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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을) 놈 걱정 말고 산(살) 놈 걱정을 하자. 지난 여름에 사두고 (지금 읽으려고) 벼르는 책도 있고, 이제 막 나와서 주문하려고 장바구니에 담은/는 책도 있다.

 

 

 

 

 

 

 

 

 

 

 

 

 

 

 

박상영은 지난 번에 썼는데, 아이들이 좋아해서(=많이 씹어서^^;) 소설집도 샀다. 김금희는 이전 소설집이 참 좋았는데, 장편이 조금 지루해서 실망했다가, 신작 작품집을 사보려고 한다. 조금 '올드'(^^;;)한 작가로는 이번에 김승옥문학상을 받은 윤성희 장편(혹은 다른 소설). 그 다음 <새의 선물>의 작가가 20대 대학생으로 분한(그렇게 이해되는데) <빛의 과거>.

 

 

 

 

 

 

 

 

 

 

 

 

 

 

 

엥, 이것이 전부인가? 목록이 현저히 짧은 것 같은 느낌에, 곰곰 생각해보니 1학기에 곧장 붙여서 강의를 하게 됐음이 상기되었다. 즉, 항상 있던 반년 정도의 텀이 없다보니 아무래도 지난 학기에 다룬 소설도 좀 더 들춰볼 수 있겠다. 책을 아예 사는 쪽이라, 그때 다 못 읽은 작품도 마저 볼 수 있겠다. 가령,

 

 

 

 

 

 

 

 

 

 

 

 

 

 

 

 

의도한 것이 결코 아니다!!! 90프로가 여성작가다. 언제부터 우리 문단이 이렇게 되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적어도 문학판에는 '남성할당제'(?)가 절실히 요청된다. 그래도 안 올 텐가, 이 문학으로? 시는 어떤가. 

 

 

 

 

 

 

 

 

 

 

 

 

 

 

 

이번 학기에는 시와 희곡도 한 주씩 할당하려고 한다. 물론 수업에 다루는 작품은 고전이지만, 얼씨구나 이참에 시집도 좀 주문하였다. 기대된다! 80-90년대 기형도, 이성복, 황지우, 최승자 등등에서 얼마나 멀리 왔는가.  

 

*

 

어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다 보았다. '다' 보았다 함은 그저께 절반쯤 보고 어제 마저 보았다는 의미다. 보고 싶은 영화 한 편 보는 것도 호사이고, 그나마도 쪼개서 봐야 하는 신세,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이 역시 그리 나쁘지 않다는 걸, 막상 당해 보니, 알겠다. 무엇보다도, 이 희소성(!) 덕분인지 영화가 넘나 재미있었다! 봉준호의 영화는, 너무 놀라운데, 사실상 거의 처음 보는 듯하다. <살인의 추억>은 무서울까봐 못 봤던 것 같다. 그럼에도 그의 필모그래피를 모르지는 않는데, 이런 식의 그로테스크한 미감을 소유한 분인줄 몰랐다, 감탄했다. 블랙잔혹코미디?

 

봉감독처럼 소위 금수저에 훌륭한 미학과 재능을 지닌 사람이 이런 사회적 대립구도에, 거시적 문제와 주제에 관심을 주는 것이 참 고맙다. 그의 출신성분(이 말이 불편한가?^^;)과 훌륭한 유전자의 특성상, 장르가 코미디인 건 당연하다. 혹은, 감독의 그런 선택이 아주 탁월하다고 생각된다. 코미디에서 한 단계 올려 '부조리'라고 해도 되겠다. 웃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콘트라스트, 대조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거쳐 우리가 보게 되는 최후의 대조(체육관의 이재민과 저택의 가든 파티) , 피칠갑 장면, 마지막 '기생충'의 지하실(거의 카타콤베 수준, 감독의 명민함에 다시 놀람!)은  더더욱 리얼리즘의 정수를 보여주는 듯하다.

 

... 아빠 무엇보다도 돈을 벌어서, 이 집을 사고, 아버지는 그냥 올라오기만 하세요...

 

하지만 아들(이름이??)이  말쑥한 차림으로 집 구경을 하는 장면은 역시나 꿈일 뿐이다. 님아, 꿈 깨시라!!! 뭔 수로 저 집을 살만한 돈을 벌겠나. 니들은 있을 곳은 저 아래(정원)도 아닌, 더 저 아래(지하)이다. 사람은 절대로 선을 넘지 말아야 되는 법! 자신의 냄새-스멜(smell)을 절대 없앨 수 없는 법! 개천의 용이 되지 말고 개천의 가재로, 붕어로 행복하시라!

