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전체를 놓고 볼 때 라스콜니코프와 그의 사상을 패러디하는 대표적인 인물은 스비드리가일로프이다(루쥔과 레베쟈트니코프도 비슷한 역할을 한다). 그가 그 특유의 음습한 아이러니와 냉소가 담긴 어조로 말하듯, 라스콜니코프의 사상이란 그저 그런 이론에 불과하고 대체로 이론이란 그놈이 다 그놈”(6, ?)이다. 그의 나폴레옹 숭배도 냉소적으로 속화되고 희화되거나 심지어 원래 그런 사상이었음이 폭로된다. 한편 스비드리가일로프는 그 자체로 극히 완성도가 높은 인물로서 라스콜니코프의 이상적 낭만주의(‘실러’) 이후의 단계인 환멸적 낭만주의를 구현한다. 청춘 이후의 시간, 말하자면 시간적인 뒷골목을 보여준다고 할까. () 마르파 페트로브나의 환영 얘기 끝에 그가 피력하는 독특한 내세관(거미줄이 쳐진 시커먼 시골 목욕탕의 모습을 한 저 세계)에서는 허무주의의 극단이 엿보인다. 과연 그의 말대로 그와 라스콜니코프 사이에는 동질성이 존재한다. 그를, 분신을 죽임으로써 작가는 영웅-주인공인 라스콜니코프를 살린다. 이를 위해 어둠-죽음’(스비드리가일로프)의 맞은편에 -’(포르피리, 소냐)을 마련해놓은 것이기도 하다.

 

 

포르피리는 문제의 사건을 맡았을 때부터 라스콜니코프에게 혐의를 두었으며 나중에는 결정적인 단서(그것이 무엇인지는 끝내 말하지 않는다)까지 확보한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에 오히려 라스콜니코프의 실질적인 구원자가 된다. ‘양날의 칼을 휘두르며 쥐를 갖고 노는 고양이처럼 라스콜니코프를 괴롭힌 것은 정녕 기법-수법’(심리전)이었던 것이다. 용의자의 하숙방에 살짝들러 에잇, 삶을 하찮게 여기지 마십시오!”(6, ?)라고 말하며 자수를 권하는 예심판사! 서른다섯 살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볼 장 다 본 노인처럼 구는, 골초에 치질로 고생하는 이 뚱뚱한 예심판사가 작가의 대변자로 나서는 것이다. “() 이론을 생각해냈으나 영 틀어져버려서, 영 독창적이지 못한 놈이 나와 버려서 창피스러웠겠죠! () 생각은 그만 하고 곧장 삶에 몸을 내맡기십시오. () 저는 그저 선생의 앞날이 창창하다는 것을 믿을 뿐입니다.”(6, ?.) 포르피리와 접촉을 통해서 라스콜니코프의 몽상과 시험은 이론(사상)의 차원에서 실제(), 아니 생존의 차원으로 이월한다.

 

 

(라스-프를 그린 건데, 정말 후덜덜...ㅠ.ㅠ / A.N. Korsakova.) 

 

 

 

소냐 마르멜라도바에 관한 한, 라스콜니코프는 그녀를 직접 보기 전부터 그녀에게 막연한 끌림을 느낀다. 동질감 때문이다. 그녀와 대면하게 됐을 때 그는 결국 당신도 똑같은 짓을 한 셈이잖아? 당신도 역시 넘어섰으니까넘어설 수 있었으니까.”(4, ?)라고 말한다. 그들은 세계의 부조리에 대해 맞서는 태도는 달랐지만(겸허한 수용 대 오만한 반역, 이타주의 대 이기주의) 어쨌거나 넘어섬으로써 공히 자신의 것이든 타인의 것이든 여하튼 삶-생명을 파멸시키고 카인의 표식을 달게 된다. 죄의 체험과 그 인식이 두 청춘을 엮어주는 절망의 친화력으로 작용한다. 한데 6부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소냐의 시선이 최후의 심판의 주체이자 용서의 주체인 신의 시선으로 대체되는 듯하다. 라스콜니코프의 마지막 말(바로 제가 그때 관리 미망인인 노파와 그 여동생 리자베타를 도끼로 살해하고 금품을 훔쳤습니다.” 6, ?)자수이면서 동시에 고해성사이기도 하다. 이렇게 고매한 살인자성스러운 매춘부의 결합이 상당히 종교적인 차원에서 실현된다. 하지만 소설은 여전히 끝나지 않는다.

 

(M. S. Shemyakin.) 

 

 

