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멸종, 생각보다 괜찮은 아이디어 -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철학적 사고 실험
토드 메이 지음, 노시내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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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멸종생각보다괜찮은아이디어 #토드메이 #철학 #인류멸종 #인류존속

#위즈덤하우스 정기서평단 #위뷰 1기로서 #도서제공 을 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본서의 원제는 [Should We Go Extinct?: A Philosophical Dilemma for Our Unbearable Times]이다. 나로서는 답이 나왔다고 생각하고 그다지 딜레마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책의 한국어 부제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철학적 사고 실험]인데 부제에서 이미 저자 토드 메이 씨의 입장이 표명되어 있다.

이 책은 인류 멸종을 논하는 무거운 주제의 책이지만 서술은 너무도 대중 친화적이다. 저자가 [굿 플레이스]라는 시트콤의 철학 자문을 맡았었다고 하는데 그 시트콤을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너무도 쉽게 딜레마를 불러오면서도 대중적이다. 그 시트콤과 같은 분위기의 책이라고 보면 된다.

저자는 본서에서 인류가 멸종해야 하는 이유를 보여주고 바로 이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존속해도 될 이유를 제시한다. 다시 그럼에도 부정적인 견해의 근거를 제시하고 다시 또 그를 부정하며 이런 순환이 이어진다. 이 리뷰에서는 저자의 입장 전환을 따르기보다 상반되는 입장을 각각 나열해야 할 것 같다. 나에게는 저자와 같은 필력과 위트를 따를 재능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인류 멸종을 지지하는 입장에 대해 저자는 공리적 입장에서 논지를 펼친다. 인류 본인이 이미 행복하지 않으며 인류는 공장형 축산과 산림 파괴를 비롯한 환경 파괴로 인류 자신뿐만이 아니라 타 생명체들인 동물들에게 마저 불행과 고통을 전파하고 있다는 이유다.

인류 존속을 주장하는 입장에 대해서는 인류는 이성을 가진 존재이니 무엇보다 존재 가치가 있고 이를 종차별이라는 관점에서 본다고 해도 타 동물군과 자연에 대해서는 적절한 대응으로 이들에게 미치는 해악을 줄이면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단순한 이야기를 철학적 논변으로 거듭 전제를 반박하고 그 반박을 반박하는 과정을 반복하는데 나는 이 책은 하나의 주제를 유의미하게 던지는 자체로서의 의미가 더 큰 저작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너무도 심오한 주제인데 분량이 너무 짧은 것만이 아니라 서술의 관점 또한 동시대에만 한정되어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이보다는 더 깊은 서술이 가능한 주제의 책이 아닌가 싶었다.

인류가 행복하지 않은 이유만으로도 이 시대의, 서로를 엿보며 열등감에 쩔어가다가 살인도 서슴치 않는 사람들, 타인의 반응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속이고 자기 입장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 극대화된 사람들, 서로 분열하기가 극한이라 남녀까지도 대립하는 시대상, 황금만능주의와 승자독식에 찌들어 타인을 인신매매하고 죽여 장기 적출도 거대 사업이 되는 이 시대상은 인류가 멸종해야만 하는 당위성을 이야기해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인류의 역사를 보아도 중국 진나라 장수 백기는 포로 40만 명인가를 묻어 죽인 것으로 알고 있으며 중국사에서 이런 규모의 인명 살상은 적지 않게 반복되었다. 예수가 사랑을 전파하고 간 서양에서는 그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당시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마녀사냥으로 죽였다. 그리고 대항해시대의 신대륙 원거주민들에 대한 살상과 폭력과 잔혹 행위도 인간의 실상을 말해준다. 세계대전 시기 일본군의 731부대 실험이나 위안부라는 이름의 성노예 행위 그리고 중국에서 그들이 행한 난징 대학살, 일본에서의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들에 대한 학살 그리고 나치가 행한 홀로코스트 등은 인류가 과연 존속되어야 할 정도로 선한 존재인가 의문이 인다.

