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로소득 시대 부자들의 정체 - 우리는 왜 부자들을 감당할 수 없는가?
앤드류 세이어 지음, 전강수 옮김 / 여문책 / 202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의 원제를 직역한 제목이 부제로 한국어 제목 아래 실려 있는데 다음과 같다. [우리는 왜 부자들을 감당할 수 없는가] 부자들의 어떤 면 때문에 우리가 부자들을 감당할 수 없는지가 상세히 제시되고 있는 책이다. 하지만 그전에 저자의 부와 경제에 대한 정의들을 먼저 알아두는 게 전체적으로 독서를 잇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저자는 번다는 개념을 자신의 가치나 능력을 제공함으로써 보상을 받는 것으로 보는데 증여나 상속을 통해 부를 얻고 이를 투자하는 극부층은 버는 것이 아니라 불로소득이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저자는 투자도 사회적 인프라, 교육, 복지 등 미래에 투자하는 것과 사익추구를 위해 금융투자를 하는 투자는 투기에 가까운 것으로 보고 있다.

 

저자는 불로소득도 복지 등을 통한 정당한 불로소득과 투기적인 추출하는 불로소득을 각각 정의한다. 극부층의 추출하는 불로소득을 경계하며 비판하는 내용이 본서의 축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적 재난과 팬데믹 등의 재앙적인 상황에서도 부자들의 부는 극단적으로 상승하고 있으며 이는 상속과 증여라는 방식으로 전승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상속과 증여를 통해 쌓은 부로 극부층이 어떻게 자신들의 세계를 구축해가는지가 본서의 주요내용이다.

 

금융가들은 대출이자를 납부하기 어려운 사람일수록 이자를 높여 받고 부유층일수록 이자를 낮게 받는다. 나로서는 니 담보 내놔라라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더욱이 금융가들이 신용파생상품 등을 제작해 경제적 재난을 일으키고 이 과정에서 고객이던 서민들의 담보를 거의 수탈해 간다거나 하는 상황 등 거대 규모의 경제난을 일으켜도 이들은 법적 처벌을 전혀 받지 않는다. 서민이 소액을 훔쳤을 때는 벌금과 처벌 수위가 상당한데도 금융가들이 수탈을 할 때는 전혀 법적 처벌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걸 저자는 지적하고 있다. 이들이 마약상들의 자금을 세탁해주고도 처벌받은 사례는 없다고 한다.

 

주식투자에서는 이들은 내부자 거래와 시장 조작 등으로 얼마든지 부를 창출하며 고용주로서의 이들은 고용의 불평등을 조장해내 인턴제도와 비정규직 등의 업무 방식을 일반화해 쓰고 버리는 방식으로 정규직 임금을 주지 않으며 차별적 임금으로 사익을 추구할 수 있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자본을 투자했다는 이유만으로 아이디어 발상, 기획, 설계, 제작, 마케팅 그 외 모든 분야에서 활약하는 근로자들 보다 초월적인 연봉과 인센티브 그리고 주가 상승으로 인한 이익을 보는 것이 상당히 불합리한 구조이다. 게다가 대다수의 일반인들도 이미 알다시피 이 극부층 중 CEO 역할을 맡는 이들은 회사가 망해도 인센티브를 받는다. 애초에 회사를 제대로 운영하는 게 의도가 아니라 여러 회사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주주들이 인수 합병하는 회사의 주가가 상승해 준 데 대해 인센티브를 지불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극부층이 무서운 것은 그들이 원칙을 창조하는 집단이라는 데 있다. 다보스 포럼 등 그들만의 세계를 구축하며 그들의 원칙을 세계적 원칙으로 만들어 간다. 게다가 각국의 정치구조와 국제기구 등에 로비나 후원금 등을 통해 또 그들 내에서는 하위층일 인물들을 요직에 배치해 법과 제도 자체를 극부층에게 유리하도록 만들고 있다.

 

브레턴우즈 체제까지는 경제적 환경이 대중 다수에게 유익한 배경으로서 작용했는데 이후 경제적 환경은 극도로 악화되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국제 구제 금융의 지원을 받거나 세계화, 자유화에 동참한 나라들은 민영화와 규제철폐, 노동 보호 철폐(노동환경의 유연성이라며) 등을 통해 대중의 안정을 파괴하는 상황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국제기구든 중앙정부의 제도든 극부층에게 유리한 지경으로 제도를 완비해 나가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들은 법과 제도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악용하거나 새로이 구성하여 자신들의 부가 더욱 공고히 해지도록 만들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선가라던가 기부자라는 이름으로 대중적인 호응까지 얻고 있다. 하지만 빌 게이츠의 경우나 워런 버핏의 경우에서 보듯이 이들의 자선 사업은 재단을 만들어 그 돈으로 투자하고 사익과 이윤을 추구하는 하나의 사업 시스템이다. 게이츠 재단이 환경문제를 내세우며 농업 부분을 장악하고 팬데믹을 우려하며 백신개발과 생산에 투자해 막대한 부를 추출한 것을 이젠 모르는 사람이 없다.

 

저자는 마지막 결론의 장 직전의 장에서 환경 문제의 심각성을 언급하며 이에 대해 대응하며 경제인들의 부분별한 생산을 제재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나로서는 이도 해결안이 아니라고 보였다. 종말론적 환경주의 연구에 대대적으로 후원하는 것도 초극부층들이며 여러 미래 예측서들에서 언급되듯이 탄소 저감과 친환경 사업에 투자되어 신개발되었거나 개발 완료 직전 단계에 있는 기계와 시스템들의 수가 수백에서 수천에 이른다. 이들은 새로운 부의 창출을 위해 대대적인 혁신을 기획하고 있는 것이다. 창조적 파괴란 개념으로 발전을 거듭해온 그들은 대대적인 혁신을 위해 거대 규모의 파괴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공유 경제라는 개념을 들어 개선안을 이야기하기도 했으나 저자가 말하는 토지에 더해 지적 재산권까지를 포함한 넓은 의미의 지대를 공유화한다던가 해도 대대적으로 실업자가 양산될 AI와 로봇의 시대에 답이 되기는 부족할 것 같다. 극부층은 그들끼리 생산하고 판매하고 소비하는 완벽한 그들만의 세계를 갖게 될 가능성이 더 크지 않나 싶다. 다수의 대중은 초대량 실업자가 되어 그들에게 부담해야 할 짐으로 전락하고 말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을 읽으며 세계는 원래부터가 기울어진 운동장이었지만 그걸 벗어날 대안도 존재하지 않는구나 하는 감상이 무엇보다 크게 남았다.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관점을 대중화해서 대중의 성향이나 심리까지 제어하고 있는 그들을 볼 때 대중에게 유익한 방식으로 게임을 전환할 가능성은 결코 없어 보인다. 이미 끝난 게임이지 않은가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