라스콜니코프는 정말로 공기를 바꿀 필요가 있었다. 포르피리와 스비드리가일로프의 입을 빌려 이 점을 강조한 작가는 에필로그에 이르러 한여름의 페테르부르크 대신 한겨울의 시베리아를 자신의 젊은 주인공에게 선사한다. 이 연옥의 시공간에서 라스콜니코프는 와병 중에 꿈을 꾼다. 인류가 일종의 선모충(旋毛蟲)에 감염되어 자멸의 길을 걷는다는 내용인데, 이로써 그의 사상의 맹점이 드러남과 동시에 부활의 가능성이 암시된다. 병에서 회복된 라스콜니코프와 소냐가 이른 아침에 강기슭에 나란히 앉아 있는 장면도 비슷한 의미를 갖는다. 그들을 두고 작가는 변증법 대신에 삶이 도래했고, 의식 속에서는 뭔가 완전히 다른 것이 생겨나야 했다.”(에필로그, ?)라고 썼다. 변증법 대 삶이라는 이분법이야말로 도스토예프스키적 사유의 특수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변증법, 즉 라스콜니코프의 이념은 뒤로 물러섰을 뿐, 삶에 의해 기각된 것이 아니다. 이론이란 오직 그와 똑같은 층위의 어떤 것에 의해서만 지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에필로그에서 부정되는 것은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일 뿐, 이론은 희화되고 속화된 채로 고스란히 주인공의 삶의 저편으로 넘겨진다. 그렇다면 변증법 대신에 삶은 결과라기보다는 두 인물 앞에 놓인 과제에 가깝다. 작가의 의도를 좇자면 지금까지 <죄와 벌>을 지탱해온 이념의 변증법삶의 변증법으로 치환되고 나아가 진정으로 죄를 통한 구원이 이루어져야 한다. 소냐가 가져다 준 복음서는 그 상징이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에필로그에서도 라스콜니코프가 성경책을 펼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로써 근대적 주인공의 방황 이후의 풍경(갱생과 부활을 담은 새로운 이야기) 역시 <죄와 벌>의 바깥으로 넘겨진다.

 

결국 인물은 물론이거니와 작가적 차원에서도 넘어섬은 완료되지 못했다. 하지만 󰡔죄와 벌󰡕이 매력적인 것은 인물이든 작가든 그들 스스로 설정한 특정한 ’(혹은 ’)과 그것을 넘어서려는 의지 사이의 긴장 때문이다. 작가는 스비드리가일로프 절망, 가장 냉소적인. / 소냐 희망, 가장 실현 불가능한.”(󰡔죄와 벌󰡕 작가 노트)이라는 메모를 남겼다. 라스콜니코프의 몽상과 환멸은 이 양극단의 팽팽한 줄다리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강렬한 소설에 싱거운 사족처럼 붙은 에필로그와 영원히 쓰이지 못한 후속편도 마찬가지인데, 근대의 미망이라고 할 수 있는 이성의 광기영성으로써 극복하려는 의지야말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이끌고 가는 보이지 않는 원동력인 것이다.

 

* * *

 

번역 과정에서 몇 종의 영역본, 불역본, 일역본, 기존의 국역본들을 두루 참조하며 많은 도움을 받았다.

흔히 라스콜니코프의 사상을 (좀 더 뒤에 나올 니체의 사상과 유사한 측면이 있기 때문에) ‘초인사상이라 부르지만 초인, ‘초인사상도 <죄와 벌>에는 언급되지 않는 단어이다. ‘비범인(非凡人) 사상이라는 말도 포르피리와 라스콜니코프가 후자의 논문 <범죄론>을 논하며 사용하는 개념을 토대로 만들어진 조어이다. 한데 기존의 국역본에서 범인’(凡人)비범인으로 옮겨진 러시아어 단어는 각각 평범한 사람()’비범한 사람()’으로 옮겼다. 원어 자체도 극히 평범한 것이거니와 라스콜니코프의 사상 역시 진부할 정도로 평범한 것, 바로 이것이 그의 절망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덧붙여, 이 부분에서 나폴레옹, 마호메트, 리쿠르고스와 함께 비범한 사람의 예로 언급되는 또 다른 인물은 기존의 국역본에서 잘못 옮긴 솔로몬이 아니라 솔론이다.

(...) 

* * *

 

여러 말이 필요 없다. <죄와 벌>은 모든 소년소녀의 로망이었다. 소년소녀의 머릿속에 생각에 대한 생각, 즉 삶과 관념 사이의 틈새가 생겨날 때 라스콜()니코프는 그 자체로 인간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라는 길고도 기괴한 이름은 소설가의 동의어였고 <죄와 벌>은 소설-문학의 동의어였다.

2004년 초, 러시아에서 아카데미판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을 구입하자마자 제일 먼저 펼쳐든 책은 물론, <죄와 벌>이었다. 해빙의 봄이, 이어 백야의 여름이 오기까지 매일매일 수험생처럼 <죄와 벌>을 읽어갔고 그와 나란히 <죄와 벌>을 패러디하는 소설을 썼다. 그 소설을 출간하지는 못했으나 그렇게 읽고 쓰면서 한 시절을 살아냈다.

오랫동안 꿈꾸었던 <죄와 벌> 번역을 맡기까지 우여곡절이 있었다. 번역을 하는 동안 뜻밖에도 더 많은 우여곡절을 겪게 됐다(...)  최선을 다했고, 현재로서 내가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번역이다. (...) 

 

-- 끝.

 

'철완 아톰'으로 유명한 데츠카 오사무가 각색하고 그린 <죄와 벌>의 일부. 역시 대가(!)임을 보여줍니다! (썩 맞는 비유는 아니지만, 조용필의 <바운스>가 싸이의 <잰틀맨> 만큼의, 심지어 그걸 능가하는 인기를 누리는 것처럼. 흠, 쓰고 나서 봐도, 적절한 비유는 아님..-_-;;) 대학 시절 연극도 했었다는군요. 흠, 그가 맡은 역은 뜻밖에도(!) 칠쟁이 미콜카였다는...-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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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죄와 벌>: 라스콜니코프의 몽상과 환멸 - “변증법 대신에 삶이 도래했다

 

1860년대 후반,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7월 초의 페테르부르크. 저녁 7시가 지난 시각, 한 청년이 도끼로 전당포 노파를 죽인다. 거의 그 직후에 귀가한 노파의 이복여동생 리자베타마저 죽인다. 그제야 청년은 자신이 첫 번째 범행을 저지르는 동안 문을 잠가 놓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그가 걸쇠를 걸기가 무섭게 노파의 지인 두 명이 차례로 나타난다. 그들은 집안에 사람이 있으면서도 일부러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것임을 알아차리고는 나름의 대책을 강구한다. 그러다 그들이 모두 자리를 비운 아주 짧은 틈에 청년은 노파의 아파트를 빠져나간다. 도중에 계단을 올라오는 사람들과 마주칠 뻔하지만, 마침 열려 있던 텅 빈 아파트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가(그때 훔친 금품 하나를 떨어뜨리고 그것을 나중에 칠장이 니콜라이가 줍게 된다) 적시에 밖으로 나온다. 그러고는 하숙방으로 돌아가 거의 기절하다시피 쓰러진다.

