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큐브 예술영화 프리미어 페스티벌' 라인업을 쭉 보다가 어쩌다보니 최근 자꾸 얽히게 되는 <안나 카레니나>를 상영하길래, 그래, 나도 이 참에 오랜만에 영화나 몰아서 보자, 하고 <안나 카레니나>를 전후로 상영하는 영화를 쭉 훑었다. 그중에 눈에 들어온 영화가 <엔젤스 셰어>와 <디테일스>였는데, 호기롭게 세 편을 같은 자리에서 연달아 볼까라는 생각도 잠시 했으나 허리 건강을 생각해 <엔젤스 셰어> <안나 카레니나> 두 편만 예매했다. 네이버 영화 소개(부산국제영화제 때 소개로 보임)에서도 씨네큐브 영화제 작품 소개가 뜬구름 잡는 듯해서 그저 거장 답지 않은 유머가 있는 영화, 정도로만 기대했는데 보는 내내 낄낄대기 바빴다. 

 


  어린 시절부터 원수처럼 지내는 동네 친구와 싸우다 잡힌 로비. 전적이 있는 터라 원래대로라면 교도소에 들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지만 임신한 여자친구 때문에 개과천선하고 있다는 변호로 가까스로 지역봉사활동으로 마지막 기회를 잡는다. 로비는 그곳에서 자신처럼 그냥 그런 밑바닥 인생을 사는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하고, 자신을 하나의 인격체로 대해주는 지역봉사활동 담당 직원과 교류하면서 불안하고 막막하지만, 그리고 아무도 믿어주지 않지만 어떻게든 자신의 삶을 바꿔보려 한다. 그러던 중 우연히  봉사활동 담당자와 위스키 양조장에 견학을 다녀온 로비는 위스키에 관심이 생겨 재미삼아 공부하다가 자신이 위스키 감별에 재능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던 중 곧 희귀한 위스키가 경매에 나와 어마어마한 가격으로 팔릴 예정이라는 소식을 듣고는 친구들과 위스키 탈취라는 기상천외한 계획을 세운다. 

 


  사람도, 환경도 생동감과는 거리가 먼 마을. 여자친구 그리고 곧 태어날 아기와 함께 지낼 곳은커녕 혼자 지낼 방 한 칸 없이 친구 집을 떠돌며 사는 로비는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살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를 얽매고 있는 과거는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자신의 힘으로 얻은 것은 아니지만 잠시나마 평범한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지만 그마저도 자신의 의지와 없는 일 때문에 박탈당한다. 그렇게 끊임없이 자신의 발목을 붙잡은 과거를 떨치게 해준 것은 바로 위스키였다. 자신의 재능을 우연히 알게 돼 이를 살려 인생의 소소한(?) 역전을 꿈꾸는 모습은 그 상황이 지극히 불법적이라 하더라도 일단은 유쾌하다. 윤리적 잣대를 엄격하게 들이댄다면 사실 말도 안 될 터지만, 관객들도 어느샌가 공범자가 되어 이 악동들이 맞이한 비극(?) 앞에서 함께 탄식하고, 그들과 함께 웃고 즐긴다. (그러고보니 관객들이 이구동성으로 탄식하는 모습도 정말 오랜만에 경험했다.) 

 


  사실 그냥 영화 시간 맞춰서 골라잡은 영화였지만 얻어걸린 게 잭팟(!)이라 연말에 좋은 선물 하나 받은 기분이었다. (오죽했으면 바쁜 와중에 시간을 쪼개서 귀차니즘을 딛고 글까지 쓰고 있겠는가.) 물론 영화가 관객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져준다거나, 감동 또는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때로는 관객과 영화 속 주인공들이 이렇게 함께 웃을 수 있는 영화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었다. (게다가 그냥 웃기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조금 지쳐 있는 내게 괜찮다고, 그냥 웃어넘겨버리라고 장난쳐주는 친구 같았던 영화. 찾아보니 2013년에 정식으로 개봉할 것 같던데, 그때 다시 한 번 이 악동들을 만나러 갈 생각이다. 


