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본 <살인의 추억>의 원작이 연극 대본이었음은 이번에 알았다. 그런데 표현 매체가 달라지면 사실상 흔한 의미의 '베낌/표절'은 얼토당토 않고 소위 '개작' 역시 무의미해보인다. 요컨대 창작이다. 기록문학(다큐멘터리), 소설, 연극, 영화, 뮤지컬 등. 이런 문제를 창작의 관점에서(^^;) 고민해볼 수도 있겠다.

 

 

 

 

 

 

 

 

 

 

 

 

 

 

 

 

최종 텍스트, 이 경우 영화의 관점에서 보면 위의 텍스트들이 대본에 해당한다. 영화 대본, 즉 시나리오는 실제 촬영 과정에서 적잖은 변주를 거치며 영화로 완성되는 것으로 안다. 많은 애드립, 또 즉흥적인 소품들(심지어 벌레 한마리, 이런 것). 이런 것을, 이번 학기에는 희곡을 한 편 다루는 김에, 생각해보면 좋겠다. 덧붙여, 어느 장르든 시대 의식 없는 작품이 살아남는 경우는 드문 것 같다. 그만큼 작가는 명민해야, 예민해야 한다는 뜻이리라.

 

 

 

 

 

 

 

 

 

 

 

 

 

 

 

 

셰익스피어 시절은 물론 이후에도 소위 공연 대본이 이렇게 활자화된 책-고전으로 남으리라 누가 생각했을까. 혹은 생각했다고 하더라도, 그 심판을 거쳐 살아남는 텍스트는 극소수. 이건 사실 어느 분야나 똑같으니 하나마나한 얘기. 아무튼 서양은 극 장르의 역사가 길지만 우리는 참 일천하다. 지금 <희곡선1>의 두 작품 읽었다 -_-; (편집이 아주 잘 되어 있다! 편집한 양승국 교수도 한때 등단한 극작가(?)인 것으로 안다.) 암튼, 생각보다 수준이 높아서 놀랐는데, 시나리오-영화 역시 비슷한 속도로 발전하길 바라는 마음, 크다.

 

 

 

 

 

 

 

 

 

 

 

 

 

 

 

 

*

 

소설을 비롯한 여러 책 텍스트와 달리 연극, 영화, 뮤지컬 등은 표현 수위가 정말로 중요한 문제일 법하다. 봉준호 감독 영화는 보통 '청불'(미불^^;)이 많은데, <살인의 추억>은 뜻밖에도(?!) 15세였다. 참 잘한, 좋은 일인 것 같다. 제목만으로도, 사건의 얼개만으로도 후덜덜. 그래도 많은 관객이 볼 수 있도록 하려면 표현 수위를 낮추는 것이 옳을 법하다. 그렇게 낮추었다고 해도 폭력 장면도 많고(실제 취조실의 폭행, 고문은 우리의 상상의 초월할 터) 아이의 가방에서 소지품 꺼내서 나열하는 장면은 차라리 없었으면 좋겠다 싶을 만큼 무서웠다. 하지만 그 정도의 공포는 감당하라는 것이 감독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구로사와 아키라를 좋아하여 오래 전 그의 영화를 거의 샅샅이 뒤져 보았다. 그 역시, 큰 줄거리와 주제를 드러내려고 하지, 잔혹한 장면에 변태적으로 집착하지 않는다.(여기도 일본 중세를 배경으로 나름 '강간의 왕국'이기도 하다.) 그런 과는 또 따로 있는 것 같다. 그런 쪽에 초점을 맞춘 공포영화, 스릴러는 그 나름으로 매니아 층이 있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아무래도  보편성을 중시하는 예술가라면, 표현 수위 문제는 신중한 고려의 대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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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는 체계가 필요하다

 

 

또 책을 낸다. 번역한 책이 아니라 쓴 책이지만 소설책이 아니다. 때로는 글자를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설레며, 때로는 관성의 법칙에 짓눌린 수험생처럼 억지로 읽고 나름대로 공들여 쓴 글들, 즉 공부의 기록이다. 거의 모든 글에는 작가의 전기가 정리되어 있는데, 이는 내가 남의 사생활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이 글들을 쓰는 동안 나는 비단 소설가가 아니라 명실상부한 작가-글쟁이가 되었다. 작가는 아무 책이나 쓸 수 있다. 모든 책에는 그러나, 체계가 필요하다.

