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이 새롭다. 어릴 때는 성공과 출세를 꿈꾸던(이 소설 속 개념으론 소위 "신사" 되기) 어린 핍의 관점에서 읽었고, 크게 감동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고작해야 신사, 라니. 이런 유치한 속물. 야망을 갖는다면, 적어도 라스콜(리)니코프 정도는 되어야. 혹은, 그 야망의 속됨을 보상할 만한 만큼 강렬한 열정을 갖고 있어야. 즉, 쥘리앙 소렐 정도는 되어야. 뭐, 이렇게 생각했을 법하다.

 

 

 

 

 

 

 

 

 

 

 

 

 

 

 

 

핏줄-신분에서 돈-계급으로 넘어가는 19세기, 야망을 가진 청년들이 만들어내는 문학 장르가 곧 소설이다. 자본주의가 빨리 발달한 영국-런던에서 소설-책은 이런 사회적 환경을 십분 활용했을 법하다. 아니, 반대로, 이런 환경이(인쇄술의 발전 포함, 출판-신문 시장의 활성화) 소설 장르를 키웠을 법하다. 디킨스는 그 인생 자체도 그러하거니와 그 문학도 이런 정황과 밀접히 관련돼 있다. <위대한 유산>에는 입지전적 인물(+ 출세한 촌놈)의 전형인 그의 자전적 요소가 많이 들어가 있다.

 

 

 

 

 

 

 

 

 

 

 

 

 

 

 

참으로 소설의 교과서답게, 이야기는 역시나 교과서답게 흘러간다. 뜻밖의 유산으로 신사-되기의 대열에 합류한 핍이 결국엔 그것의 무상함을 깨닫는다는 식.(지금 1권까지 읽었다, 왜 이리 긴 것이냐, 헉헉.) 어쩌면 역시나 교과서다운 이야기이지만, 핍의 매부 조의 인생이 흥미롭다. 

 

습지의 대장간, 괄괄한 여자의 남편(자기 아이는 없이 아내의 조카를 자식처럼 돌봐준다),  나중에는 반신불구가 된 아내를 돌봐주던, 조카 나이쯤 되는 여자(비디)와 결혼한다. 소설의 초반에 그와 핍의 훈훈한, 아름다운(!) 공생, 연대가 묘사된다. 기골이 장대하고 괄괄한(다른 말을 못 찾겠다) 여자 밑에서 기 죽어 지내는 운명이 그들을 엮어준다. 조실부모한 핍에게, 조는 실상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이지만 부모나 다름 없다. 느닷없이 부자가 되어 신사 수업을 받으러 떠나게 된(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방랑 시대의 영국판이다!) 핍은 조의 모습이 슬슬 못마땅하다. 그를 위해 뭔가를 해주고 싶다. 그에 대해 비디가 말한다.  “넌 그가 자존심이 강할지도 모른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전혀 없니?” / “그는 자존심이 강해서, 자신의 능력에 합당하고 또 실제로 성실하고 훌륭하게 그 역할을 다하고 있는 자신의 현재 자리에서 누군가가 자기를 데려가는 것을 원하지 않을지도 몰라.”(276) 이런 말을 핍은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시간이 흐른 뒤, 이미 런던 생활자가 된 그를 조가 방문한다. 이 장면은 꽤 긴데, 이 소설에서 가장 잘 쓰인 부분이라고 해야할 법하다.(첫 장면, 늪지와 더불어.) 충분히 예상 가능한 장면. 어색한 옷차림에 덧붙여 곤혹스러운 그놈의 모자(!!)가 상징하는바, 어색한 만남이 지속된다. 마지막. “오찬 들러 오실 거죠?”라는 핍의 (사실상 진정성이 없는) 제안을 단호히 거절하면서 조는 이렇게 말한다.

 

“핍, 이보게 친구, 인생이란 서로 나뉜 수없이 많은 부분들의 접합으로 이루어져 있단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대장장이고 어떤 사람은 양철공이고 어떤 사람은 금 세공업자고, 또 어떤 사람은 구리 세공업자이게끔 되어 있지. 사람들 사이에 그런 구분이 생길 수밖에 없고 또 생기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법이지. 오늘 잘못된 뭔가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건 다 내탓이다. 너와 난 런던에서는 함께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야. (...) 그건 내가 자존심이 강해서가 아니라 그저 올바른 자리에 있고 싶어서라고 해야 할 거야. 난 이런 옷차림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 나는 대장간과 우리 집 부엌과 늪지를 벗어나면 전혀 어울리지 않아. (...) 혹시라도 네가 날 다시 만나고 싶은 일이 생긴다면, 그땐 대장간에 와서 창문으로 머리를 들이밀고, 대장장이인 이 조가 거기서 낡은 모루를 앞에 두고 불에 그슬린 낡은 앞치마를 두른 채 예전부터 해오던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도록 하거라. 그러면 넌 나한테서 지금 이런 차림의 반만큼도 흠을 발견하지 못할 거다. 난 끔찍이도/ 우둔한 사람이지만, 오늘 이 일에서는 마침내 어느 정도 올바른 결론을 뽑아 냈다고 생각한다. (...)”(411-12)

 

이런 말을 하는 조에게서 핍은 소박하고도 진실된 어떤 위엄을 본다. 그의 몸에 맞지 않는 옷차림도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한데, 갈등의 뭐랄까, 이렇게 온건한 해결은(둘은 나중에 화해하는 셈이다) 이것이 디킨스의 소설(=영국 소설)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사람들이 통째로 너무들 점잖다. 과연 gentle, gentleman!

 

러시아 작가치곤 제일 온건한 편인(유럽 물도 많이 먹었고) 투르게네프조차도 이런 식의 세대 갈등, 신분(계급) 갈등을 훨씬 더 복잡한 차원에서 다룬다. 주인공 바자로프(잡계급)와 부모의 관계를 보라. 지난 봄에 쓴 논문에서 몇 자 긁어와 본다.  