 

작년 여름에 본 이창동의 <버닝>을 떠올려보면, 여기서는 감독이 '안'-금수저(설마 흙수저?)라 유산계급, 소위 가진 자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노골적이다. 그는 권태에 절어 있고 살인자이고 자기가 잃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전적으로 가해자. 하지만, <기생충>은 다르다. 그 사회 속에서 들여다 봤다는 것이 느껴지는 대목, 즉 자기 아이러니의 정점. 넘나 화목한 집안: 부부 금슬 좋아(그래서 저 소파신이 필요한 듯, 대화도 많이 해), 아들딸 다 잘 자라(이 정도 문제야 누구나 있고), 집안 사람 관리 하기 힘들어(역시나 이들에겐 일상), 그러면서도, 적당히 맹하고 착해, 마지막, 그들 역시도 가장 소중한 것(가족-가장)을 잃게 돼~. 대단히 희화되었지만, 어쨌든 이들도 사람이다, 라는 것은 충분히 보여준 듯하다.

 

덧붙여. 봉준호 vs. 송강호. 

내 생각엔 봉준호 없는 송강호는 가능하지만, 송강호 없는 봉준호는 불가능하거나 적어도 좀 부실할 것 같다. 이게 참 아이러니인데, 감독은 스스로 영화에 나갈 수 없으니(물론 출연하기도 하지만 영화 속에 들어가는 순간 그는 감독이 아니라 배우다! 하다못해, 신문 기사 속의 히치콕 사진^^;) 항상 가면-페르소나를 필요로 한다. 봉-에게 송-은 정말 환상의 가면인 것 같다. 마치 레오카락스 - 드니라방, 구로사와아키라 - 토시로미후네 등등처럼. 신은 세계 속에 나오면 안 된다. 신이 세계 속에 존재하려면 육화되어야 한다. 송강호는 봉준호의 육화, 즉 인카네이션.  

 

*

 

참 바쁘다. 영화도 마저 봐야 해, 아이 문제집도 채점해줘야 해, 정치에 무관심함에도 청문회도 한 번씩 클릭해줘야 돼... 어제 청문회를 잠깐잠깐 보다가 광의의 토론 문화에 대해 다시금 생각했다. 다른 건 몰라도, 조국 선생님은 이 점에서는 상당히 훌륭한 것 같았다. 경상도(부산) 사투리를 무척 싫어하지만 그 사투리조차 점잖을 수 있음을 그의 강연 같은 것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 다음, 남의 말을 좀 들어라.  그 다음,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말만 해라. 이렇게 쓰는 이유는 나 역시 이것이 넘나 안 되기 때문이다. 나 개인의 성격도 있지만, 우리의 토론 문화가 성숙하지 않은 탓도 있다.

 

80년대, 한 교실에 학생이 50명도 넘었다. 발표할 일 거의 없었고, 발표하면 그건 튀는 일이거나 아니면 너무 잘난 일이거나 그렇다. 이러나저러나 너무나 유표이다. 그 다음, 사람이 많으니 무조건 목소리가 커야 한다, 흑. 바로 이것. 큰소리로 마구 떠들어 상대방 제압하기. 혹은 아예 발표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을 장악하기. 이런 문화 속에서 우리는 자랐다.75년생인 내가 그렇다. 어제 청문회 장에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나보다 10살 이상 많을 텐데, 토론이 더 먼 나라 얘기인 시절을 사신 분들이다. 참, 유감스럽다. 당장 떠오르기론, 영국의 <PMQ>(총리질의~)와 비교해도 '질 떨어진다', '수준 낮다'라는 말이 실감난다. 대부분이 악다구니의 향연이다! 조국만(혹은 박지원 의원이나 등등) 사람의 말을 한다. 

 

// Order! Order! ***  must be heard! // 정녕, 말을 좀 들으라! //

 

그러나!

자라는 우리 아이들은 좀 다르다. 한 반에 스무명 안팎, 많아야 서른 명이라던가.  "누가 얘기해볼래요?" 라고 하면 적어도 반 이상이 손든다. "저요, 저요!" 그 중에서 호명 받은 아이가 발표한다. 선생님도 그 아이의 발표를 듣도록 독려한다. '말하는 것'보다 저것, (친구의 말을/발표를) '듣는 것'이 더 중요하다. 여기서 아이들의 지능(!)이, 발달 수준이 드러난다. 우리 아이 같은 띵돌이들은 딴짓하거나 멍때리거나 자기 하고 싶은 말 혼자 떠든다. 남한테 관심 끌려고 더 큰 목소리로 떠들거나 심지어 노래 부른다. 똘똘이들이야말로 남의 말을 잘 듣는다.   

 

*

 

 

 

 

 

 

 

 

 

 

 

 

 

 

조국이 굳이 공직에 나갈 생각이 없었다면 지금의 일들은 사실상 '깜'도 아니었을 것이다. 봉준호는 아시다시피 소설가 박태원의 외손자다. 금수저의 '금'보다 더 무서운 유전자 강적이랄까. 나보코프도 그렇지만, 유전자는 혁명으로도, 총칼로도 뺏을 수 없는 것이라, 남의 나라로 쫓겨나서도 승승장구한다. 그러게 참, 세상 불공평하다. 하지만 어쩌랴. 이것이 리얼리즘이다! 빛나는 유전자를 받은 것이, 화려한 전두엽을 타고난 것이 죄인가. 그들도 그것을 누릴 권리가 있다. 그것조차 인정 못 할 만큼 우리가(나 - 흙수저, 아니 심지어 수저도 없는 그냥 손!) 그렇게 배알이 꼴려 있는가. 그들을 인정하지 못한 채 게거품 물면 결국 우리만 불행해진다. 왜냐면 계속 남의 말 안 듣는 '천출'에게 정치를 맡겨야 하기 때문이다.

