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잔혹사 - 한국 현대사의 가려진 이름들
홍석률 지음 / 창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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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읽은 근현대사 책 중에 가장 재밌게 읽었던 책.
내일이면 4·19다. 4·19는 보통 ‘학생의거’로 불릴 만큼 학생들의 희생이 도드라진 항쟁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역사의 한 단면. 사실 마산 앞바다에 김주열의 시신이 떠올랐을 때, 가장 먼저 분개하고 모여들어 행동한 사람들은 우리의 어머니-중년여성-들이었다.


“현장에 있던 미국 공보원 지부장은 민주당 당사 주변에 모여있는 군중들 중에는 학생만이 아니라 ‘아주 다양한 범위의 시민’들이 있었고, ‘여기에 참여한 중년 여성들의 숫자와 열기degree에 특별히 충격을 받았다.’고 보고했다. (p.200)”
“그런데 4월 혁명 직후 출간된 책들을 보면 2차 마산항쟁에서 여성들이 인상적인 역할을 했다고 언급한 경우가 거의 없다. 김주열의 시신을 보고 중년 여성들이 분개했고, 시위가 시작되자 ‘부녀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그 뒤를 뒤따랐다.’라는 언급정도가 있다.(p.201)”


저자 홍석률은 한 장의 사진 (4월 혁명 당시 할머니들의 데모장면)으로부터 시작해 기록에 남아있지 않은 “구석자리에, 아주 작게, 대수롭지 않게, 지나가듯이 서술된 여성들의 행적 (p.191)”을 찾는다. 아직 서슬퍼런 한국전쟁시기 학살의 기운이 가시지 않은 1960년 “리대통령 물러가라”는 직접적인 구호가 적힌 현수막을 들고 행진한 최초의 이들은 이 마산의 할머니들이었다.

“할머니 시위대가 마산경찰서 앞에 이르렀을 때 <동아일보>보도로는 약3만 명의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할머니들은 경찰과 몸싸움까지 하며 경찰서 안으로 밀려들어가 ‘고문경찰 잡아내라’‘살인경관 잡아내라’라고 외쳤다. 당시 새로 부임한 경찰서장이 할머니들을 만류하느라 눈물까지 흘리며 쩔쩔 맸다고 한다.… 마산의 할머니들이 경찰서 정문 앞에서 몸싸움을 하던 무렵인 4월 25일 오후 3시경 서울 시내 대학교수들이 당시 동숭동에 있는 서울대 교수회관에 모여들었다. 교수들은 이날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는데… 교수단이 들고 있는 플래카드에는 “전국 각 대학교수단–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라고 적혀있었다. 이승만 퇴진구호는 여기에 없었다. 교수단 시위대가 거리로 나오자 시민들이 급속이 몰려들면서 “이승만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날 서울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다시 발생했다.(p.213)”

그렇다면 왜 한국 민주화의 역사 속에서 여성들의 투쟁은 지워지고 종종 축소되었을까?

“일단 여성들은 원천적으로 기록에서 배제된다. 어떤 일이 벌어진 후에 상대적으로 긴 시간이 경과하여 작성된 기록들은 이른바 원천적인 기록(1차 기록 또는 당대의 기록), 즉 사건 발행 후 아주 가까운 시점에서 작성된 기록을 바탕으로 그것을 선별하여 작성된다. 이러한 선택에 당연히 권력관계가 작용한다. 주변부 인물들의 기록은 어렵게 기록되어 있어도 선별되지 않는다. 부차적이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측면도 있는데, 사건이 진행되어 어떤 결과가 발생하면, 그 결과를 도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거나, 그러했다고 주장하거나, 그렇게 인정받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중심으로 사실을 기록하고, 나머지 사람들의 활동은 부차화, 주변화 시킨다. 그러다 보니 여성을 비롯한 주변부의 인물들은 또 지워진다. (p.202)”

역사를 서술하는 이도, 항쟁을 통해 권력을 잡은이도 ‘남성’인 경우가 대다수였기 때문에. 의도적 누락이기 보다는 어쩔 수 없는 자기중심성이라고 할까. 그러나 이러한 역사서술이 끊임없이 반복된다면, 역사발 전의 유의미한 주체였던 다수의 사람들의 힘이 지워져버리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것은 기록되지 못한 이들이 자신의 힘을 믿지 못하게 함으로써 향후 역사발전 가능성마저 봉쇄한다는 데 있어, 어쩌면 악의적이다.

