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한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고 체호프의 <벚나무(벚꽃) 동산>에서 20세기로, 파스테르나크의 <닥터(의사) 지바고>로 넘어가기 전에 잠시 감상에 젖어본다. 모두가 떠난 텅 빈 무대 이후 혁명이 찾아온다. 독특한 서사시(에픽), 독특한 역사소설, 혁명소설 등 비평과 연구의 수사는 화려하지만,  내게 <지바고>는 언제나 로맨스였다. 혁명과 세계대전, 내전의 소용돌이, 인텔리겐치아(들)의 파란만장한 삶을 다룬 로맨스. <폭풍의 언덕> 같은 진짜 로맨스를 읽던 무렵에 읽었던 탓이기도 하겠다.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으로 넘어가는 그 해 겨울, 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범우사판의 두툼한 장편, 데이비드 린의 대륙적 스케일이 느껴지는 영화.(흠, 한데 배경 속 설원은 러시아가 아니다.^^;; : 겸사겸사 린의 <아라비아의 로렌스>도 볼 만하다.) 파스테르나크(그는 유대인이라, 이름을 구개음화 시키지 않고 이대로(즉, "빠스떼르낙"으로 발음하는 것이 맞다) 는 내게 <지바고>의 작가였지만, 동시에 이 시를 쓴 시인이기도 했다.

 

모든 일에서 / 극단에까지 가고 싶다. / 일에서나, 길에서나, /마음의 혼란에서나,

재빠른 나날의 핵심에까지 / 그것들의 원인과 / 근원과 뿌리 / 본질에까지.

운명과 우연의 끈을 항상 잡고서 / 살고, 생각하고, 느끼고, 사랑하고, / 발견하고 싶다.

아, 만약 부분적으로라도 / 나에게 그것이 가능하다면 / 나는 여덟 줄의 시를 쓰겠네. / 정열의 본질에 대해서 /

오만과 원죄에 대해서 / 도주나 박해, / 사업상의 우연과 / 척골(尺骨)과 손에 대해서도 /

그것들의 법칙을 나는 찾아내겠네. / 그 본질과 / Initial을 나는 다시금 반복하겠네.

 

원문도 찾아보았다. 마지막 네 연은 번역에선 빠졌다.

 

 

До сущности протекших дней, / До их причины, / До оснований, до корней, /До сердцевины.

Все время схватывая нить / Судеб, событий, / Жить, думать, чувствовать, любить, / Свершать открытья.

О, если бы я только мог / Хотя отчасти, / Я написал бы восемь строк / О свойствах страсти.

О беззаконьях, о грехах, / Бегах, погонях, / Нечаянностях впопыхах, / Локтях, ладонях.

Я вывел бы ее закон, / Ее начало, / И повторял ее имен / Инициалы.

Я б разбивал стихи, как сад. / Всей дрожью жилок / Цвели бы липы в них подряд, / Гуськом, в затылок.

В стихи б я внес дыханье роз, / Дыханье мяты, / Луга, осоку, сенокос, / Грозы раскаты.

Так некогда шопен вложил / Живое чудо / Фольварков, парков, рощ, могил / В свои этюды.

Достигнутого торжества / Игра и мука / Натянутая тетива / Тугого лука.

 

이 시를 번역한 자는 독문학자이자 번역가, 수필가로 정리되는 전혜린. 한때는 '요절한 천재'로 여겼고, 친한 벗들과 함께 그녀의 책을 읽고 흥분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녀가 번역한 위의 시는 베껴쓰고 코팅하고 등등하여 항상 갖고 다녔던 기억이 있다. 요즘은 그녀를 안 읽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간혹 그녀를 상기한다. 이런 책들과 더불어. 

 

 

 

 

 

 

 

 

 

 

 

 

 

 

 

 

다시, 파스테르나크로, <지바고>로 가자. 아무리 읽어도 잘 쓴 소설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 이 소설을 우리가 계속 읽는 것은 아무래도, 역사가 문학을 만들기 때문, 이 아닌가 한다. 어찌 보면 흔해빠진 로맨스, 우유부단한 지식인(지바고), 열렬하고 멋있지만 작품 속에선 창백하고 부차적인 인물로 머물고 만 혁명가(파벨 안치포프), 적극적이고 매혹적인 여성임은 분명하지만 아무래도 지나치게 신비화되었고 그 때문에 오히려 부실한 여주인공(라라) 등등. 플롯의 엉성함은 말할 것도 없고.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역사가 대신(!) 동기화해주는 것 같은 느낌이다. 비슷한 시기, 비슷한 소재를 다룬 불가코프의 <백위군>과는 얼마나 대조적이냐, 그러나.

