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기독교)적 의미의 '고백'(참회)이 문학 장르, 즉 고백체(서간체) 소설로 발전, 이월하는 데 이정표가 된 작품으로 루소의 <고백>을 꼽는다.  위의 세 책이 세계문학 삼대 고백록이다.(-라고 한다.) 내가 읽은 루소의 <고백>은 아주 오래전, 김붕구 선생님 번역본인데, 그 사이 새 판본이 또 나온 모양이다. 아무튼, 명불허전!이라, 이 책에 무척 감동했다. 자신의 과거를 이렇게 미주알고주알 일일이, 많이 시간이 흐른 후에, 기록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사실 이 역시 '자전적 소설'이라 이름해도 되었을 법하지만, 루소는 그러지 않았다. 즉, '픽션'이 아니라 '논픽션'으로 내놓은 것. 그럼에도 몇 십년의 강을 거슬러, 과거를 기록함에 있어 '픽션'이 전혀 없을까. 게다가 여기에는 엄청나게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죄를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부분 다 좋지 않은 일(혹은 대놓고 가해자, 소극적 가해자, 그것의 목격자, 방관자, 아니라면 희생자, 피해자)로 언급된다. 루소는 이 모든 것을 '인간을 이해하는 자료'(?)로 이해한 것 같고, 그러길 바라서, 서문에 비슷한 언급을 해놓았다.(지금 책을 뒤져볼 시간이 없어서 -_-;;) 아무튼, 장르 불문, 세계문학의 고전이며, 개인적으론, 읽어본 루소의 몇 권의 책 중 가장 애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좀 더 뒤에(말년?) 쓴 것으로 아는, 또 다른 에세이('고백')인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보다 더 좋아한다. 아마 일본 가서 읽었기 때문인지도^^; 

 

 

 

 

 

 

 

 

 

 

 

 

 

 

 

서양문학은 이런 고백록, 자서전, 자전적 소설의 전통이 유구하다. 위에 가져온 톨스토이의 <참회록>(고백)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많은 소설이 자전 소설이다. 데뷔작은 말할 것도 없고 <전쟁과 평화>도 사실상, 자기 이야기의 확장판인 자기 가정, 가족, 가문의 이야기다. 물론 이런 개인사를 보편사로 확장하는 그 능력은, 과연 대가의 그것이라 할 만하다. <안나 카레니나>, <부활>은 사회적 이슈를 소설화한 것인데, 개인적 경험을 활용하고 심지어 자신의 분신을 소설화하는 능력과,,, 타인의 이야기를 반대로 자기화하여 개연성 있게 써내는 능력,,, 두 능력의 조합 역시, 그러하다. 겸사겸사, <부활> 번역의 역자가 바뀌었다, 허걱. 표지 그림, 카튜샤, 어쩔 겨 -_-;;

 

 

 

 

 

 

 

 

 

 

 

 

 

 

 

 

 

동양문학은 아무래도 고백의 전통의 약하고, 대신 '-전'의 전통이 강하다.(-라고 한다. by 조동일) 양반전, 전우치전, 허생전 등등. 3인칭적 서사, 전지적 화자가 남 얘기를 들려주는 식. 내가 내 얘기하는 게 쉽지 않다. 그걸 처음으로 소설에 도입한 자는 누구??? - 아는 사람 가르쳐주세요!^^;

 

분명한 건, 일본문학은 동아시아에서 제일 빠른 근대화를 시도하면서, 그러려고 엄청나게 열을 올리면서 이 부분에서도 서양 것을 더 빨리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 영향이 이런 작품들에 배어 있다. 개천용지개의 서고에 있었던(<어느 바보의 일기>?) 많은 책들 보라. 그런 갈망이 여실히 보인다. 아무튼 이건 순전히 주관적이고 인상적인 얘기라, 전거를 좀 아시는 분은 좀 알려주셔도 좋겠다^^;

 

 

   

 

 

 

 

 

 

 

 

 

 

 

 

 