 

이것이 <죄와 벌>1부의 줄거리이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독자는 문제의 청년, 즉 로지온 로마노비치 라스콜니코프가 대학에 다녔으나 경제적인 형편 때문에 학업을 중단했을 뿐더러 하숙비가 밀려 끼니조차 때우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것, 3년간 떨어져 있던 어머니와 여동생이 조만간 페테르부르크에 올 것이며 그에 앞서 여동생의 약혼자인 루쥔이 그를 방문하리라는 것 등을 알게 된다. 노파의 전당포를 방문한 직후 우연히 허름한 술집에 들렀다가 만난 마르멜라도프와 그의 가족(특히 황색 감찰을 갖고 사는 소냐)도 흥미를 자극한다. 어떻든 소설이 막 시작된 시점에서 핵심적인 사건, 즉 누가 누구를 언제 어떤 방식으로 죽였는지가 모조리 알려졌다. 따라서 소설적 흥미를 자극하는 것은 여느 범죄소설과는 다소 다르게 범행의 동기(‘’)와 그 귀추이다. 실제로 총 6부와 에필로그로 구성된 이 소설의 나머지 부분은 관처럼 비좁고 갑갑한 하숙방(지하!)에 스스로를 감금하고 자기만의 몽상에 탐닉하다가 기어코 거리(지상!)로 나와 그 일을 감행하고 그로써 선악의 피안을 넘어선(러시아어에서 넘어서다라는 동사는 범죄라는 명사와 어근이 같다.) 한 청춘이 겪는 환멸과 좌절의 기록이다. 도무지 왜 죽였는가? 물론 어떤 근거나 목적이 있으면 사람을 죽일 수 있거나 죽여도 된다는 생각 자체가 작가가 가장 경계한, 정녕 죄스러운 것이라는 전제 하에 라스콜니코프의 죄와 벌을 둘러싼 일련의 정황을 짚어보자.

 

 

 

 

 

 

 

 

 

 

 

 

 

 

우선 라스콜니코프의 사회적 입지가 주목을 요한다. 그는 단기적으론 학업을 위해, 장기적으론 입신출세를 위해 페테르부르크에 온 지방 출신의 명문대 학생, 더군다나 법학도이다. 그의 동선은 중심(대도시의 번화가, 상류층-귀족)과 주변(대도시의 빈민굴, 하류층-민중)을 아우를 법하지만 대체로 후자에 더 집중된다. 어떤 수사를 갖다 붙이든, 또 아무리 호기를 부려 봐도 가난에 짓눌려 주눅이 든 것도 사실이다. 덧붙여 그가 가장이나 다름없는 처지에 가족의 희망임을 상기하자. , 그의 몽상에는 앞으로의 성공을 위한 토대를 마련함과 동시에 가족의 희생에 보답하고 그들의 생계를 책임지고자 하는 장자 콤플렉스가 깔려 있다. 계급의식(라스콜니코프는 잡계급에 속한다)도 제법 엿보인다. 그렇다면 라스콜니코프의 범행은 생계형 범죄인가. 

 

(러시아 티브이 시리즈 <죄와 벌>.)

 

 스물세 살의 청년이(더군다나 그는 대학생씩이나 된다!) 육십 대의 전당포 노파와 삼십대 중반의 지적 장애 여성을 살해하고 금품을 빼앗은 흉악 범죄에 이른바 메시아 콤플렉스가 개입돼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 점에서 그의 첫 번째 꿈이 여러 모로 상징적이다. 어린 로쟈는 아버지와 함께 할머니의 추도 미사에 다녀오는 길에 술 취한 남자들이 허약한 암말을 채찍으로 휘갈기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연민에 사로잡힌다. 암말(약자)을 구원하려는 소년 로쟈와 그 일을 감행하려는 청년 로지온 사이에 묘한 유비 관계가 형성된다. 한데 전자는 간절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말을 죽음에서 구하지 못하고(결과만 놓고 보면 타인의 고통을 외면한 로쟈의 아버지와 비슷해진다) 후자는 구원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살인을 정당화하려 한다(결국 폭력을 즐기는 술 취한 남자들과 다를 바 없어진다). 이런 모순을 명민한 라스콜니코프가 몰랐을까. [] 꿈을 꾼 직후, 즉 범행 전날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겟세마네 기도를 연상시키는 기도를 읊조린다. ‘주여! () 저에게 저의 길을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저 빌어먹을저의 몽상을 단념하겠습니다!’(1, ?) 그러나 단념은커녕 이튿날 일종의 환시(사막의 오아시스)를 보자마자 곧장 방을 뛰쳐나가 몽상을 실행에 옮긴다

 

(60년대(?) 영화 <죄와 벌>의 라스-프. 대학생은 고사하고 지도교수라고 해도 믿을 노안..ㅠ.ㅠ)