 

 

 

 

 

 

 

 

 

 

 

 

 

 

 

소설이야 (실제로 의사이기도 했던) 불가코프가 더 잘 쓴 것 같지만, 어쨌거나 독자들은 <지바고>를 사랑한다.(물론,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만..^^;;)

 

곁들어 <지바고>를 번역하고 있는 내 신세를, 연극이 끝난 다음 텅 빈 무대 구석에 혼자 앉아 있는 늙은 단역배우(체호프, <백조의 노래>)처럼, 한탄해본다. 인생에 뭔가 다른 변수가 있었더라면 뭔가 다른 일을 하고 있었을 법한데, 인생-역사에서 가정법은 무의미하고, 거참, 그러니까, 자꾸 또 가정법을 써보는 것이다. 소설가로서, 학자로서 20여년전의 꿈을 절반도 이루지 못한 것 같아, 그러면 조용히 소설을 쓰거나 공부를 할 것이지, 이렇게 청승스러운 투정을 써대는 나 자신에게 솔직히 좀 빈정이 상하긴 하지만... -_-;;

 

정확히 21년, 5월 18일을 좀 지난 어느 날, 혼자서 광주 망월동을 찾아갔던 기억이, 지난 일요일 얼핏 떠올랐다. 그날도 날씨가 무진장 좋았던 걸로 기억된다. 그 무렵 즐겨 (따라)부르던 노래 가사 속의 금남로, 이런 곳도 배회하고. 내게 있어 광주는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한강의 애독자라고 할 형편은 아니지만, 어떤 극한의 탐미주의와 오묘한 분위기에 이끌려 주기적으로, 드문드문, 읽는데 이번 소설은 읽지 않을 도리가 없겠다.)

 

때론 잊는 것이 능사이지만, 시간과 더불어 주어지는 망각의 축복이 고맙지만, 요즘은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잊을까 두렵다. 역사의 반복, 반복되는 것의 두려움을 꼭 기억해야 한다. 얼마 전까지도 그렇게 흥분했던 세월호 사건도 진상이 전혀 규명되지 않은 채 그렇게 잊힌다. 이것이 두려운 것이다. 문학은 그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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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체호프는 <귀여운 여인>이라는 단편을 통해 중학교 때 알게 되었지만(<검은 고양이>, <목걸이> 등에 밀려 재미 없게 읽은 기억이 있다!) 극작가 체호프를 알게 된 건 훨씬 이후이다. 대학 시절, 심지어 그 이후, 대학원 시절이라고 해야겠다. 그의 희곡만 다루는 수업(세미나)을 들었는데 그 여운이 참 컸다. 그때 수업을 했던 섬배 겸 은사는 이거 번역하신 양반...^^;;

 

 

 

 

 

 

 

 

 

 

 

 

 

 

새로운 번역으로 읽는 [벚나무 동산](아직도 입에는 '벚꽃 동산'이 더 익숙하지만)은 여전히, 더더욱 좋다! 그의 희곡 중에서 가장 선호하는 작품은 누구나 좀 다르지만, 나는 언제나 이 작품을 제일 좋아했다. 수업 하기는 <갈매기>가 편한데도(공연도 많이 하고) 마땅한 이유 없이, 마치 샤를로타가 오이를 씹어먹듯, 가예프가 입안에서 알사탕을 굴리고 당구 관련 얘기를 늘어놓듯, 그렇게 이 작품이 좋다. 그리고 여기서 제일 좋은 인물 역시 예나 지금이나, 87세의 늙은 농노 피르스이다. 1막, 주요 인물들이 (벚나무 동산, 즉 영지가 팔릴 참인데도) 여유 만만하게 떠드는 와중에 간간히 헛소리를 하는 이 영감이다.

가예프: 암... 이건 물건이야... (책상을 만져 보고) 경애하는 책장이여! 어인 백 년이 넘도록 선과 정의의 빛나는 이상을 추구해 온 너의 존재를 축복하노라.(...)

사이.

로파힌: 네...

류보비 안드레예브나: 오빤 여전하시네요.

가예프: (약간 당황해하며) 공 오른편 구석으로! 잘러 쳐서 가운데로!

로파힌: (시계를 보고) 자, 저는 가야겠습니다.

