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2/63 - 1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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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영미장르소설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를 하나 고르라면 많은 이들이 스티븐 킹을 꼽지 않을까 싶다. 일일이 세기도 힘들 정도로 숱하게 영화화됐고,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한몸에 받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만큼 소개가 된 작가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정말 많은 작품이 소개됐다. 독서모임 책으로 <11/22/63>이 선정되었을 때 '드디어 스티븐 킹을 만나게 되겠군'이라는 생각이 맨 먼저 스쳤다. 그래도 나름대로 장르소설은 좀 읽는다고 자부(?)하는데 스티븐 킹이 처음이라니 스스로도 좀 의아했지만, 너무 작품이 많다 보니 뭐부터 읽지 망설이다가 시간만 흘렀던 것 같다. 그래도 그렇지 초면부터 벽돌 같은 책 두 권이라니.

 

  표지와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책은 '케네디 암살'과 관련된 책이다. 젊은 나이에 취임한 케네디는 경제불황과 냉전, 핵전쟁으로 뒤숭숭하던 시기에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제시해 오늘까지도 많은 미국인들의 기억에 살아 있는 대통령 중 하나다. 지병이나 노화로 인한 것이 아닌, 1963년 11월 22일에 오스왈드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두며 급작스럽게 임기가 끝나버렸다. 어쩌면 암살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 그리움이 더 클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지금까지도 케네디 암살을 둘러싼 음모론은 꾸준히 제기된다. 그리고 스티븐 킹은 이 사건에 타임슬립을 접목시켜 자기 나름의 견해를 더한다. '그때 오스왈드를 저지했다면 미국, 아니 세계는 지금과 다른 모습으로 흘러가지 않았을까?'라는 물음에 대한 스티븐 킹 나름의 답이 <11/22/63>이다.

 

  1권 520쪽, 2권 744쪽. 1200페이지가 넘는 무지막지한 분량인지라 케네디 암살 사건을 스티븐 킹이 뭔가 집중적으로 파헤치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었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고개가 갸웃해졌다. 애초에 1958년으로 타임슬립한 주인공이 케네디의 암살을 저지하기 위해 1963년까지 그곳에서 주인공이 오스왈드의 행적을 쫓고 그를 저지하기 위해 살아간다는 설정이기 때문에 과거에서 새롭게 만날 사람들과 꾸려갈 삶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그려지겠구나 어느 정도는 예상했지만 어느 순간 케네디는 아웃 오브 안중이 되고 새라와의 사랑이 메인 스토리로 부각된다. '과거는 고집이 세'지만 그보다 더 강한 의지로 이를 바꾸어 보겠는 의지를 보이던 주인공이 새라를 만난 이후로 "이런 일본 속담이 있었어요. '사랑에 빠지면 곰보 자국도 보조개로 보인다.' 나는 어떻게 보이든 당신 얼굴을 사랑할 거예요. 왜냐하면 당신 얼굴이니까"라는 식의 대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타임슬립 로맨스로 변해버린다. 63년이 되어 이제 정신 좀 차려 암살 사건에 집중하나 했더니 스티븐 킹은 되려 "현자들마저 믿을 수 없는 암흑의 시대에도 사랑한다는 선언은 제 몫을 하는 법"이라고 어떤 시대에도 당신에게 필요한 건 사랑뿐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최고의 이야기꾼'이라는 명성답게 무지막지한 분량도 어느새 몰입해 술술 읽어가지만, 이렇게 길게 쓸 수밖에 없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58년부터 63년까지 약 6년 동안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니 어쩔 수 없지 싶다가도 그럼 과거 체류 기간을 몇 년 줄이면 되잖아 싶었다. 나도 어차피 주인공 같은 소시민(?)이라, 주인공처럼 토끼굴에 드나들 수 있게 된다면 오스왈드의 저지는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과거에서 저렴한 식재료나 사들고 돌아왔을 것 같지만 말이다. 기대했던 바와 다른 이야기 전개에, 아무리 암살이 "역사라는 강물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여러 분수령 중에서도 변화를 일으킬 여지가 가장 다분한 사건"이라고 해도 좀 심하다 싶을 정도의 마무리라 용두사미같았지만, "독자의 궁금증을 계속 유발"한다는 점 하나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설에서 주인공의 입을 빌려 소설이건 비소설이건 "단순의 미학"이 중요하다고 "군더더기를 배제하라고, 그것이 가장 확실하고 유일한 방법이라고" 얘기했던 스티븐 킹. 그의 말처럼 군더더기가 없었다면 더 좋았을 책. 여러모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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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는재로 2013-04-03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더기 너머 많은 좀도 분량을 줄였으면 훨씬 더 읽기 좋았을 텐데 하고 생각이 드네요