일본식 사소설의 전통을 이상의 소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들식 탐미소설은 김동인의 각종 예술가 소설에 반영되지 않았나 싶다마는, 김동인을 읽은지 넘나 오래되었다 -_-;

 

 

 

 

 

 

 

 

 

 

 

 

 

 

 

 

사소설은 내 경험의 극단이다. 이게 싫으면, 그 반대의 극단이 있는데, 철저하게 남의 얘기를 가져오는 것. 개천용지개 식으로, 고사, 전설, 다른 고전(가령 <카라마조프)에서 이야기를 가져오는 것이다.  아쿠다가와의 소설의 많은 부분이 이것. 그다음, 루쉰 역시, 말년에(?) <고사신편>을 쓴 것으로 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만큼 우려먹을^^; 자신의 경험이 없어지고(바닥나고) 동시에 상상력을 먹여 살릴 정신의, 마음의 힘이 없어졌다는 뜻이리라.

 

 

 

 

 

 

 

 

 

 

 

 

 

 

 

한국 현대 문학에서 최고의 자전 소설을 꼽으라면 박완서의 <그많던싱아는...>이 아닐까 한다. 이 역시 명불허전!, 나이 들고 나서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하지만 실상 그녀의 많은 소설이 자전적 경험을 토대로 하고 있고, 자연스레 자신과 가족과 주변 이웃, 지인 들의 이야기가 들어가지 않았을까 한다. 공지영, 신경숙 등 굵직한 베스트셀러 작가의 많은 소설이 그런 것으로 안다. 워낙 안 팔려서^^; 문제가 안 돼서 그렇지, 다른 작가들의 경우도 비슷하리라. 경험과 상상의 비중이 다를 뿐, 두 가지가 섞인다는 건 동일하다. 그리고 앞서 강조한대로, 순수 고백(수기, 일기 등)을 표방한 글도 '픽션화'는 불가피하다는 점, 꼭 염두에 둬야 한다. 대표적인 걸작이 이것.

 

 

 

 

 

 

 

 

 

 

 

 

 

 

 

 

헉, 내가 읽기를 쉬는 동안에도 계속 나오고 있구나. 이 소설 속 '나'는 결국 '마르셀(프-트)인데, 이든 아니든, 기든 말든 사실 아~무 상관 없다. 중요한 건 읽을 만한, 후손에게 길이 남겨줄 가치가^^ 있는 예술텍스트인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

 

이번 김봉곤 사태(-라고 불러야 하나)를 보면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하, 굳이 절판까지 ㅠㅠ 가뜩이나 독자가 없는 한국문학에, 출판계에, 작가들에게, 이런 악재까지 ㅠ(강조하건대, 나는 김봉곤 소설을 좋아하지 않고 그가 잘했다는 건 아니다!!)  다른 한편, '성인지감수성'이라는 요상한 말이 시사하듯, 각종 모럴이(가령 저작권 포함) 많이 달라졌음을 우리가 예민하게! 인식해야 할 것 같다.  

 

아무도 관심 없겠지만, 재작년에 나온 나의 (경)장편 역시 많은 모델들이 있다. 주로 물리적 짜집기에 덧붙여 화학적 변용이 있었지만, 틀거리를 제공한 커피숍 사장은 상당히 대놓고 가져온 인물이다. 내 소설 읽고 그가 소송냈으면 클~ 날 뻔 했다^^;(실은 굉장히 좋아했음 ㅋ)  역시나 아무도 읽지도 않고 관심도 없겠지만^^; '벙거지 문청' 김건우의 모델은,,, 저 커피숍에 아침마다 나타나던(나를 전혀 모르는) 시인 오은과, 간헐적으로 출몰한 (역시나 나를 전혀 모르는) 사회학자 김홍중(곧잘 벙거지를 쓰고 다님), 대학 시절의 '나', 영문과 선배(의 외모) 등이다. 이런 걸 다 일일이 문제 삼자면,  결국 작가가 쓸 수 있는 글이란 저런 식의 독서 에세이 뿐이다.

