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


- 이면우 -

오솔길 가운데 낯선 거미줄

아침 이슬 반짝하니 거기 있음을 알겠다

허리 굽혀 갔다, 되짚어 오다 고추잠자리

망에 걸려 파닥이는 걸 보았다

작은 삶 하나, 거미줄로 숲 전체를 흔들고 있다

함께 흔들리며 거미는 자신의 때를 엿보고 있다

순간 땀 식은 등 아프도록 시리다

그래, 내가 열아홉이라면 저 투명한 날개를

망에서 떼어 내 바람 속으로 되돌릴 수 있겠지

적어도 스물아홉, 서른아홉이라면 짐짓

몸 전체로 망을 밀고 가도 좋을 게다

그러나 나는 지금 마흔아홉

홀로 망을 짜던 거미의 마음을 엿볼 나이

지금 흔들리는 건 가을 거미의 외로움임을 안다

캄캄한 뱃속, 들끓는 열망을 바로 지금, 부신 햇살 속에

저토록 살아 꿈틀대는 걸로 바꿔 놓고자

밤을 지새운 거미, 필사의 그물짜기를 나는 안다

이제 곧 겨울이 잇대 올 것이다

이윽고 파닥거림 뜸해지고

그쯤에서 거미는 궁리를 마쳤던가

슬슬 잠자리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했다

나는 허리 굽혀, 거미줄 아래 오솔길 따라

채 해결 안 된 사람의 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

시를 읽다 문득 열 아홉, 스물 아홉, 서른 아홉, 마흔 아홉의 나를 돌아본다. 숲 전체를 흔드는 잠자리 투명한 날개의 파닥거림에 가슴 아파했을 것이고, 잠자리와 거미가 들이미는 모순이 힘들어 그냥 거미줄을 밀고 나갔을 수도 있고, 홀로 필사의 그물짜기로 밤을 지샌 가을 거미의 외로움에 누구보다도 공감했을 것이다. 세월이 흐른다고 앞선 세월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에 허리 굽혀, 거미줄 아래 오솔길 따라 가지 못하고 아직 거미줄 앞에 서성거린다. 내 안에는 아직 모든 시절의 내가 서성거리고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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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데려가는人 2022-05-25 12: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마흔아홉이 되면 거미줄을 짜는 거미의 외로움도 헤아려보게 될 수 있군요. 전 항상 거미줄을 보면 경이롭다... 어떻게 실 하나로 이렇게 완벽한 그물을 짜는 거지? 이런 생각을 하거든요. ㅎㅎ 거미에게 잡아먹힐 잠자리가 불쌍했던 건 아주 어렸을 때였던 것 같고, 언젠가부턴 이런 게 자연계의 법칙이지라는 시선으로 봤던 것 같아요. 나는 안 바뀌는 것 같은데, 지나고 보면 조금씩 바뀌어있네요.^^

잉크냄새 2022-05-25 20:58   좋아요 1 | URL
누구나 큰 차이 없이 그런 과정을 거치는 것 같아요. 여리고 가냘픈 것들의 시선이었다가, 약육강식의 밀림 정글속 냉정한 어느 야수의 눈빛이었다가, 킬리만자로 표범의 고독한 눈빛이었다가...우리는 다 그 어느 눈빛 앞에 서 보았던 것 같아요.

2022-06-30 18: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6-30 2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현대인에게 요구되는 교양이란 한마디로 타자에 대한 상상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폭탄 공격을 당하는 쪽의 고뇌와 고통을 상상하는 힘은 전쟁에 저항하고 평화를 쌓기 위한 기초적 능력이다. 따라서 이런 기초적 능력을 결여한 채 젊은이들이 사회로 나가는 것이 나로서는 불안하기 짝이 없다. -p36-


그대들 말대로 타자의 고통이나 과거의 고난에 대한 상상력을 지니기란 어려운 일이다. 나에게 그런 상상력이 있다고 간단히 얘기하는 건 불성실하며 심지어 위선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애써 '상상력이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자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을 방기하는 순간 시니시즘(냉소)이 개가를 올리고 참극은 반복된다. -p265-


우리는 대부분 자신을 '정상'이라는 관념의 틀 안에 가둬놓음으로써 안심하고자 한다. 그런 우리는 언제든 '이상'한 것을 배제하고 학살하는 폭력의 가담자가 될 수 있다. -p328-


아이덴티티가 타자와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건 맞지만, 실제로는 어떤 타자와의 관계이든 보이지 않는 권력관계가 작용한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여자와 남자, 아이와 어른, 소수자와 다수자 모두 그렇다. 그것을 무시하고 마치 순수하게 대등한 관계가 존재하는 듯한 전제를 까는 건 잘못된 것이다. -p217-


