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이 깨어나는 마을
샤론 볼턴 지음, 김진석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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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땐 소설을 좋아했다. 독서반이었고, 꼬꼬마용 고전소설들과 먼나라 이웃나라 같은 만화, 어린이용 SF 소설도 꽤 진지하게 읽었다. 넉넉치 않은 살림이라 집에 책이 없어서 학급문고 같은데서 빌려 읽었던 기억이 난다. 머릿 속은 공상으로 가득했다. 조금 엉뚱한 꼬마였던 나는 읽은 내용의 주인공이 되는 상상을 하며 동네를 걷다가 자주 넘어졌고, 수시로 어디엔가 부딪혀서 옷에 지저분한 것들을 묻혀왔다. 길을 잃은 적도 많았는데 그마저도 상상력으로 극복! 딱 한번 빼고는 어떻게든 집을 찾아냈었다. 중학생 때 동네에 영화마을이 생기고 퇴마록과 드래곤라자를 필두로 한 판타지에 푹 빠졌을 당시 내 머릿속에선 소설 속의 장면들이 꽤나 근사하게 플레이 되었던 것 같다. 중3 드디어 집에 김유정 소설을 위시로 한 논술용 고전 전집이 들어왔고 1/3 정도 읽었던 것 같다. 어린왕자와 데미안은 셀 수 없을 만큼 자주 꺼내 읽었다. 햄릿과 개선문을 좋아했고, 톨스토이와 괴테는 너무 두꺼워서 읽기를 미뤘던 듯. (그리고 영원히 미뤘...) 고등학교 때 가장 재밌었던 책은 역시 해리포터와 다빈치코드!! 그리고 국뽕이 무한대로 차오르는 김진명의 소설들!! ㅋㅋㅋㅋ 쉬는 시간엔 황태자비 납치사건을 읽고 빡쳐하며, 야자시간엔 아라시의 노래를 듣고, 밤에는 고쿠센(일드)을 다운받아 보는 의식적 반일과 문화적 친일로 혼란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이상할 정도로 고등학교 졸업 이후엔 소설을 안읽었다. 고전은 아예 빠이빠이 했고 판타지도 딱 끊었다. 한겨레문학상 탄 소설들이나 겨우, 그것도 정치적 목적(?)으로 읽었던 듯. 다시 소설도 좀 봐야겠다 싶어진 것은 아주 먼 훗날의 일인데, 그것도 동년배들의 한국소설 정도이지, 여전히 외국소설은 잘 안읽히고, 민음사/열린책들 등에서 나오는 고전은 세상 졸려서 못읽는 중이다. 정말! 안읽혀, 안읽힌다고!!! 남들이 다 좋아한다는 그리스인 조르바는 읽다가 차라리 나에게 니체 입문서를 다오!이랬고 위대한 개츠비는 뭐시 위대하다는 거여 짜증이 치솟았다. 그렇게 몇번의 시도와 패배 끝에 내 뇌엔 소설 읽는 근육이 퇴화되어버렸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포기해.. 포기하면 편해져.. ☺️

인문-교양서들을 읽으며 개념과 맥락이 이해될 때 나는 즐겁다. 가벼워도 재밌고 무거워도 무거운대로 이해 될 때 반짝 작은 희열이 있다. 그런데 소설은 이게 즐기려면 ‘상상’을 해야하는 범위인거라.... 인생에 별 스펙터클이 없었던 데다, 여행은 거의 한 적이 없고, 소설과 함께 영화나 드라마도 너무 멀리 했던 모양인지.... 그러니까 언제부턴가.. 나는.. 소설을 읽을 때 상상이 안된다. 상상이 안되서 너무 슬프다. 슬프니까 안읽고, 안읽어서 더 퇴화하고 ㅋㅋㅋ

