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독립운동 당시 원래 계획은 33인 민족대표자가 직접 이날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탑골공원에서 그리 멀지 않는 태화관에 모여 33인(4명이 불참)중 불교대표 한용운 씨가 독립선언서와 3장 공약을 설명하고 다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3창하고 자진해서 경찰서에 연락하고 남산에 있는 경무통감부(왜성대)에 수감됐다.
이날 1시부터 탑골공원에 모이기 시작한 시민과 학생들은 점점 불어 5천여 명에 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민족대표인 손병희 씨가 나와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모두들 마냥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다 되도록 민족대표 33인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한 젊은 청년이 단상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바로 정재용이다. (이하 정재용 본인 회고)
朝鮮獨立宣言書(조선독립선언서)은 1919년 2월10일 육당 최남선이가 작성 하섰고 인쇄는 천도교의 인쇄기관인 보성사에서 25일 깊은 밤에 2만여장을 인쇄하여, 26일 아침부터 기독교측, 천도교측이 각 지방교회, 지방교구로 발송하였다. 나는 28일 아침 감리교 중앙예배당 전도실에서 김충근동지로부터 원산교회로 보내는 선언서 100여장 중1장을 자기호주머니속에넣고 나머지는경성역[현서울역] 대합실에 가서 방금 떠 나려는 원산교회 전도사 방영회에게 말없이 건네주고 돌아왔다. 하오 8시경 이교갑동지 주선으로 정동예배당 정원에서 명일 3월 1일 독립선언할 민족 대표자회의에 참석할 박희도, 오하영, 이필주 등과 악수환송할 때, 후사를 부탁한다는 말을 듣고 눈물을 머금지 않을 수 없었다.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아침 일찍 박희도동지 에게 가서 간밤회의 진행상황을 물은즉 회의는 예정대로 잘 진행이 되었으나 일본 사람이 고종 황제를 독살했다는 말로 군중들이 극도로 흥분된 가운데 민족대표가 탑동공원에 가서 연석하여 학생,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면 군중은 격분하게 되고 일본군경의 총칼에 유혈이 많이 날 것 같다는 논의 끝에 이를 피하고 독립선언을 하기 위하여 학생동원을 중지하고, 장소를 태화관으로 옮긴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을 때 내 생각에 민족적 자활에 관계가 되는 중대 인류거사의 기회를 놓아 보내지 않아 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면서 ,이규갑,최두현,노성현동지들과 탑동공원 정자에 올라서본즉, 지방에서 인산 배관하러 온 노인 십여분이 눈에 띌 뿐이었다. 그런데 하오 2시경 공원 북동문으로 탑을 중심하여 삽시간에 수 천명 학생, 군중이 입추의 여지도 없이 들어서 의아한 표정을 보였다. 이를 본 나는 천재일우의 조선독립선언서를 낭독할 기회가 나에게 왔구나 하는 생각에 호주머니 속에서 독립선언서를 집어내자 두 손으로 활짝 펴들고 조선독립선언서하고 외쳤다. 이를 들은 학생, 군중들은 우와, 우와 하는 함성과 함께 학생들의 모자가 공중으로 날아 오르며 발로 땅을 구르는 소리는 지축을 울리는 것 같았다. 나는 유유히 공약 3장까지 낭독하고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하자 군중이 합창했다. 이 감격스러울 때 한 청년이 불쑥나와 내가 낭독한 선언서를 달래서 품에 품고 단장을 높이 쳐들고 독립만세의 시가행진의 선두에 서서 미,불 영사관을 향해서 나갔다. 이것을 계기로 독립운동은 그대로 전국 방방곡곡, 조직을 통하여 노도와 같이 휩쓸었다.
정재용은 1886년생이니 삼일운동 당시 그의 나이는 25살. 경신중학교를 졸업한 뒤 교회학교 교사로 있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정재용은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어 2년 6개월의 형을 받았다. 출소 후 정재용은 고향인 황해도 해주로 돌아가 창의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하면서 본정통감리교회의 목회 활동을 하다가 월남하였다. 1976년에 사명하였고, 1990년에서야 비로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오늘날 남아있는 그의 행적으로, 삼각산 백운대(白雲臺) 꼭대기 위에 독립선언문은 기미년 2월 10일 최남선이 작성했으며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자신이 독립선언만세를 도창했다는 정재용의 글이 새겨져 있는 바위가 있다니 가볼 일이다. 후손으로는 서울위생병원장을 지낸 바 있는 정사영 박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