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동수는 어두운 대문 앞에서 서성였다. 그의 머리 위를 광채를 내며 날아다니던 마카다카가 재촉했다.
-도와주겠다더니 뭘 어떻게 돕겠단 거야? X나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나겠다.
동수는 마카다카의 말에 미간을 찌프리다가 결심한 듯 담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그런 상스러운 말 안 할 수는 없어. 나도 이런 상황이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궁리하는 거잖아.
-궁리하다 날 새겠다. 그리고 내가 언제 상스러운 말을 했다는 거야?
동수는 어이가 없었다.
-그 X발이나 X나 같은 표현 말야! 초딩이냐? 너 도대체 몇 살이야?
-어머! 어머! 얘 봐. 요정 잡겠네! 내가 언제 그런 천박한 말을 했다는 거야? 내가 516살이 되도록 그런 상스럽고 천박하고 교양 없는 말은 너한테 처음 들어봐.
동수는 담을 타려 기를 쓰며 매달리면서 다리를 올리다가 기가 차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됐다. 됐어. 천한 인간종자 귀에나 그렇게 들리나 보다. 내가 죄인이다. 내가 속물이야.
-그런 자기성찰은 뒀다 나중에나 해. 너 그런데 도와준다더니 벽에 몸을 부비면서 뭐 하는 거야.
벽에 매달리며 올리던 다리를 내리다 동수는 좀 기운이 빠진 듯 말했다.
-담을 넘으려고 하는데 이런 일은 처음이라 맘처럼 되지가 않네.
-담을 넘는다고 그냥 날면... 아! 너 같은 인간종자는 날지를 못하지?
담 위를 이리저리 날아다니던 마카다카는 번뜩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내가 100년도 안되는 얼마 전 들은 이야기가 있어. 너에게도 해당되려나 모르겠다.
마카다카는 그렇게 말하고는 동수의 머리 위에서 몸을 부르르 떨며 금빛 가루를 쏟아냈다. 동수의 몸에서 그 금빛가루가 스며들듯 아롱거렸다.
-자! 이제 떠오른다고 상상해 봐!
-아! 팅커벨 같은 능력이 있는 거야? 너도?
동수는 언뜻 피터팬의 한 장면이 떠올라 마카다카의 말에 어떤 저항도 없이 따랐다. 정말 몸이 점점 떠올랐다.
-이제 니가 원하는대로 날 수 있다고 상상해 봐.
몸이 떠오르자 동수는 언제나 날아다니던 피터팬인양 담 위를 넘어 꽃들이 만발해 있는 정원을 건너 현관 앞까지 날아가 착지했다.
-나 재능이 이런데 있었나 봐.
-설마 담 넘어 남의 집에 침입하는 걸 재능이랄 줄은 몰랐네. 처음 나는 아기 요정처럼 굴래, 진짜?
동수는 자기 머리 위를 이리저리 선회하는 마카다카와 함께 살며시 현관문을 당겨 보았다. 현관문은 잠겨 있지 않았고 문이 스르르 열리자 환한 불빛과 함께 거실이 보였다. 이사를 준비하는 듯 여기저기 박스와 책 더미를 묶어 놓은 것이 보였고 거실 한 켠 내놓은 식탁 위에는 작은 접시에 먹다 남은 케익 조각과 생크림이 묻어있는 포크 하나가 놓여 있었다. 마카다카의 적은 내일이면 떠날 듯 보였기에 마침 잘 찾아온듯했다. 동수는 쌓여 있는 짐들 사이로 달력을 말아놓은 것을 보고는 어떤 악당이 등장할 줄 모른다는 생각에 슬며시 집어들었다. 퍽이나 안심이 될 도구인가 싶지만 말이다. 그리고 살금살금 짐들 사이를 피해 집안으로 들어갔다.
-저기 저 방에 갇혀 있어 나의 카롱이...
마카다카가 가리키는 방을 향해 조심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동수가 금방 지나쳐온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동수는 잔뜩 긴장해 몸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문이 열리고 잠시 동안 동수가 얼어붙어 있자 놀란 노인이 소리를 쳤다.
-도.. 도... 도둑이야!
마카다카는 얼른 식탁 위에 포크를 두 팔로 안아들고 온 힘을 다해 그 노인을 향해 날아들었다.
-뒤져 버려라. 이 인간종자야!
-아야! 아야!