덧) 영화를 보고 나오면 어느샌가 흥얼거리게 되는 곡. 




댓글(6)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라로 2012-12-15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 볼테야요!!
이매지님 잘 지내시죠??^^

이매지 2012-12-16 12:16   좋아요 0 | URL
개봉하면 꼭 보세요! ㅎㅎㅎ
나비님 오랜만이예요. 와락와락.

카스피 2012-12-15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글을 올리실 정도니 상당히 재미있는 영환가 보네요^^

이매지 2012-12-16 12:17   좋아요 0 | URL
정말 저 영화 리뷰 정말 오랜만에 썼어요. ㅎㅎ

amator 2013-01-21 0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얻어걸린 잭팟'이라기엔 저는 무척 기다리고 있던 영화였는데 재밌으셨나보네요
씨네큐브 예술영화 프리미어 페스티벌 할 때 딱 출장가는 바람에 여러 작품을 놓쳐서 무척 아쉬웠어요.
혹시 아직 안보셨다면 이 영화를 만든 감독님의 다른 작품도 한 번 보시길 추천합니다.
'랜드 앤 프리덤', '빵과 장미', '티켓',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다~ 좋습니다. :)

이매지 2013-01-21 09:32   좋아요 0 | URL
사실 전 <안나 카레니나>에 더 기대를 하고 있었거든요 ㅎㅎ
개봉하면 한 번 더 보려고 하는데 영 개봉일이 안 잡히네요 ㅠㅠ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봤는데 아직 못 본 작품이 많네요.
언제 시간내서 추천해주신 다른 작품들도 봐야겠어요! ^^
 
꽃 아래 봄에 죽기를 가나리야 마스터 시리즈
기타모리 고 지음, 박정임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2년 5월
절판


'이런 마을에 살고 싶다'는 마음은 늘 이방인의 달콤한 감상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마을이 실제로 있긴 있다. -48쪽

구도가 카운터 안쪽에서 팔짱을 끼며 고개를 약간 갸웃했다. 이야기를 해도 될지 생각에 빠져 있는 그 모습이 붉은 에이프런에 수놓인 요크셔테리어와 매우 닮았다. 아주 짧은 순간, 손님과 시간을 포함하여 가게의 움직임이 모두 멈춘 것처럼 느껴졌는데, 그 이유는 삼나무 문을 사이에 두고 세상과 격리된 이 장소가 구도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계였기 때문이다. 단, 이 가게의 맹주는 그런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결코 과시하려고 하지 않는다. 어쩌면 의식조차 못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그런 분위기에 농락당하는 것도 모른 채 단지 이곳에서 기분 좋은 시간을 보낼 뿐이다. -70쪽

자유는 혼자 된 자신을 차가운 손바닥으로 내리누르고 있었다. 혼자서 집을 나설 때, 기다릴 사람 없는 집으로 돌아올 때, 부재중 전화 하나 없는 자동 응답기를 볼 때, 욕조에 몸을 담그고 혼잣말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 자유가 고독으로 바뀐 순간부터 노다에게 다른 감정이 생겨났다.
공포와 한없이 닮아 있었다.
'나 이외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 같아.'
그 생각은 가나리야를 드나드는 지금도 노다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응어리로 남아 욱신거리고 있다.
누구나 얼굴 뒤편에 슬픔을 담아 놓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나이는 아니었다. 동시에 누구나 자신의 슬픔이 최악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도 괴로운 법이다."-90~1쪽

이번에는 자신의 전용 고블릿을 비어서버 꼭지에 대었다. 구도가 맥주를 마신다는 것은 천천히 이야기를 듣겠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이런 식으로 가게의 손님들이 안고 있는 작은 문제들을 해결한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101쪽

'기원, 소원, 소망, 희망, 절망, 동경.'
사람이 살면서 하는 이런 말들 중 몇 개가 현실이 되는 것일까. 아마도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신앙을 찾는 것이다.
점술이 그렇고 주술이 그렇다. -130쪽