 

이 책은 총 아홉 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은 어릴 때부터 좋아한 <적과 흑>, <고리오 영감>, <보바리 부인> 19세기 프랑스 소설을 읽기 위한 장이다. 르네 지라르의 모방 욕망을 염두에 두었다. 2장은 문학 이상의 문학, 소설 이상의 소설에 관한 장으로서 오늘날 철학서로 자리 잡은 에세이에 관한 글도 들어갔다. 인간과 세계의 모순을 탐구한 문학은 확실히 그 형식 역시 모순이다. 원래는 3장과 한 데 묶여 있었다. 4장은 주로 생활과 일상이 담긴 세태 소설을 다루었는데, 영미문학과 러시아문학의 -메이드소설이 포함되었다. 교과서 소설은 ()’의 기록임이 드러난다. 5장은 청소년기에 즐겨 읽은 성장소설과 예술가소설에 대한 글이 대부분이다. 일본 근대 소설 역시 그 맥락에서 읽어보았다. 6, 7, 8, 9장은 각각 카프카, 카뮈(사르트르), 쿤데라(오웰), 보르헤스(나보코프, 에코)를 염두에 두고 구성하였다.

이 책의 처음과 끝에 위치한 작품이 모두 책에 관한 책이다. <돈 키호테>에서 <픽션들>과 <장미의 이름>까지 나의 읽기는 극히 주관적이다. 그럼에도 독자들이 공유할 만한 지점이 있으면 좋겠다.

 

*

 

나 역시 어느 시인처럼 나를 환멸로 이끄는 것들중 하나로 (“모교의 정문과 더불어!) 주저 없이 인용과 각주를 꼽겠다.(심보선, <슬픔이 없는 십오 초>, 문학과지성사, 2008.) 그 무게에서 해방된 가뿐한 글쓰기를 꿈꾸었으나 책에 관한 책이라 인용이 불가피했다. 각주 역시 참고문헌 목록으로 흔적기관처럼 남았다. 천형이라면 웃기고 자업자득이다. 이참에 44년을 넘긴 내 인생을 요약해본다.

 

19751, 태어났으며

10, 공부했고, 자랐고, (부모) 집 떠났으며

20, 공부했고, 소설 썼고, 담배 피웠고, 연애했고, 번역했으며

30, 공부했고, 강의했고, 논문 썼고, 번역했고, 소설 썼고, 결혼했고, 담배 끊었고, 아이 낳았으며

40, 공부하고, 강의하고, 논문 쓰고, 번역하고, 소설 쓰고, 책 내고, 담배 안 피우고, 아이 키우고,

암과 치매와 실명 없는 노년을 꿈꾼다.

  

누군가에게는 하강일 수 있는 문학이, 경상남도 거창군의 으슥한 산골에서 의무 교육만 간신히 받은 농부의 장녀로 태어난 나에게는 시종일관 상승이었다. 여섯 살이 되던 해 여름, 부산 사는 삼촌의 결혼식에 가던 길에 아빠의 손을 잡고 조만간 내가 다닐 학교를 구경 갔던 일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우리 집에서 5킬로미터는 족히 떨어진 그 야트막한 학교는 물론, 폐교된 지 오래이다. 그해 겨울 우리 가족은 거창을 떠나 부산의 산동네에 단칸방을 얻었다. 이듬해 봄, 나는 학교에 들어갔다. 한 반의 학생 수가 쉰 명도 넘던 시절, 오후반도 있던 시절이다. 그 역사적인 1981년에 읽고 쓰는 법을 배웠고 책의 세계에 진입했다. 나쁜 종이에 조잡한 그림이 들어간 교과서가 전부였음에도 그것은 아주 처음부터 문학의 형식을 갖고 있었던 듯하다. 처음 손에 잡은 순간부터 너무 좋았다, 책이라는 것이.

 

나의 책읽기는 중학교 시절 값싼 문고판으로 시작되어, 장학금과 과외비 덕분에 현금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대학 시절에 절정을 이루었다. 19933월부터 박사학위를 받은 20042월까지 촘촘히, 빼곡히 들어찬 11년의 세월 동안 단 하루도 빠짐없이 꿰차고 있던 학생증을 버리기가 얼마나 아까웠던가! 이후, 또 한 번의 시간 덩어리를 여전히 비정규직 신분이지만 러시아문학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또 그것을 연구하고 번역하는 학자로 살고 있다. 러시아문학에 한정된 좁은책읽기에 환멸을 느끼던 삼십대 중반쯤, 다시 넓은책읽기를 넘보았다. 2009<문지문화원 사이>에서 세 학기 동안 진행한 세계문학 읽기 강좌가 시발점이 되었다. 그와 얼추 맞물려 2010년 가을부터 2011년 상반기까지 <네이버> 문학 캐스트에 세계문학을 소개했다. 맨 처음 다룬 책은 사르트르의 <말>이다. 2012년부터는 <책앤>(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 귀한 지면을 얻어 2015년까지 썼다. 2016년부터는 소설 창작 강의를 맡아 세계문학의 전범과 전위의 소설을 두루 읽고 있다.