현대에도 장기 적출을 위한 납치로 경악스럽지만 20세기에 미국 정부가 군인들과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살인병기로 사용하려 최면과 마약을 이용해 세뇌했다는 [MK 울트라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가 음모론으로 알려졌으나 21세기 되어 사실로 밝혀졌다. 20세기에도 후반에 미국 흑인들을 대상으로 매독을 전파해서 이 극도의 전염병이 전파되는 과정을 추적했다는 것이 음모론으로 돌았으나 이 또한 21세기가 되어 미국 정부 산하 미질병청에서 승인을 받고 행한 실험인 것이 사실로 밝혀졌다. 개인주의적 관점으로 사건을 보는 미국인들은 이것이 한 질병청 관리이자 의료인의 개인적인 도덕성 문제이자 매드사이언티스트의 그릇된 판단에 기인한 범죄로 보며 대중적 담론에서 묻히게 되었다. 하지만 모든 인종의 여성이 흑인 남성에게 성적으로 호의적인 시대 상황에 이 실험이 흑인 사회만을 향한 실험이었다고 생각하고 미국 시민들이 문제의식 없이 넘어가는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미국 시민 전체에 대한 미국 정부 차원의 질병 전파 과정을 모니터링 하는 실험이었다는 것이 사실일 텐데도 말이다.

한국도 선감학원(서울 경기 지역)과 형제복지원(부산 경상도 지역)이라는 어린이를 아무나 잡아다가 성적으로 유린하고 폭력으로 노동력을 착취한 역사가 있다. 21세기의 한국 전라도 신안이라는 곳에서는 염전 노예라고 다른 지역 사람들을 잡아다 노예로 만들어 십수 년을 무임금으로 노동력을 착취하기도 했다. 그걸 전라도의 법원에서 관행이라며 집행유예를 판결한 판례도 있다. 전라도에서는 전국에서 시신으로 발견되는 숫자보다 더 많은 숫자의 시신이 매해 발견되고 있고 한국의 전국 곳곳에서 머리 없는 시신과 상반신 없는 시신들이 발견되고 있는 것이 현재의 대한민국 현실이다.

한국 한해 실종자 수는 7만 명 이상이고 중국은 한해 100만 명이 실종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밀입국자들 자녀 수만 명이 실종되었다. 한국에서 길거리를 가는 여고생을 마구 폭행해 차에 태우는 남자들의 모습이 감시카메라에 찍히기도 하고 중국에서는 아이를 안고 가는 엄마에게서 순식간에 아이를 빼앗아 차에 싣고 사라지는 남자들의 모습이 감시카메라에 찍히기도 하는 세상이다.

21세기 초에는 한 중학생이 게임을 하다가 사람을 죽여보고 싶다며 자기 초등학생 동생을 난자해서 죽인 사건이 있었고 자기 아이를 고층 아파트에서 창밖으로 던진 엄마도 있었다. 사회생활이 여의치 않던 20대가 사회와 타인에게 적의를 품고 서울 번화가 한복판에서 스포츠 경기를 즐기듯 마라톤을 하며 아주 먼 거리 동안에 지나가는 자기 또래의 남자들을 마구 찔러 죽인 사건이 있었던 건 지금으로부터 몇 해 되지도 않았다. 돈이 이유인 사건들은 모두 배제하고 언뜻 기억나는 충격적인 사건들만도 이렇다.

정치가의 범죄나 특정 정치인이 타국 조직범죄자들과 연루되었을 수도 있을 사건들은 현재 법들이 말할 수 없는 시대를 만들어 말하지 않는다. 직위나 계층을 막론하고 모든 인류가 문제이다.

인류 문명은 실패한 문명이다. 개선의 가능성도 없다. 인류는 멸종하는 것이 낫고 이것만이 지구가 개선되는 길이다.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네가 뭔데 그런 판단을 하느냐’고 하지만 그건 누구나가 판단할 수 있는 일이다.

과거에 한국에서는 친아버지와 계모에게 맞아 늑골이 부러지고 온몸이 멍투성이로 죽은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아직 미취학 아동이었고 온몸에는 다리미로 지진 자국과 담뱃불로 지진 자국이 있었다. 동급생들에게 폭행당하고 강간당한 채 음부가 지져진 채 죽은 여학생도 있었다. 그 여학생이 중학생인지 고등학생인지도 기억나지 않지만.