야샤: (류보비 안드레예브나에게 약을 준다) 지금 약을 드시는 게 좋겠어요....

피시크: 약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친애하는 부인...(...) (알약을 받아 자기 손바닥 위에 놓고 입김을 불어넣는다. 그러고 나서 입에 집어넣고 크바스와 함께 꿀꺽 삼킨다.) 이렇게!

류보비 안드레예브나: (깜짝 놀라며) 아니, 정신 나갔군요!

피시크: 알약을 몽땅 삼켜버렸습니다.

로파힌: 대단한 목구멍이군.

모두 웃는다.

피르스: 이분이 부활절에 우리 집에 오셔선 오이 절임을 반 통이나 드셨어요....(중얼거린다.)

류보비 안드레예브나: 이 사람이 지금 무슨 얘길 하는 거지?

바랴: 벌써 3년째 저렇게 중얼거려요. 우린 익숙해졌어요.

야샤: 연로하셨으니까. (1막, 346-347)

 

피르스는 대사가 많지 않지만(저렇게 중얼거리기만 하니 많을 수가 있나!) 많은 장면에 등장한다, 저렇게, 뭐랄까, 기괴한 장식물처럼,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흔적처럼. 그는 벌써 3년째 귀도 잘 들리지 않을 만큼 속절없이 늙어버린 처지이지만 여전히 자신을 “부엉이가 크게 울어대고, 사모바르도 쉴 새 없이 달그락거”릴 만큼 비극적인 “변고”(2막, 376쪽)가 있긴 전 그 좋았던 시절, 귀족 저택의 살림을 관장하던 집사로 여긴다. “집에서 저를 장가보낼 무렵, 주인마님의 선친께서는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어요...”(2막, 370) 농노해방령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인 의지에 따라 이곳에 남은 그였던 만큼 “벚꽃 동산이 팔리면(?) 어디로 갈 거야?”(??)라는 마님의 물음에 “명령하시는 대로...”(??)와 같은 예의 그 시대착오적인 충성을 다짐한다. 항상 단정한 차림(양복 재킷과 흰 조끼, 구두)을 하고 있고 쉰 줄을 넘긴 도련님의 취침 시간과 복장 때문에 애를 태우고 집안의 무도회에 예전과 달리 “장군님들이며 남작님들이며 제독님들”은커녕 “우체국 관리나 역장 나부랭이들”(3막, 395)조차 마지못해 참석한 것에 속상해한다.

 

잔인한 얘기지만, 늙은 인간만큼 희화하기 좋은 대상이 있을까. 여기서 피르스는 그 최고봉이다. 아마 그래서 작가는 그를, 그 혼자만을 텅 빈 무대에, 마지막 무대에 남겨두는 듯하다. 실상 그는 있으나 마나, '있음'과 '없음'의 찰나적인 교차로에 있는 인물이다. (우리 엄마 말로, 자기는 옛날 같으면 뒷산에 누워 있으나 안방에 누워 있으나 차이가 없는 나이, 라고..-_-;;) “노령인 피르스는 수리가 불가능한 관계로 조상님들께 가는 수밖에 없다”(4막, 412)는 예프호도프의 ‘최종적인 견해’는 물론 적확한 것이다. 흠.

 

무대가 텅 빈다. 문마다 자물쇠를 채우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 마차들이 멀어져 가는 소리가 들린다. 고요해진다. 정적 속에서, 저 멀리 도끼로 나무를 찍는 소리가 쓸쓸하고 애잔하게 울린다. 발소리가 들린다. 오른쪽 문에서 피르스가 나타난다. 그는 여느 때처럼 양복에 흰 조끼를 받쳐 입고, 구두를 신고 있다. 그는 환자다.

(한 줄 띄고.)

피르스: (문에 다가가서 손잡이를 만져 본다.) 잠겨 있네. 가버렸어... (소파에 앉는다.) 나를 잊어버리고 갔네... 괜찮아... 여기 앉아 있지 뭐... 레오니드 안드레예비치는 분명히 털외투가 아니라 보통 외투를 입고 가셨을 텐데... (걱정스럽게 한숨을 쉰다.) 내가 보살펴 드리지 못했으니... 젊은 사람들이란! (뭔가 중얼중얼하지만 알아들을 수 없다.) 인생이 흘러가버렸어, 산 것 같지도 않은데... (눕는다.) 눕자... 이젠 기운도 없고, 남은 게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에이, 이놈아... 등신아!(누운 채 꼼짝하지 않는다.) // 살긴 살았지만 도무지 산 것 같지가 않아.