히즈루도 대화에 참여할 수 있는 기본 룰을 간신히 이해했다. 이 가게에는 특유의 게임 비슷한 것이 존재한다. 참가 조건은 명쾌하다. 수수께끼를 내는 사람, 수수께끼를 푸는 사람, 양쪽을 겸하는 사람, 셋 중 하나면 된다. -138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붉은 머리 가문의 비극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이든 필포츠 지음, 이경아 옮김 / 엘릭시르 / 201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느새 2012년의 달력도 한 장밖에 남지 않았다. 아직 한 달이 남긴 했지만, 2012년을 가만히 돌아보면서 남들한테는 큰 의미도 없겠지만 혼자 올해의 책, 올해의 영화 이런 걸 두고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그래도 올해의 시리즈만큼은 고민 없이 정할 수 있겠구나 싶어 흐뭇했다. 몇 초의 고민도 없이 올해의 시리즈로 꼽은 것은 바로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이다. 기존에 DMB(동서미스터리북스)과 라인업이 겹쳐서 <환상의 여인>을 읽을 때만 하더라도 '이미 본 책인데...'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DMB와는 다른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 홀딱 반한 뒤 <가짜 경감 듀> <어두운 거울 속으로> 등 별 다섯을 줘도 아깝지 않을 작품을 잇달아 만나는 행복을 누렸다. 그리고 연말, 마치 선물처럼 또 한 권의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이 채워졌다. 바로 <붉은 머리 가문의 비극>이다. 이 작품 또한 기존에 DMB에서 <빨강머리 레드메인즈>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바 있지만, 다행히 아직 읽기 전이었던 터라 편견 없이 시작할 수 있었다. 


  서른다섯이라는 젊다면 젊다고 할 수 있는 나이에 런던경시청에서 높은 자리에 오른 실력 있는 형사 마크 브렌던. 매년 다트무어에서 송어 낚시로 휴가를 보내는 것 외에는 딱히 한눈팔지 않고 범죄자들을 체포하며 활약한다. 여느 해처럼 앞만 보고 달리다 휴가차 다트무어를 찾은 마크는 난생처음으로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다. 그러던 차에 낚시차 간 외딴 채석장에서 지금까지 본 그 어떤 여자보다 아름다운 여자와 우연히 마주친다. 하지만 자신감이 없었던 마크는 그녀처럼 예쁜 여자가 혼자일리 없다고, 그녀 같은 사람이 자신을 쉽게 좋아하기 힘들 것이라고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그저 스쳐보낸다. 그렇게 아쉬운 만남과 이별 뒤 그녀의 기억이 희미해질 무렵, 마을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피해자의 아내가 마크에게 도움을 요청해 그는 어쩔 수 없이 수사에 참여하게 된다. 하지만 피해자의 집에서 그가 만난 것은 그의 마음을 빼앗아간 그 여인. 삼촌이 남편을 죽인 비극적인 사건을 겪은 그녀를 위해서 마크는 온힘을 다해 사건을 해결하려 한다. 오토바이로 도주하는 처삼촌(로버트 레드메인)의 모습이 곳곳에서 목격되었기에 쉽게 끝날 것 같이 보였던 이 사건은 예상 외로 로버트 레드메인의 행방은 묘연해지면서 미궁에 빠진다. 그렇게 몇 달의 시간이 흐른 뒤, 해외로 도주했으리라 추정했던 로버트 레드메인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자신의 형을 살해하면서 이야기는 새로운 양상으로 흐른다. 


