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수업 - 따로 또 같이 살기를 배우다
페터 볼레벤 지음, 장혜경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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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쉬는 나무는 많은 비밀을 털어놓는다.... 앞으로 나의 나무들은 내게 많은 교훈을 들려줄 테지만 지금껏 나뭇잎 지붕 아래서 내가 깨달은 것만 해도 예전이라면 꿈도 꾸지 못했을 사연들이 많다. 당신에게도 나무들이 전해 준 그 행복을 나누어 주고 싶다."


중학시절 《식물의 정신세계》라는 책을 읽고 식물들도 인간의 감성과 다를 바 없는 정서를 느끼며 살아간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무수업』도 그 책의 연장선상일 거라 지레짐작 했었다. 하지만 이건 생을 그리고 있다. 숲이라는 동식물들이 이루어낸 그들의 문명(?)의 구조랄까 생리를, 나무의 생을 축으로 해 다양한 구성원들의 모습을 통해 담아내고 있다.


나무들, 균류, 이런저런 이름의 버섯류들, 나무좀, 진디, 딱따구리, 비버, 푸른머리되새, 어치, 사슴, 노루 등등... 자연계의 구성원들이 자아내는 그들의 문명(?)에 하루하루는 인간 사회 만큼 치열하면서도 인간이 만든 세계 보다 더 조화로운 이상적 세계를 보여주었다.


이기와 이타가 적절히 어우러지고 이기적인 전략이 이타적 사회를 구조화하기도 했다. 인류 문명과 유사하지만 숲이라는 더욱 탁월한 문명이 있음을 깨달았다. 


딱따구리는 그저 나무를 쪼아 나무 속 벌레나 먹고 구멍을 파서 둥지를 삼는다고 생각했다. 헌데 딱따구리는 딱딱한 나무의 껍질과 겉층을 약간 쪼아 균류가 침투해 나무를 부식시키길 기다린다고 한다. 균이 나무의 조직을 해체해 부드럽게 만들기를 한달여 동안 기다린 후에야 쪼아대서 둥지가 될 구멍을 판다고 한다. 그 이후에도 둥지가 된 구멍 내부를 균이 멈추지 않고 계속 부식시켜가는 것을 막기 위해 거듭 보수와 수선을 해야만 한단다. 그러다 딱따구리가 옮겨가면 다른 새와 다람쥐들의 거주공간이 된다고 한다. 어우러져 더불어 사는 것이 자연계의 진면목이었구나 싶었다.


비버가 댐을 만들려 나무를 쓰러뜨리면 시냇물에 쓰러진 나무가 웅덩이를 만든다. 그러면 센 물살을 못견디는 작은 생물들에게 숨쉴 공간이 된다고 한다. 그런 웅덩이엔 낙엽과 쓰러진 나무가 썩으며 부식산이 생겨난다. 그럼 부식산은 박테리아와 함께 유해물질을 제거하고 물살을 피해 숨어든 작은 생물들이 살만한 청정한 수질을 가져다 준다고 한다. (폭우 후에 그런 웅덩이에 이는 거품들은 부식산과 물살에 생겨난 공기가 결합하며 일어나는 것이라 한다.)


나무들 사이의 경쟁과 소통과 희생도 인상 깊었다. 나무도 종에 따라 빨리 성장하다가 성장이 더뎌지는 것, 처음엔 발육부진으로 다른 종의 나무 보다 더디게 자라나지만 끝내 거목이 되는 것 등 다른 성장 발육을 보인다고 한다. 같은 종의 나무도 개성이 다 달라서 나란히 선 세 나무도 겨울을 앞두고 어느 녀석은 빨리 낙엽을 떨구고 어느 녀석은 잎사귀를 오래 보유하고 있단다. 겨울이 오면 땅이 얼어 영양분과 수분을 줄기를 따라 가지를 거쳐 잎으로 이동시키기 어렵다고 한다. 그런데다 잎이 있으면 잎에서 수분이 증발해 나무가 말라간다고 한다. (겨울이 올 때쯤이면 침엽수는 수분증발을 막기 위해 잎의 표면에 수분증발 방지를 위한 두꺼운 왁스층으로 잔뜩 뒤덮는다고 한다.) 그래서 겨울을 앞두면 영양을 더 흡수해야 할지 잎사귀를 빨리 떨구어 수분증발을 막는게 나을지 결정해야 하는데 이때 나무 마다의 개성이 드러난다고 한다. 사람들 눈에는 그저 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나무도 저 마다의 개성을 지닌 채 나름 제멋에 산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판단착오가 있었더라도 뒤에 말할 공유에 의해 서로가 서로를 보살핌으로서 대처하는 것이다.


