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이별이나 상실을 경험하면 정희진을 읽는다. 내게는 그만한 진통제가 없다. 진통제라니…취소취소. 내겐 그만한 긁어팜이 없다. 헤어짐을 헤집어서 똑똑히 노려본다. 다시는 너한테 당하지 않을거야라고 잘봐둬 잘봐둬 하는 데 성공한 적은 없다. 각각의 이별은 이별자체만의 고유한 특성이 있지만, 결국 잘봐둬 잘봐둬 하면서 내가 알게 되는 건 이별(혹은 분리) 자체를 거부한 댓가라는 씁쓸한 인식? 언제나 철을 모르고 때를 모르는 건 나고 그건 좀 스스로에겐 애석하지만. 철과 때를 아시는 분 신밖에 없지 않나.

만나고 영향을 미치고 헤어지는 건 계절이 바뀌는 것 처럼 자명한 것. 당하다니 무엇을? 모두 겪었어야 할 일들이다. 거기에 피해자와 가해자는 없다. 보이지 않는/ 의식되지 않은 채의 공모가 있을 뿐. 그래도 나는 자주 해명하고 싶어했었다. 아니 늘상 그랬다. 세상에는 그런 관계가 있다. 악의 없이 질문하고 최선을 다해 대답하고 그것이 관계로 굳어져서 교정을 목적으로 심문하고, 관심과 사랑이 필요해서 의미없는 질문을 끌어안은 채 끝없이 자신을 설명하려드는 그런 관계. 나를 설명하거나 해명하려드는 것이 어쩌면 약자의 태도일 수도 있겠구나… 하고 알게 된 것은 정희진의 글 덕분이다.

힘빠지는 것은 내가 나 자신을 해명하려는 노력을 멈추었을 때, 나를 규정하려드는 질문 혹은 단정의 언어들을 마음으로 제법 튕겨낼 수 있었을 때, 그때 우리의 관계 역시 끝나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사이의 그것은 어떤 게임같은 거였을까.

어쨌든 꽤 오랜 시간 이어지고 지속된 나를 설명하려드는 어떤 관계 속의 상황은 이제와 생각해보니 굉장히 수고롭고 고통스러운 노동이었다. 알고나서도 잘 도망쳐지지 않았고, 끊어내려 할 때 마다 빈번히 죄책감이 올라왔었다. 어찌저찌 관계를 끝내는 그 순간까지도 끝내는 이유를 최대한 잘 설명하고 싶어하는 나를 느꼈을 때. 얼마나 치떨리게 스스로가 싫었는지 모른다.


“(26) 나는 누구인가. 모든 사람이 이 질문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 물음은 내 경험과 사회의 시선이 일치하지 않을 때, 타인이 멋대로 나를 규정할 때 솟아난다. 나는 누구인가를 고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넌 누구냐?”라는 심문(審問)에 대한 일차적 반응이다. 식민자는 피식민자가 나는 누구인가를 스스로 상기하게끔 끊임없이 몰아붙인다. 이 질문은 면벽 수도의 자기 탐구처럼 보이지만 실은 전면적인 폭력의 시작이다. 누구나 삶의 특정 시기에 이 물음이 요구되는 순간이 있다. 어떤 이들은 평생 이 질문과 씨름해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강요하는 저들에게 어떻게 맞설 것인가. 어떤 방어 태세를 취하면서 무엇을 확보해 나갈 것인가. 가장 흔한 답, 가장 쉬운 답, 그러나 불가능한 현실은 진정한 자아 찾기(나를 잘 설명하기)다. 이는 ‘우리’를 기존의 사고에 묶어 둠으로써 현실을 고착시키려는 식민자의 논리에 부응하여 “저들의 계통”을 강화한다. 상대가 이미 나를 정의하는 권력을 쥐고 있는, 속수(束手)의 상태에서 무슨 말을 하랴.”



그렇다. 어떤 것/누군가/무언가와 헤어지고 정희진의 글을 읽다보면 내가 저지른 오류들이 보인다. 나의 오만함과 무지가 보이고, 결론적으로 이 모든 것들이 겪었어야할 필연들이라는 사실에 괴로워하면서도 안도하게 된다.

묻지 않았더라면 느리고 묵직한 고통 속에서 오랜시간 허우적 거려야 했을 것이고 묻기 시작하면 집중적으로 날카롭게 창끝에 찔려 창을 돌려 후벼파는 듯한 고통을 단번에 몰아서 느껴야 한다.