이게 어느 정도냐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는 데, 드디어 고전격에 속하는 소설이 재미있을 수도 있구나? 싶어 흥미롭게 읽어. 읽다보니 상상이 잘 안돼. 안되겠다!!! 더 재밌게 읽고 싶어서 무려 1988년의 영화 ‘프라하의 봄’(구하기도 어렵다)을 찾아내. 그리고 그걸 열씨미 본다? 나의 버석버석한 상상력에 필요한 이미지라도 얻어보기 위해. 그러면 당연히 소설의 내용을 처절하게 스포당하지😂 그치만 나는 책에 관해서 만큼은 의외의 근성이 있고, 스포한방이면 폭싹 식어버리는 영화와는 달리 소설은 ‘읽는 재미’라는 것도 있어서, 결국 이미지를 촉촉하게 추가해서 더 재밌게 읽어버린다규!! 😜

그렇게 ‘읽다가 상상이 잘 안되면 관련된 영화를 찾아서 보고 (없으면 시대적 배경이라도) 그걸 재료로 다시 읽기’는 비루한 상상력으로나마 재밌게 소설을 읽기 위해 고안해낸 나만의 방법이다. 상상이 안되서 더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을 덜 재밌게 읽는 것보단 스포를 당해도 그 재료들로 수월하고 풍부하게 읽는 편이 즐겁다. 



참고로 부작용도 있다. 이를테면 내 상상속 토마시는 훨씬 근사했는데 영화 속 토마시가 마른 멸치처럼 생겨서 소설 읽을 맛이 뚝 떨어진다거나 ㅋㅋㅋㅋ 디카프리오의 개츠비를 보고 헤어나오지 못해 소설을 읽다 말아 버린다거나(이건 걍 디카프리오가 너무 좋아서 소설에도 인물에도 이입이 안된 경우)ㅋㅋㅋㅋㅋㅋ

*

서문이 길었다.......

그러니까 ‘올해엔 소설을 다섯권 읽었네. 후우- 다시(소설 안.못.읽.으로) 돌아와버렸군...’라고 생각하고 있던 도중 이 책을 선물받게 된거다. 친애하는 알라딘 서재 이웃님께서 스릴러는 한권도 안읽어봤다는 나의 댓글에 실화냐며...... 그러게요. 믿기진 않겠지만 실화입니다. 상상을 못하는 저에게 무려 외국의, 그것도 스릴러, 심지어 고..고딕 미스터리 장르의 소설은 역시 장벽이 높았달까요;;;;;;;;;;;;;...... 읽어보라 다정하게도 책을 보내주셨다. 



응? 이게 은유가 아니라 진짜 뱀이라고? 응? 종교? 갑자기? 엉? 지금 내가 뭘 읽고 있는 거지? 하면서 600페이지 얇지 않은 책을 퇴근 후에 꼬박 3일만에 끝내버렸다. 확실히 재밌었다! 나는 범인이 궁금했고, 주인공의 변화와 성장스토리가 애틋했고, 무엇보다 뱀이라는 소재가 너무 매력적이었다. 등장하는 뱀들을 검색해서 봐가며 읽었는 데, 징그러우면서도 매혹된다고 해야하나. 그리고....(지금부터 본심구간) 읽으면서 너무 서운했다. 어쩌다 내 소설 뇌가 퇴화가 되가지고 참. 어쩌다가 내가 그 흔한 CSI같은 드라마도 본적이 없어가지고 참. ...아니 뱀 다큐라도보고 시작할걸 그랬나??.. 아이고.... 그니까 내가 상상력이 좋았다면 정말 너무 재밌게 읽었을 것 같은 데..ㅜㅜ 장면 장면이 재밌는 데 상상이 잘 안가....ㅜㅜㅜㅜㅜㅜ

“(343) 뱀들... 수십 마리.. 어쩌면 수백 마리인지도 몰랐다. 아이 장난감에서 리본이 풀려나오듯 뱀들이 풀밭에서 출렁거렸다. 미끈하고 촉촉한 몸체가 달빛을 받아 번득거렸다. 뱀들은 집단의 목적, 공동의 목표에 따라 이동했다. ...”