 

 

 

 

 

 

 

 

 

 

 

 

 

 

 

소설이 백프로 창작이다, 라고 쉽게 생각하신 분들은, 그런 식의 소설을 쓰시는 분들이고, 소설에는 정녕 많은 소장르가 있다.  앞서 쓴, 톨스토이, 프루스트, 박완서 등은 말하자면 자전 소설 계열이다. 얼핏 떠오르기로, 도스-키, 나보코프, 이런 작가들은, 자기 얘기를, 정보를, 디테일을 가끔 이용은 해도, 자전 소설 자체는 잘 쓰지 않는다. 나보코프는 아예 자서전을 따로 썼다. 즉, 그는 보르헤스처럼 픽션적 글쓰기=소설적 글쓰기, 라고 생각하고 이른바 자기 얘기를 구질구질^^; 청승 떨며 쓸 때는 아예 '자서전'을 쓰기로 한 것이다. 이건 성향의 문제지, 작품 품질의 문제는 아니고, 윤리의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도중에 넣었어야 했는데-_-;; 낭만주의기에는 이 구분이 정말로 애매했던 것 같다. 이른바 자전 소설, 고백체 소설의 전성기랄까.

 

 

 

 

 

 

 

 

 

 

 

 

 

 

 

 

 베르테르는 곧 젊은 괴테(질풍이야, 노도야~), 세기아는 곧 뮈세(그 연인인 무슨 부인은 조르주 상드), 우리 시대의 영웅 페초린은 곧 레르몬토프. 아무도 이게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델이 된 본인이라면 모르겠다^^; 가령, <베르테르>의 알프레드나 로테, <세기아...>의 그 부인(즉, 상드), <...영웅>의 그루시니츠키, 메리 등등. 그런 것까지 허락을 받아야 할까. 글쎄다. 나도 예민한 부분은 물어보긴 하는데 - 사회성(!), 역시나 쉽지 않다!  

 

요즘 우리가 너무 예민한 건 아닌지,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나한테 던지는 말이기도 하다. 오늘도 맛나는 것을 먹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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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 2020-07-19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제 마음을 그대로 표현해주셨어요 푸른 괭이님_ 근데 안 읽은 책 정말 많네요. 다 읽고 싶다... 김봉곤은 가슴 아파요. 저도 좋아하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간만에 나타난 혜성인데 얼마나 상처 받았을까 싶고... 하지만 피해자들 생각하면 또 그들의 상처도 만만치 않고...... 아이구야.

푸른괭이 2020-07-19 14:35   좋아요 2 | URL
좋은 소설 나쁜 소설은 나중에 문학사가 알아서 다 판단해줄 거고요, 현 시점에서는 각자의 판단, 취향이 많이 작용하는데, 아무튼 뭐라도 읽히는 건 좋은 거죠. 아무도 안 쓰고 아무도 안 읽는 것 보다야^^;

어떻든 몇 안 되는 저런 작가, 저런 책이 팔려야 출판사가 안 팔리는, 그러나 유의미한 책들을 많이 낼 수가 있는데, 정말 올해는망했다, 라고 할 밖에요 ㅠ 표절이나 명백한 성폭력 같은 것도 아니고 - 게다가 그가 문동편집자라고 해서 무슨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르는 것도 아니고(오히려 처음에는 출간을 못했다고 어디서 읽은 것 같네요) -

작가와 피해자분들 사이에 사전에 미리 얘기가 잘 되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무척 아쉽습니다. 아무래도 예민한 소재(성, 게다가 퀴어)를 다루다 보니, 그 부분이 서로 쉽지 않았나 봐요 ㅠㅠ

추풍오장원 2020-07-21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리의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이 말씀에 너무나도 공감합니다. 정도를 넘어 지나치게 착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푸른괭이 2020-07-21 18:23   좋아요 1 | URL
김봉곤 소설 정말 안 좋아하지만(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취향이니까요), 이번 일로 그 작가가 너무 큰 타격을 받을까봐 걱정되네요 ㅠ 다소 불성실하고 부주의했던 건 맞지만(청탁도 많이 들어왔을 테고요) 이렇게까지 ㅠㅠ

공지영의 경우에는 전 남편이 패소(?)한 걸로, 작가의 창작의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고 판결난 걸로 알고 있습니다.
 