나는 후자다. 언제나 후자다. 매를 먼저 맞는 편이고 (때로는 벌어서 맞기도) 호되게 앓아본 경험적 자산으로 내 시간이 소중한 걸 안다. 재빨리 털어낼 수는 없는 상실이라면 공을 들여 괴롭게 압축적으로 응시하고 싶어 정희진을 읽으면서 자괴감을 곰곰하게 씹어 삼킨다. 별 수 없다. 살아야하니까. 그냥 좀 남는 시간이나마 편하게 있고 싶으니까. 읽는다.

읽다보면 안다. 아. 나는 그럴 수 밖에 없었겠구나. 나는 또 최선을 다해 버린 것이다. 그 만큼을 알았고, 이 만큼을 몰랐다. 한계를 인정하게 되면 합리화할 필요도 없어진다. 체념. 잘 정리하고 탈탈 털어 글로써서 어딘가에 봉인. 혹은 (이 글처럼) 전시. 이 과정을 ‘내 무능력에 대한 인식’이라 이름 붙일 수 있을 만큼 이별 후 정희진 읽기는 어떤 의식이 된 것도 같다.

이번의 애도 기간에 내 눈에 꽂힌 단어는 이 것. 


태클.

“(24) 흔히 사람의 욕망은 끝이 없다고 하는데, 이는 정확한 말이 아니다. ‘끝’은 원래 끝이 없다. 그리고 아무리 금수저라도 모든 욕구를 다 채우며 살 수는 없다. 문제는 선을 모를 때 생긴다. 적정선을 인식하려면 자신과 인간관계, 사회를 알아야 한다. 모든 인간에게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흙수저는 선을 밟거나 넘으면 바로 태클이 들어오기 때문에 경계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것이 ‘좌절’이다. 아니,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 처지에서 배우는 것이다. 그러나 금수저는 이 정치학에 무지하다. 분간이 없다.”


내가 ‘내 무능력에 대한 인식’이라고 표현하고 종종 여기까지가 나의 최대이구나, 아 이걸 또 몰랐구나 하며 물러서는 그 지점, 어떤 체념 앞에ㅡ 먼저 앞서는 것은 무수한 태클이었던 것일지도. 태클에 너무 익숙해서 태클이 태클로도 안느껴진 건가? 난 그래서 한계, 무능력, 스스로의 약점을 잘 아는 것, 뭐 그런 담론들이 수월하게 들리고 끌렸던가? 선을 잘 아는 것. 선을 넘지 않는 것. 그것은 자원으로도 작용하지만 저주처럼도 느껴져 내가 나에게 미리 앞서서 포기를 주문 한 것은 아닌가하는. 그럼 어디까지가 나를 보호하는 것이고 어디까지가 나의 가능성을 믿고 독려하는 건가. 뭐 그런 질문들.

사족을 더해 조금 재밌는 것은, 이 끝없는 중얼거림(하지만 말해지지 않은 말하지 않은 영역이 더욱 압도적인) … 자아에 초점을 맞추는 것 (필리스 체슬러를 내 방식대로 전유해서)… 그 것말이다. 나는 오늘처럼 이걸 하고 있는 내가 새삼 놀랍다. 나 자신으로 가득차서 뭔가를 끝없이 적고 있을 때. 이처럼 내가 나를 심문해 보는 것 역시 태클에 대한 생존 전략일지도? 그걸 다루는 건 즐겁다. (여분의 시간이 필요하지만)

“(24) 금수저의 가장 큰 약점은 상대방에 대한 무시가 아니다. 무지다. 흙수저가 이 사실을 간파한다면, 무지한 그들을 이길 수 있다. … 자녀 세대에서는 계급도 세습되지만 동시에 앎의 위치성도 승계된다. 흙수저의 유일한 자산은 *한계선 자각에서 오는 새로운 인식의 가능성이고, 금수저의 운명은 무지다.* 이것은 계급 투쟁이 일방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상황과 전선을 아는 것. 상대를 아는 자와 모르는 자,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는 자의 대결이라면 누구에게 승산이 있겠는가? ”


적정 선을 잘 지키고 의외로 낄끼빠빠 잘한다는 일전 직장 사수의 칭찬은 결국 태클의 반작용으로 내가 체득한 무엇이었고, 곧 나의 자원이었다. (이건 나 스스로가 안다) 하지만 모든 곳에 같은 원리를 작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회생활이 아닌 일상적 관계에서 혹은 사람에게… 친구에게… 연인에게… 가족에게 나는 어떠했나. 