 

라스콜니코프에게 가장 어려운, 더 정확히, 가장 하기 싫은 일은 자기기만을 인정하는 것이었으리라. 핍박받는 민중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럴 능력과 자격을 갖춘 메시아가 되는 것, 혹은 그 가능성을 점쳐보는 것이 문제였으며 결과적으로 그 일은 오만한 자기중심주의와 자폐적인 선민의식의 산물이었다는 것. 소냐를 앞에 두고 그는 광적인 어조로 고백한다. 나는 그냥 죽였어. 나 자신을 위해, 나 하나만을 위해 죽인 거야. () 나는 그때 내가 다른 사람들처럼 이에 불과한지, 아니면 인간인지를 알아야만 했어, 그것도 어서 빨리 알아야만 했지. , 내가 넘어설 수 있는지, 아니면 그럴 수 없는지를!”(5, ?.) 3부에서 얘기되는 라스콜니코프의 논문을 참조한다면 자기와 비슷한 존재를 생산하는 것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평범한 사람’(‘재료’)인가, 아니면 새로운 말을 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장애물을 발견하면 과감하게 처리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닌 비범한 사람인가. 간단히, 나폴레옹인가, 그냥 이[]인가. 그 답이 무엇인지는 분명하다. 과연 나폴레옹이 노파의 침대 밑으로 기어”(3, ?) 들겠는가. 이렇게 미학에 사로잡힌 그는 스스로를 조롱조로 미학적 이[]”(3, ?)라고 부르기에 이른다. 하지만 미학만이 문제인가.

 

(BBC판 <죄와 벌>. 도..키에 대한 오마주가 아니라 희화로 여겨질 만큼 마음에 들지 않았음..-_-;;) 

 

라스콜니코프는 소설이 끝날 때까지 절대 자신의 범죄를 뉘우치지 않는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은 시종일관 판단 착오로 인해 주제넘게 (자기에게는 있지도 않은!) ‘넘어섬의 권리를 행사하려 들었다는 사실이다. 범행 이후에 꾸는 꿈에서 조롱당하는 것도 일차적으론 바로 이 오류이다. 꿈속에서 그는 여전히 도끼를 내리치지만 노파는 죽지도 않을뿐더러 키득키득 웃고 있으며 심지어 그 모습을 감추려고 몸을 최대한 수그린다. 그 주변으로 구경꾼들까지 몰려들어 수군대며 그를 비웃는다. 범행이 완료된 순간부터 그를 괴롭힌 미학적 수치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여기서 미학적 수치는 윤리적 수치와 하나가 된다. 리자베타가 그 절절한 몸짓과 표정을 통해 상처 받을 가능성을 지닌 타자의 얼굴(레비나스)로 나타났음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혹은 그럴 수 없었다!). 비웃음으로 무장한 불멸의 노파와 타자들은 그런 자신에 대한 단죄로 읽히기도 한다. 스스로를 나폴레옹으로 내세우며 장애물을 당당히 처리한 자, 그렇게 사람을 죽이고도 () 창백한 천사처럼 거리를 활보”(6, ?)한 자에게 내려진 가장 참담한 선고는 너는 나쁜 놈이야!’가 아니라 너는 웃긴 놈이야!’가 아니겠는가. 백야의 미망에서 깨어난 라스콜니코프를 기다리는 것은 더 참담한 희화, 즉 타자와의 대면이다. 애초 1인칭 소설로 구상되어 일정 부분 그렇게 쓰였던 작품이 현재와 같은 3인칭 소설로 바뀐 이유 중 하나도 주인공의 바깥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계속...)

 

- 민음사판 <죄와 벌> 역자 해설.

 

-- <죄와 벌> 수업을 하다보니 이 소설을 내 맘대로(요즘은 더 그런 것 같은데) 읽으면서 열에 들떠 있던  십대 시절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이렇게 쓰고 보니, 차라리 이런 떠올림을 위해 이 소설을 또다시 읽는다,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이러나저러나 마흔을 코앞에 둔 내가 한 시절 '구덩이 오막살이' 구석에서 끼고 살았던 <죄와벌>을 다시 펴보는 심사는, 뭐, 제법, 야릇하다. 정확히, 그 때 그 책은 아닌데, 아무튼 그 책은  빨간 불꽃이 이글거리는 촌스럽지만, 그 당시로선 무척 강렬하게 여겨졌던 <글방문고>판, 글자포인트가 작아서 정말이지 깨알 같은 문자가 빼곡히 들어차 있던 <죄와 벌>이었다. 한데 그 책이 어디론가 사라졌고, 그 사실을 알고서 무척 쪽팔렸던(-_-;;) 기억이 있다. 아니, 그렇게 소중한(-그렇다고 떠벌린) 책을 잃어버리다니!

아무튼 역자는 이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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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소송>에 관한 14매짜리 원고를 보낸 다음, 바쁜(혹은 그런 척 하는, 그런데 척, 하다 보면, 정말 그렇게 되기도 하는) 일상의 와중에 주저리주저리 잡담을 써본다.

 

 누군가 요제프 K를 중상모략한 것이 틀림없다. 그가 무슨 특별한 나쁜 짓을 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어느 날 아침 느닷없이 체포되었기 때문이다.”(9)

 

이렇게 시작되는 당혹스러운 소설. 한때는 <심판>이었다. <실종자>(<아메리카>), <성>과 함께 '고독 삼부작'이라 불린다.(그렇다고 한다.) 실제로, 이건 너무나 고독한(!) 소설이다. 뭐랄까. 이걸 쓰는 작가가 얼마나 고독했을지, 그 고독이 거듭, 이 소설을 읽는 독자인 나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고독한 원의 고독한 중심"(!) 고독뿐이냐.