이매지 2013-04-03 10:44   좋아요 0 | URL
사실 글을 군더더기 없이 쓰는 것은 참 힘든 일인 것 같아요.
(저도 어느샌가 리뷰에 군더더기가 덕지덕지. ㅠㅠ)
 

 

 

 

 

 

 

 

 

 

 

 

 

 

2011년 출간된 이래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 네이버, 다음, 네이트 '오늘의 책'으로 선정되고, 인터넷서점마다 수십 편의 리뷰가 남겨지는 등 각계각층의 사랑을 받았던 『서울의 시간을 그리다』가 새 옷을 입고 돌아왔습니다. 『서울의 시간을 그리다』가 절판된 후에도 이장희 선생님은 동아일보, 불교신문 등 매체 연재와 개인전시회를 통해 대중과 꾸준히 소통해왔지만 책으로는 더이상 만날 수 없었기에 이를 아쉬워하는 독자들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중고로 몇 배가 되는 가격에 거래가 되는 현상도!) 그런 독자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서울의 시간을 그리다』개정판을 준비하면서 가장 고민했던 부분은 기존의 책과 어떻게 차별점을 둘 것인가였습니다.

 

구판과 개정판의 차이를 사진과 함께 설명하는 것이 이해가 편할 듯하여 준비한 자료사진! :)

 

우선 표지가 바뀌었습니다!

일러스트로 서울을 담은 책이라 본문에 수많은 일러스트가 나오는데,

서울을 대표하면서도 부담스럽지 않은 이미지를 여럿 두고 고민하다가 창경궁 일러스트를 심플하게 넣어봤습니다.

 

 

 

 

개정판을 준비하면서 뭔가 보완할 부분이 없을까 하고 인터넷서점에 올라온 리뷰를 쭉 읽어봤는데, 몇몇 분들께서 '글씨가 작다'는 의견을 주셔서 전체적으로 그림과 글씨 크기를 수정했습니다. 같은 판형에서 글씨와 그림만 키우는 건 좀 애매해서 가로, 세로 사이즈를 모두 조금씩 키웠습니다. 나란히 둔 사진에서는 잘 티가 나지 않아 모서리만 슬쩍 한 컷.

 

 

 

 

각 장의 시작 페이지도 조금 손 봤습니다.

 

 

 

 

『서울의 시간을 그리다』 개정판을 준비하면서 가장 놀랐던 부분은 이 책이 출간된 이후 변한 서울의 모습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서울은 골동품이 아니다. 끊임없이 변하는 유기체이기에 오늘도 자동차 내비게이션 회사에서는 지도를 수정하느라 분주하다. 많은 옛 건물이 개발이라는 명목하에 사라져갔다. 둘러보면 한국전쟁 이후의 모습, 나아가 잘 다듬어진 신도시의 모습이 주를 이룬다. 역사도시라기에는 초라할 정도다. 그래서 더욱 사라진 것들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 이제는 새로 지어진 고층건물 때문에 보이지 않는, 가려진 옛이야기와 만나고 싶었다. 그렇게 과거와 현재 서울의 시간을 그려보고 싶었다. 내 스케치 속 서울도 시간의 흐름을 따라 계속해서 변해갈 것이란 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의 서울 스케치 여행 또한 내가 살아 있는 한 언제나 진행형이다. _본문에서(21쪽)