 

 

 

 

 

 

 

 

 

 

 

 

 

 

 

부모의 영지에 도착한 순간 바자로프는 니힐리스트도 의학도도 아닌, 적어도 그것이기에 앞서 아버지(어머니)의 아들이다. 이 바자로프는 부모자식간의 애정이라는 생래적 낭만주의를 부정해야 하기 때문에 이상주의자 귀족을 대하는 니힐리스트 잡계급 청년보다 훨씬 더 야멸차고 위악적이다. ‘밭 갈던 할아버지’ С7: 50), 이어 ‘퇴역 의사’이자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С7: 110) 대도시로 유학을 갈 만큼 명민했던 바자로프에게 부모의 집은 그가 배반하고 부정한 다음 떠난 세계의 상징이다. 그것은  야심찬 “거인”의 초라한 과거를 적나라하게 보여줌과 동시에 실상 과거로부터 몇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심지어 제자리인) 현재의 옹색함과 비루함을 상기시킨다. 때문에 오랜 이별 끝에 만난 부모의 환대와 애정이야말로 굴레고 자기 집보다 차라리 친구 집이 더 편하다.

 

 

― 안 되겠어! ― 그가 다음날 아르카지에게 말했다, ― 내일 여길 떠나겠어. 지루해. 일을 하고 싶은데 여기서는 안 되거든. 다시 너희 집, 시골로 가겠어. 실험도구들도 전부 거기에 남겨뒀잖아. 너희 집에서는 적어도 틀어박힐(запереться) 수는 있거든. 아니, 여기서는 아버지가 <내 연구실을 네 마음대로 쓰렴 ― 아무도 너를 방해하지 않을 테니>라고 되뇌지만 실은 한 발짝도 떨어지지를 않아. 게다가 아버지를 피해 틀어박히는 것도(от него запираться) 어째 좀 창피하고. 뭐, 어머니도 그렇고. 벽 뒤에서 어머니 한숨 소리가 들리는데 막상 나가면 할 말이 전혀 없어.(С7: 126)  

 

 

실제로 바자로프는 아버지의 서글픈 절규(“Три дня... Это, это, после трех лет, маловато; маловато, Евгений!”(С7: 127)에도 아랑곳 않고 이튿날 곧장 짐을 챙겨 떠난다. 의사임에도 (아들과는 달리!) 신심이 깊은 바실리와 그의 헌신적인 아내 아리나, 이들이 아들 앞에서 취하는 태도는 부정과 배반의 숙명을 타고난 자식을 둔 부모의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버렸어, 우릴 버렸어, ― 그가 웅얼댔다, ― 버렸다고. 우리와 있는 게 지루했던 거야. 이제는 이 손가락처럼 혼자, 혼자야!> 그는 몇 번이나 이렇게 되뇌었고 그때마다 집게손가락 하나만 세운 한쪽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때 아리나 블라시예브나가 다가와 희끗희끗한 머리를 남편의 희끗희끗한 머리에 기대며 말했다. <어쩌겠어요, 바샤! 아들이란 원래 출가외인(отрезанный ломоть)인 걸. 그 애는 무슨 매처럼 내키면 날아왔다가 또 내키면 날아가네요. 하지만 나와 당신은 한 구멍에 난 버섯(опенки на дупле)처럼 나란히 앉아서 꼼짝도 못해요. 나만은 영원토록 변함없이 당신 곁에 있을 거예요, 당신도 그럴 테고.>(С7: 128)

 

 

잠깐 부모의 품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 영원히 안착하는 아르카지가 아버지와 함께 전원시의 세계를 이어간다면, 바자로프는 태어난 곳을 영원토록 부정하고 배반하도록, 그리하여 죽을 때, 심지어 죽기 위해 마지막으로 고향집에 돌아가는 운명을 타고난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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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그러나 이미 반생이 끝난 시점에서 "나는 신사가 되고 싶어!"라고 외치는 핍보다 "영원히 습지 대장간에 살어리랏다~"라고 말하는 조에게 더 공감하게 되는 건, 뭐, 인지상정 아니겠나.(이 진부함이여!) 그러나, 이 아이는 어떡하나.  

 

 

  지난 금요일 부산 해운대 근처 모백화점 문화센터 강의 끝난 직후, 아이 데리고 바다로 나갔다. 부산에서 아주 오래 살았지만, 해수욕장 다니는 어린 시절을 보내지 못한 까닭에 성인이 된 이후에도 이렇게 드문드문 찾는다. 그것도 그냥 이렇게 보기 위해서. 말하자면 나는 바다 너머의 세상을 본 셈이지만(과연 그런가...?) 아이는 어쩌나, 바다로 나갈 건가... 살짝 들어올린 발을 내려 놓고 그냥 엄마 옆에 그냥 있어라, 나가 봐야 별 수 없단다(아들의 삼십여년 뒤 미래는 바로 그 아빠의 현재)...-_-;; 이렇게 말하는 나는 너무 비관적인 엄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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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대 초반의 가난한 한 문청이 얄팍한 소설 한 권을 들고서 문학사의 한 복판으로 성큼 들어섰다. 1840년대 중반, 벨린스키를 비롯한 러시아 문단을 깜짝 놀라게 한 이 소설, <가난한 사람들>이다. (노문학계에서 드문 명민하고 발빠른 학자인 석영중 선생의 번역이 빛을 발한다.)