“주변부에 위치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기록되지 못하고 기억되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결국 다수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저변의 잠재적 역량이, 결코 엘리트에 비해뒤지지 않는 다수의 역량이, 이 사회에서 발휘되지 못하거나, 발휘된다 하더라도 제대로 평가받기는커녕 관심조차 끌지 못하며 가려지고 지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주변부의 약자를 기록하지 않는 역사는 다수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잠재적 역량을 실현할 가능성 자체를 차단하고 차별과 무시 속에서 소진시켜버린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역사발전의 가능성 자체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제약하는 것이다.(p.220)”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의미가 있다. 적히지 않은 역사들의 ‘행간’을 추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홍석률은 한국의 민주주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을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역사서술에서 부차화·주변화되면서 결국 “선거”때를 제외하고는 잘 보이지 않게 된 것이 현재 민주주의의 가장 잔혹한 측면이라며 책의 제목을 “민주주의잔혹사”라고 지었다.

마산의 할머니시위를 비롯해 최초의 민주노조였던 동일방직여성들의 투쟁 (그녀들에게 왜 하필 투척한 것이 ‘똥’이었는지), 빈민에 대한 탄압이자 ‘비국민’으로 간주되며 기본적인 인권도 없이 ‘청소‘당한 삼청교육대의 피해자들의 목소리 등 한국현대사의 기록되지 않은 역사들을 담고 있다.

마지막으로 인상 깊었부분은 힘이 없어서 적히지 않은 것이 아니라, 너무 커서 적히지 않는 역사들도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정말 가려진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또한 불균등할 수밖에 없는 한미동맹의 구조, 그리고 그 구조에서 미국의 압도적인 영향력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강한 영향력뿐만 아니라 구조적인 힘이 작용할 때 사람들은 이를 불가피한 것으로 수용하거나 순응하여 여기에 대해 제대로 말하지도, 정면으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강하고 구조적인 힘이 작용한 부분은 역사 속에서 보이지 않거나 모호해지고, 소략해진다.(p.170)”

5·16쿠데타의 형식적 명분이었던 “정군운동”의 주체들의 시대인식을 꼬집는 부분인데, 장면내각에 대해서는 반발하려 했던 이들이 그 구조가 가능하게 하는 압도적인 힘-비대칭적 한미동맹관계 규정력-에는 오히려 철저히 순응하는 모습을 보인 지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처럼, ‘힘’으로 인식조차 못할 정도의 ‘압도적인 힘’에 대해서도 당대의 역사가(혹은 엘리트)들은 필연인 것처럼 상정해 버려, 서술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꼭 역사만이 그럴까? 우리는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 않나?
박근혜는 옥살이를 해도 이재용은 풀려난다.
북핵에는 개거품을 물면서도 전세계에 가장 많은 핵을 보유한 미국의 핵에는 분노하지 않는다.
상업주의와 물신주의는 비아냥거리지만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않는다.
미투를 지지하고 성폭력에는 욕을 하지만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주의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너의 잘못을 문제 삼으면서 잘못이 가능하게 하는 구조는 문제 삼지않고,
구조는 문제 삼으면서 자신의 잘못에는 관대하다.

가까운 것은 너무 가까워서
먼 것은 너무 멀어서 잘 보이지 않는다.
무엇을 잘 본다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것.
역사를 읽는 다는 것. 역사의 행간을 읽는 다는 것.

우리들의 읽고 보는 능력이 조금은 더 평등해져야지, 민주주의의 ‘잔혹함’이 조금 덜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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