한 해 중국에서는 27만 명에서 34만 명 정도의 어린이가 실종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런데 세계기구 산하 기관의 중국 장기매매에 대한 조사에 의하면 전 세계 어린이 간의 이식 사례는 모두 합해야 한해 1000명인데 중국은 한해 3000명이다. 중국의 장기 적출 사례를 조사한 기록을 보면 중국에서 망명해온 군인과 의료인들이 보고하기를 태어난 그날 아기 부모에게 사망했다고 거짓으로 통보하고 바로 아기를 죽여서 장기를 적출한 사례도 있다고 한다. 아기던 어린이던 장기를 적출해 성인에게 이식하면 두세 달 사이에 성인의 장기 크기가 된다는 것이 의료진들 증언이다. 이런 실정이라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 중국에 방문해 시진핑 중국 주석을 만나 장기만 새걸로 바꾸면 영생할 수 있다고 말해 세계적 논란이 되고 러시아 대통령실 대변인이 이에 대해 해명까지 했던 것이다.

상상해 보라. 부모에게 학대당하던 아이가 집을 나서서 힘없이 걷고 있을 때 한 아주머니가 다가와 손을 잡아주는 모습을. 그 아이는 따듯한 손길에 이끌려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라며 따라나설 수 있다. 그 아이는 아줌마가 건네는 따듯한 음료수를 마시고 스르르 잠이 들었다가 눈을 뜨면 차가운 철제 침대에 묶여있는 현실에 처할 것이다. 아이를 보호해주어야 할 어른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그 아이의 눈과 장기를 적출하는 것이 이 세상이다. 그 아이가 “이 세상은 지옥이구나! 사람이 악마구나! 이딴 세상 멸망해 버려라!”라고 소리없이 절규하며 죽어간다고 그 아이에게 누가 “네가 뭔데 그런 판단을 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런 아이가 있는 세상을 멸망하는 게 낫다고 생각도 못 해야 한다는 것인가! 이 세상은 아무리 생각해도 멸망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나은 세상이다.

본서는 앞서 말했지만 저자의 긍정적인 답이 와닿기보다는 생각해 볼 주제를 주었다는 자체로서 의의가 있는 책이다. 시대를 보고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존속할 가치가 있다’라는 생각이 드는 사람들이 과연 있을지 모르지만 어쨌건 생각할 기회를 주는 자체로 의미가 큰 책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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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11-01 00: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흠 리뷰글을 읽어보니 과연 인간이 지구상에 존재하는것이 좋을까 하는 회의적인 생각이 드네요 ㅜ.ㅜ

이하라 2025-10-31 11:42   좋아요 0 | URL
저는 개선된다면 모를까 인류가 지금 이대로 존속되어선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절에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지 않을까 싶어요.
 
죽음을 모른다고 걱정하지 마라 - 영혼의 철학자 몽테뉴 인생 수업
미셸 에켐 드 몽테뉴 지음, 고봉만 옮김 / 아를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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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모른다고걱정하지마라 #가려뽑아새로번역한수상록 #미셸에켐드몽테뉴 #고봉만 #도서출판아를 #수상록 #에세이

 