 

2010121, 정녕 마지못해, 하루 두 갑 진정한 골초에서 비흡연자가 되었다. 나쓰메 소세키의 <그 후>에 관한 글은 담배 없이 쓴 첫 번째 글이다. 솔직히, 담배를 피우고 싶어 죽는 줄 알았다. 2011년 한여름에 아이가 태어났다. 출산 이후에는 흡연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담배를 안 피워도 나는 사람이지만 책을 읽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새끼를 낳아 젖을 먹이는 포유류의 일종, 한 마리의 암컷일 뿐이었다. 물론 이 역시 숭고한 실존이지만(동물-인간으로 회귀!) 그것을 배면으로 책의 삶이 얼마나 숭고한 실존인지(사람-인간으로 회귀!) 새삼 깨달았다. 사람은 무릇, 책을 읽어야 사람이다. 이 책의 거의 모든 글을 몸 안에서, 그리고 몸 밖에서 아이를 키우며 썼다. 아직도 걸음걸이가 불안정한 아이가, 물론 건강하고, 덧붙여 책을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으로 자라주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끝으로, 사족 한마디. 내가 가끔 아이보다 책을 더 사랑한다고 해서 엄마가 아닌 건 아니다. 밤낮을 잊고 몇날며칠을 담배와 단둘이 골방에 틀어박혀 있던, 아이 이전의 황금시대가 너무 그립다. 조금의 시건방과 비아냥도 없이 말하거니와, 공부는 내 인생의 거의 전부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가 언제까지 모범생이어야 하니러시아 유학 시절 이런 따사로운 답장을 보내준 절친했던 라이벌이 작년에 암 수술을 받았다. 이 나이에 뭘 어쩌겠는가. 우리는 언제까지나, 여전히 모범생일 필요가 있다.

    

 

2019년 여름, 김연경

 

 

*

 

 

 

 

 

 

 

 

 

 

 

 

 

 

 

독서 에세이집은 처음인데, 편집 과정이 길었다. 처음에 초고를 넘길 때는 독자서비스(?) 차원에서 원문 인용을 많이 넣었다. 하지만 분량이 너무 많아져서, 또 저작권 문제 때문에 인용문을 대폭 줄이고 대신 내 말로 푸는 수고를 많이 해야했다. 몇 꼭지를 그냥 확, 덜어내기도 했다. 그 결과 책이 훨씬 깔끔하고 날씬해졌다.

 

표지에 담배를 피우는 3,40대 여성 사진을 쓰자고 제안한 건 나다. 저 얼굴은 프랑스와즈 사강이라, 한데 이 책은 사강에 대한 책이 아니라, 다른 것을 쓰고 싶었지만, 흥미롭게도(^^;;) 저것이 사강인 것을 알아본 사람이 나 말고는 별로 없었다. 한편, 내가 고른 것은 너무 퇴폐적(^^;;)이라, 저 책의 주요 독자층(자식들에게 고전을 읽히려는 나 같은 아줌마^^;)을 염두에 둔다면 좋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담배,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퇴폐적(^^;)인지라 , 현재의 시안으로 낙착되었다. 만들고 나니, 좋더라. 그리고 한 장 넘기면, 지난 겨울 <창비 까페>에서 찍은 내 사진이 나온다. 어릴 때는 나도 한 인물 했는데 -_-;

 

제목, 목차, 서문은 마지막까지 (편집자와 함께) 고민한 것이다. 제목은 결국 내가 제안한 것이 채택되었는데, 20여년 작가 인생에 참 드문 일이다^^; 서문은 지금 올린 것에서, 중간부분을 뭉텅 덜어냈다. 그 결과, 역시나 서문이 깔끔해졌다. 나보코프는 <롤리타> 후기에서 자신의 개인사는 누구의 관심사도 될 수 없으나, 라는 식의 말을 했지만, 나는 반대의 지점에서 출발한다. 서문에서 잠깐 언급한, 거창 고제면의 개명 국민(초등)학교는 올 여름에 탈고한 소설에서 좀 묘사를 해보았다. 

 

자, 그러니까...

이제는 소설이 나올 차례다!

그런데 어디서, 어떻게? -_-;

아무튼 '삼재'가 끝났으니(나는 영원한 미신주의자!) 이제 당분간은 인생이 풀릴 것이다.