 

 

 

 

 

 

 

 

 

 

 

 

 

 

기껏 스물 대여섯의 청년이 왜, 자신의 첫 문학적 페르소나로 사십대(그것도, 다시 읽으며 계산해보니 약 47세, 헐헐: 17세에 일을 시작, 대략 삼십년 근무)의 후줄근한 찌질남으로 골랐을까. 아마 '가난'에 이런 나이(중년-노년)와 처지(홀아비)까지 덧붙여 모종의 효과를 노렸을 법도 하다. 아니면 자신의 모습을 최대한 감추려는(실상은 그렇기에 더 드러난단다^^;;)  속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도키의 기라성 같은 대표작, 가령 <카라마조프...>를 비롯한 장편을 다 읽은 다음 <가난한 사람들>을 접하면 그 단순 소박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터이다. 그러나 고골 이후 문학적 상속자를 찾지 못하고 있던 1840년대의 여타 소설들과 비교한다면, 처음 읽은 그 시절부터 마흔이 되어 다시 읽는 지금 이 순간까지 나를 눈물 짓게 하는 그 명장면(늙은 포크로프스키가 죽은 아들의 관을을 쫓아가는~)을 포함하여,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정녕, 그대는 천재가 된 것이 아니라 천재로 태어난 것이었구료~!

 

모스크바 빈민구제병원의 군의관의 아들로 태어난 도..키의 밑천은 말하자면, 자신의 주먹(머리)뿐이었다.  명문 축에 들었던 학교(공병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말단 공무원(무관)이 되었던 그가 모든 걸 다 버렸을 때는 얼마나 큰 야망이 있었던 것이냐. 요즘으로 치면 사법고시(적어도 임용고시) 합격하고 연수원 다 다니고 멀쩡하게 발령 받은 다음 옷 벗고 나오는 격. 이 모든 것을 호기롭게 다 버린 이십대의 청년이 소설을 쓴다. 소설을 통해 그가 얻고자 한 것은 무엇이냐. 바로 데뷔작의 제목에 들어있는 바, 우선은 '가난-인간'의 탐구, 나아가 그런 존재의 구원이다. 소설 써서 세계를 구원하고자 한 이 청년, 과연 돈키호테의 러시아버전이다.(그의 [백치]의 밑텍스트 중 하나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이다.)

 

 

 

 

 

 

 

 

 

 

 

 

 

 

공병학교 재학시절 형에게 보낸 편지에서 "인간이라는 비밀을 연구하고 있다(-싶다)"(?)라고 당차게 쓴 그는 결국, 평생을 그 일에 바친다. 아직 이십대, 그는 정녕 많은 소설을 써댄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과 달리, 반응이 신통치 않다. <분신>은 당시로서는 구닥따리로 여겨진 환상적 요소 때문에 비난 받고 좀 뒤에 나온 <여주인>(<백야>, <약한 마음> 등등)은 아주 통째로 쓰레기로 여겨진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혹평(!)이라도 있었지만, 그 이후에는, 소위 악플보다 무서운 무플에 맞딱뜨린다. 그럼에도 도...키는 엄청 썼다. 소위 '불온' 죄로 당국에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기 직전까지 그가 매달렸던 작품은 바로 저것, <네토치카 네즈바노바>(미완)까지.

 

만약 도...키가 사형을 당했다면 아마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작가로 문학사에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고, 8년 동안의 유형 생활 이후 문단에 복귀한다. 그가 시베리아에서 땅 파던 동안 약관의 톨스토이가 자전 삼부작을 들고 문단에 나타나주신다. 투르게네프도 꾸준히 소설을 쓰고 계신다.  별 재미를 못 본 두 편의 희극 소설과 <상처 받은 사람들> 같은 작품을 거쳐 <죽음의 집의 기록>, 무엇보다도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통해, 그는 멋지게 재기에 성공한다. 사람이 한 번 뜨기는 쉬워도 두 번 뜨기는 어려운데, 다시금, 그대는 정녕 천재였구료~

 

 

 

 

 

 

 

 

 

 

 

 

 

 

 

물론 <지하...>만 갖고 게임이 될 리 없다. 조만간 톨스토이가 써낼 장편들을 보라. 기껏해야 중인 계급(잡계급)이었던 도키가 앞으로, 부유한 백작 작가와 나란히 써내게 될 장편은 러시아문학뿐만 아니라 세계문학의 지형도를 바꿔놓는다. 적어도 이 정도의 소설은 나와주셔야.

 

 

 

 

 

 

 

 

 

 

 

 

 

 

 

<죄와 벌>은 <지하...> 직후에 쓴 작품이다. <죄와 벌>에 초점을 맞추면 <지하>는 (실제에 대한) 이론(테제)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한 시절 열광했던 소설-이론이다!) 그리고 이후의 도..키는 우리가 아니는 저 러시아의 대문호 도..키이다. 천재란 한 가지 일에 끊임없이 노력을 경주할 수 있는 재능, 이라고 니체가 (당최 어디서??) 말했던가. <가난한 사람들>과 <죄와 벌>을 비교해보라. 내 안의 천재(성)가 운명이 선사한 시련과 역시나 타고난 집중력, 투지와 더불어 이렇게 커가는 것이다. 그러니 다시금 그대는 천재였구료~

 

겸사겸사, 원고 때문에 디킨스를 읽는다. 하우저는 "가난에 대해 (잘) 쓸 줄 알았던 작가"(?)로 도..키와 더불어 디킨스를 꼽았다.(그랬지 싶다.) 그는 디킨스의 대중성-위대성에 대해서도 지적한 바 있다. 실제로도 두 작가는 많이 닮았다. 엄청난(=대하소설) 규모의 소설, 대도시 작가(런던/페테르-크), 가난과 빈민의 묘사, 소위 중치들의 야망(가령, '핍'의 '잰틀맨' 되기), 연재 소설의 형식(고로, 독자들의 반응에 예민하다), 저널리즘적 지향 등등. 도..키는 그 나름 디킨스를 좋아하여 그의 출세작인 <피크위크(픽윅) 페이퍼스>를 자신의 저널에 싣기도 했다.

