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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톡 3 - 조선백성실톡 ㅣ 조선왕조실톡 3
무적핑크 지음, 와이랩(YLAB) 기획, 이한 해설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4월
평점 :
페이지별 샷은 다른 님들 첨부사진 보시면 될듯 싶다.
종묘사직에 대한 어의풀이는 예전 도올 김용옥교수님 tv논어강좌인가에서 보았던 기억이 있는데 다른 tv강의였던지도 모르겠다. 근데 깡그리 잊었다가 이번 참에 다시 알게 되었다. 마누라와 영감의 어원은 이젠 상식이다시피한 정보이고 장영실의 업적과 서운관에 대해서는 드라마 장영실 보신 님들이라면 다들 알 내용일거다. 가체가 자연모발로 만들어졌다는 것과 어마어마 하게 무거웠다는 것도 상식이다. 중국의 청나라 시절 가체도 만만찮은 무게였다는 다큐멘터리도 있었다. 조선시대 내시가 혼인도하고 입양도 했었다는 건 종종 역사다큐에서 나왔던 내용이다. 삼국지 보신 님들은 다 알 것이듯 조조 역시 후한시대 환관에게 입양된 사람이다.
이 외에도 세종 대에 관청 업무 여종들에게 7일이던 출산 휴가를 100일로 연장해 주었다는 것이나 출산 전에도 1개월 휴가를 주었다는 내용도 있다. 산모의 남편에게도 30일 간의 휴가를 주었다고 한다.
명나라 영락제 때의 정화원정대의 정화님이 환관인 것은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다. 저자는 당나라 현종 때의 '고력사는 힘이 장사로 유명했다'며 '내시가 여성적이라는 건 편견이다'란 말도 하고 있다.
저자는 내시들의 섹스스캔들로 숙종 때 쫓겨난 내시 4명과 방자(房子 , 궁궐 일하는 여종) 4명의 이야기를 들고 있다. 태조 때 신덕왕후 강씨의 막내아들이자 세자로 책봉된 방석의 세자빈인 현빈 유씨가 쫓겨나고 젊은 내시 1명이 참수 당한 사건도 내시의 섹스스캔들 의심사례로 보고 있다. 태조에게 무슨 이유냐고 신하들이 참수형 내막을 추궁했으나 태조는 끝까지 집안 일이니 상관 말라며 이유를 결코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내시의 섹스스캔들로 의혹을 살만 했다고 본다.
사약 먹고도 죽지 않던 사람들 이야기나 어린시절 tv에서 인형극으로 보았던 오성과 한음이 친구가 아니라 나이차이가 5살이나 나던 서로 예의를 지키던 형동생 사이였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게다가 어린시절 부터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니라 20대에서야 알게 된 사이라고 한다. 방송이 한국사에 대한 역정보를 국민들에게 심어주다니...
조선시대의 신체발부 수지부모 관점으로는 이해가 안가는데 조선시대는 남자들 귀걸이가 대세였다고 한다. 정유재란(임진왜란 몇 해 후 왜군이 재차 침공해 일어난 전쟁) 당시 적의 수급이라며 바친 머리의 귀를 보고 조선인의 수급을 왜적이라며 사기친 건 아닌지 판별했다고 한다. 조선남자라면 귀걸이한 자국이 있는게 당연하다는 정도니까 얼마나 남자들 귀걸이가 일반적이었나를 말해 주는 것이다. 왜적 첩자를 판별할 때도 "귀에 구멍이 없는 자를 특히 살펴 보라"고 했단다. 그 외 세종 때 사대부 자제들 귀걸이 목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금은 사용을 금지한 사례도 있다. 또 중종 때 종친 양평군을 사칭한 자를 판별할 때도 귀의 귀걸이 구멍의 크기를 보고 가려냈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0년 전인 1572년(선조 5) 임금이 '오랑캐의 풍습'이라며 귀걸이를 금지했으나 위의 정유재란의 예와 같이 조선사람이냐 왜군이냐를 판별할 기준이 될 정도였다.
