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의 저 편에서 건져 올린 연인과 가족의 초상: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뒤라스, <연인>

 

 

 

 

 

 

 

 

 

 

 

 

 

 

 

 

전쟁이 끝나고 몇 해가 흘렀다. 몇 번의 결혼과 몇 번의 이혼에서 아이들을 낳고 몇 권의 책을 펴냈을 즈음이었다. 그가 부인과 함께 파리에 왔다. 그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요. 그녀는 목소리에서 이미 그인 줄 알았다. (중략) 그는 겁을 먹고 있었다. 예전처럼 두려워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떨리는 음성 속에서, 갑자기, 그녀는 잊고 있던 중국 억양을 기억해 냈다. (중략) 그는 잠깐 뜸을 들인 후 이렇게 말했다. 그의 사랑은 예전과 똑같다고. 그는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으며, 결코 이 사랑을 멈출 수 없을 거라고. 죽는 순간까지 그녀만을 사랑할 거라고.(136-137)

 

이런 말로 끝나는 <연인>은 물론 연애소설이다. 두 연인 모두에게 이국인 베트남, 오직 사랑을 위해 존재하는 중국인 거리의 집, 열다섯 반 나이의 가난한 프랑스 소녀와 삼십대 후반의 부유한 중국인이 만들어내는 대조의 효과, 무엇보다도 사랑에만 몰입하려는 의지 등. 상당히 절제된 문체에 간접화법이 주를 이루기는 하나,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애초부터 미래를 꿈꿀 수 없는(혹은 그러지 않으려는) 그들의 열애는 더욱더 낭만적인 색채를 띤다. 1984, 소녀는 이미 노인이 되었고, 이렇게 설정된 화자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난 첫 사랑, 아니 첫 남자의 추억은 극적이고 관능적일 수밖에 없으리라.

 

나의 삶은 아주 일찍부터 너무 늦어버렸다. 열여덟 살에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늦어버렸다. 열여덟 살과 스물다섯 살 사이에 내 얼굴은 전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변해갔다. 열여덟 살에 나는 늙어 있었다. (중략) 늙어 간다는 것은 가혹했다. 나는 늙음이 내 얼굴에 찾아와 내 모습을 하나씩 하나씩 변화시키는 것을 목격했다. 얼굴 모양이 일그러지고, 두 눈은 더 커지고, 시선은 더 슬픈 빛을 띠고, 입 모양은 더 고집스러워 보이고, 이마에는 깊은 주름이 패었다. 그런 변화에 진저리치기는커녕 나는 오히려 내 얼굴의 노쇠 현상을 마치 이야기의 줄거리가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해 하는 것 같은 호기심을 품고 지켜보았다.(10)

 

노인은 구태여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건을 엄정하게 배치하려고 하지도, 기억의 빈 곳을 메우려고 하지도 않는다. 추억은 펜을 따라 자유분방하게 흘러가 제멋대로 겹치기도, 엇갈리기도 한다. 소녀의 조숙을 넘어선 조로는 물론 엄밀한 의미의 늙음이 아니라 그 당시 소녀가 감당한 욕망경험’, 그 크기와 깊이를 말해주는 것이리라. 성장기의 기억 속에 외딴 섬처럼 자리 잡은 이 사랑의 추억은 실은 소녀를 옥죄던 현실과 얽혀 있다. 다름 아니라 가족이다.

 

안녕, 잘 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등의 인사는 결코 나누지 않는다. 고맙다는 인사도. 전혀 말을 하지 않는다. 말할 필요가 없다. 모두가 말없이, 멀찍이 떨어져 산다. 돌로 된 가족이다. 어떤 접근도 불가능한 두꺼운 퇴적물 속에서 화석이 되어 버린 가족이다. 날마다 우리는 자살을, 혹은 살인을 기도한다. 우리는 서로 말을 걸지도 않지만 보지도 않는다. 어쩌다 눈이 마주쳐도 시선을 돌려 버린다. 바라본다는 것은 한순간 그 대상을 향한, 그 대상에 대한 호기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불행에 빠지는 행위이다. 누군가를 바라본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그 시선에 합당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여전히 그는 불명예스러운 사람일 수도 있다. 대화라는 단어는 허영이다. 이 집에 가장 잘 어울리는 어휘는 수치와 자만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68-69)

 

심각한 도벽과 폭력적 성향에 아편까지 시작한 망나니 큰 오빠, 그와 정반대로 계집애처럼 연약한 작은 오빠, 무엇보다도 큰아들을 지나치게 편애하는 어머니. “나는 내 가족들에 대해 많이 썼다. 하지만 그렇게 쓰는 동안에도, 그들, 나의 어머니와 오빠들은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그들 주위에서, 다가가지 않고서 그 사물 같은 인간들 주변에서 글을 썼다.”(14) 그들로부터 공간적, 시간적 거리를 유지하며 글을 씀으로써 사물같은 그들을 인간으로 만들고 동시에 그녀 자신도 저 애증의 굴레로부터 벗어난다. ‘연인에 대한 그녀의 태도도 비슷하리라. 기억 속을 헤적이며 글을 쓰는 행위만이 우리에게 잃어버린 시간을 되살려줄 수 있으니까.

 

이런 불멸성이 살아 있을 때에만, 삶은 불멸의 것이 된다. 불멸성이 삶 속에 있을 때, 그것은 길게 사느냐 짧게 사느냐 하는 시간의 문제가 아니다.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르고 있는 또 다른 그 무엇인 것이다. 불멸성은 시작도 끝도 없다고 말하는 것도, 불멸성은 정신의 삶과 함께 시작되어 그것과 함께 끝난다고 말하는 것도 똑같이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불멸성은 정신에도 관여하고 또 바람을 쫓아가는 것에도 관여하기 때문이다. 사막의 죽은 모래들, 어린아이들의 시체를 보라. 불멸성은 거기로 지나가지 않는다. 그것은 거기에 머물렀다가 우회한다.(125)

 

 

-- 네이버캐스트

 

-- 오랜만에 뭘 올릴까 찾아보니, 이런 것도 있더라. 뒤라스의 소설은 항상 기대 이하(?)였는데, 그녀의 (너무나 개성 있는!) 얼굴에서 풍기는 포스가 너무 강한 탓인지도 모르겠다..@_@

뒤라스의 <연인>은 저 글을 쓰려고 처음 읽었다. 그러니까 소설 이전에 영화가 먼저 있었는데, 대학 시절에 본 제인 마치 주연의 <연인>은 (학력고사 치고 나서 본 <원초적 본능>에 이어) 가장 '야한' 영화로 머릿속에 남아 있다. 소설을 읽은 다음 오랜만에 다시 보니 역시나 야했지만(^^;) 연애 라인보다는 가족소설적 측면이 더 눈에 들어오더라. 덧붙여, 유학 시절 만났던 베트남 친구들에 대한 기억(그 흔적은 <내 아내의 모든 것>에 수록된 한 단편에 좀 남아 있다) 때문인지 베트남의 풍경.

 

 

 

 

그리고 공간적 배경 때문에 비슷한 인상으로 남아 있는 이 영화! 카트린느 드뇌브는 <쉘부르의 우산> 시절보다 중년 이후가 더 멋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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