 

 

 

 

 

 

 

 

 

 

 

 

 

 

 

 

그러나 나 같은 도..키 독자의 눈에는, 둘은 너무나 다른 차원의 작가이다! 디킨스의 저 순진무구한 세계란. 그의 소설 속에는, 적어도 도..키와 비교하면, 단세포들만 살고 있는 거 같다. 그래서 그 많은 방대한 저작에도 불구하고 내게 디킨스는 (이것이 내가 처음 읽은 그의 작품인데) <크리스마스 캐롤>의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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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의도한 바는 아니나 한 학기 내도록 도..키만 줄창 읽게 생겼다. 오, 기꺼이~!

이 참에 지난 10년 동안 쓰고 발표한 논문들, 그에 관한 글도 정리해 볼까 한다. 그러고 보니 나는 마흔이 다 되도록 연구서 하나 내지 않은 얼치기 학자이다. 자리를 못 잡은 거야 운 탓도 조금 해볼 수 있지만, 연구서를 못 쓴 것은 순전히 게으름의 소치이다. 나태는 악덕의 근원.

 

결혼과 출산 전의 내가 아주 부지런한 인간이었던 것은 아니나(많은 시간을 잠과 그와 유사한 활동에 바쳤다!) 애 엄마, 며느리, 동서, 뭐 이런 명찰을 달고 보니 정말, 어디, <모모>에라도 들어가 시간을 훔쳐(빌려)오고 싶은 심정이다. 그 와중에 오랜만에 고향을 그야말로 잠깐, 다녀왔다. 

 

이 서재에 걸려있는 저 사진. 2009년, 그러니까 결혼 전 여름에 찍은 것인데, 그로부터 거의 정확히 5년만이다. (이번에 알았지만) 해발 7백 미터가 넘는 고산지대, 그러니까 덕유산 거의 꼭대기에 얹힌(ㅠ.ㅠ) 마을이다. "엄마 고향 갈 거야." 이 말에 "고양이는 야옹하고 울어"라고 대꾸하는 아이까지 붙었으니 다소간의 감회가 없을 리 없다. 소싯적 소박한 꿈을 다시 한 번 상기해본다. 대학 때는 쉰 살이 되면 완전히 귀향하려고 했는데, 허걱, 10년밖에 안 남았으니 이를 어쩌나, 5년 남짓만 더 늦추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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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7일은 아이가 태어난 지 정확히 3년째 되는 날이다. 그 전날에  지난 7월 25일 걷다가 넘어져 팔꿈치 골절상을 입은 아이가 정확히 6주간 하고 있던 깁스를 풀었다. 딸을 원했던 내가 아들을 낳고 몇 위안으로 삼은 것 중 하나는, 아들-남자는 막 키워도 된다, 라는 것이었다. 과연 그런가. 아직도 걸음걸이에 균형감각이 좀 없는 아이를 지켜보며 늘 마음을 졸인다. 

 

옆집의 큰 아들이 지난 봄인가에 입대했고 얼마 전 첫 휴가를 나왔더라. 뽀얗던 얼굴이 거뭇거뭇해지고 살집도 좀 탄탄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언젠가는 남자면 누구나 군대를 가야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 때인데, 시력이 나빠 병역을 면제 받은 불어 선생님은 엄청난 열등감을 갖고 있었고 자신의 인생의 모든 불운을 소위 남자 구실 못한 것(군 면제!)에서 찾곤 했다.

 

그러나 나는 주변의 선후배, 친구들(이제는 대개 다 사오십대인데) 중 군역 면제자에게서 이런 열등감은 거의 못 봤다. 대부분이 우스갯소리대로 (사람이 아들이 아니라) 신의 아들에 가까운 출생에, 더불어 사회 생활에서도 아무런 불이익 없이 승승장구한다. 어지간한 중산층만 해도 군대를 보내긴 보내더라도 어떻게든 다 수를 쓴다. 그럼 누가 군대에 가는가. 답은 뻔하다.

 

 

 

 

 

 

 

 

 

 

 

 

 

'악의 평범성(진부함)'. 아렌트는 나치 전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얘기를 하는 것이지만,  '평범'한 우리가 범하는 '평범'한 악이 놀라울 따름이다. 보이는 것을 보지 않고 들리는 것을 또한 듣지 않은 것. 이것이 8, 90년대도 아니고 2014년의 일이라는 것이 또한 놀랍다. 가해자(들)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런 끔찍한 폭력을 연일 목격하면서도 침묵한 다수이다. 이런 식의 말에 대다수는 군대의 실상을 모르기 때문, 이라고 말한다. 그럴 거다. 그것이 더 무섭다. 군대는 원래 다 그래, 라는 것. 가만히 있으면 오히려 크나큰 악의 주체가 된다는 무서운 역설이 또 한 번 상기된다. 이 점에서는, 역사적 틀거리가 다를 뿐, 아이히만의 얘기와 별반 다를 바 없다. 한 시절 우리를 경악케 한 '고문기술자'가 자신을 극도로 성실하고 유능하고 충직한 공무원으로 생각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 다음. 정말 '악마'가 있는 것일까. 사회적으론 '범죄와 환경'이라는 물음. 즉, 환경이 백지 상태의 인간을 범죄자로 만드는가, 아니면 정녕 범죄자의 영혼을 타고 난 자(=악마)가 따로 있는가. 이 물음은 물론 쉽게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이 소설은 이 문제를 세계문학의 어떤 소설보다 더 정면에서, 깊이 다루고 있다.

