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종일관 난해하던 영화가 마지막에 가서야 이해할 수 있을 만한 건덕지가 있는 어떤 것으로 바뀌었다. 거칠게 요약하면 예술병 걸린 애비를 용서하지 말라는 교훈되시겠다. 끝까지 정신 못차리고 심연 어쩌고 하는 데, 아담 드라이버 등치 너무 크고 근육 근사해서 내가 패봤자 하나도 안아플 거 같고… 후추 잔뜩 뿌린 방에 가둬서 15시간 동안 쉬지 않고 재채기 하게 만들거나 고양이 알러지가 있다면 101마리 고양이를 독방 감옥에 풀어놓고 가둬놓는 형벌을 처방하고 싶은. 암튼 저 인간 눈물 콧물 쏙 빼놓게 하고 싶을 정도로 약 오르더라…. (그러고 보니 아담 드라이버 이런 연기 너무 잘해서 쎄하고, 갑질 논란 있었다지? 내 <패터슨> 물어내 이놈 시키야!!)
예술은 심연을 들여다봐야만 할 수 있는 건가. 아니, 예술가에게는 보인다는 그 심연이라는 것이 있긴 있는가. 어느 정도의 자의식 과잉이 있어야만 예술을 할 수 있고, 저 자신의 기량을 연마함과 동시에 어떤 지점에서는 저 자신 속을 들입다 파야하는 것이 예술이라는 건 어렴풋이 알겠다. 게다가 난 제법 예술적 인간, 예술하는 인간에 대해 존경심을 가지고 있는 편이다.
그러나 ‘심연’ 이랄게 있나. 가난이라는 건 있을 수 있겠다만, 여타의 생존 조건이 마련된 상태에서 예술가의 ‘심연’이란…? (솔직히 생계문제 해결이 안된 상태에서 예술하겠다는 것도 말리고 싶다. 베토벤이랑 고흐랑 셰익스피어가 대단한건 다 해 놨으니 그것만 잘 즐기며 살자…) 그건 대체 뭔가. 꼭 그걸 긁어 파야 독창적이고 훌륭한 예술이라는 것이 나오는 건가.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아닌 상처를 긁어파면서(열등감, 나르시시즘, 자기합리화를 심연을 들여다본다는 것으로 뭉개고) 자신과 곁을 상처입히고 희생시키고 그것을 예술이라며 명예를 획득할 수 있었던 시대는 이제 갔다. 내지는 그것을 예술적인 성향인 척 포장하는 일을 제발 좀 중단하라. 먼저는 윤리적이지 않고 보다더는 촌스러우니까.
나는 이렇게 망쳐졌으니 다음 세대여, 나를 동정하지도 용서하지도 말아라. 치유불가능한 예술병에 걸렸던 레오 까락스가 <아네트>를 통해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일까. (이 영화는 레오 까락스의 딸에게 바쳐졌다.) 그렇다면 나는 대답해줄 수 있을 것도 같다. 뭐 당연한 반성문을 이렇게 까지 길고 처절하게…😰 용서는 안하고 깨끗하게 인연 끊어 드릴테니 그거 잘 감당하시고, 제 앞에서는 울고 짜고 불고하지 마세요, 구구절절 자체가 좀 꼴사나워요ㅎㅎㅎ 제발 저를 잊으시고 자신을 잘 살아가세요! 빠잉~👋 뭐, 그런 의미에서 자식을 핑계삼아 제 삶의 무능을 합리화 하는 데 이용하는 많은 부모들이 봤으면 좋겠더라. 감독은 이렇게 반성이라도 했지(했냐?), 님들은 반성도 안하고 뭐하고 있는 거임.
영화를 보고 버스를 타고 돌아오면서 이런 발견을 했다. 내가 사랑하는 예술은 미학적으로 포장된 아름다운 폭력이 아니라 폭력이 훼손하지 못한 어떤 존엄을 대할때 느끼는 경이와 아름다움이라는 걸. 작가 김금희의 문장을 따르자면 “부스러졌을 지언정 완벽히 파괴되지는 않은” 무엇이고 피아니스트 시모어 번스타인을 따르면 “단단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결코 본질적으로 망가뜨릴 수 없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상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 깊은 심연을 들여다본들 심연에 잡아먹히지는 않는. 그것을 들여다보는 용감함, 동시에 사로잡히려는 절묘한 순간에 끊어낼 수 있는 절제. 그것의 열중, 연습 또 연습, 그 흔적으로서의 결과물 혹은 열중의 과정에서 느끼는 만족감.
어쨌든 잘 살고 싶어하는 것. 자기 자신이 가진 것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
이 지점에서 내 최애 영화 중 하나인 <세이모어 번스타인의 뉴욕 소네트>가 생각났다.
<너무 훌륭한 영화라 안보신 분 보라고 유튜브 영화 링크 걸어둡니다. 클릭>
영화 <아네트>가 예술하는 사람들아 이렇게 살지 말아라하는 오답노트라면,
영화 <세이모어 번스타인의 뉴욕 소네트>는 예술을 하려거든 이렇게 해보는게 어떨까?하는 정석 참고서같은 느낌.
무대공포증에 시달리던 배우 에단 호크는 “(21) 나는 늘 삶이 내 연기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모어를 통해 내가 연기하는 모든 것이 삶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런 생각은 한번도 해보지 못한것이죠.”라고 이야기한다. 에단 호크는 시모어는 어떻게 음악가의 측면과 개인의 측면을 통합할 수 있었을까?를 궁금히 여겼고 그 질문의 과정을 자신이 감독한 이 다큐영화로 보여주었다. 피아니스트 시모어의 대답은 간명하다.