 

이참에 다시금, 그리워지는 그대. 노무현 전 대통령이 국회의원이던 시절 청문회 장면을 다시 돌려보았다. 신파 같지만, 우리의 성장기도 생각나고,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장면들이다. 화면 속 노무현도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 거칠다, 간혹 핏대도 세운다. 그럼에도 전반적인 어조는 나지막하고 조근조근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한 번 욱하면서 "증인, 저는 증인한테 할 말이 정말 너무, 너무 많습니다~' 등의 말을 '토할 때'는 우리도 같이 토하게 되는 것이다.  토론의 기법이 따로 있나. 무슨 장르든 그렇지만, 물론 기법이 따로 있다. 하지만 기법에 앞서 정신-내용이 똑바로 박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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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온다. 링링. 발표하는 것이 너무 무서운 아이의 이야기를 담은 동화 속 주인공 이름이기도 하다. 지난 1학기초 공개 수업 선생님이 이 동화를 읽어주셨는데, 우리 아이를 비롯한 두 서너 명이 집중력이 짧았다. 중간도 못 가서 엉터리 질문하고 혼자 흥분하고 웃고 등. 그러게 듣는 능력! 자, 너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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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박완서, 라는 이름 석자를 떠올린다.(1988년 내 인생에, 삼성생명주최 중등부 독후감 심사위원으로서, 아주 잠깐 등장해주신 것을 아주 큰 영광으로 생각한다. - 지금 생각해보니 삼성은 이런 데도 돈을 썼구나^^;) 소설에 관한 한, 특히 건전한 중산층의 생활감각을 담은 걸작 수준의 소설에 관한 한, 더 말이 필요 없겠다. 국문학자들도 많이 연구하는 걸로 안다. 그런데 박완서가 동화를 썼음을 올해 알았다. 초2 교과서에도 수록되었다. 아이에게 벌로(!!) 읽으라고 한 적이 있는데, 어제는 심심해서 나도 읽어보았다.

 

 

 

 

 

 

 

 

 

 

 

 

 

 

최근에 읽은 <...싱아..>가 너무 강렬했는데, 재주 없는 소설가가 보기에 소설가 박완서의 가장 큰 재주는 겸손함(!)이다. 박완서는 그냥 사람 사는 얘기를 한다. 일견, 너무도 시시하고 평범한 얘기를, 덧붙여 너무나 쉽고 심지어 무성의하게 하는 것 같다. 하지만 글을 조금만 써 본 사람이라면, 평범할 수밖에 없는 그녀의 주인공들의 말과 행동, 그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얼마나 치밀하게 계산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많은 독자에게 쉽게 읽히도록 하기 위해, 그녀는 정반대로, 쓰는 일을 무척 어렵게 했던 것이다. 톨스토이가 그 시시한(!!!) 문장을 쓰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퇴고를 거듭했음은 나 같은 전공자만 아는 일이기도 하다.

 

 

 

 

 

 

 

 

 

 

 

 

 

 

 

또 하나, 소설가 박완서는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이점에서도, '도덕군자'가 아닌 '소설가' 톨스토이와 비슷한 점이 있다.) <나목>부터 그녀는 그저 자기 얘기를 할 뿐이다. 이점도 강조되어야겠다. 시종일관 자기 얘기다. 젊은 처녀 박완서가 있고, 나중에 우리가 보는 건 중년, 노년의 박완서다.  저 페르소나 사이에 일관성이 물론 있다. 왜냐면 그건 어쨌거나 박완서니까. <도둑맞은 가난>처럼 소위 공순이(?)가 주인공인 경우에도, 여주들은 모두 굉장히 야무지고 당당하다. 아주 마음에 든다! 그들은 아줌마가 되어도, 할머니가 되어도 그렇다. 어디 가서 기죽지 않는다. 늙어도 기죽지 않는다, 아주 좋은 일이다. 이런 일련의 장점, 미덕을 소설적 자아-화자인 박완서는 소설 속 다른 인물이나 독자에게 훈계, 강요, 설파하지 않는다. 덧붙여, '나'의 얘기를 '우리'의 얘기로 만드는 저력, 넘나 부러운 것이다... 다른 소설가들도 그리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동화는 좀 달라서 놀랐다. 개미 나라가 엄청난 기근에 시달리던 중, 한 일개미가 엄청나게 큰 먹잇감을 찾는다. 너무 커서 혼자 못 옮긴다. 그래서 동료 일개미를 부른다. 대체 이 먹이는 뭐지? 궁금해하던 중, 지혜로운 노인 개미 왈: 이건 매미야, 7년 동안의 잠을 거쳐 매미로 태어나는 거지. 의구심이 오간다. 진짜 매미야? 그런데 왜 땅속에 있어? 그런데 왜 땅밖으로 못 나가? 노인 개미의 답: 땅 위가 콘크리트로 뒤덮여서 그럴 수가 없다는 것. 여기서 개미들 사이에 의견 충돌. 이 개미를 먹이로 취할 것이냐, 아니면, 콘크리트로 덮이지 않은 부드러운 땅 밑으로 옮겨줄 것이냐. 결국 후자. 그래서 일개미들은 이 기근에(!!!) 매미 먹이를 포기하는 대신, 애벌레-번데기 매미를 성충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매미의 노래를 듣기 위해. 맞아, 땀흘려 일할 때 매미 노래를 들으니 행복했어. 등등.