현대인에게 요구되는 교양이란 한마디로 타자에 대한 상상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폭탄 공격을 당하는 쪽의 고뇌와 고통을 상상하는 힘은 전쟁에 저항하고 평화를 쌓기 위한 기초적 능력이다. 따라서 이런 기초적 능력을 결여한 채 젊은이들이 사회로 나가는 것이 나로서는 불안하기 짝이 없다. - P36

그대들 말대로 타자의 고통이나 과거의 고난에 대한 상상력을 지니기란 어려운 일이다. 나에게 그런 상상력이 있다고 간단히 얘기하는 건 불성실하며 심지어 위선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애써 ‘상상력이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자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을 방기하는 순간 시니시즘(냉소)이 개가를 올리고 참극은 반복된다. - P265

우리는 대부분 자신을 ‘정상‘이라는 관념의 틀 안에 가둬놓음으로써 안심하고자 한다. 그런 우리는 언제든 ‘이상‘한 것을 배제하고 학살하는 폭력의 가담자가 될 수 있다. - P328

아이덴티티가 타자와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건 맞지만, 실제로는 어떤 타자와의 관계이든 보이지 않는 권력관계가 작용한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여자와 남자, 아이와 어른, 소수자와 다수자 모두 그렇다. 그것을 무시하고 마치 순수하게 대등한 관계가 존재하는 듯한 전제를 까는 건 잘못된 것이다.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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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는 ‘한 일에 대한 후회(regret of action)’와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regret of inaction)’로 구분해야 한다고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교 심리학과의 닐 로스(Neal J. Roese) 교수는 주장한다. ‘한 일에 대한 후회’는 오래가지 않는다. 이미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그 결과가 잘못되었더라도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얼마든지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는 쉽게 정당화되지 않는다. ‘한 일에 대한 후회’는 내가 한 행동, 그 단 한 가지 변인만 생각하면 되지만,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는 ‘그 일을 했다면’ 일어날 수 있는 변인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 <바닷가 작업장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p60~ 61


세상에서 어리석은 일이 ‘외로움을 피해 관계로 도피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고통은 ‘불필요한 관계’에서 나옵니다. 차라리 ‘외로움’을 견디며 내 스스로에게 진실한 것이 옳습니다. 진짜 외로워야 내 스스로에게 충실해지고, 내 자신에 대해 진실해야 내가 사랑하는 이들과의 관계가 더욱 소중해집니다. - <바닷가 작업장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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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2-04-10 12: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이네요! ‘하지 않은 일들‘을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잉크냄새 2022-04-10 19:01   좋아요 2 | URL
남녀의 차이도 있다고 합니다. 남성이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 를 많이 하고 여성이 ‘한 일에 대한 후회‘ 를 많이 한다고 하네요.

프레이야 2022-04-10 14: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김정운 글 좋아합니다.^^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에 대한 생각에 공감해요. 해보고 후회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ㅎㅎ
불필요한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되네요. 봄날입니다 잉크냄새 님.

잉크냄새 2022-04-10 19:04   좋아요 3 | URL
작년 한해 김정운의 책을 대부분 읽어 보았는데, 좋은 글이 많더군요.
봄날은 후딱 갑니다. 어여 즐기시길...

마음을데려가는人 2022-05-15 21: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저자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저 말에는 공감합니다. 단 한 번뿐인 인생이라면 일단 ˝go!!!˝ 그리고 외로워야 자신의 내면과 마주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관계에서도 많은 것들을 깨달을 수 있지만, 혼자 있는 시간에 숙성되는 법이니까요. ^^

잉크냄새 2022-05-17 20:39   좋아요 1 | URL
책에서도 언급되는데 여성이 남성보다 일단 go 성향이 짙다고 하네요. 사랑을 놓고봐도 여성은 일단 사랑하고 남성은 사랑을 재어보는 경향이 크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랑도 해보지 않은 남자들이 사랑을 더 떠드는 건지도 모르죠.