이런 믿음 자체가 소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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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나왔다. 그동안 쓴 책, 번역한 책이 적지 않지만, 나오자마자 세일즈포인트가 천단위로 뜨는 책은 처음이다. 그동안의 원한을 설욕할 것 같은 느낌! 그 느낌이 너무 좋아 오히려 무섭다. 그다음, 내숭 떨지 않고 말하자면, 참 열심히 공부하고 썼다. 쓴 것보다도 저 많은 걸 언제 읽었는지 그게 더 아뜩하다. 말마따나, "제가 속도 없고(좁고) 재능도 없지만 성실하긴 무척 성실하여~~~"

 

*

 

나의 행복은 타인의 불행, 나의 불행은 타인의 행복,,, 이던가.

굳이 이렇게 생각할 건 없으나 지난 수요일 아침 7시 20분에 남동생이 **병원에서 뇌종양 수술을 시작했다. 내가 한 일은 물론 아무것도 없고, 폐강된 강좌 시간표에 맞는 영작문 강의를 들으러 갔다.

 

 

세부명으로 양성 뇌종양의 일종인 청신경초종 진단을 받은 남동생이 개두술을 받는 사이,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나도 학교에 갔다. 날씨도 좋고 풍경도 좋고. 그리고 이제 이렇게 쓰지만, 5시간 남짓 걸린 수술 이후에 환자는 사실상 거의 곧장 의식도 회복하고, 어제오늘 상태도 나쁘지 않아 (평소 친하지도 않던!!!) 나에게 문자 폭탄을 보내오고 있다. 그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증거. 도스-키가 즐겨 쓴 성경 표현대로 '죽은 자들 사이에서 부활'했다고 생각하고 정신 차리시길^^;

 

*

 

장애 수준의 발달지체임이 명백한 아이가 2학기에는 한층 더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래 관계가 매끄럽지 못한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자조를 비롯한 사회성숙도도 많이 좋아지고(물론 수치화 하면 굉장히 떨어졌을 수도 있다!!!) 첫 단원평가 나쁘지 않다.

 

 

 

소위 보통/일반 아이들도 60~70점대 점수가 많다는데, 실로 고마운 점수가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도, 운동 기능이 현저히 떨어지는 아이가 수학 점수를 통해 자존감을 좀 더 갖길 바란다.  

 

*

 

<살인의 추억>. 너무 무서울 것 같아 못/안 본 것 같은데 이제라도 시간을 내봐야겠다. 살인충동은 식욕이나 성욕보다 더 강한 것이라고 하던데 과연. 그는 어쩌다 그런 생명으로 태어난(=자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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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0 2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괭이 2019-09-21 09:38   좋아요 0 | URL
앗, 소설까지 읽으셨다니 정말 ‘팬‘이시네요^^; 감사합니다.

박균호 2019-09-20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해요. 로쟈님 서재에서 봤는데 저도 읽어 보고 싶더라구요. 시간 내서 읽어 볼께요.

푸른괭이 2019-09-21 09:40   좋아요 0 | URL
예, 후회하시지 않을 겁니다^^;
 

 

배도 고프고 내친 김에 계속 논다.

오늘부터 공부(!)를 해보려고 아우어바흐의 <미메시스>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거의 20여년만인데, 놀라워라, 한때 몰입하여 잊었던 번역이 지금은 서걱거린다. 왜지? 오디세우스를 논하는 첫 장, '손' '나그네' 이런 표현이 굉장히 옛스럽다. 그렇게 느껴진다. 역자가 누구?

 

 

 

 

 

 

 

 

 

 

 

 

 

당대 최고의 비평가였던 김우창, 유종호. 과거 시제를 붙이기도 죄송한 것이 두 분은 아직도 활발히 활동하고 계시고, 유종호의 최근 에세이는 내가 여기에 링크를 걸어놓기도 했다. 그렇게 훌륭하신 분들의 번역조차도!

 

 

 

 

 

 

 

 

 

 

 

 

 

 

(아시겠지만, 김민형은 김우창의 아들이다.)

 

민음사세계문학전집의 맨 마지막 표지에 실린 글대로, 번역은 세대/시대가 바뀌면 새로 해야 한다, 라는 의견에 나는 전격 동의한다. 간혹 반대하는 의견이 있다.

 

- 아니, 원전은 그대로인데 번역은 바뀌어야 한다?

 

세상에!!! 번역은, 아무리 좋은 것도, 원전을 대신할 수 없다.

번역은 감히 원전의 자리를 넘볼 수 없다.