 

이런 구토도 있다. 이 사법기관의 내부도 그 외부만큼이나 역겨운 모습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은 욕구에서였다. 그런데 그의 이런 추측은 옳은 것 같았다. 그는 더 이상 파고들고 싶지 않았고, 지금까지 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슴이 답답했다.”(92) 그리하여, 두 번째로 법정을 찾았던 K는 힘겹게 건물을 빠져나가며 배멀미를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된다. 어마어마한 구토(!)이다. 복도가 좌우로 흔들리고, 파도소리가 들리고 물이 덮쳐올 것 같다. 그러다 마침내 벽이 갈라지면서 바람이 들어온다. 드디어 탈출! 흡사 <큐브>의 한 장면 같다.

 

과연 탈출이냐. 힘겨운 탈출 끝에 마주한 바깥 세계(일상!)야말로 더 심한 욕지기를 불러일으킨다면...? 적어도, 이 경이로운 소설의 결말, 마지막 부분은 정녕 '개 같은 실존'을 그야말로 카프카식으로(달리 표현할 수가 없고나!) 보여준다. 

 

그가 한 번도 보지 못한 판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가 아직 이르지 못한 상급 법원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는 두 손을 쳐들고 손가락을 쫙 펼쳤다. / 그러나 K의 목에 한 남자의 양손이 놓이더니 동시에 다른 남자가 그의 심장에 칼을 찔러 넣고 두 번 돌렸다. K는 흐려져가는 눈으로 두 남자가 바로 자기 눈앞에서 서로 뺨을 맞대고서 최종 판결을 지켜보는 것을 보았다. ”개 같군!“ 그가 말했다. 그가 죽은 후에도 치욕은 살아남을 것 같았다.”(287)

 

진정한 희극은, 칼날이 목전에 왔는데도 '희망'이라는 괴물의 꼬리를 붙잡아보려는(그것도 너무 무성의하고 부실하게?!!) K의 태도에 있는 듯하다. 하지만 어쩌랴. 존재와 존재함 자체가 '죄'인 것을. 그렇기에 더더욱, 대성당, 법원 소속 신부 앞에서 무죄를 역설하는 K의 절규가 안타깝게 들린다. 안타까우면서도, 다시금, 또 웃긴다!  쿤데라의 표현을 빌자면, "농담의 검은 밑바닥"이 보일 것 같단 말이지.

 

뭔가 잘못된 겁니다. 도대체 인간이라는 사실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이 땅에서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인간입니다.”(264)

 

이 지점에서 정녕 웃어야 하는데, 쉽지 않고나.

<소송>의 첫 장을 낭독했을 때 다들 즐거워했단다. 실제로 <체포>는 좀 많이 웃긴다. <첫 심리>, <태형리>도 그렇고, 나는 그놈의 숙부(카를-알베르트, 이름도 왔다가 갔다 한다)가 왜 그리 웃기냐. 그의 호들갑은, 말하자면, 무척 조건화돼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조건화된 웃음을 웃어줘야 할 의무가 좀 있는 것 같은데,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좀 웃기기도 하다. 웃음에도 의무가 있다니, 원. 횡설수설.

 

강조하건대, 이건 잡설이라... 언젠가 다시금 <성> 안으로 깊이 침투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흠, 그 역시 새로운 패배(!)로 이어질 터. 이런 정황을 꼬집는 같은 신부의 말. 도무지 매혹되지 않을 수 없는 '성담'인 <법 앞에서>('기만'!)에 붙어 나오는 말이다.

 

글은 불변하는 것이고, 해석들은 종종 글에 대한 절망의 표현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경우 심지어 문지기야말로 기만을 당한 자라는 의견까지 있어요.”(273)

 

 

절망! 절망하기에, 또 쓴다. 하필, 지금 내가 바쁜 건, 아니, 바쁜 척 하는 건, 나보코프의 <절망>에 대해 쓰고 있기 때문이니, 이 역시 운율이 맞는다. 운율은 맞는데, 글의 아귀는 왜 이리 맞냐. 영원히 짜이지 못하는 엉성한 플롯, 구멍이 숭숭 나 있는 음모처럼. 에라잇.  

 

보지 못해 유감인데, 오손 웰스가 만든 <소송>의 한 장면. 앤서니 퍼킨스가 K역을 맡았다. 그럼, 오손 웰스는? 변호사 홀트 박사 역이라 한다. 보아하니, <첫 심리> 장면인 듯. 

 

 

 나보코프의 <처형장으로의 초대>와 비슷. 나보코프의 작품이 카프카의 영향을 받았다는 혐의(?)가 제법 설득력 있다, 나보코프는 아무리 부정한다고 해도. 뭐, 여하튼, 나의 취향은, 아무래도 타고난 천재에 가까운 나보코프 보다야, 소설 쓰느라 죽도록 고생하고 그 핑계 대고서 장가도 못 간(혹은 안 간) 카프카 쪽이다. 실은 <소송>도 펠리체 바우어와 파혼한 사건(아닌 사건-_-;;)이 제법 자극이 됐던 듯하다. 겸사겸사, 펠리체 바우어의 남성스러운(?) 외모란. 카프카의 취향의 독특함을 증명해준다 ㅎㅎ

 

카프카가 도...키를 좋아한 것도 제법 유명하다. 특히 격찬한 건, 당근, <카라마조프.> 이거 번역한 건 (<죄와 벌> 번역과 더불어) 내가 삼십대에 한 일 중 제일 잘 한 일이다, 진짜로.

