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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만한 사람은 다 알았을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망할 것임을. 작년인지 재작년인지 모심사장에서 만났던 한 국문자의 말대로, '**사는 회생이 불가능할 만큼...' 망가졌다. 참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출판사는 그나마 <이상문학상> 때문에 연명되고 있었다...라고 다들 생각할 것이다. '왕년에는'(! - 세상에 이보다 더 슬픈 말이!) 좋은 책들이 참 많았는데 이제는 쓸 만한 책이 거의 없고 심지어 이 상조차!

 

 

 

 

 

 

 

 

 

 

 

 

 

 

 

 

 

 

 

 

 

 

 

 

 

 

 

아주 오랫동안 이 상은 모든 작가의 로망, 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93년도 이상문학상 <얼음의 도가니>(최수철), 94년 <하나코는 없다>(최윤) 등 문학회 세미나 목록 1순위가 이 책이었다.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단편이 여기 실리는 것만으로도 감격했을 법하다. 젊은 독자들은 비단 수상작뿐만 아니라 여러 수록 작품을 읽으며 현대 소설의 흐름, 방향을 가늠해보고 자신의 나아갈(^^;;) 바를 그려보기도 했다.

 

 

 

 

 

 

 

 

 

 

 

 

 

 

 

대략 위에 가져온 이미지의 작품 정도는 나도 읽었다. 그다음에도 꾸준히 샀다. 수업에서 다루려고 비교적 열심히 읽었으나 도무지 작품이 안 되는 것이다ㅠㅠ 좋은 작품도 있으나 너무 재미가 없기 일쑤고, '잘' 썼다기 보다는 '애'쓴 작품이 많았다. 한 상이 이렇게 망하구나, 하는 슬픔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던 차, 다른 상들이 이 상의 자리를 가뿐히 대체한지 오래다. 단편의 경우, 권위로 치자면 이미 황순원문학상, 현대문학상, 이효석문학상, 김유정문학상 등이 가져갔고, 소위 지형도를 읽기에는 오늘의작가상이 좋다.

 

<이상...> 수상작의 조건 중 하나가 작가의 작품집에 수상작의 제목을 쓰지 않는(못하는) 것, 이었던 것으로 안다. 상 받은 모든 작가들이 동의했다는 것인데, 이상의 얼굴 옆에 자신의 이름과 작품 제목이 붙는다는 사실에 대한 자부심의 방증이기도 하겠다. 최수철의 <얼음의 도가니>는 <내 정신의 그믐>에 수록되었다. 3년씩 발표를(재수록) 못하게 한 줄은 이제야 알았는데(아니, 그 문구가 편집자의 실수로 들어갔다니!!! 이 변명이 더 슬프다!!!)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말하나마나, 나도 등단했을 때 제일 받고 싶은 상이 <이상문학상>이었다.

결국 못 받았고 이제는 줘도 흥~이게 되어버렸다.

나의 단발머리도 윤기가 없고 그저 세지 않은 것, 빠지 않은 것을 감사해야 할 처지.

"그 소녀 데려간 세월이~~~~"

 

무엇이 문제인가.

시간은 흐르는데, 나이는 먹는데, 저 변함없는 도도함이 문제인 것이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변함없음은 결국 퇴행/퇴보를 말한다.

 

'숭고미'가 '추'로 바뀌는 데 몇 년 안 걸렸다.

저러다가 이럴 줄 알았지.

 

*

 

차라리 아주 조현병이나 치매나 그 수준의 질환으로 넘어갔으면 모를까, 그 직전의 상태가 참 무서운 것 같다. 정상과 비정상의 애매한 경계 말이다. 특히, 중증(주로 정신) 질환에 인식 거부증까지(용어를 까먹음-_-;;) 들러붙으면 사태는 정말 심각해진다.

 

"**야, 너 그 약을 매일 매일 꼬박꼬박 먹어라. 그래야 앞으로 더 큰 실수를 막을 수 있다."

 

아버지의 유산-연금을 받기 위해 최근에 정신장애등급까지 받은 (왕년에는 정말 명민했던!) 한 사촌 오빠에게 큰엄마가 해준 충고였다. '완치'는, 물론, 없다!ㅠㅠ '그래야 병이 낫는다~' 이런 건 없다는 말이다. 백모의 충고는 '더 큰 실수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미 진단되고 인지된, 그래서 열심히 치료-관리 중인 질환보다 더 무서운 것이, 강조하건대, '의증-경계' 단계의 질환이다. 본인이 '노망' 든 줄 모른 채 여전히 '왕년'을 외치며 기세등등 굴며 시대착오적인 말을 늘어놓는 (시/친정)아버지들의 망언을 다들 조금씩 경험하리라. 비슷한 짓을 중년의 나/우리는 또 청장년에게, 심지어 소아청소년(자식들)에게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멋진 중년? 멋진 노년?