  <붉은 머리 가문의 비극>은 독특하게도 탐정이 두 명 등장한다. 전반부를 영국인 형사 마크 브렌던이 담당한다면 후반전은 미국인 탐정 피터 건스의 몫이다. 하지만 탐정이 두 명이라고 해서 독자가 혼란스러워할 이유는 전혀 없다. 초반에 작가가 한껏 띄워준 명성에 걸맞지 않게 마크 브렌던이 형사로, 탐정으로 실격에 가까울 정도로 정줄을 놓고 끊임없이 자충수를 두기 때문이다. 사랑에 눈이 멀어 첫 단추를 잘못 끼운 덕분에 끝까지 바보 인증을 하는 마크는 심하게 얘기하자면 탐정실격이다. 피해자의 아내 제니를 자신이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저 맹목적으로 신뢰하는 마크의 모습에서 몇 번이나 '저기, 니가 좋아하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좀 정신 좀 차리고 객관적으로 봐야 하는 거 아니니' 하며 가슴을 쳤다. 마크 때문에 때론 속이 터졌지만 사실 그게 <붉은 머리 가문의 비극>의 매력이기도 하다. 엘릭시르 편집부에서는 띠지에서 "이 작품은 '사건'이 아니라 '인물'을 따라 읽으세요"라고 권장(?)했는데, 그 말처럼 이 책은 인물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에 눈이 먼 형사 마크 브렌던과  제3의 눈으로 통찰력 있게 사건을 조사하는 베테랑 탐정 피터 건스를 각각의 축으로 놓고 봐도 재미있겠지만, 이 책에서 (그들의 붉은 머리색만큼이나) 눈에 띄는 것은 레드메인 가문의 사람들이다. 도주중인 로버트 레드메인을 비롯해 서적수집가인 앨버트 레드메인, 형과 달리 책이라곤 <모비딕>만 소중히 읽을 뿐인 퇴역 선장 벤디고 레드메인, 그리고 삼촌에 의해 남편을 잃은 제니 펜딘. 이들의 행동과 심리가 다른 어떤 추리소설보다 꼼꼼하게 묘사된다. 여기에 남편을 잃은 제니의 마음을 어느샌가 사로잡아 마크의 질투를 사는 이탈리아인 주제페 도리아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압권은 거의 마지막 챕터인 '고백'인데, 사이코패스의 이 고백 앞에서는 오싹하지 않을 독자가 몇 안 되지 싶었다.  


  인물뿐 아니라 영국의 다트무어, 크로우즈 네스트, 이탈리아의 코모 등의 배경에 대한 묘사도 돋보였고, 각각의 배경이 인물의 성격과도 잘 어울리는 듯했고, 같은 인물이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성격으로 변하는 것을 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사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이거 진짜 물건인데' 싶었지만, 밑줄 그어둔 부분을 옮기느라 부분부분 들춰보고는 다시 한 번 놀랐다. 모르는 사이에 그냥 스쳐간 복선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작가가 잘 짜놓은 프레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어리숙한 독자는 그저 읽었을 때 한 번, 읽고 나서 시간이 흘렀을 때 다시 한 번 놀랄 뿐이다. 세계문학전집으로도, 미스터리 시리즈로도, 그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작품. 엘릭시르가 다음에는 또 어떤 책으로 '미스터리 책장'을 채워줄지 설렌다.  


덧) 작품만큼이나 역자 후기도 깨알같이 재미있어서 좋았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RINY 2012-12-04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재미있어 보이는걸요? 고전 중의 고전이라 하시니~

이매지 2012-12-04 10:16   좋아요 0 | URL
저 빈말하는 사람 아닙니다. ㅎㅎㅎㅎ
저 믿고 일단 한 번 읽어보세요. (읭?!)

2012-12-04 09: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04 1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04 2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05 1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재는재로 2012-12-05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에 빠지면 바보가 된다는 말이 진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명?수사관 마크 후반의 피터건즈의 실수도 솔직히 아무리 봐도 저정도면 대충 눈치가 올텐데 여자한테 빠져 그대로 살인을 방조하는 마크의 호구짓은 진짜 필포츠의 다른작품 어둠의 소리도 괜찮죠 근데 필포츠 다른작품 혹시 알고 계신가요..