 

평소 박완서의 문체를 생각하면 군말도 좀 많게 느껴지고 무엇보다도, '원한'이 느껴지는 저 이타주의, 희생이 불편하다. 세대의 차이일 수도 있겠다. 배고픔도 너무 싫고(개미나라의 기근) 그것을 억누르고 다른 더 큰 것(매미의 인생)을 추구해야 하는, 살려야 하는, 거의 신화적 차원의 희생도 너무 싫고, 집단주의도 너무 싫다. 과장 좀 하면 치가 떨린다. 이런 전근대적인(!) 세계를 우리는 세계문학의 전범에서도 많이 보아왔다. 물론, <죄와벌>이 으뜸이다.

 

 

 

 

 

 

 

 

 

 

 

 

 

 

 

 

 

세계 전반의 불운(기근 등등)과 부조리는 결국 혁명을 통해서밖에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야말로, 도-키가 처했던 당시 러시아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1970, 80년대 우리의 현실이기도 했을 터. 다시 읽은 <당신들의 천국>에 드러난 소위 '건설 대한민국'이 불편한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였다. 이청준-조백헌이 은근히 박정희의 유비로 읽혀, 혀를 내둘렀다. 우리의 부모 세대를 그를 증오하면서도 동시에 숭배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는 독재자의 딸이 등장하는 것이다.

 

 

 

 

 

 

 

 

 

 

 

 

 

 

 

박완서 동화와 나란히, 외국 작가가 쓴 <휴고와 동생 샤샤>를 읽었다. 아이가 방학식 날 학교에서(교실에서) 가져온 것이다. 아기(소년) 사자 휴고는 어느 날 동생이 생겨 당혹스럽다. 엄마를 빼앗긴 것. 하지만 여기서 엄마의 태도가 '쏘쿨~'이다. "엄마는 동생도 돌봐야 해, 혼자 자렴." 그랬다가 또 형편이 되면 "이리 오렴, 엄마랑 놀자." 그랬다가 대체로 심드렁(?!)한데, 정녕 선진국형 심드렁함이다. 다른 한편, 동화에 기승전결이랄까, 암튼 클라이맥스라는 것이 따로 없다. 휴고가 샤샤를 괴롭히고 엄마한테 야단을 맞기도 하지만 그리 과격하게 묘사되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 샤샤가 호기심에 코끼리를 보러 갔는데, 그 동생을 형 휴고가 구하는 것이다. '형제됨'의 과정에 대한 아주 사실적이고 담백한 스케치라고 할 법하다. 여기에는 어떤 '원한'도, 또한 메시지도 보이지 않는다. 아주 잘 썼다는 생각이 드는 동화도 아니고, 유명한 동화도 아니다. 심지어 이미지도 긁어오기 힘들 정도다. 그럼에도 유럽적(독일?) 세계관을 엿보기엔 참 제격인 듯하다. 비슷한 걸로, 앤서(터)니 브라운의 <달라질 거야>를 떠올릴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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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나서 알게 되는 작가가 있다. 토니 모르슨. 헉, 읽은 것이 하나도 없다! 이제라도 한 권이라도 사 봐야지, 말하고 싶지만 아마 안/못 읽을 것 같다. 그래서 여기다 쓰는 것인데, 정녕 소개글만 봐도 울분이 차 올라 끝까지 읽지 못할 책임을 알겠다. 흑인, 여자, 노예. 이 정도만 봐도 각이 나온다. 동화를 주문해볼까 한다.

 

 

 

 

 

 

 

 

 

 

 

 

 

 

즉, 그런 시대, 그런 세계가 있는 것이다. '쏘쿨~'도 피라미드의 토대가 갖추어져야지 가능한 것이지(이 점에서 나는 정녕 유물론자), 당장 일차욕구가 해결되지 않는데 무슨. <7년동안의 잠>도 사실 저 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을 법하다. 그에 비하면, 지금 우리는 참 잘 살고 있지 않나. 이렇게 말하는 나는 구세대?