몽테뉴의 이름은 많이 들어봤으나 그의 수필을 접한 건 처음이다. 엮고 옮긴이인 고봉만 님은 몽테뉴의 [수상록]을 인생의 주기마다 거듭 읽고 또 읽어왔다고 한다. [수상록]은 이 장르를 열었다고 인정받는 최초의 저작이라고 고봉만 님은 언급하고 있다. 물론 나로서는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도 떠오르기는 했지만 아마도 이 둘의 서술과 주제를 펼치는 방식에서 차이가 있어서 그리 말씀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본서는 [수상록]에서 죽음에 대한 주제를 가려 뽑아 엮은 책이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죽음이 만연한 이 시절에 죽음을 돌아보는 본서가 출간되어 조금은 다른 의미로 다가오지도 않을까 싶기도 했다. 사람에게 죽음이란 두려움일 수도, 따스하게 또 다른 삶으로 이양하는 교차로이기도, 버거운 삶을 끝내며 다른 삶을 꿈꾸는 어두운 희망이기도, 또는 실패에 대한 수긍이기도 하다. 아마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수 만큼에 죽음의 의미가 있을 것도 같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에도 명확한 건 이건 상당히 선명하고 강렬한 경험이고 딱 그런 크기의 경험할 순간에 대한 감정이라는 것이다. 두렵던 후련하던 그저 암울하던 각자마다의 감정을 갖게 되는 가장 뚜렷한 정서적이기도 실제적이기도 한 경험일 것은 명백하다. 그래서인지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들도 이것이 걱정이라는 말에 수긍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죽음을 모른다고 걱정하지 마라] 저자는 수상록에서 죽음을 화두로 가려 뽑아 옮긴 이 책의 제목을 이리 지었다. 본서에서 몽테뉴는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거부하려 애쓰기보다는 죽음에 단단해지라고 조금씩 죽음에 적응하라는 듯 말하고 있다. 서양 철학에서는 흔히 메멘토 모리를 말하는데 죽음을 기억하라는 이 말의 깊이를 서양인들 그것도 과거의 서양인들은 명확히 느끼며 살았을 테니 말이다. 몽테뉴는 1533년 태어나 1592년 사망했는데 그가 살던 시대는 전쟁이 끊이지 않던 시절이다. 몽테뉴의 청년 중년 시절은 종교 전쟁이 지속되었다. 내전으로 사회에는 질서가 무너졌고 사람들 간의 신뢰에도 금이 갔으며 누가 친구인지 누가 적인지도 알 수 없는 시절이었다고 한다. 오늘 밤 누가 나를 배신해 죽일지 모르고 내일 아침 눈을 떴을 때 자신이 자유의 몸일지 확신할 수 없는 시대였다고 말이다.

 

이런 시대 상황과 의료가 발전하지 않아 유아들이 거듭 죽어가던 상황에서 몽테뉴의 자녀들도 거듭 죽어갔다. 몽테뉴의 첫딸은 태어난지 두 달 만에 죽었고, 둘째는 7주 만에 죽었다고 하며, 셋째는 석 달 만에, 넷째는 며칠도 못 살고 죽었다고 한다. 다섯째만이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몽테뉴는 내 아이들은 모두 젖먹이 때 죽었다.”라고 자신의 글 행간에 적었다고 한다. 그는 둘째와 셋째 같은 경우에는 이름도 짓지 않았다. 아마 두려워서였을 것이다. 며칠도 못 살고 죽은 넷째도 이름이 있는데 그 역시 두려워서 지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절친 라보에시는 몽테뉴가 20대이던 시절에 결핵으로 죽었는데 몽테뉴는 나 자신이 반으로 쪼개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고 적었다. 그의 동생 역시 사망했다. 그 시절에는 죽음이 일상적이던 시절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죽음을 꺼려하거나 부정하려 하기보다는 수긍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는 듯했다.

 

영원불변함 자체도 사실은 시들어 힘이 없는 움직임에 불과하다.” 그에게 죽음에 대한 인상이 어떠했는지가 다가오는 문장이다. 그는 영원한 것을 믿지도 기대하지도 못했다.

 

나는 존재를 그리지 않는다. 내가 그리는 것은 과정이다.” 그는 순간순간의 연속 속에서 살아있음을 느끼고 안도했던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그는 죽음에 지는 걸 그저 받아들이기보다는 살아있는 지금에서 느끼는 희열에 집중하는 길을 선택했다. “인간의 지극한 복은 행복하게 죽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인상이 그에게 더욱 삶에 대한 애착을 가지게 했음을 느낄 수 있는 문장이다.

 

신은 조금씩 빼앗아감으로써 인간에게 은총을 베푼다. 이것이 노화의 유일한 미덕이다. 노화를 겪으며 조금씩 죽어온 덕분에 마지막 순간에 죽음이 완전하지도 고통스럽지도 않은 것이다.”

 

죽음이 어디서 우리를 기다리는지 알 수 없으니 어디서든 죽음을 기다리자. 죽음에 대해 미리 생각하는 것은 자유에 대해 미리 생각하는 것이다.”