이매지 2012-12-05 10:26   좋아요 0 | URL
정말 마크의 삽질은 어이가 없을 지경이죠. ㅋㅋㅋ 피터 건즈의 실수도 그의 인간미(?)를 돋보이게 하려는 장치였을지는 모르겠지만 참 그렇죠. 필포츠 다른 작품은 저도 읽어본 것이 없어요. ㅠㅠ 국내에 좀 더 소개돼도 괜찮을 것 같은데 말이죠. :)

노이에자이트 2012-12-06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포츠는 다트무어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많이 썼죠.<바스커빌 가의 개>에도 나오는 지역이라 관심이 있습니다.이매지 님도 가보고 싶죠?

이매지 2012-12-06 13:54   좋아요 0 | URL
다트무어는 물론이고 영국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서 가보고 싶네요 ㅎㅎ
그곳에서 <바스커빌 가의 개>나 필포츠의 소설을 읽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붉은 머리 가문의 비극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이든 필포츠 지음, 이경아 옮김 / 엘릭시르 / 2012년 11월
장바구니담기


"제가 모은 사실들이 변변치 않다고 해도 절대 부정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마크는 격해진 감정을 살짝 드러내며 항변했다.
"그것들은 무쇠처럼 단단합니다. 제 눈과 관찰력은 정확하고 빈틈없이 사실을 보도록 훈련받았습니다. 아무리 종합적 사고로 본다고 해도 일 더하기 이가 삼이 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건스씨."
"그러지 않아. 일 더하기 이는 이십일이 될 수도 있고 십이가 될 수도 있어. 아니면 이분의 일이 될 수도 있고. 왜 무작정 결론부터 내리나? 자네는 사건에 관련된 사실을 찾았어. 하지만 유용한 사실을 전부 찾아낸 것은 아니야. 아니면 전부 찾은 것처럼 보이는 거겠지. 벽도 세우기 전에 지붕부터 올릴 셈인가? 게다가 자네가 말하는 '무쇠처럼 단단한' 사실들은 사실도 뭣도 아니야."
"그럼 대체 뭐란 말입니까?"
"정교하게 조작된 허구라네, 마크."-260~1쪽

헌신적인 우정의 유일한 단점이 뭔지 아나, 마크. 아무리 좋은 우정도 언젠가는 끝난다는 사실일세. 그 늙은 책벌레에게 '잘 있게'라고 인사를 하고 헤어지면 아마도 우리는 다시 못 볼 거야. 하지만 그런 이별이 두려워서 진정한 우정을 거부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나? 우의를 다지고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자신과 비슷한 영혼을 가진 사람을 찾아내는 것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소중한 경험이라네. 사랑은 우정보다 더 멋진 모험일 걸세. 하지만 젊은이, 사랑의 장밋빛 마차 곁에는 뇌성벽력이 도사리고 있다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귀한 선물을 쟁취했다면 기꺼이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지. 그러니 내게는 이런 차분한 우정이면 족하네! -271쪽

"사실 '오직 인간만이 비도덕적이지'."
그는 이렇게 말을 끝맺었다. 이 말에 씁쓸함이 파도처럼 밀려와 마크의 가슴을 적셨다.
마크가 대꾸를 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은 인간의 비도덕성을 맴돌죠. 저는 가끔 제가 싫습니다. 식료품 가겐 포목점을 하거나 군인이나 선원이 되었다면 차라리 더 좋지 않았을까요? 건스 씨, 제 인생을 건 일이 누군가의 사악함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모멸감을 느낍니다. 우리 기술이 활과 화살처럼 진부한 것이 될 날이 오기만 바랄 뿐입니다."-282~3쪽

"괴테가 뭐라고 했던가? 인간이 백만 년을 살아도 성가신 장애물이나, 그 장애물을 정복하도록 몰아붙이는 압박감은 줄어들지 않을 거라고 했지. 그리고 그 누구보다 현명했던 몽테뉴도, 자네 꼭 몽테뉴를 읽어 보게, 이런 말을 했지. 인간의 지혜는 자신이 정한 완벽한 이상에는 절대 도달할 수 없다고 말이야. 설령 그곳에 도달하더라도 다시 그 너머의 또 다른 이상을 넘어서도록 자신을 몰아붙인다는 거야. 다시 말해서 인류가 존재하는 한 이 세상에 나쁜 놈들이 부족할 일은 없을 거야. 그런 놈들을 다 잡아들이도록 사람들을 훈련할 수도 없어. 어떤 형태로든 범죄는 계속될 걸세. 인류가 존재하는 한 말이야. 게다가 범죄자들은 나날이 영리해질 거야. 그러니 우리도 분발해야겠지."-283쪽