(한 줄 띄고.)

(-426) 마치 하늘에서 그러는 것처럼 저 멀리서 줄이 끊어지는 소리가 울렸다가 슬프게 잦아든다. 다시 정적이 찾아온다. 그리고 멀리 동산에서 도끼로 나무를 찍는 소리만 들린다.

/ 막. (4막, 425-6)

 

언제나 깊은, 기나긴 여운을 남긴 마지막 장면.  "살긴 살았지만 도무지 산 것 같지가 않아."  이 문장, 많이 좋아했다. 아무튼. 마지막 장면에 대해 번역자-연구자는 (다른 논문에서) 이런 글을 썼는데, 마음에 들어서 옮겨와 본다. 여기서 언급하는 체호프의 첫 희곡은 <플라노토프>이다. 오래 전 대학원 수업을 들을 때 원문으로(!) 고생스레 다 읽은 뼈아픈 기억이 있다.

 

 “빈 무대는 체호프 드라마투르기의 시작이자 끝이다. 체호프는 약관 20세에 남들이 사용한 낡은 드라마투르기의 잔해들을 잔뜩 주워 모아 대작가로 입신하려는 망상을 꿈꾸었고 당연히 실패했다. 6년 동안 반성한 끝에 그는 텅 빈 / 무대 위에서 일인극으로 자신의 드라마투르기를 다시 세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초인적인 재능과 성실성으로 자신의 드라마투르기를 완성한 체호프는 20여년 동안 빌렸던 무대를 깨끗이 비우고(피르스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 그는 작가가 남긴 조형적 농담이다) 자신의 등장인물들과 함께 홀연히 극장을 떠나갔다.”( 박현섭. 체호프 드라마투르기의 현재적 의의. 󰡔러시아연구󰡕 제14권, 제2호. 115-116)

 

 “모두가 떠나간 뒤의 텅 빈 집은(「벚꽃 동산」) 나비가 날개를 달고 공중으로 날아가면서 남긴 빈 고치를 연상시킨다. 애벌레는 나비로서의 미래를 기억하지 못할 테지만, 아마도 짧은 탈각의 순간에 자신의 빈 고치를 얼핏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보여줄 수 없는 낙원에 대한 음화상(negative image), 찰나에 열렸다 사라진 낙원의 그늘에 다름 아니다.”( 박현섭. 「유토피아 없이 살아가기」. 문예미학. 제7호.

 

정말 좋은 일이 하나도 없음에도, 오히려 잃어버린 것에 대해 야릇할 만큼 태평스럽고 여유만만한 주인공들의 한심함(?) 속에는 부정하기 힘든 어떤 긍정의 힘이 있다. '아이스러움'. 이 희곡의 모든 인물을 지배하는 어떤 묘한 힘이기도 하다.

 

최근에 체호프가 좋아 많이 읽는다.(그럴 기회를 많이 만든다.) 옛 번역부터 최신 번역까지 번역도 많다. <펭귄클래식...> 판본은 표지가 너무 좋다. 놀랍게도(!), 추상화가로 유명한 칸딘스키의 것.

 

 

 

 

 

 

 

 

 

 

 

 

 

 

 

 

 

 

 

 

 

 

 

 

 

 

 

 

 

그러고 보니 나도 하나 하고(그러니까 안 하고 ㅠ.ㅠ) 있구나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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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페딘1T 2017-08-29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체호프도 읽어보고 싶어서 이렇게 눈팅중입니다. 단편선과 희곡집, 하나씩만 추천해 주시면 안될까요? ㅠㅠ
 

<바틀비>, 다시 읽었다! 원제는 「필경사 바틀비: 월 가 이야기」(Bartleby, the Scrivener: A Story of Wall-Street). 이것이 처음 발표된 것이 1853년이라니, 충격적이다. 소설의 내용이나 문체로는 영락 없이 모더니즘, 20세기 초반이다.(카프카의 [변신] 같은 작품과 아주 비슷하다.)   

