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삶을 쟁취하다

- 샬럿 브론테, <제인 에어>

 

 

 

 

어려서 부모를 잃고 외숙부의 집에 맡겨진 소녀가 있다. 외숙부마저 죽어버리자 소녀는 그야말로 군식구가 된다. 그런데도 고분고분하기는커녕 곧잘 악다구니를 쓰며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다. 결국 그 벌로 붉은 방에 갇힌다. 게이츠헤드 저택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방, 하지만 외숙부가 그곳에서 임종을 맞은 뒤로 아무도 살지 않는 방, 불도 때지 않아 썰렁한 방, 유령이 나와도 전혀 이상할 것 같지 않은 방. 붉은 방의 어둠을 응시하며 소녀는 억울해! 정말 억울해!”라고 외친다. 못 생긴데다가 당돌하기까지 한 열 살짜리 소녀는 못된외숙모와 외사촌들 틈에서 세상이 참 공평하지 않다는 일찌감치 깨달은 것이다.

 

 

 

 

 

 

 

 

 

 

 

 

 

 

 

제인 에어는 로우드 자선 학교에서 8년을 보낸 후 자유를 갈망하며 손필드 저택의 가정교사로 들어간다. 열여덟 살이 되었건만 여전히 못 생기고 키고 작고 비썩 마른 그녀 앞에 로체스터가 나타난다. 말하자면 남자가 나타난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로맨스도 없고 흥미도 없는 평범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조한 생활의 한 시간에 변화를 갖다 준 셈이었다. 나의 도움이 필요하였고 희구되었고 또 나는 그것을 부여하였다. 무슨 일을 했다는 것이 내게는 기뻤다. (중략) 게다가 그것은 새 얼굴이었고 흡사 기억의 화랑에 집어넣은 새 그림과 같았다. 이미 거기에 걸려 있는 딴 그림과는 전혀 다른 그림이었다. 첫째, 남성의 얼굴이었다는 점에서 그러했고 둘째로는 사납고 씩씩하고 검은 얼굴이었다는 점에서 그러하였다.(1, 209)

 

본격적으로 열정의 드라마가 시작된다. 수시로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고딕소설 속의 성과 같은 손필드 저택, 미남도 아니고 성격도 괴팍하지만 어딘가 우수에 차 있는 남자, 가정교사와 부유한 귀족이라는 신분의 벽, 스무 살에 가까운 나이 차이. 이로써 로맨스소설의 요건이 갖추어진다. 사건의 흐름과 속도는 더 기막히다. 한밤중에 로체스터의 방에 불이 나고 제인은 그를 구한다. 파티 날, 로체스터는 점쟁이로 분장해 제인의 속마음을 떠본다. 외숙모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제인이 한 달간 손필드를 떠난다. 그리움이 그들의 사랑을 점검하도록 해준다. 잉그램 양을 사이에 둔 삼각관계가 진전되면서 사랑은 더 깊어간다. 손필드 저택의 비밀이 조금씩 드러나, 아슬아슬한 긴장을 더한다. 애정의 표현 방식 역시 적절한 수위를 넘지 않으며 우리의 연애 욕망을 간질인다. 드디어, 제인과 로체스터의 결혼식. 그러나 뜻밖의 파국으로 인해 제인은 손필드를 도망치듯 떠난다. 다시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연인들은 재회하여 가정을 꾸린다. 인물들도 행복하고 독자도 행복한 결말이다. 가히, 달콤한 낭만성을 무기로 내세운 최고의 연애소설답다.

 

(여러 <제인 에어> 중 제일 마음에 들었던 BBC 영드 <제인 에어>. 단, 원래 제인은 체구가 왜소해야 하는데, 이 제인은 너무 튼실했다는..-_-;; 꽤 길지만 보는 동안 행복했습니다 ^^;) 

 

이 러브스토리를 재구성해보자. 불쌍한 고아 소녀가 가난한 가정교사를 거쳐 대저택의 어엿한 안주인이 된다. 신데렐라 콤플렉스의 실현, 시쳇말로 된장녀이야기이다. 과연 그런가? 빅토리아조의 19세기 영국, 여성은 오직 여자의 길을 충실히 감으로써만 인간일 수 있었다. 간단히 결혼, 출산, 육아, 살림 등이다. 물론, 제인이 추구했고 또 손에 넣은 가치도 그것이다. , 그녀에게는 그럴 듯한 집안도, 미모도 없었다. 대신 그녀는 자신의 분수를 똑똑히 알고서 세상의 법칙과 당당히 맞섰다. 인간으로서의 최소치의 존엄은 이런 식으로 유지된다.

 

제가 가난하고 미천하고 못생겼다고 해서 혼도 감정도 없다고 생각하세요? 잘못 생각하신 거예요! 저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혼도 있고 꼭 같은 감정도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제가 복이 있어 조금만 예쁘고 조금만 부유하게 태어났다면 저는 제가 지금 당신 곁을 떠나기가 괴로운 만큼, 당신이 저와 헤어지는 것을 괴로워하게 할 수도 있었을 거예요. 저는 지금 관습이나 인습을 매개로 해서 말씀드리는 것도 아니고 육신을 통해 말씀드리는 것도 아녜요. 제 영혼이 당신의 영혼에게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마치 두 영혼이 다 무덤 속을 지나 하느님 발밑에 서 있는 것처럼, 동등한 자격으로 말이에요. 사실상 우리는 현재도 동등하지만 말이에요!”(2, 32)

 

억울해! 정말 억울해!”라며 엉엉 울던 소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한 남자를 향해 대책 없이 열정을 불태우고 결국 그 남자를 자기 품에 안음으로써 제인은 사랑 이상의 것을, 삶 자체를 쟁취한다. ‘로체스터 씨가 아닌 그냥 에드워드’, 원죄와도 같은 어두운 과거 때문에 눈이 멀고 쇠락한 한 남자. 첫 눈에 반한 사랑이자 마지막까지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 여성이 열정과 삶의 주체가 되었다는 것, 나아가 기록-문학의 주체가 되었다는 것은 비단 제인의 인생에서뿐만 아니라 문학사의 관점에서 볼 때도 놀라운 성취이다. 물론, 그것은 <제인 에어>의 작가가 이룩한 위업이기도 하다.