 

 

 

 

 

 

 

 

 

 

 

 

 

 

 

 

표도르를 죽인 것은 나중에 밝혀지는바, 그의 사생아 스메르쟈코프이다. 이 어두운 영혼은 애초부터 악마의 자식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굴욕적인 성장환경에 의해 그런 존재로 키워진 것일까. 전자의 가능성도 크지만 스메르쟈코프를 둘러싼 환경이 너무도 비우호적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소위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상황. 소설의 초반부, 화자는 그를 크람스코이의 <관조자>에 비유하며 여러 가능성을 제시한다. 간단히, 그는 성자(순례자)가 될 수도, 방화범(살인자)이 될 수도 있는 인물이라는 것. 소설은, 전반적인 플롯의 흐름인바, 결국 이반을 살리기 위해 그를 죽이는 쪽으로 간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말라. 우리는 마땅히 영웅도, 마땅히 악인도 아니다. 평범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말라. 어릴 때 같으면, 가령 연애-사랑도 그렇고, 혹독한 시험을 거쳐야만 그 진정성이 증명된다고 생각했을 법하지만, 어림 없는 소리. 그로써 증명되는 건 차라리 우리의 나약함(그러니까 평범함)일 뿐이다.

 

군대는 원래 그런 곳이다, 라는 우리의 편견이 제발 불식되어야 마땅하다. 사람을 때리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세계 속에서는 누구나 때리고 누구나 맞게 된다. 그 '누구'의 자리에 누가 들어가느냐, 만 문제일 뿐.  즉, 언젠가 무슨 심리학 교수가 시행했던 시험이 보여주듯, 누가 '간수'냐, 누가 '죄수'냐, 그 역할이 중요할 뿐이다. 어제 맞았던 자가 내일은 때리는 자가 될 것임은 자명하다. 

 

정반대로, 동일한 상황에서 영웅이 태어나기도 한다. 어쩌면 그건 아주 사소한 일에 의해 발생하는데(내가 본 것, 들은 것을 그대로 말한다, 라는 것), 이 대목이 또한 악의 탄생과 함께 흥미로운 대목이다. 지금 읽고 있는 이 소설. 평범한 의사 리유, 재수없이(!) 오랑시에 감금돼 버린 파리의 신문기자 랑베르, 페스트 때문에 체포의 위기를 모면하게 된 연금생활자 코타르, 당최 뭘 하는 놈인지 알 수 없으나 묘하게 매력적인 타루, 고리타분한 하급 공무원의 전형이되 돈키호테적인 조용한 광기(?)를 보여주는 그랑 등.

 

 

 

 

 

 

 

 

 

 

 

 

 

 

 

카뮈의 <이방인>을 사랑하는 나에게 <페스트>는 항상 다분히 작위적, 혹은 추상적으로 여겨졌다.(처음 읽은 것은 고등학교 체육시간, 선생님이 없는 틈에, 운동장 구석에서였다.)  '공분', 더 정확히 '연대'를 촉구하는 이 소설이 완연한 삼십대로 접어든 카뮈의 사유와 고뇌는 충분히 느껴진다. 냉소적인 청년 뫼르소가 한결 성숙하고 차분한 리유-타루로 돌아온 것이다. 이 소설은 분명히 카뮈의 최고작임에도, 거참, '소설'로서는 2프로 부족한 느낌이 든다.(무엇보다도, 재미가 없다..ㅠ.ㅠ) 특히, 그가 아끼고 각색하여 연극으로 올린 이 소설과 비교하면 더더욱 그렇다. 

 

 

 

 

 

 

 

 

 

 

 

 

 

 

<악령>은 알다시피 그 출발에 있어서는 정치소설이다. 표트르 베르호벤스키의 범죄(인쇄기를 빌미로, 오인조를 탈퇴하려는 샤토프를 살해, 시신 유기 등)가 발각되는 것은, 자신의 죄를 견디지 못한 '나약한' 인간(들) 때문이다. 럄쉰, 비르긴스키 등. 살해에 가담은 했으나(직접 죽였다고 말하긴 힘들다 - 총을 쏜 것도, 시신을 유기한 것도 모두 표트르), 또한 표트르의 권위(나아가 폭력)에 압도되긴 했으나, 결국 그들은 '이겨내지' 못한다.  도스토예프스키라면 바로 이 무너짐을 통해 신의 뜻이 현현한다, 라고 했을 것이다. 이른바 양심, 윤리, 도덕감 등. 극한 상황에서 우리를 인간이게끔 하는 것은 바로 이것, 최소치의 윤리이다. 혹자(이 경우엔 표트르)의 눈에는 그것이 나약함의 표식처럼 보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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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성>을 다시 읽는다. 대학 시절부터 읽어온 손 때 묻은 범우사판(박환덕 역 - 내가 갖고 있는 것은 더 옛날 것, 빨간 색 표지이다)을 잠시 옆으로 밀쳐두고 편 것은 펭귄판 <성>(홍성광 역)이다. 너무 술술 읽히는 것은 내가 많이 큰 탓이냐, 카프카가 모던/트렌디해진 탓이냐. 아무래도 번역의 공이 적잖은 것 같다. 그러나 이 공이 다소 유감스럽다. 카프카는 결코 술술, 읽히는 작가가 아닌데, 그의 꼬여 있으되 엄정한 문체를 너무 풀어놓았다는 느낌, 지울 수 없다. 그래도 이 판본으로 계속 읽는다. 술술 읽히니까, <성>을 처음 읽었던 대학 시절보다는 훨씬 빠른 속도로 완독한 듯하다. 그러나, 강조하건대, 이 술술이 마뜩치 않아 다른 판본을 펴본다. 

 

 

 

 

 

 

 

 

 

 

 

 

 

카프카 전집을 낸 솔출판사의 <성>(오용록 역). 이 판본 역시 유감이다. 카프카가 아무리 난해한 작가라곤 하지만 그의 문장이 이렇게 뻑뻑(?)하지는 않을 터. 딱딱함과 건조함의 유려함, 이랄까, 그런 맛이 전혀 없다..ㅠ.ㅠ 소설의 전반적인 흐름을 잘 못 읽어낸 것 같은, 또한 문장과 문장 사이, 즉 문맥을 거의 살려놓지 못한 것 같은 아쉬움, 지울 수 없다.(원문과 꼼꼼히 대조해 보면 오역이 무척 많을 것 같다..ㅠ.ㅠ) 솔직히 이 경우 아쉬움은 거의 절망에 가깝다. 이 판본이 전집의 일부이고 또 엄선된 전공자의 번역기 때문이다.