흉배나 혼례복 같은 사소한 이야기도 있으나 소과, 대과 , 전시로 이어지던 조선시대 과거제 같은 알짜 상식도 있다. 소과와 대과는 각 초시라는 예선과 복시라는 본선이 있다고 한다. 소과만 합격해도 하급관리가 되며 대과에 합격하면 중앙관직을 얻었다고 한다. 전시라는 심층면접을 통과해야 장원급제라고 한다. 소과는 생원시라는 유교경전 논술 시험과 진사시라는 문예창작 시험으로 나뉘었다고 한다. 소과 합격 시 성균관 입학자격이 주어졌다고 하니 하급관리에 만족할지 진학기회로 삼아 이후 더 큰 야망을 펼칠지 선택할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성균관 입학 나이가 예전 모 드라마처럼 꽃미남 미소년들이 진학하는 것이 아니라 신입생 평균나이는 35세였다고 한다. (성균관 재학생은 학비,식비,주거비,병원비까지 게다가 심부름할 노비까지 국가에서 제공했다고 한다.) 늦은 나이에 소과에 합격하면 성균관 진학 기회가 주어져도 나이와 가정형편의 압박으로 하급관리에 만족했을 사람도 적지 않았을듯 싶다. -근데 신입생 평균나이가 35세인 성균관에 현대의 초등학교 입학 나이인 7~8세에 신입생이 되는 천재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왕세자들이었다고 한다. 역시 출발선이 다르다는 건 어떤 방면에서든 어느시대나 똑같았던거다.-
sns에서 반기문 유엔사무총장님은 선조부터가 인생역전을 이룬 가문이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님의 조상 반석평이란 분이 노비 출신이였다가 면천되어 천민출신으로 과거급제하여 관직까지 올랐다고 모 트위터리언이 트윗을 남겼었던 적이 있다. 근데 출신을 떠나 당상관(정3품 통정대부-문신-나 정3품 절충장군-무신- 이상의 품계에 오른 자)까지 올랐으며 중종 때 형조판서에 오르기까지 했던 인물이시더라. 출신 때문에 반발이 심했을텐데도 불구하고 저 정도 지위라면 아마도 그마만큼 능력이 출중해서 였으리라고 본다. 이 책에서도 반석평이란 조선 고관에 대해 나오지만 반기문 유엔사무총창님과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는다. 그 트친분 신빙성 있는 정보를 트윗한건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 트윗은 리트윗 안했었다.
조선시대 상소에 대해 전하며 조선시대 시위문화에 대해서 풀어 놓았다. 이 시대 시위 보다 지능적이며, 무력 시위는 아니면서도 행정마비와 교통체증 등 사회적 물의를 상당히 일으키는 형태였다. 복합상소伏閤上疏라 하여 궐문 앞에 누워버리 거나 도부상소(지부상소)라 하여 도끼를 옆에 두고 안건 철회를 안하려거든 배째라는 식인데 이 정도는 약과였다. 백성들의 고민을 들어주기 위해서인줄로만 알았던 신문고가 격쟁(징치기)과 함께 행정마비의 역할도 했다고 한다.
유소儒疏의 경우 성균관 유생들이 연대하여 상소를 쓰고 상자에 담아 상소를 궁궐에 전하기 위해 상소를 쓴 상소작성 지휘자와 전체 성균관 유생들과 사학 학생들 게다가 성균관 노비들까지 궁궐로 행진을 했다고 한다. 성균관 유생들의 행진 앞에서는 관리들도 말을 타지 못했다고 하며 상인들은 그날 장사를 못했다고 한다. 교통체증과 경제, 전방위적인 사회마비였다. 궁궐에 도착하여 상소를 전달하고 나면 임금이 자신들의 뜻을 들어줄 때까지 궁궐 앞에 천막을 치고 밥해 먹어가면서 버틴다고 한다. 임금이 단호하게 나오면 3번 상소를 다시 올리고 그래도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공관公館이라하여 대사성(성균관 교장)에게 공관할 것을 알리고 성균관 유생들 전체가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쯤에서 대사성이 임금에게 유생들의 뜻을 전하고 설득하는 과정이 이어진다고 한다. 1448년(세종 30) 기록상 최초의 유소 및 공관 이후 조선에는 대략 80 여 차례 이어진 시위문화라고 한다. 지성인들이라고 늘 옳은 판단을 하지는 않을 것이나 민중의 이런 과격한 의사전달에도 무력 대응하지 않는 또는 할 수 없는 위정자와 공권력이라니... 이 시대 보다 훨씬 낫지 않나 싶다.
