-90년대 기형도, 이성복, 황지우, 최승자 등등에서 얼마나 멀리 왔는가.  

 

*

 

어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다 보았다. '다' 보았다 함은 그저께 절반쯤 보고 어제 마저 보았다는 의미다. 보고 싶은 영화 한 편 보는 것도 호사이고, 그나마도 쪼개서 봐야 하는 신세,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이 역시 그리 나쁘지 않다는 걸, 막상 당해 보니, 알겠다. 무엇보다도, 이 희소성(!) 덕분인지 영화가 넘나 재미있었다! 봉준호의 영화는, 너무 놀라운데, 사실상 거의 처음 보는 듯하다. <살인의 추억>은 무서울까봐 못 봤던 것 같다. 그럼에도 그의 필모그래피를 모르지는 않는데, 이런 식의 그로테스크한 미감을 소유한 분인줄 몰랐다, 감탄했다. 블랙잔혹코미디?

 

봉감독처럼 소위 금수저에 훌륭한 미학과 재능을 지닌 사람이 이런 사회적 대립구도에, 거시적 문제와 주제에 관심을 주는 것이 참 고맙다. 그의 출신성분(이 말이 불편한가?^^;)과 훌륭한 유전자의 특성상, 장르가 코미디인 건 당연하다. 혹은, 감독의 그런 선택이 아주 탁월하다고 생각된다. 코미디에서 한 단계 올려 '부조리'라고 해도 되겠다. 웃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콘트라스트, 대조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거쳐 우리가 보게 되는 최후의 대조(체육관의 이재민과 저택의 가든 파티) , 피칠갑 장면, 마지막 '기생충'의 지하실(거의 카타콤베 수준, 감독의 명민함에 다시 놀람!)은  더더욱 리얼리즘의 정수를 보여주는 듯하다.

 

... 아빠 무엇보다도 돈을 벌어서, 이 집을 사고, 아버지는 그냥 올라오기만 하세요...

 

하지만 아들(이름이??)이  말쑥한 차림으로 집 구경을 하는 장면은 역시나 꿈일 뿐이다. 님아, 꿈 깨시라!!! 뭔 수로 저 집을 살만한 돈을 벌겠나. 니들은 있을 곳은 저 아래(정원)도 아닌, 더 저 아래(지하)이다. 사람은 절대로 선을 넘지 말아야 되는 법! 자신의 냄새-스멜(smell)을 절대 없앨 수 없는 법! 개천의 용이 되지 말고 개천의 가재로, 붕어로 행복하시라!

 

작년 여름에 본 이창동의 <버닝>을 떠올려보면, 여기서는 감독이 '안'-금수저(설마 흙수저?)라 유산계급, 소위 가진 자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노골적이다. 그는 권태에 절어 있고 살인자이고 자기가 잃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전적으로 가해자. 하지만, <기생충>은 다르다. 그 사회 속에서 들여다 봤다는 것이 느껴지는 대목, 즉 자기 아이러니의 정점. 넘나 화목한 집안: 부부 금슬 좋아(그래서 저 소파신이 필요한 듯, 대화도 많이 해), 아들딸 다 잘 자라(이 정도 문제야 누구나 있고), 집안 사람 관리 하기 힘들어(역시나 이들에겐 일상), 그러면서도, 적당히 맹하고 착해, 마지막, 그들 역시도 가장 소중한 것(가족-가장)을 잃게 돼~. 대단히 희화되었지만, 어쨌든 이들도 사람이다, 라는 것은 충분히 보여준 듯하다.

 

덧붙여. 봉준호 vs. 송강호. 

내 생각엔 봉준호 없는 송강호는 가능하지만, 송강호 없는 봉준호는 불가능하거나 적어도 좀 부실할 것 같다. 이게 참 아이러니인데, 감독은 스스로 영화에 나갈 수 없으니(물론 출연하기도 하지만 영화 속에 들어가는 순간 그는 감독이 아니라 배우다! 하다못해, 신문 기사 속의 히치콕 사진^^;) 항상 가면-페르소나를 필요로 한다. 봉-에게 송-은 정말 환상의 가면인 것 같다. 마치 레오카락스 - 드니라방, 구로사와아키라 - 토시로미후네 등등처럼. 신은 세계 속에 나오면 안 된다. 신이 세계 속에 존재하려면 육화되어야 한다. 송강호는 봉준호의 육화, 즉 인카네이션.  