 

이 점을 모르는 번역가는 기본 자세가 안 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번역가로서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시간의 심판을 넘어 살아 남는 것은 원전이지 결코 번역이 아니다. 나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도-키의 <죄와 벌>은 불멸이라도 내 번역은 한시적인 것이다. 현대의 독자들이 여러 편의상 내 번역을 읽을 뿐이다. 혹은 내 번역을 통해, 건너 도-키의 <죄와벌>로 간다. 요컨대, 다리 같은 것이다. 다리는 시간이 지나면 당연히 마모되고 교체해야 한다. 번역의 명줄은 아무리 길어도 한 2-30년이 아닐까 한다. 내가 내 스승의 번역들을 먹고 자랐듯, 나의 후학 역시 내 번역을 먹고 자라 훗날에는, 미래의 독자의 언어 감수성에 맞는 번역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덧붙여, 신간의 초역이 아니라, 기존 번역이 있는 고전을 다시 번역하는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이전 번역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아무리 후진(!) 것이라도 그것에 빚을 지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그 후진 번역을 봤다는 것 자체가 이미 빚이다. 이 점에서 <잃어버린...>의 옛 번역에 감사를, 사의를 표한 김희영 선생은, 그 태도에 있어서도 참 훌륭한 번역가라고 할 수 있다.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예전에 불문과 전공 수업에서(불문과 대학원을 갈 생각이 좀 있었다) 한 선생이 '거의 웬 듣보잡이 이런 소설을 번역했다' 라는 식의 발언을 해서였다. 아무리 후진 수준이라도(이 번역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잃어버린...> 정도의 번역에 손을 댈 정도면 '듣보잡'은 아니다. 그런데 대학에 발가락 담그고 있는 많은 '박사-교수' 중에 이런 편견이 많아, 안쓰럽다.  

 

 

 

 

 

 

 

 

 

 

 

 

 

 

 

 

<미메시스>를 이제 막 읽기 시작하여 뒷부분을 얘기할 수는 없겠지만, 오래 전 <이데아총서>에 들어 있던(우리가 이 시리즈도 얼마나 사랑했던가! 사라져서 슬펐다, 옛 애인의 기억들이 사라지는 것처럼!) 것을 표지만 바꾼 모양이다. 앞에서 서문 하나 새로 단 정도? 덕분에, 서문-머리말이 세 편이고 내용이 겹친다, 슬프다. 이론서, 학술서는 엄정함이 생명인데. 편집자도 간과한 것인지, 혹은 (필경 젊은) 편집자의 조언을 우리의 스승- 대가들이 고사한 것인지. 이것과는 별개로, 아무리 현명한 사람도 나이가 들면 귀가 먼다, 참 슬픈 일이다. 귀가 '순해지는' 것이 아니라 '먼다'. 순해지는 것이 머는 것인가? 눈도 먼다. 자연의 이치니 어쩔 수 없다.

 

나야 이미 중년이어서 이 번역이 여전히 읽히지만, 더 젊은 층에서 독자를 만들려면, 아이들 무식하다고 욕하지 말고(이거야말로 제 얼굴에 침 뱉기^^;) 새 번역이 슬슬 나와주면 좋겠다.  음, 그러는 너는 왜 니 번역을 안 하고 놀고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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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표현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도스-키 전공자로서, 또 <죄와 벌>, <악령>, <카라마조프>의 번역자로서, 우리 사회의 일련의 범죄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자주 해본다. <악령>의 마지막(별첨^^;), <스타브로긴의 고백>에서 티혼(치혼)은 스타브로긴에게 '아름답지 못한 것'(추한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범죄 중에도 유독, 심히 추한 것이 있다는 것. 일반적인 표현으론 '죄질이 나쁘다/불량하다' 정도. 스타브로긴의 범죄 중  마트료샤 사건(미성년자 강간, 자살 방조)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면, 미적 등급이 높은(?), 정상 참작이 가능한 범죄는 어떤 것일까.

 

우선은 생계형 범죄 아닐까 싶다. 배가 고파 죽겠어서 빵 하나, 은촛대 하나 훔치는 식의 범죄. 요즘은 사실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범죄다... 라고 생각하지만, '생리대' 광고를 보면 그것도 아닌 것이다. 내가 그만큼 가난하지 않은 것이지, 지구촌의 누군가, 심지어 한반도의 누군가는 여전히 가난하다. 우리는 타인의 불행에 참 무심하다. 혹은, '너의 불행이 나의 행복을 담보해~' 이런 식이다. 이건 인간의 본성인지라(측은지심의 대극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국가, 사회의 제도적인 개입이 들어가야 마땅하다. 다만, 때 아닌 '감성팔이'를 하는 경우가 있어 속상하기도 하다. 가난한 자들, 괜히 더 비굴해지지 말라. 나와 나의 형제자매, 나의 부모 역시 그토록 가난했지만(지금도 그런가?) 그렇더라도 비굴하지는 않았다. 열심히 노력하면, 그리고 내 가난을 실존으로 받아들이면 사회보장제도 꼼꼼이 따져서 인간으로서 최소치의 존엄은 지킬 수 있다. 