 

(외유내강 이미지의 제인으로는 샬럿 갱스부르가 떠오르네요. 위에 인용한 저 대사 읊을 때 인상적이던데.) 

 

샬럿 브론테는 이십대 때 뼈아픈 사랑을 겪고 계속 노처녀로 살다가 서른여덟에 결혼했다. 그리고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임신한 상태에서 병사했다. 여자로서, 아니, 그냥 인간으로서도 제법 처량한 운명이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의 기억을 투영하여 만들어낸 제인 에어는 붉은 방을 빠져나와 행복과 평온의 왕국에서 영생을 누리고 있다. 이만하면 브론테의 운명도 어느 정도 보상되지 않았을까.

 

-- 네이버 캐스트

 

-- 제각기 나름 걸출한 작가였던 브론테 자매를 소재로 만든 영화. 에밀리 역을 이자벨 아자니가 맞는 바람에 형평성(??)이 완전 깨져버렸어요 ㅋ 인지도가 제일 낮은 앤 브론테 역은 보다시피, 이자벨 위페르가 맡았습니다.

 

--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한 소설은 아무래도 에밀리의 <폭풍의 언덕>입니다만, 소설 자체는 샬럿이 좀 더 잘 썼던 것 같아요....^^;

 

 

 

 

 

 

 

 

 

 

 

 

 

 

-- BBC판 <제인 에어>의 마지막 장면(가족 사진 찍는)인데, 이미지가 너무 작네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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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티의 수도, 파리의 내적 풍경:

권태와 우울을 발명하다

- 보들레르, <파리의 우울>

 

    

 

<파리의 우울>은 작가 자신의 말마따나 이상한책이다. 에필로그를 포함하여 총 51편에 이르는 이 ()산문시는 니체의 아포리즘이나 카프카의 장편(掌篇) 소설을 미리 읽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제목은 어떠한가. ‘파리의 우울이라지만 이 책 속의 파리는 상당히 모호하고 추상적이다. 이 도시를 향해 시인은 외친다.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 , 더러운 수도여! / 창녀들, 그리고 강도들, 그대들은 대개 그처럼 자주 가져다준다. / 무지한 속물들은 알지 못하는 갖가지 쾌락을!”(에필로그, 287) 말하자면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파리의 외면이 아니라 내면이다. 그것에 작가는 우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우울과 권태는 모더니티의 수도, 19세기의 파리를 몸으로 살아냈던 보들레르의 발명품이다. 이 독특하고 새로운 정서의 진앙은 시간, 혹은 시간에 대한 의식이 아닐까 한다.

 

 

! 그렇다! ‘시간이 다시 나타났다. 시간은 이제 지배자로 군림한다. 그리고 이 혐오스러운 늙은이 시간과 함께 추억, 회한, 경련, 공포, 고통, 악몽, 분노, 신경증 등 시간의 악마 같은 수행원들이 모두 되돌아왔다. / 맹세코 초침 소리가 이제 더욱 힘차고 엄숙하게, 일 초 일 초 시계추에서 튀어나와 말한다. “나는 이다. 견디기 힘든, 냉혹한 삶!” / 인간의 삶에서 어떤 희소식을 알려주는 임무를 띤 것은 다만 일 에 지나지 않는다. 그 희소식이라는 것도 결국 우리에게 설명할 수 없는 공포를 불러일으킬 뿐이지만. / 그렇다! 시간이 군림한다. 시간이 그의 난폭한 독재권을 되찾았다. 그리고 시간은 마치 황소를 부리듯 그의 두 개의 바늘로 나를 몰아세운다. “이러! 짐승 놈아! 땀을 흘려 일해. 노예 녀석! 살아라, 망할 녀석아!”(이중의 방, 41)

 

무지막지한 시간 앞에서 시인은 정녕 나태의 화신에 지나지 않을까. 거리를 빌빌대거나(산책자!) 정반대로 방바닥을 긁는 것(몽상가!)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 ‘혁명의 시대에 이어 자본의 시대가 도래했건만 우울과 권태에 절어 있는 자가 시간과 더불어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항상 취해 있어야 한다. 모든 게 거기에 있다. 그것이 유일한 문제다. 당신의 어깨를 무너지게 하여 당신을 땅 쪽으로 꼬부라지게 하는 가증스러운 시간의 무게를 느끼지 않기 위해서 당신은 쉴 새 없이 취해 있어야 한다. / 그러나 무엇에 취한다? 술이든, 시든, 덕이든, 그 어느 것이든 당신 마음대로다. 그러나 어쨌든 취해라. / 그리고 때때로 궁궐의 계단 위에서, 도랑가의 초록색 풀 위에서, 혹은 당신 방의 음울한 고독 가운데서 당신이 깨어나게 되고, 취기가 감소되거나 사라져버리거든 물어라. (중략) 그러면 바람도, 물결도, 별도, 새도, 시계도 당신에게 대답할 것이다. “이제 취할 시간이다! ‘시간의 학대받는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취해라! 술이든, 시든, 덕이든 무엇이든, 당신 마음대로.”(취해라, 206-207)

 

이른바 취함의 미덕은 부르주아적인 절제와 중용에 정면으로 대치된다. 대체로 보들레르는 데카당스가 하나의 미학 체계로 확립되기 전부터 이미 퇴폐의 시인으로 자리매김 됐다. 놀라운 것은 그것과 첨예하게 대립하며 공존하는 민감한 윤리 의식이다.