꿈도 야무져, 욕심도 많지.

민폐나 끼치지 말자.

출판사든, 문학상이든, 사람-개인이든

망하는 건 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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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7 14: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괭이 2020-01-07 14:53   좋아요 0 | URL
이어령 선생님 시절이야 정말 전성기였을 테고, 권영민 선생님 주간이실 때도 잡지 <문학사상> 월평란에만 언급되어도 감개무량, 감지덕지의 시절이 있었지요.

‘너무 고고해서‘ 망하기론 비단 <문학사상사>뿐만이 아닙니다. 시대 변화에 발빠르게 대응하는 <창비>에 비하면 <문지>도 실은 많이 아쉽고요ㅠㅠ 우리 개개인도 조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2020-01-07 1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괭이 2020-01-07 14:54   좋아요 0 | URL
아, 그것이 사실 ‘저작권‘ 개념이 지금과는 달랐던 시절이라서요. 저도 97년 첫 소설집을 <문학과지성사>(당시로서는 상당히 좋은^^;)에서 냈는데, 계약서도 안 썼답니다^^; <열린책들>에서 나온 첫 번역도, 역시 계약서 쓴 기억이 없어요 ㅎㅎ 저는 지금도 계약서 똑바로 안 읽는다고 남편한테 혼납니다 -_-;

문제는 세상에 달라지고 현재 삼사십대(혹은 더 젊은) 작가들의 세계관이 전혀 다른데, 그걸 출판사가 전혀 모르고 있다는 점이죠 ㅠ
 

 

 

<월간에세이>

 

뇌종양이 일상이 되었다

   

 

 

여동생의 다급한 문자를 확인한 건 8월 말, 저녁이었다. “언니야, ** 뇌종양이란다.” **는 우리의 남동생이다. 문자 그대로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줄 알았다.

뇌종양. 실로 대단한 낱말이다.

남동생은 추석 연휴 직후에 P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다행히도 뇌종양 중 양성인 청신경초종이었다. 작년 봄 현기증이 잦아 메니에르병 진단을 받고 잠시 휴직했다. 올여름, 현기증이 더 심해지고 왼쪽 귀도 잘 안 들리고 입안의 근육도 불편, 심지어 마비되는 느낌이 들었다. 왼쪽 눈의 시력도 급격히 나빠졌다. 정밀 검사 결과 종양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정말 힘든 것은 수술보다 그 이후였다. 귀 뒤에는 10는 족히 되는 흉터가 생겼고 의식이 돌아오면서 각종 통증과 불편이 시작되었다. 왼쪽 눈이 감기지 않아 잠이 엄청난 사치가 돼 버렸다. 밥 한 끼 먹는 것도 고역이었다. 심하게 비뚤어진 얼굴, 영락없이 장애인이었다.

장애인. 더더욱 대단한 낱말이다.

그나마 혼자서 화장실을 갈 수 있는 것이 고마웠다. 수술 전 입원까지 포함하여 정확히 2주일 만에 남동생은 혼자서 병원을 나왔다.

지난 103, 남동생의 얼굴을 보았다. 앞서 열거한 낱말들의 위력에 지레 질려서인지, 썩 괜찮아 보였다. 혼자 고기도 굽고 먹기도 잘 먹었다. 수족을 쓰고 말하는 데 큰 지장이 없는 것이 아무래도 비장애인에 가까웠다. 그러나 아홉 살, 일곱 살 아이가 있는 마흔 살 가장으로서 당장 밥벌이가 큰 문제다. 남동생은 2년 전 재수까지 하며 힘겹게 환경미화원이 되었다. “내가 지금 노가다 하고 있었으면 어쩔 뻔했노.” 수술과 회복 기간에도 자리가 보존되고 기본급까지 나온다.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한 술 담배를 끊었다. 마침 아이 엄마도 마음에 드는 직장을 얻었다. 여러모로, 불행 중 다행이다.