 

선생님께서는 네비게이션 회사에서 지도를 수정하느라 분주하다 하셨지만, 편집부 역시 수정하느라 분주했습니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이 장소가 여전히 남아 있느냐'를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됐습니다. 워낙에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이 많은 서울이지만,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은 '지금, 서울'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아래 사진을 잠깐 예로 들자면, 구판(위)에는 없는 중국대사관에 대한 설명과 현재 공사중인 중국대사관 신축건물에 대한 내용 등을 덧붙였습니다. 이 외에도 집필 당시에는 있었던 대오서점, 와우트래블 갤러리 등은 이제 사라졌지만, 책에는 그 흔적을 담아두었습니다.    

 

 

 

 

개정판은 그냥 출판사만 바꾸고 표지만 바꾼 거 아니냐, 하실 분들을 위해 구판에는 없었던 서울의 이야기를 두 챕터 더 담았습니다. 바로, '환구단'과 '서울성곽'. 두어 챕터를 더 추가하는 과정에서 경희궁, 남산 등 다양한 장소가 물망에 올랐었는데, 최근 들어 조금씩 복원돼 옛모습을 찾아가는 서울성곽은 제 개인적인 궁금증 때문에 적극 추천(?)해 결국 환구단과 서울성곽으로 최종 낙점했습니다. 환구단은 서울시청 근처에 있어 서울시청사 이야기도 곁들였습니다.

 

 

 

 

이장희 선생님은 이 책에서 서울 여행이 어렵지 않다고, 일상에서 발길 한 번, 마음 하나 돌리면 바로 여행이 시작된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처럼 무심결에 지나친 곳에 마음을 담아 발을 들여놓는 것만으로도 서울 여행은 시작됩니다. 거창하게 짐을 싸고 일정을 계획하지 않아도 좋고, 이장희 선생님처럼 서울을 스케치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저 그 장소에 머물며 지나가는 사람들, 새가 날아가는 하늘을 보며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 서울 여행은 충분합니다. 『서울의 시간을 그리다』와 함께 이 책에서 소개한 경복궁, 명동, 숭례문, 인사동, 정동, 청계천 등 서울 곳곳을 누빈다면 분명 서울은 그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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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13-03-29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판 사놓고 읽지도 못했는데 개정판이 나왔어요. 어쩔...;;;;

이매지 2013-03-29 13:30   좋아요 0 | URL
뭐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ㅠㅠ
봄에 정동길 산책하는 이벤트 진행할 것 같아요. ㅎㅎ
마노아님도 오셔용ㅎㅎㅎㅎ
 
끝까지 연기하라
로버트 고다드 지음, 김송현정 옮김 / 검은숲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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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스티븐 킹을 놀라게 한 작가'라는 띠지 문안에도 혹했지만, 무엇보다 지금까지 스무 권 이상의 장편을 발표했음에도 국내에는 처음 소개되는 작가라는 점이 끌렸다. 한 남자가 인형을 조종하는 표지 그림을 보면 이 책이 무대와 관계 있음을, 제목의 연기가 '연기(演技)'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지만, 이 책을 읽을 당시의 마음은 '연기(延期)'에 가까웠다. 페이지는 눈여겨보지 않고 그냥 머리 식힐 겸 읽으려고 주문했는데 500페이지가 넘어 어쩐지 여유 있을 때로 미루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시작하니 '일생 일대의 상황'을 맞닥뜨린 주인공의 모습을 하루하루 지켜보면서 점점 이 남자의 이야기에 매료되어 그의 연기를 끝까지 정신없이 지켜보게 되었다.