 

 

(자화상, 이랍니다. 처음 봐요.)

 

 

가령 괘씸한 유리 장수에 재미있는 얘기가 나온다. 세상에 누구보다도 악의 없는 한 몽상가가 오직 과연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쉽사리 불이 붙는지 어떤지 보기 위해서숲에 불을 지른다. 이어 화자는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준다. 어느 날 아침 무심코 창밖을 내려다보다가 유리 장수를 발견하는데 그에게 갑작스러운 포악한 증오를 느낀 나머지 괜히 그를 집까지(7층에 있다!) 불러들인 다음 온갖 생트집을 잡아 그를 밀치다시피 내려 보낸다.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가 다시 문 앞에 나타나자 화자는 발코니에서 조그만 화분 하나를 집어 그의 지게를 향해 수직으로 던진다. 유리 장수는 나뒹굴고 유리는 박살난다. 그러자 화자는 자신의 광기에 더욱더 도취되어 인생을 아름답게! 인생을 아름답게!”라고 외친다.

 

 

 

을 향한 끌림은 자주 을 향한 갈망을 동반한다. 마찬가지로 패륜적이고 패덕적인 무보상적 행위의 저변에 윤리와 도덕에 대한 강박관념이 깔려 있는 일이 왕왕 있다. 실제로 으로 번역되는 프랑스어 단어(mal)에는 고통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보들레르에게 있어 문학 자체가 악덕에 빠진, 온갖 소외된 자들을 향한 고통과 연민의 표현이었던 것 같다. 한데 그의 병적인 자학 속에 자기 연민은 없었던 것일까. 더 이상 웃지도, 울지도, 노래를 부르지도, 춤을 추지도 않는 늙은 광대를 보며 그는 큰 고통을 느낀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서 이 광경에 마음이 사로잡혀 나의 갑작스러운 고통을 분석해 보려고 애썼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방금 본 것은 한 늙은 문학자의 이미지다. 그는 한 세대를 즐겁게 해준 훌륭한 광대였으나, 그 세대는 지나가 버린 것이다. 친구도 없고, 가족도 없고, 어린애도 없으며, 그의 빈곤과 몰이해한 대중으로 인해 망가진 늙은 시인의 이미지! 잊기 잘하는 세상 사람들은 그의 막사에는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늙은 광대, 94)

 

-고통의 꽃을 응시하며 우울과 권태에 몸부림치다 고독과 연민과 병마 속에서 죽어간 시인, 그런 시인의 이미지! 보들레르는 시를 통해, 더 정확히 자신의 시보다도 더 시적이었던 그 삶 자체를 통해 자신의 동갑내기인 두 소설가 플로베르, 도스토예프스키와 같은 업적을 성취했다. 바로 근대의 내적 풍경을 발견, 아니 발명하고 창조한 것이다.

 

-- 네이버캐스트

 

 

-- <악의 꽃>을 읽지 않고 보들레르를 말할 수 없지만 시를 읽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져 차선책(?)으로 택한 책이 <파리의 우울>이었는데, 십수년만에 다시 읽고 많이 놀랐더랬지요. 너무 '모던'(!)해서요.  언제부터인가 벤야민과 보들레르가 한 쌍이 됐어요 -_-;;   

 

 

 

 

 

 

 

 

 

 

 

 

-- 시를 읽는 일이 어려워진다 했는데, 최근에, 간만에, 그리고 얼른 시집 두 권을 샀습니다. "오다, 서럽더라"와 "사는 기쁨". 두 시인의 (잘은 모르나) 삶의 궤적만큼이나 시 세계도 (일단 표제작부터!) 너무 다르지만, 다르기 때문에 둘 다 좋습니다 ㅎㅎ  '정든 유곽'과 '즐거운 편지'가 세월이 흘러흘러 이런 모습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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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그루의 자작나무(?). 레르몬토프가 그린 수채화.)

 

 

운명론자도 비슷하다. 주인공인 불리치는 건장한 체구에 용맹스러운 세르비아 전사로서 동료 병사들 사이에서 대단한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여자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고 대신 그 모든 열정을 도박에 쏟는 것도 그의 매력의 한 요소가 된다. 불리치의 영웅주의는 그가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제안하는 유희(도박)에서 극에 달한다. , 운명이라는 것이 정말로 있는가, 아니면 인간이 자기 의지대로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가? 운명과의 이 한판 싸움에서 불리치는, 어쩐지 그가 오늘 죽을 것 같다며 운명 쪽에 패를 걸었던 페초린을 이긴다. 하지만 귀가 길에 비명횡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페초린의 예언을 실현시켜 준다. 이어, 페초린의 운명과의 한 판 승부가 시작된다. 여기서 그는 불리치의 살해범이기도 한 카자크를 거의 혼자 힘으로 생포함으로써 운명에 맞선 인간의 의지의 승리를 확증해주는 것 같다.