 

*

 

어제가 아이의 생일이었는데, 미역국을 끓이는 걸 깜박했다. 꼭 끓여야 하나? "미역국 먹을래?" "아니, 싫은데?" 아이가 먹고 싶어한 건 초코 케이크였다. 미역국 안 끓은 걸 꼭 직무유기로 봐야 하나. 사실 좀 뜨끔했던 것이, 정말 까맣게 잊은 탓이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계속 늦어지는 논문심사결과를 노심초사 기다리는 스트레스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어제야 비로소 결과가 나왔다. 한 명은 100점, 짤 없이 게재가, 한 명은 70점 이하 짤 없이 수정후재심이었다. 이런 극과 극의 결과를 보면 당혹스럽다. 또 한 명은, 천만다행, 8-90점(?) 수정후게재. 이 '마일드- 온건한' 중간자(?) 덕분에 살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비슷한 스타일로 '게재불가'를 받은 적이 있어(그것도 <카라마조프> 논문을!^^;) 그 참담함을, ...이라기보다는 귀찮음과 성가심을 너무 잘 안다. 이번에는 그러지 않아 다행이다.

 

심사는 심사자의 몫, 필자-연구자인 나의 몫은 내 논문, 논문 쓰기에 대해 생각, 반성하는 것이다. 인지불균형이 나쁜 것처럼, 나의 논문이 이렇게 호불호가 격하게 엇갈리는 스타일로 가는 것 역시 좋은 건 아니다. 모두를 다 만족시킬 순 없지만(그럴 필요도 없지만) 이런 아포리즘적(!) 글쓰기의 문제점을 심각하게 고민해야겠다.

 

아포리즘. 소설가 박완서에게는 없지만 동화작가 박완서에게는 그 위험이 보였다. 동화니까? 글쎄, 그렇지 않은 동화들이 워낙 많아서(특히 요즘 나오는 외국 동화) 써본 것이다. 동화는 교훈 충만이어야 한다, 라는 것 자체가 우리의 편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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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또 기회가 주어질까. 그래서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고, 큰물은 아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읽고 있고 그러려고 한다. 얼마 안 남았다, 그래서 더 소중한 시간, 최대한 아껴쓰자.

 

 

 

 

 

 

 

 

 

 

 

 

 

 

 

 

 

소설집이 나온 김에 <식물애호>를 다시 읽고, 무척 강렬한 인상을 남긴 <홀>도 상기하고, 작년에 사둔 <죽은 자로 하여금>을 읽었다. 삼분의 일정도는 못 읽었는데, 아무래도 뒤로 갈 수록 필력이 좀 딸린다는 아쉬움이 들었다. 독자로서는 아쉽고, 같은 작가로서는 안도의 한숨(-_-;;) 같은 것이랄까. 아무래도 편 작가는 단편에 좀 더 강한 것 같고, <홀>은 이야기 자체를 정말 잘 만난 듯하다. 무엇보다도 대사 하나 없는(말을 못하니 ㅠ.ㅠ) 오기와 말 많은(^^;;) 장모의 대립 구도가 참 좋았다. 반면 <죽은...>은 두 남주의 긴장 관계가 조금 약하달까, 그런 느낌이었다. 사회적 의제(내부고발자)를 다루고자 한 듯한데, 얼핏 미야베 미유키가 생각났다.

 

 

 

 

 

 

 

 

 

 

 

 

 

 

 

김영하의 신작 에세이를 읽고 싶어 그의 단편도 다시 봤다. 여전히 잘 쓰지만(말해야 뭣하랴!) 그가 어느 덧 오십대임을 곱씹게 하는, 그런 소재, 그런 주제, 그런 문체. <여행의 이유>는 쭉 읽고 <작가의 말>이 너무 즐거워(꾀돌이 얘기에서 빵~터졌다) 아이들과 공유하려고 한다. 계속 좋은 소설 많이 써주시길, 역시 독자로서 기대하고, 작가로서는 배가 아프고 그렇다. 그대의 재능, 그대의 학구열, 그대의 (겉보기와는 조금 달리^^;) 성실성 등.

 

 

 

 

 

 

 

 

 

 

 

 

 

 

 

 

말하자면 신인 작가도 꾸준히 읽어왔는데, 이번에는 박상영. 아직 안 읽었으나 <... 파스타>와 이번에 저 상 받은 <우럭...>을 읽으려고 한다. 음식, 좋아!^^;; 최은영, 김봉곤, 박민정(??) 등이 약간 내 스타일이 아니어서 조금 울쩍했는데, 이쪽은 모르겠다. 새 작가, 새 작품을 만날 때는 아무튼 기대된다! 

 

 

 

 

 

 

 

 

 

 

 

 

 

 

 

한강의 신작도 읽고 싶어 스캔을 떠놨고 권여선 신작 장편을 읽고 싶은 마음에 <...주정뱅이>를 다시 읽나 고민 중이다. 이러다 보면 (다시) 읽고 싶었으나 결국 못 읽겠는 책들 투성이다. 어떻게 해도 최수철의 신작 장편은 사수하고 싶어서 일단 바로 사뒀는데, 장편인지라 읽어도 나만 읽을 수 있겠다.