 

  주인공 토비 플러드. "로저 무어의 뒤를 이어 새로운 제임스 본드가 될 뻔"했지만, 그의 연기 인생은 "몇 년 전에 뚜렷한 이유도 없이 본궤도에서 이탈해 옆길로 들어"선 상황이다. 순회공연 중인 연극도 반응이 그저 그래서 연기 인생이 끝나갈 참이고, 별거중인 아내와의 결혼생활도 끝이 보인다. 그러던 중 토비는 아내에게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토비의 극성팬을 쫓아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어떻게든 아내와 다시 시작해보고팠던 토비는 이 일을 계기로 재기를 노리고, 팬으로 보이는 남자는 토비와 이야기를 나눈 뒤 앞으로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그의 바람처럼 진행되는 것 같았던 일은 팬으로 보이는 남자가 다시 아내의 곁을 맴돌고 이에 항의하는 토비에게 그의 연극무대가 시작되는 8시에 단둘이 만나자는 메시지를 전한다. 이후 토비는 생각지도 못한 사건의 소용돌이에 휘몰리게 된다. 그의 무기는 '끝까지 연기하는 것'뿐. 잇단 의문과 죽음을 토비는 어떻게 헤쳐갈 수 있을지.

 

  "인간이 상상도 못할 기묘한 방식으로 운명의 날실과 씨실을 얽"은 상황에 떨어져 일주일 동안 편안히 잠 잘 새도 없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토비의 모습에 페이지가 술술 넘어갔지만, 한편으로는 대체 어떻게 마무리하려고 일을 이렇게 벌이는 건가 걱정도 됐다. 토비라는 캐릭터가 연극배우이면서 탐정의 자질이 있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닥친 일을 자기 딴으로 수습하기도 바쁜 판인데 어쩌자고 대기업의 비밀까지 파고들어가는 건가 했는데, 결국 막판에 제삼자가 사건을 마무리짓는 모습을 보며 이게 어떤 의미로는 반전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사실 온갖 육체적, 정신적 고난을 겪으면서도 토비는 대기업의 음모를 위해 버티는 것이 아니라 별거중인 아내 제니의 관심(또는 사랑)이라는 개인적인 목표를 좇을 뿐이다. 그가 맞선 것은 운명이나 유령 같은 보이지 않는 힘이 아니라, 자신의 과오를 바로잡을 단 한 번의 기회는 아니었을까. "과거를 바꿀 수는 없다. 어쩌면 미래 역시 바꿀 수 없을지도 모른다"라고 이야기 초반에 얘기했지만 결국 그는 자신의 미래를 다른 누구의 강요가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손에 넣는다.

 

  기대했던 형태의 반전은 없어서 아쉬웠지만 지문 사이, 대화 사이에 살짝 녹아 있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시각은 좋았다. 예를 들어, 토비는 "연기자는 무대 위에서도 무대 밖에서도 가식의 탈을 뒤집어쓴다. 하지만, 내 경우엔 상황이 변했다. 완전히"라고 이야기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이 책을 읽는 독자 또한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무대가 아닌 현실에 발을 디딘 채 연기를 하고 있지 않을까. 토비는 자신이 "처한 곤경을 이치에 맞게 다른 이들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라고 토로했지만, 어차피 타인을 이해시키는 것은 적당한 선에서 타협점을 찾는 것일뿐이 아닐까. 어이없을 정도로 뒤통수 때리는 반전이 아니라 맥이 좀 풀릴 수 있지만, 슈퍼히어로가 아닌 평범남이 등장하는 속도감 있는 스릴러 정도로 읽는다면 분량에 관계 없이 가볍게 읽을 수 있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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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63 - 2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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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함이……."
"도라고 합니다. 존 도."
-16쪽

갈림길에 다다른 남자와 여자가 어느 쪽도 택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시간만 보내는 경우도 있다. 잘못 선택했다가는 끝장임을 알기에…… 살려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음을 알기에. 1962년의 그 잔인하고 우울했던 겨울에 새디와 내가 그랬다. -97쪽