 

(많은 페초린들 중 하나 ^^;)

 

 

하지만 의지-운명의 변증법보다 더 절대적인 진리는 다른 곳에 있다. 살해된 멧돼지를 발견했을 때 페초린은 형이상학을 집어던지고 발밑을 보기 시작했다라고 말한다. 이 말 속에는 어떤 형이상학도 없으며 그가 발밑에서 발견한 것도 한낱 돼지 시체일 뿐이다. 그러나 이 돼지가 불가해한 운명의 힘과 연결되어 있음을 생각한다면 진리는 정녕 형이상학이 아닌 발밑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것은 형이상학적인 것을 전혀 좋아하지 않는, 막심의 심드렁하지만 동정이 흠뻑 배어 있는 한 마디와도 일맥상통한다. “무슨 귀신에 씌어서 한밤중에 술 취한 사람한테 말을 붙였는지······! 하긴 그럴 팔자였겠지.” 안타깝게도, 페초린 역시 막심의 투정 섞인 예언(막심 막시미치)대로 젊은 나이에 객사한다.

 

(이 페초린은 처음 보네요-_-;;)

 

 

주인공 페초린의 삶이 마감되는 순간(“Finita la comedia!”) 독자의 시선은 작가 레르몬토프에게로 향한다. 구체적인 양상이야 어떻든 인물과 작가의 운명 사이에 다분히 신비스러운 유비 관계가 성립되어, 모종의 신비감마저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페초린-레르몬토프는 데카브리스트 난 이후 이른바 환멸과 절망의 시대를 살아내야 했던 청년의 전형으로서, 심지어 하나의 아이콘으로서 러시아문학사에 아로새겨진다.

 

 

(브루벨이 그린 페초린. / 브루벨은 민음사판 표지로 사용된 그림([악마])의 화가이기도 합니다.)

 

물론,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러시아소설의 정점으로 본다면, <우리시대의 영웅>은 이 작품을 영어로 옮기고 훌륭한 서문까지 단 나보코프의 냉혹한 지적대로 결함이 많은 작품이다. 작품의 많은 부분이 건방진 아포리즘과 진부한 비유로 가득 차 있고 베라를 비롯한 많은 인물들이 실제 삶이 아니라 서유럽의 낭만주의 소설에서 옮아온 것처럼 창백하다. 작가의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사적 거리는 결단코 확보되지 못했으며 장편소설에 대한 야심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어쨌거나 기나긴 이야기 사슬에 머물고 말았다. 여러 모로 젊은 시인이 쓴 미숙한소설이라는 혐의를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역시나 나보코프의 애정과 감탄 섞인 말을 빌자면, 러시아 소설이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수준에 머물러 있을 때 겨우 이십대 중반의 작가가 이처럼 훌륭한 소설을 쓴 것이다. 레르몬토프의 젊음-어림은 당시 러시아문학의 연령이었던 셈이다. 그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던 도저한 낭만성과 소설적, 즉 리얼리즘적 형식을 통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시도 사이의 긴장, 그리고 나의 영혼을 증명하기 위해서 떠나는근대적 주인공 페초린의 창조는 러시아문학사에서 가히 혁명적인 성취라고 할 수 있겠다.

 

* * *

 

 

 

 

 

 

 

 

 

 

 

 

(이십대에 써서 출간한 소설책들.)

 

불혹의 나이가 되면 절로 대가가 될 줄 믿었던 대학 시절, 처음으로 레르몬토프라는 이름을 알게 되었다. 낭만적이고 감성적인, 때론 열정적이고 강렬한 그의 시에 매료되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헤어졌지만, 너의 초상은은 대학교 4학년 때 발표된 내 등단작의 제목의 일부이자 제사가 되기도 했다. 역시나 그 무렵에 처음 읽은 <우리시대의 영웅>은 그 자체로 충격이었다. 페초린-레르몬토프는 내 안의 몬스터처럼 무섭게 자라버린 도스토예프스키의 주인공들의 배아였던 것이다. 이 작품이 내 청춘의 비망록처럼 읽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도...키 소설의 주인공들 중 레르몬토프-페초린의 직계는 아무래도 [악령]의 스타브로긴이죠.^^; 이른바 '지하인'은 페초린의 변태, 돌연변이랄까요. )

 

실상 <우리시대의 영웅>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밑에서><데미안>처럼 우리 모두의 성장기, 우리 모두의 청춘에 대한 솔직한, 그래서 아름다운 기록이다. 고로, 이 작품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대가적인 필치로 펼쳐지는 삶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 아니라, 즉 삶 자체가 아니라 삶에 대한 풋풋한 기대와 애달픈 불안, 때로는 낯 뜨거운 엄살이다. 말하자면, 레르몬토프는 (그 시절의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사랑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사랑에 실패한 비극적인 연인의 역을 맡고자 했고, 삶을 채 살아보기도 전에 그것의 단맛 쓴맛을 다 맛본 양 조로와 피로의 포즈를 취했으며, 꿈을 제대로 키워보기도 전에 그 실현 불가능성에 탐닉하는, 또 삶에 배반당할 겨를도 미처 없었건만 그 배반에 분노하는 환멸의 시인이고자 했다.

 

 

 

 

 

 

 

 

 

 

 

 

 

 

 

작가에게 있어 환멸의 유일한 형식이 침묵이라면, 레르몬토프는 차라리 가슴 속에 펄펄 끓는 마그마를 담고 있었던 영원한 낭만주의자, 즉 영원한 청춘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자신의 초상이 곧 우리시대의 초상이 되기를 갈망했다. ‘우리시대의 영웅(주인공)’이라니, 얼마나 당돌한 제목인가. 이 작품보다 조금 더 전에 쓰인 비슷한 경향의 작품이 주인공의 이름을 제목으로 내건 것에 비하면(샤토브리앙의 <르네>, 콩스탕의 <아돌프> ) 이 역시 러시아문학 특유의 대책 없는 오만함과 극단의 발현일 것이다.