 

그토록 짧은 시간 동안의 일을 그토록 오랫동안 두려워할 이유가 있을까? 오래 사나 일찍 죽으나 죽음의 관점에서 보면 마찬가지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히파니스강에는 단 하루밖에 살지 못하는 작은 동물들이 있다고 한다. 그 동물들 중 아침 여덟 시에 죽는 동물은 청춘에 죽는 것이고, 오후 다섯 시에 죽는 동물은 노후에 죽는 것이다. 이토록 짧은 동안의 일로 행복이니 불행이니 하는 것을 보고 웃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죽음에 대한 강렬한 인상이 그의 의식 속에서 점차 승화되어 가며 위트와 함께 다른 감상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본서에서는 죽음만이 아닌 그의 의식들도 돌아보게 된다. 그는 늙어가며 자신에게 자제력이 생겼다고 말하고 성숙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말을 무겁게 여기지 않았다. 늙고 병들어서 활력이 사라져 가면서야 멈추게 되는 것을 절제한다거나 자제력이 생겼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즐길 수 있을 때 즐기는 것은 당연하다고 영혼과 육체는 부부처럼 서로 의지하며 절제 속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쾌락을 적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더 나은 삶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는 경험을 통해 우리의 영혼을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성적 사유와 교육을 기꺼이 신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이다. 이는 시행착오가 있더라도 실천하는 과정 속에서 숙련되고 성장한다는 말일 것이다.

 

그의 말들은 상식적이고 이성적일 때와 직관적일 때가 교차하며 영혼에 이끌림과 울림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시대에 주던 울림이 이 시대에도 동요하게 하는 것은 인간에게 시간을 관통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시대의 영혼에게도 필요한 질문과 조언에 대한 궁금함이 인다면 들어봐도 좋을 말들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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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뱅크 레볼루션 - BaaS로 다시 태어나는 금융의 미래
김준태 지음 / 슬로디미디어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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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뱅크레볼루션 #김준태 #슬로디미디어 #채성모의손에잡히는독서 #BaaS #블록체인 #핀테크 @chae_seongmo @slodymedia

 

<채성모의 손에 잡히는 독서>를 통해서 #도서협찬 을 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현재 금융의 변화는 대부분이 체감하고 있을 것이다. 방문해 이용할 은행 수는 줄고 있고 은행 거래는 대부분 스마트폰 등을 이용한 온라인으로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금융업의 기능이 최소화되어 가느냐 하면 그건 체감과는 다르다. 네이버, 카카오, 쿠팡 등 지불 결제를 하는 방식이 달라져서 그렇지 결제 빈도는 오히려 대다수에게 늘었을 테니 말이다.

 

본서는 기술 발전과 적용으로 현재의 금융이 어떻게 변화하고 기업과 융합하고 있는지가 다가오는 책이다. 쿠팡, 네이버, 카카오, SSG 등에서 지불 결제 방식과 시스템의 변화를 그리기도 금융상품과 어떻게 연계되는지도 풀어내어지고 있다.

 

본서를 통해 금융은 더 이상 독립된 위치가 아니라 기업의 필요와 융합하며 일상 속으로 침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책 제목의 전면에 등장하는 Baas(Banking as a Service)의 개념을 통해 금융이 어떻게 플랫폼화되었는지 어떻게 일상 속에서 기능하고 있는지를 실제 기업과 우리 일상의 단면들을 예로 들며 시스템의 면면을 이해하게 서술하고 있다.

 

커머스, 농업, 자율주행을 비롯한 모빌리티 전반과 함께 금융의 기능적인 면이 시대 흐름 속에서 사라져가는 것이 아니라 더 일상에 긴요하게 그리고 다채로운 양상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렇다고 금융이 기업의 부속적 기능을 하는 방향으로 역할이 위축되었다기보다는 기업 활동 전반에서 기획과 설계, 실적용, 변화 등에 구심점 역할을 하는 하나의 시스템으로 변모해 가는 과도기라고 보인다.