“(17) 우리는 삶이 우리가 글을 쓰거나 연기하거나 음악을 하는 데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그 반대도 성립한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은 몰라요. 우리의 재능이나 예술성도 우리를 규정하고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23) 나는 모든 사람이 재능을 타고난다고, 혹은 특정한 뭔가를 탐구하려는 내밀한 욕망이 있다고 확고하게 믿습니다. 재봉 기술, 정원 가꾸기, 혹은 요리가 될 수도 있어요. 그게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재능이든 간에 우리가 가진 재능이 우리 존재의 핵심이라고 확신합니다.”
사람들이 가진 고유의 재능과 그 재능(예술)을 가꾸는 것에 대한 헌신이 더 좋은 사람이 되게 한다는 말, 그걸 삶으로 꾸준히 살아온 아흔 살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듣고 검소한 일상을 들여다 보는 일. <아네트>를 보고 나니 시모어 할아버지가 그리워졌다. 책장에서 <시모어 번스타인의 말>을 꺼냈다.
오늘 내 눈에 머무는 문장은
“(108)하비 : 선생님이 음악을 약물처럼 사용했다고 느낀 적이 있나요? 세상에서 벌어지는 고통을 느끼지 않으려고, 끔찍한 부당함에 맞서 그것을 바꾸려는 노력을 피하려고 음악에 몰입했다고 생각해요? 위대한 예술의 아름다움이 행동에 자극을 주기보다 진정제로 전락할 수도 있는 위험은 없을까요?
번스타인 : 나는 음악을 결코 *진정제*로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힘들고 특히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음악이 여러 차례 *구원자* 역할을 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군대가 생각나네요.”
진정제로서의 예술과 구원으로서의 예술. 내가 좋아하는 예술은 혹은 내가 하고 싶은 예술은 명확히 후자구나 한다. 하지만 때때로 그것을 진정제처럼 사용하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영영 몰랐을 것이다. 나 자신에게 해줄 수 있는 일들을 내가 하지 않았더라면,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인정받기를 원하며 그것을 주지않는 사람을 탓했을 것이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서 도망치기 위해서 진정제처럼 읽고 썼다. 정확한 글자들은 구원처럼도 느껴졌다. 나는 그런 사람이니까. 더 많은 언어가 필요한 사람이니까. 언어로 해석된 감정을 느끼는 것이 현실의 감정을 느끼는 것 보다 더 생생한 사람이니까. 나는 관계보다는 글자가 필요한 사람이었다. 슬픈 사실은 내가 속한 세계가 글자에 썩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것.
지난달과 이번달에는 사람들을 자주 만났고, 다행스럽게도 세상에 속해있다는 안온함과 어떤 세상과는 영영 멀어지고 있구나하는 비애감을 동시에 느꼈다. 혼자있을 때보다 친구를 만났을 때 더 외로워지는 기분. 한없이 책 속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친구들이 담담히 감내하는 중인 세상이 내주는 숙제(거칠게 단순화 하자면 취업, 결혼, 출산, 육아)를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들로 안심하고 싶었다. 책 속에는 그런 사람들이 드글드글하다. 규범의 입장에서 약간 미쳐있는 그 사람들은 초조해하지 않는다. 나는 자신만의 세계에서 살아갈 지언정 초조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현실의 사람들을 만나면 그것이 나만의 자폐적 세계인것 같아 걱정도 하게 된다. 나는 어쩌고 싶나.
진정제 같은 글과 구원으로서의 글. 점점 내 안에서 읽고 쓰는 것이 매우 커져간다는 걸 느낀다. (그를 위한 고독의 시간과 조용한 환경이 무척 중요해졌다.) 시모어 할아버지는 누구에게나 고유한 재능이 있으니 관심있는 것이라면 그것을 꼭 붙들고 결실을 맺을 때 까지 매달려보기를 권유했다. 좋은 삶을 살 수 있다면 읽고 쓰는 것 따위 언제든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했었다. 요즘은 그것이 없으면 내게는 좋은 삶이라고 할 수 없겠구나 싶어진다. 그것이 따로 떨어진 별개의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 오해였을까. 내가 바라는 것은 시모어 할아버지가 피아노 연주를 하고 가르치는 것 처럼 읽고 쓰며 늙어가는 것. 곁에는 고양이 한 마리, 맥주도 있으면 좋고. 가끔 책이야기 할 수 있는 친구들.
나에게도 꽉 잠궈둔 심연 비스무리 한 것이 있다. 내가 물끄러미 건너다 보는 것은 심연이 아니라 거기서 구해내고자 했던 나 자신이다. 쉽게 포기하지 않았던 나라는 인간이 가진 고유함이다. 무의식과 심연에 글자들을 입히면서 나를 구해왔다. 그럴 때야 살아있는 것 같았고 숨이쉬어졌다. 그런 나를 어렵다고 말하는 말들에, 그런 나를, 내가 만들어 낸 것을 쉽게 얻은 것처럼 생각하는 이들에게 이제 더는 주눅들지 않는다. 나에게 예술이란 글자들이고 글자들을 발견하는 짓을 그만 둘 생각은 역시 없다. 시모어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되새긴다. 예술과 좋은 삶은 따로 떨어져있지 않다. 좋은 삶이란 무언가? 잘 모르겠지만 심연을 제거한 것이 좋은 삶이라는 생각 역시 들지 않는다.
규범에서 살짝 비껴있더라도, 존재를 구원하는 예술이라면 나는 찬성.
규범에서 비껴나는 것이 예술이라고 착각하여 존재를 해치는 행위에 나는 반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