 

 

 

 

 

 

 

 

 

 

 

 

 

 

 

오랫동안 소망했지만 미루고 미루다 이제야, 내 손으로 번역한 <우리시대의 영웅>을 내놓는다. 이로써 레르몬토프에게, 또 이 작품에 진 빚을 갚는 기분이다. 폭탄이라도 맞은 양 35세라는 나이테를 뒤집어쓰고 보니 27세라는 나이가 자살이라면 모를까 그냥 죽기에는 너무 억울하고 서러운 나이라는 것을 알겠다. 그러니까 레르몬토프는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가 훗날 성공적인 데뷔작을 내놓으며 작가 인생을 막 시작할 나이에 목숨을 날려 버린 것이다! 27이라는 숫자를 곱씹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정확히 그 나이에 동경의 썰렁한 병원에서 죽어간 우리 문학의 영원한 청춘이자 모던 보이’, 이상(李箱)이 떠오른다. 문학이 좋으면 요절도 작가에게는 비극이 아니라 희극이다. 한 인간으로서 레르몬토프의 비극은 오래 전에 끝났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작가로서 그의 희극이 시작되는 것이다.

(민음사판 <우리시대의 영웅>에 표지를 제공한 브루벨의 <악마>. 레르-프의 서사시 <악마>의 주인공이면서 동시에 레르몬토프-페초린의 문학적 자아. 몽환적이죠? ^^; 실제로 봤을 때 '악마'의 하체를 덮은 파란색이 무척 뇌쇄적이었던 것 같은데요...)

 

-- 오랜만에 내 소설책들을 (표지만^^;) 다시 보는데요, 특히 개인적으로 가장 실험적(??)이라고 생각하는(그래서 정말 너무 안 팔린 ㅠ.ㅠ) <그러니 어찌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있겠는가>에 제목을 제공한 소설(<얼음의 도가니>)의 저자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네요. 어제 막 다 읽은 그의 최근 작품집,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두 권 짜리 <페스트>를 읽어내면서 고전한 기억도 있습니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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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춘, 혹은 젊은 날의 초상

- 레르몬토프의 <우리시대의 영웅>

 

 

 

1. 요절한 천재 시인

 

미하일 유리예비치 레르몬토프는 1814103(현재력 15) 모스크바에서 태어나서 1841715(현재력 27) 퍄티고르스크에서 죽었다. 일부러 운을 맞춘 것 같은 이 생몰년도와 그의 전기에서 유달리 문제적인 것은 죽음이다 

(작품의 특성상, 뭐, 여러 정황상, 완전 미남이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흑흑, 아무리 봐도 좀팽이(?) 같이 생겼다는...-_-;;)

 

<우리 시대의 영웅>의 주인공 페초린은 그루시니츠키를 결투에서 죽였지만 소설의 저자인 레르몬토프에게는 다소 다른 상황이 펼쳐진다. 1841, 당국은 레르몬토프의 방종한 생활을 종식시키고자 48시간 이내에 페테르부르크를 떠나 캅카스로 가라고 명령한다. 그는 죽음이 임박했다는 음울한 예감에 젖어 414일 길을 떠나는데, 허약한 몸으로 긴 여행을 감당하다가 그만 열병에 걸린다. 완치될 때까지 퍄티고르스크에 머물러도 좋다는 당국의 허가가 떨어진다. 가뜩이나 그에 대한 반감과 질투가 만연한 가운데, 713일 어느 저녁 모임에서 레르몬토프는 동창생이기도 한 마르티노프 소령과 말다툼을 벌인다. 마르트이노프는 그가 던진 농담과 말장난을 공식적 이유로 내세워 결투를 신청한다. 이틀 뒤인 715일 저녁 6시에서 7시 사이, 마슈크 산비탈에서 두 명의 젊은 장교가 소설 속 한 장면처럼 결투를 한다. 그리고 레르몬토프는 마르티노프의 총을 맞고 죽는다. 그때 그의 나이는 27세였다. 때문에 그의 전기와 연대기는 페테르부르크와 캅카스 사이의 이동을 비롯하여 온갖 소소한 사건을 다 동원해도 극도로 짧아질 수밖에 없다.

(중략)

 

 

18412, 아르세니예바의 집요한 청원 끝에 레르몬토프는 다시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다. 그만 퇴역하여 문학에만 전념하고 잡지를 간행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으나 곧 사교계 생활에 환멸을 느끼던 차 당국의 명령에 의해 다시 캅카스로 떠난다. 여로에서 주옥같은 시(지루하고 서글퍼, 나 홀로 길을 나서네, 예언자)를 남긴 채, 앞서 언급했듯 퍄티고르스크에서 사망한다. 그의 유해는 타르하니로 옮겨져 1842423, 아르세니예프 가족묘에 이장된다. 벨린스키는 이 새로운, 막대한 손실로 인해 가뜩이나 빈한한 러시아 문학이 고아가 되었다.”라며 그의 죽음을, 또한 러시아문학을 애도했다.