 

 

 

 

 

 

 

 

 

 

 

 

 

예를 한 번 들어보자. K의 눈에 들어온 성의 모습을 적은 부분. 괄호는 쪽수이다. 판본이 더 있으나 구하기도 힘들고 원고 마감일이 얼마 남지 않아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한다.

 

-범우사판

 

성은 여기 먼 곳에서 보아도 K의 기대와 대체로 일치하는 것이었다. 옛날 기사의 성도 아니고 화려한 현대식 저택도 아니었다. 그것은 옆으로 퍼진 건축물로, 몇 개의 3층 건물과 빽빽이 들어 찬 많은 낮은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것이 성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더라면, 작은 도시쯤으로 오인했을지도 모른다. 탑이라곤 단 하나밖에 눈에 띄지 않았는데, 그게 주택 건물에 붙은 건지 아니면 교회에 붙은 건지 분간할 수 없었으나, 탑 주위엔 까마귀 떼들이 빙빙 돌고 있었다. // K는 계속해서 걸어갔으나, 눈은 역시 성을 향하고 있었고 그 밖에는 그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가까이 감에 따라 성은 그를 실망시켰다. 시골집들이 밀집해서 이루어진 아주 초라한 소읍(小邑)에 불과하여서, 겨우 사람들의 눈을 끄는 집이라면 아무도 이 시골집이 모두 돌로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칠은 이미 벗겨졌고, 돌도 허물어질 것처럼 보였다. K는 문득 고향 마을을 생각해 보았다. 그 고향 마을도 이런 성에 비해서는 손색이 없었다. 성을 시찰하기 위한 것뿐이라면, K는 일부러 먼 길을 올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 정도라면 이미 오랫동안 못 가 본 고향을 다시 한 번 찾아보는 편이 훨씬 현명한 행동이었을 것이다.(24) 

 

-펭귄판.

 

대체로 성은 멀리 이곳에서 보아도 K의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유서 깊은 기사의 성이나 새로 으리으리하게 지은 건물이 아니라 옆으로 넓게 퍼진 시설물로, 서너 개의 3층 건물과 오밀조밀하게 붙어 있는 수많은 나지막한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것이 성이라는 사실을 몰랐으면 조그만 도시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주거용 건물에 딸려 있는지, 아니면 교회에 딸려 있는지 알 수 없는 탑 하나가 눈에 띄었을 뿐이었다. 이 탑 주위를 까마귀 떼가 빙빙 맴돌고 있었다. // K는 성을 쳐다보며 계속 걸어갔다. 그 밖에는 어떤 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가까이 가보고서 그는 성에 적이 실망하고 말았다. 그것은 시골집으로 이루어진 아주 형편없는 작은 도시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모든 게 돌로 지어졌다는 것만 돋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색을 칠한 게 진작부터 벗겨져 있었고, 돌이 부서져 떨어질 지경이었다. K는 얼핏 자신의 고향 작은 도시를 떠올려보았다. 그곳도 소위 성이라는 이것에 비하면 그다지 못하지 않았다. 단지 성을 시찰하는 게 중요한 문제였다면 굳이 긴 여행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벌써 가본 지 오래된 옛 고향에 다시 한 번 찾아가는 게 더 현명한 처사였을지도 모른다.(17)

 

- 솔출판사판

 

이곳 멀리서 보기에 성은 K의 예상과 대체로 일치했다. 그건 오래된 기사의 성도 새로 지은 호화 건축도 아닌, 이층은 몇 안 되지만 다닥다닥 나란히 붙은 수많은 저층 건물들로 이루어진 광대한 건축물이었다. 그게 성이라는 걸 몰랐다면 하나의 읍으로 보았을는지 모른다. K의 눈엔 탑 하나만이 보였는데 그게 주택 건물의 일부인지 교회 것인지는 분간할 수 없었다. 그 주위로는 까마귀떼가 날고 있었다. // K는 오직 성 쪽을 쳐다보며 어떤 일에도 신경 쓰지 않고 계속 걸어갔다. 그러나 점점 가까이 갈수록 성은 그의 기대에 어긋나는 그저 초라하기 짝이 없는, 시골집들이 옹기종기 모인 소읍이었으며,  별다른 점이라곤 모두 돌로 지어진 것 같다는 것인데 그나마 칠은 벗겨진 지 오래고 돌마저도 부스러질 것 같았다. 언뜻 K의 조그만 고향 모습이 떠올랐는데, 이따위 성에 뒤질 것이 별로 없었다. K가 오직 구경 삼아 온 거라면 오랜 발품이 아까웠을 것이고 그럴 바엔 매우 오랫동안 가보지 못한 옛 고향을 찾아가보는 게 더 영리한 일이었을 것이다.(16-17)

 

*

 

개인적으로 제일 잘된 번역을 꼽으라면, 박환덕 선생의 <성>인 것 같은데(어릴 때 독일어 수업 들은 기억이-_-;;), 이 사실이야말로 유감의 이유이다. 청출어람은커녕...-_-;; 

 

원래 번역비평은 고사하고 남의 번역을 두고 이렇게 '뒷담화'처럼 씹어대는 건 (꼭 나 자신의 열패감을 엉뚱한 데 푸는 것도 같고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처럼 보일까봐 -_-;;) 즐기지 않지만, 원고를 쓰면서 인용문을 옮기던 중 분노(!)하여 몇 자 적는 것이다. 카프카를 좋아하는 독자로서 분노의 권리는 충분히 있다고 본다.

 카프카가 국내에 번역, 소개된 지 오래된 만큼 이제 그냥 번역은 의미가 없다. 잘 된 번역이 필요하다. 독문학자들이 분발해주었으면 한다. 한데 이 전공자들이야말로 자신의 게으름을 꼬장꼬장한 선비정신인 양 착각, 엉터리 번역을 내놓는 주범이니 더 유감스럽다.