 

 

 

 

 

 

 

 

 

 

 

 

 

 

 

 

 

둘의 소설 세계가 너무 다르니(혹은 달라 보이니), 처음엔 놀랄 법도 하다. 도..키는 타고난 이야기꾼이고, 카프카는 어쨌거나 '학문적인'(!) 작가다. 그럼에도 좋아한 건 좋아한 건데, 작가마다 다 자기만의 조그만 모퉁이(!)가 있는 듯하다. 그 모퉁이가 그토록 수치스러웠던 것이냐. 왜 원고를 불태우라고 했나. 자기는 손이 없냐, 발이 없냐. 고골은 눈물을 흘리며(!!) 직접 불태웠는데... 흠. 흠. 흠. 레핀의 그림 속 고골은, 그러나, 은근히 희극적으로 보인단 말이지. 내가 꼬롬한건가..? 아니아니, 진정한 고뇌는 왠지 저럴 것 같단 말씀.

 

 

 

 

아무튼. 어느 날 생각했는데, 카프카는 정녕 불멸(!)의 욕구가 강했던 것 같기도 하다.  심드렁(!)의 포즈(포스, 인가?) 밑에 감춰진 어마어마한 야망의 덩어리. '단식'의 형식 속에 포함된 '포식'의 욕구. 웃음-광대의 내부에 도사린 비극의 무게.

 

주저리주저리.  어느 순간 왕창 어긋난 인생(=시간)의 돌쩌귀가 다시 맞춰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자, 그럼, 어긋남 자체를 그냥 받아들이자, 이 말씀. 자, 그럼, 다시 <절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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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더하기 둘은 넷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

조지 오웰(1903-1950), <1984>(1949)

 

 

 

198444일 현재, 세계는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이스트아시아 등 세 개의 거대 국가로 재편돼 있다. 소설의 배경인 오세아니아의 런던. “빅 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라는 문구처럼 모든 것이 B.B., 즉 빅 브라더의 통제 하에 있다. 텔레스크린, 증오 주간, 영사(영국 사회주의), 승리맨션, 승리담배, 신어. 극히 단순화된 미래 사회를 움직이는 원칙은 당의 슬로건(“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이 암시하듯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진리의 부정, 이른바 이중사고’(‘현실 제어를 의미하기도 한다)이다. 진리부의 일원으로서 역사의 재편-날조에 종사하고 있는 윈스턴 스미스는 대략 7년쯤 전부터 당과 빅 브라더에 반감을 품어왔는데, 그 표현이 일기 쓰기이다. 2부에서는 연애를 통해 저항한다. 줄리아는 당의 부패와 타락의 상징처럼 제시되고 그녀와의 육체적 관계는 일종의 전투”, “사랑의 행위이기 전에 당에 일격을 가하는 정치적 행동”(179)이다. 그들은 함께 형제단에 가입함으로써 체제 전복을 꾀하지만 그들에게 밀회 장소를 제공해 주었던 늙은 상점주인 채링턴, 정확히, 그렇게 위장해 있던 사상경찰에게 체포된다. 3부는 어둠이 없는 곳”(321), 즉 애정부에 갇힌 윈스턴이 오브라이언의 고문과 세뇌 끝에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담고 있다.

 

 

 

 

 

 

 

 

 

 

 

 

 

 

 

디스토피아 소설로 널리 알려진 조지 오웰의 <1984>는 여러 모로 정치풍자적인 우화에 가깝다. 검은 콧수염을 기른 마흔 댓 살쯤의 잘 생긴 남자(빅 브라더)는 스탈린을, “인민의 적골드스타인은 외모(가느다란 염소수염과 어딘가 지적이면서도 비열해 보이는 얼굴), 유대인이라는 점과 일련의 전기적 사실에 있어 트로츠키를 연상시킨다. 윈스턴과 오브라이언의 두 번에 걸친 긴 대화(심문), 골드스타인의 책(<과두적 집단주의의 이론과 실제>)에서 인용되는 문장은 소설이 아니라 선동적이고 교시적인 팸플릿에서 가져온 듯하다. 실제로 문학과 정치의 상관성은 <1984>, 나아가 조지 오웰의 문학을 받치고 있는 축이기도 하다.

 

 

 

 

 

 

 

 

 

 

 

 

 

 

인도 주재 영국 공관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난 그의 첫 직업은 버마(미얀마)의 경찰이었다. 그러나 제국주의뿐만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모든 형태에 대해 분노하면서 제국의 식민지 경찰 에릭 아서 블레어는 작가 조지 오웰로 다시 태어난다. 그가 1930년대에 쓴 책들(<런던과 파리의 따라지 인생>, <위건 부두 가는 길>, <카탈로니아 찬가> )은 대도시의 슬럼가, 탄광 지대, 전쟁터 등 민중속으로, 또 역사의 현장으로 들어가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충실히 기록하고 보도하려는 소명감을 여실히 보여준다여전히 모더니즘의 영향력이 막강한 때였음에도 그는 전통적 리얼리즘과 저널리즘의 원칙을 고수하며 르포르타주(다큐멘터리)와 순수 문학의 경계를 오가는 소설을 썼다. 기록문학의 대가가 <동물농장>, <1984>와 같은 알레고리로 옮아간 것은 당연해 보인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러니까 나이 다섯 아니면 여섯 살 때부터, 나는 내가 나중 커서 작가가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나는 왜 쓰는가)로 시작하는 유명한 에세이에서 그가 작가가 되려는 네 가지 동기 중 가장 강조하는 것도 정치적 목적이다. 여기서 정치적이란 세계를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욕망, 성취하고자 하는 사회가 어떤 사회여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보려는 욕망을 말한다. 고로 어떤 책도 정치적 편견으로부터 아주 자유롭지 않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견해 자체도 하나의 정치적 태도이다.”