-대머리가 반쯤 벗겨진 하얀머리의 노인이 도둑이라고 소리치다가 사타구니를 잡고는 웅크리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마카다카는 포크가 너무 무거워 이삿짐 박스 위로 포크를 안은 채 떨어졌다. 동수는 노인을 보고는 왠지 안심이 되는 것 같아 노인을 보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괜찮으십니까? 어르신!
노인은 사타구니를 잡은 채로 동수를 보다가 인상 좋은 동수의 얼굴에 약간 마음을 놓은듯한 표정이 되었다.
-여기는 훔쳐 갈게 아무것도 없어. 책이나 훔쳐 가겠다면 모르겠지만...
-어르신, 저는 도둑질을 하려고 온 게 아니라...
동수는 마카다카와의 만남부터 그녀의 부탁까지를 설명하며 그 대머리 어르신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니까 자네는 저 생물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는 거군..
-예? 어르신께서는 그럼 쟤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말씀이신가요?
-그저 풀벌레 소리로는 들리는데 저게 말도 하는지는 몰랐네 그려.
동수는 마카다카를 돌아봤다.
-저 인간종자가 뭐라는 거야. 카롱을 풀어주겠데...
=아! 진짜 나만 알아들을 수 있는 거였구나...
마카다카의 풀벌레 소리를 듣고는 노인이 동수에게 물었다.
-저 생물이... 자네가 말하는 마카 뭐라는 애가 뭐라고 하나?
이건 도대체 어떤 인연인가 하는 생각에 넋 나가 있던 동수는 다시 노인을 돌아보며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자기 남자 친구를 풀어주겠다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나도 내일이면 이사를 가야하는데 '세상에 이런 일이'에 어떻게 제보하나 걱정했구만. 사람처럼 자기들 나라가 있고 문명을 이루며 살아가는 지적 생명체라면 풀어주는 게 도리겠지.
3
마카다카와 카롱은 밝은 광채를 내며 밤하늘 상공으로 날아오르며 하늘 위에서 서로를 향해 감싸고 돌고 있었다. 동수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흐뭇한 마음에 넋을 놓고 있었구나 이제 그만 돌아가야지' 하며 그들에게서 돌아섰다. 하늘 위에서 마카다카가 쏜살같이 동수를 향해 날아오며 소리쳤다.
-야이, X발아! 어딜 그냥 가는 거야. 어디 나를 신세 지고도 갚지 않는 몰상식한 요정을 만들려구.
-그 X발 이란 표현 좀 쓰지 않으면 안 돼.
살짝 짜증이 난 동수의 말을 듣고 어느새 날아온 카롱이 말했다.
-어디서 그런 막말을 나의 다키 앞에서 하는 거야? X나 어이없네.
-진짜 누가 어이없는지 모르겠네. 욕설 커플이냐? 도대체...
-이젠 알겠군. 요정들의 표현으로 센 표현이긴 한데. 너희 인간종자들의 그런 저열한 표현과는 다른 표현이 번역되는 과정에 그리 표현되는 모양이야. 하지만 어떻게 번역되는지는 알겠지만 우리는 너희들이 쓰는 그런 저속한 표현을 쓰지 않아!
카롱의 설명이 그럴듯했다. 하지만 그래도 동수는 욕설이 난무하는 이 커플이.. 게다가 인종차별주의까지 있는 게 살짝 못마땅했다. 그렇다 해도 인간이 아닌 지적 생명체들에게 인종차별이 뭔지 이해시키고 수긍하게 하는 과정이 번거로울듯해 체념하기로 했다.
-나 너에게 신세를 졌어. 그건 꼭 갚아야 해. 그게 우리 요정들의 규정이야. 네가 바라는 게 뭐든지 꼭 한 가지는 들어줄게.
-뭐든지라고..
-그래 뭐든지!
마카다카는 한껏 자부심이 느껴지는 표정으로 단언했다.
동수는 한 번도 세상에 단 한 가지 소원이 있어 본 적이 없던 사람처럼 어리둥절해졌다.
=뭘 들어달라고 하지? 30억 쯤 로또에 당첨되게 해달라고 할까? 세계 최고의 지혜를 갖게 해달라고 할까? 이쁜 여친은...?
그런 생각이 스쳐가다 동수는 돈이나 지혜나 여친 보다 더 귀중한 무언가가 더 소중한 누군가가 떠올랐다.
-엄마.. 엄마가 어디 계신지 알고 싶어. 아니면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 전화번호라도 가르쳐 줄 수 없겠니?
-엄마라고.. 엄마랑 언제 헤어졌는데...
-헤어진 게 아니야! 잠시 날 보육원에 맡기셨다가 찾으러 오시는 길을 너무 오래 잊으신 거야. 그뿐이야...