 

9시 27분이지만 '늦은밤'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다. 아파서 일찍 잠든 아이 옆에서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보다가 저 말에 머물렀다. 도-키가 떠올랐다. 인간의 다면성이란. 인간이란 넓다, 너무 넓어서 차라리 축소시켰으면 좋겠다, 소돔의 구덩이에 빠져 있을 때도(그때야 말로!) 더더욱 마돈나의 이상을 불태운다, 신과 악마가 싸우는데 그 전쟁터가 바로 인간의 마음이다 등등. <카라마조프...>의 드미트리의 말이다. 누구에게나 이런 인생의 소설이 있지만, '그럴 사람 아니다'라는 말을 보며 다시 한 번 떠올린다.

 

 

 

 

 

 

 

 

 

 

 

 

 

(나의 은사님의 번역이 내 번역보다는 업그레이드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오역도 아마 잡아주셨을 테고. - 내 번역엔 오역이 없다, 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번역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번역은 해석과 판단의 문제인 경우도 있어 더더욱 그렇다.)

 

드미트리가 인간의 '넓음'(모순)을 논할 때는 '공시성'에 집중했던 것 같다. 자, 여기에 '시간'을, 그 무서운 괴물을 덧붙여 보자. 통시성. 그 관점에서 (한) 인간을 본다면, '그럴 사람 아니다'라는 말 자체가 모순형용임을 알 수 있다. 한 살 아기, 열살 소년소녀, 스무살 청년, 서른살 처녀총각, 마흔살 아줌마 아저씨 등등. 말쑥한 변호사에 청와대 **가 된 선배의 모습에서, 오래 전 줄 담배 피우던 문학청년의 모습을 찾기 힘들듯(전자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 '비에 젖은 단발 머리 곱게 빗은 그 소녀'는 이미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그 시절에 대한 우리의 그리움이려나. 혹은 그 가치(-를 담보한 사람)를 공유했던 과거의 내 모습이려나.

 

아마 다 진실이리라. 수더분한 인권 변호사, 착한 청장년, 노회한 정치인 등등. 하지만 그 반대도 또한 진실이리라. 연애 감정이 있었든 어쨌든 그것을 '폭력'이라 느낀 사람이 있다면 일정 부분 폭력이 있었다는 것 또한 진실이리라, 라는 얘기다. 아마 그를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일 수록, 충격과 고통은 더 크리라 생각된다. 동시에, '그럼에도 - ' 이런 반동 역시 동반되지 않을지. 이건 '픽션'(=신화)을 만들려는, 그것이 없으면 안 되는 우리 인간의 본원적 속성이므로, 그의 자리에 박근혜를 갖다 놓아도 비슷할 법하다.  (저 불쌍한 것, 엄마 아빠 다 사고로 잃고 시집도 못 가고 나를 위해서 운운...) 

 

 

 

 

 

 

 

 

 

 

 

 

 

 

 

여러 정황상, 서로 짝패처럼 여겨지는 박상영과 김봉곤 중, 나는 이상하게도, 전자는 아주 재미있고 감동적인 데 반해 후자는 너무 안 읽혀 돈만 낭비한 셈이 되어 버렸다. 수업에서 다루기도 했지만, 너무 날 것의 느낌이 불편했다. 20여년 전, 누군가에게 내 소설이 그랬을 수도. 하지만 나는 워낙에 6천부 팔린 작가라^^; '물의'와 '추문'의 대상이 될 만한 영광도^^; 누리지 못했다. 센세이션, 스캔들. 아, 요즘은 이런 것도 문제가 될 수 있겠구나 싶다.  지난 봄/여름에 문제의 그 소설을 읽었으나, 그냥 독자일 뿐인 나는 그 'C누나'도 그냥 저냥 읽고 넘겼다. 현실 속의 그가 '폭력'을 느낀다면 그 역시도 폭력일 수 있겠다 싶기도 하다. 다른 한편으론, 두 사람 사이에서 적절히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원고를 보여줄 때) 이렇게 커진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사회성은 발달의 시작과 끝.