뛰어난 탐정이나 형사는 무엇보다 어떤 문제든지 그것에 영향을 미치는 양쪽 입장을 다 고려할 줄 알아야 한다. 수사 과정에서 마주치는 문제의 열에 아홉은 오로지 한 가지 면밖에 없다. 그런데 탐정이든 형사든 이런 능력이 부족한 탓에 엉뚱한 사람을 교수대로 보내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다시 말해 그럴듯한 가설을 따라가 잘못된 전제를 바탕으로 명백하고 뻔한 결론만 좇다 보니 논리적인 전제는 끝장이 나 버리는 것이다. -299쪽

"내일 일을 누가 알겠습니까.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안다면 세상을 지배할 수도 있을 겁니다."
"내일도 오늘과 다름없는 하루라면 좋겠군."
그러자 주제페가 대꾸했다.
"탐정이라면 모름지기 희망을 품어야죠. 때로 탐정에게 가진 것이라곤 희망뿐일 수도 있으니까요."-379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염매처럼 신들리는 것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4
미쓰다 신조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본 민속 미스터리(특정 지역의 민담 혹은 괴담과 풍습이 어우러져 기괴한 사건으로 발현되는 미스터리를 제멋대로 이름붙여봤다) 분야에서 워낙 긴다이치 코스케라는 캐릭터의 존재가 크게 느껴지기 때문일까. 대개 읽고 나면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보다'라는 수식어를 붙여서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긴다이치 시리즈와 닮은 듯하면서도 달라서 긴다이치 코스케와 별개로 하나의 작품으로 판단했던 시리즈가 있었으니 도조 겐야 시리즈다. <잘린 머리처럼 불길한 것> <산마처럼 비웃는 것>에 이어 세번째로 소개되는 <염매처럼 신들리는 것>은 도조 겐야 시리즈의 첫 권임에도 불구하고 호러, 민속, 미스터리 세 마리 토끼를 잡는데 별 무리없이 성공한다. 

  편벽한 산골 마을 가가구시 촌. 흑과 백으로 마을의 주요 가문이 서로 반목하는 이곳에 이야기를 찾아 도조 겐야가 찾아온다. 아무리 넉살 좋은 도조 겐야마저도 움츠러들 정도로 외지인에게 배타적인 분위기의 가가구시 촌. 그의 도착과 함께 가가구시 촌에서 기괴한 살인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삿갓에 도롱이 차림의 허수아비 형상으로 발견되는 죽은 자들. 그들의 입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물건을 물고 있다. 정황상으로는 밀실살인일 수밖에 없는 상황. 이에 사람들은 '염매'가 한 일이 틀림없다고 공포에 떨기 시작한다. 기괴하게 발견되는 사체는 진짜 염매 때문일까? "신령에게 납치됐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불가사의한 상황에서 사라진 아이들, 인습의 의례 중 죽으면 산신령이 될 수 있다고 설득하는 노파, 생령을 봐서 그에 씌었다며 시름시름 앓는 소녀, 염매가 나왔다며 수군거리는 마을 사람들, 죽은 언니가 돌아왔다며 두려워하는 동생, 흉산을 침범했다가 공포 체험을 한 소년, 정체를 알 수 없는 뭔가에 쫓기는 무녀"(8쪽) 등의 인물과 잇달아 발견되는 기괴한 빚어내는 마을을 둘러싼 "기이할 정도로 사위스러운 분위기"가 호러소설인지 본격 미스터리인지 그 정체를 제대로 알 수 없게 독자를 이끈다. 