 

*

 

참 바쁘다. 영화도 마저 봐야 해, 아이 문제집도 채점해줘야 해, 정치에 무관심함에도 청문회도 한 번씩 클릭해줘야 돼... 어제 청문회를 잠깐잠깐 보다가 광의의 토론 문화에 대해 다시금 생각했다. 다른 건 몰라도, 조국 선생님은 이 점에서는 상당히 훌륭한 것 같았다. 경상도(부산) 사투리를 무척 싫어하지만 그 사투리조차 점잖을 수 있음을 그의 강연 같은 것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 다음, 남의 말을 좀 들어라.  그 다음,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말만 해라. 이렇게 쓰는 이유는 나 역시 이것이 넘나 안 되기 때문이다. 나 개인의 성격도 있지만, 우리의 토론 문화가 성숙하지 않은 탓도 있다.

 

80년대, 한 교실에 학생이 50명도 넘었다. 발표할 일 거의 없었고, 발표하면 그건 튀는 일이거나 아니면 너무 잘난 일이거나 그렇다. 이러나저러나 너무나 유표이다. 그 다음, 사람이 많으니 무조건 목소리가 커야 한다, 흑. 바로 이것. 큰소리로 마구 떠들어 상대방 제압하기. 혹은 아예 발표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을 장악하기. 이런 문화 속에서 우리는 자랐다.75년생인 내가 그렇다. 어제 청문회 장에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나보다 10살 이상 많을 텐데, 토론이 더 먼 나라 얘기인 시절을 사신 분들이다. 참, 유감스럽다. 당장 떠오르기론, 영국의 <PMQ>(총리질의~)와 비교해도 '질 떨어진다', '수준 낮다'라는 말이 실감난다. 대부분이 악다구니의 향연이다! 조국만(혹은 박지원 의원이나 등등) 사람의 말을 한다. 

 

// Order! Order! ***  must be heard! // 정녕, 말을 좀 들으라! //

 

그러나!

자라는 우리 아이들은 좀 다르다. 한 반에 스무명 안팎, 많아야 서른 명이라던가.  "누가 얘기해볼래요?" 라고 하면 적어도 반 이상이 손든다. "저요, 저요!" 그 중에서 호명 받은 아이가 발표한다. 선생님도 그 아이의 발표를 듣도록 독려한다. '말하는 것'보다 저것, (친구의 말을/발표를) '듣는 것'이 더 중요하다. 여기서 아이들의 지능(!)이, 발달 수준이 드러난다. 우리 아이 같은 띵돌이들은 딴짓하거나 멍때리거나 자기 하고 싶은 말 혼자 떠든다. 남한테 관심 끌려고 더 큰 목소리로 떠들거나 심지어 노래 부른다. 똘똘이들이야말로 남의 말을 잘 듣는다.   

 

*

 

 

 

 

 

 

 

 

 

 

 

 

 

 

조국이 굳이 공직에 나갈 생각이 없었다면 지금의 일들은 사실상 '깜'도 아니었을 것이다. 봉준호는 아시다시피 소설가 박태원의 외손자다. 금수저의 '금'보다 더 무서운 유전자 강적이랄까. 나보코프도 그렇지만, 유전자는 혁명으로도, 총칼로도 뺏을 수 없는 것이라, 남의 나라로 쫓겨나서도 승승장구한다. 그러게 참, 세상 불공평하다. 하지만 어쩌랴. 이것이 리얼리즘이다! 빛나는 유전자를 받은 것이, 화려한 전두엽을 타고난 것이 죄인가. 그들도 그것을 누릴 권리가 있다. 그것조차 인정 못 할 만큼 우리가(나 - 흙수저, 아니 심지어 수저도 없는 그냥 손!) 그렇게 배알이 꼴려 있는가. 그들을 인정하지 못한 채 게거품 물면 결국 우리만 불행해진다. 왜냐면 계속 남의 말 안 듣는 '천출'에게 정치를 맡겨야 하기 때문이다.

 

이참에 다시금, 그리워지는 그대. 노무현 전 대통령이 국회의원이던 시절 청문회 장면을 다시 돌려보았다. 신파 같지만, 우리의 성장기도 생각나고,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장면들이다. 화면 속 노무현도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 거칠다, 간혹 핏대도 세운다. 그럼에도 전반적인 어조는 나지막하고 조근조근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한 번 욱하면서 "증인, 저는 증인한테 할 말이 정말 너무, 너무 많습니다~' 등의 말을 '토할 때'는 우리도 같이 토하게 되는 것이다.  토론의 기법이 따로 있나. 무슨 장르든 그렇지만, 물론 기법이 따로 있다. 하지만 기법에 앞서 정신-내용이 똑바로 박혀야 한다.

 

*

 

태풍 온다. 링링. 발표하는 것이 너무 무서운 아이의 이야기를 담은 동화 속 주인공 이름이기도 하다. 지난 1학기초 공개 수업 선생님이 이 동화를 읽어주셨는데, 우리 아이를 비롯한 두 서너 명이 집중력이 짧았다. 중간도 못 가서 엉터리 질문하고 혼자 흥분하고 웃고 등. 그러게 듣는 능력! 자, 너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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