 

이런 금융 변화의 축은 블록체인과 같은 기술의 혁신이 일구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변화는 암호화폐, NFT와 같은 경제 시스템의 전환을 가져오는 요소들과 결합하며 이제까지 이어온 세계관으로 보자면 기업에 과도한 힘을 부여하게 되는 것이라 해석된다. 또 본서에서는 긍정적으로 그리고 있는 ESG를 위한 미래 금융의 역할은 사실 기후위기설과 환경주의 등의 맹점을 간과하고 우리가 현실에서 눈에 보이는 변화를 위기로 인식하며 순순히 순응하는 바가 탄소발자국 추적 같은 프로그램과 연계되며 모빌리티, 블록체인, 암호화폐나 CBDC와 결합하면, 결국 우리 일상을 얼마나 제재할 수 있고 통제사회 속에서 제한 속에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 것인지를 대부분은 주목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편리해진 삶만을 낙관적으로 그리며 암담해질 가능성을 회피하고 외면하는 데 결국 대다수에 민중이 맞이할 현실은 팍팍하고 삭막하다는 말 이상의 사회가 될 것이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양극단의 체제가 일종의 사회 실험적으로 시대를 가로지르다가 첫 번째로 공산주의가 망했고 이제는 자본주의가 망하는 것을 지켜보게 될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의 총아인 기업이 만개하는 시대를 가져오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이 두 체제가 사람들 곧 대중이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의도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가정을 한다면 앞으로는 ESG가 밝게 그리는 이상과는 다르게 기업의 주주들이라는 자본가들 일부만이 자신들만의 리그 속에서 살아가고 대중은 절멸해 가는 시대 상황을 맞이하게 될 것이고 AIAGI가 되고 ASI가 되어갈 현실 속에서 대중은 경제적 도태 속에서 처분되는 자멸 아닌 자멸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 수순인 것 같다. 자본주의는 기업과 자본가만을 위한 시스템이었다는 걸 깨닫고 대중은 사라져 갈 것이다. 개인주의, 능력주의, 승자독식, 기술 발전만을 낙관적 시선으로 보는 시대에 이런 전망은 들리지도 않겠지만 말이다.

 

어쨌건 본서는 대부분의 개인이 지불 결제 시스템의 변화와 암호화폐나 CBDC 그리고 블록체인의 기술로 인해 체감하고 있거나 예견하고 있는 금융의 시대적 변화가 어떠한 체계와 기술로 가능한지 이후의 변화는 어떠할지를 헤아려 볼 수 있도록 한다. 읽어볼 만한 책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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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 없음 - 격동의 세계를 이해하는 세 가지 프레임
헬렌 톰슨 지음, 김승진 옮김 / 윌북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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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에 대해서는 단기적 현상 너머 수십 년에 걸친 구조적 흐름을 읽어내는 데 탁월한 역사가라고 하며 민주적, 경제적, 지정학적 혼란의 역사를 연구하고 복잡한 현대사를 이해하는 새로운 틀을 제시해 학계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는 저자 소개글이 있다.

 

세계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프레임들에 주목하고 있어 이 책도 관심 분야라서 선택하게 되었다. 다만 독해에 필요한 난이도가 극상이라 책을 읽고도 맥락만이 남았다. 올해 중 반드시 다시 읽을 책이고 재독을 하고 나서 리뷰를 해야 할 것만 같은 책이지만 우선 가벼운 리뷰를 남긴다.

 

본서는 지정학, 경제, 민주정치라는 세계의 틀로 현대사를 움직여온 힘을 그려내고 있다. 세계 패권과 격동에 중심에는 미국이 있었기에 에너지와 함께 달러를 주목해야 함도 분명할 것이다. 본서에서는 세계사를 움직이는 것은 실리이며 에너지에 의해 역사적 격동들이 일어났음에 주목하고 있다. 현재 러시아와 유럽 간의 에너지 역학도 러우 전쟁과 함께 재편되었다. 본서에서는 현대사의 격동에 미국의 실정이 미친 영향을 그리고 있기도 한데 개인적으로는 저자가 논하는 세 가지 틀만으로는 현대사의 향후 전환점을 그려내기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종교적인 프레임을 표면상 드러내며 진행되고 있는 이스라엘의 확장세와 이슬람 무장세력들의 확산도 그렇고 미국에서 차별철폐주의와 함께 정치적 올바름이 부각되며 사회적 도덕적 혼란이 가중되는 것도 그렇고 이 시점에 미국 보수 언론이 대대적으로 중국의 장기 매매 산업과 그로 인한 범죄에 대한 뉴스와 다큐멘터리를 대거 방송하는 것도 그렇고 이건 종교 사상 윤리의 측면으로도 충격적 인상을 심어주며 선과 악의 대결이라는 구도로 세계의 격돌을 해석하도록 유도하는 경향도 없지 않다고 생각된다. 실리나 민주주의 가치를 가장 큰 해석의 틀과 관점으로 제시하던 기존의 역사 해석의 관점과는 다른 부분이 큰, 세계사적 전환의 시국이 아닌가 한다.