우리의 성장과 발달은 사회성(눈맞춤, 호명 반응, 감정 교류, 의사소통)에서 시작하여 사회성으로 끝난다. 두 번째 사회성의 경우, 상상력, 추상력, 이런 것도 들어가겠다. 일면식도 없는 장하준, 유시민, 유현준, 김영하 등등의 책이나 방송, 강의, 토론 등을 자주, 그러나 짬짬이 찾아 듣고(보고) 교감한다. 이런 건 일방향 사회성이라 편하다. 하지만 쌍방향(오, ZOOM!) 사회성은 다르다. 과연, 접촉과 오류는 불가피하다.

 

다시 <카라마조프.> 드미트리의 떠들썩한 모크로예 술판에 동참했던 젊은 지주. 그는 완전히 엑스트라인데, 드미트리가 체포되었을 때 절규한다. 아, 정말 사람이란! 사람을 알 수가, 믿을 수가 없구나! 화자는 덧붙인다. 그는 드미트리가 진범이라고 확고히 믿었다, 라고. 아주 사소한 디테일이지만, 역시 대가답게, 살면서 자주 떠오르는 대목이다. 그는 (아마 이름이 막시모프??) 드미트리를 좋아했지만, 동시에, 드미트리가 표도르를 죽였다고 믿었고, 동시에, 자기가 믿은 그 사실(실은 그런데 이것이 거짓이다!) 때문에 통탄한다.

 

다시, 그럴 사람 아니다.

항암 중인 아비를 보면,  전혀 다른 맥락에서, 또 이런 말을 생각한다. 하, 저런 양반이 아닌데. 그러니까, 우리는 항상, 그럴 사람이 아니다, 그럴 수 있다. 특히 과거의 나, 미래의 나와 비교해 보면.

 

생각할 수록 머리가 복잡해지는데, 노년의 톨스토이는 이 문제에 굉장히 심플!하게 접근한다. 체급별로 다 잘 싸우는 당신은 정녕 천재.

 

 

 

 

 

 

 

 

 

 

 

 

 

 

한 자 한 자 원어로 읽어가면서 (주로 아이에 의해, 또 일정 부분 아빠와 두 동생에 의해 유발되는) 내 안의 불안과 공포와 우울에 '항-'을 넣는 중이다. 항암, 항생, 항바이러스, 항우울, 항간전 등. antibiotics, 抗生劑. 하나만  찾아보니 이렇다. 아, 부작용이 있어도 좋다, 제발 작용이라도 멀쩡하게, 어엿하게 좀 있어다오, 이 말이다. 작용이 작용하면 '싸이드' 작용 쯤이냐 기꺼이 감수하겠다. 어떤 질환이든 다들 비슷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이 역시 조만간 체념하게 되겠지만 -.

 

 

 

 

 

 

 

 

 

 

 

 

 

 

 

과학, 의학에 거는 기대랄까, 지푸라기 잡는 심정의 절박함이랄까, 이런 건 어쩔 수 없는 듯하다. 사실 저출산이 그렇게 비극인가, 그렇게 생각하는가, 이 지구상에 호모 사피엔스가 너무 많지 않은가.(by 유시민) 여사여사 책을 좀 정치하게 읽고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라는 생각에 논문을 쓰자. 더불어, 이번 학기에 급증한, 하지만 전혀 해소하지 못한 SF에 관한 관심을 내년 쯤에는 어떻게 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책을 모아보고(-만) 있다.

 

 

 

 

 

 

 

 

 

 

 

 

 

 

 

 

 

 

 

 

 

 

 

 

 

 

 

 

 

 

자료가 너무 많아 이미지를 긁어오기 힘들 정도. 차분한 호흡으로 가자. 오늘은 아주 질 좋은 삼계탕을 먹었다. 내일도 살아 있어야 - 그럴 사람이 아닐 수도 있고 그럴 사람일 수도 있고 - 아무튼, 좌우지간 살아 있어야...