 

혈육이 이렇다 보니, 세상에는 뇌종양 환자가 참 많다. 초점을 소아에 맞추면 소아암 중 가장 많은 것이 백혈병, 즉 혈액암과 뇌종양이라고 한다. 먼 나라 얘기처럼 들리는 질병, 장애, 사고 등이 실은 굉장히 가까이 있다. 물론, 남의 일에 지나치게 감정 이입을 한 나머지 값싼 동정에 사로잡힐 필요도, 미리부터 불안해할 필요도 없다. 다만, 타인의 불행이 많은 경우 인과응보가 아님을 명심할 필요는 있다. 선천적인 중증 장애나 희소병도 뭔가 잘못해서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 ‘운명-팔자라는 말을 떠올려도 좋겠다. 초등특수교사인 여동생이 40를 출퇴근하며 가르치고 돌보는 아이들 대부분이 중증이다. 그들 역시 누군가의 소중한 자녀로서 그런 장애와 질환을 갖고 태어날 궁극의 원인은 없었다. 그냥 그리된 것이다. 아홉 살인 나의 아이 역시 운동 발달이 장애 수준으로 지체되어 있다. ? 이 물음 앞에 한없는 무력함을 느낀다.

2019년을 넘기면 만으로도 마흔다섯 살이다. 질병은 눈먼 장님과 같아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의 뜻을 알겠다. 비단 질병뿐이랴. 어떻든 사람은 다 죽는다. 이건 결코 입방정이 아니다. 필멸의 존재임을 기억할 때 우리의 삶은 더 농밀해질 수 있다. 오랜만에 폴 발레리의 시구를 떠올린다. “바람이 분다!살아야겠다.”(해변의 묘지)

 

*

  

 

 

 

 

 

 

 

 

 

 

 

 

 

 

 

 

'운명-팔자'와 관련하여 떠올린 건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이다. 럭키-포조 커플은 이런 운명의 역동성을 대변한다. 누가 주인이고 누가 노예인가. 누가 정상이고 누가 장애(장님)인가. 모든 것은 운명의 테러-장난의 산물일 뿐이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힘이 빠진다. 더군다나 이번 2학기, 특히 12월은 아이가 '작은 장난'의 희생양이 되어 두 번이나 아프고 있다. 즉, 현재 진행형. 12월 초에는 편도선염으로 고생하더니 마지막주는 기관지염이다. 지난 금요일, 기침이 안 좋긴 했으나 열이 없어 학교를 보냈으나 한시간 남짓 뒤 담임 선생님이 전화를 주셨다. 세아이의 엄마이자 20년 이상 경력의 교사의 촉은 참 정확하다. 두 세시간 뒤 열이 오르기 시작, 항생제와 소염진통제의 도움을 받아도 계속 콜록콜록의 연속이다. 그나마 어제밤에는 열이 나지 않아 한숨을 돌렸으나 '기관지염 -> 폐렴' 이런 도식을 아는지라 조마조마하다. 그래도(아니, 그래서?) 나는 논문을 써보려고, 쓰기 시작하려고 간만에 주말 외출(외근?!)을 감행했다. 덕분에 아이는 아빠와 단둘이 깨가 쏟아지는(반대인가?) 시간을 보내고 있으리라. 질투가 나서 곧 들어가려고 한다. 

 

이 '엄마'라는 자리가 아주 웃긴 것이,,

자기가 딱히 더 잘 하지도 않으면서 왠지 남이 더 잘할 것 같으면 약 오르는 그런 자리다!

 

*

 

아이는 눈을 기다리는데, 이 역시 '팔자-운명'.

 

 

*

 

 

 

 

 

 

 

 

 

 

 

 

 

 

 

 

(제목의 '마담'은 바꾸고 싶당~^^:)

 

'운명-팔자'의 극 사실주의 버전. 너무 사실(주의)적, 심지어 자연주의적이라 소름 돋는 소설. 아주 오래 전 어느 술자리에서 불문학자이자 소설가인 은사가 술에 취해 꼬인 혀로 밑바닥을 보면서 혼잣말처럼 "<보바리>는 진짜(끔찍하게) 잘 쓴 소설이야"라고 말했던 기억이 되살아나고, 이제야 비로소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엠마가 음독했음을, 곧 죽을 것임을 알게 된 후, 샤를르와 그녀의 대화. 엠마의 음독부터 사망까지 무려 17쪽의 분량, 즉 시간이 필요하다! 놀라운 대목이다. 겸사겸사, 나도 매사에, 내가 맡은 모든 역할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난 그래도 한다고 했는데!"