 

그 다음은 미필적 고의, 부작위의 죄 같은 것. sins of ommission. 즉, 뭘 해서(작위 commission)가 아니라 뭘 안 해서 죄가 되는 것이다. 이게 형사적으로 처벌되는 경우는 드물 터이다. 저 사람 구하려다가 내가 죽을 것 같아 아무것도 안 하거나 도망친 사람을 잡아다가 족칠 수는 없다. 그런데 살다 보면 애매한 경우도 있을 법하다. 가령, 주차장에서 꼬맹이들 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교통사고 같은 것. 운전대를 잡아본(헐, 뜨끔! - 운전하지 않는, 운전면허소지자^^;) 사람으로서, 아무리 교통 법규를 잘 지켜도, 즉 서행하면서 전방주시 해도 코너에서 확 튀어나오는 서너살 꼬맹이를 안 칠 도리는 없다. 한편,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애는 한 순간이에요, 애기 엄마!" 이 말의 무서움 또한 잘 한다. 엄마의 방심이 큰 죄이긴 하지만, 24시간 일년 열두달 아이를 보다 보면 아차, 하는 일이 상당히 자주 있다. '십년감수'라는 말이 실감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니 죄는 있고 죄인은 없는 참 안타까운 상황이기도 하다. 비슷하게, 한밤중에 고추 광주리 머리에 이고 고속도로를 건너는 할머니, 인지 기능이 아이처럼 퇴화된 상태에서 차 몰고 나가 고속도로에서 역주행하는 할아버지, 대책 없이 집을 나갔거나 길을 잃은 발달장애 성인들(조은**양의 기적은, 비가 와준 덕분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녀가 조용했기에, 운동능력이 낮은 저각성이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등. 

 

그 다음은, 흉악, 극악 범죄라도 너무 양해, 이해되는 안타까운 경우. 가령 노모(노부)가 심한 장애를 앓는 성인 아들/딸을 죽인다거나, 그 반대의 경우 같은 것. 다들 혀를 내두르며 안타까워하는 것이, 극히 공감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중병이나 다름없는, 심지어 그보다 더 한 치매 관련 범죄도 비슷하다. 조금 '마일드'하게는 요즘 연예인들 사이에 나타나는 '빚투' 정도. 설마 가족이? 가족끼리 어떻게 저런 일이? 아니다, 가족이기에 오히려 가능한 일이다. 조금만 싸납게 했다가는, 니가 부모를 버려? 형제 자매를 버려? 이런 화살이 무서워 자꾸 퍼주다 보면 걷잡을 수 없어진다. 도중에 터져 줘야 그나마 종기-고름 수준에서 멈춘다. 자꾸 가면, 더 극악한 양상의 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

 

<카라마조프>의 소재-주제가  '아비 죽이기'라는 점은 그래서, 항상 의미심장하다. 스메르쟈코프를 용의선상에 넣고(정확히는 미끼로) 예심판사가 드미트리를 슬쩍 떠본다. 드미트리 왈: "에이, 설마요, 걔는 우리 아버지 아들일 수도 있는 걸요, 소문 들으셨죠?" 대략 이런 식의 말. '아들은 결코 아비를 죽이지 않는다'라는 법칙은, 드미트리에게나 가능한 것이다. 그는 착하니까, 아비를 죽이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반은 다르다. '아들은(도) 아비를 죽일 수 있다'라는 것.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 그래서, 작가에 따르면, 드미트리가 아니라 이반이 죄인이다.

 

*

 

자, 다시 반대로, 정녕 '추한' 범죄는 뭐가 있을까. 거론하기도 싫은 각종 범죄들이 있다. 성범죄는 거의 항상 그리 취급되고 그래야 마땅하다. 특이 소아 상대, 또 집단적으로 이루어지는 것 등. 그런데 최근 들어 '미추'의 범주를 초월하는, 뭐랄까, 굉장히 선진화된, 선진국형 미학적 범죄랄까, 21세기, 심지어 22세기형 범죄랄까, 이런 것이 보인다. 2년전 인천초등생 사건이 그렇고, 얼마전 제주고 고유* 사건이 그렇다.