 

 

 

 

 

 

 

 

 

 

 

 

 

 

 

(나보코프가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는데, 그가 쓴 서문이 참 마음에 듭니다...^^;)

 

2. 청춘, 혹은 젊은 날의 초상: <우리 시대의 영웅>

 

<우리시대의 영웅>은 당시 유행하던 연작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덧붙여 두 겹, 세 겹으로 이루어진 액자소설이기도 한데, 이는 단순히 검열에 대한 두려움 탓만은 아니다. 일찍이 시인으로서 명성을 날리던 레르몬토프였지만 소설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바짐, 공작부인 리곱스카야등은 모두 수작의 징후를 보여주지만 어느 것 하나 완성되지 못했다. 이와 같은 소설 습작의 연장선상에서 <우리시대의 영웅>을 써가며 레르몬토프가 유달리 고민했던 것은 구성과 서사 구축의 문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 작가는 총 세 명의 화자(여행자 ’, 막심 막시미치, 페초린)를 등장시켜 에서 으로의 접근을 시도한다. 그리고 각각의 단편을 창작 시기는 물론이거니와 작품 속의 시간과도 거의 어긋나게 배치한다. 두 개의 서문까지 포함하여 총 일곱 개의 텍스트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은 캅카스의 젊은 장교 페초린, 우리시대의 주인공(영웅)’이다. 말하자면 <우리시대의 영웅>은 제목과 구성이 보여주듯, ‘주인공(영웅)’을 찾아가는 소설이다. 그렇다면 페초린, 그는 누구인가.

 

(벨라)

 

벨라속의 페초린은 우선, 비극적인 연애담의 다분히 신비화된 주인공이다. 페테르부르크 사교계에 염증이 난 이 청년 귀족 장교는 캅카스의 자연을 상징하는 족장의 딸 벨라에게 반한다. 결국, 카즈비치의 말을 미끼로 벨라의 동생을 꼬드겨 벨라를 납치하도록 하고 벨라의 사랑을 얻는 데도 성공한다. 하지만 그의 사랑은 이내 시들시들해지고, 그 틈에 애마를 빼앗긴 분노, 벨라를 향한 해묵은 열정, 페초린에 대한 질투 등에 사로잡힌 카즈비치가 벨라를 살해한다. 건전한 상식의 소유자이자 순진한 막심의 눈에 한없이 이상하게만 보이는 페초린에게서 여행객 화자는 당시 러시아에 만연한 바이런주의의 한 전형을 본다. 실제로 그의 눈이 포착한 페초린의 초상화(막심 막시미치), 특히 웃을 때조차도 아무런 변화가 없는, 즉 웃지 않는 그 눈은 낭만주의 문학에서 공식화된 바이런주의의 표식(환멸)처럼 읽힌다. 막심과 조우한 페초린의 배은망덕한 태도와 냉랭한 반응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페초린의 일지는 그의 치기어린 염세주의와 냉소주의의 실체를 여과 없이 보여준다.

 

 

(사교계의 한 장면(?). 레르몬토프가 그린 그림.)

 

가령 공작 영애 메리에서 페초린은 스스로를 내부에 두 명의 인간이 들어 있는 이른바 분열된 인간으로 정의한다. , “한 명은 삶이라는 단어의 온전한 의미대로 삶을 살고, 다른 한 명은 그에 대해 사유하고 그를 심판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공작 영애 메리속의 페초린은 일련의 사건의 주인공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기록하는 작가로서 자기반성과 자기해부의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소설의 주된 골조인 연애와 결투도 그 나름대로 흥미진진하다. 페초린은 유희 차원에서, 말하자면 가짜 사랑을 진짜 사랑인 양 연기하며 메리를 유혹하지만, 뜻밖에도 오랜 연인이었던 베라가 나타남으로써 진짜 사랑의 열병을 앓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진짜 사랑을 지속시키기 위해 이젠 유희가 아니라 거의 목숨을 건 연극판을 벌인다. 이렇게 몇 개의 기만이 축적되어 크나큰 비극으로 이어진다 

(바이런은 정작 시보다는 이 인간 자체가 하나의 작품인 것 같아요 @__@)

 

실상 그루시니츠키와의 결투에서 페초린이 우위에 설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마땅히 더 뛰어나서가 아니라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있었기 때문, 궁극적으로는 그가 이 소설의 주인공-영웅이기 때문이다. 페초린은 그루시니츠키에 대해 그의 목적은 소설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라고 하지만 이 말은 그 누구보다 페초린에게 해당된다. 이른바 모방 욕망은 이 소설의 거의 모든 인물들을(심지어 바이런을 영어로 읽는 메리까지) 감염시킨 일종의 병이다. 물론 페초린은 자신의 이 모방 욕망이 우스꽝스럽다는 것을, 자신이 주인공-영웅인 양 굴지만 실은 운명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애처로운 형리나 배신자의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는, “5막에 꼭 필요한 인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바이런 경과 같은 천재가 되고자 하는 꿈을 숨기지 않는다. 실제로 타만운명론자천재의 조짐을 보여주는 수작이기도 하다.

 

(결투. 역시 레르몬토프의 그림.)

 

특히 타만은 훗날 체호프가 극찬한바, 길지 않은 분량에 흥미진진한 인물들, 긴장감 있는 이야기 전개, 간결하고 아름다운 문체 등 단편소설 시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시대의 영웅>에 수록된 작품 중 최고작이라고 할 수 있다. 타만의 전반부는 낭만적이다 못해 거의 신비스럽다. 부정한 기운이 감도는 외딴 집, 불길한 귀머거리노파, 우울한 장님소년, 비밀로 중무장한 아리따운 처녀, 바람을 타고 저 세계로 떠나는 배, 달밤의 바닷가 주위로 펼쳐지는 모험들, 엿듣기-엿보기-미행 등은 하나같이 고딕소설을 연상시키며 예사롭지 않은 사건을 예고한다. 하지만 바로 그 이면에는 서로 모순되는 요소들이 도사리고 있다.