 

 

"왜 그랬어? 누가 시켰어?"

그녀는 대답했다. 

"하는 수 없었어요, 여보."

"“당신은 행복하지 않았어? 내 잘못이야? 난 그래도 한다고 했는데!"

"네... 맞아요...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

그리고 그녀는 샤를르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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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9 1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괭이 2019-12-29 17:58   좋아요 1 | URL
가까운 사람(들)에게 큰일이 닥치면 욕심을 많이 버리게 되더라고요^^; 그게 또 좋은 점입니다. 그런데 왠지 요즘은 하얀 눈 위에 빨간 꽃 이미지가 좋네요 ㅎㅎㅎ
 

 

 

 

 

 

 

 

 

 

 

 

 

 

 

 

오후-저녁에 아이가 공부하는 동안, 유튜브에서 '김영하'를 (몰래, 아웅~) 검색해본다. 최근에 이런 '-짓'을 많이 하지 않아 안/본 것들이 제법 된다. 훑어보던 중, 앗, 이거다! <소설 쓰기를 위해 내가 하는 것> 겨우 4분 32초, 넘나 재미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zaR_FZ-has&t=17s

 

대략 내 식으로(그래봐야 '인용'에 살짝 덧붙이는 것인데) 풀어본다.

 

1) 소설가가 된 이상, 고독해야 한다.

혼자 있어야 한다. 세상과 단절되어야 한다.

너의 고독 속으로 도피하라.

 

2) 사람과 사물을 사랑하라.

답은 일상의 사람과 사물 속에 있다. 계속 응시하다면 보면 뭔가 보인다.

그속으로 파고 들어가라.

사람과 사물을 불러라, 그들에게 이름을 붙여라. (김춘수, <꽃>^^;)

 

3) 악마와 싸워라.

이 악마란 바로, 소설 쓰기를 막는 게으름, 좌절, 절망 등의 정서다.

이건 쓰레기야, 클리셰야, 유치해, 말이 되냐, 예전보다 못하잖아(헉!) 

이런 악마들을 때려부수고 전진!

 

4) 다름 아닌 소설을 써야 하는 단 한 가지 이유에 대해 생각하라

동어반복이다. 소설을 써야 하니까 쓰는 거다.

소설을 쓰지 못하는, 쓰기 싫은 백 가지 이유는 잊으라.

 

5) 가령, 나에게 소중한 물건이 사라진(제자리에 없는) 걸 알았을 때의 황망함.

손톱깎기^^; 그것을 찾았을 때의 기쁨. 손톱을 깎는 기쁨. 깨끗해진 손톱으로, 자 때리는 거다, 키보드를.  

 

* 딱 한 문장만!!! 한 문장만 쓰는 거다, 한 문장인데 뭐 어때!!!

 

어릴/젊을 때는 김영하의 '재주', 즉 천재성과 스토리텔링의 재능이 부러웠다. 여차하면 추리소설도 쓸 수 있는 머리(!) 같았다, 대단함. 아이큐 무진장 높을 거라고, <사진관 살인사건> 읽고 생각함.  그 다음은 담배를 끊은 그 의지력(^^;), 요즘은 요컨대 저런 능력이다. 성실함, 지구력, 장인정신, 그리고 '꼰대'이길 거부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책 시장의 다변화에 발빠르게 대응하는) 하는 프로의식. 한편으론, <여행의 이유> 관련 동영상에서 선보인 그의 공책(다이어리 느낌의)을 보고 탄복했다. 저 아날로그는 뭐지? 저 색연필은? 빌 게이츠가 아이들의 컴퓨터, 인터넷 노출 시간을 최대한 제한하는(비슷하게 페북, 유투브 CEO도 마찬가지) 것과 비슷하리라. 게다가 저 그림 솜씨, 어쩔겨, 헉 ㅠㅠ

 

역시 글은, 소설은,

손가락의 힘으로,

몸와 허리의 힘으로

쓰는 것이다.

 

 * 딱 한 문장만! 나도 딱 한 문장을 썼다,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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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도 나만의 '옥수수밭'이 있다. 옥수수밭 뿐이랴. 들깨밭, 참깨밭, 고추밭, 고구마밭, 심지어 소나무 숲, 대나무 숲, 찔레나무 숲(덤불) 등등 하고 많은 숲과 밭이 있다. 하지만 이런 체험-기억과 소설은 역시 별개인 것 같다. <김승옥문학상...>에 실린 편혜영의 <어쩌면 스무번>을 읽으며 해본 생각이고 가져본 슬픔이다.