 

cf. 백낙청 선생님 이름 오랜만에 들어본다(... 스무 살이나 많은 내가 당신의 장례를... 이럴 줄 몰랐다, 라는 식의 말씀), 겸사겸사 그의 장남 블로그도, 이웃 동네 마실 가듯, 구경간다, 너무 다른 삶의 양상, 그 대조가 거의 미학 수준이다, 라는 생각이 든다.

 

 

 

 

 

 

 

 

 

 

 

 

 

 

 

 

 

주저리주저리 썼는데, 쓰는 행위가 지닌 '항-'의 효과를 실감한다. 오토픽션, 이라고? 글쎄, 사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게 여겨지는데, 별로 중요하지 않다. 본질적인 것은, 읽을 만한, 훌륭한 언어적 구조물을 만드는 것이다.(가령 위에서 가져온 책들.) 이제 자야지. - 모두 안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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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20-07-16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김봉곤의 날것 ! 맞습니다. 저도 김봉곤 읽으면서 ˝ 날것 ˝ 이란 생각이 들어 거부감이 들더군요. 문학이란 게 날것을 요리를 해서 익힌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믿는 저에게는 그냥 날것만 덜렁 내놓고는 먹어라, 라고 하니 거부감이 들더군요..

푸른괭이 2020-07-16 10:42   좋아요 1 | URL
하지만 그걸 돈주고 살 만큼 좋아하는 독자들이 있으니까, 그들의 취향도 존중받아야 된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의 글 자체가 별로 마음에 안 들더라고요-_-;; 저렇게 마구 쓰는데도 인기가 있다니ㅠㅠ 그래서 이번 소설집은 아예 안 샀어요.

아무리 그래도 창비, 문동 보이콧까지 ㅠㅠ 가뜩이나 파리 날리는 게 문학판인데, 다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요 ㅠㅠ 모두 너무 에너지가 넘치는 듯^^;;
 

 

최근에 이런 책들을 훑었다, 읽었다고 할만한 것도 있다.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읽기 위해서였다. 이 책인데, 번역이 조금 갱신되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있다. 소설이 짧아서 작업에 큰 시간이 걸리진 않을 텐데.

 

 

 

 

 

 

 

 

 

 

 

 

 

 

 

 

러시아문학도 번역이 많이 되어 있다. 그런데도 제대로 안 읽다니^^; 이런 책들이 러시아 수용소 문학으로 대략 꼽히는 모양이다. 바실리 그로스만의 책도 있는데, 나는 읽지 못했고, 번역도 없고, 아마 번역되어도 안 읽기 쉽겠다.

 

 

 

 

 

 

 

 

 

 

 

 

 

 

이들 중 최근에 읽고 독자로서 가장 감동 받은 것은 빅터 프랭클 책이다. 처음 듣고(아, 무식?) 처음 읽는 작가라서 그렇기도 할 테지만, 문체가 담백하고, 무엇보다도, 이런 유의 문학(홀로코스트)에 항상 있는 '늪'이 여기는 없다. 그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과연 '로고테라피'가 효과가 있구나, 싶은 대목이다. 결국 자살하고 만 프리모 레비와는 사뭇 다르다. 레비는 완독 못했다, 읽어나가기 힘들었다. 반면, 프랭클은 '읽히는' 것에 대해 쓴다. 읽을 만하고 참을 만하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다니!"(?) 언제 죽을지 모르는 수용소에 강제 노역을 하다가 저녁 노을에, 자연 풍경에 감동하는 것, 역시 이것이 인간이다!

 

러시아 수용소 문학의 연원은, 놀라운가, 역시나 도스토예프스키다. '문학'이라기에는 너무나 자료집, 르뽀에 가까운 체호프의 <사할린 섬>은, 그러나, <6호실>, <구셉>과 같은 걸작의 에뛰드라고 볼 수 있다. 아, 작가는 부지런해야!