나무 사이의 경쟁만이 아니라 다른 생물과도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것이 자연계에서 나무의 삶이다. 뿌리 부근에 특정 버섯류가 자리잡으면 다른 나무와 영양분도 정보도 교류하지 못해 사망에 이르는 나무도 있다고 한다. 영양분과 정보의 교류... 그건 잠시 후 알아보고 나무의 분투를 좀더 보자. 나무는 천적의 위협에 방어물질을 만들어내 천적이 피해가게 하거나 심한 경우 사망하게 한다. 그와 동시에 다른 동종의 나무들에게는 미리 방어물질을 만들어내라고 향기를 매개로 정보를 준다고 한다. 더구나 놀라운 건 그런 정보전달의 과정에 향기만이 이용되는 것이 아니라 소리와 전기 작용도 역할을 한다고 한다. 


나무가 소리라니? 할테지만 학계 연구로는 나무는 220헤르츠의 소리를 뿌리에서 낼 수 있다고 한다. 한 나무의 뿌리가 침략자가 있다는 소식을 다른 나무들에게 알리면 다른 나무들 뿌리의 잔뿌리가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한다고 한다. (무슨 판타지 속 괴기수도 아니고ㅡ.ㅡ;;;) 전기 작용도 상상 밖이다. 같은 종의 나무들 끼리는 서로 뿌리를 얽히고 있으면서 천적 동물의 등장에 전기적 흐름으로 알려준다고 한다. 뿌리가 닿지 않을만큼 멀리 떨어진 동종 나무에게는 토양에 넓게 분포하고 있는 균류가 광섬유 역할을 하며 위험을 알리는 정보를 전달한다고 한다. 


-전기적 작용과 균류의 역할 그리고 나무의 기능이라고는 믿기 힘든 '소리'...(나무의 소리를 찾아서^^;) 다소 특이해 보이는 이런 현상들은 사실 토양에 퍼져 있는 균류의 역할을 공간이 대신하며 사람들 사이 흔히 일어나는 현상이다. 자신 또는 가족, 사랑하는 누군가가 위험을 앞두고 있을 때 우리는 인체적 이상반응이 일어나거나 예지몽을 꾸기도 한다. 어찌되었건 나무 사이 뿌리의 얽힘은 사회에서 서로 서로가 연결되어 있음을 상징하기에 적절한 예가 아닌가 싶다.-


이런 뿌리의 얽힘은 서로가 서로와 영양을 분배하는데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저자는 이를 사회복지라는 인간 사회의 제도와 연결 짓던데 이건 복지제도에 멈추는 것이 아니다. 공평한 분배 그 이상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란 나누는 것이다. 결국 누구에게 빼앗아 누구에게 주느냐 하는 것이다." 라는 <육룡이 나르샤>에서의 정도전 대사는 구시대적 사고 방식이다. 나무를 보라. 애초에 뺏어서 나눌 필요도 없다 애초에 뺏을 것도 없이 공유하지 않는가? 어느 나무가 모든 양분이 인간 사회처럼 정점으로 편중되는 것을 내버려두다가 뒤늦게서야 재분배하자면서 열 올리며 복지를 찾고 있느냐는 말이다.


나무가 살신성인하다거나 자녀를 죽음으로서도 돌본다면 누가 믿을까 싶다. 헌데도 숲에서는 어미 나무일지 그냥 이웃의 어른 나무일지가 다 자란 나무들 틈에서 빛이 가려져 광합성이 어려운 아기 나무를 그런 얽힌 뿌리를 통한 공유로 보살핀다고 한다. 더우기 가문비나무의 씨앗이 쓰러져 있는 죽은 나무의 몸통에 떨어지면 특히나 더 잘 발아한다고 한다. 이를 '시신의 회춘'이라고도 한다는데 이 죽은 어미 나무는 점점 부식되어 흙과 하나되며 그렇게 부식토가 되어 아기 나무를 돌본다. '죽어서도 아기의 요람이 되는 것이다' 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아기 나무라고는하지만 저자가 몇십년 수령의 나무 까지를 아기 나무라 보는건지 모르겠다. 저자의 말로는 스웨덴 달라르나 지방에는 수령 8000살이나 되는 가문비나무가 있다고 한다. 유럽에서는 150살 나무는 아직 어린나이의 나무라고 한다. 그러니 아기 나무가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 보다 10살 이상 연세가 많으신 고령의 분들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바이에른 숲 국립공원에 나무생물학자 마르틴 고스너 박사가 찾아와 (높이 52미터, 직경 2미터의 600세나 되신) 고목에 제충제를 살포했다고 한다. 이때 나무 주위로 죽어 떨어진 곤충이 '무려 257종, 2041마리'였다고 한다.