1564년(명종19) 정은춘이란 작자가 어린이를 납치해서 쓸개를 꺼내고 살을 구워 먹었다고 하며 1566년 창병(아마도 중증인듯한, 피부병의 일종)이 유행하자 의관 한명이 사람의 간을 먹으면 낫는다는 말을 한 것을 발단으로 사람 사냥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서울 활인서나 보제원, 종루 근처 걸인이나 부랑자들이 많았다는데 4~5년 만에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아마 그 지역에서 걸인과 부랑자들이 자꾸 죽어가니 어느 정도의 인원은 사냥 당하기 전에 도망갔을 거라 믿어야 겠다. 어쨋건 그런 이유로 다음 타겟으로 어린이들을 노렸다고 한다. 1576년(선조9) 임금이 직접 "배를 갈라 사람을 죽인 이를 체포하라"는 특명을 내렸다고 한다. 조직적인 사람사냥 범죄집단이 사람의 간을 중국에 약재로 팔기까지 했다고 한다. 1594년(선조27) 임진왜란 휴전 중 기근이 극한에 달해 백성들이 사람고기를 먹으면서도 괴이하게 여기지 않는다며 강력하게 처벌하자고 사헌부가 청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 후 선조임금이 어명하기를 "심한 굶주림으로 부모, 형제, 이웃 간에 서로 잡아먹는다 하니 그러지 못하게 하라" 했다고 한다.
서부개척시대 금광에서 고립되어 서로 잡아먹었다는 기록을 본 기억이 있다. 또 소비에트 연방(現 러시아)의 감옥에서 탈출하며 샌드위치라 하여 3명이서 눈쌓인 대륙을 횡단하다 2명이 1명을 살해해서 먹었다는 실화바탕 영화를 본 기억이 있다. 중국도 과거왕조시대 기근이 극심할 때 인육를 먹던 사례가 있었다고 알고 있다. '중국 식인문화' 였나(?) 여하튼 그런 제목으로 내가 10대 중반 즈음 전문연구서가 출간되었던 것을 신문광고란에서 보았던 기억이 있다.
사람은 다 똑같지 않기에 누군가는 우월한 여정으로 숭고한 가치를 증명 할 지 모른다. 그러나 누구나에게 그런 기준을 요구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에 일어나는 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하나하나를 방치하고 외면하고 좌시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그러다가는 결국 사람 다 똑같지 않다는 것을 굳이 자신이 검증해내야 하는 결과만 가져올 뿐이다.
전쟁은 천재지변이 아니고 기근도 자연재해로 일어나는 것만이 아니다. 좀더 사려 깊었더라면 충분히 대비할 수도 있었던 사건들을 끝내 우리는 재난이라며 맞이할 때가 많았다. 이 시대 현재 당장 일어나고 있는 전쟁과 기아와 질병과 재해를 막는 것은 버겁다해도 향후의 인류가 사람다움을 잃지 않도록 대비해 줄 수는 있다. 앞으로의 인류가 겪지 않아도 될 일들을 방치하고 외면하고 좌시하여 구태여 감당할 수밖에 없는 현실로 가져다 주어야만 할까?
이 책은 가벼운 터치로 깊이 생각해 볼 주제를 거듭 안겨 준다. 제도와 사람과 생명을 두루 생각케 한다.
가볍게 보고 지나치고 말면 자기 삶도 남의 삶도 보이는 것 들리는 것 이상은 알지 못한다.
곱씹어 봐야 별거 없다면서 지나친다면 애초에 독서가 무슨 의미인가?
씹어 먹어야 할 건 씹어 삼켜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