 

 

 

 

 

 

 

 

 

 

 

 

 

 

 

<식물애호>를 포함, 세 편을 다 읽었다. 그래도 제일 잘 쓴 건 <식물..>인 것 같지만, <호텔 창문>과 <어쩌면...>도 참 좋았다. 이미지만 놓고 보면 옥수수밭 쪽이, 호텔창문이나 강가보다는 좋았지만, 스토리는 후자가 더 나은 것도 같고, 뭐, 아무거나 다 잘 썼다. 아이들은 어떻게 읽었는지 나중에 답안을 보면 알겠다. 나도 나만의 밭/숲을 잘 가꿔보고 싶은데, 아무 이야기도 날 찾아와주지 않는다. 몸과 마음이 모조리 다 너무 피폐하여 무슨 이야기를 찾아나설 힘도 생기지 않는다. 곁들어, 윤성희, 권여선 소설도 읽었다. 한밤에 놀이터에서 킥보드를 타는 할머니의 이미지 너무 좋았다. (그러나 글자가 너무 빡빡합니다ㅠㅠ) 쓰러진 할머니를, 마침 공부를 하다 말고(실은 하지 않음) 귀가한 한 청년이 목격하여 신고한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할머니를 구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 나를 위로하는 한마디다. 남은 소설들은 내년 봄에 읽으려고 한다. 이 책은 선별, 편집이 무척 좋다. 흑, 역시 문학동네 ㅠㅠ 문학동네가 현재 우리 문단의 '로마'다. 모든 길은 로마-문동으로 통한다.

 

- 아, 나는 살겠소, 태양만 비친(춘)다면!

- (... 이겨) 춤을 추겠네!

 

그렇게 기꺼이 춤추는 소설, 김영하를 읽었다. 이번에 새 판본이 나와서 청년 김영하의 소설을 읽는 기쁨을 누렸고, 덩달아 그런 김영하를 읽던 청년 김연경을 되돌아보는 (슬픈) 기쁨을 맛보았다. <엘리..터>는 물론, <사진관...>, <흡혈귀>까지 봤다. 저 춤추는 '끼'를 어쩔까. 건필하시라, 우리의 영원한 오빠여.

 

 

 

 

 

 

 

 

 

 

 

 

 

 

시간은 없지만 배수아, 이장욱까지 엿보았다. 이장욱 신간은 <행자...>를 읽는 순간, 아싸~ 이거다, 하고 감이 와서 한 번 골라보았다. 평소 이장욱답지 않게 모종의 생기발랄, 이런 것이 느껴져서이다. 아이들도 재미있어 했지만, 나에게 이장욱은 너무 학구적인(?!) 작가라 그런지 실감이 좀 덜한 작품이었다. 아마 김영하와 같이 읽어서 그럴 수도. 발랄한 스토리텔러의 '끼'가 없어도, 그러나, 좋은 소설을 쓸 수 있다. 배수아를 보라.

 

 

 

 

 

 

 

 

 

 

 

 

 

 

아, 나는 영원한 (앨리스의) '토끼'. 정말 시간이 없다. 마지막 주에는 박상영의 소설을 읽을까 한다. 한국소설을 더 읽고 싶은 욕심이 크지만, 장르문학 쪽 단편도 하나는 보는 것을 늘 목표로 하고 있어서 이것까지 꼽사리로. 사실 꼽사리가 될 만한 작가는 아니다만.

 

 

 

 

 

 

 

 

 

 

 

 

 

 

욕심만 내고 못 읽은 작가는 내년 봄으로 미뤄둔다. 미루는 데는 또 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 적들도 졸지/자지/놀지 않지만, 나도 내 나름으로 일하고 있단 말씀.

 

*

 

다시금 48년생 로커.

- 내 음악(노래)을 평가하고요? (...) 나는 내 음악이 너무 좋아, 최고야, 하하하  

GOOD!!!!

 

옛날에는 나의 책, 소설, 학력, 번역 등에 '겸양'의 차원에서 후지다, 라는 식의 말을 많이 했다.  하지만 그 후진 책, 왜 쓰나. 쓰는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왜 출간하나. 그걸 사보는 독자는 뭐가 되나.  강의 역시 마찬가지. 교수-강사가 강의를 후지게 하면, 그걸 듣는 학생들은 뭐가 되나. 다른 한편, 이런 자기비하, 겸양은 자신의 이상을 지나치게 높이 잡는 데서 비롯되는 오만의 산물이기도 하다. '사십오도 경사에서 뒹굴다 보면 곧 오십'인 처지, 실제로 나의 책, 소설 등등은 후지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속으로는 그럴 지언 정 '대외적인' 차원에서는 조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건 흡사 다음과 같다. 

