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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으~


재혁은 술이 덜 깬 건지 몸이 다 찌뿌듯한 것 같은 느낌에 기지개를 켜면서 침대에서 눈을 떴다. 지은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 어제 너무 마셨나 봐.. 몸이 말을 듣지를...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자신의 팔을 내리다 말고 재혁은 흠칫 놀랐다. 


=이건.. 이건..


-그제 침입자들로부터 공격이 있었어. 널 끝내 보호하지 못했어.. 재혁아, 미안해!


지은이 갑작스레 무거운 어조로 말했지만 재혁의 귀에선 이명이 울리는 듯 자세히 들리지 않았다. 침대에 걸터앉은 재혁의 얼굴은 말할 수 없이 어두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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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포트기에서 지은이 닭을 꺼내 냄비에 담고 미소를 지으며 재혁을 돌아봤다.


-재혁아! 오늘은 전통요리 영상에서 배운 닭곰탕 같이 만들어 보자. 


식탁 의자에 앉아 멍하니 그런 지은을 바라보던 재혁은 한참이나 지나 한 마디를 했다.


-닭은 이제 질려버리겠어. 


-무슨 소리야! 니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닭 요리잖아.


-난 더 이상 인간이 아니야! 사이보그가 됐으니까 변하는 게 당연하잖아.


-아니야. 너의 뇌도 미각도 감각의 일부도 그대로야. 변할 리가 없잖아.


-일부.. 그 일부 외의 것들이 변했나 보지.


재혁은 그 말을 하고 주거공간에서 돌아서 나갔다. 지은은 모든 걸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런 재혁을 붙잡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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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은 세미를 설득해 재혁의 강화 의체에 연결해 재혁의 일상을 훔쳐봤다. 세미도 재혁의 안정이 걱정스러워 별 대응 없이 지은의 말에 따랐다. 지은은 승완과 웃고 있는 재혁의 모습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지만 한없이 슬프기만 했다. 웃고 있는 재혁의 눈빛 속에서 공허 밖에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혁 씨, 며칠째 의체 이식 적응 약물을 복용하지 않고 있어. 현재 상태로는 디폴트 모드 신경망의 작용이 정상일 리 없어. 


-어떻게 해야 해... 나 이제 어떻게 해.. 너, 니가 재혁이에게 그날 영상을 보여줬어?


-어쩔 수 없었어. 재혁 씨가 계속 불안정한 상태로 그날 영상만 보여 달라고 요구했거든.


-그걸 보여주면 어떡해...


-너야말로 다리 부상 입은 재혁 씨를 전신 의체 이식을 해 버리고는 그게 숨겨질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어.


-재혁이가 어땠는데.. 그 영상을 보고..


세미가 말없이 지은이 궁금해하는 그날의 재혁 모습을 입체영상으로 공간에 띠웠다.


: 재혁은 멍한 채 다리가 잘린 자신을 안고 시술처로 옮기고는 마취를 시키는 지은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지은이 생존 유지 장치에 재혁을 연결하고는 의료기기로 재혁의 목을 절단하는 장면을 보고는 재혁은 넋 나간 듯 서있다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16 


재혁은 손톱만하게 드래건 마운틴이 보이는 건너편 빌딩 정상에서 무릎을 감싸안고 앉아 아무 말없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곁으로 지은이 다가왔다.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세미가 의체에 연결만 하면 바로 어딨는지 알 텐데 앓는 소리는..


한결 밝아진듯한 재혁의 목소리에 지은은 한숨을 놓는듯했지만 한편으론 잘못된 코딩을 하고 있는 것만 같은 어지러움도 느껴졌다. 지은이 답이 없자 재혁은 말을 이었다.


-저기 보이지? 우리 드래건 마운틴...


-어! 정말 손톱만하네. 좁지 않은 공간인데.


-저기가 나 어릴 때 가족들이랑 같이 살던 곳이었어. 우리 엄마 아빠 영상은 너도 봤지?


-그래. 넌 눈은 아빠를 닮고 코는 엄마를 닮았더라. 그러고 보니 니 헤어스타일도 너희 아빠 판박이야. 유행도 모르니 넌.


-그래, 어릴 땐 참 행복했어. 의체 전복 단체라는 데서 우리 집에 폭탄을 터트려서 엄마 아빠 모두 돌아가시기 전까진...


-아...


지은은 안타까운 탄식을 했다. 그리고 재혁과 즐거운 날들은 많았지만 재혁이 이렇게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주는 것은 처음이라 요즘 재혁과의 서늘한 분위기 속에서도 오늘만은 다행스러운 날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커서 생각해 보니까 너무 우스운 거야. 우리 집엔 키우던 강아지까지 모두 자연체였어. 하다못해 강화 의수나 강화 의족을 한 사이보그는 그 강아지 마저도 아니었다고. 그런데 왜 내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셔야 했지 왜..


-그 의체 전복 단체라는데는 그저 혐오와 폭력을 분출할 누군가가 필요했던 거지 대상이 누구냐도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아. 그 대상 없는 폭력에 너희 부모님이 희생되실 이유는 없었는데..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모를 상황에 지은은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이젠 내가 있어. 언제까지나 난 니 곁에서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게.. 언제까지나 너와 함께 일 거야. 언제나..