동수는 갑작스레 눈물이 북받쳤다. 동수는 눈물이 그렁해진 채 소리쳤다.
-제발... 전화번호만이라도 알려 줘.
-그.. 그래.
잠시 당황하는 듯하던 마카다카는 새벽 하늘위에서 광채를 일렁이며 작은 원을 그리면서 맴돌았다. 그러면서 알 수 없는 읊조림을 했다. 그러자 그녀가 그린 금빛 원 사이로 희미하다가 점점 선명히 영상이 맺히기 시작했다.
영상이 선명해지기까지 짧은 순간 바라보던 동수에 눈가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어느 묘지의 비석이 비치었기 때문이다. 묘비에 새겨진 이름을 보고는 동수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미안해. 전화번호는 알려 줄 수 없을 것 같아. 너무 늦었어. 너희 엄마는 14년 전에 돌아가셨어.
-엄마... 엄마... 왜 나만 두고 가셨어요.. 왜요...
통곡하고 있는 동수에게 마카다카가 말했다.
-안타깝지만 난 아직 하루에 한 가지 소원 밖에 이뤄줄 수 없어. 처음부터 그냥 너희 엄마와 대화하게 해 달랬으면. 영혼과의 대화라도 잠시 할 수 있게 해주는 건데...
동수는 울다가 하늘 위의 그녀를 올려다보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미안하지만... 그럼 내일이라도 한 번만 우리 엄마랑 이야기하게 해주면 안 돼!
-그게.. 우리는 해가 뜨기 전에 돌아가야 해.
동수는 울음을 참으려 했지만 더 크게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래, 나도 네게 빚진 게 있어. 내가 너의 소원을 들어 줄 차례인 것 같아.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동수는 카롱을 올려다보았다. 카롱은 마카다카와는 다르게 하얀 빛을 뿜어내며 큰 원을 그리다 점점 작은 원을 그리며 동수의 머리 위를 맴돌았다.
잠시 후 동수의 귀에 너무 오랜 시간 만에 듣는 하지만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아들 동수야!
-엄마! 정말 엄마야!
-그래, 엄마야!
-엄마... 너무 보고 싶었어요. 왜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엄마 곁에서 언제까지나 있고 싶었는데 왜 돌아가신 거에요.
-엄마가 아픈데 우리 동수를 의탁할 아무도 없어서 어쩔 수가 없었단다. 미안하다 동수야.
-엄마 이젠 전 정말 혼자인 것만 같아요. 아니 정말 혼자가 됐네요.
-그렇지 않아 동수야. 네 눈에 보이지 않아 그렇지 엄마는 늘 네 곁에 있어.
-엄마... 엄마... 엄마가 늘 제 곁에 있었다고요.
-그래 지난밤에도 네가 억울한 일 겪는 걸 다 보았단다.
-엄마 세상이 너무 험해요. 살아간다는 게 너무 힘들어요.
-좋은 사장님이었는데 그렇게 오해하실지 몰랐구나. 하지만 정말 넌 혼자가 아니야. 언제나 힘들면 엄마가 곁에서 함께 울고 있다는 걸 알아주렴. 그리고 세상은 힘들지만 그 힘겨움을 이겨내는 사람에게는 보람도 있는 곳이란다. 잘 살아내야 한다. 내 아들아!
카롱이 끼어들듯 말했다.
-망자와의 대화는 오래 할 수 없어. 곧 차원의 틈이 메워질 거야.
-안돼.. 엄마..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데... 할 수가 없데요.
-동수야. 마음이 힘들고 괴로울 때라도 끼니는 거르지 말아야 해. 밥을 먹어야 살아갈 기운이 나는 거란다. 귀찮더라도 아침을 꼭 챙겨야 해. 내가 차려주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구나.
-엄마..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5살 때부터 엄마를 기다리는 하루하루 매일 드리고 싶었던 말이에요... 엄마 사랑해요..
-동수야.. 엄마도... 우리 아들을......
동수의 머리 위에 있던 나선형의 광채가 사라지며 엄마와의 대화가 끊겼다.
동수는 울면서 외쳤다.
-엄마 저도 알아요. 엄마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해요...
새벽 동이 트기 전 마카다카와 카롱은 하늘에 금빛과 하얀빛이 어우러진 원을 그리고는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진 하늘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동수는 아직도 울고 있었다. 그때 동수의 스마트폰 벨소리가 울렸다. 스마트폰 화면을 바라보니 -고마운 사장님-이라고 떠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