 

 현재 가장 핫/힙한 고유* 사건의 핵심은, 피의자가 넘나 평범, 평범 이상의 평범이라는 데 있다. 일단 예쁘다. 그것도 눈 돌아갈 미인도 아니고, 정녕 평범 수준의 예쁨이다. 자그마하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애교부리기 좋아하고 아마 친구나 연인 관계도 원만했을 법하다. 평범-예쁨 수준의 짜증, 토라짐 등. 아이에게는 어떤 엄마였을까. 크게 차별되지 않았을 법하다. 모든 엄마처럼 아이 예뻐하고 잔소리도 하고 간혹 자기 히스테리도 부리고 그래도 아이 예뻐하고 등등. 그랬기에 소위 뒤통수 치기도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대학원 시절, '초롱초롱빛나리' 사건에 너무 놀란 적이 있다. 이 경우도 범인이 (아마 만삭의?) 임신부였다는 점이 우리를 경악케 했다. 소설에도 쓴 기억이 있다.

 

 

 

 

 

 

 

 

 

 

  

 

 

 

'악의 평범성'을 익히 알면서도 우리는 항상 뒤통수를 맞는다. 혹은 그런 척 으악~ 하고 경악한다. 혹은 경악하는 척 한다. 풀어헤친 머리를 걷어올린 후 나온 그녀의 얼굴은, 여자들이라면 어지간히들 동의하겠지만, 예쁘장한 편이었다. 이후 공개된 그녀의 평상시 사진은 그점을 확증해준다.  그녀는 이토록 '평범'(banal)한 존재인데, 그녀가 이룩한(!) 악은 좋다/나쁘다, 를 떠나 무척 기괴하다. 그로테스크, 라는 말이 딱 맞는다. 세상에. 도대체 어떻게?? 살인까지야 그렇다 쳐도 그 다음의 처리 장면은 과연 엽기지만, B급(^^;;) 장르 소설이나 영화에 능한 자라면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특히 요리사, 혹은 요리를 담당하는 여자-아줌마의 경우에 죽은 동물 식재료 다듬기 만큼 일상적인 일은 없다고 한다. 시아버지가 낚시를 좋아하셔서, 시어머니는 살아있는 각종 물고기는 물론 심지어 살아 있는 닭도 능숙하게 '처리/처분'하신다. 쓰다 보니 왕룽 일가의 젊은 여자(오란??)가 막 자른 소의 목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를 받는 장면이 떠오른다.

 

 

 

 

 

 

 

 

 

 

 

 

 

 

(이 소설, 요즘 왜 안 읽지?)

 

시골의 여자아이로서 나는 여자어른들이 이렇게 살생하는 것을, 적어도 살생된 것을 처리하는 것을 곧잘 보아왔다. 내장을 상처 내지 않고 분리해내기, 살 별로(?) 가르기, 그거 정리하기, 생선의 경우 배 가르고 내장 빼고 토막 치기, 조개 산 채로 껍질 갈라 꺼내기 등등. 살육의 향연, 홀로코스트다. 말로만 들은 개잡기는, 정말이지. -_-;  "아빠도 내가 키운 돼지나 소는 못 먹겠더라." 그러는 님은 나약한 (지식인이 아니라) 농부?? 글쎄다.  쓰다 보니 이건 육식의 문제와도, 최근의 화두와 연결시키면 '개고기' 문제와도 연결되는 듯하니 패스.

 

다시 고유*로 가면, 이름도 참 예쁘고 참한 그녀에겐 또 다른 평범한 취미가 있다. 사진 찍기, 기록하기, 물건 보관하기. 이 역시 여자들이 넘나 즐기는 취미다. 남친과 주고받은 편지, 어릴 적 사진, 머리카락 등등. 사진 찍기, 블로그나 트윗,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나 같으면 이런 데다 글쓰기, 심지어 가공하고 소설로 쓰기 등. 그녀의 취미가 드러나는 방식이 넘나 평범하고 속돼서 또다시 banality라는 낱말을 떠올린다. 예쁘게 닫은 지퍼백에 속에 든 팥과 소금! 이 정겨움이란, 또한 전통적인 미신스러움이란! 그녀는 여러 모로, 친구 하고 싶고 (아마 남자라면) 한 번쯤 차라도, 산책이라도 같이 하고 싶은 그런 소녀/아가씨/아줌마(아이엄마)였을 법하다.  