난 어떤 소통을 원했다. 아주 찰나지만 가끔씩은 가능했던 깊숙한 공감을 원했다. 본질에 다가가는 대화를 무의식을 탐색하는 이야기를 원했다. 그리고 빈번히 실패했고(태클), 또 체념하면서 내가 너무 욕심을 부리고 있는 건가하고 생각했다.

내가 잘못된 건 아니었지만, 분명 어떤 사람들은 나를 부담스러워했던 것 같다. 그러다 어느 날은 창피해서 숨고 싶었고, 다시는 마음 열지 않을거야 남모르게 이악물었다. 그리고 또 다시 그리워져서 마음을 열고, 영감을 얻고, 힘을 내고, 또 그러다 조금 더 원하게 되고, 나의 욕심을 탓하게 되고… 그런 상황의 반복. 20대 초반을 생각하면… 관계에서 정당한 권리조차 말하는 걸 그토록 힘들어했던 나였으니 이만큼 온 것도 장한 일이긴 하다.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갈 마음을 먹는 것은 또 어쩌면 나 자신의 한계를 더듬어 보는 일이라서… 요 얼마간의 나는 겁이 났던 걸까.

“(11) *나는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다는 것, 더구나 결정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삭제된 역사를 알게 되는 것은, 무지로 인해 보호받아 온 자신의 삶에 대한 부끄러움, 사회에 대한 분노, 소통의 절망 때문에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아니라 행동을 봐.
그 사람이 쓴 글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을 봐.

이 말은 누가 나에게 해준 말이 아니고 20대의 내가 누군가들에게 자주 하곤 했던 말이다. 우습게도 이 말을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가장 허약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건 삼십대 중반 지금의 나다. 내 말이 나를 배반하는 일은 너무도 흔하지만, 이번 거는 배반이 아니라 풍자의 대상이 되어도 할말이 없는 수준의 처참한 자기직면을 가져왔다. 나는 내가 쓴 글이 나였으면 했던가, 감히?

내가 스스로를 돌보는 법을 배우겠다는 명분으로 사람을 겪어내지 않는 동안 내가 키워낸 나 스스로와 내가 안다고 믿었던(!) 관계들은 정말로는 어떤 단단한 믿음의 토대 안에 구축된 그런 종류의 것일까. 글쎄. 그건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하지만 요 몇년간의 내게 중요한 관계들은 대부분이 글과 말뿐인 데이터를 삭제하면 사라질지도 모르는 그런 종류의 무엇이었다. 어쨌든 여기서 얻어낸 어떤 부스러기들을 또 잘 그러모아서… 슬슬 사람들을 만나야하는 시점이 오고 있는 것 같다고 요즘 긴박하게 느끼는 중이다. (아…조금만 더 머물러주면 안될까? 팬데믹이여…)


결국 안다는 것은 … 읽는다는 것, 본다는 것, 머리를 굴려서 해석한다는 것과는 다르다는 생각이다. 지식도 그렇지만 특히 사람이 그렇다. 큰일이군. 지금에 너무 익숙해져버렸다. 정말로 어쩌면 나는 소설을 좀 더 읽어야겠다. 아니다. 어쩌면 나는 좀 사람을 더 만나야 하겠다. 아… 아니다. 역시 소설을 좀 더 읽고 사람을 만나야하는 데 왜 소설을 못읽니…. (슬프군)


*

사실은 몇 주 전에 어떤 사람을 떠나보냈다. 
마음 속에서는 떠나 보낸지 오래된 사람인데 한번 더 보냈다.

그를 알고 나를 아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그를 애도하고 추억했다.
나만 알고 나의 이야기를 아는 사람들은 어떤 관계는 애도도 필요없고 잊어버려도 된다고 말했고, 또 그의 존재 여부와 상관 없이 계속해서 더 미워해도 된다고도 말해주었다.
그를 알긴 하지만 나를 좀 더 많이 아는 사람은 그에 대해서도 나에 대해서도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나는 길게 가로로 놓인 아무런 이야기하지 않음에 조금 오래 머물러있었다.

그와 잘지냈던 시간 보다 힘들어했던 시간들이 더 길고 모두 다 잊어버리기엔 좋았던 기억들이 있지만 나는 그때의 내가 아직도 밉다. 그가 미운 것이 아니라 그때의 내가 불쑥불쑥 견딜 수 없이 밉다.