 

 

 

 

 

 

 

 

 

 

 

 

 

 

 

이런 운명의 소설이 있나 보다. <모비딕>만큼 대규모(?)도 아니고 단편치곤 길지만 아무튼 단행본으로 내기엔 좀 민망한 분량임에도 아마 최근에 가장 문제적인 소설 중 하나로 대접받는 듯하다.(호프만의 <모래 인간>의 느낌..ㅋ) 대략 노트 옮기면: 하트와 네그리 - “제국에 맞서는 노동 거부”(refusal of labor), 지젝 - “사회적 상징 질서에 뺄셈의 자세를 취하는 수동적 공격성”(Passive aggressivity), 들뢰즈 - “모든 형상을 능가하는 기원적 단독성”(originary singularity), 아감벤 - “순수한 잠재성”(pure potentiality). 뭐, 맥락을 빼놓으니 얄궂지만, 얼마나 인구에 회자되는지는 알 만하다. 가장 마음에 드는 정의는 들뢰즈의 것이다.("Bartelby; or, The Formula") 

 

“「바틀비」는 작가에게 메타포도 아니고 그 어떤 무엇의 상징도 아니다. 그것은 격렬하게 희극적인 텍스트인데, 희극적인 것은 항상 문자 그대로이다.”("Bartelby" is neither a metaphor for the writer nor the symbol of anything whatsoever. It is a violently comical text, and the comical is always literal.)

 

뭐가 그리 격렬하게(!), 격하게, 맹렬하게 희극적이냐. 내겐 이 바틀비란 인물이 그렇고, 그를 소개하는 변호사가 그렇고, 그의 사무실에 있는 세 명의 고용인(터키, 니퍼즈, 진저 넛)이 그렇다. 문체가 웃긴 건 더 말할 것도 없다. <모비딕>과는 사뭇 다르다!

 

변호사는 바틀비를 두고 '불가사의', '불가해'한 존재라고 하지만, 사실, 고용인에게 휘둘리는(무장해제!) 그야말로 오히려 괴상한 존재이다. 필사를 거부한 필경사 바틀비를 해고하는 데도 실패한 이 변호사는 이런 책을 뒤적이다 이런 결론에 도달한다.

 

 “나는 차츰 바틀비와 관련된 이런 고생이 영겁 전에 모두 예정되어 있었으며 바틀비는 나 같은 범부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전지(全知)한 섭리의 어떤 신비한 목적을 위해 내게 할당되었다는 믿음에 빠져들었다. 그래, 바틀비야, 칸막이 뒤에 있어라 하고 나는 생각했다. 다시는 너를 박해하지 않으마. 너는 이 의자들처럼 해가 없고 시끄럽게 굴지도 않아. ... 나는 만족해.... ”(87: 번역본은 창비 것.)

“그 죄없는 창백한 인간을 상스러운 교도소로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 꼼짝도 않으려는 녀석이 떠돌이 부랑자라고? 그렇다면 녀석을 부랑자로 취급하려는 까닭은 녀석이 부랑자가 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인 셈인데.”(89-90)

 

결국 변호사는 자기가 방을 빼기로(!) 한다. 사무실을 이전한 다음에도 계속 바틀비에게 끌리는 것은 또 어떤 연유인가.(이만한 짝패도 없으리!) 다시 가보니, 바틀비는 이제 '사무실의 유령'이 아니라 '건물의 유령'이 돼 있다. 숫제 건물을 안 떠나는 것. 거기서 먹고(그는 거의 안 먹는다!) 자고 등 사무실을 진정한 '오피스텔'로 만들어 버린다. 그와 변호사가 대면하는 장면, 이 소설에서 그나마(!) 제일 긴 대화 장면이다. 변호사 역시, 바틀비가 이례적으로 말을 많이 해줘서 좋아한다.

 

“어딘가에 취직해서 다시 필사일을 하고 싶나?”

“아니요. 나는 어떤 변화도 안 겪고 싶습니다.”(No; I would prefer not to make any change.)

“포목상 점원 일은 어떤가?”

“그 일은 너무 틀어박혀 있어서요. 싫어요, 점원 일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까다롭게 가리는 것은 아니에요.(but I am not particular.)”