 

 

 

 

 

 

 

 

 

 

 

 

 

<1984>를 쓰기 전 조지 오웰은 디스토피아 소설의 고전으로 꼽히는 자먀친의 <우리들>(1923)에 대한 짧은 평(자유와 행복)을 남겼다. 그가 지적하듯 이 소설은 스탈린 체제가 시작되기 전에 쓰인 소설이다. 형식주의 이론의 대두와 맞물려 다양한 문체와 형식 실험이 행해지는 가운데 자먀친은 SF소설에서 나올 법한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도스토예프스키(특히 <지하로부터의 수기>)가 던진 화두를 소설화한다. 건물은 유리벽으로 돼 있고 인간은 알파벳과 숫자로 환원되고 인간의 욕망과 자유의지는 “2x2=4”, 즉 수학과 이성의 논리에 따라 엄밀하게 측정, 계산된다. 단일제국의 우주선 축조에 참여하는 엔지니어 D-503의 일기(수기)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반역을 시도했던 주인공이 일종의 로보토미 수술을 받고서 제국의 충실한 종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난다. 전체주의의 악몽 속에서 철저히 마모돼 가는 개인의 실존을 포착한 걸작의 닫힌 구조를 <1984>도 반복한다.

 

 

 

 

 

 

 

 

 

 

 

 

 

 

 

1, 윈스턴 스미스의 일기에는 빅 브라더를 타도하자”(31), “둘 더하기 둘은 넷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 이것이 자유이다.”(114)와 같은 문장이 들어 있다. 3, 철저한 재교육이 끝난 뒤 그는 둘 더하기 둘은 다섯이라고 쓴다. 소위 쥐 고문을 받은 뒤에는 빅 브라더를 향한 증오도 사라진다. “윈스턴은 빅 브라더의 거대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중략) 투쟁은 끝났다. 그는 자신과의 투쟁에서 승리했다. 그는 빅 브라더를 사랑했다.”(417) 묵시록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결말이다. 여기에 덧붙인 부록: 신어의 원리는 인간의 의식 구조의 형성과 변화에 언어-문학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새삼스레 환기시킨다.

 

-- <책앤>

 

-- 바깥의 기운과는 별개로, 아니면, 그것과 밀접히 연관되어, 여하튼 무척 우울하다, 라고 쓰고 보니, 딱히 그렇게 우울할 것도 없네요, 쩝. '우울'에 관한 문장을 쓰는 순간, 우울이 졸지에 희화되는 느낌..-_-;; 뭐, 여하튼. 오랜만에 다시 읽은 <1984>, 정치 알레고리의 느낌이 너무 강해서 놀랐습니다. 국내 독자에게 인지도는 낮지만 자먀틴(-찐)의 <우리(들)>가 문학적 관점에서는 훨씬 더 뛰어난 소설인 것 같은데, 취향의 문제일까요....? ^^;;  남들 다 재미있어 하는 (<1984>에서 시작된) 하루키의 소설은 또 왜 그리 지루할까요...ㅠ.ㅠ 아무래도 <상실의 시대>가 제일 재미있었던 듯...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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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탄생 -

제임스 조이스, <젊은 예술가의 초상>(1916)

 

 

 

옛날에, 아주 살기 좋던 시절, 음매 하고 우는 암소 한 마리가 길을 걸어오고 있었단다. 길을 걸어오던 이 음매 암소는 턱쿠 아기라는 이름을 가진 예쁜 사내아이를 만났단다.”(11) 이런 문장으로 시작하는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한 소년이 예술가로서의 소임을 깨닫는 과정을 그린 성장 소설이자 교양 소설이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용서를 빌지 않으면 독수리들이 와서 눈알을 빼버릴 거라는 단티(아줌마)의 말이 오랫동안 아이의 머릿속에서 메아리친다. 학창 시절 스티븐이 겪는 일도 비교적 전형적이다. 가령 아놀 신부의 라틴어 시간, 학감인 돌란 신부가 나타나 게으른 학생플래밍을 체벌한 다음 스티븐을 주목한다. 왜 쓰기를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안경을 깼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지만 게으름뱅이에 속임수나 쓰는 아이로 매도당한다. 자초지종을 설명할 기회도 없이 그의 손바닥에 수치와 고통과 공포의 회초리가 갈겨진다. 정말로 안경을 깼고 새 안경을 보내달라고 집에 편지를 썼고 그것이 도착할 때까지 쓰기를 면제 받았는데 회초리질이라니, 얼마나 부당하고도 잔인한가! 스티븐은 교장실을 찾아가 목이 막히고 눈물이 그렁그렁하는 가운데 조곤조곤, 또박또박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한다. 이 대범하고 영웅적인 행위로 스티븐의 성장의 한 고리가 마무리된다.