 

최근에 새로 읽은 카프카의 여러 소설 중 제일 마음에 들었던 번역은, '심판'에서 '소송'으로 바뀐 제목까지 포함하여, 이것. 강렬한 비주얼을 자랑하는 문학동네의 표지도 마음에 든다.  (물론 이것도 예전에 읽은 판본은 범우사판이다.)

 

 

 

 

 

 

 

 

 

 

 

 

 

*

 

번역. 처음에는 어린/젊은 학자로서 공부한다는 마음을 갖고서, 또 소설가로서 고전을 필사한다는 마음을 갖고서 시작했던 일이다. 한데  내 이름 달고 출간된 번역서가 점점 쌓여가고 그 중에 베스트/스테디셀러가 적잖이 있다 보니 점점 더 예민해지는 건 당연하다. 외국어 공부를 원래 좋아했지만 그 갈증 역시 점점 더 커져간다. 하지만 역시 중요한 건 남의 말이 아니라 우리말. 남의 말도 저들에겐 우리말이다.

 

원문이 소중한 만큼이나 우리말 번역본이 소중하다. 번역은 언어 시스템을 통째로 옮기는 것일 텐데, 쟤가 저렇게 쓰고서 어떻게 세계문학사에 남았겠냐, 라는 물음을 낳는 번역은 결코 좋은 번역이 아니다. 차라리 번역 자체를 잊고 작품 자체에 몰입하도록 만드는 번역이 좋은 번역이 다. 어느 번역가 선생의 말대로 번역가는 정녕 '그림자' 같은 존재, 어쩌면 그래서 슬픈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보통 박사/교수 번역가들이 자신을 옹호하는 말 중에, 자기는 외국어는 잘 아는데(하는데) 우리말이 부족해서(혹은 윤문하는 것이 귀찮아서), 라는 식의 거만한(!) 변명이 많다.(그러곤 원문을 들이민다.) 이는 단연코, 헛소리이다. 훌륭한 우리말 번역본을 낸 사람 중 해당 외국어를 잘 모르는 번역가는 없다.  번역을 학자나 교수가 하기엔 너무 성가신 '허드렛일'쯤으로 생각한다면 하지를 마시고.

 

 

덧붙여, 소설가야 소설 못 쓰면 자기 혼자 망신이지만(그리고 출판사를 찾지 못한 원고를 그냥  모셔두면 되지만), 불성실한 번역을 내놓는 번역가는 죄인이다.  행여 나도 그런 죄를 범해버린 건, 또 범하고 있는 건 아닌지, 번역가로서, 또 전공자로서 새삼, 발이 저릿,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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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염먹는고흐 2014-10-05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송은 문동판이 좋은 번역이었군요. 감사합니다.

유주 2015-02-23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포스팅 감사합니다. 이렇게 전문적으로 포스팅하시니 재밌게 읽었네요. `불성실한 번역을 내놓는 번역가는 죄인이다`라는 말에 크게 동감합니다.

2017-09-08 15: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방학, 때아닌 학구열에 불타고 있다. 이런 낯뜨거운 표현을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것은 실상, 사정이 여의치 못하기 때문이다. 9시 15분 경에 셔틀버스를 타는 아이는 2시 5분 경에 돌아온다.(한 번은 1시 49분에 도착한 적도 있다 -_-;;) 5시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불태우는 학구열은 확실히, 24시간 내도록 공부를 할 수 있었지만 실은 하릴 없는 호작질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던 지난 날의 그것과는 다를 수밖에. 뭐든 그렇지만, 아주 잘하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공부가 제일 쉽다. 책만 상대하면 되니까.

 

방학을 전후하여 보는 책은 20세기러시아소설과 그 관련 연구서들. 책의 목차에 따라 <닥터 지바고>, <거장과 마르가리타>,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등 세 권. 나보코프의 소설(<절망>)은 작가와 작품에 대한 각별한 애정 때문에 따로(망명문학) 분류한다.

 

 

 

 

 

 

 

 

 

 

 

 

 

 

 

이들 작품 각각에 대한 얘기들은 더러 했지만 최근 흥미를 갖게 된 것 중 하나는 스탈린이다. 세 작가, 세 작품 모두 어떤 식으로든 그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

파스테르나크는 소위 동반자 작가로서 소비에트에서는 (다시금!) 소위 '내적 망명'의 인생을 살았던 작가이다. 그래도 그가 추방이나 숙청당하지 않고 살아남은 것은 뭐랄까, 시쳇말로 은둔형 외톨이(??), 뭐, 이런 것이었기 때문인 듯하다. '반-체제' 운동도 뭔가 강한 의지와 욕망이 있어야 하지, 파스테르나크(지바고)는 문학사적 계보로 보자면 잉여 인간의 소비에트 버전인지라, 역시나 뭐랄까, 나를 그냥 잡아잡수쇼, 내 배를 째든 말든 알아서 하쇼, 뭐, 이런 식의 입장이었던 지라 스탈린도 그냥 내버려두었던 듯하다. 그와 <지바고>의 출간, 노벨상 수상 등을 둘러싼 스캔들에도 스탈린이 물론 개입되었을 법하다.

 

불가코프의 경우는 좀 더 복잡한데, 스탈린은 그에게 가해자, 박해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를 싫어하는 여러 작가들(작가동맹 등)의 비난과 공격으로부터 그를 지켜준 비호자에 더 가까운 듯하다. 이 오묘한(불편하지만 불가피한) 공생 관계를 불가코프는 루이 14세와 몰리에르의 관계에 빗대어 표현한 바 있다([몰리에르/위선자의 밀교]). 소설가이기 이전에 극작가였던 그의 작품, 즉 연극을 스탈린은 제법 좋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얼핏 엘리자베스 여왕과 셰익스피어의 관계가 연상된다.)