디크 시먼스는 슬픈 영화를 볼 때마다 손수건을 한 장 더 챙기는 사람답게 우리의 재결합에 진심으로 기뻐했다. 엘리 도커티는 그렇지가 않았다. 내가 그때 알아차린 한 가지 희한한 사실이 있다. 비밀을 잘 지키는 쪽은 여자들이지만, 비밀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쪽은 남자들이라는 것. -262쪽

"이런 일본 속담이 있었어요. '사랑에 빠지면 곰보 자국도 보조개로 보인다.' 나는 어떻게 보이든 당신 얼굴을 사랑할 거예요. 왜냐하면 당신 얼굴이니까."-347~8쪽

모든 게 퍼뜩 선명해지는 순간이 찾아오면 세상에는 별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사실이겠지만, 이 세상은 외침과 메아리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기계장치에 불과하다. 톱니와 바퀴로 이루어진 척하지만,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신비로운 유리 덮개 밑에서 시간을 알리는 꿈의 시계인 척하지만 그게 아니다. 그 뒤에는 뭐가 있을까? 그 밑에는, 그 주변에는 뭐가 있을까? 혼돈, 폭풍, 망치를 휘두르는 남자들, 칼을 휘두르는 남자들, 총을 쏘는 남자들. 군림할 수 없는 게 있으면 왜곡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게 있으면 비하하는 여자들. 조명 하나 외로이 비추는 무대에서 어둠을 무릅쓰고 춤을 추는 인간들, 그 주변을 에워싼 공포와 상실의 세계. -399~400쪽

현자들마저 믿을 수 없는 암흑의 시대에도 사랑한다는 선언은 제 몫을 하는 법이다. -402쪽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그런데 내가 또 이것만큼은 분명히 알고 있다. 과거가 고집이 센 이유는 거북 등껍질이 단단한 이유와 같다는 것. 그 안의 속살이 여리고 방어 능력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
그리고 또 한 가지 있다. 우리는 일상의 수많은 기회와 가능성이라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는 것. 이것들이 기타 줄과 같다는 것. 우리는 이 줄들을 퉁기며 즐겁게 연주한다. 화음을 만들어 낸다. 그러다 줄을 추가한다. 10개, 100개, 1000개, 100만 개. 줄의 숫자는 곱절로 늘어나니까! 해리는 쩍 하고 갈라지는 소리의 정체를 알지 못했지만, 나는 안다. 그건 줄이 너무 늘어나서 화음이 너무 많이 만들어졌을 때 나는 소리다.
높은 도 음을 진성으로 우렁차게 내면 고급 크리스털이 깨질 수 있다. 음이 제대로 맞아떨어지는 화음을 스테레오로 크게 틀면 유리창이 깨질 수 있다. 그러니까 시간이라는 악기의 줄이 너무 많아지면 현실이 깨질 수 있다(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렇다). -7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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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63 - 1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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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동전처럼 뒤집히려는 기로에 서 있을 때 지금이 그런 순간인지, 왜 그렇게 되었는지 인간이 무슨 수로 알 수가 있을까. -14쪽

많은 사람들이 이 시대에 향수를 느끼는 이유는 악취가 얼마나 지독했는지 잊어버렸거나, 50년대 황금기를 운운할 때 그런 측면은 아예 감안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61쪽

역사라는 강물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여러 분수령 중에서도 변화를 일으킬 여지가 가장 다분한 사건이 암살이야. 성공한 경우도 그렇고, 실패한 경우도 그렇고.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가브릴로 프린치프라는 별 볼일 없는 정신병자의 손에 암살당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됐지. 반대로 1944년에는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가 히틀러를 암살하려다 실패하는 바람에 (성공할 뻔했지만 실패로 끝났지.) 계속된 전쟁으로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그 영화라면 나도 본 적이 있었다.
앨이 말을 이었다.
"페르디난트 대공이나 아돌프 히틀러는 어쩔 방법이 없어. 우리 능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니까."
나는 우리라는 대명사를 내세워 가설을 세울 필요는 없지 않으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아주 섬뜩한 소설을 읽는 듯한 심정이었다. 예컨대 토머스 하디의 작품이랄까? 어떤 식으로 결말이 맺어질지 알고는 있지만, 그로 인해 흥이 깨지기는커녕 더욱 고조되는 긴장감. 모퉁이에서 탈선하길 바라며 전차의 속력을 더욱 높이는 아이를 보는 것과 비슷한 이 기분. -92~3쪽