 

 

 

 

 

 

 

 

 

 

 

 

 

 

전학한 스티븐은 한 친구의 말마따나 전형적인 모범 청년”, “담배도 안 피우고, 바자에도 안 가고, 계집애들과 시시덕거리지도 않고, 제기랄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119)는 학생이다. 다른 학우들과는 달리 테니슨보다는 반항과 환멸의 상징인 바이런을 위대한 시인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영어 선생은 그의 에세이에서 이단적인 생각”(123)을 엿본다. 열여섯의 반항은 사창가로 이어지고 사악한 자기방기(自己放棄)의 부르짖음”(156)과 함께 순수의 시대가 종말을 고한다. 통렬한 죄책감과 진정어린 참회로 성장의 새로운 고리가 열린다. 이런 그에게 교장은 성직자가 되면 어떻겠냐고 제안한다. 스티븐도 예수회 소속 신부 스티븐 디덜러스”(249)의 모습을 그려보지만 더블린 만(), 바다를 바라보며 자신의 진짜 소임은 종교가 아니라 예술, 즉 문학임을 깨닫는다. “그의 영혼은 소년 시절의 무덤에서 일어나 그 시절의 수의를 떨쳐버렸다. () 이제는 영혼의 자유와 힘을 밑천으로 하나의 살아 있는 것, 아름답고 신비한 불멸의 새 비상체(飛翔體)를 오만하게 창조해 보리라.”(262)

 

 

 

 

 

 

 

 

 

 

 

 

 

 

 

 

더쿠 아기가 예술가로 태어나는 이 순간은 신의 존재와 그 뜻이 구체화되는 종교적 황홀경을, 거룩한 현현(epiphany)을 방불케 한다. 대학생이 된 스티븐이 한 친구 앞에서 하는 말은 젊은 예술가의 테제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무엇을 할 것이며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지를 말해 주마. 내가 믿지 않게 된 것은, 그것이 나의 가정이든 나의 조국이든 나의 교회든, 결코 섬기지 않겠어. 그리고 나는 어떤 삶이나 예술 양식을 빌려 내 자신을 가능한 한 자유로이, 가능한 한 완전하게, 표현하고자 노력할 것이며, 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내가 스스로에게 허용할 수 있는 무기인 침묵, 유배(流配) 및 간계를 이용하도록 하겠어.”(379)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스티븐의 일기 역시 그 옛날의 아버지여, 그 옛날의 장인(匠人)이여, 지금 그리고 앞으로 영원히, 나에게 큰 도움이 되어주소서.”라는 기도로 끝난다. 물론 그가 부르는 저 신은 디덜러스라는 이름 속에 포함된 다이달로스이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3인칭 시점을 취하고 있긴 하지만 대체로 고독이나 소외도, 추방이나 망명도 두려워하지 않는 오만한 주인공의 내면에 초점을 맞춘다. 성장은 연속적인 시간의 흐름을 따른다기보다는 가파른 계단처럼 비약적으로 이루어지고, 성장의 각 단계를 반영하는 문체는 후반부로 갈수록 현란한 기교를 뽐내며 지적이고 난해한 담론을 선보인다. 여러 모로 모더니즘과 의식의 흐름의 시작을 알리는 소설답다. 조이스가 그 무렵 비교적 전통적인세태 소설(<더블린 사람들>)을 같이 쓰고 있었음을 상기한다면, 이 자전 소설의 혁신성이 더 도드라진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정확히, 그 전신인 <스티븐 히어로>)과 유사한 유일한작품으로 조이스는 러시아의 낭만주의 시인 레르몬토프가 쓴 자전소설(<우리 시대의 영웅>)을 꼽았다. 작품의 길이와 주인공의 성향에는 차이가 있으나 목적과 제목”, “신랄한 논술은 비슷하다는(리처드 엘먼, <제임스 조이스>) 것이다. 과연 개별적 시공간을 떠나 영웅-주인공을 꿈꾸는 젊은 예술가의 오만한 반항에는 보편적인 유사성이 있다.

 

 

(조이스 관련 책이면 어디나 나오는 사진. 노라와 함께 혼인신고 하러 가는 길...^^;;)

 

 

조이스는 이십대 때 조국 아일랜드를 떠났고 이후 두 번의 방문을 빼면 평생 유럽을 떠돌며 살았다. “더블린의 핵심에 도달할 수 있다면 세계 모든 도시의 핵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리처드 엘먼) 조국을 향한 그의 감정은 복잡다단했지 싶다. 유럽의 변방, 척박한 섬나라 출신의 작가가 비단 영국문학사가 아니라 세계문학사에 이름을 올리기까지 부당하고 잔인한 회초리질이 얼마나 많았을까. 어린 스티븐이 지리책의 여백에 써놓았듯, 아일랜드는 그의 삶과 문학의 중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으리라. “스티븐 디덜러스 / 기초반 / () / 아일랜드 / 유럽 / 세계 / 우주”(25)

 

-- 책앤

 

-- 머릿속에 재미없는 악몽(ㅠ.ㅠ)처럼 남아 있는 조이스! <율리시스>는 여전히 엄두를 못 내고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다시 읽어봤는데, 그대는 여전히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임을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그와 <율리시스>에 대한 미련은 깔끔히 접는 걸로... ㅋ 어릴 때 영산문 강독(?) 시간에 원문 강독한 <더블린 사람들>은 그나마 읽을 만하다고 쳐도, 조이스의 이른바 '에피파니'가 나에게는 별다른 에피파니를 주지 않더라고요...-_-;; 흠, 그럼에도 그가 아일랜드 출신이라는 건 어째 뇌리에 남는군요.(그리고 안질환으로 고통 받았다는 사실도.) 

 

역시나 아일랜드 출신인 이 양반이 조이스 밑에서 비서 노릇을 했지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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