“너무 틀어박혀 있다니,confinement”하고 내가 소리쳤다. “아니 자네는 계속 틀어박혀 있잖아!”(93)

 

해서  이것 저것(바텐더 일, 상인들 대신 돈 수금, 젊은 신사의 말벗 자격으로 유럽 가는 것 등) 제안해도 바틀비는 다 싫다고 한다. “... 저는 붙박이 일이 좋아요.stationary. 하지만 내가 까다로운 것은 아니에요.”(94)

 

여기서 잠시 소위 바틀비 문장인 “I would prefer not to.”를 보자. 내가 영어 표현을 두고 왈가왈부할 주제는 아니나, 게다가 나 역시 번역가로서 번역의 고충을 익히 알기에 뭐라 할 건 더더욱 아니나, 국내 번역본의 표현이 썩 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ㅠ.ㅠ 이유는 간단한데, 우리 말이 너무 어색해서이다. "...하는 편을 택한다'라든가 '그러지 않는다'라든가 하는 문장 말이다. 소설의 원문을 슬슬 훑어봐도 이 표현이 밥 먹듯(!) 등장한다. 내 보기엔 그냥 "(그것은/그것을) 하기 싫습니다."(혹은 맥락에서 따라선 "...하고 싶지 않습니다.")가 딱 맞을 것 같다. 이렇게 해도 공손함과 완강함은 얼추 표현되는 듯하다. 어차피 번역에서 완전히, 는 불가능하다, 그건 번역이 아니다.  

 

아무튼. 저 유명한 문장에 표현된 이른바 ‘수동적 저항’의 적극성, 더불어, 전체 부정이 아니라 to 이하의 것‘은’ 하기 싫다는 것, 즉 잠재적으로 상정된, 뭔가 달리 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가령 그가 하고 싶은 것은 뭔가를(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다. 하고 싶은 것을 하고(prefer to)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는 것(prefer not to)은 바틀비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의 보편적이고 원초적인 욕망이다. 결코 그가 ‘특별한/까다로운’(particular) 것이 아니다. 단, 불가피하게 우리의 욕망과 선호(prefer)를 조절하고 제한할 수밖에 없는 세계 속에서 타협적인 변호사는 살아남는 반면 바틀비는 마치 그레고르 잠자가 벌레로 변해 영업사원의 굴레에서 벗어나듯 조용히 ‘면벽 공상’의 세계로 사라질 수밖에 없다.

 

이 창백하고 여윈 유령 같은 일중독자(그는 변호사의 충복이었고 처음 몇 주간은 죽도록 일만 한다!)는 계속, 누군가를 연상시킨다. 어쩌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을. 어쩌면 그는 나, 당신, 우리 모두의 모습일 수도. '붙박이 인생', '유령 같은 실존'의 누군가.

 

 

 

 

 

 

 

 

 

 

 

 

 

 

끝으로, 멜빌. 언젠가 <모비딕>에 대해서도 짧게 썼다. 최근에 알게 됐는데(어쩌면 상기됐는데) 레오 까락스의 문제작 <폴라 엑스>의 원작 소설인 <피에르, 혹은 애매함>(?)의 작가 역시 멜빌이다.(이 소설, 엄청 긴데, 번역이 안 돼서 너무 유감이다..ㅠ.ㅠ 영화 역시 비교적 최근에 또다시 봤으나 여전히 '모호한' 영화이다..ㅠ.ㅠ) 놀랍다. 그리고, 카프카 뺨치는 건조한 희극성이 돋보이는 <바틀비> 역시 그의 작품이다. 얼마나 다면적이고, 뭐랄까, 거친(!), 길들여지지 않는(!) 작가인가! "가난과 고독"의 바틀비('야망'을 버리고 편히 사는 쪽을 택한 변호사도 실상은 비슷하다) 역시 멜빌의 분신이다.

 

멜빌의 '워너비' 작가는 스승 겸 선배 격인 호손이었던 것 같은데, 두 작가와 작품들의 운명도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싶다. 물론, 어린 시절 <주홍글자(글씨)>를 재미나게 읽은 기억, <큰 바위 얼굴> 연극에 참여한 기억이 있긴 하지만, 그의 소설을 다시 읽게 될 기회가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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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 강의를 끝낸 직후, 강의실에서 못한 말을 여기에 마저 써본다. 

 

언제 읽어도 나를 흥분시키는 소설이다. 이번에는 (지금 쓰고 있는 책의 한 챕터와 관련하여) 주로 알료샤 관련 부분을 읽었으나, 그럼에도 가장 재미있는 건 고등학교 때나 지금이나 이반 관련 부분이다. 죄. 작위의 죄, 그리고 부작위의 죄. sins of commission / sins of ommission. 이반과 관련하여 문제삼는 건 후자, 즉 부작위의 죄(혹은 미필적 고의)이다. 그 스스로 아비를 죽이지 않은 건 물론, 적극적으로 사주(교사)하지도 않았는데 왜 그는 고통받는가??