 

아이가 잠들면 십원짜리 쌍욕을 해본다. 말 그대로 평범한 쌍욕. 과거 할머니가 늘어놓는 구성진, 그래서 문학적인 그런 쌍욕도 아니고, 아이를 키우지 않는다면, 평소에도 제법 할 만한 그런 욕들. 아이 때문에 참는 말들, 그런 표현, 특히 담임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 등을 혼자 떠들기도 하고 남편한테 말하기도 한다.(보통 그는 알고 보면, 자고 있다 -_-;;)

 

"내가 생각해도 난 미친*이다. 야, 이 미친 *아, 너는 마누라가 미친*이면 좋냐? 애 앞에서 어떻게 말을 그따구로 해?"

"그 개**는 왜 그 **이야. 그 **들 중에 나보다 공부 잘 하는 놈 하나 없고 나보다 소설 공부 많이 한 놈 하나도 없어, 몽땅 다 **에 **들이야!"

 

 

이런 말을 몇 마디만 하고 나도 상당한 '설욕'의 쾌락이 느껴진다. 욕설의 카타르시스랄까. 이러고 나면 내가 '급' 착해지는 것을, 내 입이 '급' 아름다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나라고 해서, 특히 아이 엄마라고 해서 항상 '바르고 고운 말'만 쓸 수 있나. 우리에겐 이런 카타르시스의 문학이(도) 필요하다. 무엇이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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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을) 놈 걱정 말고 산(살) 놈 걱정을 하자. 지난 여름에 사두고 (지금 읽으려고) 벼르는 책도 있고, 이제 막 나와서 주문하려고 장바구니에 담은/는 책도 있다.

 

 

 

 

 

 

 

 

 

 

 

 

 

 

 

박상영은 지난 번에 썼는데, 아이들이 좋아해서(=많이 씹어서^^;) 소설집도 샀다. 김금희는 이전 소설집이 참 좋았는데, 장편이 조금 지루해서 실망했다가, 신작 작품집을 사보려고 한다. 조금 '올드'(^^;;)한 작가로는 이번에 김승옥문학상을 받은 윤성희 장편(혹은 다른 소설). 그 다음 <새의 선물>의 작가가 20대 대학생으로 분한(그렇게 이해되는데) <빛의 과거>.

 

 

 

 

 

 

 

 

 

 

 

 

 

 

 

엥, 이것이 전부인가? 목록이 현저히 짧은 것 같은 느낌에, 곰곰 생각해보니 1학기에 곧장 붙여서 강의를 하게 됐음이 상기되었다. 즉, 항상 있던 반년 정도의 텀이 없다보니 아무래도 지난 학기에 다룬 소설도 좀 더 들춰볼 수 있겠다. 책을 아예 사는 쪽이라, 그때 다 못 읽은 작품도 마저 볼 수 있겠다. 가령,

 

 

 

 

 

 

 

 

 

 

 

 

 

 

 

 

의도한 것이 결코 아니다!!! 90프로가 여성작가다. 언제부터 우리 문단이 이렇게 되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적어도 문학판에는 '남성할당제'(?)가 절실히 요청된다. 그래도 안 올 텐가, 이 문학으로? 시는 어떤가. 

 

 

 

 

 

 

 

 

 

 

 

 

 

 

 

이번 학기에는 시와 희곡도 한 주씩 할당하려고 한다. 물론 수업에 다루는 작품은 고전이지만, 얼씨구나 이참에 시집도 좀 주문하였다. 기대된다! 80-90년대 기형도, 이성복, 황지우, 최승자 등등에서 얼마나 멀리 왔는가.  

 

*

 

어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다 보았다. '다' 보았다 함은 그저께 절반쯤 보고 어제 마저 보았다는 의미다. 보고 싶은 영화 한 편 보는 것도 호사이고, 그나마도 쪼개서 봐야 하는 신세,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이 역시 그리 나쁘지 않다는 걸, 막상 당해 보니, 알겠다. 무엇보다도, 이 희소성(!) 덕분인지 영화가 넘나 재미있었다! 봉준호의 영화는, 너무 놀라운데, 사실상 거의 처음 보는 듯하다. <살인의 추억>은 무서울까봐 못 봤던 것 같다. 그럼에도 그의 필모그래피를 모르지는 않는데, 이런 식의 그로테스크한 미감을 소유한 분인줄 몰랐다, 감탄했다. 블랙잔혹코미디?