재혁이 지은의 말에 한참을 물끄러미 지은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부모님께서 돌아가시고 보험사에서 보험금으로 저 드래건 마운틴을 건축해 주고 날 대학까지 마치게 해줬어. 난 고고학이나 20세기부터 21세기까지 존재한 한반도 남북국시대사를 전공하고 싶었지만 앞으로의 생계를 위해 의학과 공학을 전공했어. 그리고 많은 날을 드래건 마운틴 전체를 운영해주는 세미에 의존했지. 하지만 세미는 목소리뿐이잖아. 뭔가 함께이면서도 나날이 외롭고 허전했어. 아니 허탈했다는 게 맞겠지.


지은은 이제 재혁이 자신과 만나게 된 날을 이야기할 거라 짐작했다. 


=재혁에게 나는 어떤 존재인 걸까?


이런 생각에 명확히 답할 수 있던 날들 보다 사이보그가 된 재혁이 지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몹시 두렵고 궁금했다.


-그러다 GOA사의 네오 아마토르를 알게 됐어. 최상의 연인... 나만의 연인... 이런 카피가 날 더 절실해지게 만들었지. 그래서 널 만나게 된 거야. 너를 처음 보는 순간 난 내 이상의 연인이 너란 걸 알 수 있었어. 니가 나를 알아 가는 그 순간.. 니가 내게 의지하던 그 순간, 나도 너를 알아가는 것만 같고 네게 의지하게 되는 것만 같았어...


지은이 재혁의 다음 말과 행동을 예측하려는 동안 재혁은 잠시 말을 그치고 있다가 지은을 돌아봤다.


-있잖아. 너와 함께 깨어나고 요리하고 함께 걷고 웃던 그 모든 순간이 소중했어. 널 원망하려고도 해 봤지만 그 모든 날들이 빛나고 있더라... 우리 같이 도봉산 암벽 등반 갔던 날 기억해?


-응. 그날 좀 위험했지.


-그렇지만 행복했어. 넌 두렵다고 했지만 난 나 자신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거든. 언제까지나 너와 함께 일 거라는 걸 믿고 있었으니까. 오히려 난 그날 너와 언제나 함께 일 거라는 확신이 더 확고해진 날이야. 절벽에서 떨어지는 내 손을 니가 잡고 놓지 않았을 때. 나도 생각했어 이 손을 나 역시 언제까지나 놓지 않겠다고. 실내에서 가상 등반을 해본 것 외에는 그날 실제 암벽을 탄 게 나도 처음이었어. 그런 도전을 할 수 있었던 건 네가 있어서였고. 

넌 니가 나에게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을지 몰라도 실제로 네게 의존하고 있던 건 나였어. 


-아니야. 니가 내게 의존했던 것만이 아니잖아. 우리는 서로에게 의존한 거야.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거야. 그런 게 사랑이라며.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그건 집착이었어. 의지한다는 그 순간 집착이 돼버린 거야.


-집착이 나쁜 거야? 집착은...


-아니야. 집착은 사랑이 아니라고.. 네게 그런 인식을 심어준 게 나였지... 집착하지 않는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라고. 집착하기 때문에 서로를 원하고 집착하기 때문에 서로를 위해 존재하게 되는 거라고... 내가 먼저 네게 말했었지.. 하지만...


재혁이 자신의 의체를 내려다보며 흐느끼듯 말했다. 


-이건 그런 집착이 아니야. 서로를 위하는 그런 집착이 아니라고. 나만의 연인을 원했던 건 이렇게 물건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었어. 지은아 봐.


재혁이 두팔을 벌리고 말을 이었다.


-이게 사랑이니. 이런 게...


지은은 많은 변명과 대응 루트가 언어 회로에서 솟아 나오고 있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재혁이의 심정이 지금 어떤지 짐작할 수도 없었지만 이 이상의 심정으로 몰아넣을 대응을 해서는 안된다고 판단했다.


-나 널 처음 만났던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어. 그래서 니가 자기학습을 처음부터 다시 하게 하고 싶어. 우리 사랑을 처음부터 다시 코딩하고 싶다고. 하지만 이젠 모두 늦어버렸어.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게 됐다고. 


지은은 다급히 말했다.


-아니야 재혁아! 여기서부터는 다시 코딩할 수 있는 거야. 이제 새로운 시작이라고 생각하면 돼... 넌 그러면 안 돼.


-널 미워하고 싶었는데. 널 사랑했던 날들만 떠올라... 하지만 그런데도 널 더 이상 사랑할 수는 없을 것 같아!


말을 마치고 재혁은 빌딩 정상에서 지은을 바라보는 채로 허공에 눕듯이 뛰어내렸다. 지은은 재혁이 뛰어내리자 뒤따라 바로 몸을 날렸다. 재혁과 지은은 서로의 손이 닿을 듯한 거리를 두고 위 아래에서 추락하고 있었다. 재혁을 내려다보며 떨어져내리고 있는 지은은 자신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손만 내밀면 지은의 손에 닿을 거리에서 재혁은 바닥에 가까워졌을 때쯤 지은에게서 등을 돌려 바닥을 향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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