 

 

 

 

 

 

 

 

 

 

 

 

 

 

 

다시 도-키. 서론에만 잠깐 언급되지만, 확실히 그에 맞먹을 만한 작가는 톨스토이(그리고 약간은 체호프) 밖에 없는 것 같다. 이 책은 겨우 2부작이다. 얼마든지 더 쓸 수 있었겠지만, 확실히 이런 유의 '기록'(반쯤은 논픽션)보다는 소설, 픽션이 더 끌렸을 터.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그의 머릿속, 가슴속에서 터져나오길 바라고 있었을까. 나를 꺼내줘, 나를 써줘, 나를 소설로 만들어줘! 솔제니친에 대해 쓰다가, 엉뚱하게도, 다시금, 도스토옙스키의 위대함을 절감한다. 생긴 건 정말이지 도끼 자루 같은데 -_-;; 마침 <죄와 벌> 저 표지의 도끼가 생각나서, - 아무 의미 없는 비유다.

겸사겸사, 러시아문학 번역의 완벽한 세대 교체. 나-우리 역시 조만간 교체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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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준비하기가 힘들어서^^; 뺄까 하다가, 오히려 또 역으로, 이 참에 한 번 더 읽어보자 싶어서 강의를 진행했다. 현재 상황상, 읽고 정리하고 강의동영상을 찍는 것이다. 새 번역이 나온 <해피 데이스>를 들춰 보고 싶은 욕심 때문이기도 하다. 이 희곡, 역시나 너무 어려웠다 ㅠㅠ

 

<고도를 기다리며>. 응당 '고도'는 누구인가. 물론 신-구원의 다른 이름일 터. '신'은 또한 '개'이이기도 하다. GOD. DIEU.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포조와 럭키, 1막과 2막의 소년(혹은 그의 형) 등 등장인물은 모두 (카프카의 소설과 비슷하게도) 정체성이 명확히 규정되지 않는다. '신'과 '개'가 언어유희 차원의 대상으로 바뀌는 마당에, 다른 것들이야 말해서 뭐하라. 두 명의 도둑 중 한 명은 구원 받았어, 나머지는 구원 못 받았어, 아니야, 둘 다 팽이야~ 등의 얘기도 그렇다. 중요하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

 

- 그렇다, 즐겁게 웃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한바탕 웃음, 희극이다. 딱 올라온 만큼만 드문드문 봤지만, 이런 연출의 분위기일 법하다. 과연 우리 모두가 기다리는 '너', 고도는 누구인지.

 

https://www.youtube.com/watch?v=MUXtzkLTABI

 

신분과 계급과 빈부와 남녀와 노소와,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여기와 저기와 거기와, 너와 나와 그(그녀)와, 등등 모든 '다른' 것들 사이의 경계와 차이를 싹 날려버리는 놀라운 마법이 <고도...>에서 펼쳐진다. 한 학생의 말대로, 이건 너무 유쾌한 건 아닐지라도,,,, 어딘가 나를, 우리를 위로하는 요소를 갖고 있다. 베케트보다 앞서, 체호프의 마지막 드라마 <벚꽃 동산>에서도 그런 것을 본다. 전 재산을 다 날리고도, 아니, 그러고서야 오히려 더 평안을 찾은 것 같은 주인공의 모습!

 

- 거봐, 차라리 팔리고 나니 더 좋잖아? 그 전까지 우리가 얼마나 힘들었어?

여기서 "팔리고"는 "죽고"의 동의어로 읽어도 좋을까? ^^;

 

 

 

*

 

 

 

 

 

 

 

 

 

 

<고도...>에서 항상 놓친 것. '기다림'에 너무 주목한 나머지, 블-르(디디)와 에-공(고고)이 계속 어딘가로 가려고 한다는 사실을 잊었다. 마찬가지로, 포조와 럭키 역시 어디선가 오는 인물, 또한 어디론가 가는 인물이다. 소년(2)도 마찬가지. 그들은 어디로 가는가. 과연 갈 곳은 있는가. 그들의 신발은 왜 그리 낡았는가. 이런 물음으로 가득 찬 신기한, 신통방통한 텍스트!