 

봉감독처럼 소위 금수저에 훌륭한 미학과 재능을 지닌 사람이 이런 사회적 대립구도에, 거시적 문제와 주제에 관심을 주는 것이 참 고맙다. 그의 출신성분(이 말이 불편한가?^^;)과 훌륭한 유전자의 특성상, 장르가 코미디인 건 당연하다. 혹은, 감독의 그런 선택이 아주 탁월하다고 생각된다. 코미디에서 한 단계 올려 '부조리'라고 해도 되겠다. 웃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콘트라스트, 대조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거쳐 우리가 보게 되는 최후의 대조(체육관의 이재민과 저택의 가든 파티) , 피칠갑 장면, 마지막 '기생충'의 지하실(거의 카타콤베 수준, 감독의 명민함에 다시 놀람!)은  더더욱 리얼리즘의 정수를 보여주는 듯하다.

 

... 아빠 무엇보다도 돈을 벌어서, 이 집을 사고, 아버지는 그냥 올라오기만 하세요...

 

하지만 아들(이름이??)이  말쑥한 차림으로 집 구경을 하는 장면은 역시나 꿈일 뿐이다. 님아, 꿈 깨시라!!! 뭔 수로 저 집을 살만한 돈을 벌겠나. 니들은 있을 곳은 저 아래(정원)도 아닌, 더 저 아래(지하)이다. 사람은 절대로 선을 넘지 말아야 되는 법! 자신의 냄새-스멜(smell)을 절대 없앨 수 없는 법! 개천의 용이 되지 말고 개천의 가재로, 붕어로 행복하시라!

 

작년 여름에 본 이창동의 <버닝>을 떠올려보면, 여기서는 감독이 '안'-금수저(설마 흙수저?)라 유산계급, 소위 가진 자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노골적이다. 그는 권태에 절어 있고 살인자이고 자기가 잃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전적으로 가해자. 하지만, <기생충>은 다르다. 그 사회 속에서 들여다 봤다는 것이 느껴지는 대목, 즉 자기 아이러니의 정점. 넘나 화목한 집안: 부부 금슬 좋아(그래서 저 소파신이 필요한 듯, 대화도 많이 해), 아들딸 다 잘 자라(이 정도 문제야 누구나 있고), 집안 사람 관리 하기 힘들어(역시나 이들에겐 일상), 그러면서도, 적당히 맹하고 착해, 마지막, 그들 역시도 가장 소중한 것(가족-가장)을 잃게 돼~. 대단히 희화되었지만, 어쨌든 이들도 사람이다, 라는 것은 충분히 보여준 듯하다.

 

덧붙여. 봉준호 vs. 송강호. 

내 생각엔 봉준호 없는 송강호는 가능하지만, 송강호 없는 봉준호는 불가능하거나 적어도 좀 부실할 것 같다. 이게 참 아이러니인데, 감독은 스스로 영화에 나갈 수 없으니(물론 출연하기도 하지만 영화 속에 들어가는 순간 그는 감독이 아니라 배우다! 하다못해, 신문 기사 속의 히치콕 사진^^;) 항상 가면-페르소나를 필요로 한다. 봉-에게 송-은 정말 환상의 가면인 것 같다. 마치 레오카락스 - 드니라방, 구로사와아키라 - 토시로미후네 등등처럼. 신은 세계 속에 나오면 안 된다. 신이 세계 속에 존재하려면 육화되어야 한다. 송강호는 봉준호의 육화, 즉 인카네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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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바쁘다. 영화도 마저 봐야 해, 아이 문제집도 채점해줘야 해, 정치에 무관심함에도 청문회도 한 번씩 클릭해줘야 돼... 어제 청문회를 잠깐잠깐 보다가 광의의 토론 문화에 대해 다시금 생각했다. 다른 건 몰라도, 조국 선생님은 이 점에서는 상당히 훌륭한 것 같았다. 경상도(부산) 사투리를 무척 싫어하지만 그 사투리조차 점잖을 수 있음을 그의 강연 같은 것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 다음, 남의 말을 좀 들어라.  그 다음,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말만 해라. 이렇게 쓰는 이유는 나 역시 이것이 넘나 안 되기 때문이다. 나 개인의 성격도 있지만, 우리의 토론 문화가 성숙하지 않은 탓도 있다.