 

 

  

 

 

 

 

 

 

 

 

 

 

 

솔제니친과 스탈린은 여러 말이 필요 없다. 스탈린 때문에 소위 수용소 인생을 살게 된 그는 다시금 스탈린 때문에(덕분에!) 다시금 소위 수용소 문학(!)의 대가가 된다. 기본적으로 기록문학, 고발문학, 선전문학인 그의 소설이 한시절 어마어마한 대작의 대접을 받은 건 작가의 문학성과 필력 때문이라기보다는(혹은 그만큼이나) 스탈린 체제가 불러일으키는 흥미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솔제니친 소설, 별로 안 좋아합니다..-_-;; 사람은 참 좋았던 것 같은데요.) 데뷔작이자 대표작, 출세작인 <이반...> 외에 많은 소설을 썼는데, 대체로 다 길다. 국내에 출간된 <수용소군도>, 저 아래 판본은 물론, 축약본이다.

 

 

 

 

 

 

 

 

 

 

 

 

 

 

한 시절의 문학 전체를 쥐고흔든 스탈린은 당최 뭐냐. 모든 독재자들이 그러하듯, 스탈린은 그 자체가 소설 속 주인공으로 연구해도 될 만큼, 더불어 그의 인생을 한 편의 장편소설로 봐도 될 만큼 흥미롭다. 우리에겐 (하고많은^^;;) 포악하고 괴상한 독재자로 알려져 있지만, 최대한의 객관적 시각을 유지하자면(아래, 저 책에 따라), 그는 어쨌거나 몇 번이나 사선을 넘나든 열렬한 혁명가였고, 아주 독창적인 사상을 내세운 건 아니지만 아무튼 몇 권의 저작을 남긴 사상가-지식인이었고, (레닌이 혁명을 일으킨 데 이어) 혁명 이후의 러시아를 거의 30년 동안 통치한 정치가였다.(물론 이 모든 것과 더불어, 피에 굶주린 살인마에 사이코, 였던 것 같긴 하다.-_-;;)

 

 

 

 

 

 

 

 

 

 

 

 

 

 

(겸사겸사, <교양인>의 문제적 인간 시리즈 아주 맘에 든다! 요즘 같이 열악한 출판 환경에서 네차예프 전기까지, 고마운 일이다.)

 

독재자 스탈린에 앞서 혁명가 스탈린은 (아마 그 이후에도 얼마 동안) '행동하는 지성', 즉 '문과 무'를 겸비한, 적어도 그러려고 한 자였다. 이 역시, 전통인가. 레닌이 많은 저작을 남겼듯, 스탈린 역시 그러했음을 앞서도 언급했다. 이미지를 가져올 수 없는데, 아무튼 그의 글들이 우리 말로 번역된 건 (짐작했던 대로) 8, 90년대이다. 도서관에서 빌려왔다. 이제 읽는 일만 남았다.-_-;; 손을 대니 책장이 바스라질 것 같고, 몇 장 넘기지도 않았는데 손끝이 텁텁(?)해지는 것이 정녕 8,90년대는 역사 속의 시간이구나...   

 

 

 

 

 

 

재색을 겸비하기 힘들듯 문무를 겸비하기 힘들다.(운이 좀 안 맞나? @_@) 그렇기에 더더욱 지금 장안에 화제가 되고 있는 이 영화의 주인공, 이 인물이 떠오른다. 전사(!)이되 동시에 글쟁이, 지식이였던 그. 돌이켜보니, 당혹스럽게도, <난중일기>를 제대로 읽은 기억이 없다.

 

 

 

 

 

 

 

 

 

 

 

 

 

영화 보러 갈 처지는 아니고(다운받아 놓은 것도 못 보고 있으니) 그래서 더더욱, 그 짧은 예고편이 감동적이다! ㅋ "신에게는 아직 열 두척의 배가 남아 있사옵니다." 고작 열 두척 갖고 전쟁에서 승리한 이순신, 그와 붙어 패배한 일본은 뭐냐. 자기들 힘 좀 있다고 옆집 사람 못 살게 구는 건 물론 나쁜 짓이지만(그래서 천벌 받잖아~) 그들에겐 그들만의 히-스토리가 있을 터. 류승룡의 일본어, 맘에 든다 ㅋ 나도 일본어 다시 공부하고 싶다 ㅋ

 

잘 싸운 전사야 많겠지만 전사이되 그 기록을 남긴 자의 수는 많지 않을 법하다. 얼핏 떠오르는 인물은 로마의 마지막 황제이자 스토아 학파의 거두인 아우렐리우스. 어렸을 적에도 '훌륭한'(!) 사람이 되려고 졸면서도 열쉼~히, 꾸역꾸역 읽은 기억이 있다. 어쩌면 이런 문화적 토양 덕분에 '고뇌하는 우유부단한 전사', 즉 햄릿이라는 인물이 탄생했는지도 모르겠다. 기본적으로 칼잡이(!)임에도 시인(!)인 그.

 

 

 

 

 

 

 

 

 

 

 

 

 

 

 

 

 

마지막, 분단 국가인지라, 남자로 태어난 우리의 소중한 아이들이 의무적으로 군대에 가야하는 일이 앞으로 계속 될 법하다. 본의 아니게(?) 아들의 엄마가 된 나의 소원은, 진정, 통일이다. 어떤 수사를 갖다 붙여도 군역은 힘든 일, 그래서 의무로 강요되는 일이다. 뉴스를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소리는 "아니, 지나 죽이지, 왜 남의 집 귀한 아들을 죽여!" 였다. 어찌된 영문인지 잘 모르겠지만, 이 쪽 저 쪽 다 남의 집 귀한 아들이다. 왜 이런 불행한 일이 계속되는지. 사람이 마흔이 돼서도 없던 정치의식이 이런 식으로도 생기는가 보다 싶은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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