아.. 상상해보고 싶은 데, 뭔가 흡족하게 떠올려지지 않는다. 내가 상상력이 풍부했다면, 시각적으로도 촉각적으로도 정말 흡, 하고 숨멎할 장면이었을 것 같은 데.. ㅜㅜ 이 뿐만 아니라 소설 전체적으로 나의 비루한 상상력을 탓할 부분들은 너무 많았고, 그래서 앞으로 스릴러를 읽기 위해서라도 다양한 영화를 많이 봐두리라 다짐했다. 이 재밌는 걸 더 재밌게 읽고 싶도다!!! 막판 저택에서의 결투(?)도 상상하기에 따라서는 정말정말 재밌게 읽을 수 있었을 것 같은 데... 생각이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아서.. 그런데 읽다보면 다음이 궁금하니까 페이지 확확 넘어가고 그래서 ㅜㅜ 서글펐다ㅜㅜㅜㅜ 따싯, 앞으로 영화 많이 볼거야...ㅜ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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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은 없다>에서 손예진이 본격적으로 흑화하면서 운전대를 잡으면서 이런다. “생각하자 생각하자. 정신 똑바로 차리고 생각하자. 생각하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생각하자.” 영화에서 제일 좋아하는 장면이고, 지금까지 본 모든 영화를 통틀어 손에 꼽을 정도로 좋아하는 대사다. 쉽게 살고 싶을 때, 나약해지고 싶을 때, 나는 언제부턴가 이 장면을 떠올린다. 나를 구할 것은 나밖에 없다. 나를 먹여살릴 사람도 나 밖에 없다. 포기하고 싶으면, 의존하고 싶으면 댓가를 치러야한다. 생각하자. 생각하자. 정신 똑바로 차리고 생각하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다시 생각하자.

여자 주인공이 절박한 상황에 쌩 혼자 내던져졌을 때. 결국에는 아무 것도 믿을게 없고 믿어서도 안되고 의존할 수 없고 의존해서도 안될 때. 그때 쨘 하고 남자주인공이 나타나서 구해준다면야 그거야 말로 클리셰고 신화고 동화(현실 속에서 그런 동아줄이야 말로 개 썩어문드러진 줄이기 십상이다. 걍 상황이 너무 힘드니까 내 절박함 투사한거다. 그딴 거 없고 혹시 있으면 의심해라.)이고, 그런 방식으로 문제해결하는 거 너무 싫으니까 - 나는 바란다. 특히 그가 여주인공이라면 끝까지 정신줄 잡고 생각하기를. 의탁하지 않기를. 두다리로 일어서기를. 독하게 독립을 쟁취하고, 내가 나를 구할 수 있다는 경험에 근거한 자존감으로 이후의 삶을 살아가기를. 만약 가능하면 그것을 기반으로 관계맺고, 연대하기를.

친애하는 서재이웃님이 왜 이 소설을 좋아했는 지 알 것도 같다. 어쩜, 내가 이 소설이 좋다고 생각했던 이유와도 같을거라 추측해본다.

처음부터 일관되게 주인공 클래라는 타인의 도움을 거부하는 사람이지만, 소설의 후반부에 가면 그러한 그녀의 성향이 장점이 되어 사건을 해결할 수 있게 된다. 생각해봐, 생각하자. 가만히 생각하자. 움직이자. 생각하자. 머리를 써! 라고 끊임없이 되뇌이는 클래라. 결국은 생각해내는 클래라. 쉽게 모면하지 않는 사람. 그녀는 의존할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건강한 의존으로 나아가기 위해 먼저 자기자신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만약 위기의 상황에서 클래라가 보다 쉽게 도움을 요청하고, 타인과 함께하는 모험을 감수하고 헤쳐나가는 캐릭터였다면? 난 이 소설을 별로라고 생각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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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구실삼아 나를 무고한 피해자로 만들어 주저 앉아버리고 싶은 유혹을 경험할 때가 많았다.
물론 때때로 충분히 남탓, 세상탓을 할 필요도 있긴하지만 나에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닌 것 같다.