  <염매처럼 신들리는 것>을 수월하게 읽기 위해서는 우선 두 가지가 선행되어야 한다. 먼저 염매란 무엇인가다. 책의 뒷표지에서는 염매를 "① 가위 누르는 귀신 ② 짚으로 만든 인형(제웅)을 매개로 삼는 주술의 일종으로, 사람을 죽이거나 병에 걸리게 하려고 귀신에게 빌거나 방술을 쓰는 행위"라고 소개한다. 그리고 "③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자 그 어떤 마물보다 가장 꺼림칙한 존재"라고 덧붙이는데 이 책에서는 ③에 가깝겠지만 ②와도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듯하다. 의미는 좀 다르지만 '마귀' 정도로 이해해도 큰 무리는 없지 않을까 싶다. 두번째는 무녀인 사기리의 구분이다. 책을 읽다보면 저절로 알게 되긴 하지만, 처음에는 사기리 옆에 찍힌 점이 무슨 의미인지 이거 오자인가, 하는 생각까지 하면서 고개를 갸웃갸웃했다. 알고보니 한 집안에서 무녀와 혼령받이를 한 대에 한 쌍(이 둘은 늘 쌍둥이 자매다)씩 담당하고 있는데, 이들의 이름이 사기리. 초대 사기리, 2대 사기리, 3대 사기리 이 여섯 쌍을 사기리 옆에 점으로 구분하고 있기 때문에 이름 옆에 달린 점 하나에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중반을 넘어서면 그나마 속력이 붙지만 <염매처럼 신들리는 것>은 빈말으로라도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는 책이라고 할 수 없다. 사기리만 해도 여섯에다가 대립하는 두 가문 사람들까지 따지자면 일단 주조연을 막론하고 등장인물만 수십 명이 되는데다(가계도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가 가가구시 촌의 과거사에 염매 관련한 괴담에 아무튼 가볍게 머리나 식히자고 읽기에는 이건 말이 많아도 너무 많다. 하지만 초중반에 홍수처럼 밀려오는 이런 문자의 습격을 무사히 넘기고 연쇄살인사건이 벌어지면 그 다음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어느샌가 사건의 기묘한 설정에 눈이 가고, 기담(인지 괴담인지)에 홀리듯 빠진다. 도조 겐야, 사기리, 렌자부로. 총 세 사람의 입을 통해 그려지는 이야기는 하나하나 볼 때도 재미있지만 이를 조각처럼 하나씩 모아볼 때 그 매력이 더해진다. 호러소설 뺨치게 오싹하기도 했지만 책을 다 읽었더니 그래도 역시 가장 무서운 건 인간, 이구나 하는 생각에 다시금 소름이 돋았다. "현실과 비현실, 합리와 비합리, 흑과 백. 세상 많은 사람들이 매사가 그런 식으로 명쾌하게 구분된다고 무의식 중에 믿는다"는 도조 겐야의 말처럼, 이 책의 내용은 얼핏 이분법적인 구분 위에 놓인다. 하지만 결국엔 이조차도 인간이 만들어낸 허상이자 공포일 뿐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불가피한 흐름 속에서 전통이라는 것은, 풍습이라는 것은 과연 어떻게 변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과 함께 읽고 나서도 뒷맛이 영 개운치 않았다. 중간에 포기하고 그만둘 뻔도 했지만, 역시 고비를 넘기고 다 읽고 났더니 벌써부터 도조 겐야 다음 시리즈가 궁금해진다. 다음엔 뭐'처럼' 뭐'하는 것'으로 찾아올지. 도조 겐야의 기이한 발자취를 따라잡고 싶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야클 2012-12-03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등장인물 스무 명 넘어 가는 일본 소설에 차츰 이름 외울 부담감에 손이 잘 안간다는.... -_-;

이매지 2012-12-03 15:02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초반에 정말 쓰나미처럼 나와서 순간 정줄을 놓게 되더라구여. 재밌자고 읽는 책인데 이게 뭐꼬 싶어서 집어던질 뻔했던. ㅎㅎ 뭐 암튼 끝이 좋으니 다 좋아, 가 됐지만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