 

(카프카스 추억. 유화. / 역시 레르..프의 그림. 재주가 대단하지요?^^;)

 

가령, 귀머거리 노파는 귀가 멀었건만 자기에게 필요한 말은 잘만 알아듣고, 장님 소년은 이름 그대로 눈이 멀었건만 야밤의 바닷가도 거침없이 잘만 걸어 다닌다. 페초린은 이 모든 것을 알면서도 자기 스스로 만들어놓은 낭만적 코드에 매인 나머지, 또한 처녀의 아름다움에 홀린 나머지 겉만 보고 속을 보지 못한다. 그러다 결국 루살카에게 속아 물에 빠져죽을 뻔했을 뿐더러 물건마저 모조리 도둑맞는 어처구니없는 봉변을 당한다.

 

대체로 타만의 페초린은 벨라공작 영애 메리에서 환멸과 악마주의의 화신처럼 신화화됐던 그 페초린과는 전혀 다르다. 하지만 타만의 등장인물로서의 페초린이 바보-장님으로 전락하는 순간은 화자-관찰자로서의 페초린이 뛰어난 단편소설 작가로 태어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 스스로 주인공-영웅이기를 포기하는 순간, 오히려 그는 소설적 인물로서도 훨씬 더 흥미진진하고, 또한 작가로서도 더 뛰어난 지위를 확보하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계속)

 

--- <우리 시대의 영웅> 역자해설

 

-- 비교적 절박한 필요에 의해, 낭만주의와 낭만주의의 언저리를 돌고 돌아, 다시 레르몬토프를 읽으려 합니다.  '도.톨이'와 비교할 수는 없으나, 모든 작가, 작품은 다 자기만의 자리가 있는 듯합니다. 레르-프와 그의 <우리 시대의 영웅>을 상당히 잘 읽어낸 사람 중 하나가 시인 심보선인데요(문학동네 네이버 카페 ), 정녕 그의 말대로 레프-프는 소설을 일기처럼 쓴, 그게 매력적인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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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범죄? 완벽한 소설을 꿈꾸다!

- 나보코프, 절망

 

 

나보코프의 <절망>은 제목만큼이나 강렬하고 아찔한 소설이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말의 더미 속에서 분신범죄가 포착된다. 그러나 실제 소설은 환상적인 고딕풍의 범죄소설을 예상하는 독자의 기대를 배반한다.

 

 

 

 

 

 

 

 

 

 

 

주인공 게르만 카를로비치는 베를린에 살고 있는 서른여섯 살의 러시아계 독일인으로서 변변찮은 초콜릿 사업자이다. 193059, 업무차 프라하에 들렀던 그는 풀밭에서 속 편하게 자고 있는 한 부랑아(은근히 목가적인 풍경이다!)가 자신과 무척 닮았음을 확신하고서 모종의 영감에 휩싸인다. 문학 속의 분신을 현실에서 살려내듯 문학 속의 범죄를 자신의 삶 속에서 실현하는 것. , 분신이라는 개별성과 유일성을 위협하는 요소를 이용하여 전대미문의 독창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것. 이 미적 행위의 준비와 실행 과정에서 많은 거짓말이 창조된다. 펠릭스를 꾀기 위한 현란한 수다는 물론이거니와 아내 리다 앞에서 웅장하게 토로하는 숨겨진 동생 이야기는 한 편의 소설에 가깝다. 게르만의 미학적 환희가 극점으로 치달아갈수록 두드러지는 것은 그의 자기기만이다. 펠릭스는 정말로 그와 닮았는가. 그의 범죄는 정말로 무관심무목적의 행위(예술)인가. 혹시 기울어져가는 사업을 만회하려는 속된 욕망이 깔려 있는 것은 아닐까. 리다와 아르달리온의 부적절한관계는 또한 어떠한가. 이런 유의 기만을 전혀 몰랐다면 그는 나보코프의 소설에 곧잘 등장하는 눈 뜬 장님인 것이고, 만약 알았다면, 알고서도 죽였다면 정녕 희대의 악당인 것이다.

 

 

 

 

 

 

 

 

 

 

 

 

파리의 한 호텔에서 범행의 기록에 열중하던 중 게르만은 <죄와 벌>을 언급한다. 라스콜니코프를 그토록 괴롭힌 묵직하고 날카로운 감각, 수치대신 그야말로 후안무치한 유희가 전면에 나선다. 그에게 있어 문제는 살인 자체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그것과 동시에 탄생하는 소설이다. 이미 완료된(그렇다고 생각되는) 완전 범죄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고로, 이미 쓰인 원고에 걸맞은 이름이다. “언젠가 제목을 붙였던 것 같은데. 뭐더라, 무슨 무슨 수기라는 말로 끝났다. 그러나 누구의 수기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튼 수기는 끔찍이도 진부하고 따분하다. 제목을 뭐로 한다? ‘분신’? 하지만 그런 제목은 이미 있다. (중략) 닮음? 인정받지 못한 닮음? 닮음의 옹호? 좀 건조하고 철학적인 경향이 있다”(223-224) 어떤 절박한 이유도 없이 사람을 죽여 놓고서 미학을 논하고 그것에 탐닉하는 것, 이것이 보석금을 얼마를 내든 결코 잠시라도 지옥에서 풀려날 수 없는”(<절망> 영어판 서문) 악당인 게르만의 이다. 그렇다면 ?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로 (저에게는^^;) 유명한 파스빈더 감독이 만든 <절망>의 한 장면, 이랍니다. 이 영화, 보고 싶은데, 어디서 구하죠? ㅠ.ㅠ)