 

 

 

 

 

 

 

 

 

 

 

 

 

 

 

 

정녕 그렇지 않나. 읽을 책은 많고 인생은 짧다. 문득,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얼마나 부질 없나 싶다. 특히 책을 사는 일 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독서-책읽기이지 책-물건이 아니다. 하지만 책을 좋아한다, 라고 말할 때는 대부분 두 가지를 다 포함한다. 그렇게 마흔 다섯살까지 살아왔는데 어느 날 보니, 언젠가 어느 기호학자-노문학자 선배의 지적대로, 이거야말로 물신(숭배)주의가 아닌가 말이다. 헌 책을 갖다 파는 일도 성가시고, 결국 온 집안이 불쏘시개 천천국이다ㅠ.ㅠ

 

아파트 평수는 제한되어 있고 아이 책과 물건이 점점 늘어간다. 정녕 책이 아니라 책읽기를 사야할 때, 이 문제를 고민해봐야 할 때다. 올해 전자북  인세가 작년의 두 배여서 깜짝 놀랐다. 물론 종이책 인세에 비할 바 없을 만큼 약소한 금액이지만, 현재 독서 시장의 흐름을 보여주는 대목인 듯하다. 물건(이 경우엔)을 집에 쌓아두는 일의 부질함. 모든 것을 데이터로.(이걸 좀 더 세련되게 표현할 수 없나 -_-;;) 초등학교 가정통신문도 앱으로 오는 세상이다. 방과후수업도 대부분 앱으로 신청. 이런 유의 사이버(??) 세계를 살게 될 줄,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는 거창의 산골, 75년의 나는 생각도 못했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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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해서 쭉 읽지는 못하지만, 그때그때 읽는 부분마다 감동적이다. 무엇보다도 감동적인 것은 간결하고 힘있는, 접속사가 거의 없이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만으로 이어지며 훌륭한 맥락을 만들어는 그의 놀라운 문체이다. 그런데 그는 의사이고 그것도 내과나 정신과가 아닌 외과의, 심지어 중증외상센터에서 일하는 외과의다. 아, 솔직히, 근래에 읽은 어지간한 소설(들) 보다 낫다. 몇 군데 옮겨온다.

 

"필사적으로 피를 막아내는 속도와 피를 부어 넣는 속도의 합이 파열된 장기로부터 터져 나와 쏟아지는 피의 속도에 미치지 못할 때, 핏물 속에서 환자의 장기를 더듬던 내 손은 서늘해졌다. 차갑게 식은 피와 굳어가는 장기가 손끝에 느껴지면 사신이 환자를 데려갔음을 알았다."(2, 11)

 

*

 

"내과와 외과를 구분 짓는 이유가 무엇이든, 외과를 업으로 삼는 우리의 일상은 갈라지고 짓이겨진 살과 부서진 뼈와 장기들, 끊어진 신경과 어긋난 조직, 솟구치는 핏물 속에 있었다. 병원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날이 많지 않았다. 삶은 평범함과 거리가 멀었다. 그래도 나는 수술이 좋았고 수술방에 감도는 서늘한 감촉을 사랑했다."(1, 33)

 

*

 

"남자의 몸 안에는 이전에 받았던 큰 수술의 여파로 심한 유착이 남아 있었다. 복강 내 수많은 조직과 장기들은 다 엉겨 붙어 한 덩어리와도 같아 보였다. 복강 제일 얕은 곳에서 간 파열로 인한 피가, 쪼개진 간 조직 사이로 울컥거리며 뿜어져 올랐다. 환자의 피는 따뜻했다. 그것 하나가 그의 숨이 아직은 이상에 머물고 있음을 짐작케 했다. (...) 지루한 박리 수술이 끝나고 마침내 후복강까지 시야가 닿았을 때 나는 아연실색했다. 환자의 비장과 좌측 신장이 이미 적출되어 있었다." (1, 65)

 

수술 뒤 환자를 중환자실로 보낸 다음, 식사하는 장면, 이 챕터의 마지막인데, 이 정도면 소설작법 교본으로 써도 되겠다. 해맑은 어린아아와 사목하는(이런 표현 쓰나?) 목사의 대조. '나'(이국종)의 마지막 행위.   

 

그날 저녁 교직원 식당이 문을 당아 외래객 식당으로 갔다. 밥맛을 느낄 수 없었으나 그냥 먹었다. 지나가던 아이가 나를 보고 물었다.

- 밥 먹어요? 혼자?

아이의 눈은 맑았다. 나는 그냥 짧게 고개만 끄덕했다. 다시 숟가락을 들려 할 때 원목인 손덕식 목사가 다가와 프린트한 기도문을 주며 말하고 갔다.

- 제가 기도 많이 합니다.