 

- 나도 가고(가서) 그리고 기다린다.

 

 

 

 

내가 제일 먼저 떴다. 그 직후, 아이들이 들어와서 한창 떠들다가 자, 안녕~ 하면, 정말로 아이들이, 그 얼굴이 하나둘씩 팍팍 꺼진다. 아이들이 꺼져버린다. 50개의 얼굴이 뿅뽕, 사라지는 모습이 참 진풍경이다.

 

놀라운 건, 이 실시간 쌍방 화상 강의에 익숙해져서, 행여 대면으로 전환되면 얼마나 뻘쭘(!)할까 하는 것. 막상 해보니 이런 형식의 강의도 장점이 많다. 우선, 집에서 원하는 시간대에 강의를 찍어두니 편리하다. 책을 싸들고 가야 할 필요가 없고 예쁜 얼굴의^^; <편집자 K>처럼 그 자리에 앉아 책을 직접 소개할 수도 있다. 수시로 '변신', 녹화를 하는데, 옆에서 아이를 째려보는(!) 것도 한 재미다. 묘한 동시성의 체험이다. 이 재미가 큰 탓인지, 이번 달 카드값이 평소보다 절반으로 줄었다, 뭐냐?! ^^; 다른 한편, 동영상을 미리 올려두면 그걸로 시수를 채울 수가 있지 않나. 행여, 나나 아이가 아플 때 휴강하지 않고 강의를 진행하는 셈이 되기도 한다.

 

그러게, 호모 사피엔스는 이런 식으로 역병 이후의 시대를 살아왔나 보다. 존재의 양상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요컨대, 살아 있음이 중요하다. 하지만, '생사 역시 궁극에는 다 사라진다. 이게 너무 즐겁고 유쾌하다! 라고 (어느 학생처럼) 쓸 수 있으면 좋겠지만, 나는 조금은 슬프다,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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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같으면 '-깜'도 안 되는 소식인데, 돌림병 시국, 코로나 창궐기라 이 역시 대단한 희소식이 되어 버렸다. 어제 <지바고> 증쇄 소식이 전해졌다. 재판 찍는 데 1년이 조금 넘었다. 사실 기대 이하지만, 나의 욕심을^^; 탓한다.

 

몇 안 되지만 사소한 오탈자, 무엇보다도, 역자 해설에서 년도 틀린 것(1935년 -> 1934년: 작가동맹 2차회의) 등을 고친다. 모두 좋은 소식이다! 천쪽이 넘는(?) 책에 이 정도의 흠이 없을 리 없다. 물론 아예 없으면 더 좋지만, 사람 하는 일에 그러기 쉽지 않다. 이런 것이 두려우면 아주 일을 하지를 못한다. 또 한 가지. 이런 오류가 발견되었다는 것은,,, 누군가는(심지어 2천+2천 명이나^^;) 이 책을 읽었다는 것, 인지했다는 것이다. 감사할 일이다. 민세전집은 신간 마케팅을 거의, 전혀 하지 않는 것으로 안다. 시리즈 자체가 이미 마케팅이기도 하다. 여사여사, 앞으로는 더 많은 독자와 만나길! 이번 학기에 강의에서도 다룰 수 있게 되어 무척 기쁘다.

 

 

 

 

 

 

 

 

 

 

 

 

 

 

 

 

 

*

 

- "야, 원숭이, 그만 까불고 공부 안 해?!"

- "원숭이라고? 그 별명 좋아, 흥!"

 

- "(동영상) 여섯 개 다 봤어, 더 봐야 돼?"

- "쉿!"

 

아이와 이런 얘기, 이런 다툼을 하는 이 일상의 생활이 너무 고맙다.

늙음, 늙어감이, 아줌마와 할머니의 모습이 부럽다는, 이십대 뇌종양 진단 환자의 동영상을 보다가 결국 끄고 말았다... 정말 너무 예쁜 아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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