 

80년대, 한 교실에 학생이 50명도 넘었다. 발표할 일 거의 없었고, 발표하면 그건 튀는 일이거나 아니면 너무 잘난 일이거나 그렇다. 이러나저러나 너무나 유표이다. 그 다음, 사람이 많으니 무조건 목소리가 커야 한다, 흑. 바로 이것. 큰소리로 마구 떠들어 상대방 제압하기. 혹은 아예 발표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을 장악하기. 이런 문화 속에서 우리는 자랐다.75년생인 내가 그렇다. 어제 청문회 장에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나보다 10살 이상 많을 텐데, 토론이 더 먼 나라 얘기인 시절을 사신 분들이다. 참, 유감스럽다. 당장 떠오르기론, 영국의 <PMQ>(총리질의~)와 비교해도 '질 떨어진다', '수준 낮다'라는 말이 실감난다. 대부분이 악다구니의 향연이다! 조국만(혹은 박지원 의원이나 등등) 사람의 말을 한다. 

 

// Order! Order! ***  must be heard! // 정녕, 말을 좀 들으라! //

 

그러나!

자라는 우리 아이들은 좀 다르다. 한 반에 스무명 안팎, 많아야 서른 명이라던가.  "누가 얘기해볼래요?" 라고 하면 적어도 반 이상이 손든다. "저요, 저요!" 그 중에서 호명 받은 아이가 발표한다. 선생님도 그 아이의 발표를 듣도록 독려한다. '말하는 것'보다 저것, (친구의 말을/발표를) '듣는 것'이 더 중요하다. 여기서 아이들의 지능(!)이, 발달 수준이 드러난다. 우리 아이 같은 띵돌이들은 딴짓하거나 멍때리거나 자기 하고 싶은 말 혼자 떠든다. 남한테 관심 끌려고 더 큰 목소리로 떠들거나 심지어 노래 부른다. 똘똘이들이야말로 남의 말을 잘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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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이 굳이 공직에 나갈 생각이 없었다면 지금의 일들은 사실상 '깜'도 아니었을 것이다. 봉준호는 아시다시피 소설가 박태원의 외손자다. 금수저의 '금'보다 더 무서운 유전자 강적이랄까. 나보코프도 그렇지만, 유전자는 혁명으로도, 총칼로도 뺏을 수 없는 것이라, 남의 나라로 쫓겨나서도 승승장구한다. 그러게 참, 세상 불공평하다. 하지만 어쩌랴. 이것이 리얼리즘이다! 빛나는 유전자를 받은 것이, 화려한 전두엽을 타고난 것이 죄인가. 그들도 그것을 누릴 권리가 있다. 그것조차 인정 못 할 만큼 우리가(나 - 흙수저, 아니 심지어 수저도 없는 그냥 손!) 그렇게 배알이 꼴려 있는가. 그들을 인정하지 못한 채 게거품 물면 결국 우리만 불행해진다. 왜냐면 계속 남의 말 안 듣는 '천출'에게 정치를 맡겨야 하기 때문이다.

 

이참에 다시금, 그리워지는 그대. 노무현 전 대통령이 국회의원이던 시절 청문회 장면을 다시 돌려보았다. 신파 같지만, 우리의 성장기도 생각나고,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장면들이다. 화면 속 노무현도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 거칠다, 간혹 핏대도 세운다. 그럼에도 전반적인 어조는 나지막하고 조근조근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한 번 욱하면서 "증인, 저는 증인한테 할 말이 정말 너무, 너무 많습니다~' 등의 말을 '토할 때'는 우리도 같이 토하게 되는 것이다.  토론의 기법이 따로 있나. 무슨 장르든 그렇지만, 물론 기법이 따로 있다. 하지만 기법에 앞서 정신-내용이 똑바로 박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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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온다. 링링. 발표하는 것이 너무 무서운 아이의 이야기를 담은 동화 속 주인공 이름이기도 하다. 지난 1학기초 공개 수업 선생님이 이 동화를 읽어주셨는데, 우리 아이를 비롯한 두 서너 명이 집중력이 짧았다. 중간도 못 가서 엉터리 질문하고 혼자 흥분하고 웃고 등. 그러게 듣는 능력! 자, 너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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