나는 말없이 종이를 받아 식판 옆에 엎어두고 보지 않았다. (1, 68)

 

이런 부분 많지만, 읽으면서 울컥, 하는 대목.

 

"그는 예비역 해병이자 취업 준비생이었다. 아르바이트로 오토바이 배달을 하던 중에 사고를 당했다고 했다. 한쪽 다리를 잃었고 인공항문까지 달았다. 20대 청년이 받아들이기에는 지독한 현실이었다. 그러나 그는 오래 괴로워하지 ㅇ낳았다. 좌절하는 대신 살아있음으로 가질 수 있는 나머지 가능성이 집중했다. 그 긍정이 놀라웠다. 그런 삶의 태도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를 보며 나는 부끄러웠다."(1, 76) "얼마 뒤 그 환자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입사했다는 소식을 알려왔다."(1, 77)

 

 조직폭력배, "밤거리의 주먹들"을 수술하는 부분.

 

"나는 그들이 가진 적의의 근원을 알 수 없었고, 폭력과 살인의 명분도 이해하지 못했다."(79-80)

"정상적으로 흘러가는 피의 박동을 느끼면서 나는 젊은 생명의 강한 힘을 확인했다. 죽어가는 환자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나는 내 손끝에서 사람의 생사가 갈린다는 사실을 느낄 때마다 그 무게감에 짓눌렸다."(8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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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의사의 이런 체험을 생생하게 담은 소설로 불가코프의 초기 소설을 소개한 적이 있다. 모의대 특강에서도 읽었는데, 이국종의 책을 보니 참 무의미하다 싶다. 그때 나왔더라면 같이 읽었을 텐데.

 

 

 

 

 

 

 

 

 

 

 

 

 

 

우라사와 나오키 <몬스터> 속의 외과의사 닥터 덴마.(일본 만화라, 일본인으로 설정^^;)

- 선생의 손은 사람을 죽이는 손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손입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요한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덴마에게 하는 말이다. 덴마는 결국 요한을 못 죽인다, 오히려 다시 살려낸다. 외과의, 이 surgeon의  손은 참 신비로운 것이다. 그래서 더 매혹적인지도 모르겠다. 손에 든 메스만큼이나 붓-펜을 잘 휘두르다니, 거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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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 역시 원래 일본 유학을 갈 때는 의학도였는데 돌아올 때는 작가-사상가가 되어 있었다. 사람 몸을 고치는 것보다 머리를 고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고, 그 스스로 밝힌 바 있다. 이른바 환등기 사건. 음, 그 머리 역시 실은 몸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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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책이 새로 나온 김에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관한 논문을 쓰려 했다. 책도 다 구입했다. 이 참에 연구비 받던 '벨 에포크'에 주문해둔 톨-이 연구서도 처리할 겸.  그런데 <닥터 지바고> 일정에 맞추다 보니 그 논문을 먼저 쓰고 <전.평.>은 내년으로 미룬다. 여사여사 자료를 뒤지던 중 이광수가 이른바 '조선의 톨-이'를 자처했음을, 그 정도로까지 그를 좋아했음을 알게 되었다. 언젠가 이 부분을 좀 더 다루어 봐도 좋겠다. 비단 이광수뿐만 아니라 이 무렵 우리 지식인들이 사랑한 톨-이는 무엇보다도 <부활>의 작가였다. 정확히 <부활>도 아닌, <해당화: 가주사 애화>(중국어에서 번역했다고 한다)의 작가. 당시 각종 '애화'(대략 창부화된 여자들의 슬픈 이야기, 신파)가 무척 유행했는데 그 원조라고.  그리고 확인된 바는 아니지만 <부활>의 한국어 완역(일본어에서) 역시 이광수(혹은 허영숙)에 의한 것일 수 있다는 추정도 있을 정도라고.  아, 이광수는 러시아어도 구사했다고 한다.

 

 

 

 

 

 

 

 

 

 

 

 

 

 

 

겸사겸사 사족.  박형규 선생님 덕분에 <부활>을, 또 그밖의 많은 러시아 작품들을 훌륭한 우리말 버전으로 읽어왔지만(특히, 볼쇼이판 <전.평.>) 아, 이제는 세대교체가 절실하다고 여겨진다. 이게 번역 및 번역가의 숙명임을 우리는 꼭 알아야 한다. 번역가는 결코 작가가 아니다. 언제가 모 번역가 선생님의 말을 빌어 썼지만 번역가는 '그림자', 작가와 작품 뒤에 붙은 쓸쓸한 그림자이다. 모든 일, 모든 직업에는 '연령 제한' 있다. 학문이나 번역, 창작이라고 예외일 리 없다. 당장 눈이 어두워 내가 번역하는(혹은 쓰는) 텍스트도 제대로 못 보는 마당에..ㅠ.ㅠ 물론 그걸 뛰어 넘는 드문 천재들이 있긴 하지만, 역시나 '그럼에도'이다. 내 번역의 유효기간도 길지 않음을 또한 명심해야 한다.(그럼 뭐 먹고 살지?) 아무튼.