 

저자는 패자의 동의를 논하며 패자의 동의가 없는 민주주의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언급을 하고 있지만 현대사에서 지금까지는 패자의 동의란 강자의 요구와 강자가 제시하는 규정보다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앞으로의 다극화 시대에는 패자의 요구가 시대적 전환에 중요한 전환의 요소가 될 것이다. 현재 다극화 시대를 예측하고 그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패권국가 미국의 주도로 야기된 대전쟁의 시국 이후에는 패자들의 안정화 요구가 뒤따르게 될 것이 자명하고 그 약소국들의 요구는 국제기구의 권한 강화나 세계 단일 정부 수립을 향한 도정에 들어서는 시대 흐름을 가져올 것이라 예측된다. 이는 다극화 시대를 예측한 미국이 그 시대 흐름에서도 미국의 영향력을 잃지 않으려는 대응으로 변화의 흐름을 주도하려 의도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본서에서 이야기하는 지정학, 경제, 민주정치라는 세 가지 프레임으로 해석될 수 있었던 역사 흐름과는 다른 도상에 들어서게 된 것이 근래의 역사 흐름이다.

 

앞으로의 세계상이 기존 세계관과는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이 나의 예측이기는 하지만 지금까지의 세계사 흐름이 실리라는 실체를 벗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향후의 세계사에서도 그 이면에는 분명 실리 추구가 따를 것이다. 하지만 향후에는 선이니 정의니 세계와 인류의 요구니 하는 이상적인 표상이 세계인들의 수긍 속에서 전면에 내세워질 수 있고 알고 보면 하등의 정의나 선도 없는 이 세계가 선전적으로는 표방하는 기치가 되지 않을까 예측한다. 중국의 장기 매매 산업에 대해서도 한국의 정치와 치안까지 야합해 키워지고 있는 부정과 범죄가 미국 정보기관에서 첩보 입수를 하지 못해 단죄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미국이나 세계기구가 개입하지 않는 것은 전 세계가 경악할 수준으로 범죄와 피해 규모가 확장해 세계적인 이슈가 되면 그때 절대악을 처단하는 절대선의 정의 구현으로 선전하려 관망만 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이 아닌가 싶다. 이 시대에는 진정한 선은 없다는 말이다.

 

어쨌건 본서는 지금까지의 역사를 돌아보는 프레임을 갖추는 데는 좋을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후에 다시 본서를 재독하면서 깨우치는 바가 크리라 기대된다.

 

북스타그램_우주 @woojoos_story 모집, @willbooks_pub 도서 지원으로

우주서평단에서 함께 읽었습니다

 

#우주서평단 #질서없음 #헬렌톰슨 #사회사상사 #윌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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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 이후의 질서 - 트럼프 경제 패권의 미래
케네스 로고프 지음, 노승영 옮김 / 윌북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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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이후의질서 #케네스로고프 #경제경영 #투자 #달러패권

 

#윌북 으로부터 #도서제공 을 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세계는 꽤 오랜 세월 미국 패권이 막강한 단극화 시대를 거쳤다. 현재는 다극화 양상으로 나아가고 있다. 미국이 세계적으로 행사하던 힘의 불균형을 세계 경찰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하던 양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도 세계적 변화의 추세에서 자신들이 여력을 다하지 못할 것을 이미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의 패권은 군사력도 그렇고 팝이나 영화 같은 문화의 힘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오일 머니라는 미국 달러의 힘도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 시절에는 미국 군사력을 위협할 나라는 없다 해도 타격은 줄 수 있을 것이며 오일 머니의 영향력을 흔들려는 시도들도 있다. 중국을 비롯한 여타 국가들이 오일 머니를 대체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연합적인 화폐를 구상하기도 했었다.

