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만큼은 정말 일찍 자려고 컴퓨터도, TV도, PMP도 다 끄고 누워 책을 잡았건만
결국 책 때문에 다시 컴퓨터를 켜고 말았다.
<보통의 존재>라는 책 말이다.
한국소설 안읽고 (뭐 그렇다고 외국소설을 열심히 읽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고)
에세이도 더 이상 가벼울 수는 없다 식의 신변잡기스러운 책만 가끔 잡는 인간인지라
당연히 나의 '나와바리'가 아닌 이 책에는 눈길 한 번 준 적이 없었는데
지난번에 도서전 문학동네 부스에 갔다가 우연히 이 책의 앞쪽 몇 장을 보고 흥미가 동해 주문했던 것.
물론 나는 이 '이석원'이라는 사람이 누군지 전혀 모르고 소설가인가? 했는데
저자 설명을 보니 무슨 언더그라운드 밴드 리더라고.
언더그라운드는 커녕 오버그라운드도 모르며 아직까지 소녀시대에서 윤아밖에 구별을 해내지 못하는 나로서는 -_-
작가이기 전에 음악가인지 아니면 음악가이기 전에 작가인지 별 상관은 없지만서도...
어쨌든 주문을 하고 나서 한참동안 책상 한 구석에 박아놓았다가 자기 전에 집어들었는데...아...
p.37 연애란 이 사람한테 받은 걸 저 사람한테 주는 이어달리기와도 같은 것이어서 전에 사람한테 주지 못한 걸 이번 사람한테 주고 전에 사람한테 당한 걸 죄 없는 이번 사람한테 푸는 이상한 게임이다. 불공정하고 이치에 안 맞긴 하지만 이 특이한 이어달리기의 경향이 대체로 그렇다.
이 문단을 읽고 나는 주섬주섬 일어나서 컴퓨터를 다시 켰다.
이 사람 천재인가?
연애(아니 연애'들'이라고 복수로 표현해야 하나)를 이렇게 기가막히게 한 문단으로 표현한게 정말 대단하다 이거지.
그런 고로 이 쉰 새벽에 나한테 잘해준 사람들 하나하나 머릿속에서 끄집어내가며
나 다음에 만난 사람한테는 나한테 못받은만큼 받았기를.
그리고 내가 잘해준 사람들(은 거의 없다...하지만 있긴 있다)은 잘먹고 잘 살아라 흥..!의 한 마디와 함께
나 다음에 만난 사람에게는 나한테 못한거까지 잘해라.
이 책 괜찮네.
질색팔색하는 '구질구질함'이 별로 없으면서 '국어실력과 독해능력을 의심하게 하는 겉멋만 가득한 글'도 없고
너무 무거워서 부담스럽지도 않고 너무 가벼워서 딴 일 하면서 건성건성 읽을 정도도 아닌,
뭔가 중용의 미를 아는 책이라고 할까.
하긴 그래서 <보통의 존재>일지도 모르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