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은 왜 싸우는가? - 정체성의 투쟁, 중동사 21장면
박정욱 지음 / 지식프레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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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중동에서의 충돌이 본격적으로 확장될 우려가 큰 가운데 모호하게만 두었던 중동에 대한 상식을 확장하기 위해 중동 관련 저작들에 손이 갔다. 도서관의 유용성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중동 관련서들을 몇몇 읽는 중인데 이 책이 그 두 번째 책이다.

 

부제가 [정체성의 투쟁, 중동사 21장면]이듯 중동사 전반을 아우르며 중동사에 주목할 대목들을 21개의 장으로 나누어 설명해주는 책이다. 무함마드가 신의 계시를 받은 날부터 예언자를 누가 계승하는가가 문제가 된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열, 오스만 제국, 이란이 시아파가 된 이야기, 사우드 가문과 와하비즘, 사우디아라비아와 요르단, 이라크가 자리잡은 배경, 터키 공화국의 성립, 이스라엘 건국, 1~4차 중동전쟁, 이슬람 원리주의의 성장, 레바논, 이란의 혁명, 이란-이라크 전쟁, 팔레스타인의 인티파다, 쿠르드족의 투쟁, 알카에다와 911 테러, 시리아 내전까지 중동사의 의미 깊은 대목들을 소개하는 책이다.

 

물론 중동의 역사 중 주목해야 할 대목이라던가 저자가 주목한 국가와 분쟁들에서 배제된 지역들의 역사는 언제든 역사적 중요성이 재정의되며 어디는 다시 줌인 되고 어디는 줌아웃 될지도 모를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대부분의 우리나라 대중들에게 낯선 이야기인 중동사를, 넓으면서도 맥락 깊게 설명해주는 저작이라는 감상이 들게 한다.

 

부제 마따나 이 책의 서술 전체가 중동에 정체성이 부여되고 그 정체성을 뚜렷이 하기 위해 투쟁하는 역사가 담긴 내용으로 이슬람 원리주의가 왜 그리 배타적이며 저항적인지 알 수 있기도 한 것이 오스만 제국을 패퇴시키고 중동의 지도를 재정립하려는 서구세력이 중동에서 행한 유럽 간의, 또 영국과 이슬람 간의, 또 유대인들을 향해서 한 삼중 조약이 문제가 되었고, 서구가 인도를 지키기 위해 이란과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을 향했던 적대적 책략, 현대에 이르기까지 산유국들을 향한 책략들 그 외에도 이슬람 각국을 향했던 이익 추구의 행위들은 서구세력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외교 정책이었을지 모르겠으나 침탈당하는 입장에서는 뼛속 깊이 아로새겨지는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서구세력들의 이런 양상은 이슬람의 의식있는 인물들이 정체성을 되찾고 공고히 하고자 하는 태도를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와하비즘이 자정을 위해서였다면 이슬람 원리주의는 저항을 배태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느껴졌다. 무슬림 형제단도, PLO(팔레스타인해방기구), 쿠르드 노동자당도 외부와 자신을 선 그으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자 하는 의지가 표출된 것이다. 그들은 저항함으로써 자신을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저항하는 타자는 그들의 반경에서 멀던 가깝던 외부인 것이다. 자신들이 선 그은 이것이 무슬림이고 이것이 이슬람이라는 그 선보다도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그들의 저항 방식에 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저돌적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심정적인 한 부분으로는 우리는 이슬람이 저항하는 자세의 어느 치까지는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일제강점기하의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저격도 다 한발만이었는지, 도시락 폭탄도 단 한 명에게만 피해가 가도록 세밀히 조율되었는지, 독립운동단체들이 상대국 민간인들에게는 절대 인명 피해가 가지 않도록 배려했는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으니 말이다. 나라를 잃거나 자주적인 권리를 잃은 이들이 불균등한 무력차 앞에 놓였을 때 선택할 수 있는 하나는 테러일 수 있음을 우리는 안다. 상대국의 지식인이 나는 안다. 테러리스트의 슬픈 마음을”(코코아 한 잔 - 이시카와 다쿠보쿠)이라고 노래한다고 해서 그가 나라 잃고 자주적 권리 잃은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평화의 시대에 평화에 젖어버린 우리로서는 기억을 다시 떠올리기 어렵다.

 

그저 그들이 처한 현실을 이해하지만 과격하기에 문제는 커진다라던가 정치적인 인물들로 인해 사태가 확장되고 있다고 단정 지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우리는 이제 평화와 안락에 젖어 테러리스트의 심정이 우리 심정이던 날을 잊은 세대다. 그들의 심정과 그들의 견해는 우리에겐 이제 낯설다. 모순적이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과의 공존을 모색해야 한다. 시절이 시대가 그런 아이러니에 우리를 몰아넣었다.

 

그들과 공존하는 법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잃어버린 자주적 권리를 되찾아 준다 해도 그들의 이슬람 원리주의는 그들 내부에서 곪아터지기 쉬운 상태 같다. 복종을 뜻하는 이슬람이라는 용어대로 복종하는 가운데 남는 여분으로의 여성 인권과 자유에 겨우 만족하는 그들이지만 언제까지 그런 상태로 머물지는 못할 것이다. (그들의 신본주의만큼이나 대다수 국가의 인본주의도 분명 문제는 있다. 하지만 그 문제를 수긍할 때 인본주의에서는 개선의 여지가 있다고 해도 신본주의에서는 문제를 수긍하는 자체가 불가능하다)

 

지금의 문명의 충돌을 거치고 잦아들 때 그들 내부의 격돌이 시작될 것이고 그런 내부의 격돌을 무마하기 위해 그들은 다시 외부의 적으로 눈을 돌리게 만들 것이다. 우리는 돌고 도는 도돌이표 같은 문제에 직면해 있다. 이스라엘이 승리를 거듭한다고 기독교도들이 찾는 예수 재림으로 오는 천년왕국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 천년왕국이 온다면 그건 온 민중이 자신의 뇌를 BCI 기술의 역설적인 작용으로 완벽히 기계에 통제당하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말해 주는 것 그 이상은 아닐 것이다.

 

너무 많이 나간 것 같은데 정리하자면, 이 시절을 알기 위해서는 이 시대의 격렬한 맥락들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 중 중동의 역사와 분쟁의 쟁점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이해의 한 뼘을 위해 이 책이 그리고 저자가 해주는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이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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