 

 

게르만이 멋지게 완성했다고 믿은 살인 예술은, 그러나, 하찮은 물건(펠릭스의 이름과 출신지가 새겨진 지팡이) 때문에 추악한 실패작이 되고 만다. “나는 사형수의 미소를 지었소. 그리고 고통스러워 비명을 질러대는 뭉툭한 연필로 첫 페이지에 재빨리 그리고 단호하게 절망이라는 단어를 썼소. 이보다 나은 제목은 찾을 수 없소.”(226) 공들여 쓴 원고가 천재적인 소설이 되기는커녕 쓰레기 더미”(226)일 뿐이라는 사실 앞에서 절망은 불가피하다. <절망>에서 가장 명민한 인물이자 예술가의 전범인 아르달리온이 따끔하게 지적하는 것도 이 점이다. 게르만처럼 위장 살인으로 보험사를 속이는 수법은 날림에다가 진부”(229)한 것이거니와 이 피투성이의 혼란상과 혐오스러운 미스터리”, “음울한 도스토예프스키적 성향”(227) 역시도 게르만이 제멋대로 해석하고 재생한 어설픈, 따라서 애처로운 패러디에 불과하다는 것. 무엇보다도, 게르만이 유달리 집착을 보였던 닮음과 그것을 통해 증명하고자 했던 유일성’(천재성)의 강박관념에 대해 아르달리온은 세상에 닮은 사람은 없다는 논리로 응수한다. 역시나 그의 일관된 입장인바, “모든 얼굴은 유일무이”(51)하기 때문이다. 닮음 어쩌고 하는 게르만의 수작에 산골무지렁이 같은 단순함과 질박함으로 응수한 펠릭스야말로 존재의 건강한 고유성을 대변하는지도 모르겠다.

 

 

 

 

 

 

 

 

 

 

(<절망>의 밑텍스트들 중 도..키 작품들.)

 

 

 

나보코프가 러시아 문학의 적자로서 가진 자부심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는 러시아 문학 특유의 억압’(도덕, 정치, 종교 등)로부터의 자유를 선언했으며, 온갖 이데올로기를 비워냄으로써 문학을 오롯이 문학이게끔 하고 작가를 오직 예술에만 헌신하는 독특한 성직자이게끔 했다. 휴머니즘의 강박과 진득진득한 메시아 콤플렉스로 고통 받는 인텔리겐치아의 굴레 혹은 십자가는 더 이상 작가의 몫이 아니다. 나보코프가 유미적인 문체주의자로 비난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소위 미학 선언의 저변에 깔린 맥락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 그는 러시아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의 후예로서 볼셰비키 혁명 때문에 영원히 조국을 떠나야 했다. 그 와중에 어이없는 희생양이 된 그의 아버지는 그가 항상 깊은 존경을 표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가 그토록 사랑한 러시아 문학은 아무리 독특한 시각과 해석의 잣대를 갖다 댈지라도 예의 그 억압까지 포함하는 문학이다.

 

나보코프는 탁월한 언어 조탁 능력을 타고 났을 뿐더러 문화적인 열등감이 거의 없는 작가였다. 그럼에도 자신의 천재성과 박식함에 도취되는 대신(곧잘 게르만처럼 건방지게 굴긴 했다!) 평생 겸손한 자세로 문학에 임했다. 학자로서도 성실한 편이었으며 꼼꼼한 번역가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소설가로서 염두에 둔 것은 문학사와의 대결이었던 것 같다. 특히 삼십 대 초반, 유럽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쓴 <절망>은 의심의 여지없이 열병으로 인한 발작성 정신이상과 자존감 상실로 인한 일탈 행동 분야의 우리 전문가”(101), 즉 도스토옙스키에게 던지는 도전장이다. 거장을 향한 질투가 느껴지기도 한다. 어쨌거나 이 지점에서 나보코프의 문학이 시작된다.

 

 

 

 

 

 

 

 

 

 

 

 

 

 

 

한 시절 포스트모더니즘의 맥락에서 정의됐던 나보코프의 서사 전략, 즉 각종 유희는 얄팍한 허영의 산물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문학사에 대한 깊은 통찰, 나아가 기존의 문학이 없이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인식과 절망(!) 이후에 나온, 소설가로서 그가 취할 수 있었던 유일한 존재 형식이다. 경제적 여건과는 무관하게 평생을 부랑아처럼, 유목민처럼 떠돌며 그가 찾아 헤맨 님펫’(<롤리타>)의 이름은 결국, 기존의 문학이 아닌 삶의 샘물에서 곧장 퍼 올린 투명한 문학(가령 푸시킨)이었으리라.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그의 문학이 가닿을 수 없는 문학의 유토피아, 영원히 되돌아가지 못한 유년의 고향 러시아와 같은 것이었으리라.

 

-- 문학동네 네이버 카페

 

-- 새로운 번역의 <롤리타>가 출간되어 무척 기쁩니다! 표지도(어디 영어판 표지였던 것 같기도 한데) 완전 마음에 들고요. 특히, 옛날 <민음사판> 표지에 비하면, 완전 좋아요 ㅎㅎ 한데 <롤리타>에 대해서는 아직 마땅히 쓴 글이 없어(언제 기회가 주어지면 기꺼이 쓸 텐데요!), <절망>에 관한 글을 올립니다. 이걸로는 지금 논문 써야 되는데..-_-;;

-- 아래, 나보코프 가족 사진입니다. 저 아들(드미트리)이 커서 아버지의 작품들을 관리하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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