 

 

 

 

 

 

 

 

 

 

 

 

 

 

 

 

이 얘기를 많이 했는데, 알료샤에 대해서도 물을 수 있다. 그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하고 챙기면서 왜, 엄연히 그와 피를 나눈(비록 절반이지만) 이복형 스메르쟈코프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었나. 그 역시 사랑과 관심을 필요로 하는 한 인간이었음에도, '천사'의 사명을 띠고 세계(소설) 속에 내려온 알료샤는 그를 처음부터 배제한다.  자신의 반쪽 형을 어둠 속에 함몰하도록 내버려둔 것, 그리하여 결국 아비살해라는 끔찍한 죄를 저지르도록 방치한 것. 이 역시 도스토예프스키의 윤리에 따르면 죄가 될 수 있다. '부작위의 죄'를 (물론 형사상의 법리가 아니라) 아주 넓은 맥락으로 확장하는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당연히,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그가 이 소설에서 얘기하는 소위 '만인유죄' 사상, '죄에 있어서의 연대의식'의 의미가 바로 그것. "우리는 모두 모든 사람들 앞에서, 모든 것에 대해 죄인이다."  '쿨~함'과 '쉬크한 개인주의'가 장려되는 시대(이 역시 항상 서울 중산층의 모럴처럼 여겨졌는데 어느 순간 나도 그것을 지향하는 것이 아닌가 여겨져 소름이 돋는다), '오지랖'이 최악의 가치, 즉 '촌스러움'으로 폄하되는 시대에 도..키의 이런 윤리관이  아직도 이렇게 읽히고 경청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세월호 침몰과 관련, 부작위의 죄, 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것을 보았다. 손에 물 묻히기 싫어하면서 가사도우미로 나선 아줌마처럼 자기 일에 소명의식이 전혀 없는 선장 및 선원들에 대한 분노에 덧붙여, 칠순 노인에게 (그렇게 적은 임금에) 그렇게 큰 배와 수백명의 목숨을 맡겨놓고 검사고 대피훈련이고 좌우당간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않는 시스템에 대한 분노를 참기 힘들다. 배가 일초만에 풍덩 가라앉는 것도 아니고, 학생이 신고까지 했음에도, 저토록 우아하게(!) 대처한 당국은 당최 뭐냐.(배의 위치를 대라니..ㅠ.ㅠ) 도무지 우리가 어떤 나라에 살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아이들이 물 속에서 허덕이는데 국가(어미/아비)가 주판알 튕기고 있으니, 그렇게 거칠고 무식한 러시아에서도 이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노력했는데도 이것밖에 안 된 것이면 (한심하지만) 안타까운 것이고, 애초 아무것도 안 한 것이라면 야비한 것이다. 무능한 부모와 부도덕한 부모는 한끝 차이일 수 있지만, 그 한끝이 때론 치명적이다.

 

 

 

 

 

 

 

 

 

 

 

 

 

 

도...키 전공자답지않게(?) 나는 종교도 없거니와 정치에는 대체로 무관심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 이후 나를 자극하는 일이  자주 생겨 무척 불쾌하다. 보육여건 개선을 기치로 내걸고 어린이집을 사실상 공짜로 운영하고 있는 정부이지만, 그렇게 키운 아이들을 저렇게 허망하게 보내면 무슨 의미가 있나.(사망한 교사들도 20대, 누군가의 소중한 아들딸들이다!)  

 

정부는 무작정 아이를 많이 낳으라고 할 것이 아니라, 이미 낳아놓은 아이들이 잘 자라도록, 나아가 이미 키워놓은 아이들이 더 잘 클 수 있도록 보살필 일이다. 사고 날까 무서워서 아이를 어디 견학 한 번, 수학 여행 한 번 못 보내는 나라라면, 어느 미친 놈이 아이를 낳겠는가. 또한 죽어가는 친구들 틈에서 용케 살아남은 내 아이가 평생 죄책감과 트라우마를 갖고 살아야 한다면...? 