 

 

 

 

 

 

 

 

 

 

 

 

 

 

 

그런데 보다시피,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소꼬리뼈를 통째로 사와 다듬어 곰국 끓이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돼지등뼈로 김치찜을 한 적이 있는데(나도 한 때는 엄청 노력했다오!!!) 뼈와 고기가 같이 들어가는 건 정말이지 넘나 힘들다. 핏물 빼고 삶고 물 버리고 장시간 고우(으?)고 곰국의 경우는 기름도 걷어내야 하고 여기에 채소나 다른 식재료도 함께 넣자면, 손은 두 배, 세 배 간다. 비슷하게 힘든 것이 육개장, 닭개장이다. 고기는 고기대로 삶아서 바르고 채소는 채소대로 준비한한 다음 끓여야하고, 소위 '깊은 맛'을 위해서는 각종 재료를 넣은 육수가 필요하다. 간은 반드시, 주로 국간장이 들어가야 한다. 역시나 '깊은 맛'을 위해서다.

 

 

 

 

 

 

 

 

 

 

 

 

 

(바흐틴/친이 그로테스크 얘기하면서 연구한 라블레의 소설.)  

 

이야기가 왜 이리로 왔나. 그만큼 그녀의 범죄는 그로테스크하다. 그로테스크는 서로 다른, 반대되는 범주가 뒤섞일 때 발생하는 미적 충격이다. 여기서 섞인 범주는 (아름다운 것/추한 것, 높은 것/낮은 것, 죽은 것/산 것 등등) 두 개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어린 아이의 엄마라는 점이, (많은 경우 '엄마'이기에 저질러지는 살육, 살생도 많지만! 왜냐면 엄마는 못 할 짓이 없다고 생각하니까!)  무엇보다도 그로테스크하다. 처음에는 사람을 저렇게 잔인하게(이 단어도 별로 들어맞지 않다고 생각될 만큼 그로테스크하다) '처리/처분'하도록 만든 분노의 근원이 무엇일까, 궁금했다. 하지만 이 물음 자체도 성립될 것 같지 않은 것이, 다시금, 너무 그로테스크하기 때문이다. 분노, 증오, 이런 건 일반적인 단어다. 이런 것에 의한 범죄는 그래도, 상식(?)에 들어갈 법하다. 심지어 각종 혐오범죄도, 물론 아주 극악하지만, 또 엄벌에 처해야 하지만, 이해는 된다. 하지만 이건 뭐지. 너무 그로테스크하여 여전히 혼란스럽다. 도스-키라면, 해답은 못 내도 놀라운 걸작은 써냈을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저런 소설들이기도 하다.  

 

아무튼 저 범죄의 미적 등급을 매기자면.... 아무래도 ...

등급외,

밖에 안 될 것 같다.

 

 

*

 

논문 수정하기가 싫어서 너무 놀았다. 이러고도 아이에게 공부하라고 말하는 엄마, 내가 생각해도 토나온다. 아이의 할머니에게, 강남 8학군 최선선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언저리, 변두리의 아이 셋 맘이었던 그녀에게 조언을 구했다.  "나는 별로 안 보냈어, 별로 안 시켰어~" 하지만 들어보면 이런 학원 저런 학원 이런 과외 선생 저런 선생.  결론이즉.

 

- "다 소용 없고, 제일 중요한 건..."

 

아이들의 건강이야, 가족의 행복이야, 혹은 어차피 소용 없으니 아이의 뜻을 존중해야~

 

이럴 줄 알았는데....

 

- "수학과 영어다~!"

 

헐 ^^; 역시 님은 최고의 맘인 것이다... 내숭 떨지 않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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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균호 2019-08-12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 알라딘에 이렇게 대단하신 분이 계신 줄 몰랐네요. 세상에 도끼 번역가님이라니... 선생님이 번역하신 까라마조프 제 서재에 잘 모셔져 있답니다. 도 선생을 워낙 좋아해서 각 출판사에서 나온 도 선생 저작들을 사 모았거든요.
정말 영광입니다. 자주 봬요. 좋은 글 참 잘 읽고 갑니다 ^^

푸른괭이 2019-08-12 13:49   좋아요 1 | URL
알라딘에는 업계종사자 많습니다. 저는 명함도 못 내밀어요.
오늘 너무 놀아서 이제부터 일하려고요^^; 아이한테는 한자 쓰라고 해놓고 엄마는 댓글 답니다 -_-;;

라스콜 2019-08-16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김연경 작가님!! 제가 이 책으로(때문에) 도끼님한테 빠져서 지금 까지도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너무 반갑습니다

푸른괭이 2019-08-16 09:51   좋아요 1 | URL
흠, 올 여름에는 제 책도 나오는데요^^;; 제가 지금 호가호위하며 사네요 -_-;;

라스콜 2019-08-16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 이제 작가님 책에 빠질 준비를 해야 되겠네요. 기대 하겠습니다.답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