 

톨-이를 무척 사랑한 이광수의 소설 중 그의 흔적, 특히 <부활>의 영향이 아주 큰 작품이 <유정>이라고 한다. 헐, 기억 창고를 아무리 뒤져봐도 안 읽은 것이다, 님아 ㅠ.ㅠ 안빈, 석순옥(맞나?) 어쩌고 하는 무슨 사랑 얘기는 <유정>이 아니고 <사랑>이었나 보다. 그리하여, 이 주제를 다룬다고 하더라고 밑바닥으로 다 파야하게 생겼다.

 

 

 

 

 

 

 

 

 

 

 

 

 

 

 

 

<유정>이야 노골적이고, 이 주제와 비교적 무관하다는 <무정> 역시 이형식의 박영채를 계몽하려는(나아가, 네흘류도프가 카츄사에게 그랬듯, '구원'하려는) 그 심리적, 정신적, 도덕적 흐름에 있어 기본적으로 <부활>을 밑에 깔고 있다. - 고 하는데, 아주 공감된다. 덧붙여, 이 경우에도 우리가 꼭 넘고 가야 할 산은 이 분의 이 책.

 

 

 

 

 

 

 

 

 

 

 

 

 

 

 

이광수를 좋아한 적은 없다. 그러나 웃긴 신파나 그 못지 않게 웃긴 도덕소설(계몽~)이나 썼다고 여겨진 그가 왠지, 소설을 참 잘 쓴 염상섭보다 더 인간적으로(?!) 여겨지는 아이러니를 경험한다. 보다 더 정감이 간다고 할지. 언젠가 강의실에서 김윤식 선생님이 열심히 이광수를 '씹던' 기억이 난다. 그의 고아콤플렉스, 또한 '조선/인'에 대한 총체적 열등감, '잘난 것', '높은 것'을 향한 열망, 그가 결국 친일로 간 것은 내적 필연이었던 것, 그의 지적 흐름상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 (평론가 최재서던가, 그에 대해서도 비슷한 얘기를 들었던 듯하다.) 허영숙과의 로맨스, 결혼 생활 역시 그러하다. 아이들을 많이 낳았던데, 참, 천생 연분이었던 듯하다. 그러게 '사랑의 문법'이 곧 '소설의 문법'으로 이어진다.(이상, 염상섭, 이광수).  

 

 

 

 

 

 

 

 

 

 

 

 

 

 

*

 

우리가 학창시절부터 보아온 이광수는 머리가 훌러덩 벗겨지고 지나치게 둥근(동그란) 알의 안경을 끼고 한복을 입은 할아버지(기껏해야 늙은 아저씨) 이광수이다. 나이가 들어보니 우리의 얼굴과 몸이 양질전화한다는 것을 알겠다. 정확히 그 결절점을 찾기는 힘들겠으나, 아무튼 우리는 나비나 다른 곤충의 변태 못지않은 과격한 변화를 겪는다. 어쩌다 젊은 날의 이광수 사진을 봤는데, 헐, 윤동주 뺨치는 얼굴이었구나. 과연 청년 이광수는 지식인에 작가에 혁명가에(그리고 열정적인 연인에), 그 무렵에는 뭐든지, 누구든지 될 수 있었으리라. 그리고 말년(중년)에 이런 얼굴이 된 것이다. 음, 호위호식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이 역시, 출세지향적이던, 야망 많던 그가 원하던 대로.

 

 

겸사겸사, 톨-이의 역설은 늙어서 더 볼 만하다는 것. 그는 외모 콤플렉스가 무척 강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톨-이 원하는 톨-이의 모습에 가까워진다.

 

 

못 생겼다기보다는 못 됐게(!) 생긴 얼굴인데, 바로 이 대목 '악'을 누르고 '선'을 극대화하는 것이 톨-이의 일생일대의 과제였다. 그리고 말년엔 보다시피, 우리가 익히는, 또 많은 화가들이 사랑한 얼굴.(그리고 그런, 정정한 할아버지의 몸.) 저 수북한 털. 사실 머리카락도 꽤 오랫동안 무성했다. 그러니 그 '육'(=악)을 감당하기가 그렇게 힘들었겠지만, 실은 그것이야말로 창작(=삶)의 원동력이었던 것이니, 부러울 수밖에. 그게 없었다면 톨-이는 소설을 쓰지 않았을 터이다. 마음 착한 지주 귀족 할아버지가 돼서 여러 사회 사업, 자선 사업 하시고 아이들한테 민화 읽어주시고 그러셨을 터. 가끔씩 동네 처녀 총각 주례 서주시고 (믿거나 말거나 많은 사생아를 만드는 대신) 늙은 마누라랑 알콩달콩, 티격태격  잘 살고.   

 

결국 사람은 자신이 원하던, 그래서 걸어가던 그 길의 끝에 이르게 된다. 약간의 차이야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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