나도 서스펜스 소설의 기본을 아는데(한평생 스릴러를 수도 없이 읽었으니 그럴 수밖에) 독자의 궁금증을 계속 유발해야 한다는 것이 제1원칙이다. -94쪽

아, 스텝 좀 꼬이면 어때. 이렇게 아름다운걸. 나는 7번 도로를 달려 켄두스케그 서안에 떡하니 자리 잡은 데리를 접한 이래 처음으로 행복해졌다. 나는 그 기분을 간직하고 싶어서 발걸음을 옮기며 오랜 가르침을 가슴에 새겼다. 돌아보지 마, 절대 돌아보지 마. 유난히 좋았던 일(혹은 유난히 나빴던 일)을 겪은 뒤에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수없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이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인간은 돌아보게 되어 있다. 목에 회전이 되는 관절이 달린 이유가 그 때문이다. -223쪽

나는 교단에서 늘 단순의 미학을 강조했다. 소설이건 비소설이건 딱 한 가지 질문, 딱 한 가지 대답으로 이루어지는 법이라고. 독자가 어떤 일들이 있었느냐고 물으면 작가가 이런 일이 잇었다고 대답하는 식인 거라고. 그리고…… 이런 일…… 이런 일도 있었다고 대답하는 식인 거라고. 군더더기를 배제하라고. 그것이 가장 확실하고 유일한 방법이라고.
나도 노력하겠지만, 데리에서 겉으로 보이는 현실은 시커멓고 깊은 호수를 덮은 얇은 얼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래도 노력을 하자면.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이런 일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일도. 또 이런 일도. -230쪽

"과거는 고집이 세요, 앨. 과거는 바뀌길 원치 않아요."
"나도 알아. 내가 자네한테 한 말이잖아."
"맞아요.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과거가 변화에 저항하는 강도는 어떤 행위에 따라 미래가 얼마나 달라지는가에 정비례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346쪽

어느 방 안에 들어갔는데, 카드로 복잡하게 만든 여러 층짜리 집이 테이블 위에 있다고 상상해 보자. 그걸 쓰러뜨리는 게 당신에게 주어진 과제다. 그뿐이라면 쉬울 것이다. 발을 세게 구르든지 생일 촛불을 한꺼번에 끄려고 만반의 준비를 할 때처럼 힘껏 입김을 불면 될 테니까.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다. 문제는 그 카드 집을 특정한 시점에 쓰러뜨려야 한다는 거다. 그 전까지는 잘 보존하고 있어야 한다는 거다. -379쪽

나는 이런 일에 무작정 끌어들인 앨이 원망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좀 더 맑은 정신으로 생각해 보면 시간이 더 주어졌던들 뭐가 달라졌을까 싶었다. 오히려 상황만 더 안 좋아졌을 가능성이 지대하고, 어쩌면 앨은 그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자살을 하지 않았더라도 내게 주어진 시간이 기껏해야 1, 2주에 불과했을 텐데, 댈러스의 그날과 연쇄적으로 연결된 사건들을 다룬 책이 몇 권이나 될까? 100권? 300권? 어쩌면 1000권에 육박할지 모른다. 어떤 이는 앨처럼 오스왈드의 단독 범행이라고 했고, 또 어떤 이는 배후에 정교한 음모가 있었다고 주장했고, 또 어떤 이는 그가 총을 쏜 게 아니라 체포된 이후에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덤터기를 쓴 거라고 못을 박았다. 앨은 자살이라는 방식을 통해 학자의 가장 큰 약점을 제거했다. 자료 조사라는 미명 아래 미적대지 않았던 것이다. -4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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