“(498) 나는 결단을 내렸다. “그냥 흉터일 뿐이에요. 그게 제 인생을 망치지는 않아요.””

상처를 통해 내가 확인하고 싶은 것은 그래서 내가 이만큼 망했다가 아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건재하다는 뜻이고, 아프지 않았으면 몰랐을 진실을 마주했다는 것이고, 결코 나 자신보다 흉터가 클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거기에 가닿기 위해선 나만의 해석이 필요하고 그러려면 언어가, 이야기가, 타인의 삶이 필요하다. 비록 소박하더라도 시간을 들인 나의 해석이 없다면 결국 상처에 삶을 갖다 바치게 되더라. 물론 해석은 살아가면서 계속 변한다.

살아가야 하니까.
어떻게든 일어서야하는 나는, 아직까진 사람이 두려운 나는, 책을 읽고 영화를 본다. 간접경험은, 타인의 언어는. 불가해해서 위독해져버린 해묵은 상처를 해석해 내는 데 좋은 재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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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아 물론 순수하게 인생의 락도 된다!! 소설.안.못.읽의 삶을 극복하쟈~~~ 뇌야, 훈련해서 진화하쟈~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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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0-11-22 10: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설은 옳습니다. 논픽션은 속여도 소설은 안 속여요. 소설은 대놓고 거짓말이야! 하고 거짓말치니까.... 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0-11-22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프라하의 봄 토마시는 진짜 별로였다..저는 차라리 밀란쿤데라 할배 얼굴을 토마시로 상상하고 읽습니다. ㅋㅋㅋ

공쟝쟝 2020-11-22 10:51   좋아요 1 | URL
헐ㅋㅋ 젊은 쿤데라 고집스럽게 잘생겼네요?ㅋㅋㅋ 확실히 이편이 나앗겠어 ㅋㅋ 하지만 줄리엣비노쉬는 진짜 테레자였어요 ㅠㅠ 이뽀

단발머리 2020-11-22 12: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은데.... 특히 서문이 너무나 좋아요. 이렇게 공쟝쟝님 독서역사에 대해 알게 되네요.
저도 아직 소설은 어려운데 철학책 척척 읽는 쟝쟝님이 소설도 섭렵하게 되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 벌어질까 기대감 200%에요.
햄릿이랑 개선문 좋아하는 중학생이라니!! 고급지고 품격있고 우아합니다. 전 중학교 때 뭘 읽었나 생각해봐요. 난 햄릿도 개선문도 모르는 중학생이었고, 흠....펄벅의 <대지>를 읽었네요. 난, 대지와 부활의 중딩.

공쟝쟝 2020-11-22 23:16   좋아요 0 | URL
매번 다정하게 좋아해주시는 단발님, 철학책 척척 이라고 말씀하시다니.. 철학입문서를 어려워하며 읽는 사람으로 정정해주세요. ㅋㅋㅋㅋ 펄벅의 대지는 개선문보다 두꺼워서 읽다 말았던 것 같아! 대지와 부활의 중딩 멋져 😘

수연 2020-11-22 14: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른 멸치 대목에서 너무 웃어버렸어요, 쟝쟝님의 인생관을 짐작하게 하는 페이퍼, 그대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인하고 독립적인 여성이구나 싶은.

공쟝쟝 2020-11-22 23:18   좋아요 0 | URL
강인해지고 싶고 독립적이고 싶어서 꾸역꾸역 독서하는. 그런 사람 되고 싶다용🤧

비연 2020-11-22 18: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른 멸치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0-11-22 23:18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 제가 진짜 안좋아하는 상임..ㅋㅋㅋ 대머리만큼 싫엇!!

deadpaper 2020-11-22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쟝쟝 읽히는 어감이 좋네요

공쟝쟝 2020-11-22 23:19   좋아요 0 | URL
마지막 쟝 드립을 알아차려주시는 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