이 외에도 나무와 더불어 살아가는 생물들은 본서에 꽤 많이도 등장한다. 그 중 나무를 아프게도 하고 돕기도 하며 공생하는 여러 종의 균류가 있다. 이런 균류는 자신과 공생하는 나무가 양분이 모자라면 독을 방출해 톡토기 같은 절지 동물을 죽여서는 그로 부터 질소를 나무가 충당하게도 한다. 나무의 상처에 침투해 가지나 몸통을 손상 입히거나 심지어 나무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균류도 있다. 나무 입장에서는 해충인 여타 곤충들이 나무좀 의 공격에 저항하며 나무는 면역체계를 공고히 하기도 한다. 앞서 본 딱따구리가 나무를 해치는 것도 같겠지만 나무의 몸통을 침범하는 균류나 나무좀을 쪼아 먹어서 나무의 겉에 상처를 입히는 정도는 만회할 만한 도움이 되기도 한단다. 게다가 나무에 구멍을 파면서도 용케 수맥의 치명적 손상은 입히지 않으며 공생하고 있다고 한다. 어치 라는 새는 먹이감 삼아 나무의 열매를 따다가 모아 놓는데 그 과정에서 씨앗들이 먼거리로 가 싹을 틔우는 것이라 한다. 비버 같은 벌목꾼들도 나무 입장에서야 무자비한 살해자이겠으나 자연의 입장에서는 위에서 보았듯 나무의 또 다른 진가를 자연 속에 알려주는 매개이지 않은가? 인간들의 개발과 훼손으로 들이나 스텝(강수량이 풍부한 비옥한 지대) 지역에서 밀려난 사슴, 노루 같은 취약계층 동물들은 별 수 없이 나무 껍질을 뜯어먹으며 나무에게 고통과 손상을 주게 된다. 그 손상을 못버텨내고 죽는 나무가 있다해도 그 죽는 나무는 쓰러져 아기 나무의 요람이 될 것이다. 자연 속 갈등과 사랑은 그렇게 순환하고 또 순환하는 것이 순리인가 보다. 


순환의 순리를 나무와 바다 사이에서도 볼 수 있다. 일본 홋카이도 대학北海道大學의 해양화학자 마쓰나가 가쓰히코 교수는 '낙엽에서 나온 산이 개울과 시내를 거쳐 바다로 흘러가 플랑크톤의 성장을 자극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마쓰나가 가쓰히코 교수는 해안가에 나무를 많이 심으라 독려하며 실제 나무가 많으면 물고기와 굴의 어획량이 증가한다고 한다. 이를 언급하며 저자는 "숲은 또 전 세계의 다른 자연공간들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쯤이면 자연 공간 만이 문제가 아니라 지구라는 하나의 생명체를 구성하는 유기적 관계 속에서 숲은 지구의 생명 유지를 위해 필수 구성요소가 아닐까 싶다.


이 책 속 나무들도 그와 더불어 살아가는 여타 생물들도 서로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고 전략적 대응을 하기도 한다. 그렇게 우정도 사랑도 나눔도 매서운 갈등과 충돌도 두루 있지만 결국은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일방적으로 압도하며 갑질하는 구조이지 않더라는 말이다. 


나무가 자기방어를 못해 나무좀 등의 병충해로 가지 하나가 부식해 가면 가지는 결국 떨어져 나간다. 그리고 그렇게 떨어져 내린 썩은 가지는 균류의 도움으로 부식토가 되어 거름으로 재활용된다. 살아나야 할 나무를 위해 나무의 일부는 그렇게 자연히 사라져가며 나무의 새로운 날들을 위한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이 세계에서 그리도 오랜 세월 인류를 살게도 해왔지만 썩어가고 있는 제도가 있다면 과감히 떨어져 나가도록 해야 할 일이다. 난 그 썩어가고 있는 제도가 자본주의라고 생각한다. 또 자본주의라는 상처를 치료하는 과정에 대의민주정치에서 직접민주정치로 진화해야만 할 일이다. 그래야 새로운 날들을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죽은 이후 우리가 만들었던 시대가 부식토로나 남아 다음 세대가 새로운 제도를 만들도록 미뤄두기 보다는 더나은 선택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서로 뿌리를 얽고 균류를 배양해 서로 교감하고 소통하고 채워주면서 새시대를 열어야 할 것이다. 면역체계를 만들지 못해 자신에게도 이웃생명에게도 독만 내뿜을 줄 아는 아픈 나무들에게 우리의 뿌리를 건네고 품어야 할 일이다. '아프냐고 아프다면 우리가 함께이니 함께 나아가자고 더불어 살아가자' 고 그렇게 따스하게 사랑으로 서로를 채워가는... 아름답게 공유하는 시대를 우리는 만들어 갈 수 있다. 이것이 내가 부식토가 되어가며 한시대를 함께해온 생명들에게 건네야 할 전기적 흐름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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