내 안의 어떤 광막한 황폐함을 마주했을 때. 자주 오는 건 아닌 데, 그냥 좀 삶이 무겁고 힘들 때.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 내가 생겨먹기를 이런 모양이라는 걸 턱하니 그냥 척하니 바로보게 될 때. 누군가을 탓하고 싶은데 탓할 사람이 없으니까 그냥 그때의 나를 탓하는 거다. 그만하고 싶은데 잘 안된다.

무튼 이걸 다 쓰고 나면 나는 좀 미안해져서… 그를 애도랄까 비슷하게 떠나보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그냥… 다썼는데… 지금의 내 질문들만 주절주절 늘어놓았다네.

하지만 하나는 확실히 알겠다.
그도 알고 나도 아는 사람들을.
내가 그를 애도하고 추억할 수 있을 때까지는. 
안만나고 싶다는 것.

그냥 지금이 좀 덜 힘들면 좋겠다. 그러면 그때의 나를 좀 덜 미워하고 여유있게 추억도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그러려면 이제 사람을 좀 만나야하는 데… 새로운 사람들을… 나는 나 자신이 좀 변한 건지 장담을 할 수가 없고.
그래. 결국엔 또 이런 결론을 내고 오늘의 글이 끝나지는 구나….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제, 다르게 생각하기가 생존의 문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지식 정보화 사회의 ‘진정한’ 의미는, 언어/사유의 힘이 중대해졌다는 사실, 그리고 사회적 약자가 자기 언어를 갖지 않으면 존재 양식을 잃는 시대라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돈이나 물리력이 없다. *절대 다수인 사회적 약자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자원은 윤리와 언어뿐이다.*
- 언제나 내가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은 윤리와 언어 뿐. (낯선 시선 중에서)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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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2-04-28 17:2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아니 잠깐 쏠로라더니 언제 만나고 언제 헤어짐? 요즘 연애하느라 바빴긔? (아니 낚인 거 같아 얼른 끝까지 읽어보자)

공쟝쟝 2022-04-28 17:27   좋아요 5 | URL
그런거 아녜요 ㅠㅠ 이 바보야!!

잠자냥 2022-04-28 17:29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ㅋ 응 그렇다라귴ㅋㅋㅋㅋㅋㅋㅋㅋ

2022-04-28 17: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4-28 17: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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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28 17: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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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28 17: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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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28 17: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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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28 18: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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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28 19: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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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a 2022-04-28 20:1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빈 자리를 마주할 수 있을 때까지 무탈하시고요, 모쪼록 존버 파이팅입니다. 사람 만나는 것도 만나질 때 하세요. 윤석이가 짜장면 먹을 때처럼 자연스럽게! 쟝쟝님 마음의 여유와 평안과 씩씩함을 응원합니다. ㅎㅎㅎ

공쟝쟝 2022-04-28 21:15   좋아요 3 | URL
네. 그러려구요. 막상 만나면 너무 막 들떠버리곤 해가지고 (-_-;;;) 일단은 사이버 상으로만 만나는 데... 오랜만에 하루에 몰아서 만나려니 벅차네요? (북플러의 하루...) 그러고 보면 제가 알고보니 메타버스 형 인간인가 봅니다. 그래도 가끔 진짜 사람의 눈빛과 목소리가 그리워용... 흐흐...

커피소년 2022-04-29 16: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제 공장 돌리시는건가요? 공장장님

커피소년 2022-05-05 12: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는 님이 너무 부럽습니다. 행복해보여요.

독서괭 2022-05-06 00:1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힘든 일이 있으셨군요, 쟝쟝님.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지만 쟝쟝님의 심정이 전해져 오는 듯 합니다. 힘내라는 말은 함부로 못하겠고,, 이제 슬슬 사람을 만나야겠다고 하시니, 만나서 새우깡 뜯을 날이 다가오나요? ㅎㅎ

공쟝쟝 2022-05-06 10:43   좋아요 4 | URL
네 좋은 친구들이 있어서, 잘 흘려보낸 것 같아요. 지나간 것은 지나간대로~~~ 괭님 새우깡을 뜯으시면 전 옆에서 깡소주를…* 헤헤^^

새파랑 2022-05-07 08: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쟝쟝님 또 축하드립니다. 이번주말에는 깡소쥬 대신 위스키로 ^^

thkang1001 2022-05-07 19: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공쟝쟝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주말과 휴일 보내세요!

서니데이 2022-05-07 17: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2022-05-10 00: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5-10 0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5-10 23: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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