 

"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신이 만든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반의 유명한 테제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신(=아비/황제-차르)에 대한 기대가 그만큼 컸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네가 신(대통령)이라면 제발 잘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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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이슈에 대해 별로 반응하는 편이 아니지만 <세월호> 침몰 사건에 대해서는 나도 연일, 버럭, 의 연속이다. (지난 번 부산외대 사건도 그렇지만)  승객의 대부분이 아이들이니, 그저 참담할 뿐이다. 사고 소식을 접한 그날, 노란 셔틀버스에서 내리는 아이를 품에 안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질 것 같더라. 아이를 가진 모든 부모의 심정이 그랬을 법하다. 내 아이가 저런 상황이라면. 혹자는 마침 아이가 수학여행 떠난 상태라,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반면 여기에는 또 얼마나 도저한 이기주의가 개입되는가. 내 아이는 살아 있다, 라는 아슬아슬한 안도감.  아이가 생기면 그래도 좀 이타적이 될 줄 알았는데, 웬걸, 자기 아이 일 아니면 잘 모른다더니, 그 말도 이제 알겠다...  

 

안 좋은 일이 생기면 굳이 어떤 누구의 잘못을 캐기보다는 그냥 일이 그리 되려고 그랬나보다, 라고 생각하는 쪽, 그러곤 지난 일을 빨리 잊고 다음 일을 도모하려고 애쓰는 쪽이다. 그럼에도 이 참사는 침몰을 전후한 상황이 너무 부조리하다. 19세기 소설에도 곧잘 배가 등장한다. 그런 배를 저 지경이 되도록 수습을 못했다는 것이 나같은 문외한으로서는 도무지 납득이 안 된다. 선장을 비롯한 승무원들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구조 작업도 마찬가지이다.

 

 

 

 

 

 

 

 

 

 

 

 

 

 

누군가에게 네 목숨 버리고 남 목숨 구하라고 요구할 권리는 없으나(아무도 그러지도 않는다) 특정한 자리에 요구되는 최소한의 책임은 있다. 자기 몸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은 채 가라앉는 배에서 내빼버린 선장의 사진을 보며 누가 분노하지 않겠나. 모든 선장이 배와 더불어 바닷속으로 함몰할 수는 없겠지만 이거야말로 '선장'(캡틴)이라는 말에 대한 배반이 아닐 수 없다. 공분, 이라는 단어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 같다.

 

2주쯤 전 일요일, 아이가 발작을 일으켜 응급실로 달려갔다. 유아 발작은 진짜로 위험한 건데 왜 이리 태평이냐고 소리치는 것이, 아무리 침착하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흥분하는 것이 애 엄마의 자리이다. 그걸 멀뚱멀뚱 바라보며 저 아줌마는 왜 저리 소란이냐고 생각하는 것이 또 관객들(그들도 제각기 아프다!)의 자리이다. 입원 수속부터 받으라는 것이 원무과 직원의 자리이다. 그 와중에 최대한 냉정을 유지하며(경련하는 환아를 처음 본 것 같던데, 그래서 경련 상태인지 아닌지 자기도 헷갈려 하고) 상황을 판단, 부작용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아이의 몸에 진정제를 놓아야 하는 것이 또한 의사의 자리이다.(최근 응급실을 자주 가면서 주말에도 고생하는 젊은 수련의들에 대한 생각이 많아진다. 요즘은 여성 의사들이 정말 많더라.) 

 

 

 

 

 

 

 

 

 

 

 

 

 

 

 

 

 

언젠가 <맥베스>를 다시 읽으면서 맥베스의 광기에 대해 죄의식, 죄책감은 죄의 크기가 아니라 죄를 느낄 줄 아는 마음(의식)의 크기에 비례한다고 쓴 적이 있다.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건 아무래도,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껏 쭉 반복적으로 읽어온 <카라마조프...> 때문이다. 이반은 왜, 자기가 아버지를 직접 죽이지도 않았는데, 그리고 스메르쟈코프에게 노골적으로 살인을 사주하지도 않았는데 그런 죄책감에 시달리는가. 이 물음을 풀어가는 과정이 이 소설의 삼분의 일, 어쩌면 절반을 이룬다.

 

  

 

 

 

 

 

 

 

 

 

 

 

 

 

 

<대심문관>에서 암시되듯 우리 모두 천재-선지자(=예수)처럼 살 수는 없다. 우생학적 이분법(이것 자체가 위험천만한 것이라고 할지라도)을 빌려 냉정하게 말하자면 우리 대부분이 '평민'(=양떼: 라스콜니코프의 표현으론 '이[蝨]')이다. 평민한테 그 이상의 것(가령, 소설 속에서는 기적과 신비에 의지하지 않은 순수한 믿음, 그리고 자유의 윤리적인 행사)을 요구할 수는 없다. 다만, 인간이라는 자리에 맞는 최소치의 책임과 의식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그러고 보니, 오늘이 4월 19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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