 

과거에는 미국 역시 연합 화폐를 구상하기도 했었다는 저서들이 있기도 했으나 이제는 CBDC의 영향을 고려해야 하는 걸 너머 스테이블 코인을 위시한 암호화폐의 미래가 어떠할지도 고려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아직은 정체 중으로 보이지만 곧 등장할 메타버스 내에서 국가의 영향력을 초월할 기업들의 저력도 새로운 체제의 지불 시스템을 가져올 것이다. 이미 대중 누구나가 알고 있듯 외형적으로도 실체적으로도 미국 정부의 공영기관이 아닌 개인 소유인 FRB도 이 시절이 지나면서는 그 효용이 달라질지 모른다. 이미 20세기 초에 록펠러(로케펠러)가의 수장은 국제회의에서 화폐생산권만 우리에게 있다면 정치가 어떻든 상관하지 않겠다고 발언했었다. 이제는 FRB라는 공영기관 역할을 하는 민간기업도 필요치 않은 시대다. 과거에는 형식적으로라도 미국의 화폐생산은 미국 채권을 거래하며 정부 주도형으로 보이는 외양이라도 띠었지만 스테이블 코인과 암호화폐는 각 기업의 화폐생산권을 당연한 권리로 인정할 시대를 가져올 것이다.

 

이 시절까지 지속해온 세계 운영의 구조가 더 이상 유지될 힘을 잃는 것은 새로이 개발된 기술들로 어쩔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그 첨단을 만들어 걷고 있는 전문가들은 그런 변화의 양상이 어떤 결과와 어떤 시대를 가져다줄지 대중에게 경고해 주지 않고 있다. 개인들은 다방면의 독서와 데이터를 통해 정보를 접하고 통합하고 정리하는 과정을 통해 미래 예측을 해내는 수밖에 없다. 그런 까닭에 다채로운 분야의 책들을 읽어야 할 필요가 있고 이해의 범주를 넘어서는 책들도 맥락만은 이해하고 수용하며 접해야 하지 않나 싶다.

 

본서는 미국 달러 패권의 역사를 과거부터 현재까지 조망하기도 하고 그에 미치는 영향력들을 돌아보기도 한다. 일본 엔화, 소련 루블화의 영향력을 돌아보기도 하며 유럽 유로화의 잠재력을 논하기도 한다. 미국 경제 위상에 도전하는 중국 경제의 저력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각국 경제의 과거와 현실을 조망하게 된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르기에 세계 경제의 변화들을 돌아보며 경제 환경이 화폐 전쟁에서 미친 영향력들을 헤아리게도 한다. 달러 패권의 변화를 논하며 CBDC와 스테이블 코인, 암호화폐 전반을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아마도 앞으로의 화폐전쟁은 저자의 깊은 강의에도 불구하고 표면적으로든 실체적으로든 국가가 아닌 기업이 주도하는 양상이 겉으로도 확연히 드러날 것으로 예측되기도 했다. 현재의 다극화된 세계 패권 시절이 결국에는 미국이라는 단일 국가의 영향력만을 위축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술 혁신들의 적용과 함께 국가 정부가 아닌 글로벌 기업들의 영향력을 드러내는 시대를 빠르게 가져올 것으로 예측되기 때문이다. 이 시절의 끝은 아마도 어떤 국가도 승리자로 자리매김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본서는 하버드 대학 국제 경제학 교수이자 IMF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저자가 자신의 전문 분야에 대한 전문성을 담아 써낸 저작으로 아무리 비경제학도까지 배려한 저작이라고 해도 경제 지식이 전무하고 조금만 경제적 전문 지식을 이야기해도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은 나 같은 독자에게는 다소가 아니라 무리하게 무리한 저작이다.

 

하지만 이 리뷰에서 이미 언급했듯 전문가들은 시대적 변화와 기술 혁신이 어떤 미래를 가져다줄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간명하고 타격감있게 직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세계적인 지성이 아닌 평범한 우리, 대중과 개인은 그래서 더더군다나 버거운 정보가 담긴 책들과 데이터도 빈번하게 접할 필요가 있다. 미래를 알고자 하는 건 대비하고 싶어서고 살아남고 싶어서다. 그렇다면 버거워도 다가서야 할 것만 같은 정보에는 다가서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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