Vanessa 2022-05-15 2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맞아요. 맞습니다

잉크냄새 2022-05-17 20:39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법정, 나를 물들이다 - 법정 스님과 행복한 동행을 한 사람들
변택주 지음 / 불광출판사 / 2012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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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후반, 회사를 그만두고 인도 여행길에 올랐을 때, 내 배낭 속에 한 권의 책이 있었다. 범우사 문고판 법정 스님의 <무소유>였다. 내 영혼 어딘가에 덕지덕지 달라 붙어있을 욕망의 덩어리를 떨쳐버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들고 다녔다. 지금 표지를 살펴보니 읽은 날짜가 연필로 적혀 있다. 한달 반의 여행 기간 동안 네 번을 읽은 모양이다. 그 당시에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현재 내 삶의 방향을 볼 때 스님의 무소유, 시절 인연, 본래무일물과 같은 사상이 은연중에 흔적을 남기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법정, 나를 물들이다>는 그들의 삶에서 법정 스님과 함께 가서 함께 행복했던 열아홉 분의 인연을 담은 책이다. 그의 인연은 삶이 종교의 경계에서 자유로와 주교, 목사, 스님, 원불교 교무 등 종교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다. 사람 사귐의 경계에서 자유로와 화가, 조각가, 방송인, 도예가, 서예가 등 삶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근엄한 스님의 삶 뿐만 아니라 냉정한 겉모습과 달리 작은 인연에도 우주만큼 큰 의미를 두시는 또 다른 면모도 얼핏 보인다. 또한 조근조근 스님과의 인연을 풀어내는 그들의 삶도 스님과의 인연이 스미고 번지어 맑고 향기로운 삶으로 이어지고 있다.


거창한 다비식이나 화장 의식 없이 스님의 평소 말씀 그대로 '비구 법정(比丘 法頂)' 위패 하나 드시고 불에 드신지 어느덧 열두해가 지났다. "살때는 삶에 철저해 그 전부를 살아야 하고 죽을 때는 죽음에 철저해 그 전부가 죽어야 한다."는 말씀을 몸소 보여주시고 떠나셨다. 수필가로서, 문장가로서 그가 남기 숱한 글들은 그의 완전한 죽음 뒤에도 우리의 삶을 때론 보듬고 때론 질타하며 그의 생을 더 맑고 향기롭게 기억하게 한다. 

  

스승은 소유하러 들면 텅 빈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사라진다고 했다. 우리 필요는 대상이 아니라 쓰임새다. 의자를 가지려는 까닭은 ‘앉기 위함’ 이요, 사랑을 구하는 까닭은 ‘설렘과 끌림’때문이다. 우리 필요는 소유가 아니라, 쓸모이다.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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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2-03-18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 요즘 넘 멋지신 거 아녜요?? 암튼, 우리 필요는 대상이 아니라 쓰임새라니!!! 고개 주억거리고 생각에 잠겨 봅니다. 나의 쓰임새는 뭔가? ^^;;
그리고 이 온라인에서의 인연도 생각하게 되고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잉크냄새 2022-03-19 11:53   좋아요 0 | URL
대상의 본질에 충실하면 그 쓰임새가 보이지 않을까요?

프레이야 2022-03-18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 님 인도 페이퍼 기억납니다.
글도 사진도 그냥 좋았던 기억이요.
법정스님의 책은 거의 갖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의 기억과 인연 이야기로 엮인 이 책은 처음 봐요. 찜해갑니다. 오래전 나온 책이군요.
무소유의 참뜻을 다시 생각해 보며…

잉크냄새 2022-03-19 11:54   좋아요 1 | URL
인도 여행 떠난 지 벌써 십년이 훌쩍 넘었네요.
요즘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다 보니 책들이 좀 오래된 감이 있네요.

마음을데려가는人 2022-03-21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유로와 자유로와... 오늘 이 말이 마음에 박히네요 :)

잉크냄새 2022-03-22 13:21   좋아요 0 | URL
라임이 살아있다는 말씀이렸다!!!
 

생각하기도 싫었던 상상 이상의 괴물이 드디어 태어났다. 표면화된 공약만으로도 전율이 느껴지는데 이면에 감춰진 더러운 욕망은 얼마나 음흉하게 또아리를 틀고 있을까. 어느 어두운 룸싸롱에서 폭탄주를 마시며 병뚜껑 룰렛을 돌려 복수의 대상을 정하고 있을 것이다. 그 복수의 칼날은 정치권이 끝나는 날, 일반 대중을 향할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그를 선택한 이들, 스스로의 욕망에 충실했던 그들의 성향이 쉽게 바뀌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성격처럼, 혈액형처럼, 손금처럼 이미 정형화된 속성이 되어 버렸다. 아직은 만족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프로 철새 챨스가 날아가기 전 장담했듯이 손가락을 꺽어버리고 싶은 날은 생각보다 훨씬 빨리 올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 날이 오기 전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그들의 도끼 자루만은 되지 않았으면 한다. 쇠에서 나온 녹에 스스로 무너지도록....  


"처음으로 쇠가 만들어졌을 때 세상의 모든 나무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어느 생각 깊은 나무가 말했다. 두려워할 것 없다. 

우리들이 자루가 되어주지 않는 한 쇠는 결코 우리를 해칠 수 없는 법이다." 

-신영복 < 나무야, 나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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